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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등산화의 끈을 매며 / 윤주홍

부흐고비 2021. 4. 19. 13:01

계절 앞에서는 추위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엊그제만 하더라도 뿌려 놓은 듯 희끗희끗하던 눈이, 산에 눅눅한 기운으로 감돌고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요란스런 것을 보니 새 계절이 오고 있다는 산의 눈짓인 것을-.

깊은 계곡이 있는 이 산은 잠재하고 있는 계절들을 추스르는 몸짓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조화하면서 자연이 의도한 그대로 자기 연출을 산길에 펼친다.

개울소리에서 꽃피는 봄소식을 감지하듯 화사한 꽃잎에서 벌써 여름의 무성한 녹음과 그 부는 바람에서 선뜻 가을의 낙엽을 느낄 수 있고 차가운 기운이 계곡을 갈색으로 바꾸어 놓을 때 벌써 겨울은 눈 소리를 앞세워 이미 다가오고 있다.

어느 한 밤, 눈이 쌓이고 햇살이 활짝 펴진 겨울의 한낮 산길에는 나무마다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부시게 빛났고 가루구슬을 뿌리듯 가는 바람에도 보라가 일어나는 그 기막힌 설경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산의 선물은 아니다. 때로는 눈의 깊이가 발목도 더 묻히고 산은 돌아앉은 여인처럼 흰 자락을 사리듯 추켜 가파른 눈사태로 령(嶺)을 이루고 힘겹게 열기가 달아오른 땀으로 지쳐버린 채 넘어 눈 위에 털퍽 누워버리면 그 흠쾌함이란 나만이 아는 산과의 교감된 정그러운 음성이 계절의 소리로 들려온다.

춘하추동 언제나 계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매력 때문에 이 계곡이 있는 이 산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산은 언제나 외롭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모르는 계곡이 있는 산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신비로운 외로움을 갖고 있다.

어제도 오르고 또 내일을 걸어도 산길은 언제나 새롭다. 그래서 계절에 관계없이 낯이 설다. 산 속에 내가 묻히면 온통 외로움으로 감싸이고 산의 풍습인 듯 고독이 익숙해질 즈음 겨우 내 모습에서 어지간히 묻어 있는 산 때를 알게 되고 내 마음속에서 산이 그득하게 혹 바위로, 나무들로, 숲으로 진달래꽃 덤불 옆에 서 있는 나를 산이 소유하고 있음을 안다.

산은 품고 있던 한을 능선으로 뻗었다가 불쑥 솟구쳐 뫼봉으로 분출되고 하늘과 접한 높음에서 속스럽지 않는 정기와 기품으로 서리는가 하면 창조의 신묘한 기미가 깃들인 화창한 계절로 변화하는 이치를 속인이 알 수야 있겠는가만-.

그 정상에 우뚝 서 보면 호연한 시야와 하늘을 바람에 섞어 마시는 가슴은 신선함이 충만하다. 승리와 성취감에 희열이 일어나고 사람과 용서와 포용의 실상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사양할 수 없는 산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한나절 폭염을 등에 짊어진 채 말라버린 계곡을 따라 산을 올랐다. 가히 살인적이다. 쉬어갈 곳을 두리번거리고 찾았다. 갈잎나무와 쪽나무가 있는 숲을 헤치어 놓듯 기대었을 때 나무는 짙은 그늘로 햇빛을 가려주고 늘어진 가지에 무성한 잎 사이에서 생기는 미풍은 졸음을 몰고 눈썹을 엄습할 때 스르르 찾아온 꿈은 생시인 듯.

바다!

수평선 저 너머로 두어 척 배가 점같이 떠 있고 만 리도 넘는 백사장에 홀로 서 있는 내 발을 적시고 밀려가는 파도는 쏴- 철썩거린다. 바람은 염기를 머금은 채 가슴팍을 헤치며 불어들고 오싹 한기를 느낄 즈음 갈매기 한 마리 머리 위에 날며 "끼으륵"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산새 한 마리 쪽나무 숲에서 울며 날아갔다. 산은 사계절만이 아니라 바다까지도 태포하고 있는 것일까. 대낮의 산행인에게 산 중턱 그늘 아래 펼쳐놓는 산이 주는 바다의 조화는 그 동안 길게 사귀어온 돈후한 벗에게 계절이 부리는 영험한 기적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어느 해 가을은 숲이 온통 화가의 앞치마 같이 색색으로 물들어 있고 산수화 그 화폭 속에 흐르는 계곡 돌작길을 거닐 즈음 푸른 하늘 한 조각이 물에 잠겨 내려 있는가 했더니 그 위로 단풍잎 대엿 장이 맑은 가을물 위에 떠 있다. 너무 투명하여서 그런지 가슴이 텅 빈 것 같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는 것 같다. 허전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필연이 만나야 할 누구인가 기다리지 않고 앞을 달려가는가. 안절부절이다.

발에 밟히는 나뭇잎 하나 불피풍우한, 계절과 생을 마무리하면서 가지와 별리하여 다른 계절을 좇아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문득 시골 정류장 해질 무렵.

"야! 이놈아 빨리 가자. 막차를 놓치면 오늘 집에 못 간다. 빨리-."

하시고는 흰 수염을 나부끼며 손자의 손을 잡고 기다려 주지 않고 떠나버린 막차의 뒤를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름은 또 무슨 인생사를 이야기하려는 계절의 철학이랴.

바위에 앉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혔던 모습이 하도 허허하게 보였던가. 동행한 등산객이 손을 내밀며 발길을 재촉하던 그 가을. 이제 낙조의 그늘이 산에 깊어지고 우리의 발길은 서두는데 나목(裸木)의 긴 그림자 사잇길을 걷는다. 한 계절을 세월에 붙어 살아온 삶의 허물을 훨훨 벗어버리고 오직 진실만이 나목으로 모습져 있는 나무들이다. 저렇듯 한 생애의 마지막 날에 누구나 한올의 실도 용납되지 않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보여야 할 내가 살고있는 계절의 끝이다.

협착한 길을 허둥지둥 내려오며 비탈길에 벗은 나무를 기대어 체중을 조절한다. 이 겸허한 나목. 그러면서 어엿한 모습으로 당당히 기다리는 계절 앞에 자신을 드러내 놓은 부끄럼 없는 만만한 자세에 나의 새 계절을 맞을 그 날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친절한 벗 계곡이 있는 산.

이제 따뜻한 새봄이 왔다. 계절을 맞으러 가자. 여인의 맞주름처럼 곱게 자락진 산에 골짜기마다 피어있을 꽃들을 맞으러 나는 산을 가야 한다. 산이 표출한 계절의 성격 속에 올해의 진달래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감상하러 가자. 혹 작년에 다발로 피어있던 그 자리엔 어느 패션으로 계절을 연출하고 있을까. 외롭게 큰 바위틈에, 한가지 끝 길게 야들이 피어있던 한 송이 진달래는 다시 피었는가.

보러 가자. 그리고 이들의 발랄한 꽃소리들에서 들려오는 계절의 미세한 소리를 들으러 가야 하는 산행을 위하여 등산화의 끈을 매고 있다.

관악산에 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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