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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북해도 도야 호수 / 정목일

부흐고비 2021. 4. 20. 08:22

가을 초입에 일본 북해도 도야호수를 만나러 갔다.

도야호수는 화산 폭발로 패인 지형에 물이 고여 생긴 호수이다. 일본에선 세 번째로 큰 호수로 둘레가 50km, 가장 깊은 곳은 180m인 큰 담수호다.

일본 북해도의 가을 절정에 도야호수와 첫 대면을 한다. 도야호수는 수천 년의 깊이와 사유로 명상에 빠져있다. 무르익은 단풍에도 잔잔한 표정만 보일 뿐, 깊은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옥빛 하늘에 구름이 한 줄씩 즉흥시를 썼다 지우곤 한다. 누군가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영원의 모습도 보리라. 하늘과 호수는 맑은 청명의 얼굴이지만, 구름이 있어 생동감을 보여준다. 도야호수 천 년 명상의 깊이가 짜르르 스며들고 있다. 산, 들판, 호수, 강을 보면 손 모아 경배하고픈 마음이 생긴다. 1백 년 미만을 살다 가는 인생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신비와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만든다.

유람선을 타고 도야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주변 경치를 완상하면서 호수의 얼굴과 마음을 대면한다. 호수가 수천 년 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을 보고 싶다. 호수와의 순간적인 만남과 산책이지만 몇 천 년 침묵의 말을 듣고 싶다.

호수와 마음 대화를 나누는 산책길은 유람선이 선착장을 출발하여 한 바퀴 도는 코스이다. 하늘에 흰 구름덩이가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며 흘러가고, 호수 속에 작은 섬들과 바깥으로 낮은 산들이 늘어서 있다. 호수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 숲, 나무, 바위 등이 자연 그대로의 순결과 청순함을 지니고 있다. 숲과 바람, 구름과도 눈인사를 하고 마음 대화를 나눈다. 번쩍이거나 황홀함으로 현혹하지도 않고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으로 교감에 이르게 한다.

하늘과 호수는 마음을 비춰 드러내고, 유람선은 유유히 물길을 헤쳐가고 있다. 바쁨도 느림도 없이 홀가분하게 호수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언제 천 년의 호수와 마음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마음을 비춰볼 수 있음이 좋다. 더구나 상쾌한 바람을 만나 더 고마웠다. 연인의 체온 같은 따스한 햇살의 감촉에 온몸이 포근해진다. 따스함, 다정함, 부드러움은 오늘의 호수가 지닌 자비와 은혜의 손길일 듯싶다. 호숫가 도로변에 서 있는 나무들…. 아름드리 백 년 이상의 수령樹齡을 지닌 늠름한 나무들이 누릇누릇 단풍을 맞고 있다. 겨우살이를 예비하는 표정들이다. 폭설과 찬바람을 맞을 채비를 하면서 깊어가는 가을 한순간, 도야 호수에서 내 마음을 비춰 보이고 있다. 호수는 깊이와 넓이만큼 심연에 추억과 체험들을 품고 있음직하다. 갈매기들이 유람선을 뒤따르고 있다. 배가 지나며 내는 잔잔한 물결, 점점 다가오는 호숫가의 산들, 산 위의 구름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산, 호수는 그 자리에서 변함이 없으나, 하늘의 구름만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이다. ‘인생은 뜬구름 같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은 관찰과 비유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유람선은 천천히 호수 속으로 다가가고 있다. 시월의 햇살이 연인의 살갗처럼 따스하고 눈부시다. ‘광명’이란 이런 것인가. 섬 안에 돌로 덮인 조그만 산 한 채가 고즈넉하다. 삼각형 녹색의 산이다. 고독해 보이지만 호수 안에 안거해 있다. 띄엄띄엄 섬들이 가까이 있어서 평온스러운 표정들이다. 호수 주변으로 빙 둘러 산들이 늘어서 있다. 능선들은 부드럽고 은은히 가야금 음률처럼 잔잔하게 하늘로 번져가는 듯하고, 호숫가 높지 않게 자그마한 산 능선들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호수의 운치를 북돋우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맑은 고독과 침묵을 품어 왔으면 호수의 깊이만큼 초연한 것인가. 호숫가에 마을도 있어서, 잠시 정박하는 시간을 가진다.

호숫가의 나무들과 인사를 나눈다. 가을 초입인데도 나무들이 아직 짙은 녹색이다. 수형樹形이 둥그스름한 모양새를 보이는 나무들은 상록수종일 듯싶다. 호수의 천년 고요에 달빛의 수억 년 적막을 보태면 어떤 표정일까 알고 싶다.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면, 영원 속의 한순간과 만나 어떻게 화음을 이룰지 알 수 없다. 북해도 도야호수에 와서 만남과 이별을 생각한다. 산, 호수 등 자연은 무한의 모습이지만, 일회성 삶을 지닌 인간에게 이 한 번의 체험은 다시 올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가을 초입의 호수의 숨결, 내 인생도 어느새 가을 무렵에 당도해 있음을 느낀다.

유람선은 천천히 물 주름을 일으키면서 떠간다. 평온하고 깊은 가을 정취가 짜르르 가슴에 닿는 것은 호수에서 처음 느끼는 감회가 아닐까 싶다. 하늘과 산, 주변의 경치뿐만 아니라, 호수의 천 년 그리움이 전해오는 듯하다. 혹독한 겨울이 다가옴을 아쉬워하는 표정도 뒤섞여 있다.

나도 가을을 맞아 인생의 무엇을 거두고 버려야 할지를 생각한다. 떨쳐버릴 것은 다 지워버리고, 맨몸으로 어떻게 겨울바람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유람선은 호수 중앙에 있는 중도, 대도를 돌아 시발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가을엔 자연과 모든 생명체가 모두 삶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려는 모습들이다. 북해도 도야호수에 와서 내 삶의 깊이와 표정을 비춰본다. 겨울에는 눈발이 휘날릴 것이다. 얼음으로 은빛의 세상이 되리라. 도야호수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명상과 내공이 깊어서일까. 천 년 명상으로 마음을 닦은 도야호수와 만나, 내 마음에도 얼지 않은 호수 하나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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