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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외가(外家) / 윤주홍

부흐고비 2021. 4. 19. 15:08

외가는 어머니의 옛 둥우리이며 어머니의 고향이다. 이 둥지를 떠나 와서 새로운 둥지를 이루어 우리들 가슴마다에 영원한 고향과 사랑을 챙겨 주신 어머니가 나시고 자라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외가를 좋아한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심성과 어머니의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겸양은 만 가지 덕을 세우는 근본이요, 만 가지 생활의 첫걸음은 염치이며, 근신은 백 가지 예의의 심성이라고 들려주시는 외조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기도 한 외가이다.

그런 외가의 마지막 계시던 외숙모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을 받아 들고 있다. 여읜지 오래인 어머니가 불현듯 뵙고 싶으면 아직도 팔순이 넘어 계시는 외숙모를 그리며 스스로 안위 받던 마지막 남아 있는 모성애의 정자락을 아쉬워 버린 것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절후 때는 핑계하지 못한 외숙모의 안후 때문이라도 찾아 뵙던 외가이었는데.

사람이 살다가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자연 이치, 우리가 태어났더니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세상을 얻어진 것과 같은 섭리인 것을, 근 60년간이나 인연을 맺으며 살아오던 정줄이 가벼운 부고 한 장으로 툭 끊어진다는 것은 아무리 세상 인사가 그렇다하더라도 너무 서글픈 일이다.


벌써 오래된 일이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막 살구가 익어 가던 하지 무렵 어느 날, 올여름 방학에도 외가에 보내 달라고 어머니를 졸라대던 생각이 안개가 피어나듯 몰려온다. 백 리 길이 넘는 외가에는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고, 벌써 기별된 외가 식구들의 손을 잡고 외가로 떠나던 신난 기억 말이다.


몇 고개를 넘을 때마다 성황당에 돌을 던지며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피하여 쉬었다가 또 걸으면 온몸에 땀이 흠뻑 젖는다. 어쩌다 울창한 소나무 숲 오솔길에 들어서면 어디서 터져서 새어 나오는 듯 불어오는 솔밭 바람은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고 그 청량함이란 이루 비길 데 전혀 없이 향기롭고 신선하였다. 쉬엄쉬엄 걷는 길이라서 여름 긴 해가 뉘엿이 햇살을 던지며 서쪽 산 그늘을 길게 들어내리면 발목이 시큰하여 힘이 지쳐 온다. 그제서야 외가가 있는 마을 어귀에 다다른다.

벌써 한나절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던 외사촌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나를 에워싼다. 저희들끼리 짜 놓은 놀이 계획을 이것저것 성급히 설명하며 마음에 드느냐 재잘거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여독은 풀리고,

"너희들 붕어잡이는 꼭 가야여."

"물이 너무 많은 것 같던데――."

"걱정마 벌써 물고를 돌려서 막아 놓았어.

" 외사촌 형의 배려가 이렇게 각별하다. 그래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외가에 오기를 참 잘했구나 싶었다.

"그만들 성가시게 해라. 오늘은 좀 편히 쉬어야지."

자애롭고 자상한 외숙모의 목소리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칙사 대접이다. 닭국을 끓인다. 갈치 자반이며 외숙모의 정성스러운 음식 솜씨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다. 꼭 어머니의 솜씨 그 맛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외가는 바다가 보이는 바깥마당이 있었다.

감나무, 호도나무, 대추나무가 있었고 이쪽 칙간 옆 이만치에 살구나무가 크게 서 있었다. 매화나무는 마당 끝에 복숭아나무 두어 그루와 함께 심어져 있었으며 밭머리에 곧게 솟아있는 낙엽송 한 그루가 보기 좋게 뻗어 있었다. 잎이 넓고 무성한 비자나무, 오동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이름 모를 각종나무들이 어지럽게 심어져 있었지만 서로가 조화되어 아름답고 조용하기가 오히려 개울가 미루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마저 시끄러울 만큼 한적하다.

여름 한나절의 한 폭 시골 풍경화 같기만 하던 외가, 울타리 옆에 앵두나무와 무화과나무 몇 그루가 엉키어 있었다. 이 외가를 올해도 또 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방학이 아직도 두어 달 남았는데 어머니를 졸라대는 것이다.

약속은 귀한 것이다. 더욱이 양보한 형의 차례를 다시 빼앗겠다는 사심스러운 심사가 자가당착에 사로잡힌 나에게 자못 깨닫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3학년짜리 인격이다. 작년에 받았던 극진한 대접에만 집착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 다섯 살 때인가 어머니와 함께 슬쩍 다녀오고 작년에 이어 이젠 의젓한 3학년짜리 꾸러기가 되어서 집에서는 형님들 때문에 무슨 일이든 뒤로 밀리는 서열에 비하면 여간 으쓱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철이 일러서 영글지 않은 고구마 몇 뿌리를 캐어다가 삶아서 큰 것에 하나를 더 주시던 외숙모의 눈치를 살피던 외사촌들의 민망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물고기를 잡던 날도 그러하다. 웅덩이 물고를 두루 막고 바가지로 물을 퍼내다 땀흘려 한참 만에 바닥이 드러날 무렵이면 등지느러미를 물 밖으로 내보이는 붕어들을 손으로 잡아 올린다. 그때도 큰놈을 잡는 기회와 공을 나에게 주던 그들, 큰 소리질러 즐거움을 더했고 어른들 앞에서 자랑과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을 때 우쭐하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 재방문의 관록을 과시하려는 영예욕 때문일까?

외가에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흡수한 따뜻한 둥지의 화기와 사랑과 그리움의 원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인격을 세워 가는 슬기와 교훈이 남아 있는 곳, 희로애락을 거듭하는 삶 속에 정서를 삼던 어머니의 가슴만큼이나 깊고 넓은 도량과 포용, 용서가 수용되어 있는 둥우리요, 색이다. 그런 외가의 표현으로 남아 계시던 외숙모가 안 계신 지금 어이하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에는.

한평생을 사랑으로 살면서 우리 가슴 깊이에서 맥같이 흐르는 흔적을 남긴 어머니와 외숙모의 그 뜻을 이제서야 겨우 알 듯한데 그들은 안 계시고 단풍이 물들기에는 아직은 몇 날을 기다려야 하는 계절 앞에 서서 외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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