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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무르 / 맹난자

부흐고비 2021. 4. 27. 08:53

‘고령화시대,치매 아내 죽인 70대에 이례적 실형’이란 굵다란 신문기사목이 눈길을 끌었다. 아내를 죽인 70대라?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당겼다.

법정에는 녹색수의를 입은 백발노인이 피고석에 앉았고 그는 자택에서 치매에 걸린 아내(73)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이모(78)씨였다. 이가 빠진 볼이 홀쭉했다. 명문 사립대를 나와 건설회사 둥에서 근무했으며 49년 전 결혼하여 두 아들과 손자를 여럿 둔 할아버지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아들들은 살해 현장사진이 나오자 고개를 숙이거나 울먹였다고 한다. 이씨는 “아내가 의부증과 폭언,폭력 등 치매증세가 심해 목 졸라 죽였다”고 범행사실을 모두 시인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날 이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1년 간 치매에 걸린 피해자를 헌신적으로 병간호했고 가족이 선처를 원하고 있다”면서도 "점점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에 치매로 가족내 문제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유사범죄의 유발을 방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이 끝날 무렵,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가족 중에 일거수일투족을 돌봐줘야 할 중증환자가 있는데 가족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사는 게 무슨 의미 있느냐?’며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피고석의 이씨는 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씨는 아내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1년 전 투신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으며 사건 당일에도 아내는 홀어머니 밑에서 "배운 것 없이 자랐다,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다”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이씨는 재판정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아내가 나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하는 아들과 손자들이 집에 늦게 들어온단 얘기를 듣고 함께 죽을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서늘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아무르〉가 겹쳐왔다. 치매에 걸린 아내의 얼굴을 쿠션으로 누른 뒤 자살을 택한 노부부의 인생을 다룬 영화다.

음악회에 다녀온 뒤 아내의 이상증후가 발견된다. 피아니스트인 안느는 그 후 두 번의 뇌졸중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이른다 남편 조르쥬는 최선을 다해 아내를 돌본다. 딸은 요양소로 보낼 것을 주장하지만 그는 병원이나 요양소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끝까지 존중한다. 음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억지로 물을 먹인 뒤, 삼키라고 소리치자 안느는 입안에 물고 있던 물을 남편의 얼굴에다 뿜어댔다. 순간적으로 안느의 얼굴을 강타한 손. “여보 미안해~”를 연발하던 조르쥬는 이제 더 이상은 아니라는 듯,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카메라는 차분하게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낸다. 이제 조르쥬의 걸음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창밖에서 비둘기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처음은 창밖으로 가볍게 쫓아내었고 두 번째는 거실에서 종종대는 그놈과 힘겹게 대결하다가 커다란 천으로 마룻바닥을 덮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혹 저러다가 죽이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는 일기장에 '두 번 다 놓아 주었다’고 썼다. '아 다행이구나!’ 어떤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내의 뇌졸중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두 번째 침입,영화는 대사 없이 많은 것을 들려준다. 외출을 하려는 안느에게 남편이 코트를 입혀준다. 안느가 돌아보며 말한다.

"당신도 코트를 입고 와요.”

조르쥬는 비칠거리며 짧은 보폭으로 그녀 쪽을 향한다. 그들의 외출,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80노인의 담담한 연기는 머지않은 장래의 우리들 모습이었다. 죽어 간다는 것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남편의 시중을 들며 식탁에서 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첩을 들추며 '아! 아름답다.’ '인생은 길다.’ 그때 그녀의 길다는 말이 왜 그런지 내겐 절실하게 들렸다. 살만큼 살았으니 ‘지루하다’ 는 나이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때로는 죽음도 구원이 아니겠는가.

성숙한 인간은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꼭지가 빠지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낙과(落果)처럼 광풍이 휩쓴 어느 날 아침, 푸른 과일들이 땅위에 떨어졌다. 자살로 마감한 영화배우 최진실·최진영 남매와 그의 전 남편인 조성민. 며칠 전 신문에 세 사람의 영정사진이 나란히 소개되었다.

인생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 길다.’ 그것을 알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원한이 없이 떠나가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원한(怨恨)없이 떠나야 한다는 게 나의 주장이며 어떤 경로로든지 간에 죽음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죽음이 찾아와준다면 그때가 떠나기에 적기가 아닐까 한다.

철학은 죽음을 배우기 위한 학문이라고 한다. “죽음만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20세기의 분석철학가 비트겐슈타인은 탈장으로 군복무가 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 때 자원입대하여 최전방으로 전출되기를 원했고,결국 이탈리아의 어느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죽음에 가깝다는 것이 삶에 빛을 던져줄 것”이라고 일기에 썼으며 그는 죽음에 직면해 봄으로써 삶의 의미가 더 구체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스트리아 철강산업의 대부호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세 형들의 자살을 차례로 경험한 뒤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천착한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삶의 문제와의 유기적인 관계로 통찰했으며 그 자신 또한 삶과 일관된 모습으로 죽어갔다. 막대한 유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안락한 생활을 경계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최후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 달라”며 1951년 전립선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죽음은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다 비트켄슈타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는 스코트 니어링(1883~1983)을 모델로 삼고 싶다. 사회개혁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스코트는 100세의 생일이 다가오자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었다.

'오! 주여.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외친 릴케의 죽음을 나 역시도 많이 생각했었다. 스코트야말로 자신의 죽음을 죽은 것이다.

죽음은 다만 '옮겨감’이거니 그가 말 한대로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한 변화’라고 말했던 죽음에게로 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했다.

53년 영혼의 동반자,헬렌 니어링이 스코트에게 나직이 속삭여준 말을 가슴에 눌러 담는다.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했어요. 당신 몫을 다했어요. 새로운 앞으로 나아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은 당신과 함께 가고 있어요.”

이들의 작별에는 서로 다독여주는 사랑이 있었다. 안느와 조르쥬의 작별에도 아무르가 있었다. 함께 손잡고 일몰 앞에 선 이들의 모습이 왜 그지없이 아름다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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