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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리운 산사나이 / 박영수

부흐고비 2021. 4. 28. 08:32

산에서 아침을 열고 내려와 찾아가는 해장국집이 있다. 순댓국 맛도 좋고 그 집엔 내가 집에서 보지 않는 신문을 볼 수 있어 좋다. 식탁에 앉고 나면 음식보다 신문이 먼저 나온다. 단골손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주인댁 눈길이 살갑다.

지난 토요일 아침, 무심코 집어든 J일보를 보다 흠칫 놀랐다. 온통 스포츠면이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산사나이 고상돈 이야기로 가득하다. 오랜만에 보고픈 사람 다시 만나는 잔잔한 감동이 일렁였다. 올해가 40주기란다. 글엔 그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이야기, 불과 2년 뒤에 북미 매킨리봉에서 맞이한 너무나 안타까운 최후, 그리고 고향에 묻힌 과정까지 한 편의 감동드라마로 펼쳐져 있다. 추억 속을 헤매다가 식어버린 국물 두어 숟가락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불혹不惑의 고개에서 그를 만났다. 통기타 가수가 생음악을 연주하던 청주 중앙공원 입구 한 카페에서였다. 그곳에서 저녁마다 마주치던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의 청년은 예의도 발랐고 겸손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가 나를 깍듯하게 대하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자신을 보이스카우트와 등산의 길로 이끌어주신 고마운 스승과 내가 너무도 얼굴이 닮았던 때문이었다.

“아, 그 청년이다!”

1977년 9월 어느 날, H일보 전면을 뒤덮었던 세계 최고봉에 오른 기사의 사진을 보던 일이 떠오른다. 놀랍게도 온 국민을 열광시킨 산의 영웅이 바로 카페에서 만나던 바로 그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카페에선 산사나이 얘기로 넘쳐났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다정한 친구가 되어 술잔이 오갔다. 허나 진정한 축배는 주인공이 귀국한 뒤에야 들 수 있었다.

무명 산악인에서 일약 스타가 된 고상돈, 제주에서 태어났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청주사람이 되었다. 고교시절부터 산악인 꿈을 키운 그는 대학생 때 정상의 사나이가 되었고, 행동반경이 크게 넓어지면서 카페를 찾는 발길이 뜸해져 갔다. 하지만 나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모교 강당에서의 결혼식, 매킨리봉 등정을 떠나던 날도 그를 만났다.

세상일 참으로 얄궂다. 신혼의 단꿈이 1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고, 경기도 어딘가에 잠시 몸을 맡겼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신문을 펴든다. 산소마스크를 쓴 정상의 산사나이에 눈길이 꽂힌다. 사진 설명을 읽다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양손에 태극기와 제주산악회 깃발을 들고 선 고상돈 대장”이란 표현에서 ‘제주산악회 깃발’이 묘했다. 관계자분들과 전화도 하고, 책과 자료들도 살피다가 내 손에 묵직한 『고상돈 평전』이 쥐어졌다. 책을 펼치자 맨 앞 동상 사진 속의 그가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날린다. 유복녀와 악우岳友들이 쓴 추모사를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상돈거리도 생겨났단다. 제주도민들의 응집력, 뜨거운 애향심 참으로 놀랍고도 부럽다. 기념관 건립도 무르익었단다. 반가운 일이다.

평전 중간쯤 인터뷰 기사도 실려 있다. “정상에서 제주산악회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고 밝힌 대목이 나온다. 아하, 고인의 마음속엔 성장지 아닌 출생지가 먼저였나 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떠올리며, J일보 사진 설명의 의구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등산에 푹 빠져 살아온 내 마음 깊은 곳에 고상돈 대장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동안 높고 험한 산 오르다 로프라도 타는 날이면 난 버릇처럼 산사나이를 떠올리며 힘을 얻곤 했다. 산은 내게 존재의 근원 같다.

“그는 가지 않았다. 우리들 가슴속에 길이 살아 계시리.”

한라산에서 영원을 바라보고 선 기념비에 새겨진 노산의 시 한 구절이 눈에 밟힌다. 그를 산사나이로 키워 낸 충북의 어디인가에도 추모의 제단은 만들어져야 할 일이다. 오래전 가본 1,100m고지 유택 다시 찾아가, 술 한잔 올리고 싶다.


 

박영수 수필가는 1997년 1월 늦깎이로 문단에 등단했다. 2009년 '좋은 수필 사'의 '현대수필가 100인선'에 선정됐다. 그는 신곡문학상 본상을 비롯해 충북수필문학상·남촌문학상·한국문인상·충북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문화의 달 행사추진위원장으로 행사를 성공리에 치러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저서로 수필집 '망초 꽃 핀 언덕'과 '땅 한 평 책 한 권'을 펴냈다. 청주문화원장과 충북예총 부위원장, 충북수필문학회장 등을 지내면서 충북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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