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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맞이꽃 / 박영수

부흐고비 2021. 4. 28. 08:39

이른 새벽 버릇처럼 오르는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하늘뜨락 같은 쉼터가 있다.

꼭짓점 한발 아래 바위를 낀 두어 평 공간은, 적어도 동이 터 오는 잠시 동안 만은 나의 영토가 된다.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다 보면 청정한 산의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저만치서 들리는 아낙들의 ‘야호!’ 소리는 ‘방 빼!’ 하는 신호이다. 내려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오래전, 산에서 아침 열기를 시작할 때는 약속 없이도 만나던 산 벗들이 꽤나 많았으나 세월과 더불어 하나 둘씩 멀어져 갔다. 망팔(望八) 고개에 올라서면서 건강 문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서이다. 그러던 지난 해 6월, 친구 떠나간 빈자리를 채워 주려는 듯 반가운 손님이 찾아들었다. 바위 옆 풀 섶에 달맞이꽃이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한 포기에서 서너 줄기가 올라와 여름 내내 샛노란 미등을 밝혔다.

강둑이나 냇가의 빈 터 같은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꽃이 어떻게 하늘뜨락에까지 씨앗을 틔운 것일까. 산꼭대기에 핀 달맞이꽃은 어제까지 마을 근처에서 보아오던 그 흔해 빠진 꽃과는 사뭇 달랐다. 같은 꽃인데도 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일까.

적막 속에 달빛을 연모하여 온 밤을 지새우다 인기척에 놀라 안개를 헤치고 나타나는 앙증맞은 자태, 여름밤 고향집 초가지붕을 하얗게 수놓던 박꽃의 청초함에 견줄까. 이른 봄날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다 잔설 속에서 생명의 경외로 다가서던 복수초, 그 손 시린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온 것만 같았다.

어찌 달맞이꽃 뿐이랴. 봄부터 가을까지 산에서 피었다 지는 꽃들에는 산의 마음이 담겨있다. 산꽃들은 자연의 오묘한 신비를 가냘픈 떨림으로 속삭이는 계절의 전령사와도 같다.

어느 산악인은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 했다지만, 나는 ‘거기 꽃이 피어 있어 오른다.’고 말하고 싶다. 여름 한 철을 한 포기의 꽃에 반해 새벽 등산을 거르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의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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