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바람의 연인 / 이경은

부흐고비 2021. 4. 28. 08:44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

마치 폭풍 속을 날아오르려는 새처럼 두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의 나신(裸身)을 휘감고 있는 하늘거리는 천 자락에는 바람이 숨어들어 있고, 금방이라도 또 다른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두 남녀는 소용돌이치는 폭풍우 속에서 사랑의 지독한 기쁨과 열정, 치욕을 동시에 맛보며 영원히 함께 떠돌아다니리라.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이 그림 속의 주인공 남녀의 이름이다. 문학사상 열정적 사랑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70행(行)이야기.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5곡에 나오는 이 비극적 사랑을 화가 에리 셰퍼(Ary Scheffer)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파올로 말라테스타의 유령(Les ombres de Francesca da Rimini et de Paolo Malatesta apparaissent a Dante et a Virgile)>이란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사실 이 그림을 이 곳 파리에서 보게 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그저 책 속에 있는 그림 화보로나 겨우 그 분위기를 접했을 뿐이라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흐릿하게 인쇄된 페이지속의 모습들, 딱 그 정도였다. 70년대 이발소에서 흔히 보았던 그런 그림들의 인상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순간 앞서 보았던 많은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다 지워졌다.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고, 그 빈자리에 이 그림 한 점이 오롯이 들어섰다. 그 유명하다는 그림들도 자취없이 다 사라져버렸다. 내 얼굴엔 붉게 홍조가 물들고 가슴이 스멀거렸다. 그림 위로 내가 읽었던 책들의 페이지들이 휘이익- 하며 마구 넘겨지고 있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 속의 화면처럼 책의 구절들이 내 가슴에서 튀어나와 그림 속에서 뛰어 들어가고, 이내 다시 튕겨 나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림 속에서 조금은 당당하게 하얀 몸을 드러낸 여자와 달리 약간 어두운 톤으로 채색된 남자는 부끄러운 듯, 아니 고뇌에 찬 듯 두 눈을 천으로 가리고 있다. 사랑 앞에서 여자가 더 당당하다고 말해야할까. 아니면 프란체스카의 열정적 사랑이 파올로보다 더 뜨거웠던가. 황홀하면서도 동시에 괴롭고, 기쁘면서 잔인하고, 천국이면서 지옥인 바로 그 사랑. 결국 이 비극적 사랑은 그들을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다. 두 남녀의 공식적인 죄는 간음―시동생과 형수의 불륜적인 사랑이었다. 절름발이이자 추남인 형 대신 청혼을 한 동생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그녀는 형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의 숨은 열정은 위험하고도 치명적이었다. 사랑의 황홀경과 그 결과를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처럼 두 사람에게 남겨진 것은 깊은 회환과 돌이킬 수 없는 ‘죄’라는 이름의 영원하고도 고통스런 대가였다.

그들 곁에는 특유의 빨간 색 망토를 입은 단테가 깊고 진지한 눈초리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다. 오히려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눈이 더 부드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단테는 ‘시체가 쓰러지듯 나는 쓰러졌다’고 표현했다. 영원한 연인이었지만 이루어질 수 없어 가슴이 저렸던 베아트리체를 떠올렸던 것일까. 아니면 비록 저리 바람 속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이지만 사랑을 이룬 그들이 혹시 부러웠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베아트리체를 통해 영원의 세계로 구원될 것이지만, 나는 신적인 세계보다는 인간적인 세계에 시선이 더 머물렀다.

한 권의 책.

그들이 함께 읽으며 금기된 사랑에 서서히 빠져들었던 책이 떠오른다. 랜슬렛의 친구이자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남긴 아서왕의 기사, Galahad가 쓴 바로 그 책 . 아서왕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인 랜슬럿이 기네비오 왕비를 사랑하였고, 그로 인해 슬픈 최후를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가슴 아프고 슬픈 사랑이지만, 아서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불륜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믿었던 부하에게 처참한 배신을 당한다는 쓰라린 이야기인 셈이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는 이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만나면서 랜슬럿과 기네비오 왕비의 사랑의 감정에 이입되고, “우리는 그 날 더 이상 읽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욕망의 수렁에 빠져 들어간다.

마치 그림 속에 그들이 현신(現身)한 듯하다. 프란체스카는 “비참했을 때 행복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일만큼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라고 단테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런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현재 괴롭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이 힘들 때는 그런 시간을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보다 감도가 낮고 지루한 일상의 시간들이 조금 덜 힘들고, 언젠가는 다시 행복한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이 생기는 게 아닐까.

이태리어로 ‘talento’란 재능이나 천재성, 수완, 성향이나 의욕 등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단테는 이 낱말을 ‘욕망’이나 ‘강한 성욕’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다!(Che la ragion sommettono al talento!)”

아, 언제나 인간의 욕망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

지나쳐도 모자라도 안 될 만큼의 욕망이라야 인간이 세상 속에서 바로 설 수 있겠지만, 사람의 힘으로 그 평형을 이루기엔 그 욕망이란 이름의 불길이 늘 거세다. 스페인의 궁중화가였던 고야는 그의 판화집 <카프리초스. 1799년>에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uos.)”라는 문장을 부제로 적어 놓았다. 평자들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던 계몽주의자였던 그가 이성을 잃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다고도 하고, 더러는 악한 마음과 싸우느라 지치고 힘들어하는 나약한 인간 내면의 모습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고도 평한다. 나는 이 ‘연민’이란 말에 마음이 더 닿았다.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그림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의 무모한 사랑과 기쁨, 슬픔, 치욕의 죄를 함께 끌어안고서…. 그들이 이제 세상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추방을 받아야 하는지는 시간을 초월하는 어려운 결정이다. 욕망의 그림자가 이렇게 짙을 줄 그때 알았더라면 이 운명의 굴레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다만 한 점의 예술품으로 승화된 그들을 마음에 담고 미술관을 나섰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주繼走 / 김원순  (0) 2021.04.29
얼굴 / 노혜숙  (0) 2021.04.28
달맞이꽃 / 박영수  (0) 2021.04.28
그리운 산사나이 / 박영수  (0) 2021.04.28
허공을 밟다 / 장미숙  (0) 2021.04.2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