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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얼굴 / 노혜숙

부흐고비 2021. 4. 28. 13:00

그는 빗속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빗물이 얼굴에 스미면서 희미하던 이목구비의 윤곽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어쩌다 목이 잘렸을까. 어떤 파란의 시절을 건너 '얼굴박물관'의 구경거리가 되었을까. 오래전 바이욘 사원에서 보았던 자야바르만 7세의 형상을 닮은 듯도 했다. 세월의 푸른 이끼를 화관처럼 둘러쓰고 있었다. 순탄치 않았을 생의 긴 여정, 고요하고 묵직할 뿐 비극의 기색이라곤 없어 보였다.

내 눈가의 그늘을 읽은 듯 목 없는 부처가 침묵의 설법을 던졌다. '삶 너머 삶을 보라.'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떠올랐다. 입관 전 곱게 매만진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 놓아버린 사람의 무욕과 표정. 순하게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눈가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을 더듬고 있었다. 내가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들여다본 까닭이 거기 있었다.

'얼굴박물관' 관석헌 앞뜰은 석상들의 전시장이었다. 얼굴도 키도 제각각이었다. 무심한 돌들도 풍화를 비켜가진 못했다. 어떤 건 코가 떨어져 나갔고 어떤 건 윤곽이 뭉그러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울고 웃고 찡그리고 새침하고, 영락없이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을 닮아 있었다. 그 많은 석상 중 하필 목 잘려 누운 얼굴에 마음을 주었을까. 그늘의 독법에 민감한 사람은 상처와 죽음의 기미를 섬세하게 알아챈다. 대개는 부처의 형상에서 무념의 평화를 읽고 가는데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먼저 읽었다.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라고 했던가. 사람들은 아무것도 걸칠 수 없는 민낯에 자신만의 지도를 그린다. 생의 궤적이 한 권의 책처럼 얼굴에 형상화되어 있다. 얼굴을 인격의 성소라 칭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원한다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얼굴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도 가능하다. 거기다 사이보그 인간의 출현이 전망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얼굴이 인격의 성소라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땅딸막하니 못생긴 석상이 눈길을 끌었다. 웃음도 헤벌쭉 능청스러웠다. 그 우스꽝스러운 석상은 어디서 퇴짜를 맞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문득 못생겨서 파혼을 당했다는 공주 이야기가 생각났다. 토마스 크롬웰이 영국의 왕 헨리 8세에게 클레브스 공국의 공주를 중매했다. 공주는 추녀였으나 크롬웰은 왕실 화가에게 부탁하여 절색으로 둔갑시켰다. 초상화를 보고 결혼을 결정한 헨리 8세는 공주의 실제 얼굴을 보고 질색했다. 당장 결혼을 무효로 하고 그 대가로 공주에게는 평생 섭섭지 않을 만큼 융숭한 대접을 해서 돌려보냈다. 거짓 초상화로 결혼을 주선했던 크롬웰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시대, 얼굴은 전시 효과가 높은 최고의 상품이다. 그를 위해 죽음의 위험도 불사한다. 얼마 전 성형수술을 하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취업을 앞둔 평범한 젊은이였다. 성형은 이제 기호식품처럼 취사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성형이 가능한 시대에 살았다면 저 클레브스 공국 공주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 최고의 순간이 허망하리만치 짧다는 데 있다. 상승가를 유지하기 위해 고투하는 동안 내면의 얼이 기진맥진한다는 데 있다. 허무에 복종하게 하는 자 자본의 얼굴은 얼마나 매끄럽고 탐욕스러운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본다. 세상의 척도대로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 지 오래다. 얼굴은 내 안의 나와 바깥 세계가 만나는 접점, 나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적당히 포장하고 살았으나 욕망의 피로와 허기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얼굴 중심에 있어야 할 얼이 또렷하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외면할 수 없는 얼굴. 나는 유일하게 그 얼굴을 이해해야 하는 한 사람 아닌가.

저 목 잘린 부처는 어쩌면 모든 얼굴이 도달하는 종착역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배웅하듯 한마디 깨우침이 문밖을 넘어온다. 산 자여. 얼굴 너머 얼굴을 보라. 마침내 그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보라. 시르죽었든 얼을 수습하여 일으킨다. 하마터면 얼빠진 얼굴로 인생 막을 내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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