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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계주繼走 / 김원순

부흐고비 2021. 4. 29. 08:23

살 만큼 살아온 늙은이 둘이, 또다시 살아보겠다고 헌집을 사서 새집으로 꾸미는 중이다. 아이들이 한창 공부할 땐 제 방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다가, 지금에사 여러 개의 방이 딸린 집을 장만하고 보니 후회와 미안함이 앞을 가린다. 아이 둘도 어미의 무심함과 야속함을 삭이느라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러나 헌집을 둘러보는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니 어미에게 품었던 야속함을 훌훌 털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참으로 막막하고 한심한 어미였다.

좀 더 빨리 농장을 접을 걸 그랬다. 하향선을 그리는 화훼 경기를 보면서도 마음을 쉬이 접지 못한 것은, 내년에는 반드시 상향선을 그릴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보다 쏟아 부은 돈에 비해 흘린 땀방울의 무게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모래알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남은 통장의 잔고처럼 시름시름 지쳐가는 가족들 생각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낡은 움막집을 헐고 다시 짓느라 장마철 비닐하우스 안에서 새우잠을 잔 날들이 별처럼 그렁거린다. 지우고 싶은 일들도 기억 저편에서 가슴을 마구 저미고.

자정이 가깝도록 단열재를 붙인 뒤 벽지를 바른다.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는데 언제쯤 끝날지는 예측할 수가 없다. 크고 작은 일들을 죄다 떠안았으니 아들이 입술이 장밋빛처럼 부르틀 만하다. 회사와 어미집을 오가며 제집보다 더 애를 쓰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어미의 마음은 갈래갈개 찢어져 흐르는 폭포가 된다.

단열재를 붙이고 벽지를 바르는 동안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침 햇살 가득한 동창이 있는 방을 제 방인 듯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제 방도 없는 움막집에 차마 친구들을 데리고 올 수 없었다던 아들의 한숨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환청처럼 들린다. 도배가 끝난다 해도 텅 비어 있을 방과 거실이 고도孤島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오래된 나무 문짝을 떼어내고 하얀 새시로 바꿔달았더니 침침하던 거실이 대낮처럼 환해져 한층 넓어 보인다. 비싸지 않은 벽지와 장판을 바꿔준 것뿐인데 방들도 신이 났는지 신혼방인 양 꿈을 꾸는 듯하다. 내 마음속의 낡은 방들도 도배를 하면 유년시절의 방처럼 꿈을 꿀 수 있을까. 도배를 하기 전에 마음속의 고답한 가구부터 버려야겠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집과 부부도 마찬가지다. 언뜻, 물음표 두 개가 섬광처럼 스친다. “나는 이 집의 진정한 주인인가.” “살면서 사랑하고 배려하는 아내로 살아왔던가.”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나와 헌집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니 집과 내가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서 한몸처럼 느껴진다. 부르튼 입술로 하얀 새시문을 여닫는 아들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처럼 생각된다. 아, 진정한 행복이란 이처럼 작은 것에서 오는 것을. 종이 한 장 차이인 행복과 불행을 헌집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떼어낸 벽지와 장판, 낡은 문짝들이 마당 가운데 수북이 쌓여간다. 전 주인이 버리고 간 화분과 그릇들이 대합조개 껍데기와 함께 군데군데 돌무덤처럼 쌓여 있다. 전주인의 손때와 체온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 유구한 삶의 화석들이다. 하나씩 들추면 통통걸음으로 걸어 나와 살을 부비며 살았던 얘기들을 구슬처럼 꿸 것 같다. 전 주인이 살다간 흔적들을 하나하나 지운다. 내 삶의 이야기를 쓰려면 전 주인이 쓰고 간 이야기들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전 주인 또한 그 전 주인의 흔적들을 말끔히 지웠듯이, 나 역시 이 집을 떠나고 나면 누군가가 내 삶의 흔적들을 지우느라 밤을 하얗게 밝힐 것이다. 그리곤 대낮처럼 환해진 방에서 별보다 찬란한 꿈을 꾸지 않을까. 전 주인과 나, 그리고 방마다 등불을 밝힐 미지의 주인! 마치 운동회 날 이어달리기를 보는 듯 신기하고 흥미롭다.

문득 계주繼走가 생각난다. 운동회나 올림픽경기 때 제일 나중에 치러지는 계주는 경기의 백미며 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도 앞지르면 마음을 풍성처럼 띄워주고, 그러다가 자리를 내주면 온몸의 힘을 죄다 빼버리는 계주야말로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남녘 들판을 바라보는 나의 집을 쳐다본다. 갑자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바장이는 마음을 앞세우고 달렸던 신혼 시절, 셋방에서 전셋집으로 비틀거리며 달리는 동안 움켜쥐었던 손바닥의 그 많은 땀방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3평에서 23평 아파트로 힘겹게 달려왔을 때 하늘 높이 띄워 올린 희망의 풍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3년 뒤 남편의 갑작스런 사직으로 희망의 풍성이 산산조각 터져버렸을 때, 나는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상실감과 자괴감에 몸서리치곤 한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좌절’과 ‘체념’이란 낱말을 비집고 일어섰을 때, 화훼농장을 하도록 이끌어준 여동생이 있다. 그녀는 아직도 나의 구세주다. 움막집 속에서 밤마다 별을 헤고 내일을 꿈꾸며, 터져버린 희망의 풍선을 높이 띄워 올린 꿈에 부풀던 움막집 속의 따스하고 맑은 가난!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금의 헌집까지 달려오게 한 힘이다.

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헌집 마당 한켠에 펼쳐져 있는 텃밭의 무한한 긍정과 도전, 겸손이 내 삶을 받쳐줄 지줏대 같아서 슬며시 기대본다. 이 아프고 힘겨운 것들이 내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어주었기에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어기차게 달려올 수 있었다. 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달리기였다.

전 주인이 살았던 집에 내가 살고,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내가 앉고, 언니가 입었던 옷을 나와 동생이 받아 입었듯이 세상살이란 온통 이어달리기의 연속이다. 어줍은 글이지만 마음껏 쓸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의 DNA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이어달리기 덕분에 삶과 생명이 존재하고 사랑과 전쟁, 편화가 공존하는 듯하다.

나의 헌집은 전 주인으로부터 건네받은 또 다른 바통이다. 바통의 색깔이 푸르거나 희거나, 첫 번째 주자거나 마지막 주자거나 상광이 없다. 건네받은 바통을 단단히 쥐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최선을 다해 달리면 된다. 반칙을 하지 않고 제 궤도를 열심히 달리다가 미지의 누군가에게 이 바통을 넘겨주었을 때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건네받은 바통을 쥐고 아름답고 시원하게 닦아 놓은 길 위를 가뿐하게 달리고 있노라’고.

두 늙은이의 헌집이 등불처럼 환하게 켜지는 날, 제 방도 없이 살았던 아들과 딸 내외를 초대해서 보름달 같은 신혼방 하나씩 내어줄 것이다. 언제든 어느 때든 불쑥 찾아와도 제 방이 있는 어미의 집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었으면 좋겠다. 방과 마당, 텃밭과 대문 앞에도 우리들의 아름답고 진솔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전 주인이 잠을 잔 방에서 아침 해를 맞이하고, 된장찌개를 끓였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이 무궁무진하고 아름다운 계주! 이 집을 마지막으로 두 늙은이의 어기찬 계주를 끝낼까 한다. 걷다가 힘들면 퍼더버리고 앉아서 지난 날 달렸던 가풀막진 길들을 고요히 떠올려도 보고, 달동네 그 낡은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따뜻한 불빛의 응원과 갈채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렸던 아릿한 추억들과 유유자적 걸어도 보고….

제 방조차 없던 아이 둘에게 어미가 달렸던 어기찬 길을 찬찬히 걸어보게 하고싶다. 마지막 주자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계주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가라고 넌지시 알러주어야지. 주저앉지 않고 달려온 길 끝에서 만난 나의 헌집이 챔피언의 목에 걸어주는 꽃목걸이인 양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비록 문패는 달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향기로운 삶의 노래가 있고,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사랑이 있고, 별처럼 꿈을 꾸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어기차게 달려온 내가 있고, 나를 나답데 조율해주는 내 마음이 그곳에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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