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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마종기 시인

부흐고비 2021. 5. 3. 10:25

 

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상처2 / 마종기

그렇다, 젊었던 나이의 나여,/ 평생 도망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하느님의 눈물 한 방울./ 멀리 누워 있는 저 호수도/ 가엾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 짓누르던 세월의 불면증을/ 몇 번이나 호수에 던져버린다./ 불면증 물려받은 호수가/ 머리까지 온몸이 젖은 채로/ 잠시 눈을 뜨고 몸을 흔든다/ 연한 속살은 바람에 씻겨/ 호수의 살결이 틈틈이 트고/ 가는 다리까지 떨고 있다.//

상처3 / 마종기

어디였지?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다 되어/ 호수도, 바람도, 다리도/ 대충 냄새로만 기억이 날 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끔/ 귓속의 환정의 아우성./ 아무도 우리를 말릴 수 없다는/ 상처의 나이의 아우성.//

상처4 / 마종기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등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려주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상처 5 / 마종기

나이 탓이겠지만 요즈음에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피가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 심하게 다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처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세포들은/ 자꾸 머리를 부딪히며 소리 죽여 운다.// 나이 탓이겠지만 남들의 상처도/ 전보다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다./ 피부를 숨긴 공포의 빠른 도주도/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보인다./ 무자비한 욕망이 표정 죽이고/ 우리 사이에 집과 공장을 짓는다.// 나는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기적의 알약은 커지기만 하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공기의 입들이/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떠들며/ 살충제의 바람을 만들어 주위에 뿌린다./ 그래도 피나지 않는 마지막 것을/ 언제나 두 손에 들고 사는 너.//

상처6 / 마종기

집 없는 새가 되라고 했니?/ 오래 머물 곳 없어야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야 진심에 골몰할 수 있다고./ 설레는 피안으로 높이 날아올라/ 구름이 하는 말도 들을 수 있다고./ 이승의 푸른 목마름도 볼 수 있다 했니?// 잎 다 날린 춥고 높은 우듬지에서/ 집 없는 새의 초점 없는 눈이 되어야/ 우리 사이의 복잡한 넝쿨이 풀어진다 했니?/ 망각의 틈새에서 적적하고 노쇠한 뼈들이/ 몇 개쯤의 상처는 아예 손에 들고 살라 하네./ 외지고 헐거운 삶의 질곡을 완성한다고.// 문을 열면 나를 맞아준 것은/ 질서 없이 도망간 흔한 변명뿐,/ 수척한 추위에 떨며 나를 안아주었네.// 노을이 붉어질수록 깊이 잠기는/ 저녁 근처의 너는 벌써 새가 되었니?/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아프지, 그게 오래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

상처 / 마종기

오래 먼 숲을 헤쳐 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 버릴 수 없는 그 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천사의 탄식 / 마종기

기댈 곳이 정말 없네. 어디에 누워도 메마른 신음, 어디에 가도/ 목이 막힌 주검들. 지친 몸 쉴 곳 없는 낯선 땅이 내 상처였지/ 창궐하는 역병은 세상을 찌르고사람들은 수없이 죽어서/ 쌓이고 매장할 곳도 화장할 곳도 없다는데 60년 전 시인이/ 되겠다고 한 건방진 약속, 늦었지만 이제 취소합니다./ 숨 쉴 곳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당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을 떠나면 반가운 나라가 보이고/ 그 곳에서 모두 함께 만나 울면서 춤춘다는 말도 차츰 무서워진다./ 어떤 표정으로 당신을 맞이해야 할까? 바다의 별같이 화려할 수는/ 없겠지만 준비 없이 고통받기 두려워 한 발 물러서면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잇다는 모순. 미워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잡히지 않겠다고/ 도망 다닌다.//
나는 욕심이 크지 않고 남을 돕고 싶어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 내 열병만 참으면 되는 줄 알았지. 벌거벗어도 아름다웠던 날이/ 있었지만 이제 무엇을 더 피하고 무엇을 더 감추어야 편안해질까./ 어느새 세대에 찢긴 바람도 멎고 내 영혼이 당신께 귀기울입니다./ 어려운 일곱 마디 말을 다 듣고 나서야 헐벗은 당신의 윤곽이 차츰/ 분명해집니다.//
한때는 나도 들꽃과 바람에 어울려 살았지만 당신이 피 흘리며/ 배척당했던 곳은 먼지와 빈 흙과 돌무더기, 아직도 인간의 짐을 지고/ 돌산에 오르고 있다고 믿는 그 길을 나도 허기진 채 걸어보았지요/. 오랫동안 외로웠다고 이제는 말해도 될까? 헐벗은 마을에서는/ 내 유일한 유희를 함께해줄 이가 없었지요. 듣지도 않고 모두들/ 가버렸습니다.//
젊었을 적 밥 딜런이 바람 속에 답이 있다고 웅얼댄다./ 몇 번이나 고개를 들고 찾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는냐고/ 묻는다. 그래, 나도 평생 고개를 수없이 들어보았다./ 나이가 들어서야 큰 것은 단순한 것에 스며있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해는 저물고 세월은 너와 나 사이로 흘러가는데/ 그 하늘은 아직 높고 멀기만 하다.//
시체 해부로 밤을 지새우던 의대생 시절에 나는 당신이/ 주는 양식을 간단히 거절했지요.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믿/ 었으니까. 그 냄새의 세월이 가고 내 나라에서 쫓겨난 뒤/ 에야 내가 배고픈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저쪽 골목을 돌아/ 세상에 왔을 때 눈물진 당신의 양식을 먹고 나서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네. 가난하고 끝없는 내 피난처여.//
오른쪽 뇌에서 쏟아진 자연과 자유와 느슨한 감성은 왼쪽 뇌에/ 서 있는 물리화학과 피의 기술을 만나 난상 토론 긑에 나를 이룬다./ 그 뇌를 조각으로 자르고 남의 심장을 듣어 쑤시고/ 복강을 열어보며 배운 것이 인간은 누군가 만든 신비이고 그 길/ 끝에서 우리를 집으로 인도해주는 손길. 반성의 기미만 내 유서가/ 되어 고개를 깊이 숙이네.//
밝고 깨끗한 곳이 아니고 어둡고 고개 숙인 골짜기에만 무지개가/ 산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꿈이 내 지향/ 이었다.무지개가 살아 있는 한 당신도 언제고 돌아오리라 믿었다./ 저기 고통에 절어 탈진된 채 망연히 서 계시는 이는 누군가./ 스타바트 마테르의 노래가 들린다. 고통을 이겨낸 배경으로 찬란한/ 무지개가 선다.//
거의 끝나가는구나. 다리를 끌며 앞서가는 이, 눈에 익은/ 뒷모습이 반갑다. 살아오면서 자주 들었던 한숨 소리는/ 더 이상 기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구나. 쓰러져 피흘린 자에게/ 들리던 탄식은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 눈을 뜰 줄 몰랐으니 한숨의/ 의미도 몰랐던 거지. 우리는 결국 다 함께 일어난다는,/ 다정하게 들리는 저 천사의 탄식!//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이 오고/ 있다. 어렵던 미적분도 다 풀었고 산을 넘던 일몰도 멈추어 섰다./ 이제는 생애의 성사를 받을 시간, 수 많은 죄와 회한을/ 기쁨으로 바꾸어주는 당신께 다가간다. 지는 노을 속에/ 자욱한 영혼들, 천천히 날아오르는 오, 부끄러운 내 몸//

시인의 용도 / 마종기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이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에서/ 중앙아프리카에서/ 굶고 굶어서 가죽만 거칠어진/ 수백 수천의 어린이가 검게 말라서/ 매일 쓰레기처럼 죽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서/ 오늘은 해골을 굴리고 놀고/ 내일은 정글 진흙탕 속에 죽는 어린이./ 열 살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고/ 열두 살이면 기관단총을 쏘아댑니다./ 엘살바돌에서, 니카라과에서/ 중앙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해 뜨고 해 질 때까지 온종일/ 오른쪽은 왼쪽을 씹고/ 왼쪽은 오른쪽을 까고/ 대가리는 꼬리를 먹고/ 꼬리는 대가리를 치다가 죽고./ 하루도 그치지 않는 총소리,/ 하루도 쉬지 않는 殺人/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어디 있습니까.// 이란에서, 이라크에서,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에서, 시베리아 벌판에서/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 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 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 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 어느 시인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감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 그러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용도2 / 마종기

하느님,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 못 하게 하세요./ 어두운 골방에 앉아 하루 종일 봉투 만들고/ 라면으로 끼니를 잇는 노파를 아신다면,/ 하느님, 내가 외롭단 말 못 하게 하세요./ 쉽게는 서울 남쪽 변두리를 걸어서/ 신흥 1동, 2동 언덕배기 하꼬방을 보세요./ 골목길 돌아서며 피 토하는 소년을 아신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영양실조도 있었어요.// 하느님, 내가 사랑이란 말 못 하게 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아직 인자(人子)로 살아 있을 적에도/ 먼지 쓴 신자(信者)의 회초리가 드세기도 하더니/ 세계의 곳곳에는 그 사랑의 신자들 가득하고/ 신자에게 맞아 죽은 신자들의 시신(屍身),/ 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고/ 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 들어 보세요./ 고통도, 사랑도, 말 못 하는/ 섭섭한 이 시대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대화 / 마종기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신설동 밤길 / 마종기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오랜 기다림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후회는 없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인파에 밀려난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취위마저 안심하고 인사하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이겠지.// 가진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미련의 극치라고 모두들 피하는데/ 그 세련된 도시를 떠나 여기까지 온/ 내 몸에 깊이 스며드는 신설동의 밤길.//

​쓸쓸한 물 / 마종기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 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깨꽃 / 마종기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알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 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 마종기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 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헤밍웨이를 꿈꾸며 / 마종기

그랬지.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가난도 무질서도 싫었고 무리지어 고함치는 획일성도 싫었다. 더나고 또 떠나다 보니 여기에 서 있다. 낡고 빈 바닷가, 잡음의 파도 소리를 보내고 산티아고 노인을 기다리고 싶다. 남은 생명을 한 판에 다 걸고 집채만 한 고기를 잡았던 헤밍웨이의 어부를 만나고 싶다. 그 쿠바 나라 노인은 나를 기다리며 감추어둔 회심의 미소를 그때 보여줄 것이다. 해변에 눕는다. 해변이 천천히 그림자를 옮기면서 나를 치며 가라고 할 때까지 계획 없이 떠다니던 내 생을 후회하기 않겠다. 내가 무리를 떠나온 것은 비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노을이 키웨스트 해변에 피를 흘리고 흘려 모든 바다가 다시 무서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의 자식들이 몰려나와 신나는 한 판 춤을 즐길 때까지.//
마흔두 개의 섬을 연걸한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너며 차를 달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섬. 어느 다리는 길이가 30리 정도까지 되어 가늘게 흔들리며 망망 바다에 떠 있어 어지러웠지만, 헤밍웨이는 야자수밖에 없는 그 마지막 섬에 프랑스 미녀를 데려와 넷째 뷩ㄴ으로 살림을 차리고 말술을 마셨다. 그 중간에는 사람 열 배 크기의 상어를 잡고 거대 다랑어를 잡고 아프리카에 가서는 사자와 표범과 코뿔소를 피투성이로 죽이고 종국에는 그 총으로 더 늙기 전에 미리 죽어버린 남자. 그가 쓴 통 크고 시야 넓은 은유의 글을 읽다가 나도 콩 큰 시를 꿈꾸며 모든 의심과 열등감을 밟고 방을 뛰쳐나온다. 갈 곳 없지만 눈을 크게 뜨고 아직은 갈기 사나온 수사자를 꿈꾸며, 가슴을 펴고 바다같이 넓은 시를 꿈꾸며, 다시 한 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를 꿈꾸며.//

희망에 대하여 / 마종기

오래전 희망에 대해 말해준 분이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 귀인의 흐미아은 어디쯤에 숨어 살고 있을까. 그 후 언제부터인지 나도 내 희망을 찾아서 세상으 ㄹ헤매 다녔다. 전에는 널려 있는 듯 자주 보이던 희망에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희망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싱싱한 냄새의 생명은 혹시나 계절이나 나이와 관계가 있을까. 이제야 조금은 후회되면서 지나가버린 희망이 그리워진다.//
함께 붙잡고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란 것을 아는 이, 남의 깊은 속가지 다 믿고 있는 이가 희망의 신호다. 당당히 걸어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흐미아이다. 내가 처음 품었던 희망과 지금의 희망은 많이 달라졌다. 희망은 구름같이 변하는 것인가. 벌판같이 나른한 것인가. 희망이 등을 다독이며 속삭인다. 희망은 당도 아니고 사람이다. 산천초목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른 섞임이다.//
내가 세상과 작별할 때에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은 아마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내가 가진 작은 희망들 때문에 나는 누구라도 용서할 힘이 생겼다. 내 손을 보라. 허영이 치유되는 침묵의 소리. 손해보고 상처받았다고 괴로워하던 남루한 내 생을 안아주면서 당당하게 가벼워지라고 흐미아은 오늘도 내게 말해준다.//
'내가 세상과 작별할 때에도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싶다. 나는 아직도 희망을 그리 많이 가짖 못했고 희망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 '누구라도 용서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싫은 사람은 싫다.//

​마흔두 개의 초록 / 마종기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나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그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갈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봄날의 상징 /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운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 한 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듯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릐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

목련, 혹은 미미한 은퇴 / 마종기

1// 젊은 봄날에 우리는/ 먼 외국에서 도착했다/ 구식이 된 거리의 실내악,/ 집 잃은 사람은 구라파로 가고/ 목련이 구름처럼 피어 기가 질리던/ 그 계시의 영상을 믿기로 했다.// 이사 온 나라는 달기만 해서/ 목련의 색깔은 더 엷어지고/ 시계 초침 소리는 더 빨라지고/ 나는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단번에 칼처럼 매워지고 싶었지만/ 정신 나간 목련은 계속 피면서 지고/ 여름이 되기 전에 맨발이 되었다./ 나는 가벼운 물에 떠돌기 시작했다.// 2// 당신이 같이 걸어주어서/ 내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나는 끝까지 모른다.// 당신의 이마에서 눈과 목으로/ 가슴으로, 배로, 그 밑으로/ 상처 자국의 다리를 쓸어내려도/ 황막하게 슬프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젖어서 시리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지도를 펼쳐보면/ 기억 나니? 오래 전/ 그 큰 나무 그늘에서 나를 부르던/ 미열의 연보라색 눈동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혹시 쉬고 있는 목성과 토성 사이.// 오늘도 당신에게 가지 않았다./ 아무리 울어도 표나지 않는/ 비 오는 날에 보는 목련의 벗은 몸.// 3// 평생을 어딘가에 취해서 살았다./ 행방이 묘연한 내 살림살이./ 꽃을 먼저 피워 날리고 난 후에야/ 뒤늦게 나뭇잎을 만들어 달고/ 꽃씨 간직할 방도 마련하기 전에/ 아이들은 차를 타고 제각각/ 어색한 언어의 나라로 떠났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가까운 친구들은 병이 들었고/ 일요일에는 낙엽이 날렸다./ 낙엽은 나무의 눈물,/ 쌓인 눈물을 다 씻어낸 뒤에/ 당신에게 들어가 열매가 되었다.//

꿈꾸는 당신 / 마종기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구해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속 깊이 숨은 것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상처를/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길 / 마종기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에 덮인 집이 불을 낮추고/ 검푸른 바깥이 천천히 밝아왔다./ 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 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 끊어질 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 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저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쓸쓸한 물 / 마종기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이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갈대의 피 / 마종기

내가 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죽은 듯 살아있고/ 살아있는 듯 몸을 흔들며/ 죽어있기 때문이지// 죽고 사는 것이 같이 잘 섞여서/ 죽은 갈대가 산 것같이 노래하고/ 산갈대가 죽은 갈대를 안고 춤추네// 평생동안 한 눈만 팔고 살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다 가게하고/ 손 흔들어 보내면서 웃고 있네// 아끼기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팔목 한번, 어깨 한번 만지지 않는구나/ 만지고 싶어라, 날아가는 흰 갈대꽃/ 매일 흘리는 피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네//

이슬의 하루 / 마종기

이제는 알겠지,/ 내가 이슬을 따라온 사연./ 있는 듯 다시 보면 없고/ 없는 줄 알고 지나치면/ 반짝이는 구슬이 되어 웃고 있네.// 없는 듯 숨어서 사는/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의/ 거대한 마지막 비밀./ 내 젊은 날의 모습도/ 이슬 안에 보이고/ 내가 흘린 먼 길의 눈물까지/ 이슬이 아직 품어 안고 있네.// 산 자에게는 실체가 확연치 않은/ 이슬, 해가 떠오르면/ 몸을 숨겨 행선지를 알리지 않는,/ 내 눈보다 머리보다 정확한/ 이슬의 육체, 그 숨결을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헤매다 보니/ 어두운 남의 나라에 와서/ 나는 이렇게 허술하게 살고 있구나./ 이슬의 존재를 믿기까지/ 탕진한 시간과 장소들이/ 내 주위를 서성이며 웃고 있구나.// 이제는 알겠지, 그래도/ 이슬을 찾아 나선 내 사연,/ 구걸하며 살아온 사연./ 이슬의 하루는/ 허덕이던 내 평생이다./ 이슬이 보일 때부터 시작해/ 이슬이 보일 때까지 살았다.//

이슬의 애인 / 마종기

아침마다 이슬은 나를 허물어/ 질투를 선물한다.// 그런 날들이 들에 쌓여/ 시든 삶을 사는 마을,/ 모든 빛나고 아름다

운 것들은/ 평생의 속임수가 되어/ 사방에서 반짝였다.// 이른 아침의 작은 꽃은 결국/ 잠들어 있던 이슬이었지만/ 그래도 꽃향기는 몰려와/ 눈부신 하루를 만들고/ 시간의 폐허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간밤에는 누가 한을 남겼나,/ 이슬이 풀잎마다 가득하다./ 그 여리고 가는 마음을 사랑하느니/ 야속하게 다시 배신당할지라도/ 나는 한 세상의 헐벗은 애인,/ 잊혀진 그 하루의 동행만으로도/ 온몸을 적시던 이슬의 춤.//

비 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환한 불을 다시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어느 날 문득 / 마종기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긴 질긴 내 그림자가/ 팔 잘린 고목 하나를 키워놓았어./ 봄이 되면 어색하게 성긴 잎들을/ 눈 시간 가지 끝에 매달기도 하지만/ 한세월에 큰 벼락도 몇 개 맞아서/ 속살까지 검게 탄 서리 먹은 고목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은 힘 지친 잉어 한 마리/ 물살 빠른 강물 따라 헤엄치고 있었어./ 정말 헤엄을 치는 것이었을까./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 것이었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한 채/ 잉어 한 마리 눈시울 붉히며 지나갔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모두 그랬어. 어디로들 가는지./ 고목이나 잉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뚝심이 없었던 젊은 하늘에서/ 며칠내 그치지 않은 검은색 빗소리.//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인 마해송이며 어머니는 한국여성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박외선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9년〈해부학교실(解剖學敎室)〉등으로《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단
1960년 첫 시집 《조용한 개선》 후 《두 번째 겨울》(1965),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9),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등을 발간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 미주문학상, 제7회 편운문학상, 제9회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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