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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형영 시인

부흐고비 2021. 5. 1. 07:13

따뜻한 봄날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 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나 / 김형영

수술 전날 밤 꿈에/ 나는 내 무덤에 가서/ 거기 나붙은 내 명패와 사진을 보고/ 한생을 한꺼번에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흘린 눈물을 담아보니/ 내 육신 자루에 가득했다./ 살아서는 한 방울도 맺히지 않던/ 그 눈물.// 그랬구나/ 그랬구나/ 이것이 나였구나./ 좀더 일찍/ 죽기 전에 죽었으면 좋았을걸.//

上里 6 / 김형영

나 죽으면 천국에 가리/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아니아니/ 영구차를 타고// 게딱지 같은 고향집/ 내가 먹은 강아지들/ 꼬리 치듯이/ 쑥냄새 날고// 개구리 울음울면/ 개나리 꽃 피어/ 피어 피어 피어/ 울리는/ 하늘 끝까지// 나 죽으면/ 上里 가리.//

내가 죽거든 / 김형영

내가 죽거든/ 내 눈 뚜껑은 열어둬./ 관악산 문상을 받고 싶어.// 아침마다 걷던 숲길이며/ 수억만 년 묵상 중인 바위들,/ 새들의 만가,/ 춤추는 나무들,// 내가 죽거든/ 관 뚜껑을 열어둬./ 용약하는 관악산의 내 친구들/ 마음에 담아 떠나고 싶어.//

유언시 / 김형영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죽거든/ 무덤일랑 만들지 마라/ 납골당에도 가두지 마라// 나를 먼지로 만들어/ 관악산 중턱 후미진 곳에서 뿌려다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구름이 흘러가면 구름 따라/ 새들 지저귀면 새소리로/ 꽃들 향기 뿜으면 그 향기에 취해/ 천지사방 허공을 떠돌며/ 보이지 않는 자연이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

서시 / 김형영

바닷가 모래밭에/ 한 아이 구덩이를 파서는/ 그 안에 바닷물을 담고 있네./ 조그만 조개껍데기로 퍼 담고 있네.// 거기서 뭐 하느냐 물으면/ "이 안에 바닷물을 다 담으려고요."/ "그건 불가능하단다." 일러주어도/ 아이는 계속해서 퍼 담고 있네.//

수평선1 / 김형영

하늘과 바다가 내통(內通)하더니/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었구나// 나 이제 어디서 널 그리워하지//

바람 / 김형영

어디로 떠난다 해도 거기 내가 머무나니/ 님은 나의 두려움 없는 자유라//

하늘에 바람을 걸고 / 김형영 

나무와 인사를 하면/ 저 사람 미쳤다고 수군거린다.// 나무를 알고 싶어/ 나무와 얘기를 나누면/ 저 사람 헛소리한다고 고개를 흔든다.// 없는 것을 본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것을 보았을 뿐인데/ 무슨 죄인 만난듯 돌아서버린다.// 머지않아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날/ 하늘에 바람 하나 걸고 산 삶이여// 행복하여라,/ 그날을 기다리던 시간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 김형영

눈 덮인 산중/ 늙은 감나무/ 지는 노을 움켜서/ 허공에 내어건/ 홍시 하나// 쭈그렁밤탱이가 되어/ 이제 더는/ 매달릴 힘조차 없어/ 눈송이 하나에도/ 흔들리고 있는/ 홍시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롭게 매달린 예수처럼/ 바람으로 바람을 견디며/ 추위로 추위 견디며/ 먼 세상 꿈꾸고 있네//

 

변산바람꽃 / 김형영

, 거기 피어 있었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봄바람은/ 내 작은 꽃 속에서 불고,/ 가난해도 꽃을 피우는 마음/ 너 아니면/ 누가 또 보여주겠느냐/ 이 세상천지/ 어느 마음이//

 

가을 하늘 / 김형영

몇십 년을 두고 가슴에 든 멍이/ 누구도 모르게 품안고 살았던 멍이/ 이제 더는 감출 수가 없어/ 멀건 대낮/ 하늘에 대고/ 어디 한번 보기나 하시라고/ 답답한 가슴 열어보였더니/ 하늘이 그만 놀라시어/ 내 멍든 가슴을 덥석 안았습니다./ 온통 시퍼런 가을 하늘이// 

 

쉬었다 가자 / 김형영

내가 날마다 오르는 관악산 중턱에는/ 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요/ 팔을 다 벌려도 안을 수가 없어서/ 못 이긴 척 가만히 안기지요./ 껍질은 두껍고 거칠지만/ 할머니 마음같이 포근하지요.// 소나무 곁에는 벚나무도 자라고 있는데요/ 아직은 젊고 허리가 가늘어서/ 내가 꼭 감싸주지요./ 손주를 안아주듯 그렇게요.// 안기고 안아주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십 년도 한나절같이 훌쩍 지났어요./ 이제 그만 바위 곁에 앉아/ 쉬었다 가는 게 좋겠지요.//

 

回春 / 김형영 

나무를 안으니/ 내 몸속에 수액이 흐른다./ 나무는 내 몸이 제 몸인 줄 아는지/ 자꾸만 수액을 빨아올린다.// 잎이 무성하니/ 갈 길 바쁜 사람도 쉬었다 간다./ 나무가 시원하니 나도 시원하고/ 나무에 힘이 솟으니/ 내 몸속 피도 잘 돌아// 오늘은/ 당신을 불러내어/ 바람 안고 한번 놀아볼까?/ 용을 써볼까?/ 에라, 내친김에 사고도 쳐볼까.//

 

작은 생각들 / 김형영 

1. // 밤아,/ 마침내 네가/ 흩어진 천지사방을/ 하나로 모았구나.//

2. 우리 동네// 우리 동네 구멍가게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있다./ 그냥 거기 맘 놓고/ 아무거나 가져가거라.// 이따 또 오지 마라.//

3. 이웃// 누가 네 이웃이냐 묻지 마라./ 나도 네 이웃 아니냐.//

4. 生死// 네가 죽는 날/ 네가 태어난다.// 언제 너희가 만나랴.//

5. // 겨우내 땅속에서/ 숨죽이고 꾼 꿈 하나 들고/ 땅 밖으로 나오는 새싹들아./ 너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이 풍진세상은 어떻게 견디며/ 꿈은 또 언제 펼치려나.//

6. 높바람// 높바람이 분다./ 어디에 떠나야 할 것이 숨어 있나 본다.// 옷깃 여며야겠다.//

7. 짝사랑// 내게 없는 것 네게는 있었다.// 눈앞에 떠도는 뜬구름 하나.//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 김형영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말을 잃고 내게 오는가./ 사랑이라는 말/ 죽음이라는 말/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내가 부를 이름도 없이 내게 오는가.// 보이지 않는 당신/ 보이지 않는 육체/ 그럼에도 당신은 살아 있다./ 어둠 속 깊이깊이/ 내 마음속 깊이깊이/ 내가 당신을 꿈꾸는 것처럼/ 당신은 나를 꿈꾸고/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가지리.//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힘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시간의 힘으로/ 天國이 있다면/ 우리가 그 天國을 가지리.//

 

오늘은 당신 없이 아내에게 / 김형영

봄비에 젖은 꽃/ 산길 따라 한꺼번에 피었습니다.// 당신 없이 나 혼자/ 너무 심심해/ 무슨 말이든 누구와 나누고 싶어.// 그래, 그래, 그래,/ 오늘은 당신 없이/ 그냥 꽃하고 눈만 맞추며/ 게으른 산행을 할까 합니다.//

 

말벗 / 김형영

바깥나들이 할 때면/ 뒷짐부터 진다./ 편안하다./ 느릿느릿 걷다가/ 담장 밑에 민들레며/ 겁 없이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과도 만난다.// 한참을 그냥 마주 서서/ 속사정도 나눈다./ 눈 잠깐 맞췄을 뿐인데/ 돌아서면 여운이 남는다.// 말벗이 하나둘 사라지고/ 혼자 남아 중얼거리는 날이 많아지자/ 먼 산 황혼이 조용히 타이른다./ 그만 자거라.//

 

산꼭대기에 올라 / 김형영

산꼭대기에 올라/ 소나무 밑에 누워본다./ 얽히고설킨 가지와/ 가지마다 푸른 솔잎 사이로/ 바람과 구름 따라/ 근심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진다.// 하늘을 향해 몇백 년을 자란/ 늙은 소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 내가 가장 가벼워지는 시간./ 어디든 춤추며 날아갈 것 같다.// 좋은 날 좋은 시 택해서/ 막걸리 한두 말 퍼다/ 뿌리 깊이 부어드려야겠다.//

 

땅을 여는 꽃들 / 김형영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보려면/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품어보자.//

 

봄나비처럼 / 김형영

날아다니는 꽃/ 날아다니는 노래/ 그걸 바라보며 흥얼흥얼/ 봄날은 하루뿐인 듯/ 햇볕과 신명 나서 놀아봅니다.// 삼라만상을 흔들며 날아들면/ 풀잎은 꽃잎이 되고/ 돌멩이도 개똥밭도/ 길바닥도 꽃을 피웁니다.//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앉아도/ 앉은 줄도 모르고/ 꽃들은 제 향기에 취해/ 나는 내 꿈에 취해 삽니다.//

 

그래도 봄을 믿어봐 / 김형영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조금 취해서 / 김형영

남 칭찬하고

술 한 잔 마시고,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니

행복하구나.

갈 길 몰라도

행복하구나.

 

비틀거리는 삶 / 김형영

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한동안은/ 님의 뜻 따라 살아가리라/ 하루에도 골백번/ 마음 다졌고// 잠들 때에도/ 잠깰 때에도/ 먹고 마시며/ 사람을 만날 때에도// 햇살을 모르는 아침 이슬을/ 님께 기도하듯/ 떨면서 받치고 있는 풀잎에/ 스치는 맨살의 감촉으로/ 님을 알려 하였으나// , 나는 어느새/ 비틀거리는 삶이 되어/ 풀잎에 맨살 스치기도 전에/ 내 뜻 따라 사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서 죽어가고 있다/ 니나노 바람으로 거듭거듭/ 죽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 김형영

엄마 젖가슴에 안겨/ 옹알거리는 아기,// 눈을 감아도 수호천사를 만나/ 무슨 생각을 나누는지/ 연신 꽃피는 웃음,// 거짓이라곤 눈곱만큼도 섞이지 않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이제 막 태어나는 말,// 좋은 시인의 시도/ 태어난 지 세이레쯤 된/ 아기 옹알이 같은/ 눈에 보이는 음악이어라//

 

나이 40/ 김형영

돼지 눈에는/ 부처님도 돼지로 보이는 것이라고/ 노스님 말씀에/ "그야 그렇겠지요"/ 무심코 머리 끄덕였는데// 그때 나이 곱절 가까운/ 40이 넘은 오늘에/ 하늘의 별을 새듯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한 말씀만 같아/ 밤낮없이 후회롭다.//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 개도 돼지도/ 그네 새끼들까지도/ 다 안쓰럽고 가련해/ 사람같이만 보이나니/ 어제의 나같이만 보이나니//

 

나무 안에서 / 김형영

산에 오르다/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가자./ 하늘에 매단 구름/ 바람 불어 흔들리거든/ 나무에 안겨 쉬었다 가자.// 벚나무를 안으면/ 마음속은 어느새 벚꽃동산,/ 참나무를 안으면/ 몸속엔 주렁주렁 도토리가 열리고,/ 소나무를 안으면/ 관솔들이 우우우 일어나/ 제 몸 태워 캄캄한 길 밝히니//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 

 

산 책 / 김형영

아침마다 숲길을 거닙니다./ 움 트고 새 날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숨구멍은 저절로 열리고/ 가지에 바람이 흔들립니다.// 발걸음이 빨라지면/ 나무들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속상한 날이건 즐거운 날이건/ 그런 건 다 내뿜어 버리고/ 제 생명의 입김 실컷 마시라 합니다.// 숲 속 한 시간으로/ 하루 스물 세 시간이 평안합니다./ 어제 마신 술은 냉수가 되고/ 피운 담배도 안개처럼 걷힙니다.// 오늘도 숲길을 거닙니다./ 비가 오면 비와 더불어/ 눈이 내리면 눈과 더불어/ 바람이 불면 바람과 더불어/ 나는 날마다 오늘입니다.//

 

헛것을 따라다니다 / 김형영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 헛것을 따라다니다 : 「열왕기 하권」17장 15절.

 

화살시편 2 올빼미 / 김형영 

정말 못당하겠네/ 밤을 낮이라 하고/ 낮을 밤이라 우기는 놈들// 올빼미 너냐?/아니면/ 너 말고/ / 누구냐?// 나냐?//

 

화살시편 12 자유 / 김형영

공초 오상순 선생은/ ‘자유가 날 구속했다/ 명대사를 남기고 떠나가셨다// 꽁초 연기 붙잡고//

 

화살시편 17 밤길 / 김형영

너무 어두워/ 찾은 길도 밤길이다// 어디 길동무 없소?//

 

화살시편 22 -꿈이 자라는 곳 / 김형영

빈 절터/ 쑥대밭// 거기서도 꿈은 자라고 있구나//

 

화살시편 28 정의 / 김형영

정의는 정의를 맏지 않는다/ 정의에 관심이 없다./ 정의는 없이 게시기에/ 정의를 사랑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정의를 앞세우지 마라./ 누구든 정의로 가두지 마라./ 바람이 불면 잎새 사이로/ 한 눈 하늘이 깜빡일 뿐/ 정의는 정의를 모른다.//

 

통회(痛悔)시편 1 / 김형영

주님, 저를 죽이지 마소서./ 화가 나시더라도/ 흐느끼는 이 소리 들으소서.// 뼈 마디마디 경련이 일고/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이 목숨 살리소서.//

 

통회시편 6 / 김형영

뱀보다 더 아름답게 우는 것은 없다/ 뱀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를 동여매며 운다/ 땅 밑으로 밑으로 달아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통곡할/ 거룩한 손도 없이/ 뱀은 스스로를 동여매며/ 온몸으로 운다.// 뱀은 나의 오랜 친구로서/ 친구인 나는 뱀에게 말했다/ 가거라, 울부짖음아/ 죄지은 내 심장의 고동과도 같고/ 습관처럼 가슴을 치는/ 내 더러운 손 같은 울부짖음아/ 가거라, 사람들이 모여/ 너를 죽이려고 막대기를 들기 전에.// , 뱀이여/ 너는 아름다워 죄를 짓는구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 김형영

<1>/ 누구신가/ 거기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개선가를 부르며 하늘고 오르신 이여!//

<2>/ 작은 산언덕 솔뫼에서 태어난 생명 중의 생명/ 박해의 회오리바람에 싸여/ 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열 여섯에 성소를 받고 걸어서 마카오까지 가신 이,/ 당신은/ 누구신가/ 겨레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이 한 생각 화두로 삼고/ 맨몸으로 걸어 걸어 몇 백리,/ 못 먹고 지쳐 눈구덩에/ 반나마 죽어 잠이 들 때는/ 잠이 들 때는/ "일어나 걸어라"는 말씀으로 살아나신 이,/ 당신은/ 누구신가/ 수호천사 라파엘 작은 목선 하나로/ 성난 바다에 돛대도 키도 던져 버리고/ 상해를 떠난 지 42/ 조국을 떠난 지 10/ 이 나라 최초의 목자가 되어 돌아오신 이,/ 흩어진 양 떼를 돌보려 찾아왔으나/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짖어대는 개들'/ 우글대는 그런 조국을 더더욱 사랑하신 이,/ 당신은/ 누구신가/ 선교사의 입국로를 열어 주려고/ 연평도 앞바다 등산곶에 갔다가/ 그만 그 길로 끌려가 오히려 쇠사슬에 손발이 묶여/ 신문과 회유와 고문받기 40여 차례 "나는 죽여도 뒤이어 또 신부가 올 것" 이라고/ 오늘의 천여 명 신부를 예언하신 이,/ 당신은/ 누구신가/ 신부되어 일곱 달 만에/ 사학 죄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해괴한 피의 제사의 제물이 되신 이,/ 북한산과 도봉산과 관악산이 굽어보는/ 한강의 새남터 모래밭에서/ 비웃음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때/ "여러분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한 것" 이라고/ 하늘과 땅에 외치신 이,/ 당신은/ 누구신가/ 마침내 옷이 벗겨지고/ 얼굴에는 회칠당하고, 화살이 두 귀에 꽂혀도/ 스스로 꼿꼿이 세운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여덟 번 내리쳐도/ 스물 여섯 살의 눈빛, 캄캄한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보다 더 눈부시던 이,/ 당신은/ 누구신가/ 마지막 외침의 어떤 것은 바람되어 떠돌고/ 어떤 것은 먹구름 속 천둥이 되고/ 또 어떤 것은 별이 되신 이여!//

<3>/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제 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변칙없는 하느님 법칙을 따르신 이여,/ 이제 모래밭에 뿌려진 피 다시 생각하며/ 150년으로 울부짖나니/ 승리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당신 아니 죽어 살았었더면 누군들/ 믿음의 얼굴로 살다 죽을 수 있으리오/ 희망의 얼굴로 살다 죽을 수 있으리오/ 사랑의 얼굴로 살다 죽을 수 있으리오//

 


 

김형영(1944~2021) 시인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과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각각 당선해 문단에 나왔다.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강은교·윤후명·정희성 시인 등과 1969년 ‘칠십년대’ 시 동인을 결성해 1973년 제6집까지 동인지를 발행했으며, 2012년에 이름을 ‘고래’로 바꾸어 동인 활동을 재개했다. 1970년부터 30여 년 간 월간 <샘터>에 근무했다. 은퇴 뒤에는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발행하는 잡지 <들숨날숨>의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1973년 첫 시집 <침묵의 무늬>를 낸 것을 비롯해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다른 하늘이 열릴 때> <홀로 울게 하소서> <화살시편> 등의 시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형영 시인, 시선집 내는 날 하늘로…시신은 기증

1970년대 초반 ‘칠십년대’ 동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원로 시인 김형영이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문학과..

www.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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