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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정록 시인

부흐고비 2021. 5. 2. 18:57

뒷짐 /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짐 / 이정록
기사양반,/ 이걸 어쩐다?/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나만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노석으로 바꿔야겠슈./ 영구차 끌듯이/ 고분고분하게 몰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고분이니께.//

실패 / 이정록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 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중 실속 있는 겨./ 다 살고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 번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 겨//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그믐달 / 이정록
가로등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날이 올 거여/ 지나고 보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 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이웃 /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 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연탄 / 이정록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게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나뭇가지를 얻어 쓰려거든 / 이정록
먼저 미안하단 말 건네고/ 햇살 좋은 남쪽 가지를 얻어오너라/ 원추리꽃이 피기 전에 몸 추스를 수 있도록/ 마침 이별주를 마친 밑가지라면 좋으련만/ 진물 위에 흙 한 줌 문지르고 이끼옷도 입혀주고/ 도려낸 나무그늘, 네 그림자로 둥글게 기워보아라/ 남은 나무 밑동이 몽둥이가 되지 않도록/ 끌고 온 나뭇가지가 채찍이 되지 않도록//


꽃살문 / 이정록
꽃에는 정작 방년(芳年)이란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피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칼자국,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자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 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마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 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새김하고 있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염화(拈華)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미소(微笑) 있겠는가?/ 풍경소리며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 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 가시게나//

식구 / 이정록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 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비 그친 뒤 / 이정록
안마당을 두드리고 소나기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 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끼자 울 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가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몸에 초록 침을 맞은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놓은 자리로 엄살엄살 구름 몇이 다가간다 개구리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병따개는 입심이 좋다 / 이정록
동시 한 편 써서//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눈사람// 눈사람은 살 빠지면 죽는다/ 햇살 다이어트가 가장 위험하다] 자꾸만 바닥에 떨어진다고/ 식구가 자석 병따개로 눌러놓는다/ 병따개 뒤로 첫 글자만 숨는다/ [사람// 사람은 살 빠지면 죽는다/ 살 다이어트가 가장 위험하다]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냉장고가 쉴 새 없이 심호흡 한다/ 가만 보니 병따개는 무쇠이빨을 갖고 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헛말이다/ 병따개는 통니 하나가 생명이다/ 이 빠지면 죽는다//

도깨비기둥 / 이정록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 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 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 길 물 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먼 하늘주소까지.//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 이정록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 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풀뿌리의 힘 / 이정록
불구덩이를/ 지나온 기왓장// 그 불기운을 빨아올려야겠다고/ 대웅전 기와지붕 위에서 풀들이 자란다// (뿌리가 들린 生은/ 불기운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저 허공에 떠있는/ 풀뿌리의 힘으로// 부처의 이마엔 주름이 없다//

나에게 쓰는 편지 / 이정록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다시 나에게 쓰는 편지 / 이정록
콩나물은/ 허공에 기둥 하나 밀어 올리다가/ 쇠기 전에 머리통을 버린다/ 참 좋다// 쓰라린 새벽/ 꽃도 열매도 없는 기둥들이/ 제 몸을 우려내어/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좋다 참/ 좋은 끝장이다//

대추나무 / 이정록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구부러진다는 것 / 이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햇살의 경문(經文) / 이정록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절마당 가득한 저 기왓장들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새를 꿈꾸었던 영혼의 깃털마다 가족들의 이름과 골목길 복잡한 주소들이/ 적혀 있다/ 커다란 새 한마리가 갈비뼈 뒤편에 업장을 서려물고 있는 것이다/ 날고 싶었던 것들의 극락왕생을 낙서하지 마라 목어처럼 텅 빈 새의/ 뱃속에 알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법당문이나 환하게 열어제쳐라/ 그리하여 그 새 똥구멍으로 들이치는/ 찬란한 햇살에 눈이나 부비거라//

산 하나를 방석삼아 / 이정록
단풍나무 아래에/ 돼지머리가 버려져 있다/ 돼지는 일생을/ 서 있거나 누워 지낸다/ 앉아 있을 경우는, 오직/ 새끼를 낳은 암놈이/ 앞발만 세우고 비척거릴 때다/ 돼지머리는/ 제대로 한번 앉아보려고/ 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 선지피는/ 단풍잎이 다 들이마셨나/ 도끼가 지나간 자리로/ 산 하나를 꿰차고 있다/ 잘린 목으로/ 일찍 떨어진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해열제 / 이정록
그대보고 싶을수록/ 늪이 생각납니다/ 늘 젖어 있는 뿌리/ 비늘마다 물이끼 푸르른 물고기들/ 지느러미를 세운 채 알을 낳고/ 넓은 이파리 위론/ 배때기 하얀 개구리가/ 깜짝 뒷다리를 감추는 오후/ 하늘 한 자락/ 콱 베어 물고 우거지는 늪/ 깊은 가슴을 생각합니다/ 내 마음속/ 악어의 이마가 펄펄 끓습니다//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 이정록
눈도 녹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양달을 잘 아시는가/ 나물을 뜯으려고 바구니를 내려놓은 자리/ 거기다, 그곳이 햇살의 곳간이다/ 갈퀴 손으로 새순을 어루만지자/ 오물거리던 햇살이 재게 할머니의 등에 오른다/ 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르자/ 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 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 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 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 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 항아리 숫돌에 녹물을 지운 나물 칼/ 응달은 자신의 남은 빛을 그 칼날에다 부려놓고/ 방금 새순을 바친 풀뿌리로 스며든다/ 우글거리던 햇살의 도가니, 그 밑자리로/ 응달은 겨울잠 자러 가는 실뱀처럼 꼬리를 감춘다/ 양달은 지금 어디에다 아랫목을 들였나/ 아기가 갑자기 제 트림에 놀라 운다/ 아기의 뱃속 어딘가에서/ 빙벽 하나 무너져내렸는가//

내 품에, 그대 눈물을 /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랜지 속 빵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 슬픔이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우표 / 이정록
우표의 뒷면은/ 얼어붙은 호수 같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구멍까지 뚫어놓았다// 침이라도 바를라치면/ 뜨건 살갗 잡아당기는 것까지/ 우표는 쩔걱쩔걱한 얼음판을 닮았다// 우표와 마주치면 언제라도/ 혓바늘 서듯 그대 다시 살아나/ 지난 몇십 년의 겨울을 건너가고 싶다/ 꼬리지느러미 좋은 화염의 추억에 초고추장 찍어/ 아, 그대의 입천장 들여다보고 싶다// 편지봉투를 불자, 아뜩하게/ 얼음 깨지는 소리며 빙어 뛰어 오르는 소리 올라온다/ 불면의 딱따구리가 내 늑골에다 파놓은 구멍들/ 그 어두운 우체통에 답장을 넣어다오// 저 얼음 우표가 봄으로 가듯/ 나의 경계도 소통을 꿈꾼다// 우표의 울타리, 빙어알만 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 우표의 뒷면에 혀를 댄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이 사금파리처럼 싸하다// 그대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 한/ 성에 가득한 혓바닥, 그 끝자리에/ 언 목젖을 가다듬는 내가 있다//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 이정록
버스는 떠났네/ 처음 집을 나온 듯 휘몰아치는 바람/ 너는 다시 오지 않으리, 아니/ 다시는 오지 마라 어금니 깨무는데/ 아름다워라 단풍든 물푸레나무/ 나는 방금 이별한 여자의 얼굴도 잊고/ 첫사랑에 빠진 듯 탄성을 지르는데/ 산간 멀리서 첫눈이 온다지/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 그 황금 이파리를/ 수많은 조각달로 고쳐 읽으며/ 하느님의 지갑에는 저 이파리들 가득하겠지/ 문득 갑부가 되어 즐겁다가/ 뚝 떼어서 함께 지고 갈 여자가 없어서/ 슬퍼지다가, 네 어깨는 작고 작아서/ 내가 다 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늦가을/ 막차는 가버렸고, 포장마차는 물푸레나무 그림자로 출렁이는데/ 주인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흰 뼈를 꺼내놓는데/ 비누라면 함께 샤워할 네가 없고/ 숫돌이라면 이제 은장도는 품지 않아/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둥글게 닳아버린 저것이/ 그냥 지상의 도마 위로 솟구쳤겠나/ 그래 저것을 나는 난파밖에 모르는 조각배라 해야겠네/ 너에게 가는 마지막 배라고 출항표에다 적어놓아야겠네/ 나에게도 함께 노 저어 갈 여자가 있었지/ 포장마차는 사공만 가득한 채 정박 중인데/ 물푸레나무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사라져도 되겠네 먼바다로/ 첫눈 맞으러 가도 되겠네//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 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 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사랑 / 이정록
연초록 껍질에/ 촘촘 가시를 달고 있는/ 장미꽃을 한 아름 산다.// 네가 나에게 꽃인 동안/ 내 몸에도 가시 돋는다.// 한 다발이 된다는 것은/ 가시로 서로를 껴안는다는 것// 꽃망울에게 싱긋/ 윙크를 하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그래, 사랑의 가시라는 거/ 한낱 모가 난 껍질일 뿐// 꽃잎이 진 자리와/ 가시가 떨어져 나간 자리, 모두/ 눈물 마른자리 동그랗다.// 우리 사랑도, 분명/ 희고 둥근 방을 가질 것이다.//

눈사람의 상처 / 이정록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삽질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혈거시대 / 이정록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꼰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줄탁 / 이정록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청국장 / 이정록
영덕식당 아주머니가/ 청국장 백반을 이고 온다/ 신문지 한 가운데 둥근 투가리에서// 김이 폴폴 오르고, 그걸 맛보겠다고/ 하느님이 눈발이 되어 뛰어내린다/ 하느님도 무게가 제법인지/ 아주머니가 허리를 펴고 멈춰 선다/ 여관 신축공사장 삼층으로 오르면/ 눈발 하느님은 국물도 없을 것이다/ 시멘트 범벅인 장화 하느님들이// 단체손님을 받을 제일 큰방에서/ 신문지를 확 걷어치울 것이기 때문이다/ 삽 자루나 질통에 이마를 부딪힌 채/ 선배님들의 입 속으로 후룩후룩 넘어가는/ 청국장을 아름다이 바라볼 것이다/ 그들 가운데 젊은 운동화가/ 컵라면 빈 그릇에 남은 반찬을 쓸어 담아/ 소주 됫병 옆에 밀어놓는다/ 저걸 한 모금 들이켰으면 좋겠다고/ 눈발 하느님이 몸서리를 치자/ 크윽, 눈길도 없이 녹아버린다//

기러기떼 / 이정록
地上과의 인연/ 더 차가워져야 한다// 활시위처럼 몸 당겨/ 겨울로 간다// 작살 같으 대오로/ 하늘을 끌고 간다// 몸 비트는 하늘/ 깃털처럼 白雪 쏟아진다//

대통밥 /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풋사과의 주름살 / 이정록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목 / 이정록
잔 바람에도 바닥으로 쏠리는/ 담장 위 호박 넝쿨을 위해/ 마루 밑을 뒹구는 박카스/ 작은 병 속에 물을 담는다/ 이제 호박 줄기 상하지 않도록/ 사료푸대 오려 붕대처럼 감고/ 광목실로 묶는다/ 호박 줄기 지긋 잡아당기며/ 고드랫돌처럼 작은 병들이 매달린다/ 피로 회복과 자양 강장이/ 팽팽하게 힘 겨루기를 시작한다/ 아슬아슬 균형의 틈을/ 비집고 가는 오른손// 다행이다, 모가지는/ 묶어 매달기 알맞게 잘록하다/ 어둠을 짚어 나가는, 덩굴손을 위하여/ 네 목과 내 목은 수평으로 짱짱한가//

마디 / 이정록
마디와 마디 사이에/ 두 가닥씩 칼금이 그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나무는/ 그 등고선의 기울기와 간격으로/ 하늘 높이 몸을 디민다// 새가 대나무 꼭지에 앉는다/ 수많은 마디들이 새의 무게를 갖고 논다/ 또한 새떼의 수많은 뼈마디가/ 대나무를 흔들며 합창을 한다// 바람의 마디와 하늘의 마디도/ 대밭, 둥근 방으로 몸을 퉁기며 노닌다// 시끌벅적 앞다투는/ 댓이파리들의 노래 위에 눈이 쌓이면/ 대나무는 간혹 몸을 꺾는다/ 백설의 마디며 물의 마디를 모르는/ 이파리들의 고성방가들// 대숲 속에는 마디를 모르는 것들이/ 바닥을 덮는다, 켜켜이/ 썩어가는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하얀 대뿌리, 그 잘디잔 말씀이 뻗어나간다//

아름다운 녹 / 이정록
고목이 쓰러진 뒤에/ 보았다, 까치집 속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그 어떤 옷걸이가 새와 함께/ 하늘을 날아봤겠는가, 어미새 저도/ 새끼들의 외투나 털목도리를 걸어놓고 싶었을까/ 까치 알의 두근거림과 새끼 까치들의/ 배고픔을 받들어 모셨을 옷걸이,/ 까치 똥을 그을음처럼 여미며/ 구들장으로 살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둥우리 속 마른 나뭇가지를/ 닮아보고 싶었을까/ 한창 녹이 슬고 있었다/ 혹시, 철사 옷걸이는/ 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열매를 꿈꾸는 새 / 이정록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

저녁 / 이정록
곧 어두워지리라/ 호들갑 떨지 마라/ 잔 들어라,/ 낮달은 제 자리에서 밝아진다//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공주사범대학 졸업.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 『정말』이 있으며, 장편동화로 『귀신골 송사리』 『십 원짜리 똥탑』가 있다. 대전일보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 문태준 시인은 이정록의 시에서 곰살가운 살내가 풍긴다면서,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옷을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고 평했다.

이정록 “시는 교통사고나 상처, 동시나 동화는 약국이나 병원 침대” | YES24 채널예스

시인은 전방위로 활동한다. 시집 외에 동시집, 그림책, 동화책부터 최근 청소년시집까지 꾸준히 발표했다. 교사로도 오래 활동한 시인에 대해 “참 부지런하시다”고 말한 유병록 시인이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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