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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안진 시인

부흐고비 2021. 5. 5. 08:19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

 

벌초, 하지 말 걸 / 유안진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를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나//

母子 / 유안진​
찬물에 기름 돌 듯/ 외로운 마음도/ 네 고사리손 잡으면/ 힘이 솟구치고​// 고운때 묻은/ 네 발바닥에/ 어미는 눈물 닦고//​ 문밖에는 눈바람이/ 울부짖어도/ 자면서도 키룩키룩 웃는/ 아가​// 우리 모자/ 꼬옥 껴안고/ 섣달 그믐 추운 밤을/ 따뜻이 가자.//

바늘에게 바치다 / 유안진
어둠에 저항하는 한 송이 작은 꽃/ 30촉 알전구 아래에서/ 바늘 귀를 더듬던 어머니// 세상으로 뚫린 유일한 숨구멍으로/ 의식주를 실어 나르던 낙타의 바늘에게//

아버지의 마음 / 유안진
휴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씀씀이가 하도 헤퍼 용돈 적게 줬더니/ 등록금을 쓰고 휴학해버렸다고/ 돈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식 아까워서 그랬다는데// 맞다/ 하느님 아버지도/ 내가 아까워서/ 낡은 날 더 망치게 될까 봐/ 달라는 대로 즉각 다 주시진 않는 거다//

말하지 않은 말 /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지옥이 필요했다 / 유안진
결혼생활 70여 년을/ 어떻게 살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는/ 9순의 노인 부부// 왜 동고(同苦)가 먼저냐고 묻자/ 지옥(地獄)부터 살아서/ 지금 동락(同樂)하는 천당에 올 수 있었지/ 지옥을 안 살고 어찌 천당에 왔겠냐는/ 아흐 동동다리//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멀리 있기 / 유안진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四大五常, 루머가 끝나다 / 유안진
피크닉이 끝난 듯/ 다들 식당으로 들어가 잔을 기울이며 밥을 먹고/ 웃고 떠들다가 올라탄 차 안에서 단잠에 떨어졌다/ 태어나 살다 죽었다는 것이 괜한 소문일 뿐// 사랑했어도 아무도 사랑한 적 없고/ 낳아 키웠어도 자식 둔 적 없고/ 교회를 들랑거렸어도 신(神)을 믿어본 적 없고/ 오래 살았어도 살았던 흔적 없는/ 엊그제 죽었어도 죽은 흔적 없는/ 다만 한 토막 루머(Rumor)일 뿐// 지 화 수 풍(地火水風) 사대(四大)가 모인 사람 몸뚱이는/ 죽으면/ 피부와 살과 힘줄과 뼈는 흙으로/ 침 눈물 피는 물로/ 따뜻한 체온은 불로/ 성품은 바람으로 돌아간다는데/ 시대를 거느리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은/ 마음이라는데, 다들 돌아간 거기는 어디쯤인가// 입에서 입으로/ 공중에서 허공으로 잠깐 떠돌고 만/ 소음(騷音)일 따름/ 이명(耳鳴)일 따름/ 엉뚱한 냇물만 오염시킨 한 움큼 먼지일 따름인가//

꿈 /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눈물 / 유안진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몰랐다 / 유안진
히말라야 오르는 길/ 어느 외딴 高山마을 밖/ 비어있는 마을 어귀, 비어있는 길 가운데/ 새끼 나귀 한 마리가 혼자 서 있었다/ 고삐 매지 않은 채로 마냥 서 있었다/ 올라갈 때 서 있더니/ 내려올 때도 서 있었다/ 행복한 눈빛으로 무작정 서 있었다/ 한참을 내려와 돌아다보니/ 도포자락 같은 흰구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神을 기다리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충고 / 유안진
마음아/ 음지식물같이/ 창백한 내 마음아// 물에 물 탄 듯이/ 살아가는 일도/ 내게는 숨이 차다/ 벅차고 힘겨웁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거리 거리의 저 웃음들/ 저 바쁜 웃음 속에/ 끼여들어봐라// 웃음이든/ 노래이든/ 지저귀어봐라.//

눈 내리는 날의 일기 / 유안진
눈 내리는 창가에 서면/ 그리워집니다 다시금// 저 순수와 정직의 꽃가루/ 가득히 쓰고 달려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어느 낯선 거리에서라도/ 객쩍은 웃음으로 마주치기를// 눈 내리는 창가에 서면/ 더운 눈물 데불고 찾아오는 이/ 간절한 그 누구 아직 있습니다.//
밤마다/ 박쥐떼 푸득거리는/ 추억의 동굴 속// 허깨비의 거미줄을/ 말끔히 걷어내고/ 등燈을 돋운다.// 친구여 힘을 내자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 들창을 열고 보니/ 눈 속에 나무들 몰려와 섰다.//
이 정결한 시간에는/ 너를 생각하며/ 인적 드문 길을 걷는다.// 옷깃을 세워 입은/ 뒷모습을 대한 듯// 둥구나무 높은 덩치가/ 우뚝 막아선다.//
천지가 숨죽인 겨울날에/ 쏟아지는 눈발을 지켜본다// 돌부리도/ 마른 그루터기도/ 눈 속 깊이 파묻힌다// 그렇다/ 잊음도 아름다운지고// 오늘은 흰 눈 속에/ 이름 하나 묻어두자//
부르면 눈발을 타고/ 와 닿을 이름아// 명년明年 새봄이 오거들랑/ 목청 풀린 시냇소리/ 촉 트는 갯버들로// 찾아오라고/ 간곡히 일러두고/ 돌아서는 지금은// 저무는 섣달/ 눈발도 굵은/ 어느 저녁답.//

눈사람 /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사리(舍利) / 유안진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다보탑을 줍다 / 유안진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구리동전/ 그렇게 살았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봄 /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봄비 한 주머니 / 유안진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봄의 미행 / 유안진
눈 내린 들길을/ 혼자 가는 스님을/ 발자국 들이 묵묵히 따라 걷고/ 괜히 심통 난 바람이/ 발길질로 따라가는/ 겨울나그네들을/ 한 오 리쯤이나 뒤쳐져서/ 아지랑이 새봄이/ 까치발로 미행한다.//

가을 타고 싶어라 / 유안진
벤치에 낙엽 두 장/ 열이레 달처럼 삐뚜름 멀찍이 앉아/ 젖었다 말라 가는 마지막 향기를 나누고 있다.// 가을 타는 남자와 그렇게 앉아/ 달빛에 젖은 옷이 별빛에 마를 때까지/ 사랑이나 행복과는 가당찮고 아득한/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 환경재앙이나 혤리혜성을/ 까닭 모를 기쁨으로 진지하게 들으며/ 대책 없이 만족하며/ 그것이 고백이라고 믿어 의심 없이/ 그렇게 오묘하게 그렇게 감미롭게.…//

가을 /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가을 편지 / 유안진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낙엽 쌓인 길에서 / 유안진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겨울을 기다리며 / 유안진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꽃 지는 날에 /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서리 꽃 / 유안진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 꽃/ 내 이름을 어쩔래//

동백꽃 /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선운사 동백꽃 / 유안진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라고//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비를 맞아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罪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들국화 / 유안진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구절초 /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갈대꽃 /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댕기풀 / 유안진
어쩔 셈이냐고/ 시절은 다시 한 번/ 한사코 푸르러// 무당의 초록 활옷엔/ 신들린 휘파람 소리// 햇볕에 익었으면 역사가 될 얘기들/ 빛 바래어 전설이 되는 여름 달밤에는// 기슭마다 몽달혼 떼지어 수런대고/ 댕기풀도 애띤 얼굴/ 아우성치듯 꽃피더란다.//

멀리 있기에 / 유안진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세한도 가는 길 / 유안진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힌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송년에 즈음하면 /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할 수 있는 용기 /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아침 기도 / 유안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 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 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녁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착해지는 날 / 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휘파람을 불어 다오 / 유안진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 다오//

약속의 별 / 유안진
Ⅰ/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Ⅱ/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Ⅲ/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Ⅳ/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Ⅴ/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작정 / 유안진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조각달 / 유안진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키 / 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황홀한 거짓말 / 유안진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 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거짓말로 참말하기 / 유안진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孤兒요/ (한 신문에 실린 이 풍자로 관련자들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소련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대화였단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니?/ 한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투르먼 대통령한테 뺨맞고 싶어요/ 깜짝 놀란 어른이 까닭을 묻자, 그 어린이는/ 내가 미국 아이이거나 투르먼이 우리 대통령일 테니까요/ (이 풍자만화의 관련자들은 전원 체포되었다고 한다)// 어느 위성국가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내 방송이었단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비행기는 곧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합니다/ 담뱃불을 끄고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세요/ 그리고 손목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주세요/ (이 풍자만화로도 관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체포할수록 풍자의/ 인기가 급상승될뿐더러, 포화 상태의 수용소 비용을 줄이려고/ 기 수감자들도 다 석방했는데, 이는 후로시쵸프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놀랍고도 기발한 발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서신 / 유안진
이른봄 날씨처럼/ 변덕스런 꽃부스럼 돋아나는 발진發疹으로/ 모진 신고를 견디어야 했습니다만// 만약/ 그대와 내게 용기가 있어/ 여름날 장마처럼 오래오래 울더라도/ 여름 대낮 태양 같은 사랑을 했더라면/ 죽은 나뭇가지에도 잎이 우거지고/ 새들이 그 품에 깃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성과 정열을 잘 다스려/ 가을 햇볕같이 성숙된 열정을 이어왔더라면/ 지금쯤/ 가을 이삭 같은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임이여/ 어쩌다가 우리는/ 서로가 너무 강하고 몸만 도사리고/ 자제와 분별로 싸늘히 식히고 식힌 나머지/ 소한小寒 대한大寒 추위를 불러오고 말아/ 얼음장 두꺼운 가슴바닥에/ 실낱같이 흐르는 그리움 한 줄기로/ 삼동三冬을 어리석게 살고 있을까요.//

옛날 애인 / 유안진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무어라고 썼을까? / 유안진
간음 현장의 여인을 끌고 와 물었다/ 율법대로 돌로 치리이까?/ 말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쓰고/ 일어선 예수는, 죄 없는 이부터 먼저 치라/ 고 하며, 다시 땅바닥에 썼다/ 1. 대단하지 않소, 혼자서도 간음할 수 있다니?/ 2. 같이 잔 남자는 왜 안 끌고 왔오?/ 3. 당신들은 재수 좋아 안 들켰을 거 아니요?/ 4. 당신들 딸이라면 어떻게 하겠오?/ 몇 번이 정답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둥근 세모꼴 / 유안진
비트겐슈타인만큼 펄펄 끓는 정오/ 캔터키 프라이드 인간이 되는 중이다/ 메밀베개 베고 엎어졌다 일어났다/ 시원해질까 하고/ 메밀꽃 메밀꽃 하는데/ 이효석의 메밀밭이 제 발로 달려온다/ 까만 세모꼴 속에 시침떼고 들어앉은/ 동그랗고 하얀 알갱이까지/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나물까지 군침 돌더니/ 이마머리 자욱 핀 메밀꽃밭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가 뛰어온다/ 삼복 여름-메밀밭.//

운명, 조롱당하다 / 유안진
콩 심은 콩 밭에서 팥을 더 추수한다/ 뱁새가 황새를 앞질러서 날고 있다/ 인삼 밭에는 민들레가 더 무성하다/ 통쾌한 21세기/ 팥으로 매주 쑤고, 황새보다 뱁새, 인삼보다 민들레래.//

시인(詩人)의 빈소(殯所)에서 / 유안진
모인 우리는 오늘 밤 하늘에 새별이 돋을 거라며/ 미소 환한 영정 앞에서 산문시와 시 잡지의 업적을/ 기리고 기리다가 저절로 추억으로 들어갔다// 한참 전에 떠난 시인 권탱고와 이가린스키에 이어 정지루박 시인이라고/ 달려와 같이 한 이디스코, 오부르스, 유삼바, 신무드, 문막춤, 훌라초이, 유소시얼리스트 등등/ 시인들의 공인된 별명을 모르면 간첩이라던, 에피소드를 웃어가며 슬퍼했다// 말당 서정주 선생님부터 정한막님 김남작님 유안율과 진달자 시인까지/ 대가 선배님들 끄트머리 끝 끝에 이어지는, 버르장머리 없이 어리광도 피우면서/ 시단 한 생애의 소득이라곤/ 왜인지도 모르게 얻어진 별명뿐이라고 울음을 울었다/ 그리고는 옷깃 여미어 별이 되신 선배님들마다/ 너무 겸손하여 스스로 빛내지 않아서/ 불타버리지 않는 밤하늘과 여기 우리 세상이 멀쩡하다고// 나 또한 과학적 도덕적 철학적 문학적…을 갈팡질팡하다가/ 드디어는 지극히 종교적이 되어 잔을 들어 스스로를 감사했다/ 신(神)이 못되는 시의 다행을/ 지금껏 써온 나의 시(詩) 나부랭이가/ 말씀이 될 수 없는 천만다행(千萬多幸)까지를.//

시간 / 유안진
현재現在는/ 가지 않고 항상 여기 있는데/ 나만 변해서/ 과거過去가 되어가네.//

한국남편 / 유안진
에덴동산이 한국 땅에 있었다라면// 안타깝다// 아담이 한국 남자였더라면/ 절대로 아내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말 되게 말 안 되게 / 유안진
먹기 싫으면 밥이 코자고 싶어한다 하고/ 찾아도 없는 양말은 그네 타러 놀이터에 갔다는/ 세 살 손자의, 물활론적 생각과/ 전문식電文式 화법은/ 초문법적 탈문법적/ 거꾸로 어순에 과감한 생력이다/ 세 살 때가 시인 나이, 말도사다.//

안경알만 바꿨는데 / 유안진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날아다니고/ 허공 속에는 새들이 헤엄쳐 다닌다/ 나 또한 물과 허공 사이를 물구나무서서 다닌다// 질겁하고 달려가 따졌더니/ 안경점 주인은 고래고래 삿대질이다/ 제대로/ 똑바로/ 잘 보이게/ 주문했지 않았느냐고.//

미완에게 바치는 완성의 제물 / 유안진
까마귀/ 울음 두 점 떨구고 간 된서리 하늘아래/ 꽃필 가망 전혀 없는 구절초 봉오리/ 위에, 떡갈나무 잎 떨어졌다, 빗나갔다/ 또 한 잎 떨어졌다, 또 빗나갔다/ 다른 잎이 떨어져 반만 덮였다/ 또 다른 잎이 떨어져도 덜 덮였다/ 어디선가 한 잎 날아와 다 덮였다/ 도토리 빈 깍지, 저도 뛰어 내렸다/ 바람불어도 날아가지 않겠다.//

업적 / 유안진
산으로 갔는데 강이었고/ 바다로 떠났는데 사막에 와 있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훗날 거기 찾아/ 거꾸로 로꾸거로 잘팡질팡 반세기/ 매미의, 귀뚜라미의, 알프래드 드 뮈세의/ 평생업적이 울음이었다 해서/ 헤매임도 업적이 되나요?//

아직도 꿈꾼다 / 유안진
바다로 떠나는 새끼연어들을 새끼붕어들도 뒤따라간다// 기러기 떼와 함께 까치 몇 마리도 시베리아로 떠난다 피서를 즐기려고// 제비 한 마리가 참새들과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가을볕을 쬔다 텃새가 되려고// 서리 허연 가지 사이 개나리 철쭉꽃이 드문드문 피었다 겨울꽃이 되려고// 가마우지 새는 물 속을 헤엄치고 싶어했고/ 날개를 꿈꾸던 다람쥐는 하늘다람쥐가 되었으니까.//

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느냐 / 유안진
녹음이 짙어지면 검푸르다/ 단풍도 진할수록 검붉다/ 깊을수록 바닷물도 검푸르고/ 장미도 흑장미가 가장 오묘하다// 검어진다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 높이를 거꾸로 가늠하게 된다는 것/ 창세전의 카오스로 천현으로/ 흡수되어 용해되어 버린다는 것/ 어떤 때 얼룩도 때 얼ㄹ룩일 수가 없어져버린다는 것/ 오묘 기묘 절묘해진다는 것인데// 벌건 대낮이다/ 흐린 자국까지 낱낱이 까발려서 어쩌자는 거냐/ 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은 칠흑 슬픔/ 바닥 모를 용서의 깊이로 가라앉아/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검은 혁명을 음미해보자/ 암흑보다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

잉여 휴식시간의 자율학습 노트 / 유안진
만리를 달려온 바람에 머리채나 빗질하고/ 천리를 달려온 강물에 손발이나 씻는 것이/ 미안스럽다가// 하필이면 지구에만 붙어 살아야 하고/ 쉬지 않고 돌고 있는 지구에 붙어살면서도/ 멀미하지 않는 것이 이상스럽다가// 올 겨울은 너무 추워/ 따뜻한 땅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죽어버린 이들의 용단이 부럽다가// 소원이 있으면 기도가 생겨나고/ 기도에는 늘 피눈물이 따르는/ 짧고도 지루한 인생을/ 손톱 발톱 땀나게 살다니/ 지구를 집어 물수제비 뜨고 싶네.//

어느 실직자의 증세 / 유안진
제 처 옆에 붙어 앉아/ 별나게 아첨하는 동창 땜에/ 닭살 돋는 부부들/ 참다 못한 친구몇이 불러내어 충고하자// "반년 넘도록 아내 이름이 생각 안 나서야/ 7년이나 쫓아다녀 결혼했는데 말야"//

백색 어둠 / 유안진
내 눈은 자주 햇빛으로 캄캄해지곤 한다/ 내 눈은 자주 어둠으로 밝아지기도 한다/ 햇빛에는 낯설어 겁먹고 눈멀어도/ 어둠은 빛깔과 냄새까지 친숙하고 다정해// 모든 밝음은 어둠에서 태어나고/ 어떤 어둠에도 빛은 있기 마련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치 그 높이에 기대어/ 그 안자락에 포근히 안도하고 싶은데// 나는 늘 내 두려움이 두렵지/ 최대치로 치솟아 눈멀어버리는 햇빛 공포도/ 한밤중에는 가라앉아 밝아지는 눈으로/ 정오와 자정을, 웃음과 울음을 갈팡질팡/ 거꾸로 로꾸거로 살다 말다 하느라고//

필요충분조건으로/ 유안진
지금 눈 오신다고/ 북촌 친구가 문자를 주었다/ 빗줄기를 내다보며 나도 답을 쳤는데/ 금방 또 왔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씻어낼 게 많고/ 그의 마을에는 덮어 가릴 게 많아서라고//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불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 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을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 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신이 돼 있을껄.../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침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에/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베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보고싶어지는 그는 때로 울고 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시킬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 가루가 끼었다고 해도/ 그의 숙녀 됨 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여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박사.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1965년 박목월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하』, 『물로 바람으로』, 『날개옷』, 『달빛에 젖은 가락』, 『영원한 느낌표』, 『월령가 쑥대머리』, 『누이』, 『봄비 한 주머니』, 『숙맥 노트』, 『둥근 세모꼴』, 『걸어서 에덴까지』, 『알고(考)』, 『기쁜 이별』, 『거짓말로 참말 하기』 등이 있음.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유심작품상, 구상문학상, 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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