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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영랑 시인

부흐고비 2021. 5. 8. 08:56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안치환의 노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거문고 / 김영랑
검은벽에 기대 선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 騏 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위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곳 몸둘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가야금 / 김영랑
북으로/ 북으로/ 울고 간다 기러기// 남방의/ 대숲 밑/ 뉘 휘여 날켰느뇨// 앞서고 뒤섰다/ 어지럴 리 없으나// 가냘픈 실오라기/ 네 목숨이 조매로아//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망각 / 김영랑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 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웬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 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달리는 행상(行喪)을 보랐고 있느니// 내 가 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메/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 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비운(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고만이라―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음을/ 아!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세기(世紀)는 그 죽음 다 망각하였지만//

바다로 가자 / 김영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우리는 바다 없이 살았지야 숨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꾸러져 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제주야 가고 오고/ 독목선(獨木船) 왜(倭)섬이사 갔다 왔지/ 허나 그게 바다러냐/ 건너 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삼 년 걸려도 큰 배를 짓자꾸나/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 배 타고 떠나가자꾸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닿은 저 수평선 뚫으리라/ 큰 호통 하고 떠나가자꾸나/ 바다 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 벗은 넋이로다 풀어놓인 겨레로다/ 가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가별/ 머리엔 끄득 보배를 이고 오렴/ 발 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천리를 올라온다 / 김영랑
천리를 올라온다/ 또 천리를 올라들 온다/ 나귀 얼렁소리 닿는 말굽소리/ 청운의 큰 뜻은 모여들다 모여들다.// 남산 북악 갈래갈래 뻗은 골짜기/ 엷은 안개 그 밑에 묵은 이끼와 푸른 송백/ 낭랑히 울려나는 청의동자(靑衣童子)의 글 외는 소리/ 나라가 덩그러니 이룩해지다.// 인경종이 울어 팔문(八門)이 굳이 닫히어도/ 난신외구(亂臣外寇)더러 성(城)을 넘고 불을 놓다./ 퇴락한 금석전각(金石殿閣) 이젠 차라리 겨레의 향그런 재화(才華)로다./ 찬란한 파고다여, 우리 그대 앞에 진정 고개 숙인다.// 철마가 터지던 날 노들 무쇠다리/ 신기한 먼 나라를 사뿐 옮겨다 놓았다./ 서울! 이 나라의 화사한 아침 저자러라/ 겨레의 새 봄바람에 어리둥절 실행(失行)한 숫처년들 없었을 거냐.// 남산에 올라 북한관악(北漢冠岳)을 두루 바라다보아도/ 정녕코 산(山) 정기로 태어난 우리들이라./ 우뚝 솟은 묏부리마다 고물고물 골짜기마다/ 내 모습 내 마음 두견이 울고 두견이 피고// 높은 재 얕은 골 흔들리는 실마리 길/ 그윽하고 너그럽고 잔잔하고 산뜻하지/ 백마 호통소리 나는 날이면/ 황금 꾀꼬리 희비교향을 아뢰리라.//

묘비명 / 김영랑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비(碑)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 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비(碑)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恨) 되는 한마디 삭이실란가//

물 보면 흐르고 / 김영랑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은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듣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 흘러가건만// 그 밤을 흘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집 / 김영랑
내 집 아니라/ 늬 집이라/ 날으다 얼른 돌아오라/ 처마 난간이/ 늬들 가여운 속삭임을 지음(知音)터라// 내 집 아니라/ 늬 집이라/ 아배 간 뒤 머언 날/ 아들 손자 잠도 깨우리/ 문틈 사이 늬는 몇 대(代)째 설워 우느뇨// 내 집 아니라/ 늬 집이라/ 하늘 날으던 은행잎이/ 좁은 마루 구석에 품인 듯 안겨든다/ 태고로 맑은 바람이 거기 살았니라// 오! 내 집이라/ 열 해요 스무 해를/ 앉았다 누웠달 뿐/ 문 밖에 바쁜 손이/ 길 잘못 들어 날 찾아오고// 손때 살내음도 절었을 난간이/ 흔히 나를 안고 한가하다/ 한두 쪽 흰구름도 사라지는디/ 한두엇 저질러 논 부끄러운 짓/ 파아란 하늘처럼 아슴풀하다//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 / 김영랑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 눈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무너진 성터 / 김영랑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강물 / 김영랑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언덕에 바로 누워 /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 소프라노 국영순 가곡 : 언덕에 누워

지반추억(地畔追億) / 김영랑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짓 / 김영랑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 김영랑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발표 당시의 제목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오월(五月) /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5월 아침 / 김영랑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오월 한(五月 恨) / 김영랑
모란이 피는 오월달/ 月桂(월계)도 피는 오월달/ 온갖 재앙이 다 벌어졌어도/ 내 품에 남는 다순 김 있어/ 마음실 튀기는 오월이러라// 무슨 대견한 옛날였으랴/ 그래서 못 잊는 오월이랴/ 청산을 거닐면 하루 한 치씩/ 뻗어 오르는 풀숲 사이를/ 보람만 달리던 오월이러라// 아무리 두견이 애달아해도/ 황금 꾀꼬리 아양을 펴도/ 싫고 좋고 그렇기보다는/ 풍기는 내음에 지늘꼈건만/ 어느새 다 해 - 진 오월이러라//

춘향(春香) / 김영랑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 김영랑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물소리 / 김영랑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거나//

사랑은 하늘 / 김영랑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 김영랑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미움이란 말 / 김영랑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사행소곡오수(四行小曲五首) / 김영랑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 넘은 달그리매 마음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호젓하고 줄 데 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슷긴 찬별을 보았습니다// 빈 포케트에 손 찌르고 폴 베를레-느 찾는 날/ 온 몸은 흐렁흐렁 눈물도 찔끔 나누나/ 오! 비가 이리 쭐쭐쭐 나리는 날은/ 설운 소리 한 천 마디 썼으면 싶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여울에 희롱하는 갈잎/ 알듯 모를 듯 숨 쉬고 눈물 맺은/ 내 청춘의 어느 날 서러운 손짓이여//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개풀 수줍어 고개 숙이네/ 한낮에 배란놈이 저가슴 만졌구나/ 뻘건 맨발로는 나도작고 간지럽고나//


사행소곡육수(四行小曲六首) / 김영랑
그 밖에 더 아실 이 안 계실거나/ 그이의 젖은 옷깃 눈물이라고/ 빛나는 별 아래 애달픈 입김이/ 이슬로 맺히고 맺히었음을// 밤이면 고총아래 고개 숙이고/ 낮이면 하늘보고 웃음 좀 웃고/ 너른 들 쓸쓸하여 외론 할미꽃/ 아무도 몰래 지는 새벽 지친별// 저 곡조만 마조 호동글 사라지면/ 목속의 구슬을 물속에 버리려니/ 해와 같이 떴다지는 구름 속 종달은/ 내일 또 새론 섬 새 구슬 머금고 오리// 산골을 놀이터로 커난 새악시/ 가슴속은 구슬같이 맑으련마는/ 바라보는 먼 곳이 그리움인지/ 동이인 채 산길에 섰기도 하네//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 구름 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빠른 철로에 조는 손님아/ 이 시골 이 정거장 행여 잊을라/ 한가하고 그립고 쓸쓸한 시골사람의/ 드나드는 이 정거장 행여 잊을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六首) / 김영랑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러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만 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까지//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 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感激(감격) 8. 15 / 김영랑
煉獄(연옥)의 半世紀(반세기) 짓밟히어 지늘끼고도 다시 선뜻 불같이 일어서는 우리는 대한의 훗한 겨레/ 쇠사슬 즈르릉 풀리던 그날/ 어디하나 異端(이단)있어 行列(행렬)을 빠져나더뇨/ 삼천만은 낯낯이 가슴 맺힌 독립을 외쳤을 뿐// 疆土(강토)가 까다로운 經緯度(경위도)에 자리했음 울어야 하느냐?/ 고구려 신라 쩍은 어찌들 했던가 뒤져보렴아/ 聖朝(성조) 이룩하신 이땅은 천하의 陽地(양지)/ 삼천리가 적어서 한이라면 英蘭土(영란토)를 보렴아/ 奇蹟(기적)이 아니드면 모실 수 없던 민족의 統領(통령)/ 그 聰慧(총혜) 그 膽(담)덩이 이 나라는 반석위에 선 民主堡壘(민주보루)/ 벌써 倭(왜)놈과의 싸움도 지난 듯싶은데/ 四年(사년)동안은 누구들 때문에 흘린 피드냐/ 萬年共和(만년공화)의 世界憲章(세계헌장) 발맞추는 大韓民國(대한민국)/ 民主憲法(민주헌법)이 그러드냐 土地改革(토지개혁)을 안한다더냐/ 도시 大西洋憲章(대서양헌장)이 未洽(미흡)트란말이지/ 四十八對六(사십팔대육)인데 육이 더 옳드란말이지/ 鐵(철)의 帳幕(장막)은 숨 막혀도 獨裁(독재)하니 좋았고/ 民主開放(민주개방)이 明朗(명랑)하여도 人權平等(인권평등)이 싫드란말이지/ 四十年(사십년)동안의 불다름에도 얼은 남은 겨레로다/ 사년쯤의 싸움이사 우리는 백년도 불가사리/ 이젠 벌써 是非(시비)를 따질 때가 아니로다/ 쓰러진 同志(동지)의 죽엄을 밟고 넘어서 오직 前進(전진)할 뿐/ 大義(대의)에 죽음 永遠(영원)한 삶임을 삼천만 모두 다 마음커니/ 大義大韓(대의대한) 그 앞에 간사한 謀略(모략)과 흉측한 暗鬪(암투)가 있을 수 없다/ 보라 저 피로 쌓일 失地恢復(실지회복)의 수만 깃발/ 들으라 百萬聰俊(백만총준)의 地軸(지축)을 흔드는 저 盟誓(맹세)들//


원망 / 김영랑
‘바람이 부는 대로 찾아가오리’/ 흘린 듯 기약하신 님이시기로/ 행여나! 행여나! 귀를 종금이/ 어리석다 하심은 너무로구려/ 문풍지 설움에 몸이 저리어/ 내리는 함박눈 가슴 해어져/ 헛보람! 헛보람! 몰랐으랴만/ 날더러 어리석단 너무로구료//

가늘한 내음 / 김영랑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윈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후끈한 마음// 아니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

강선대(降仙臺) / 김영랑
강선대 돌비늘 끝에/ 하잔한 인간 하나/ 그는 버-ㄹ써/ 불타오르는 호수에 뛰어내려서/ 제 몸 사뤘더라면 좋았을 인간// 이제 몇 해뇨/ 그 황홀 만나도 이 몸 선뜻 못 내던지고/ 그 찬란 보고도 노래는 영영 못 부른 채// 젖어드는 물결과 싸우다 넘기고/ 시달린 마음이라 더러 눈물 맺었네// 강선대 돌비늘 끝에 벌써/ 불사뤘어야 좋았을 인간//

그 밖에 더 아실 이 / 김영랑
그 밖에 더 아실 이 안 계실거나/ 그이의 젖은 옷깃 눈물이라고/ 빛나는 별 아래 애닯은 입김이/ 이슬로 맺히고 맺히었음을//

그 색시 서럽다 / 김영랑
그 색시 서럽다 그 얼굴 그 동자가/ 가을 하늘가에 도는 바람슷긴 구름조각/ 핼슥하고 서느라워 어데로 떠갔으랴/ 그 색시 서럽다 옛날의 옛날의//

그대는 호령도 하실 만하다 / 김영랑
창랑에 잠방거리는 섬들을 길러/ 그대는 탈도 없이 태연스럽다// 마음을 휩쓸고 목숨 앗아간/ 간밤 풍랑도 가소롭구나// 아침 날빛에 돛 높이 달고/ 청산아 봐란 듯 떠나가는 배// 바람은 차고 물결은 치고/ 그대는 호령도 하실 만하다//

금호강 / 김영랑
언제부터/ 응 그래 저 수백리를/ 맥맥히 이어받고 이어가는 도란 물결소리/ 슬픈 魚族 거슬러 행렬하는 강/ 차라이 아쉬움에/ 내 후련한 연륜과 함께/ 맛보듯 구수한 이야기 잊고/ 어드맬 흘러갈 금호강// 여기 해뜨는 아침이 있었다/ 계절풍과 더불어 꽃피는 봄이 있었다/ 교교히 달빛 어린 가을이 있었다.// 이 나룻가에서/ 내가 몸을 따루며 살았다./ 물소리를 듣고 잠들었다./ 오랜 오늘/ 근이는 대학을 들고/ 수방우와 그리고 선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도시 믿어지지 않은,// 이 나룻가/ 오릇한 위치에 내 홀로 서면,/ 지금은 어느 어머니가 된/ 눈맵시 아름다운 연인의 이름이,// 아직도 입술에 맵돌아/ 사라지지 않고,// 이 나룻가 물을 마시고 받은/ 내 청춘의 상처// 아- 나의 병아//

꿈밭에 봄마음 / 김영랑
구비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몰아서/ 꿈밭에 봄마음 가고가고 또 간다//

낮의 소란소리 / 김영랑
거나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디/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 예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아놓은 바람이어니/ 묵근히 옮겨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 다리 날아본 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내 옛날 온 꿈이 / 김영랑
내 옛날 온 꿈이 모조리 실리어간/ 하늘가 닿는 데 기쁨이 사신가// 고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래자/ 헛되나 마음가는 그곳뿐이라// 눈물을 삼키며 기쁨을 찾노란다/ 허공은 저리도 한없이 푸르름을// 엎디어 눈물로 땅 우에 새기자/ 하늘가 닿는 데 기쁨이 사신다//

내 훗진 노래 / 김영랑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 꽃은 까득 피고 벌떼 닝닝거리고// 그대 내 그늘 없는 소리를 들으실까/ 안개 자욱히 푸른 골을 다 덮었네// 그대 내 흥 안 이는 노래를 들으실까/ 봄물결은 왜 이는지 출렁거린디// 내 소리는 꿰벗어 봄철이 실타리/ 호젓한 소리 가다가는 씁쓸한 소리// 어슨 달밤 빨간 동백꽃 쥐어따서/ 마음씨 냥 꽁꽁 주물러버리네//

노래 / 김영랑
눈물에 실려가면 산길로 칠십리/ 돌아보니 찬바람 무덤에 몰리네/ 서울이 천리로다 멀기도 하련만/ 문물에 실려가면 한걸음 한걸음// 뱃장 우에 부은 발 쉬일까보다/ 달빛으로 눈물을 말리까보다/ 고요한 바다 우로 노래가 떠간다/ 설움도 부끄러워 노래가 노래가//

눈물 속 빛나는 보람 / 김영랑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데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슷긴 찬 별을 보았습니다//

뉘 눈결에 쏘이었소 / 김영랑
뉘 눈결에 쏘이었소/ 온통 수줍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이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어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님 두시고 / 김영랑
님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 / 김영랑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이길래/ 내 숨결 가부엽게 실어보냈지/ 하늘가를 스치고 휘도는 바람/ 어이면 한숨만 몰아다주오//

달 / 김영랑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들꽃 / 김영랑
향내 없다고 버리실라면/ 내 목숨 꺾지나 말으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이의 발끝에 조을걸//

땅거미 /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픗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으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떠날아가는 마음 / 김영랑
떠날아가는 마음의 파름한 길을/ 꿈이런가 눈감고 헤아리려니/ 가슴에 선뜻 빛깔이 돌아/ 생각을 끊으며 눈물 고이며//

마당 앞 맑은 새암 / 김영랑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 김영랑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여울에 희롱하는 갈잎/ 알만 모를만 숨쉬고 눈물맺은/ 내 청춘의 어느날 서러운 손짓이여//

밤사람 그립고야 / 김영랑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넘은 달 그리메 마음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뵈지도 않는 입김 / 김영랑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어 찾으며/ 삶은 오로지 바늘끝같이//

불지암(佛地庵) / 김영랑
그 밤 가득한 山정기는 기척없이 솟은 하얀 달빛에 모두 쓸리우고/ 한낮을 향미로우라 울리던 시냇물 소리마저 멀고 그윽하여/ 衆香의 맑은 돌에 맺은 금이슬 구을러 흐르듯/ 아담한 꿈 하나 여승의 호젓한 품을 애끊이 사라졌느니// 천년 옛날 쫓기어간 신랑의 아들이냐 그 빛은 청초한 수미山 나리꽃/ 정녕 지름길 섯드른 흰옷 입은 고운 소년이/ 흡사 그 바다에서 이 바다로 고요히 떨어지는 별살같이/ 옆산 모롱이에 언뜻 나타나 앞골 시내로 사뿐 사라지심// 승은 아까워 못 견디는 양 희미해지는 꿈만 뒤쫓았으나/ 끝없는지라 돌여 밝은 날의 남모를 귀한 보람을 품었을 뿐/ 토끼라 사슴만 뛰어보여도 반드시 기려지는 사나이 지났었느니// 고운 輦의 거동이 있음직한 맑고 트인 날 해는 기우는제/ 승의 보람은 이루었느냐 가엾어라 미목청수한 젊은 선비/ 앞시냇물 모이는 새파란 소에 몸을 던지시니라//

비는 마음 / 김영랑
아파 누워 혼자 비노라/ 이대로 가진 못하느냐// 비는 마음 그래도 거짓 있나/ 살잔 욕심 찾아도 보나/ 새삼스레 있을 리 없다/ 힘없고 느릿한 핏줄 하나// 오! 그저 이슬같이/ 예사 고요히 지려무나/ 저기 은행잎은 떠날온다//

빛깔 환히 / 김영랑
빛깔 환히/ 동창에 떠오름을 기둘리신가/ 아흐레 어린 달이/ 부름도 없이 홀로 났네/ 月出東嶺!/ 팔도사람 다 맞이하소/ 기척없이 따르는 마음/ 그대나 홀히 싸안아주오//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 김영랑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개풀 수줍어 고개 숙이네/ 한낮에 배란 놈이 저 가슴 만졌고나/ 뻘건 맨발로는 나도 자꾸 간지럽고나//

 




김영랑 시인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이 있다.

모란이 활짝 피어 있는 전남 강진의 김영랑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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