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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요시노 히로시 시인

부흐고비 2021. 5. 7. 16:12

축혼가 /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 큰소리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 장난치는 편이 좋다/ 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후에 의심스러워지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이/ 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날이 있어도 좋다//
그리고 어째서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잠자코 있어도//
두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길 바란다//

 

생명은 / 요시노 히로시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곤충이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그냥 흩어져 있는 것들끼리/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곤충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겠지//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s born이야. 수동형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 지는 것이로군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말예요.// 그때 아버지는 어떤 놀라움으로 아들의 말을 받아들였을까. 나의 표정이 그저 순진한 것으로만 아버지의 눈에 비쳤을까. 그것을 정확하게 살피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문법상의 단순한 발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다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 하루살이라는 벌레는 말이야, 태어나서 2-3일 만에 죽는다는데 그럴 바에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인지 하고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시절이 있었단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아버지는 계속했다.// -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어느 날 이것이 하루살이라며 확대경으로 보여 주었다. 설명에 의하면 입은 완전히 퇴화되어 먹이를 섭취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위 부분을 절개해 보아도 들어 있는 것은 공기뿐, 아무리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알만은 뱃속에 소복이 충만하여 홀쭉한 가슴 부위까지 꽉 차 있었다. 그것은 흡사 현기증 나도록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슬픔이 목덜미까지 치밀어 올라온 것 같았다. 차가운 빛의 알이었다. 내가 친구 쪽을 돌아보며 <알이다> 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애달픈 일이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의 일이었단다. 네 어머니가 너를 낳자마자 그만 세상을 떠나간 것은...// 아버지의 그 다음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아픔처럼 끊임없이 애달프게 내 뇌리에 꽂히는 것이 있었다./ - 홀쭉한 어머니의 가슴팍까지 숨막히게 가로 메우고 있던 하얀 나의 육체.//

나 자신에게 / 요시노 히로시
타인을 격려할 수는 잇어도/ 자신을 격려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아직 피어나는 꽃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그리하자/ 좀 어색하더라도 참고서/ 촘 무리를 해서라도/ 엷은 흥겨움 속에서/ 내가 즐거워하도록 하여 두자//

한국어로 / 요시노 히로시
한국어로/ 馬을 [말]이라 한다./ 言을 [말]이라고 한다./ 언어는 달리는 말이었다./뜨거운 설렘을 전하기 위한.// 한국어로/ 目을 [눈]이라고 한다./ 雪을 [눈]이라고 한다./ 하늘의 눈은 지상의 무엇을 보려고/ 반짝이며 내려오는가.// 한국어로/ 一을 [일]이라고 한다./ 事를 [일]이라고 한다./ 하나하나 무던히 쌓아 올리는 것이/ 일이다.// 한국어로/ 가겠다는 말을 [가마]라고 한다./ 사람 타는 수레를 [가마]라고 한다./ 가겠다는 젊은 가마꾼의 어깨를/ 가마가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한다.// 한국어로/ 일주년을 [돌]이라고 한다./ 石을 [돌]이라고 한다./ 층층이 돌에 새겨진, 시간의 퇴척.../ 일주년의 두께는 얼마만큼일런가.//

동사 '부딪치다' / 요시노 히로시
어느 날 아침/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한 명의 여성/ 일본 최초의 맹인 전화교환원// 그 눈은/ 바깥세상을 흡수하지 못하고/ 빛을 밝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몇 해 전 실명했다는 그 눈은/ 사회자가 그녀의 출퇴근 모습을 소개했다// '출근 첫날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로는 줄곧/ 혼자서 출퇴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오늘로 한 달/ 편도로 거의 한 시간 동안 만원 전철을 타고……'// 그리고 물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기 힘드시죠?'// 그녀는 대답했다/ '네, 힘들긴 힘들지만/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걷기 때문에/ 그럭저럭……'/ '부딪치면서…… 말인가요?'라고 말하는 사회자// 그녀는 미소 지었다/ '부딪치는 것이 있으면/ 오히려 안심이 되는 걸요'// 눈이 보이는 나는 부딪치지 않고 걷는다/ 사람이나 물체를/ 피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여기며/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부딪치며 걷는다// 부딪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세상이 내민 거친 호의로 여기며/ 길 위의 쓰레기통이나 볼트가 튀어나온 가드레일과/ 몸을 난폭하게 치고 지나가는 가방과/ 울퉁불퉁한 보도블록과 조바심 내는 자동차의 경적/ 그것들은 오히려/ 그녀를 생생하게 긴장시키는 것// 친근한 장애물 존재의 촉감/ 부딪쳐 오는 모든 것들에 자신을 맞부딪쳐/ 부싯돌처럼 상쾌하게 불꽃을 일으키면서/ 걸어가는 그녀// 사람과 사물들 사이를/ 눅눅한 성냥개비처럼 한 번의 불꽃도 일으킴 없이/ 그냥 빠져나가기만 해 온 나// 세상을 피하는 것밖에 몰랐던 나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세게 부딪쳐 온 그녀/ 피할 겨를도 없이 나가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나에게/ 그녀가 속삭여 주었다// 부딪치는 법, 세상을 소유하는 기술을/ 동사 '부딪치다'가 그곳에 있었다// 한 여성의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그녀의 주위에는 모든 물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짓 한 번에 곧바로 노래를 부를 것처럼/ 다정한 성가대처럼//

바위가 / 요시노 히로시
바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름을 거스르고 있었다./ 바위 곁에서 강 위로/ 강인한 꼬리를 지닌 물고기가 힘차게/ 살며시 헤엄쳐 지나갔다./ 거스르는데도/ 각기 특유의/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하는/ 방법이 있는 법./ 물고기가 바위를 딱하게 여기거나// 바위가 물고기를 깔보지 않는 것이/ 자못 산뜻하다./ 흐름은 유유히/ 도리어 비굴한 것들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저녁놀 / 요시노 히로시
항상 그렇듯이/ 전철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젊은이와 아가씨가 앉아 있고/ 노인은 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허둥지둥 노인이 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옆쪽 틈새에서 밀려왔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노인은 다음 역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난다는 말 그대로/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또 밀려왔다/ 가엽게도/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다음 역도/ 그 다음 역도/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긴장된 몸은 굳어졌고.../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몸을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고/ 아가씨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난자가 된다/ 그건/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처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착한 마음에 압박을 견디면서/ 아가씨는 어디까지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랫입술을 씹으며/ 괴로운 심정으로/ 아름다운 저녁놀도 바라보지 못한 채//

산이 / 요시노 히로시
산은 먼 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사람은 마음을/ 되찾으러 간다.// 그렇게/ 전신을 사로 잡힌다.//

나무 / 요시노 히로시
사람 또한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닐까/ 나무의 자기주장이 가지를 뻗어가는 것이듯이/ 사람 또한 보이지 않는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간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냉담해지기 쉬운 이유는,/ 가지와 가지가 깊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답답한 맘에 몸을 비틀어/ 서로 상처 입고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어쩔 수 없다./ 가지를 뻗지 않는 자아는 없다./ 하물며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배회해야 하는 나무/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을 수 없다.// 가지가 극히 우거진 산과 들의 나무는/ 바람의 힘을 빌려 가지 끝을 거칠게 맞부딪쳐서/ 빽빽이 자라난 가지를 떨어뜨려버린다는/ 정원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의 경우 어떨까/ 정원가위를 내 자신의 내부에 넣고, 어둑한 자아를/ 베어낸 기억은, 아직 없지만//

수목 / 요시노 히로시
처음 줄기가 갈라져 가지가 될 때의 결단/ 그 끝자락에서 무수한 싹이 움틀 때의 미열/ 그것이 고통일지 환희일지/ 사람은 모른다/ 나무의 목표란 무엇인가, 완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사람은 알지 못한다.// 분명히 사람은 오랜 기간을 나무와 함께 지상에서 지내왔다./ 나무를 키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는 것은/ 사람과 관련된 나무의 몇 가지 특징뿐,/ 나무 자체에 대해 이제껏 사람은 무엇을 생각해 보았을까.// 지금은 겨울이다./ 낙엽수라 사람이 부르는 나무들은 대부분 잎을 흐트러뜨리고/ 어느 종류는 말라붙은 잎을, 아직 가지에 남긴 채/ 때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려/ 은박지처럼 울고 있다./ 나는 지면에 흩어진 낙엽을 밟고/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이 체험할 수 없는 다른(生)이/ 나무의 모습으로 숲을 이뤄/ 잠시/ 겨울의 옅은 볕을 쬔다. 나와 함께.//

단풍 / 요시노 히로시
여름, 초록의 짙음을 겨루던 나무가/ 가을, 붉음의 짙음을 겨룬다// 붉음의 짙음을 겨룬 단풍에겐/ 더는 겨룰 색깔이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자신을 지면에 흐트러뜨릴 뿐/ 차가운 지면을 빨갛게 물들이려// 그리고?// 그리고는--// <붉은 카펫을 깐 것 같다>/ 몰아치는 비유에 견딜 뿐//

얼굴 / 요시노 히로시
나무의 뿌리처럼/ 어둠을 감싸는 본성이 사람에게도 있다/ 나무의 가지 끝처럼/ 빛을 바라는 본성이 사람에게도 있다// 빛과 어둠으로 자라나는 사람은, 그러나/ 빛과 어둠을 공평히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숭고하지도 추악하지도 못한 우리의 얼굴은/ 이렇게 생겨 난 것이다// 나무는 벗었다. 몸통도 팔도 분명하지만/ 얼굴은 없다. 얼굴이 없는 홀가분함으로/ 주변 그리고 자신에게 섞여 드는 것일까// 나무의 얼굴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파란 겨울하늘의/ 차가운 안식이 감돌 뿐이다//

휴지씨 / 요시노 히로시
휴지를/ 한 남자가 버렸다/ 전철 바닥에/ 휴지의 체면일랑 아랑곳 하지 않고서// 그런데도 휴지씨/ 성내지 않는다/ 깔끔한 휴지통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화려한 최후를 맞지 못했다고 해서// 하물며 인간은 누구하나/ 죽을 자리 하나/ 전해져 있지 않건만// 전철역 승강장 난간을 걷던 도중/ 나의 부주의한 별이 내게서 눈을 떼었던 단 몇 초 사이에 졸도해서/ 그 자리가 나의 최후의 장소가 될 뻔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 요시노 히로시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을 향한 누군가의 기나긴 앙갚음일지도 모른다/ 라고 사가(嵯峨)씨는 운을 떼었다// 틀림없이/ 그렇기에 말로 남자와 여자는/ 그 앙갚음을 영속시키기 위한/ 한 조의 덫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나는, 그렇지만/ 아내에게 무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젊은 날의/ 감미로운 곤혹 속을 지금도 헤맨다// 아마도 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나긴 앙갚음과는 다른 기원을 갖는/ 기나긴 송별극 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는/ 여자의 몸을 빌어, 남자의 마음에 무게를 더하는/ 불가사의한 사람스러움과 같은 것을/ 잠든 아내의 곁에서 달래곤 한다//
* 嵯峨信之(さが のぶゆき) : 1902~1997 일본의 시인

나나코에게 / 요시노 히로시
빨간 사과처럼 볼을 붉히고/ 잠들어 있는 나나코.// 어머니를 닮아/ 나나코의 볼도 빨갛게 되었구나./ 한때 윤기 넘치던 어머니의 볼은/ 이제 조금 헤쓱해졌지.// 아버지한테도/ 쓰라린 기억이 조금씩 늘었어./ 말하기 무엇하지만/ 나나코/ 아버지는 너한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남의 기대를 따르려다/ 자신을/ 얼마나 망치는지/ 아버지는 확실히/ 알았거든.// 아버지가/ 너한테 주고픈 것은/ 건강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그만둘 때지./ 나를 사랑하는 일을 그만둘 때/ 우리는/ 남을 사랑하는 일도 그만두게 되고/ 세상을 잃어버리고 마는 거야/ 내가 있을 때/ 우리가 있고/ 세상이 있어.//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쓰라린 고생이 많단다./ 이 고생을/ 지금은/ 너한테 줄 수 없다.// 너한테 주고픈 것은/ 향기로운 건강과/ 얻기 힘들고/ 기르기 어려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사귐 / 요시노 히로시
내가 기르는 잉꼬/ 부리로 문을 들어올리고/ 새장 밖으로 나선다// 자혜가 있는 새만큼/ 주인을 낙담시키는 존재도 없지 않을까?/ 새는 내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주객전도다/ 부탁이니 잉꼬여/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물론/ 새장의 무의미함을/ 잉꼬가 내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주인으로서의 교만함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진혼가 / 요시노 히로시
죽음을 강요하는 시간은/ 한편으로 삶을 가요하며/ 쉼없이 지휘봉을 움직여/ 가을의 수많은 풀벌레를 노래하게 한다.// 은밀하게/ 노래의 실타래를 굴리며, 실을/ 서서히 풀었다 감았다 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그러나 풀벌레들은/ 노래를 빼앗겼다 여기지 않으며/ 하물며 억지로 부름도 아니고/ 스스로 노래하길 바란 듯이 뜨겁게// 억지 아닌 유일한 것이야 말로 노래라는 듯 소리를 높여/ 그것을 얄팍한 시간을 살아가는 작은 귀에도 들려주려 하여/ 질릴 줄을 모른다//

달팽이 / 요시노 히로시
자기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 어차피 사람은/ 자기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자신을 버려두고 가든지/ 자신을 끌고 가든지/ 결국 자기를 자기 밖으로 끌어내어/ 미지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눈(雪)과 같이 / 요시노 히로시
사람은 누구나 남과는 다른 삶을 바란다/ 눈이 육각형이라는 틀 속에서 조차/ 결정의 모양이라는 다소의 변화로서 겨루듯이//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눈이 자신의 색 외에는 초연한 듯하지만/ 실상 다른 의미에서는 너무도 간단히 물들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눈과 같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할 수 없어서/ 자신을 냉대하지 않고서는 응결할 수 없어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흩날리는 눈과 같이/ 낙하하는 중에도 비상한다고 믿으며//

눈 내리는 날에 / 요시노 히로시
눈이 거칠게 몰아친다/ 눈이기에 휠 수 밖에 없음을 참으며// 진실을 가리우는 눈의 흰색/ 누구도 의심치 않는 눈의 흰색/ 그리 믿어지는 눈은 구슬프다// 그 어디에 순백한 마음일랑 있으랴/ 그 어디에 때 묻지 않는 눈일랑 있으랴// 눈이 거칠게 몰라친다/ 하얀 껍질을 반짝거리며/ 하얀 껍질을 참으며// 눈은 때 묻지 않는 존재로서/ 언제이고 하얀 존재로서/ 높은 하늘 가운데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슬픔을 어찌 떨쳐내랴// 눈은 하나가 내려오기 시작하면/ 그 뒤를 이어 또 그 뒤를 이어 그치지 않는다/ 더러워진 눈을 감추려// 순백을 꽃잎처럼 감싸가며/ 그 뒤를 이어 또 그 귀를 이어 그치지 감싸가며/ 더러워진 눈을 감추려// 눈이 거칠게 몰아친다/ 눈은 어찌하여야 그 자신의/ 눈을 가리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런가/ 그러나 이미/ 저로서는 어찌 하여야 할 줄도 모르는 듯/ 눈은 거칠게 몰아친다// 눈 위에 눈이/ 그 위에 다시 눈이/ 한량 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소리도 없이 쌓여간다/ 쌓여져가다/ 쌓여만간다 쌓여져간다//

꺾음과 기도 / 요시노 히로시
자신을 꺾을(折) 수 있을 때/ 비로서 기도(祈) 할 수 있다//

한낮의 하늘 / 요시노 히로시
낯을 가리는 어느 소박한 별이/ 한낮의 하늘 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반짝거린다./ 눈에 띄지 않도록.// 수줍은 많은 고운 마음이/ 조그마한 빛을 들키지 않으려/ 환한 양지 속을/ 걷는 것 같이.// 빛을 품으려 하는 별들이/ 한낮의 하늘 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반짝거린다./ 가만히, 조용히.//

하늘의 색 / 요시노 히로시
하늘의 색은/ 바다의 색이었습니다/ 아득한 경계선을 넘은/ 하늘의 푸름은 바다의 푸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 속, 하늘의 색이 곧/ 다른 누군가의 마음 속, 바다까지/ 닿는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바다를/ 바다에 닿은 하늘을 헤엄쳤습니다/ 정확히는, 나의 바다까지 닿은 누군가의 하늘을//

 

개와 샐러리맨 / 요시노 히로시
또왔다./ 비스켓을 줘보지만 역시 먹지 않는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처음 왔을 땐 생선뼈를 던져주었다. 먹지 않았다. 그 후로 올 적마다 무언가를 주었지만 한 번도 먹으려고는 않았다.// 검고 마른개다. 이름표도 없다. 애교도 모른다. 먹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매일처럼 부엌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내 참을성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문뜩/ 나는 지금까지 q[풀었던 배려들이 후회스러워졌다.// 그날 밤 나는 검은 개와 함께였다. 나는 개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개도 원하지 않았으며 둘이서 침묵을 지켰다. 별이 예쁘고 개의 눈이 부드러웠다. 그 이상으로 나의 눈이 부드러웠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개가 애견시절의 경험이나 말해볼까 라고 했지만 그러면 나는 샐러리맨 시절의 경험을 거내야 할 분위기였고 신세타령이나 하는 것도 꼴볼견인지라 관두자고 나는 대답했다.// 그런 씁쓸한 꿈을 품은 채, 나는 다음날 아침 평소대로 출근길에 올랐다.//

어느 이름 봄 버스에서 / 요시노 히로시
머지않아 엄마가 될 것 같은 아가씨가/ 무릎 위로/ 털실로 된 작고 하얀 양말을 짜고 있다/ 마치/ 그녀 자신이 들어갈 고치의 한 부분을 만들기라도 하듯./ 아직 그녀에게 남은/ 조금 응석받이인 ‘소녀’를/ 단호하게/ 끊어/ 고치에 가두지 않으면/ 때맞춰 ‘엄마’가 될 수는/ 없기라도/ 한 듯 무심히.//

눈(眼), 하늘, 사랑 / 요시노 히로시
나는 단언한다/ 봐야만 하는 것이 잇었기에/ 눈이 생겨 난 것을// 막연히 감각하던 푸른 하늘을/ 확실히 보기 위하여/ 피부의 한 부분이 서서히 투명한 수정체로/ 변해가는 그 모습을 나는 그려본다// 한 번 더 나는 단언한다/ 아름다운 것은/ 눈에게 사랑 받아/ 보다 아름다워진다고// 그대에게 연의 모습을/ 아름답게 새기는 눈이 있다면/ 나는 단언에 수긍할 것이다//

솔직한 물음표 / 요시노 히로시
작은 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작은 새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기에/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갸웃거렸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고개의 움직임/ 교만치 않은 아름다운 물음표의 형상.// 때로/ 바람처럼/ 귓가에 들려오는/ 의미 모를 방문에/ 나 또한/ 솔직하게 갸웃거릴 수 있는, 작은 새의 고개이고 싶다.//

물맴이 / 요시노 히로시
한 방울 수은같이, 조금 묵직하게/ 수면을 구부리며 떠있다/ 빙빙 돌며 헤엄친다/ 그리고 때로 물속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암시적인 행위/ 떠있지만은 않은, 파고 드는 것.//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간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수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일상의 두터움.// 물로 파고드는 물맴이/ 그 깊이는 얕을지라도/ 적잖은 물의 저항을 만날 터.// 신체를 죄어들며 밀어내는/ 물의 힘을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물맴이가/ 물의 겉과 속을 왕래하며 출몰하는 것은/ 감탄할만한 일이다.// 물맴이가 죽으면/ 물은 그 힘을 풀어/ 잠자코 그 주검을 품어주리라./ 그것은 물맴이는 알지 못하는/ 물의 헤아림.//

 



요시노 히로시(吉野弘, Yosino Hirosi. 1926~2013) 시인
야마가타현의 사카다시 출생으로 일본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53년 동인잡지 도(櫂)에 참가하여 시인 활동 시작. 1957년에 시집 ‘소식(消息)’을 발행하였고 1959년에는 시집 ‘환상・방법(幻・方法)’을 냈다. 1962년부터 전업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1971년 ‘감상여행(感傷旅行)’으로 제23회 요미우리 문학상의 시가부분에서 입상하였다. 1994년 ‘요시노 히로시 전시집을 발행하였다. 대표작으로 결혼피로연에서 널리 인용, 낭독되기로 유명한 ‘축혼가‘, ’저녁놀(夕焼け)’, ‘I was born', '무지개의 다리(虹の足)’ 등이 있다. 요시노 히로시는 저명한 시인임에 분명하지만 스스로 시인으로서 칭송받는 것을 꺼려 직업을 잡문가로 표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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