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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한강 시인

부흐고비 2021. 5. 13. 08:52

한강,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2016)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 한강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거울 저편의 겨울 / 한강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지금 가을의 저녁 누군가가nㅣ 따라오는데요 밤을 건너려고 겨울을 건너려고 가만히 기다리는데요 누군가가 앞질러 가듯 나의 도시가 그 도시를 앞질러 가는 동안// 3//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너무 추워/ 사물들은 떨지 못해/ (얼어 있던) 네 얼굴은/ 부서지지도 못해//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너도/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4// 만 하루 동안 비행할 거라고 했다/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입속에 털어넣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 도시의 숙소에 짐을 풀면/ 오래 세수를 해야지// 이 도시의 고통이 가만히 앞질러 가면/ 나는 가만히 뒤처져 가고// 네가 잠시 안 들여다보는/ 거울의 찬 뒷면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흥얼거려야지//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따가운 혀로 밀어 뱉어낸 네가/ 돌아가 나를 들여다볼 때까지// 5// 내 눈은 두 개의 몽당양초 뚜욱뚝 촛농을 흘리며 심지를 태우는데요 그게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파르스름한 불꽃심이 흔들리는 건 혼들이 오는 거라는데요 혼들이 내 눈에 앉아 흔들리는데요 흥얼거리는데요 멀리 너울거리는 겉불꽃은 더 멀어지려고 너울거리는데요 내일 당신은 가장 먼 도시로 가는데요 내가 여기서 타오르는데요 당신은 이제 허공의 무덤속에 손을 넣고 기다리는데요 기억이 뱀처럼 당신의 손가락을 무는데요 당신은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꼼짝하지 않는 당신의 얼굴은 불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데요,//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아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즐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거울 저편의 겨울 3 -J에게 / 한강
조용히/ 미꺼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면서/ 더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을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요즘은 아주 빠르게 걷는구나 학교 다닐 때 너는 아주 빠르게 걷거나 아주 느리게 걷는 아이였는데 졸업하고서 한참 뒤에 내가 아주 느리게 걸을 때 너를 보고 싶었던 건 네가아주 느리게 걷던 아이였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만일 갑자기 너를 만난다면 네가 아주 빠르게 걷고 있었으면 했는데 그건 네가 아주 느리게 걸었던 몸으로 아주 빠르게 나에게 걸어올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정말 너를 우연히 거리에서 보았을 때 ㄴ는 정말 그렇게 빨리 걸어오고 있었는데 나는 아주 느리게, 거의 멈춘 채로 걷고 있었는데 네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입술이 일그러졌는데 그건 울기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글썽이기 시작했는데 그건 단지 내가 아주 느리게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단지 너는 아주 빠르게 걷는 사람의 팔로 짧게 나를 안아 주었는데 나는 그걸 잊을 수 없었는데 어느 날 내가 물었을 때 너는 그날을 기억 못하겠다고 했고 그때 나는 생각했는데 그건 네가 아주, 아주 빠르게 걷던 때였기 때문일 거라고// 왜 이렇게 춥지,/ 네가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꽤 춥구나.//

거울 저편의 겨울 4 -개기일식 / 한강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각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거울 저편의 겨울 5 / 한강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아침 여덟 시// 덜덜덜/ 가방을 끌고// 입원 가방도/ 퇴원 가방도 아닌 가방을 끌고// 핏자국 없이/ 흉터도 없이 덜컥거리며// 저녁의 뒷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울 저편의 겨울 6 -중력의 선 / 한강
사물이 떨어지는 선./ 허공에서 지면으로/ 명료하게// 한 점과/ 다른 점을 가장 빠르게 잇는// 가혹하거나 잔인하게./ 직선// 깃털 달린 사물./ 육각형의 눈송이/ 넓고 팔락거리는 무엇/ 이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선// 백인들이 건설한/ 백인들의 거리를 걷다가./ 완전한 살육의 기억을 말의 발굽으로 디딘/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거울 이편과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하는 나는//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단 한 군데에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몸의 부드러움과// 꼭 한 번/ 완전하게 찾아올/ 중력의 직선을 생각하는 나는// 신도/ 인간도 믿지 않는/ 네 침묵을 기억하는 나는//

거울 저편의 겨울 7 -오후의 미소 / 한강
거울 뒤편의/ 백화점 푸드코트// 초로의 지친 여자가/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를 입고/ 두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스티로폼 접시에/ 감자튀김이 쌓여 있다// 일회용 소스 봉지는 뜯겨 있다// 너덜너덜 뜯긴 경계에/ 달고 끈끈한 소스가 묻어 있다//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한다// 너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라는 암호가/ 끌어올린 입꼬리에 새겨진다// 수십 개의 더러운 테이블들이/ 수십 명의 지친 쇼핑객들이/ 수백 조각의 뜨거운 감자튀김들이/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너덜너덜 뜯긴/ 식욕을 기다리며,//

거울 저편의 겨울 8 / 한강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거울 저편의 겨울 9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 한강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 두 눈은 이글거릴 것//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심장에 바람을 넣고/ 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흐느끼는 빵처럼/ 악기들이 부풀고)//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당신을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중력을 타고 비스듬히,/ 더 팽팽한 사선으로 미끄러질 것//

거울 저편의 겨울 10 / 한강
보름 조금 지난/ 달이 낯설다//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상./ 위쪽의 반원이/ 미묘하게 움츠러든.// 강을 따라 걷던/ 우리들 중 하나가 말한다.// 그야 여기는 무척 남쪽이니까./ 우리들의 도시는 무척 북쪽이었으니까.// 비스듬한 행성의 축을 타고/ 그토록 멀리 미끄러져 내려왔으니/ 시선의 각도에 맞추어/ 달의 윗면이 오므라든 거라고// 손바닥으로 꾹 눌러본 소금 공, 혹은/ 얼린 밀반죽처럼/ (아주 조금) 납작한 달// 다른 행성의/ 다른 달/ 아래를 걷듯/ 우리들은 조용히./ (슬프지 않게)//

거울 저편의 겨울 11 / 한강
비 내리는 동물원/ 철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거울 저편의 겨울 12 -여름 천변, 서울 / 한강
저녁에/ 우는 새를 보았어.// 어스름에 젖은 나무 벤치에서 울고 있더군.//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아서,/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어도/ 날아가지 않아서.// 내가 허깨비가 되었을까/ 문득 생각했어// 무엇도 해칠 수 없는 혼령/ 같은 게 마침내 된 걸까, 하고// 그래서 말해보았지, 저녁에/ 우는 새에게// 스물네 시간을 느슨히 접어/ 돌아온 나의/ 비밀을, (차갑게)/ 피 흘리는 정적을, 얼음이/ 덜 녹은 목구멍으로// 내 눈을 보지 않고 우는 새에게//

저녁의 소묘 4 / 한강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 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저녁의 소묘 5 / 한강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자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피 흐르는 눈 / 한강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 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이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중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피 흐르는 눈 2 / 한강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피 흐르는 눈 3 / 한강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피 흐르는 눈 4 / 한강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 한강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더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해부극장 2 / 한강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십 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뤼트 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여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날개 / 한강
그 고속도로의 번호는 모른다/ 아이오와에서 시카고로 가는 큰길 가장자리에/ 새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바람이 불 때/ 거대한 차가 천둥 소리를 내며 지나칠 때/ 잎사귀 같은 날개가 조용히 펄럭인다/ 십 마일쯤 더 가서/ 내가 탄 버스가 비에 젖기 시작한다// 그 날개가 젖는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 한강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동지)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가거라//

첫새벽 /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괜찮아 /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회복기의 노래 /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 / 한강
은색 꼬리날개가 반짝이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오른쪽 산 뒤에서 날아와/ 새털구름 안쪽으로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은색 꼬리날개가 빛나는 비행기가/ 같은 길을 긋고 사라진다// 활활/ 시퍼렇게/ 이글거리는 하늘/ 의 눈[眼] 속// 어떤 말,/ 어떤 맹세처럼 활공해/ 사라진 것들// 단단한 주먹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나는 그것들을 혀의 뒷면에 새긴다// 감은 눈 밖은 주황빛,/ 내 몸보다 뜨거운 주황빛// 나를 긋고 간 것들// 베인 혀 아래 비릿하게 고인 것들// (고요히,/ 무서운 속력으로)// 스스로 흔적을 지운 것들//

마크 로스코와 나 -2월의 죽음/ 한강
미리 밝혀둘 것 없이/ 마크로코스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1903년 9월 25일 태어나/ 1970년 2월 25일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 태어나/ 아직 살아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버러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 마크 로스코 : 러시아 출신의 미국 추상화가

그때 / 한강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을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 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자화상. 2000. 겨울 / 한강
초나라에 한 사나이가 살았다/ 서안으로 가려고 말과 마부와 마차를 샀다/ 길을 나서자 사람들이 말했다/ 이보오./ 그쪽은 서안으로 가는 길이 아니오/ 사나이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요?/ 말들은 튼튼하고 마부는 노련하오/ 공들여 만든 마차가 있고/ 여비도 넉넉하오/ 걱정 마시오, 나는/ 서안으로 갈 수 있소// 세월이 흐른 뒤/ 저문 사막 가운데/ 먹을 것도 돈도 떨어지고/ 마부는 도망치고/ 말들은 죽고 더러 병들고/ 홀로 모래밭에 발이 묻힌/ 사나이가 있다// 마른 목구멍에/ 서걱이는 모래흙,/ 되짚어갈 발자국들은/ 길 위의 바람이 쓸어간 지 오래/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사나이를 서안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 초나라의 사나이,/ 먼 눈/ 병든 몸으로 영원히/ 서안으로 가지 못한다//

​파란 돌 /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어느 날, 나의 살은 / 한강
어느 날 눈떠보면/ 물과 같았다가/ 그 다음날 눈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트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 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슨/ 진통제 糖衣였다가/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 한강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더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지옥처럼 바싹 마른 눈두덩을/ 너는 그림자로도 문지르지 않고/ 내 눈을 건너다봤다./ 내 눈 역시/ 바싹 마른 지옥인 것처럼.// 어두워질 거라고.//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

심장이라는 사물 2 / 한강
오늘은/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 벽에 비친 희미한 빛/ 또는 그림자/ 그런 무엇이 되었다고 믿어져서요/ 죽는다는 건/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저녁 잎사귀 / 한강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서울의 겨울 12 /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유월 /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胃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山川,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몇 개의 이야기 6 / 한강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몇 개의 이야기 12 / 한강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빰에,/ 얼룩진.//

오이도(烏耳島) / 한강
내 젊은 날은 다 거기 있었네/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목선 두 척./ 이름붙일 수 없는 날들이 모두 밀려와/ 나를 쓸어안도록/ 버려두었네/ 그토록 오래 물었던 말들은 부표로 또고/ 시리게/ 불살은 빛나고/ 무수한 대답을 방죽으로 때려 안겨주던 파도./ 너무 많은 사랑이라/ 읽을 수 없었네 내 안엔/ 너무 더운 빗줄들이었네 날들이여./ 덧없이/ 날들이여/ 내 어리석은 날/ 캄캄한 날들은 다 거기 있었네/ 그곳으로 한데 흘러 춤추고 있었네//

무제 / 한강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떠 있다 함께 걸어간다 흘러간다 지워지지 않는다 좀처럼. 뿌리쳐지지 않는다 끈덕진 녀석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떠나도 떠나지지 않는다 나는 달아난다 더 달아날 수 없을 때까지. 더 달아날 수 없어 돌아서서 움켜쥐려 한다 움킬 수 없다 두 팔 휘젓는다 움킬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내가 홀로 울 때면// 내 손금을 따라 조용히,// 떨며 고여 있다//

회상 / 한강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 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붓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첫새벽 /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앙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캄캄한 불빛의 집 / 한강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빰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여름날은 간다 / 한강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리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 봤다 해도//

 




한강 시인, 소설가
1970년 광주출생.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
수상 : 만해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2017년 『소년이 온다』로 말라파르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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