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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재삼 시인

부흐고비 2021. 5. 13. 13:25

사천 박재삼문학관

 

어떤 귀로 /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 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잠자는 아내 / 박재삼
깨어 있을 때는/ 그리 일이 많던 아내가/ 잠에 곯아떨어지고 보면/ 세상천지는 나 몰라라/ 숨 쉬는 소리만이/ 새록새록 들리는 데,// 이렇게 늘 가까이서/ 살을 대고 산 것이/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이 인연을 어찌하고/ 각각 이승을 뜨고/ 억울하게 땅 밑에 묻히는/ 숱한 세월을 생각하면/ 그 허무는 어쩔 거나//

과일가게 앞에서 / 박재삼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 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 연애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한 /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 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 낼런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밤바다에서 /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질정(質定): 갈피를 잡아 분명하게 함

추억(追憶)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가난의 골목에서는 / 박재삼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오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이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 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비오는 날 / 박재삼
가슴을 다친 누이는/ 오지 못할 사람의 편지를 받고/ 다시 한 번/ 송두리째 가슴이 찢긴다/ 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물/ 땅에서도 괴는 눈물의/ 이 비오는 날!//

풀잎의 노래 / 박재삼
천지에 파랗게 풀잎들이 솟아/ 무슨 간절한 할말이라도 있는 듯/ 조용한 아우성을 지른다/ 네, 네, 네, 야단스러이/ 일제히 소리하며 일어나고/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환호를 치며 솟아오른다// 아,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시끄러운 말을 피하고/ 오직 바람 속에서 햇빛 속에서/ 몸을 통째로 내맡기고 있나니/ 파란 것이 어떻게/ 빛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것은 어릴 때부터 느껴온 수수께끼였어라.// 그리하여 그들은 드디어/ 바람에 흐르고/ 햇빛에 젖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해내면서도/ 그것을 다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묵묵한 가운데 치르는구나.//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일월 속에서 /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12월 /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 박재삼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나무 / 박재삼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 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가는 근심,/ 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 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나무 그늘 / 박재삼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내 사랑은 / 박재삼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나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지쳐 주리라./ 가다간 돌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사랑의 노래 / 박재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사랑하는 사람 /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첫사랑 그 사람은 /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 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 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 박재삼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아가(雅歌) / 박재삼
나무 그늘에 쉬었다 와서/ 사랑하는 이여,/ 내 몸에서 비치는 아련한 나무 그늘을/ 그대 잠결 가까이/ 비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돌에는 그늘이 빨려 들고,/ 또한 이 무늬 짓는/ 나무 냄새의 싱싱한 공기를/ 그대 꿈결 속에/ 젖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바라건대/ 이 나무 그늘을,/ 이 나무 냄새를,/ 하여간 나무에 엉긴/ 모든 좋은 것을 다 갖다 놓고,/ 그대 잠 깨기 전의/ 서늘하고 빛나고 싱싱한 것 위에/ 송두리째 이바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
* 아가(雅歌): 연애를 찬양한 노래

신 아리랑 / 박재삼
바다 두고 산을 두고/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백리 바깥을 보는/ 네 산처럼 아득한 눈을 어찌하고,// 내 잘못을 거울처럼 받아 비추는/ 물 같은 이마를 어찌하고,// 복사꽃 피는 앵도꽃 피는/ 정다운 동네 어귀 입술을 어찌하고,// 우거진 숲이여/ 네 시원한 머리카락을 어찌하고,// 아, 어찌하고 어찌하고/ 고향의 능선 젖가슴을 어찌하고,// 바다 있기에 산이 있기에/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낙과소리를 들으며 / 박재삼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라일락꽃을 보면서 /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無言으로 오는 봄 /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무제(無題) /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바람의 내력 /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사람이 사는 길 밑에 / 박재삼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슬픔을 탈바꿈하는 / 박재삼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어느 뱃사공 / 박재삼

아버지는 그 넓은 바다를 밭처럼 갈고 살더니 결국은 푸른 바다에 빠져 죽고, 그 원통한 길을 다만 별수없이 아들이 대를 이어 그물을 던져 생선을 길어 올리네. 푸드득 뛰는 그 선연한 비늘빛에 취하여 죽으나 사나 손때 묻고 닳아진 노를 젓네. 삐그덕 삐그덕 가더라도 그 끝간데가 없는 길을 아득한 햇빛 속에 묻고 저절로 익힌 뱃노래만 부르노니 어쩔 수 없이 슬픔은 물려받고 그 슬픔을 꽃피우는 이 짓 밖에 다른 할일은 없네.//


가을비 / 박재삼
가을 아득한 들판을 바라보며/ 시방 추적추적 비 내리는 광경을/ 꼼짝없이 하염없이 또 덧없이/ 받아들이네./ 이러구러 사람은 늙는 것인가.// 세상에는 볕이 내리던 때도 많았고/ 그것도 노곤하게 흐르는 봄볕이었다가/ 여름날의 뜨거운 뙤약볕이었다가/ 하늘이 높은 서늘한 가을 날씨로까지/ 이어져 오던 것이/ 오늘은 어느덧 가슴에 스미듯이/ 옥타브도 낮게 흐르네.// 어찌보면 풀벌레 울음은/ 땅에 제일 가깝게/ 가장 절절이/ 슬픔을 먼저 읊조리고 가는 것 같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까나./ 아, 그것이 막막한/ 빈 가을 빈 들판에 비 내리네.//

나는 아직도 /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 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루나무 / 박재삼
미루나무에/ 강물처럼 감기는/ 햇빛과 바람/ 돌면서 빛나면서/ 이슬방울 튕기면서/ 은방울 굴리면서.// 사랑이여 어쩔래,/ 그대 대하는 내 눈이/ 눈물 괴면서 혼이 나가면서/ 아, 머리 풀면서, 저승 가면서.//

신록(新綠) / 박재삼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新綠을 보며 / 박재삼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자연 - 춘향이 마음 초(抄) / 박재삼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뻗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수정가(水晶歌) /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같단들 어느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 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대인사(待人詞) / 박재삼
저 칠칠한 대밭 둘레길을 내 마음은 늘 바자니고 있어요. 그러면 훗날의 당신의 구름 같은 옷자락이 불각(不刻)스레 보여 오는 것이어요. 눈물 속에서는, 반짝이는 눈물 속에서는, 당신 얼굴이 여러 모양으로 보여 오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피가 마를 만큼 그저 심심할 따름이어요. 그러니 이 생각밖에는요.// 「당신이 오실 때 그 많은 다른 모양의 당신 얼굴을 한 얼굴로 다스리시고, 또한 대밭 둘레길에 사무친 한의 내 눈물일랑은 당신의 옷자락에 재양(載陽) 치듯 환하게 하시라」고요.//
* 바자니고: 부질없이 오락가락 거닐고, 불각스레: 문득, 뜻하지 아니하게, 재양치듯: 반반하게 펴서 다리는 것처럼​

어지러운 혼 / 박재삼
겨우 예닐곱살 난 우리를 그리 사랑하신 남평문씨 부인은/ 서늘한 모시옷 위에 그 눈부신 동전을 하냥 달고 계셨던 그와도 같이/ 마음 위에 늘 또 하나 바래인 마음을 冠 올려 사셨느니라.// 그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그것 그 짐 때문에,/ 어이할까나,/ 갈앉아지기로는,/ 몸을 풀어 사랑을 나누기로는,/ 바다 밖에 죽을 데가 없었느니라.// 혼도 어여쁜 혼은, 우리의 바다에 살아 바다로 구경나선 눈썹 위에서, 다시 살아 어지러울 줄이야……// 밝은 날, 바다 밑이 이 세상 아니게 기웃거려지는 한려수도를 크고 너른 꽃하나로 느껴보아라. 우리는 한시도 가만 못 있는 지껄이는 이파리 되어, 누구에게 손 잡혀 따라가며 따라가며 크고 있는가.//

바람 그림자를 -春香이 마음 / 박재삼
어지간히 구성진 노래 끝에도 눈물 나지 않던 것이 문득 머언 들판을 서성이는 구름 그림자에 눈물져 올 줄이야.//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 마음 그림자는, 드디어 마음에도 등을 넘어 내려오는 눈물이 아니란 말가.// -- 문득 이 도령이 돌아오자, 참 가당찮은 세월을 밀어버리어, 천지에 넘치는 바람의 화안한 그림자를 춘향은 눈물 속에 아로새겨 보았을 줄이야.//

매미 울음 끝에 / 박재삼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비 올려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듯 쟁쟁쟁/ 천지가 하는 별의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아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쳐지기만 하노니.//

무봉천지(無縫天地) / 박재삼
저저(底底)히 할말을 뇌일락하면 오히려 사무침이 무너져 한정없이 멍멍한 거라요. 문득 때까치가 울어 오거나 눈은 이미 장다리꽃밭에 흘려 있거나 한 거라요. 비 오는 날도, 구성진 생각을 앞질러 구성지게 울고 있는 빗소리라요. 어쩔 수 없는 거라요. 우리의 할 말은 우리의 살과 마음 밖에서 기쁘다면 우리보다 기쁘고 슬프다면 우리보다 슬프게 확실히 쟁쟁쟁 아지랭이 되어 있는 거라요. 참, 그 때, 아무도 없는 단오의 그네 위에서 아뜩하였더니, 절로는 옷고름이 풀리어, 사람에게 아니라도 부끄럽던거라요. 또는 변학도에게 퍼부을 말도 그 때의 장독진 아픔의 살이, 쓰린 소리를 빼랑빼랑 내고 있던 거라요. 허구헌 날 서방님 뜻 높을진저 바라면, 맑은 정신 속을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웃녘에 돌림병이 퍼져 서방님 살아계시기를 빌었을 때에도 웃마을의 복사꽃이 웃으면서 뜻을 받아 말하고 있던 거라요. 그러니 우리가 만나 옛말하고 오손도손 살 일이란 것도, 조촐한 비 개인 하늘 밑에서 서로의 눈이 무지개 선 서러운 산등성 같은 우리의 마음일 따름이라요.//

 

임의 초상/ 박재삼

그 언제 그대와 헤어져 있게 되었을까/ 노래를 부르면 가까이 올 수 없을까// 멀리 휘파람 불면 숨소리가 닿을까/ 임은 가버렸네 허전한 내 마음 내 마음/ 산에 올라 풀잎 잡고 흐느껴 울어요/ 강가에 홀로 서 한숨을 띄워 보냅니다// 멀리 휘파람 불면 숨소리가 닿을까/ 임은 가버렸네 허전한 내 마음 내 마음/ 산에 올라 풀잎 잡고 흐느껴 울어요/ 강가에 홀로 서 한숨을 띄워 보냅니다//

* 바리톤 장철 가곡 : 임의 초상


햇빛의 선물 /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혹서일기 /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흥부 부부상 /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닿는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아름다운 사람 / 박재삼
바람이 부는 날은/ 별들이 갈대로 쓸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사람아.// 달이 높이 뜬 날은/ 별들은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을 보며 고개 숙인/ 아름다운 사람아.//

 




박재삼(朴在森 1933~1997) 시인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로 이어지는 가장 한국적인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경남 사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가난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으로 일하였는데, 그곳에서 교사이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에 입문하였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 나무》,《추억에서》등 15권의 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중앙일보시조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삼천포의 서정시인 박재삼을 만날 수 있는 박재삼 문학관

박재삼의 시, 그 깊은 세계박재삼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시를 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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