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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허수경 시인

부흐고비 2021. 5. 15. 10:34

시인론 / 허수경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이다. 여태껏 누군가가 써오던 시를 쓰면서 시인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고아인 시인들을 사랑한다. 모어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토에서 비틀거리는 시인들을 존경한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을 정확하게 통과(하는 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도 부도덕한 이들은 많다. 다만 부와 권력의 문화라는 것이 나를 미학적으로 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시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어쩌면 내 시쓰기의 모든 시간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시는 나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지만 시를 쓰는 시간, 그것 자체가 다만 답이다. 시를 쓸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나의 고아를 혹은 고아성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허수경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공터의 사랑 /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입맞춤 / 허수경
그 양반 생각만 하모 지금도 오만간장이 다 오그라붙제 무정한 양반 아니여/ 유정한 시절 꽃 분분 가슴살에 꽂힌 바람 된통부를 꽃물 듣는 아린 날 눈뜨면/ 멀어질새 눈감으면 흩어질새 부러 감은 듯 마는 듯 다소곳 숨죽인 듯 화들짝/ 불에 데인 듯 떨며 떨며 천지간에 둘도 없이 초승달 떼구름 흰 옷고름 개켜/ 넣으며 설핏허니 굴참남게로 넘어가면 이년 눈이 뒤집혀 병든 애비 버려두고/ 꺼짐부리 살림 접어두고 고만 밤도망질 치고 말았제 무정한 양반 대처살이/ 모질새 애먼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간 뒤 그 밤만 생각하모 불쌍한 울 아버지/ 쿵쿵 가래 기침에 엎어지며 끓여 먹을 냄비밥 간장종지가 더 애닯데이 더 목매인데이//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폐병장이 내 사내 /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 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 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불우한 악기 /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 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바다가 / 허수경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오후 두시경 / 허수경
영상 15도/ 바람은 서북, 구름// 아침에 잠깐 안개구름이 지나가고 난 뒤/ 맑은 하늘// 오후 두시경/ 문 앞에 하얀 병원차가 서고 들것을 들고/ 하얀 남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배달한 음식의 빈 식기를 가져나오듯 무념한 얼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미줄, 정원, 그림 같은 꽃, 구두 한짝, 그리고 반쯤 열린 문//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 / 허수경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이가 된다// 폭풍이 오고 지붕이 날아가고 지궁 아래에 있던 얼굴이 날아가고// 젖가슴이 작은 여자아이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거리를 서성인다 상어떼처럼 차들은 여자아이의 치마를 할퀴며 지나가고 검은 코끼리 같은 구름이 찢어진 치마 안에 손을 넣는다// 덜 자란 아이들은 언제나 덜 자라 이 거리에서 돈을 벌지 못하고 아이들의 가슴에 든 지폐는 영혼을 팔아 바다를 사고 적막한 눈을 감고 바다는 오 오 거리에서 팔던 오뎅국물처럼 졸아든다// 그리고 집을 묻는다 지나가는 사람은 술 취한 눈을 들어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낡은 들보 같은 여자아이의 젖가슴에 손을 집어넣으며 지나가는 사람은 아이를 안는다// 바람이 불고 바람 사이로 먹소금이 일어나 작은 자궁으로 들어가고 먼 훗날 그 자궁에서 늙고 조그마한 아가가 자라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 술 마시는 곳 기웃거리며 술병 깨고 손에 피를 흘리며 여관에서 혼자 잠, 여관 들어선 자리 밑 옛 미나리꽝 맑은 미나리순이 걸어들어와 저의 손으로 내 이마를 만지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고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은 그렇게 가고......//

그 옛날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 허수경
과수원 가까이에는 통조림 공장/ 과수원 가까이에는 마을// 한때 마을에는 사람의 아들에게 연애편지를 쓰던 호랑이가 살았네/ 우편배달부는 지난날 전쟁으로 살해되고/ 편지가 든 가방만이 과수원 나무에 매달려 있네// 과수원 가까이에 사는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했네/ 머리카락이 떨어질세라 흰 머릿수건을 쓰고// 여자들은 밤에도 낮에도 일을 했네/ 물과 피로 이루어진 생산기계/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여자들의 흰 손이 양수 속을 헤엄쳐다니네// 과일에 박힌 씨앗을 도려내고/ 토막토막 잘라서 끓는 설탕물 속으로 집어던지네// 거대한 화덕 위/ 씨앗 없는 과일들이 설탕물 속에서 쏘다니고/ 우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과수원 나무에 매달린 주인 없는 가죽가방 속에서/ 오래된 문자로 쓰여진 편지가 지상으로 떨어지네// 내 짐승의 자궁을 받아주어요 누군가 공장의 그늘 아래에 멈추어 서서 늙은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었네// 공장이 문을 닫은 지도 오래되고 이곳이 먼 훗날 바다가 될는지 바다가 생겨서 물고기들이 낡은 공장의 들보 사이를 걸어다닐는지 알 수 없네//

먹고 싶다 / 허수경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둘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초자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어느날 애인들은 / 허수경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 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달빛 / 허수경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량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 한 것이 화정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 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 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새벽 발굴 / 허수경
아직 해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으로 올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삼 초 간격으로 달라지는 하늘빛을 보세요/ 마치 적군의 진격을 목전에 둔 마을/ 여인들의 공포 같은/ 빛의 움직임//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사탕수수도 목화도 자라지 않는 이 폐허/ 해는 이곳에 아찔한 정적을 경작하고/ 햇빛은 자유 데모보다 더 강렬하게/ 폐허의 심장을 움켜쥐지요//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기술은 귀여워요, 감쪽같이 당신이 이 지구에 있었던 마지막 자리를 남북경위도 숫자로 딱 매겨내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격자 안에 든 작은 발굴지 지도를 좀 보세요, 그 안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가 됩니다)// 그대들은 누구이신지요 앉은 다리로 서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이 무덤 안에 든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햇빛이 나오자마자 날아오는 초원의 파리떼들/ 아직 산 자의 뜨거운 얼굴 땀으로 엉겨드는 파리떼들// 이름 없는 집단 무덤/ 해골 없이 다리뼈만 남아 있거나 마디가 다 잘린 손발을 가진 그대들/ 해와 달이 다 집어먹어버린 곤죽의 살덩이들은/ 흙이 되어 가깝게 그대들의 뼈를 덮었는데/ 아직 흙에는 물기가 남아 있어/ 비닐봉지에 그대들을 담으면 송송 물이 맺힙니다//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심장 없는 별을 군복 깊숙이 넣고 사는/ 그대들은 누구인지요 저 초원에 사는 베두윈들이/ 별에 쫓겨 이 폐허로 들어와 실타래 같은 짠 치즈를 팔고/ 해에 쫓겨 헉헉거리다 잠시 휴식시간,/ 설탕에 절인 살구를 치즈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는/ 이 점령지 폐허에서 그대를 발굴하는/ 이는 또 누구인지요// 저 해는 제 식민지를 잘 관리하는 이를테면 우주의 소작인인데/ 그리하여 우주보다 더 혹독하게 폐허의 등허리를 누르는데/ 흙먼지 미립 속에 찬연히 들어와 움직이는 식민 권력 속에/ 목마른 이는 물을 구하러 마을로 가고/ 폐허에 남은 이는 그대가 든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어주며/ 그대의 마지막 물기를 말리고 있습니다//

스승의 구두 / 허수경
구두는 쉴새없이 낡아가고/ 장대동 중앙시장에는 새 상가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어오는 오늘의 피곤이/ 이십 년은 족히 넘은 스승의 서재에서/ 먼지로 앉고/ 스승은 넥타이를 푼다// 새로 산 책을 넘긴다/ 스승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도시를 다스리는 정/ 의론과/ 인권론과 형평론을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눈을 부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승은 낡아가고/ 구두는 현관에서 낡아가지만/ 내일도 장대동 중앙시장/ 새로 선 상가를 지나/ 하룻밤새 또 건물을 지은/ 도시의 길을 밟을 것이다// 스승은 낡은 구두처럼/ 새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스승이 낡아가는 것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휠씬은 더 먼저 낡아갈 것인가//

언덕 잠(봄) / 허수경
꽃 든 자리/ 꽃 나간 자리// 아득한/ 어두운// 여보세요/ 불 좀 껴주세요// 환해서/ 잠 안 오네요//

봄날은 간다 / 허수경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기차는 간다 /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기차역 / 허수경
그때 나 갓 스무 살/ 그 거리, 혼불이 든 영혼의 거리/ 그대를 기다렸네/ 내 옆에 보자기를 풀어 빗이나 실이나 단추를 팔던/ 아낙, 그때는 80년대// 독재자의 얼굴로 돌이 날아가고/ 흰옷을 입은 여자들이 한 거리에서 춤을 추고/ 그대가 오던 길이 막히고/ 아낙이 젖 먹던 아이의 얼굴을 시커먼 손으로 훔처주며/ 고개를 숙일 때//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시계를 바라보며/ 오후를 넘긴 해가 멀리 지구의 저 너머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때 내 영혼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대여, 이 속수무책은 그때 그 도시를 다스리던 독재자의 선물인가,// 내가 그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느낌,/ 내 일생의 어떤 순간도 더 이상 기다림으로 허비하지 않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기다림을 거부하며,// 어둑한 그 거리에서/ 아낙이 단 하나의 빗도 팔지 못하던 그 거리에서,/ 어떤 독재보다 더 지독한 속수무책은/ 내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검열했고/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믿지 않는 것, 그때,/ 그대는 끝내 그곳에 오지 않고// 지금 나는 사십이 되어 비 오는 이방의 어둑한 기차역에 서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오십 분 연착된다던 기차는 두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고/ 펑크 계집아이 하나가 맥주 하나 마실 돈 달라고 손 냉미는데/ 지금 이 속수무책도 그때 그 독재자의 선물인가,/ 나 그때 지금까지 당도하지 않는/ 그대를 기다려야 했는가//

우리는 촛대 / 허수경
우리는 촛대/ 누군가 맑은 짐승의 기름을 굳혀 만든/ 불을 켜주오// 그 겨울, 얼음 선 마을/ 않은 몸/ 사지 오지 저 드나먼 언덕의 철거울// 그 흩어진 본의 기름을 짜서/ 만든초로/ 불을 켜다오// 우리는 촛대 저물렁거리는 밝음 아래/ 대지에 떨어지는 붉은 콩 같은/ 기름을 받는/ 말을 견뎌내는/ 촛대// 붉은 채소는붉게 다지고 푸른채소는 푸르게 다지는/ 여자들이 어둔 국솥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 우리는 그런 시절의 촛대//

우연한 나의 / 허수경
내 마을은 우연한 나의 자연/ 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 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 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 허수경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 안/ 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 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구든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강 / 허수경
강은 꿈이었다/ 너무 먼 저편// 탯줄은 강에 띄워 보내고/ 간간이 강풍에 진저리치며/ 나는 자랐다// 내가 자라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강 저편보다 더 먼 나를/ 건너온 쪽에 남겨두었다// 어느 하구 모래톱에 묻힌 나의/ 배냇기억처럼//

물좀 가져다주어요 / 허수경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이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옥수수를 심을걸 그랬어요그랬/ 더라도면 아이들이 그 앞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이 안부 좀 전해주오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 이 될 시간도//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 허수경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 고//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물 재우며//

 

별을 별이 / 허수경
별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고 칼로 별을 도려낸 흔적을 가진 이도 있고 그 흔적을 개조해서 무덤으로 만든 이도 있고 공중에 별을 걸어놓고 벌집을 만든 이도 있지만// 별로 밥을 먹거나 별을 살 속으로 깊이 집어넣고 우는 이도 있고 진저리를 치며 가까운 별을 괴롭히거나 별을 구우려고 불을 피우거나 하는 이도 있지만// 별을 사막에서 바라보면 별을 사막의 바람이 자고 난 뒤 바라보면 사실 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고 별이 우리를 가지고 있지만//

저 山水가 / 허수경
저 山水가 날 기댈 데 없이 만드네 저 유정한 山水가/ 저 혼자 무정한 시절을 거느리려고 하는가// 나 돌아갈 곳 저곳뿐 저곳뿐 생각나면 언제나,/ 비린 찬 올라오는 아침 밥상처럼 아늑한가// 저건 처녀의 무릎, 저건 지옥/ 그야 뭐 다 놓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수채의 지옥, 그러나 저곳마저 기대지지 못한다/ 면 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야 하나// 죽어 발목에 명찰을 달고 저 山水 속에 버려져야 하는/ 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생각하며 가버려야 하는가//

맑은 전등 / 허수경
바다 마을/ 집 한 채// 다리를 오므리고 실파를 다듬는 계집아이/ 튼 손등에 오그리고 앉은 실파 냄새// 아이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먼 검바다 뜬 배/ 닻에 붉은 오징어 다리가 감겼다/ 힘찬 오징어 다리// 파뿌리처럼 오그리고 있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 허수경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우연한 감염 / 허수경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 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 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라고//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 허수경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절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우리들의 저녁식사 / 허수경
토끼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었네/ 아둔한 내가 마련한 찬을 토끼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요리는 토끼고기// 토끼도 토끼를 먹고 나도 토끼를 먹는다/ 이건 토끼가 아니야, 토끼고기라니까!/ 토끼고기를 먹고 있는 토끼는 나와 수준이 똑같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식사가 그렇지 않을까요/ 풀을 불러놓고 풀을 먹고/ 추억을 불러놓고 추억을 같이 먹고/ 미움을 불러놓고 미움을 같이 먹었더랬지요// 우리는 언제나 그랬지요/ 이 세계에 있는 공허한 모든 식사가 그랬지요//

시간 언덕 / 허수경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 비씨 2100년경의 무너진 담이 나온다 담 높이는 이십 센티, 다시 밑으로 밑으로 합쳐서 일 미터를 더 판다 체로 흙을 쳐서 흙 안에 든 토기 파편까지 다 건져낸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년, 압둘라가 아침밥을 먹으러 간 사이 난, 참치 캔을 딴다, 누군가 이 참치 캔을 한 오백 년 뒤에 발굴하면 이 뒤엉킨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시간언덕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사랑의 不善 / 허수경
너는 왜 胃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 로 들어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두께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 허수경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몽골리안 텐트 / 허수경
숨 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부취부귀(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늙은 가수 - "뽕짝의 꿈" / 허수경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젖이 꽃잎 열 듯 발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대구 저녁국 / 허수경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추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데를 가고 싶었다/먼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이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데를 가고 싶었다/먼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 허수경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흰/ 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 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 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 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 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 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 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 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일락 / 허수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 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이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 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 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 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 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 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 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 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 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가을 물 가을 불 / 허수경
그 강// 내가 자란 마을 강 천지로 불 일듯,/ 붉은 잎 떨어질 때/ 그때 그 강가에 서서/ 아마도 누군가 기다리는 뱃사공 본 듯.// 그 뱃사공이 마시던 주발에/ 붉은 잎 떨어지는 것 본 듯.// 검은 이불 속을 뒤척이며/ 서리서리 퍼런 물./ 퍼런 물속 순한 물이/ 되는 불 만난 듯./ 기다린 듯.// 거친 손을 뱃사공이 내밀며/ 가자, 가자 ,할 때./ 그때 어디로,/ 라고 묻지 못하는 길/ 오랫동안 걸은 듯.// 가을 물 가을 불 속 검은 이불 속,/ 순하게 사라지는 꿈꾼 듯// 고개 숙이고/ 강 저쪽을 바라보던 이/ 실은 뱃사공 무심하게 노를 그은 듯.//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 허수경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 빛이거나 누런 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 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허수경(許秀卿, 1964~2018) 시인
경상남도 진주 출생, 1987년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독일 뮌스터대학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2018년 10월 독일에서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2001년 제14회〈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 198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2001),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이 있다.

 


 

고 허수경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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