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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담쟁이덩굴 / 정원영

부흐고비 2021. 5. 26. 09:19

이래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는가. 보통 살아있을 것 같지 않는 담쟁이 줄기에 눈길이 닿는다. 막 나온 새순은 깨끗이 빨아서 붓걸이에 걸어 놓은 작은 붓 같기도 하고, 참새 혀 같기도 하다. 딱딱한 시멘트 벽 표면에 발판을 이용하여 담쟁이줄기가 착 붙어있다.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 살아가려는 애착이 손끝에 전해온다. 생명을 이어가기위해 벽을 손끝으로 움켜쥐며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잔인함을 느꼈다. 역설적으로 보면 경이감을 느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인근 언덕위에 있는 고등학교담장은 대형벽돌구축물로 높게 만들어 놓았다. 아침이면 운동장과 교사 주위를 휘돌아 이어져있는 긴 담장 옆을 걸어서 운동하러 간다. 물 한 모금 머금지 않은 듯. 가죽구두 끈 모양을 한 담쟁이줄기를 보면 심어 놓은 지 몇 해 안되어 보인다.

자연의 힘 앞에서 대항하지 못 한 무력인지, 아니면 사람의 손에 의해서인지 벽에 붙어 있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다. 땅을 향해 늘어진 줄기에서도 어린 잎눈이 연두색 빛을 띠고 있다. 안쓰러워 벽에 붙여 봐도 이내 축 늘어지고 만다. 곧 생기를 찾으리라 믿으며 다른 줄기 속에 끼워 놓았다.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서도 싹을 틔우려는 의지에서, 나는 외세에 짓밟히면서도 끈기 있게 버텨온 우리 민족의 끈기를 느낀다. 이상화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듯이.

혹한의 눈바람 속에서도 새봄을 맞이하려는 굳은 의지로, 꿈을 안고 버티며 참아냈으리라. 보기에는 영혼마저 말라 죽었을 것 같은 줄기를 하고, 어미 잎 떠난 자리에 새 싹을 틔우고 있다. 줄기 끝까지 물을 끌어 올릴 힘이 부쳤는지 어느 끝 줄기는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투를 버리면서 해마다 조금씩 커가는 것을 본 것이다. 우리 아파트 담벼락의 담쟁이처럼 풍성하게 되려면 몇 번의 같은 시련을 더 격어야 할까. 싱그럽게 물오른 담쟁이 만 보았을 땐 이토록 힘들게 담벼락을 오르는 줄 몰랐다. 이제야 가까이 다가가 눈 맞춤을 오래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서는 벽 앞에서 낙담하고 피하려고 만 하였다. 당당히 맞서려는 힘이 부치면 주저앉아 포기하기도 하였다. 담쟁이는 달랐다. 높은 곳 까지 올라 담장을 덮으려면 아직 멀었다. 담장높이는 팔 미터가 족히 넘어 보인다. 담쟁이는 내 키만 하거나 작다. 며칠 사이로 이파리는 점점 제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새 줄기도 쭉쭉 하루가 다르게 이상을 향하여 뻗어가고 있다. 오직 담쟁이는 혼자의 힘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포기란 없다는 듯이.

나는 오래 전부터 곱다는 이유로 가을이면 담쟁이 붉은 잎을 채집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 담벼락을 곱게 채운 담쟁이 잎은 꽃같이 아름답다. 그대로 보내기가 아쉬웠다. 해마다 책갈피에 차곡차곡 끼워 넣곤 한다. 하트모양의 작은 잎, 손바닥처럼 생긴 큰이파리 각각의 쓰임도 다양하다. 흰색 잴펜으로 좋은 시의구절을 써서 친구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담쟁이 잎은 빛깔이 고울 뿐만 아니라 모양도 예쁘고 표면이 매끄럽고 두꺼워 글씨가 잘 써진다. 코팅을 하면 영구적이다.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집 신발장에는 좋은 글을 써넣고 코팅한 다섯 장의 담쟁이 잎을 요리조리 배치해 붙여놓았다.

네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 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신발을 꺼내며 읽어보고 청소할 때 신발장문을 닦으면서도 천천히 읊조리며 마음의 평온을 찾는 시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 가을이었다. 오래 동안 나와 같이 봉사하시던 칠십대 후반이신 선생님께서 췌장암으로 판명이 나셨다. 항상 웃는 얼굴에서 큰댁집안의 오라버니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분이시라 더욱 안타까웠다. 치료하시는 중 하루 시간을 내어 봉사실에 들리셨다. 눈과 볼이 푹 들어간, 많이도 야윈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밝게 웃는 모습을 하고 계서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희망을 갖고 치료에 임하시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순간 아‘그거 나는 재빨리 수첩에 끼워 넣었던 담쟁이 잎을 꺼내어

“선생님 며칠 전에 넣어둔 담쟁이 단풍이에요. 높은 담벼락을 오르는 담쟁이덩굴처럼 끝까지 병마와 싸워 이기세요. 좋은 글이라도 썼으면 좋으련만, 선생님 오실 줄 몰랐어요.”

환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수첩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넣으시면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간밤의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남은 잎 새를 보고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된 소녀처럼, 선생님께서도 담쟁이 잎을 보시고 쾌차하기를 바랐다. 장애물이 앞에 놓여도 절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오르는 담쟁이의 특성을. 작은 잎이 주는 메시지를 선생님께서는 분명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담쟁이가 새싹 틔우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길에 핀 소박한 들꽃이 애잔하게 다가오고, 이슬 맺힌 풀포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올봄에 가녀린 담쟁이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아침마다 마주하는 담쟁이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의 특성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버틴다. 90도의 각도를 오체투지하며. 힘차게 뻗어나가는 담쟁이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푸른 담쟁이덩굴을 일컬어, 푸른색의 가볍고 얇은 비단을 칭하는 청라(靑蘿)라고 불리었음을 알 것도 같다. 신사임당은 자신의 당호를 현모양처로 알려진 주나라 문조의 어머니인 태임당(太任堂)을 닮겠다는 뜻으로 사임당(師任堂)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나는 당호를 청라당(靑蘿堂)으로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 해 본다.

잔인하리만큼 온 힘을 쏟는 담쟁이의 굳센 의지에 존경심을 보낸다. 자르르 윤기 흐르는 이파리 정성 다해 키우는 담쟁이처럼, 남은 인생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특성을 닮아야겠다. 꽃같이 곱게 물든 담쟁이 잎처럼 고운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다. 허름한 담장도 담쟁이덩굴이 감싸주면 운치 있는 담벼락이 되듯, 나 또한 마음자락 펼쳐가며 남의 허물도 감싸 주리라. 비단결처럼 고운 심성으로 내 살아가는 넓은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품어 주련다. 나약한 이들에게 살아가려는 의지와 꿈을. 넘을 수 없는 난관이 가로 막아도 오르고 오르면 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듯이.


▲ 정원영 수필가
‧ 수필⌜춘추⌟등단. ⌜서정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 한국예총 부천지회백일장 장원, ‧부천문화원 시조백일장 최우수, 향촌문학회 전국여성문학대전 최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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