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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다로 간 인어 공주 / 문춘희

부흐고비 2021. 5. 28. 12:42

인어 공주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이 꼬리 대신 다리를 갖게 해 주세요."

"그러면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게 주어야 한다. 만약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서 거품이 되고 말아. 그래도 좋으냐?"

"네, 왕자님만 볼 수 있다면……."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유치원생인 막내가 작은 사고로 집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에 입원한 지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수십 권도 넘게 읽어 주느라 나는 동화구연가가 다 되었다.

곤히 잠든 아들에게 이불 자락을 덮어 주고 병원 복도로 나와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온갖 약품 냄새와 신열로 들뜬 신음 소리가 밤새 뒤섞여 굴러다니는 병실 공기는 사람을 어지간히 지치게 한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칼끝 같은 바람이 휘리릭 얼굴을 할퀴며 복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맵고 차지만 오히려 상쾌하다. 밤하늘에는 먼 데서 바라본 무수한 아파트촌 불빛 같은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다. 저만치 아래로 보이는 거리에는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다닥다닥 붙어 있다. 칠 층 병원 복도에서 내려다본 집들의 창문이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 카드만 한 창문에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실루엣들이 어른거린다. 창문 틈 사이로 밥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치이칙 치이칙 익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창문들을 하나하나 스르르 열어 보면 각양각색의 삶들이 수많은 자음과 모음으로 빼곡히 적혀 있을 것이다. 오늘 오후에 병원으로 찾아온 S의 이야기도 그 많고 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쇼팽의 '녹턴'이 요요하게 흐르는 병원 근처의 카페에서 S를 만났다.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몹시 단호했다.

"이제는 그 사람이 없으면 이 세상 무엇도 나에겐 의미가 없어. 모든 걸 다 버리고서라도 그 사람을 따라가고 싶어."

습격처럼 찾아든 너무나 낯설고 놀라운 이야기에 나는 낮꿈을 꾸고 있는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 연합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S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선이 고운 얼굴에 자태까지 몹시 아름다웠던 그녀는 선배, 후배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목련꽃 향기 같은 단아하고 순한 것들의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자분자분한 말의 숨결이며 후배들을 따뜻하게 챙겨주는 마음 품새가 좋았다. 그녀도 외로움을 많이 타던 나에게 유독 살갑게 대해 주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친자매처럼 여기저기를 우르르 쏘다니며 깔깔거리기도 하고, 도서관에 붙어 앉아 중등 교사 임용 고시를 함께 준비하기도 했다.

S는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어느 산골짜기에 국어 교사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 교사와 결혼도 하고 아이 둘을 낳고선 다시 D시로 전근을 왔다. D시로 온 S를 가끔씩 만날 때마다 그녀에게선 희고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들이 바람에 쏴아아 쏴아아 서럽게 몸을 떠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미소에서는 외로움이 설핏 설핏 묻어 나왔다. 그녀는 몸도 마음도 모두 곡기를 끊은 듯 시름시름 시들어 갔다. 마치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 같아 보였다.

"나는 빈 상자 같아.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사는 것 같아."

그녀는 자신의 덤덤한 결혼 생활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산골짜기에 발령을 받아 몹시 외로웠던 시기에 남편의 적극적인 구혼을 받아 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에게는 한 번도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남편은 퇴근을 한 그녀를 제일 먼저 맞아 주는 낯익은 푸르스름한 거실 벽지 같은, 오래되어 만만하고 편안해진 가구 같은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녀는 그저 그런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공허함도 그 어떤 아픔만큼 통증을 동반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공허함에는 약도 처방도 아무 소용이 없음도 그때 알았다. 나는 그녀의 황량한 모습을 볼 때마다 목젖이 싸아하게 젖어 왔다. 그러던 그녀가 작년에 인도로 여행을 다녀오더니 사뭇 달라졌다. 그곳에서 K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K는 S의 동아리 남자 선배로 학창 시절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둘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인도로 해외 파견 근무를 나온 K에게도 눈송이처럼 소담스런 두 딸과 아침마다 그의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 놓는 아내가 있다고 했다.

근래에 그녀는 꽃 빛깔 같은 환한 미소로 나를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거실 창 너머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예기치 않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부신 미소도, 갑작스런 생기도 왠지 불안했다. 분명 덧니처럼 감출 수 없는 비밀을 가진 듯했다. 얼마 후, 묘하게 아름다워지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그녀에게서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고 말았다.

"나는 지금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난 그저 나 자신이기만 하면 안 될까? 애들은 굳이 내 손길 같은 거 없어도 될 만큼 커 버렸어."

그녀는 혈관이 찢어지는 듯한 격렬한 아픔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듯 앙다문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지금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가슴을 베여 피를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름답고 달콤하기만 한 줄 알았던 사랑, 그 깊은 곳에 예사롭지 않은 칼이 숨겨져 있음을 뒤늦게 알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리한 칼날에 베이는 것조차 결코 피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래도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지다 보면 그녀의 베인 가슴도 점차 아물겠지. 습해진 마음은 볕 좋은 날 꺼내어 자주 말려 주면 되겠지.

병원으로 돌아오는 내내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 점 없는 듯 숨이 막히고 답답하였다. 다리는 자꾸만 허방만 짚고 있었다. S는 뒤늦게 만난 신기루 같은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백년가약을 맺었던 남편을 버리고, 자신이 피워낸 아직은 어리고 성긴 꽃송이들을 버리고 위험한 사랑을 찾아 떠나겠다는 S. 사람인 왕자를 사랑한 인어 공주가 자신이 살던 곳과 부모, 형제를 버리고 자신의 혀를 버린 대가로, 사람의 다리를 얻어 왕자가 있는 세상으로 나가지만 결국엔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마는 동화 속 인어 공주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슬프고도 비극적인 이야기, 참담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인어 공주와 S는 지금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는 대가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가로 자신이 동경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슬픈 인어 공주였다.

나는 S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그저 아프게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인어 공주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인어 공주가 제 본래의 고향인 깊고 푸른 바다속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그녀에게 왕자의 가슴을 깊숙이 찌를 칼 한 자루를 쥐어 주어야 하리라. 나는 그녀에게 쥐어 줄 칼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칼을 만들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열었다. 내 아이에게 들려줄, 그녀에게 다시 들려주었을 때 칼이 되어 줄 수도 있을 인어 공주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고쳐 쓰기로 했다.

인어 공주는 왕자의 침실로 살며시 들어갔어요. 인어 공주는 왕자의 심장 한복판을 깊숙이 찔렀어요. 그러자 왕자는 짚으로 만든 인형으로 변했어요. 공주는 깜짝 놀랐어요. 여태 자신이 사랑한 왕자가 짚으로 만든 인형이었다니. 인어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갑판 위로 뛰어갔어요. 다섯 명의 언니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언니들과 함께 깊은 바다속 화려한 성(城)으로 돌아갔어요. 인어 공주는 아버지와 언니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밤새 장시간의 노동으로 허기진 가로등도, 가로수 이 가지 저 가지를 헤매며 웅웅 울어 대던 겨울바람도 잠을 자는지 사방이 적요하다. 병실 창 너머로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희부윰한 해가 서늘하게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다 빛깔보다 더 새파란 컴퓨터 모니터 위로 여러 명의 인어 공주들이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힘차게 헤엄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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