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뒤란 / 우종률

부흐고비 2021. 6. 4. 09:02

“얼레리 꼴레리 소문내야지, 누구누구는 뒷단에서 뭐뭐 했대요, 뭐뭐 했대요.”

하필이면 동네에서 제일 개구쟁이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아마도 녀석의 눈엔 특종 감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심심하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는가 일부러 찾아다니던 아이들이 아니었던가. 우리 집 뒤란과 동네 정자나무와는 일직선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무를 타던 녀석에게 그만 발각되었던 것이었다. 소문은 봄부터 여름 내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마침 도시에 사는 친척 여동생이 와서 소꿉놀이로 음식을 만들어주던 참이었다. 음식이라야 우물가에 달린 풋-앵두를 따고 사금파리를 빻아 양념으로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모두 주고 싶었다. 아이도 유난히 나를 따랐다. 도시아이들에겐 간섭받지 않는 그런 공간이 얼마나 흥미로웠겠는가. 뒤란은 나에게 사랑의 꿈을 키워주던 곳이었다.

아니 또 있다. 뒤란은 어머니의 부지깽이 꾸중을 일차적으로 피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야 무거운 책가방이 필요가 없고 가사일 돕는 일이 학교 일보다 어쩜 더 중요하였다. 방과후면 소꼴 베기나 소 풀 뜯기기가 오후의 나의 일과였다. 그도 꾀가 나서 들과 산으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다 해가 저물어야 돌아오면 어머니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뒤란으로 도망가면 어머니는 일단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날 보듬어주던 아홉 살의 뒤란, 모든 꿍꿍이 수작들을 만들어 내던 그곳을 우린 ‘뒷단’이라고도 불렀다.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생가로 문학기행을 갔다. 동행한 문우들은 모두들 옛이야기로 여념이 없다. 대청마루에 앉아 보기도 하고 지게를 지면서 ‘내 어렸을 때’를 이야기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겹게도 가난했던 시절에 집착을 하는 건 왜일까. 조용한 날이 없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집안을 한 바퀴를 휘돌아보다 나는 뒤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맨땅에 펑퍼지게 앉아 땅따먹기라도 할 그런 작은 마당마저 없었다. 대신 쪽마루가 댓 자로 이어져 있었다. 겨우 엉덩이나 비집을 정도의 폭이었다. 오랜 동안 잊고 지냈던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바라다본 운동장과 교실 의자가 그랬다. 그때보다 꿈은 더욱 작아지고 허상들만 차 있으니 커졌다 고만할 순 없으리라. 그 시절 찬란했던 꿈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은 허물 벗은 껍데기만이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 야트막한 담장엔 이엉이 가지런하게 이어져 있었다. 시인은 여기서 무엇을 노래했을까.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시인은 아이를 여의고 서러운 마음을 ‘유리창’으로 이 뒤란에서 속울음을 삼켰던가.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으면 피멍이 들 정도였으랴. 언어의 감춤은 어디까지였을까. 검은 안경테 안에 숨겨진 불면의 나날들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뒤란을 두고 수군거린다고 한다. 대나무가 소소하게 울고 동백꽃 또한 도란도란 말소리를 죽이며 피었다 지는, 구석진 자리에서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 수군거린다고 한다. 살면서 지붕 끝에 닿으려고 모둠발로 용솟음도 쳐보고, 수많은 변신도 꾀해 보았지만 여전히 내가 찾던 희망은 자꾸만 달아나곤 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더 큰 욕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도회가 싫어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내 마음의 뒤란 한 쪽에선 도시의 미아가 되는 꿈을 간간이 꾼다. 아직도 내가 바라던 유년의 소꿉손님 같은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음인가. 아, 차려 논 그날의 풋-밥상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쪽마루에 앉아 끝없는 미궁에 빠져본다. 다가오지 않는 나의 뒤란이 가물가물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고개를 젖히니 목 울대로 울컥 설움 한 점 넘어간다.

“뭘 하세요. 다들 단체사진 찍는데 ……”

펼쳐 놓은 가슴을 여미며 돌아서 나가니 저마다 한마디씩 거드는 듯하다.

“얼레리 꼴레리 누구누구는 뒷단에서 뭐하고 왔데요.”

왁자한 소리가 시리도록 푸른 봄 하늘로 동심원이 되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갖춘마디 / 윤미애  (0) 2021.06.04
그때가 좋았어! / 이종전  (0) 2021.06.04
그 사람 / 노정숙  (0) 2021.06.03
피어라, 오늘 / 노정숙  (0) 2021.06.03
봄봄봄 / 노정숙  (0) 2021.06.0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