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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침묵의 소리 / 최민자

부흐고비 2021. 6. 28. 09:04

딴딴하고 말쏙한, 그러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아보카도 씨에게는 씨앗보다 씨알이 더 잘 어울린다. 기름진 살 속에서 막 발굴된 그것은 멸종된 파충류의 알 화석을 닮았다. 세상을 향해 분출시키고 싶은 강렬한 에너지가 강고한 침묵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씨알이 내게 침묵으로 명한다. 날 심어 줘, 쓰레기통 같은 데에 버리지 말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해줘…….

수박씨나 복숭아씨 같은 것을 버릴 때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애써 무르익힌 과육을 송두리째 헌납하는 푸나무들에게도 통 큰 계산이 있을 법한데 인간들은 모르는 체 제 잇속만 챙긴다. 흙에 묻어 주면 수백 곱절 되돌아올 생산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리면서도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

심지도 버리지도 못한 씨알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하룻밤 지나니 연갈색 표피 위에 가느다란 핏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확대된 안구 사진 같기도 하고 막 부화가 시작된 난황 같기도 하다. 크기 때문일까. 이 씨알은 더 버리기 힘들다. 서양 남자의 민머리처럼 둥글고 단단한 외형에서 불끈거리는 저항성이 느껴져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일에 죄책감마저 느끼게 한다. 흙냄새를 맡으면 금세 갈라져 하루아침에 성큼 하늘을 찌를 동화 속 콩나무 같기도 하다. 씨앗의 의중이, 내부가 궁금하다.

우툴두툴한 피부에 푸르뎅뎅한 색감의 이 과일이 알사탕 크기의 묵직한 씨를 설계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다지 매혹적이라 할 수 없는 외모에 후숙後熟되기 전까지는 맛도 향도 별로여서 들짐승이나 새에게 먹힐 것 같지 않다는 자기성찰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애시 남에게 호감 줄 외양도 아니고 향기를 팔 주제도 못되니 스스로의 하중과 중력의 힘을 빌려서라도 번식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속 깊은 계산 같은 거 말이다. 건조하고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면 스스로 오래 견뎌야 하니 악어 등가죽 같은 피부 밑에 기름진 살점도 비축해 두었을 테고.

​ 과육이란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힘 가진 자들에 바치는 세금이거나 조공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 자리에 붙박여 살아내야 하는 푸나무들이 제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발 달린 것들을 하수인으로 부려야 하는데 그냥 부탁하기가 면구스러워 교통비를 제공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씨가 주主고 살은 종從이었던 게 까다로운 거간들 비위를 맞추다 보니 부가세 내지는 인건비가 비싸져 주객전도로 바뀌었을 것이고.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자신의 창조물들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흡족해하시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지만 나는 꽃이나 열매가 애초부터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진화생물학적 입장에 한 표를 던진다. 처음엔 하찮고 수수했으나 진딧물 같은 작은 벌레들의 즙이나 빨아먹던 벌이 식성을 바꿔 채식을 하게 된 이후로 다양한 꽃식물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는, 벌 나비가 가루받이를 돕지 않았다면 꽃들의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열매도 다양하지 못했을 테고. 열매가 과일로 격상된 이면에는 인간의 개입이 불가피했을 터이지만 꽃들이, 과일이, 인간을 위해 진화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도모하는 모든 일이 다 제 살자고 하는 일이니.

그나저나 이 민둥머리, 살점이 발리고 발가벗겨져서까지 자꾸자꾸 감정이입을 종용하는 것,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죽은 척 잠잠해도 진즉 상황 파악을 끝낸 것인가. 이역만리에서 뿌리라도 한번 내려 보려면 벌 나비가 아닌 지금 이 인간을 이용할밖에 없다는. 싱크대를 닦으려 씨알을 집어 올리려니 시끌시끌한 침묵이 나를 마구 흔든다.

'좋아좋아. 잘하고 있어. 우선 싹부터 내야 하니 이쑤시개 몇 개 몸통에 박아 물 채운 소주잔에 밑 부분만 잠기게 걸쳐놔 줘봐. 그렇게 몇 주 기다리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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