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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인찬 시인

부흐고비 2021. 7. 7. 02:44

아카이브 / 황인찬
이 계단을 오르면 집에 이른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마다 여름은 창턱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한다​// 이 계단은 집을 벗어난다​// 여름에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여름이 이리저리 피어 있는 풍경이다/ 낮은 풀들이 한쪽으로 밟혀 누워 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구관조 씻기기 / 황인찬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예언자 / 황인찬
차를 마시고 싶어서 찻잔을 만지려다 연거푸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알아차린 것이다/ 찻잔이 죽어버렸다는 것을//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고, 두 사람은 충분하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을 안아 줘야지, 나는 생각했지만 그러다 알아차린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는 것을// ​교회에 갔는데 광목으로 두 눈을 가린 이가 있었다/ ​내가 올 줄을 알았다고// ​혼자서 눈밭을 걸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고,/ 나는 알아차렸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념사진 / 황인찬
“우리들의/ ​잡은 손 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 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캐치볼 / 황인찬
던진 공이 돌아오지 않는다/ 파울/ 선언하는 새들// 잔디가 자꾸 죽으려 한다/ 죽은 것은 투수// 나는 그 자세가 마음에 든다/ 공의 속도로/ 지면과 새가 부딪치듯이// 손이 자꾸 헛나가니까/ 내가 자꾸 누우려 한다// 원근법에 의거하여/ 글러브는 펜스 위에, 잔디밭은 구름 위에/ 아니 조금 더// 던진 공이 날아간다/ 글러브와 잔디밭을 통과하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적 없으니까/ 새들은 침묵한다//

건조과 / 황인찬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다 책상 아래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희지의 세계 / 황인찬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네가 아닌 병원 -희지의 세계 / 황인찬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이 있고 책상에 누가 누운 흔적이 있고 수백 개의 창이 있고 수백 개의 창이 있고 거기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조용히 움직이는 추침이 있고 망상과 전망을 혼동하는 시인이 있고 점차로 잦아드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낮과 무관한 밤이 있고 눈뜨지 않는 육체에 갇힌 영혼이 있고 창밖으로 무수하게 펼쳐진 마지막 잎새가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자주 아픈 사람은 병원에 자주 가고 계속 아픈 사람은 병원에 계속 있고 아프지 않으면 오지도 못하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

다정과 다감 - 희지의 세계 / 황인찬
한 사람이 자꾸 공원을 헤매는 장면을 상정해 본다 두 사람이 물 위에서 노를 젓는 장면을 병치해 본다 한낮의 공원, 하고 떠올리면 떠오르는 것들을 한낮의 공원이라는 말이 대신해 주고 있다//고수부지의 두 사람, 바글대는 여름의 날벌레들,/ 모두가 내린 버스에서 홀로 내리지 않는 한 사람 같은// 그러한 장면이 이 시엔 없고// 영화를 보는 장면이 갑자기 끼어든다 영화 속에서는 사람들이 죽는다 원래 죽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 밖에서도 사람은 죽지만 거기에는 자막이 없다// 이 시에는 다른 어떤 시들처럼 사람이 등장하고,/ 그 사람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공원으로 나오면 잔디를 밟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것을 반드시 다라야 한다 쓰인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현대의 한국어 문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한낮의 공원,// 이쯤에서 시선이 멀어지는 것이 좋다 새가 날아갈 수도 있고, 공원을 둘러싼 도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아니면 더욱 멀리 가거나,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시를 끝낼 수도 있지만// 잔디를 밟지 않으려고 어디로도 가지 않고/ 잔디의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이 슬프지 않다// 그렇게 써도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다//

오수 / 황인찬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그것은 소설이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 아이는 개였다/ 하얗고 털이 많고 항상 혀를 내밀고 있다// 그 아이는 운전을 잘하는 개여서/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든 갔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개였다/ 나의 품에 안겨서 자주 낑낑거렸다// 석양이 질 때면 우수에 찬 개였고/ 머리를 기대어 앉으면 두 심장이 뛰는 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나의 영혼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너무 좋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개에게 고백했다// 사, 랑, 해// 너무 떨려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꾸 짖었다”// 그것을 다 썼을 때, 어디선가 불이 났다 그것은 소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소설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그 아이는 개가 아니다//

종로사가 / 황인찬
앞으로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봉양 / 황인찬
친구의 과수원에 놀러 갔다// 과수원에서는/ 벌을 많이 친다고 했다// 빛 많은 날에는/ 벌들 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고// 꽃나무가 늘어서 있고/ 친구는 벌들과 같이 바쁘다// 다른 세상 같아/ 무심코 나온 말에 친구는 말이 없다// 과수원을 한바퀴 돌았다/ 사과꽃에 벌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왱왱대며/ 움직이며// 빛 소음 운동 빛// 모두 부수고 있었다//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you are (not) alone / 황인찬
(모난 괄호를 보면 갇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 김춘수였을 것이다 휘어진 괄호를 보면 사라지는 기분이 들까 공이나 새 따위의 궤적이 지금도 사라지고 있겠지 자꾸 생각해본다 둥근 공이나 둥근 새 같은 것들이 기호로 보인다)// 나는 사랑을 느끼는 중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증명하는 중이다/ ()/ 때로 좋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는 무릎으로 기어가 제발 사랑해달라고 빌었다//

부곡 / 황인찬
폐업한 온천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어// 물은 끊기고/ 불은 꺼지고// 요괴들이 살 것 같은 곳이었어/ 센과 치히로에서 본 것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통영 / 황인찬
원문고개 지나면/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외지 사람들은/ 원문고개 지나면 보이는 좁은 만이/ 하천처럼 보이나봐요// 다들 그걸 두고/ 강이야 바다야 이야길해요// 외지 사람도 통영 사람도/ 버스가 그곳을 지날 때는/ 모두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봐요//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그것은 너무 고단해/ 오는 내내 잠들어 있던 내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는 아직 통영에 온 것이 아닌데//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통영 사람들과 밤 부둣가를 걸었을 때/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것이 너무 포근하다고 느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가/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통영의 모든 것이 아름답군요!/ 나는 말했고//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이것은 나의 최선 그것이 나의 최악 / 황인찬
어두운 밤입니다// 형광등은 저녁 동안의 빛을 아직 다 소진하지 못하고 희미한 빛을 뿜습니다 하지만 금세 꺼져버리는군요// 밖에서는 청년들이 떠드는 소리, 지금이 몇시냐고 외치는 소리, 이윽고 모든 것이 조용해집니다// 직전에 멈춰야 해요/ 요새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날이 추워져서 얇은 이불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시린 발을 비비다 옆 사람의 따뜻한 발과 닿으면 "자?" 저도 모르게 묻게 되고, 그러면 "응" 대답이 돌아오는 군요/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아직 어두운 밤입니다/ 야광별이 박혀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끝이 어딘지 알아야 할 텐데// 알 도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직전에// 직전에 멈추지 않으면 안 돼요/ 멈추지 않으면// 다 끝나버리니까/ 지난여름에는 해변에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을 보며 지난 밤의 즐거웠던 춤과 사랑의 기억 따위를 떠올렸습니다만 지금은 좁은 침대에 누워 어깨를 움츠린 채// 잠들어 있는 옆 사람을 살짝 밀어볼 뿐입니다/ 밀리지는 않는군요 이대로 잠들 수는 없겠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이군요/ 창밖에서는 또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레몬그라스 똠양꿍의 재료 / 황인찬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양꿍의 재료// 혼자서 먹었어요,/ 망원동의 골목에서요//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똠은 끓이고, 얌은 새콤하고, 입맛 없을 때 아주 좋은 시,/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상상만 해봤어요// 밖에 눈이 와서요/ 따뜻한 우동 국물이 생각나는 밤이라서요//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양꿍의 재료// 뜻이 있다고, 없다고, 누가 자꾸 말하고//

식탁 위의 연설 / 황인찬
왕십리는 미아리가 되고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퍼드 셔츠가 되고 유모차는 다리 저는 개가 되고// 잠들어 기댄 어깨가 어두운 종점이 되고/ 늙은 나무는 고향집의 은유가 되는// 그것이 삶이라니// 돌아오는 길은 모르는 동네다 공원을 걷는 사람은 호수의 조명이고// 매일 밤 거실 바닥에 누워 생각한 것은/ 잠들면 모두 까먹게 된다// 너무 이상해//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것들만이 펼쳐져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뿐이라니// 그것은 네가 어느 저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외친 말이다/ 나는 네가 의자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했고// 그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고,/ 이제는 일상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불가능한 경이 / 황인찬
어떻게 말을 꺼내지, 어떻게 말하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지// 너는 책상에 앉아 있고/ 나는 창 너머에 서 있고// 백년째 복도를 헤매던 사람도 이제는 지쳤다고 한다//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아이들은 일동 차렷하고 인사를 하네//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면 모두 놀라버릴 텐데/ 이상한 것도 놀라운 것도 이제는 버거운데// 어떻게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하면/ 경이롭지 않을 수 있지//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시면 수업이 시작되시고/ 나는 창 너머에서 수업을 지켜봅니다// 수업은 좋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백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선량하고 아이들은 무구합니다// 너는 판서된 것을 따라 적고/ 나는 창 너머에서 그것을 따라 읽고// 어떻게 말을 건넬까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망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지// 자꾸 고민하면서/ 백년째 말을 걸지 못하는 내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시면 아이들이 복도로 밀려나오고// 복도에 서 있는 내 앞에 네가 서 있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얼 하느냐고, 빨리 들어오라고//

사랑과 자비 / 황인찬
맞아, 그 여름의 바닷가에선 물새들이 끊임없이 울고 있었어 젊은 사람들이 해변을 뛰어다녔고 맞아, 우리는 개를 끌고 나왔어 그런데 그 개는 어디로 갔지?// 쌓인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작은 것들이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다// 우리는 그때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걷고 있었어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신발을 잃어버리고도 서로를 보며 그저 웃었고 그때 우리는 두 사람이었지// 한 사람의 발자국이 흰 눈 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보고 또 알았는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겨울 호수를 따라 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조건과 반응 / 황인찬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야"// 옆 테이블의 남자가 말했어/ 너는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고// "자꾸 뭘 바라잖아, 사람 얼굴을 보면서......"// 그때 우리는 호수공원 옆의 카페에 있었어 커다란 고무 오리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지//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게 너무 슬프다고......"// 남자는 혼자 앉아 있고/ 너는 그냥 창밖의 오리를 보고 있어/ 아니면 오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야......"// 남자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고,/ 나는 애써 그를 보지 않았지// 울고 있는 어른을 보면/ 죄짓는 기분이 드니까// 사람들은 그냥 오리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어/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손을 마주 잡고// "자꾸 뭘 바라게 된다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사라졌어/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개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개가 바라는 것이란// 맛있는 음식, 따뜻하고 안전한 집, 마음껏 뛰기와 힘껏 물어뜯기,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칭찬......// 그런데 너는 지금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너를 불렀어// 그러자 너는 슬픔과 다정함이 구분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쓰다듬어주었고//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십육 미터의 거대한 오리를 보며/ 자꾸 귀엽다고 말하고 있어//

이것이 나의 최악 그것이 나의 최선 / 황인찬
이 시에는 바다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는 우리가 그 여름의 바다에서 돌아온 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불러일으킨 작은 변화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느 토요일 오후 책장에 올려둔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며 거기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러 확인한다거나, 한 손에 국자와 젓가락을 쥔 채 개수대로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갑자기 떠오른 지난 여름의 대화들에 혼잣말로 답해본다거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라게 된다거나// 뭐 그런 일들// 어느 주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까맣게 탄 그와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아름다운 것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는 어째서인지 그것을 설명하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답하는 대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었던/ 돌이켜보면 아마 그는 우리가 결국 이 시의 마지막에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밤에는 늦도록 잠들지 않았다/ 즐거웠던 지난 일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폭죽 불꽃이 터져오르는 해변에서 불을 피우며 여럿이 어울려 춤을 추었던 그 밤과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태풍이 찾아와 살풍경한 해변을 웃으며 걸었던 일 따위에 대해 아주 짧았고 그래서 충실했던 날들에 대해// 손을 잡은 채로,/ 손에 매달린 아름다운 것을 서로 모르는 척하며// 그렇게 그 장면은 끝난다// 이제 이 시에는 바다를 떠올린다거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과 그 생활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여름과 그 바다가 완전히 끝나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끝난 것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영원히 반복되는 비슷한 주말의 이미지들에 대한 것이고/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부끄러움에 대한 것뿐// 그렇게 삶이 계속되었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말차 / 황인찬
하얗고 작은 잔에서/ 김이 피어오릅니다// 기억나는 것은/ 인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던 때의/ 서늘한 공기와 말차의 씁쓸함// 눈떴을 때 여에 누운 것은/ 죽은 사랑의 얼굴// 그런데도 그와 입을 맞추고 아침을 먹고// 그를 보내는군요// 시간이 없다며 그가 떠난 이곳에는 시간만 남아 있고/ 하얗고 작은 물 위에는 찻잎이 서 있습니다// 찻잎이 서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누가 말했지만......// 부서집니다// 산산이// 깨져나갑니다// 그것은 발등이 뜨거워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의 기억// 사람의 목에 매달리던 사람의/ 목이 매달리던 날의 마음// 전력을 다해/ 그만두고 싶습니다// 화단의 철쭉에는/ 꽃망울이 매달려 있습니다/ 너무 많군요// 마음은 너무나 작고// 기억은 거의 부서져 있어서/ 이 시는 도약을 모릅니다// 부엌 바닥에서/ 김이 피어오릅니다// 발등은 너무 분홍빛이라/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군요// 이 시는 바닥에 흩어진 것이 모두 식고/ 다 말라 증발할 때까지 여기 한동안 머무르겠습니다// 아프거나 슬픈 사람이 없어 다행이군요//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 황인찬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기쁨이 없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떠올리는 온갖 좋은 것들이 이 시에서는 모두 지워지면 좋겠다 그렇게 지워지는 시// 바람이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흐르는데/ 눈물의 그날 밤에 상아 혼자 울고 있나// 송창식은 노래하고 송창식은 방이 넓어서 갈 곳이 없다면 좋겠다 우연히 얻은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면// 그 생각을 여기 적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배를 앓는 듯한 불안을 그리는 순간이 없으면 좋겠다// 영원히 계속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침도 오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무익한 건 좋다고 해놓고, 무해한 건 악한 일이라 말하는 일도 이젠 아무래도 좋겠다// 이 시에는 기쁨이 솟아올라 남은 것이 없다면 좋겠다/ 기쁨은 놀라움과 안심이 겹쳐질 때 만들어지고// 그것이 손쉽게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렵게도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지만//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이 방에는 사랑이 흘러가고 관념만 남아서/ 그저 기뻐하기만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그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손에 만져지는 돌이라면 좋겠다// 그 돌을 먼 바다에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느리게 침잠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이 시에는 사랑이 없다면 좋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같은 것이 어디에도 없다면 좋겠다// 그저 늘어지기만 하는 이 글이 시라면 좋겠다/ 시가 아니라면 정말 좋겠다//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사랑만 남는다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 황인찬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법원 / 황인찬
아침마다 쥐가 죽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밤새 놓은 쥐덫을 양동이에 빠뜨렸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할머니는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것을 어떻게 하셨나// 망연해져서 그 차갑고 축축한 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대문 밖에 나와서 앉아 있는데 하얀색 경찰차가 유령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부서져버린 / 황인찬
어떻게 끝내야 할까,/ 그런 고민 속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문이 열리는 것이 좋을까, 영영 닫혀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결말은 어떨까// ......그런 생각 속에 있을 때,//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창밖은 어둡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 창에는 창밖을 내려다보는 내가 반사되고, 여길 좀 보라는 목소리가 있고, 또 이제 그만 끝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일이 이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어떻게 끝내야 할까,// 영원한 폭우 속에 갇혀버린 채로 끝난다면 어떨까, 문을 열고 나가니 전혀 다른 골목에 도착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겠지//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렇게 끝내면 정말 끝나버릴 것만 같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이렇게 이 시를 끝내기로 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네게 말을 건네며//

저녁의 게임 / 황인찬
코트에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내린 코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서지는 것은 코트가 아니라 저녁이었고 난반사하는 조명이 저녁을 은폐하였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을 가로지르며// 코트는 눈과 비에 훼손되지 않는 훌륭한 것이지만 흙탕물이 이리저리 자꾸만 튀는 것이고, 너는 이미 진흙투성이인 것이 되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서 미안해/ 미안한 얼굴로 네가 말해서 아니야 기쁜걸 내가 답했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며/ 진흙투성이의 어떤 인생을 생각하며// 이 저녁에 부서지는 저녁을 보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연약한 빛들이 코트 위에 고인 채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빗속을 달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저녁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서정 / 황인찬
“저 나무 좀 봐”/ 거대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 애가 말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였다 무수히 뻗어 나온 가지와 잎들이 일대를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저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다 그 애의 팔이 자꾸 내 몸에 닿는 것이 신경 쓰인다// 팔월의 열기도 나무의 어둠 아래로는 미치질 않았다// “이곳은 누가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캄캄한 것과 환한 것이 나뉘어 있구나“// 그 애가 말할 때,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애로부터 멀어지려고 그랬다 나뭇잎이 이렇게 섬세하고 무엇인가 잔뜩 돋아나서 징그럽다는 것을 그 전엔 왜 몰랐을까// 오늘은 그 애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인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 애는 말했는데, 그 애는 아무런 말도 해주질 않고// 그 애는 어째서 나를 이 깊은 산 속으로 데려왔을까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 나의 마음은 기묘하게 뒤틀려가고 있었으나 점차로 모든 것이 명료하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구나// 그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나무 아래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애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은 채였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 애가 말했다// 명료하게// 미지근한 그 애의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 / 황인찬
푸른 하늘 은하수라는 말이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어릴 적엔 은하수라는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와 내가 주고받은 말// 나는 그에게 은하수를 직접 본 적이 있는지 물었고(무작위로 자연을 소환하는 윈도우 잠금화면 때문이었다)// 그는 갑자기 푸른 하늘인데 은하수가 어떻게 보이느냐 운운하며 푸른 하늘 은하수 얘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저 나무 멋지지 않아요?”/ “무슨 나무요?”/ “이따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얼굴 까만 남자애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자리에서는 고개를 돌려봐도 다 똑같은 나무뿐, 밥을 다 먹고 식당 밖으로 나가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성으로 떠나 몇 달째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면 같이 천왕에서 살자는 둥 자기 고향인 수성이 좋다는 둥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그걸 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 온다거나 달이 밝다거나 태양풍이 어떻다거나/ 할 말이 없어서 하게 되는 이야기들뿐이니까// 혼자서 멍청하게 앉아 있으면 화면에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자연이 너무 예뻐서 그걸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굳이 옛날 윈도우 배경화면(파란 하늘 아래 푸른 언덕이 그려진 그거)을 찾아 쓰는 타입의 사람이지만……// 토끼 한 마리나 계수나무 한 나무에는 관심 없겠지// 그에게 서쪽 나라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다// 푸른 하늘에는 하얀 반달이 떠 있을 뿐이었지만……// 나는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고 싶어서/ 식당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서로 전혀 다른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똑같은 나무들의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사람을 막지 말라고, 호버보드에 탄 사람이 내게 말했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어두운 밤, 저고도 인공위성들이 빛나고 있다 예전에는 은하수를 눈으로도 볼 수 있고 성좌를 지도 삼아 움직일 수도 있었다나// 나는 이 시의 시점을 조금이라도 미래처럼 보이고 싶어서 약간 장난을 쳐본다 그러나 미래는 오지 않았다//

영원한 자연 / 황인찬
얼마 전에 장미도/ 열매가 열린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여름이 끝났는데/ 까맣게 타버린 꽃이/ 떨어지지도 않고 있더라구요// 먹을 순 없다나봐요// 얼마 전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케이크를 샀는데 꽃사과가 올라가 있었어요// 친구가 꽃사과를 처음 본댔어요/ 결국 아무도 꽃사과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고속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겨울이 벌써 시작됐어요/ 날이 추워져서/ 이제 복어가 철이래요// 아직 제철 복을 못 먹어봤어요/ 그러고 보니 굴도 이제 곧 철이죠/ 제철 챙겨서 음식을 먹는 편은 아니지만// 생각났어요/ 그냥 생각났어요// 요새는 그래요/ 생물들을 자주 생각하게 돼요/ 생물들이 죽고 사는 것이 생각나고 그래요// 남쪽은 항상 바다라고 생각했어요/ 바다가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골 마을을 무심코 걷다가/ 모르는 집 담장 너머에 널린 빨래들을 봤고요// 꽃무늬 바지를 보고/ 꽃이 피었다고 잠깐 믿기도 했어요//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군요/ 그게 너무 흔한 일이지만// 남쪽의 바다에 겨울이 오면/ 바닷가에도 붉은 꽃이 피겠지요// 흰 눈이 쌓이고/ 붉은 꽃들이 드문드문 보이겠지요/ 그게 장미는 아니겠지요// 장미는 눈을 감고 있어요/ 누가 그렇게 말했어요// 들장미는 열매가 맺히면/ 차로도 끓여 먹어요// 그렇지만/ 오해를 후회하고/ 착각을 원망하며/ 차를 마시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이// 보입니다/ 빈 찻잔이// 아무튼 지금은/ 비가 옵니다// 까맣게 타버린 꽃이/ 비에 젖어 더욱 까매질 겁니다// 정말로 바다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이 모든 것을 돼지국밥을 먹으며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근처 위성도시 어딘가에서//

환영하는 영화 / 황인찬
창밖으로 쏟아지는 무수한 빛을 보고 있으면/ 이게 현실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바싹 마른 운동장이 보인다/ 뛰어가는 애들이 보인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내 생각보다 조금씩 더 하얗고/ 흐리구나// 내 생각이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두운 복도를 한참 걸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두려워하며// 만약 이것이 영화였다면 누군가를 마주쳤겠지,/ 어린 나를 아꼈던 선생님이나,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애일 수도 있겠지// 밖에서는 애들이 뭐라고 외치고 있다// 복도는 너무 서늘해서 오히려 안심이 된다/ 놀라운 기쁨보다는 슬픔의 익숙함이 편안하다//창밖으로 쏟아지는 무수한 빛을 보고 있으면/ 이게 인생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두운 복도를 한참 걸었다// 식어 버린 손을 주머니에 넣으니 약간 따뜻했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이미지 사진 / 황인찬
아름다움 하나/ 나무 의자 둘// 잠시 찾아와서 내려앉는 빛// 이 장면은 폐기되었고// 이해하자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잖아 하나/ 서양란 화분이 쓰러진 모양이 둘//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니(다 날아가고 눈 코 입만 남은 사진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날들의 기억)// 사진관에 모이는 것으로 마음을 남기던 시절의 기억 속으로 내려오는 저녁이 하나 휘어지는 빛이 둘// (이 순간을 어떠 영화에서 본 것만 같다고 잠시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시절에만 가능한 착각이라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의 부끄러움)// 죽은 아름다움 하나/ 부서진 나무 의자 다섯// 자꾸 뭘 기억하려고 그래(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빛)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들 날려서 찍었지?// (작은 강의실이 젊은 옛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미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말하는 사람과 이미지인데 왜 귀를 기울여요 말하는 사람)// 웃으세요/ 친구끼리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사라짐// 그 장면은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빛이 들어가면 다 상하니까/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세요// 불 꺼진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빛//

받아쓰기 / 황인찬
바다 쓰기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 30년 전 필름인데 인화할 수 있나요?”/ “뽑아 봐야 알 것 같은데요”// 사진관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바다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만// “이 사람 멋있네요”/ “죽었어요”// 겨울 바다는 너무 적막해서 아무것도 받아적을 말이 없었다 바닷바람은 자꾸 뭐라고 떠드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쓰기요/ 받아쓰기// 매년 바다가 넓어진다고 했다// “이 사람은 친구 동생인데 죽었어요”// 나는 흰 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 지시를 따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웃고 있으면 너무 이상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빛이 보이고// 화면 위로 보이는 얼굴은 모르는 사람// 바다를 어떻게 써요/ 왜 쓰는데요// 바닷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겨울 바다 위를 물새들이 돌고 있었고// “조금 돌아갔어요 이 사진은 안 되겠는데요”/ 그런 말을 들었다//

흐리고 흰 빛 아래 우리는 잠시 / 황인찬
조명 없는 밤길은 발이 안 보여서 무섭지 않아?/ 우리가 진짜 발 없이 걷고 있는 거면 어떡해// 그게 무슨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너는 어둠 속에서 말했지// 집에 돌아가는 길은 멀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흐리고 흰 빛// 이거 봐, 발이 있긴 하네// 흐린 빛 아래서 발을 내밀며 너는 말했고/ 나는 그냥 웃었어// 집은 아주 멀고, 우리는 그 밤을 끝없이 걸었지/ 분명히 존재하는 두 발로 말이야// 발밑에 펼쳐진/ 바닥없는 어둠은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유독 /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 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꺼야, 모두 알고 있었지//

휴가 / 황인찬
창밖으로 물이 보인다 아주 넓고 많은 물이다/ 바닷가에 가족들과 갔던 날, 물새들에 둘러싸인 채 겁에 질려 울음을 떠트렸던 날/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느꼈는데,/ 그건 그냥 느낌이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 너라는 고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냥 느낌이었다/ 밖에 나가 회를 먹고 불꽃놀이를 하다 돌아왔다/ 잠깐 누웠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옷을 걸치고 바닷바람을 맞았다 멀리서 어선 하나가 말도 안 되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밤의 바다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일까 저렇게까지 아름다운 것은 원래 저렇게 불길한 것일까 생각했는데/ 어어 저거 불난 거 아냐?/ 누군가 외쳤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인간으로 가득한 지하철 안이었다//

멍하면 멍 / 황인찬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시에는 개나 새가 나오고 무슨 개고 무슨 새인지는 알기가 어렵고/ 그거는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다 잘못했어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 그렇게 모두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시에서는 누가 죽고 누가 울고 모두 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잘할 수도 있는데/ 안 그랬어요// 반성하는 의미에서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작은 새가요//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는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 누군가 새를 썼더니 새는 날고 울다 천 리를 날아/ 시가 되어 앉았다는 고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처럼요//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 그냥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

머리와 어깨 / 황인찬
광화문에서 새로 나온 문예지를 읽으며 지나 계절 발표한 시에 대해 혹시/ 누가 뭐라 말했나 살펴보고 나면 이제는 할 일이 없군요// 허리가 자주 아파서 안마사를 찾아갔군요 두 시간에 십이만 원이지만 항/ 상 세 시간동안 마사지를 해주시는 아주머니였군요 자세가 안 좋으면// 모든 게 안 좋아요/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지방의 학생들 앞에서 시에 대해 말할 때는 시를 쓰면 머리가 아프고 허리/ 가 아파요 머리 없이 허리 없이 어깨가 움직여요 울다 왔군요 많이 울었군요// 그래요 압니다/ 다 압니다// 쓸쓸한 나무에는 쓸쓸한 열매가 맺히나요 그런 말은 믿지 않는군요 무엇/ 을 보고 무엇을 배웠나요 그건 몰라요 그런 말을 그리도 길고 재미없게 하는군요// 아직도 시를 쓰고 있군요 어깨가 움직이고 있군요 시가 싫어서 미치겠는/ 데도 지겹다고 자꾸 새처럼 짖으면서도 왜 쓰는지도 모르는군요//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머리 있으니까 더 머리 있으니까”// 누군가 말을 걸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 군요 혹시 시인 아니시냐고 묻는/ 사람이군요 굳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다 맞다는 말을 하는군요// 그 사람은 알겠다고 하고 바로 떠나는군요/ 그래요 압니다// 다 압니다/ 모든 게 안 좋아요 언젠간 좋아질 테지만//

전주 / 황인찬
탁자는 다리가 넷/ 나는 다리가 둘// 나는 걷고/ 탁자는 걷지 않고// 새는 다리가 둘이다/ 새는 날아다니고// 너는 다리가 둘/ 탁자는 다리가 넷//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 거야/ 아니면 없을 거야/ 다리가 넷 달린 개 한 마리가/ 총총총 앞을 지나고// 이 모든 일을 알고도 탁자는 가만히 있다//

 



황인찬 시인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제3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희지의 세계》《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이 있다.

 

 

 

[시인 특집] 황인찬 “한 번에 읽히는 시가 좋다” | YES24 채널예스

공감을 한다는 건 ‘난 이걸 알아’라는 태도잖아요.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요. 어떤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의 자리는 공감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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