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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내 마음속의 반쪽 / 류영택

부흐고비 2021. 7. 2. 08:30

층층이 겹쳐있는 깃털이 예사롭지가 않다. 앞에서 보면 전장에 나가는 로마 장수의 머리에 쓴 투구모양을 하고 있고, 옆에서 보면 깃을 잔득 세운 채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를 위협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닮아 있다.

경주박물관, 내 눈길을 붙든 것은 안압지 용마루를 장식했던 치미다. 하지만 치미는 지난 날 위엄을 부리고 앉아 있던 그 모습이 아니다. 한껏 멋을 부렸지만 겉모습과 달리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발을 굴리며 인기척을 내보지만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직도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 넋을 놓고 있는 치미의 모습이 지난 날 우리 집 용마루에 올라앉은 망새의 슬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향 집은 헐리고 없었다. 기둥을 떠받치고 있던 주축 돌도 장독대 옆에 서 있던 감나무도 어느 하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말끔히 닦아놓은 공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곳에 집이 있었다는 흔적마저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빈터에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애석한 마음도 잠시, 마음 한 구석에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향집은 팔렸다. 언젠가 고향에 내려가 살아야지, 끝까지 집을 지키려 했지만 형제 중 막내였던 내게 그런 여력도 권한이 없었다.

몇 년 후 그 집을 다시 사려고 고향에 들렸을 때는 이미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새 주인은 집을 팔기가 싫었던지 내가 만나자고하면 피하기만 했다. 허탕을 치고 발걸음을 돌릴 때마다 나는 우리 집 지붕을 바라봤다. 지난 날 용마루 끝에 한껏 위엄을 부리고 있던 망새를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집과의 인연은 영영 끝나는구나 생각하니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한 번 남에 손에 넘어 간 집을 다시 살 수가 없었다.

그 후 고향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볼일이 있어 고향에 내려가도 가까운 골목길을 놔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갔다.

세월이 지나자 집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수구려 들었다. 일부러 돌아가야 했던 길을 애써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젠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날도 고향에 내려갔다. 집 앞을 지나는 길에 까치발을 하고 담장 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마당에는 풀이 무성히 자라있고 한 쪽 끝에는 두엄이 쌓여있었다. 집이 왜 이 모양이지? 그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대문도 없는, 장대를 걸쳐놓은 삽짝을 들어서자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대청마루는 뜯겨지고, 무시로 드나들던 여닫이문도 떼어지고 없었다. 식구들의 온기로 가득했던 방은 거미줄이 쳐져있었고, 습기에 부풀어 오른 벽지에는 검은 곰팡이가 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르렁, 가마솥 뚜껑이 열릴 때마다 구수한 밥 냄새와 함께 장지문 새로 하얀 김이 피어나던 그 자리에는 인기척에 놀란 듯 누런 암소가 멀건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봤다. 이럴 수가. 카운터펀치에 얻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져왔다. 이거였구나. 우리 집이 소 마구간으로 바뀌다니, 이 꼴을 보여 주려고 그렇게 나를 피했나! 심한 배심감이 들었다. 집 주인에게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유년의 기억들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것 같았다.

차라리 헐어버렸을 것을, 월지궁을 떠나던 날 신라 태자의 눈에 비친 치미의 모습도 그러했을까. 그날따라 지붕 위의 망새가 더 슬퍼보였다. 나는 멍하니 망새를 바라보다 걸음을 재촉했다. 힐끔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눈물을 보이기 싫어 앞만 보고 걸었다. 그게 내가 본 망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순왕이 고려의 태조 왕건을 위해 연회를 베풀던 날, 월지는 더 이상 신라왕실의 별궁도, 대통을 이를 태자가 머무는 동궁도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 신라역사를 마감하는 오욕의 현장이며 서라벌 사람들의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월지를 울리는 풍악소리, 비위를 맞추느라 궁녀들의 등을 떠미는 조정 대신들의 비굴한 웃음, 기고만장해 있는 점령군 장수들의 어우러진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올 때마다 치미를 바라보는 서라벌 사람들의 눈빛은 서글픔을 넘어 원성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치미는 더 이상 왕실의 위엄을 대변하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왠지 나약해보이고 금세라도 눈물을 지을 것처럼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치미를 볼 때마다 차라리 없어졌으면, 저게 없어야 그나마 옛 영화를 마음속에라도 고이 간직할 텐데. 암담한 현실에서 놓여나고 싶었던 서라벌 사람들은 어디론가 치미가 훨훨 날아 가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태자가 금강산으로 자취를 감추던 날 치미도 모습을 감추었다. 그날은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날마다 벌어지던 연회가 파할 시간, 제일 먼저 불길이 솟은 곳은 태자가 머물던 동궁이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성난 불길을 서라벌 사람들은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불길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연못으로 떨어지는 낙화(落火)를 지켜보며 울분을 삼켰다. 와르르 기왓장이 떨어지고 서까래가 떨어지고 지붕을 받치던 기둥이 쓰러졌다.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용마루를 지키고 있던 치미는 그 순간 불덩이로 변했다. 그게 서라벌 사람들이 본 치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흥망성쇠, 한 나라와 한 집안이 망하는 것을 어찌 비교가 할 수 있겠냐마는 그날 내 눈에 비친 망새는 우리가족의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라가 망하면 같이 아파할, 망국의 설움을 함께 달랠 이웃이라도 있겠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었다. 언젠가 너를 다시 그 자리에 다시 올려놓으마. 어느새 내 마음에 내려앉은 망새의 슬픈 눈빛뿐이었다.

치미를 바라본다. 잠시 전 모습과 달리 생기가 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씽긋 웃음을 내놓는다. 하지만 치미는 새침해 있다. ‘이놈아, 내가 여기에 혼자 있는 줄 아나? 내 반쪽도 같이 있다. 네가 망새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처럼, 나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 반쪽이 들어있다. 잊지 마라. 긴 세월 사람들의 뇌리 속에 치미가 살아 있어 듯이 네 마음속에 망새를 새기고 있는 한 언제가 네 집 용마루에 올라 앉아 있던 망새의 반쪽도 다시 환생할 것이다.’ 나를 나무라듯 치미의 부리에 서려 있는 형광 빛이 반짝 내 눈과 마주친다.

긴 세월 신라의 부흥과 쇠퇴기 지켜본 치미처럼, 그 해에 논을 서너 마지기를 샀고, 이듬해는 돼지가 새끼돼지를 열두 마리를 낳았었지. 맞아 그때가 우리 집, 내 생에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지. 그리고 그렇게 많았던 재산이 바람에 재 날리듯 공중분해 되는 아픔도 있었지. 내 마음속에 내려앉은 망새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치미가 제짝을 찾듯, 그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내 마음속의 반쪽, 이제 그 짝을 찾아 나서야겠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치미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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