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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영주 시인

부흐고비 2021. 7. 8. 08:57

여름의 애도 / 이영주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에 젖은 어머니의 발자국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이 다정한 악몽의 시간에 잠깐 쉬었다 갈게. 죽은 사람의 날개가 힘없이 부서집니다. 어머니의 등에서 흰 빛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컹컹 웃기 시작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깃털이 흩어져 쓸려갑니다. 그 위로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폭염 / 이영주
수염이 없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옛이야기를 노인이 되어서야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깎으면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첫번째로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스스로 울 수 있는 순간부터 그는 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는데, 두 번째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는 수염을 깎고 인공 눈물을 넣고 두 손을 모아 흐릿한 시야를 가늠해봅니다. 어지러운 햇빛이 쏟아지네요. 비밀이 있다면, 세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매일매일 골목길의 잎들을 쓸어내고 건물의 유리창을 닦으면서 바깥으로 던져질 시간을 확인합니다. 인간이 서서 걷기 시작 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왜 이곳의 꽃은 항상 쓰레기 더미 위에서 피어날까요. 목련 나무 아래 놓인 쓰레기를 버리며 생각합니다. 슬픈 기도가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한낮은 너무 뜨겁다고.//

낭만적인 자리 / 이영주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있다. 형태를 만져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십 년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곳은 얼마나 걸어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의 다리에서 생생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가 뿌린 흙 위에 나는 서 있다. 이곳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난다. 잠깐 동안 그는 앉아 있었는데, 동그랗게 어두워지는 자리였다. 내가 어지러워 돌처럼 흘러나가는 자리. 소파에 앉아서 그는 흩어진 잔해들을 본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집이라는 집은 없다. 고향이 없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지.//

지붕 위로 흘러가는 방 / 이영주
한밤중에 지붕은 머리에 둥근 달을 이고 허공으로 걸어간다./ 어릴적 나를 업고 프라이팬에 노란 달을 부치던 어머니// 비린 달을 게워내며 옥탑방이 지붕 위로 흘러간다.//

방화범 / 이영주
우리가 깊어져서 검게 타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 불을 붙일까? 그녀는 뜨거운 이마를 내 심장에 대고 있습니다. 이것 봐, 너무 깊은 소리가 들리니까 자꾸만 무너져 내려. 나는 양초를 손에 꼭 쥐고 있고요. 언제쯤 밤의 회오리가 끝이 날까요. 불을 붙이면 자꾸만 꺼져 버리는 이상 기후 속에 나는 버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숨이 안으로 안으로 더 숨어 들어가는데 꺼지기 전에 붙일까? 흰 눈이 오기 전에. 그녀는 이미 녹아내리는 손을 뻗어 내 심장 안을 만져봅니다. 이 안에는 뭐가 이렇게 축축한 것들이 잔뜩 있을까. 그녀는 액체처럼 말을 합니다. 흘러내리는 감각. 촛농이 흘러내리는 이것은 불인가요 물인가요. 그녀가 나의 안을 헤집으며 흘리고 있는 물질은. 한밤에 빛나고 있는 이 물질은. 창 안으로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무겁고 무서운 것들이 바닥으로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우리가 눈 속에서 나갈 수 있다면 이 파티는 시작될 수 있을까요. 깊이를 벗어나 좀 더 가볍게 신발을 벗고 옷을 벗고 뭉개진 자신을 벗고 가장 작은 입자로 둥둥 떠다니다면요. 그녀의 물질이 스며들 때마다 나는 희고 어지러운 백발이 생겨납니다. 나는 양초를 사 모으고요. 불을 붙이려고요. 두 손을 모읍니다. 나는 회오리 속에 남아 계속 버려집니다.//

둥글게 둥글게 / 이영주
태어나는 순간에는 왜 나를 볼 수 없을까/ 미래 밖에서 우리는 공을 굴린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안쪽에 숨겨져 있다./ 아픈 사람의 손바닥은 늘 빨개// 뜨거운 물속에 잠기면/ 공처럼 둥글어진다.// 방문을 열고 천천히 마당으로 간다./ 까마귀의 붉은 속살이 목련 나무 아래 솟아 있다.// 새벽을 지나 앞발로 공을 굴리는 고양이/ 태어나면서부터 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색깔을/ 가졌을지도 몰라// 모호한 시작 때문에 처음과 끝을 굴리는 우리는//

녹은 이후 / 이영주
눈사람이 녹고 있다/ 눈사람은 내색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부분은// 에스키모인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걷는 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막대기를 꽂고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해서/ 투명하게 되어 돌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왜 돌아오질 않죠/ 불 꺼지 방안에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얼음처럼 기다렸는데/ 누군가 돌아올까 봐/ 창문을 열어 두고 갔는데// 햇빛 아래/ 죽어가는 부분이 남아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발밑으로/ 엉망인 바닥으로// 형태가 무너지는 눈사람// 이렇게 귀향이 어려운 줄은 몰랐는데/ 흰 눈으로 사람을 만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걸 봄이라고 한다면//

언니에게 / 이영주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성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굴뚝의 성장담 / 이영주
당인리발전소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교복을 벗고 매일 저녁/ 끝에서 끝으로 걷는다/ 등짝이 불타오르는 기분/ 언제나 붉은 얼굴로 걷는다/ 연기처럼 굴뚝에서 생성된다는 건…/ 키가 크고 난 이후/ 나는 다리가 자주 구겨진다/ 척추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등을 구부려/ 욕조 바깥으로 뻗어나간 발목을 쥐어본다/ 내 몸의 끝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박쥐우산을 가진 소년 -장이지 시인에게 / 이영주
직선으로 생긴 구름에 대해 떠올릴 때 너는 울었다/ 아무런 무게도 없는 세계를 생각했다// 박쥐우산을 펴들고 너는 공기 속을 걸었다/ 물방울들이 자꾸만 직선을 곡선으로 만든다, 누나// 문턱에 한 발이 끼어 침묵에 빠진 새들/ 너는 새벽 내내 네 발의 모양을 바라본다/ 둥글게 휜 발가락 하나쯤 숨어 있어도 좋을 거야// 고요한 세계에 머리를 누이고 잠들고 싶지만, 누나/ 새벽이면 자꾸만 한쪽 발이 길어진다/ 무릎에 고인 물들이 조금씩 빠져 나간다// 너는 접히지 않는 우산을 가지고 방 안에서 날았다/ 누나, 내가 마르기 시작한 건 동그란 새의 등뼈를 만지면서부터// 어두운 골목에서 몸의 중심으로 뻗어 있는 발가락을 세는 동안/ 네 주머니에서 떨어지던 깃털 하나를 줍는다//

저무는 사람 / 이영주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생일은 미리 말해 주자. 젖은 바람 부는 계절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쓴다. 몸을 보니 여자였구나. 상점 주인은 창밖의 간판을 세다가 저무는 사람. 단 한 명의 노파도 없는 비 오는 골목으로 음악을 흘려보낸다.// 지느러미를 감추고 들어와야 해.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를 보니 물고기구나. 상점에는 푸른 비늘이 가득 찬다. 그녀가 달력을 넘기는 동안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 노파를 보고 싶은 계절이야. 생일을 견디며 물고기들이 모서리에 지느러미를 비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장화를 벗고 보니 딱딱한 계단이구나. 그녀는 문 밖의 발들을 바라보다 밤늦도록 저문다.// 고무장화를 신자. 태풍이 오기 전에 생일을 미리 말하자. 바람이 젖은 달력을 찢는다. 계단 밑, 붉은 웅덩이 속에 머리를 빡빡 민 노파가 잠들어 있다.//

물고기가 된다는 것 / 이영주
학교를 가려고/ 시체가 떠내려 온 천변을 지날 때마다 나는/ 차가운 물속을 걷는 기분/ 한 떼의 사자(死者)들이 죽은 자를 놓치고/ 공중에 떠 있다// 수업 시간이면/ 까마귀들은 유리창에 붙어/ 내 몸속을 들여다보았다// 운동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늙은 개의 휜 다리를 만진다// 언니들은 사자(死者) 같은 얼굴로/ 교문 뒤에 숨어 침을 뱉고 휘파람을 불었다// 천변의 하류 쪽에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나는 매일 거슬러 오르느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학교를 가려고/ 천변 밑에서 걸었다 발바닥에서/ 두꺼운 지느러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흰 소를 타고 여름으로 오는 아침 / 이영주
고대 도시로 오기 위해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왔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쪽문을 지나 두 계절을 건너오느라 발목이 다 젖었네요. 태양의 묽은 반죽처럼 흘러내릴 때 도마뱀의 꼬리를 쫓아 푸른 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구름 위에 앉은 산악 민족들은 어떤 얼굴로 잠을 불렀던 것일까요. 나는 휴게소에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를 휘휘 돌립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오면서 무엇을 들고 왔을까요? 오랫동안 굽어 있던 어깨를 가방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키 작은 국경 주민들이 웃고 있어요. 퉁퉁 부은 심장. 계절 없는 민족. 거대한 황금 불상의 이름은 전락(轉落). 당신은 하얀 머리칼을 자르고 산악 민족의 얼굴을 빌려 씁니다. 흰 소를 타고 여름으로 오는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린 것은 점점 더 새로워지는 겨울과 여름 사이였습니다.//

공중에서 사는 사람 / 이영주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깊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땅으로 내려갈 수가 없네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지붕이 없는 골조물 위에서 비가 오면 구름처럼 부어올랐습니다 살냄새, 땀냄새, 피 냄새// 가족들은 밑에서 희미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를 핥고 싶어서 우리는 침을 흘립니다// 이 악취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공중을 떠도는 망령을 향하여 조금씩 옮겨져 갑니다 냄새들이 뼈처럼 단단해집니다// 상실감에 집중하면서 실패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면서 비가 올 때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이란 지붕도 벽도 있어야 할 텐데요 오로지 서로의 안쪽만 들여다보면 처음 느끼는 감촉에 살이 떨립니다 어쩌면// 지구란 얇은 판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구멍 뚫린 곳// 우리는 타오르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너진 골조물에 벽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 서서히 올라오는 저녁이 노래 바깥으로 훌러갑니다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우리는 냄새처럼 이 공중에서 화석이 될까요// 집이란 그런 것이지요 벽이 있고 사라지기 전에 냄새의 이름도 알 수 있는//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그저 이마를 문지르고 머리뼈를 기대고 몸에서 몸으로 악취가 흘러가기를 우리는 남겨두고 노래가 내려가 떨고 있는 두 손을 핥아주기를//

숲의 축구 / 이영주
숲에 가득한 건 비밀들.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신발이 없어 울고 있으니, 발이 없는 자가 다가왔다는 페르시아 속담.// 아이들은 양탄자를 짜고 축구를 한다. 실패를 둘둘 말아서 너의 발이 멀리 날아가도록 힘껏 찰게. 붉은 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비밀은 잎에서 잎으로 건네진다. 아이들이 발을 찬대. 공은 흐르고, 공보다 아름다운 맨발이 흐른대.// 예전에는 슬픔을 돌보았대. 눈물이 영웅이 되는 시간. 이 숲에 와서 잎사귀가 자라도록 울고 아이들은 강을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자 무성한 나무들이 여름을 떠나간다. 오래된 나무집 그늘 남은 빛으로 빠져든다. 이 세계에는 오로지 한 계절뿐인데, 양탄자를 짜느라 계절을 넘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기후는 양탄자에 모여 있다. 비밀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대. 실에는 흰 눈이 내리고. 멀리 날아갔던 발들이 모여 있대.//

출근길 / 이영주
피 냄새 자욱한 담벼락 사이로 한 사나이가 걸어간다/ 사내의 빗장뼈가 양복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길고 구불구불한 빗줄기가 손을 뻗어/ 꺼진 알전구를 빙빙 돌린다/ 어젯밤 하얗게 그려진 사고의 흔적이/ 밀가루 반죽처럼 사방으로 번진다/ 사내는 덜컹거리는 몸을 제자리에 쓰윽 집어넣고 출근하는 길이다/ 불타고 남은 자동차 철제 뼈대가/ 히죽거리며 축축하게 빛나고 있다/ 새벽이면/ 담벼락의 혀가 쑥 늘어진 좁은 골목을 헤치며/ 사내는 끈적끈적하고 묘한 쾌감에 젖는다/ 어젯밤 네가 사라진 자리,/ 깨진 뒤통수를 흘리고 간 자리,/ 오래된 바퀴가 너에게 구멍을 뚫고 지나간 자리,/ 사내는 잠시 불꺼진 신호등을 본다/ 무거운 도시락 가방이 비에 젖는다/ 이제 너와 나는 한 종족으로 서로의 몸을/ 도시락처럼 미리 까 먹으며 도시의 출근길을 건너고 있다/ 양복 밖으로 조금씩 삐져 나가는 텅 빈 뼈들이/ 즐거운 허기에 딸깍거린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때로 출근하는 모든 길이 관 속으로 뻗길 꿈꾼다/ 이제 너와 나는 서로의 뼈를 이어 붙이며/ 붉은 빛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참이다//

외국여행 / 이영주
각자의 말들로 서로를 물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어둠과 다른 색/ 오래전 이동해 온 고통이 여기에 와서 쉬고 있다/ 어떤 불행도 가끔은 쉬었다 간다/ 옆에 앉는다/ 노인이 지팡이를 내려놓고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흰 이를 드러내며 나는 웃고/ 우리의 혼혈은 어떤 언어일지 생각한다//

​손님 / 이영주
외국인들이 앉아 있다. 이곳은 우리 집인데, 외국어만 쓸 수 있다. 나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실 안을 빙빙 돈다. 주전자에서 눈부신 연기가 올라와 흩어지고, 부드러운 음성, 깃털처럼 언어들이 떠다닌다. 부드러운 날개. 나는 손을 뻗어 흩날리는 소리를 잡아본다. 의미를 잃어버리면 이렇게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를 수 있을까. 서로에게 닿지 않은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창밖에서는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 된다. 외국인들이 깃털을 털 듯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고 있다. 더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면 날개를 접고 우리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창밖에는 폭설이 쏟아지고, 우리 집에서 홀로 집을 잃은 나는 외국인들처럼 차를 한 잔 마시는데, 부드러운 연기, 부드러운 실종.//

티베트의 나팔 깔링* / 이영주
허벅지에서 뼈를 꺼냈다/ 나팔을 만들었다// 새장 같은 침대에 누웠다/ 새들의 잘린 머리가 밤새도록/ 죽은 자들의 문장을 읽었다// 허벅지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을 만지며/ 그는 다리에서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 밤,/ 택시를 타고 국경을 달렸다// 수많은 나팔들을 넣어두고/ 죽어서도 음악을 듣지 못하는// 내 몸이 부끄러웠다/ 티베트에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 이따금 한밤의 별 속으로 들락거리는// 길고 어두운 뼈 하나가 몸 밖을 빠져나간다//
​* 깔링 : 티베트의 악기, 죽은 자의 넓적다리 뼈로 만든 나팔

연대 / 이영주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 흙 속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

무늬목 / 이영주
우리는 불타는 창고에 있었다// 이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현실은 합선이고/ 우리의 뒤통수는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덜 마른 합판을 우리 사이에 끼워두었다면/ 불길이 솟아오르다 겉만 태웠을 텐데// 우리는 햇빛 아래서 온몸을 건조시켜 뼈를 드러내는 종족/ 일하는 종족이다/ 수분이 부족하지// 이것은 은유가 아니고// 한동안 창고 안에서 고기처럼 역한 냄새를 풍기며/ 비틀리다 뒹굴고 기어가다 재가 되고// 죽음이란 붉은 빛 속의 혀//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우리는 태양 아래서 온 뼈를 태워/ 물건을 쌓는 종족/ 싱싱한 피부가 부족하지// 서로 엉키어서 죽었지만/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독은 각각의 죽음 안에// 서로가 서로를 뒤덮는 합판이 되어/ 타오르는 계단이 되어//

숙련공 / 이영주
기계음이 퍼져나간다./ 밤이면 더욱 먼 곳까지.// 소년이 있다./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자라야 하는 괴물이라고/ 서로의 침과 피를 주고받는/ 밤의 빛.// 폐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지. 어차피 기계는 멈추었고 머리를 뚫고 퍼져나가는 음악은 끝나지 않거든. 소년은 발밑에 엎드린 아픈 개를 보고 있다. 개는 힘차게 죽은 음악에 따라 떨고 있다. 우린 모두 갈 데가 없구나. 바퀴처럼 밑에서 굴러가기만 원했는데도. 아무리 굴러가도 절벽이지만. 그래도 벌벌 떨 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멈추었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라이터를 켰다 껐다, 밤의 유일한 빛./ 소년이// 용접은 필요 없어서 가면도 벗어버렸지. 혹시 죽고 싶다면 이야기해. 개가 짖는다. 민얼굴로 웃으며 빛이 나는 밤에는 모든 것이 멈추니까. 폐공장은 부서진 담벼락이 많으니 머물기 좋지.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 창문 안에서 개와 소년이 춤을 추고 있다. 이렇게 굴러가보자. 기계음이 울고, 끝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자랄 수 있을 거야. 검은 머리통을 뚫고 터지는 음악을 따라가보자. 개처럼 절벽에서 굴러떨어진다면// 어둠 밖에 어른들이 모여 있다./ 어른들은 늘 모여 있고//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죽어야 하는 괴물이라고// 소년은 절벽에 홀로 남아 있다.//

빈 노트 / 이영주
다 자란 소녀를 입양하는 것은 어떨까. 머리가 부서진 인형이 말을 한다. 검은 레이스가 펄럭거린다. 입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 글쎄. 팔이 부러진 인형이 팔짱을 끼다 말고 중얼거린다. 찢어진 퍼프소매 사이로 철사 끈이 뻗어 나와 있다. 소녀란 다 자랄 수가 없는데. 자란 것이 없고 자랄 것이 없어서 소녀라고 부르지 않나. 머리가 부서지고 팔이 부러진 인형끼리 말을 한다. 내가 본 소녀들은. 버려진 상자 안에서 심각한 복화술이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상자 밖에서 온전한 구체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머리통과 팔뚝에서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진다. 소녀들은 우리를 입양하면 이름을 붙여주곤 했었지. 기억나지? 이름이란 기억해야 이름인데. 머리가 부서진 인형의 눈썹이 조금씩 떨린다. 젠장. 반밖에 안 남은 머리통으로 뭘 기억하라는 거지. 상자 밖으로 뻗어 나간 철사 끈을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다. 왼쪽으로 굽은 인형의 팔이 너덜너덜하다. 내가 한 팔로 너를 안을 수 있다면. 조금씩 부서지면서 옆으로 갈 수 있다면. 소녀들이 골목에 모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울음을 참듯이 배에 힘을 주면 가능하지.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조용한 대화라니. 소녀들은 자라기를 멈출 때마다 이곳에 와서 인형처럼 말을 한다. 서로의 머리통을 만져주고 부러진 팔에 흰 붕대를 감아준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였지. 소녀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산산조각이 난 구체 관절을 붙여본다. 자꾸만 떨어지는구나. 애초부터 우리는 자신을 입양해야만 했어. 태어나면서부터 그럴 기회가 없었지. 거울이 깨진 진열장 앞에서 소녀들은 말이 고인 깊숙한 내부를 들여다본다.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대화를 한다.//

내 몸을 빌려줄게 / 이영주
담장에 박힌 종양들,// 여자가 담장 위에 걸터앉아 넝쿨을 솎아 벤다. 잘 벼려진 가윗날이 잎사귀를 똑똑, 끊어낸다. 적막한 허공에 흩어지는 흰 머리칼. 바닥에 푸른 종양들이 떨어진다.// 그녀의 가랑이가 줄줄이 뽑아올린 담쟁이넝쿨, 문 닫힌 골목 사이사이 꿈결인 듯 기어올랐지 밤이면 그녀가 뱉어낸 달빛을 먹고 잠든 담장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지 배를 대고 쓰윽 기어다녔지 지나간 자리마다 파편처럼 초승달이 새겨져 있었지 아무도 깨어나지 않는 어지러운 골목, 문을 열고 내 몸을 찔러넣었지 네 몸을 휘감고서 조여보았지// 내 몸을 빌려줄게 어린애처럼 뒹굴고 놀고 갈 수 있게 한 시절 장난치다 갈 수 있게 누구든 빌려줄게// 머리칼을 풀어헤친 얼굴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무엇인지 모르지 담장 안인지 밖인지 네 몸인지 내 몸인지// 한낮에 담쟁이넝쿨을 잘라내는 늙은 여자// 밤이면 등에 돋은 종양이 가렵다.//

미래안(未來眼) / 이영주
크레타 섬에는, 대리석과 염소와 죽은 왕들. 푸른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이 옆 노인을 끌어안는 장면. 에게해 절벽에서 우주 원자론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 밤이면 얼굴을 깎아 비석을 세우는 여러 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술집. 잘린 토끼 머리가 정육점 유리창에 매달려 귀를 길게 세운다.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 노인이 옆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염소처럼 운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년이 다른 노인을 배웅하는 것. 저녁이면 흔들리는 에게 해 물빛. 수학시간 옆자리에서 동맥 끊기 놀이를 하던 내 첫사랑 소녀의 까맣고 푸른 동공 같은. 절벽에는 죽은 왕들의 비밀문자. 어린 왕자는 진공 없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의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 크레타 섬 정육점 유리창에 묻어, 토끼 이마에 툭 불거진 뼈 하나를 보는 저녁. 노인이 천천히 쓰러지는 옆 노인처럼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드는.//

고적운 / 이영주
구름을 묘사하시오 엷은 판자나 둥그스름한 덩어리 또는 롤 모양의 조각들이 모여서 된 백색이나 회색 덩어리* 양떼가 공중을 밟고 지나가죠 나는 그때 공중처럼 부드러운 것에 짓밟히는 기분으로 열아홉을 보냈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묘사하느라 공책을 접으며 저절로 몰두를 하게 되었는데 얼굴이 검게 물든 양 한 마리가 떼에서 떨어져 나왔죠 이 구름이 물방울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자꾸 미끄러져 울게 돼 비가 오고, 양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였죠// 극한 기온으로 떨어질 때 얼음으로 된 구름은 무엇인가 그럴 때 나는 친구와 얼어붙은 공중 정원에 버려진 신발이 되었죠 슈즈는 복수형 우리 내부에서 버려진다는 것의 달콤함에 이미 몰두했던 열아홉이었죠 양은 어떨까 사람이 좋고 사람이 싫을까 우리는 하얗게 피어오르는 서로의 털을 빗으면서 낄낄거렸는데 과학 시험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는 지옥 개들이 들끓을 테지 우리는 순한 털을 계속 움켜쥐고 놓지 않았죠//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 선생님은 신발을 구겨 신고 텅 빈 답안지를 찢었습니다 아무것도 적지 마라 이 떼에서 떨어져 나와 지상으로 뚝 떨어진다는 것을 피 흘리는 양 한 마리 된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공중의 신이 문을 닫으면, 너는 순한 양의 얼굴로 창문을 열겠지 대기가 불안정할 때 두꺼운 양떼구름이 지나가고 비는 오지 않는다 선생님은 종이 울리자 찢어진 답안지를 짓밟고 공중으로 나아갔죠 우리는 구겨진 채 웃었습니다 언젠가 끝나겠지 절벽에 선 양//
* 기상백과

북극 / 이영주
엠은 말한다./ 겨울이 가득한 섬 때문에 이곳에서 떠날 수가 없네./ 얼음밖에 없는데./ 냉동물이 되고 싶은데.// 나는 말한다./ 영혼도 있지./ 오, 라고 엠은 입술을 둥글게 만들고.// 깨진 유리처럼 살이 떨어지고./ 겨울은 영혼하고 어울리고./ 엠은 문밖에 서 있다./ 부푼 바람 속에서 하얗게 얼어가며 웃는다./ 웃는 냉동.// 그 모습을 나는 볼 수가 없지./ 따뜻한 케이지에 갇혀 생크림을 먹고 있지./ 진짜 가고 싶은 곳은 어딜까./ 킁킁거리며 나는 성에 낀 창문 밖을 바라본다./ 사라져 가는 엠을 본다./ 크림을 질질 흘리며 나는 다시 말한다./ 내가 있는 섬에는 따뜻한 멸망이 있어./ 함께 있을래?// 나에게서 오래 전에 떠나간 엠은/ 문밖에서 더 끝으로/ 입김처럼 흩어진다./ 남은 결정체가 툭툭 밑으로 쏟아진다./ 부드러운 망국에 가면 나는 녹아버리니까./ 훼손된 것도 다정하게 말하면 좋아져./ 모두가 좋은 것을 앓아.// 나는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기어 나온다.// 그 겨울 섬에는 망국의 부드러운 말씀이 필요하다.// 문을 열고 털이 빠진 발을 내디딘다./ 조금씩 얼어붙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엠의 손을 핥는다.//

나의 선교사 / 이영주
흑백의 지구가 굴러간다// 정확한 말이 없어서 사는 것 같다.// 결국 못 찾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잠깐 기침을 했다./ 선교사는 그저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태풍이 오기 전에 너를 만났다./ 너는 정글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짐승의 가죽들이 나뒹굴었던 새벽이었다고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멀리서 총을 들고 서 있었다고 했다.// 그때 너는 오래된 기도문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했다./ 빗속에서 너는 나의 손을 꽉 잡고 울었다.// 나는 잠시/ 그 험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비가 오면 우리는 우산만큼 떨어져 걸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긴 여행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너는 다시 정글 속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리 걸어도/ 신이라는 아름다운 바닥으로 갈 수가 없었다.//

2인칭의 자세 / 이영주
볼 수 없는 얼굴을 너는 자꾸 보는 척한다 그 얼굴을 따라하고 싶어 한다 너는 텅 비어 있으니까 꿈 같은 건 없으니까 잘 망하고 싶다는 막연한 안부를 전하고 너는 자꾸 우는 소리를 낸다 다른 불행을 지어내서 열심히 울다 보면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거니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궁금했다 너는 자꾸만 내 불행을 따라하고 나는 점점 옷을 벗고 가벼워진다 고통이 없는 것이 불안해서 너는 식물의 뿌리를 자르고 화분에 머리를 박는다 그것이 너의 모닝 인사 화끈하게 어디에도 없는 하루를 시작하지 기분의 근원을 모르면서 남들 따라 긴 산책을 시작하고// 그 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어서 너는 숲의 정령들을 불러낸다 정령의 꼬리 끝에 딸려 나온 피 묻은 액자, 잘 벼려진 칼날, 쓰이다 만 족보, 네가 부러뜨린 어머니의 팔, 목 잘린 고양이, 낡은 노트, 불 탄 새, 해변의 공장,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년들…… 이렇게 꿈에서 망가뜨린 목록을 늘어놓고 공포의 얼굴을 그려보려 한다 너는 무엇도 잘 보이지 않고 불행을 도둑맞은 나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길은 끝나지를 않아 너는 아픈 다리를 움켜쥐며 주저앉는다 근원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해// 어머니는 인상적이지 않죠 좋을 때는 좋고 싫을 때는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야 공포의 흔적이 어떻게 생기겠어요 미안해요 어머니 팔을 부러뜨렸어요, 라고 쓰고 나서 너는 깊은 함정에 빠진다 너는 일기를 쓸 때마다 무슨 말을 지어낼까 고심한다 없는 문자를 아무리 찢어도 부정의 얼룩이 생기질 않으니 너는 한 줌 연기처럼 사라지는 나의 목을 조른다 이 수많은 고통들을 어떻게 네가 다 가지고 가려고 하지 너는 낮게 중얼거리며 내가 적힌 한 페이지를 구겨버리듯 손아귀에 점점 더 힘을 준다 나는 사라지면서 선혈을 흘린다 너는 그제야 떨어지는 얼룩들을 천천히 핥으면서 자신이 파국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병 속의 편지 / 이영주
어둠이 검은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이후부터 시간의 꿈을 담고 싶어졌습니다. 병에 담으면 될까요? 긴 시간을 건너왔으니 따뜻했던 밤으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병을 모으고/ 병을 세우고//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은 찰랑찰랑한 어둠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의 입구를 꽉 움켜쥔 채 잠이 들고// 나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관한 것들을 자꾸만 쓸어 담고// 너니까, 너라서, 너 때문에 지옥에 있었지. 우리의 싸움이 검고 어두워질 때 너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시간은 꿈이 되었지. 전도서를 펼치면 허무,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다시 지웠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종말보다 잔혹해서 병에 담고 싶어지는데// 그는 매일 밤 펜을 버리고/ 문장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아무것도 쓰지 마. 무관한 것들을 쓰지 마.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지 마. 이제는 쓰지 마.//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면 파괴되지./ 사라질 수가 없지.// 그는 연애편지를 이렇게 건네네요.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영원히 느끼고 싶다면 그저 손이라는 물질을 잡고// 병의 입구를 열고//

솜틀 공장 / 이영주
아버지는 베개를 만들었다. 심장 근처에 부드럽고 하얀 솜이 묻어 있었다. 구름을 끌고 온 자. 흰 뼈가 우수수 떨어졌다. 베개를 나르던 어머니는 자주 몽글몽글한 것들을 토해냈다. 허리를 굽히면 천변의 오리처럼 약한 비명이 울렸다. 저녁이면 공장 안에서 천천히 작아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문질렀다. 깃털처럼 숨 막히는 간지러움을 나누었다. 깊은 통증인 줄 모르고 나는 매일 밤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몰래 돋아나는 젖은 깃을 쓰다듬었다. 악몽은 다정했고 공장 앞 천변에는 가끔 오래된 시체가 떠올랐다. 나는 홀로 긴 잠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흰 뼈가 개천 바닥에서 굴러다녔다. 아침이면 꿈보다 큰 베개가 내 안으로 배달되었다. 포장을 풀자 점점 부풀어 올랐다. 거대한 구름이 진흙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구름의 꼬리를 밟으며 개천가를 걸었다. 피 묻은 깃털이 흩날렸다.//

해변의 조우 / 이영주
우리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평등하게 죽음을 나눠 가졌지// 엄마의 딱딱하고 흰 손/ 그 손을 잡고 말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복잡한 꿈이었는데/ 순서 없이 뒤섞여버린 현실이었는데// 내가 죽은 건지/ 엄마가 죽은 건지// 먼저 떠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백발이 덮어버린 이마를 쓸어 넘기다가// 나는 어딘가 아파서 점점 어두운 표정을 갖게 되었지/ 엄마, 엄마는 어느샌가/ 무너져 내리며 투명한 얼굴로 걸어가고// 손을 앞으로, 앞으로만 내밀고/ 나는 그 손을 잡으려고 아주 오랫동안 수평선을 걸어왔지// 우리는 나란히 걷다가/ 비 내리는 꿈속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었다// 갑자기 뒤돌아선 엄마의/ 유리알 같은 모래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마지막 기후// 우리는 순서 없이 섞여버린/ 따뜻한 물이 스며드는 삶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고양이가 걸어간다 / 이영주
네가 너무 멀어서 나는 벽 뒤로 돌아간다/ 내 문장은 벽 뒤에서 시작되고// 나는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교환원처럼/ 너에게 끈질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울었으면 등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모든 죄는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등짐 속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그대의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의 기억처럼//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외로운 자의 얼굴은 점점 길어진다// 통곡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는/ 벽 뒤에 침묵을 새겨놓고 걷는다// 등뼈가 젖는다//

 


이영주 시인
1974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졸업했다.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108번째 사내》《언니에게》《차가운 사탕들》《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You Arrived in the Season of Perennial Summe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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