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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오은 시인

부흐고비 2021. 7. 9. 08:34

O와 o / 오은
너 O 맞지? 낯선 이의 목소리에 몸이 절로 쭈그러들었다. 당시 나는 벤치에 앉아 모든 생각은 일정 정도는 딴생각이라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데로 쓰는 것이 생각이니까. 머릿속이 흔들려야 하니까. O 맞네, 맞아! 낯선 이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는 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낯섦과 느닷없음이 겹쳐 공포가 되었다.// 무방비 상태일 때는 별도리 없이 위축된다. 오후 두 시에도 그렇고 새벽 두 시에도 마찬가지다. 밝아서 부끄럽고 어두워서 무섭다. 위축된다고 밝히고 나니 몸뿐 아니라 마음도 덩달아 작아졌다. 위축될 때마다 나는 확신한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몸의 밀도가 낮아질 때마다 마음에도 숭숭 구멍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O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가만있다. 가만히 있다. 대책이 없으므로 O의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대책을 강구할 수도 없다. O는 기죽은 얼굴로, 풀 죽은 표정으로 낯선 이를 올려다본다. 낯선 이가 확신하는 자세를 견딜 수 없다. 낯섦이 믿음을 덮쳐 창피가 되었다. 면목은 자주 사라진다.// 나는 o야. 그러니까 O 맞잖아. 아니야, 나는 o라니까. 면목이 사라지니 o는 용감해진다. 누군가를 대하는 데 필요한 건 면목이 아니라 면목 없음일지도 모른다고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랑 같은 반이었던 O가 아니라고? 낯선 이는 놀라는 척하면서 비웃고 있다. 낯선 이와 아무리 낯을 익혀도 절대 친밀해질 수는 없다.// 나는 o야. 나는 작아. 나는 겁이 많아. 화를 내기보다 투정을 부리는 편이지. 여행 대신 산책을 하는 편이지. 대화가 아닌 혼잣말이 편하지. O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o인 나는 그래. 나는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오후 두 시야. 나는 오후 두 시의 o야. 오후 두 시에도 새벽 두 시에도 나는 o야.// 낯선 이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O임을 확인한다고 해서 포상금을 받는 것도 아니다. 기껏 O를 닮은 누군가를 봤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O가 자신이 O가 아니라고 했어. 친구는 말할 것이다. O가 아니었나 보지. 다른 친구는 피식 웃으며 물을지도 모른다. O가 왜 그랬대? 낯선 이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o는 다시 벤치에서 딴생각을 한다. 딴생각에 풍덩 빠지는 것이 아니라 딴생각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간다. 대륙을 가로지르고 대양을 미끄러진다. 이따금 바위처럼, 암초처럼 낯선 이가 튀어나온다. 낯선 이는 O는 알지만 o는 모른다. 보이는 바위와 보이지 않는 바위 사이에서 또 다른 바위가 고개를 내민다. 딴생각이 딴생각을 낳는다.// 나는 O와 o 사이에 있다.

미시감(未視感, jamais vu)* / 오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툴렀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싼다/ 둘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랑을 어색해한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하다// 여기서 울던 사람이/ 길에 매달려 가까스로 걷는다/ 집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안녕/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 미시감 : 기시감(旣視感, deja vu)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실제로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듯이 느끼는 착각을 의미한다.

이사 / 오은
마지막으로 화분을 실었다/ 꽃이 없는 화분// 흙이 가득한 화분/ 오늘도 물을 줬는지 촉촉했다// 트럭이 새집을 향한다// 손을 흔들어도 집은 가만있었다/ 멀어지는 동안/ 어느새 옛집이 되어 있었다// 잠잠하던 화분이 눈을 떴다/ 싹이 있는 화분// 화분이 움직이는 집이 되던 순간// 네가 나타났다/ 여백이 실체를 드러냈다// 뚫어져라 바라봤는데도 집은 가만있었다/ 낡은 새집으로 있었다// 가장 먼저 화분을 내렸다/ 집집이 집 안으로//

우리 / 오은
괄호를 열고/ 비밀을 적고/ 괄호를 닫고// 비밀은 잠재적으로 봉인되었다// 정작 우리는/ 괄호 밖에 서 있었다// 비밀스럽지만 비밀하지는 않은// 들키기는 싫지만/ 인정은 받고 싶은// 괄호는 안을 껴안고/ 괄호는 바깥에 등을 돌리고/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하고//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숨이 턱턱 막히고// 괄호 밖 그림자는/ 서성이다가/ 꿈틀대다가/ 출렁대다가// 꾸역꾸역 괄호 안으로 스며들고/ 우리는 스스로 비밀이 되었지만/ 서로를 숨겨 주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일 분 후 / 오은
넌 최고상을 받을 예정이다/ 아나운서가 네 이름을 제대로 발음한다면// 네 이름은 아직 봉투 속에 있다// 너는 속으로 되뇐다/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부른 적이 또 있었을까/ 네 이름을/ 격렬하게 숨도 안 쉬고/ 자그마치 일 분 동안// 누가 가져가지도 않을 텐데/ 너는 너를 포함한 그 무엇도 믿지 못한다/ 네 믿음은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일 분 후// 봉투 속 네 이름은 밖으로 기어 나오고/ 드디어// 너는 단상에 오를 것이다/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긁적여도 좋다/어색한 듯 잠시 휘청거려도 괜찮다// 너의 신체는 벌써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일 분이 되면,/ 네 목소리는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고/ 날리던 꽃가루는/ 내 목구멍을 파고들 수도 있다// 나는 손바닥을 펴 내가 빈손임을 확인한다// 일 분 사이, 나는/ 첫 번째 손가락으로 네게 찬사를 보냈다가/ 세 번째 손가락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일 분이 가기 전에// 너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일 분의 외곽에 있는 나를 가리킨다/ 다행히 나는 온몸으로 신호에 반응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일 분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너는 네 번째 손가락을 들어/ 보란 듯이 내게 흔들 수도 있다/ 빛나는 것은 어지럽다/ 내가 아니면, 내 것이 아니라면// 네가 생각하는 동안/ 나도 일 분을 절단해/ 몇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손가락을 쳐다보며/ 일 분 전의 약속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일 분 후가 되자 소용없어지고 만// 첫 번째 손가락의 자취가 사라졌다/ 팡파르와 함께// 장내에는 폭죽이 쏟아지고 있다/ 일 분 후의 네가 내 앞을 무뚝뚝하게 지나간다// 세 번째 손가락이 벌떡 서려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나운서는 예정대로 다음 봉투를 열고/ 너는 네 이름을 잠시 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 분 후, 너를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직 일 분 전이라 아무도 모른다// 교양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 오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떤 머리를 쓰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씁니다. 중요한 강의와 회의가 여러 건 있으니 저 머리를 써야겠군요. 잠자리용 머리를 벗어두고 그 머리를 착용합니다. 하루가 시작된 게 몸소 느껴지는군요. 평소보다 늙어 보인다구요? 저는 평소란 게 없습니다. 인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인다구요? 이 머리를 쓰면 웃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웃으며 인사합니다. 나는 웃지 않고 고개만 까딱 숙입니다. 나는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지요. 이 머리가 날 그렇게 만듭니다. 생각하는 동물들은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머리를 쓴 친구는 참 마음에 들어요. 날 존경하는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쟤는 시험 보는 날만 꼭 거창한 머리를 쓰고 옵니다. 답안지는 더 거창하지요.// 퇴근 후, 머리를 벗어 선반에 고이 모셔둡니다. 목에 잠복해 있던 스프링이 불쑥 피어납니다. 하녀가 후다닥 뛰어와서 실내용 머리를 씌워줍니다. 주름살과 콧수염은 빚보다 더 빨리 늘어나는군요. 도무지 청산이 불가능해요. 식염수에 눈알을 세척하고 스프레이로 콧구멍을 살균합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내용 머리를 벗어야겠습니다. 선반에 진열된 머리들 중 하나를 골라 쓰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IQ가 15 떨어지는 대신, EQ가 30 상승합니다. 당신은 우아하군요. 오늘따라 유독 재킷이 잘 어울리는군요. 아이들은 어찌나 이렇게도 사랑스러울까요. 이 머리만 쓰면 자동적으로 거짓말들이 줄줄 쏟아져 나옵니다.// 하녀가 쿠키와 차를 내오고 우리는 대화에 몰두합니다. 가든파티에는 가실 건가요? 주식은 오늘 또 바닥을 쳤더군요. 다음 달 품위는 또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말을 마치고 우리는 웃습니다. 이상하게 이 머리만 쓰면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차 맛이 쓰군요. 쿠키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아요. 재채기를 하며 어색하게 또 한 번 웃습니다. 실내용 머리는 어느새 조금 늙었습니다.// 창밖으로 낯익은 머리가 지나갑니다. 언젠가 봤던 머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우리 어디선가 만났던가요? 아, 저 머리에는 텔레파시가 가닿지 않는 모양이네요. 손님들에게 말합니다. 아쉽지만 오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에요. 외출을 해야겠습니다. 당장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그런데 어떤 머리를 써야 당신이 나를 알아볼까요. 일렬로 늘어선 머리들이 자기를 골라달라고 사정없이 달그락거리는군요.// 머리 하나를 쓰고 거리를 거닐다 누군가와 부딪치고 맙니다. 성난 머리가 말합니다. 거, 머리 좀 조심하쇼. 여기 어디에 거머리가 있다고요?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성난 머리에선 이미 연기가 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머리 하나가 지나갔을 텐데, 혹시 못 보셨나요?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수많은 머리들이 휩쓸고 간 수많은 자취들을 따라가자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입니다. 고장 난 나침반처럼 빙빙 회전하는 머리를,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찔 / 오은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 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詩 / 오은
철길 위에서 유모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굴뚝도 없이 씩씩하게 굴렀다. 아이는 발가락을 맞대고 난생처음인 듯 울어젖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씩씩했다. 속으로 내가 말했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 아이는 철길에서 자랐다. 유모도 없었다. 돌봄도 없었다. 떠날 땐 경적을 듣고 돌아올 땐 매연을 마셨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말문이 터졌다. 울음에 의미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몸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유모차를 박차고 나왔다. 바퀴 없이도 씽씽 미끄러질 수 있었다. 참말이었다.// 아이는 기관사가 되었다. 유모차 대신 기차를 몰았다. 발바닥으론 액셀러레이터나 클러치만 밟았다. 언젠가 발바닥을 맞댄 적이 있었던가?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패스. 대신 아이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빼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객차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아이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을, 승객들은 잊지 않았다.// 철길 위에서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을 만큼 충분히 씩씩했다. 유모는 있었더라도 아마 죽었을 것이다. 아이는 유모를 제 인생에서 완전히 밀어내려는 듯 액셀러레이터를 더 힘차게 밟았다. 그런 식으로 유머를 잃어버렸다. 원래부터 웃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구해야 한다! 더 한층 씩씩해진 아이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기차 안에서 유모라도 살려내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발바닥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윽고 기차를 멈추었다. 발바닥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모양이었다. 승객들이 안도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입에도 담기 힘든 욕설들이 귀에는 담기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내리고 싶었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이가 아니었다면.//

합평회 / 오은
좋은 말만 하기 없기/ 나쁜 말은 꼭 한 번씩은 하기// 자 누구부터 할까?// 손바닥을 내밀고/ 선생님의 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먼저 맞는 매가 매서웠다// 이 구절 어디서 본 것 같아/ 맞아, 그 시인의 그 시집에 있는 그 시의 두번째 연이랑 유사해/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그 누구들과 그 무엇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맹해 보이는 아이조차/ 겉옷의 안주머니에/ 잘 드는 족집게나 면도칼, 송곳 하나씩은 품고 있었다// 기교만 있지 새로움은 없어/ 정작 네 이야기가 없잖아/ 진정성이 안 느껴져// 오늘 함께 점심을 먹고 간식을 먹고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연애에 대해 떠들던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새겨들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야// 언제부턴가 자기 작품은 가져오지도 않는 선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잔뜩 뚱뚱해진 선배// 맞는 자는/ 더 매서워진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야멸차져야 한다// 이제부터는 육탄전이다// 겨울인데도/ 교실에 난방이 안 되는데도/ 족집게나 면도칼, 송곳이 삐져나올지 모르는데도/ 얼굴이 벌게진 아이들이 겉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 누구와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좋은 말은 하기 없기/ 꼭 나쁜 말만 골라서 하기// 법대로 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 이러면서 크는 거야/ 더 할 말 있는 사람?// 인용되지 못한 마음만 교실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얼굴 / 오은
고함을 칠 용기도 없고/ 욕을 퍼부을 패기도 없어// 나는 미로로 간다// 지상은 손짓이 있는 곳/ 지하는 발버둥이 있는 곳// 할 말이 있어서/ 손짓을 잊지 못해서/ 손에 쥔 전화기만/ 들었다가 놨다가// 같은 편을 찾아서/ 비슷한 사연을 찾아서/ 땀내를 풍기며/ 울다가 웃다가// 우리는 사이좋게/ 얼굴이 점점 시끄러워진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 유예 되었다는 것/ '있다가'가 '이따가'가 된다는 것/ 같은 시간이 다음 역까지 계속된다는 것// 웃길 때 웃지 못하고/ 화날 때 화내지 못해서/ 우리의 얼굴은 어색하다/ 낯빛으로 드러나는 열없는 몸부림// 지상은 산 사람들을 위한 곳/ 지하는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곳//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미간이 좁아진다는 사실을// 코를 움씰거릴 때마다/ 인중에 돋아난 솜털들이/ 어쩔 줄 몰라 몸을 눕힌다는 사실을// 입술을 비죽일 때마다/ 입속에서는 윗니와 아랫니가/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을// 내 얼굴을 통해서/ 내 얼굴이 보고 있다/ 내 얼굴을// 얼굴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는 어떤 얼굴이 튀어나온다// 순식간에 미로가 된 얼굴/ 환승을 해야 한다// 전동차가 멈추고/ 이번 역에서 탈 얼굴들이 보인다/ 내리지 않은 얼굴들이 남은 사연을 전달할 것 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표정을/ 평생 떠나지 않을 생활을// 스크린 도어가 열린다/ 시끄러운 얼굴들이 안팎으로 쏟아진다/ 아무것도 막아주지 못한다//

그 냄새 좀 제발! / 오은
아침에 일어나면/ 입을 벌려 연습해요/ “아니요.”// 양치질을 하면/ 입가에 하얗게 거품이 일어요/ 거짓말처럼// 거품을 걷어 내고/ 거울을 보며 살짝 웃을 때/ 나는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어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하철을 타면 냄새가 나요// 비누 냄새, 된장 냄새, 커피 냄새, 빗물 냄새, 담배 냄새, 새벽 냄새, 피로와 활기가 뒤섞인 어색한 냄새, 사람 몸에서 달아나려고 발버둥치는 냄새, 사람 몸에 남아 있고자 아득바득 애쓰는 냄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뿜어 대는 갖가지 냄새, 사람 냄새// 나는 그 냄새들을 다 끌어안고 내려요/ 사회생활이라는 오늘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어제와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면/ 낌새는 냄새가 되고/ 당신은 회사 모토처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해 줘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몸소 실천하고 있어요// 향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당신 냄새를,/ 사무실 냄새를,/ 내가 끌어안고 온 하나하나의 냄새들을 모조리 지워 버리는 거예요/ 여기 어디에도 사람 냄새가 없어요/ 온데간데없어요// 잠이 확 달아나요/ 실전이에요// 차마 코를 닫을 수는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아요/ 입을 다물어 버려요// 킁킁거리기라도 했다가는/ “향기 좋지?”라는 물음이 분사될 거예요/ 내 안의 폭력성은 상승하겠죠/ ‘아니요! 아니요!’ 속으로만 신나게 소리치겠죠/ 연습은 실전과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겠죠/ 봐요, 나는 분명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어요/ 한층 화가 났어요/ 더한층 비겁해졌어요// 말할 수는 없어도/ 숨 쉴 수는 있어요// 눈감아 주는 것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는 것도/ 잘할 수 있어요// 당신이 짬이 날 때마다/ 연예 기사를 클릭하고/ 오늘의 운세와/ 내일의 인연에 목을 매는 것도/ 나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에요// 사회생활을 하러 왔는데/ 온몸으로 생존만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치 사회생활이 끝나기 직전이에요/ 당신은 끝까지 자랑스럽고 싶은가 봐요/ 아무래도 회사에 뼈를 묻을 작정인 모양이에요/ 여러분, 그리고 사무실이여/ 이 향기를 남겨 놓을 테니/ 월요일까지 나를 잊지 말아 달라!// 주말 내내 이곳은 오염되어 있을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당신과 함께 5년을 근무했다던 저 사람은/ 비염임에 틀림없어요!// 출근 전에는 치약 거품을 물고 있던 내가/ 퇴근 전에는 게거품을 물고 있어요// 생존만 생각하다 보니/ 별수 없이 오늘 나는 야근인데/ 할 일이 태산인데/ 알다시피 오늘은 금요일인데/ 간만에 들어온 소개팅을 취소해야 하는데/ 당신 면전에 버럭 소리라도 질렀다간/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질지 모르는데/ 나의 원래 냄새는 이미 희미해졌는데/ 한밤중까지 오염된 공간에 있어야 하는데/ 이 냄새를 끌어안고 집에 들어갔다간/ 향수 살 돈 있으면/ 생활비나 좀 더 보태라고 엄마가 윽박지를 게 빤한데/ 상상은 끝이 없는데/ 무슨 상상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뜩이나 숨통이 막혀 죽겠는데/ 당신이 향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금요일 오후를 지워 버리는 것도 모자라/ 당신 자신마저 점점 지워 버리고 있는/ 그 냄새 좀 제발!//

58년 개띠 / 오은
앞만 보며 달려왔어요/ 뒤를 볼 겨를이 없었어요/ 누가 쫓아오고 있는 것처럼/ 그림자를 볼 여유가 없었어요// 뒷바라지하느라 이렇게 늙었어요/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누가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몰아세우니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어요// 위를 떠받들며 살아왔어요/ 아래를 보살피며 살아왔어요/ 위아래가 있는 삶이었어요/ 옆에 누가 있는지/ 어떤 풍경이 흘러가고 있는지/ 이 거대한 풍경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담당하고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실은 무서웠어요/ 일그러져서 다시 펴지지 않을까 봐/ 희미해져서 다시 생생해지지 못할까 봐// 무서워서 눈을 감아버렸어요/ 온몸이 거대한 속표정으로 변했어요// 눈뜨면 여기였어요/ 여지없이 여기였어요// 오늘은 오늘의 밥이 절실했어요/ 내일은 내일의 옷이 요긴했어요/ 십 년 뒤 오늘에는 집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앞으로 보면/ 개떼처럼 몰려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뒤에 있어서/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 늘 위아래가 있었는데/ 꾹 다문 입술에는/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어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멈췄어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그림자가 꿈틀거렸어요// 뒤를 돌아다보니 거울이 있었어요/ 내가 있었어요/ 잊고 있었던 얼굴에는 물굽이가 가득했어요/ 어디로 흘러도 이상할 게 없는 표정이//

만약이라는 약 /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물방울효과 / 오은
물방울 한 점에 대해 생각한다. 바다 위에 떨어진 한 점의 물방울에 대해. 그 물방울은 너무도 견고해서 결코 바닷물과 섞이지 않는다. 바다의 일부분이 되길 거부한다. 물방울은 사실 그 어디에도 속할 생각이 없다. 끝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길 원할 뿐이다. 물방울 한 점은 파도를 넘고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다 위를 훌훌 떠다닌다. 그저 떠다닐 뿐이다. 스스로를 일으키는 기표처럼.// *// 지금 여기에는 색과 음과 말이 있다. 네가 벽에 대고 세게 망치를 내리친다고 하자. 색은 번지고 음은 퍼지고 말은 결국 내뱉어질 것이다. 네 눈에는 숨은 그림들이 스르르 고개 드는 모습이 보인다. 너는 곧 절대음감을 지니게 되고 자음과 모음을 뒤섞는 법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는 색과 음과 말이 있고, 너는 이 모든 것들을 네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잠시 후, 기표는 순순히 너의 것이 된다.// *// 지금 여기는 미어터지기 직전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시공간은 몸을 같이 움직인다. 색이 선명해진다. 음이 단단해진다. 말이 씨가 되고 있다.// *// 물방울이 잠시 휘청거렸다. 공간이 흔들렸다. 밀물이 시작되었다.// *// 어떤 시인은 조사(助詞) 하나를 가지고 일 년을 넘게 끙끙거렸다. 마치 단어 하나가 풍기는 뉘앙스가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각각의 조사가 풍기는 느낌에 사로잡혀 헤매고 또 헤맸다. 그리고 그 느낌은 섣불리 말해질 수 없었다. 쉽게 말해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번 내뱉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 년이 흘렀지만, 그는 그 어떤 조사와도 이별할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돼 있었다.// 조사를 선택하는 동안, 그는 늙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한 점의 물방울처럼, 그것은 끝끝내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매일 바다에 나가 물방울을 구하는 심정으로 시를 썼다. 사실, 시를 썼다기보다 조사를 선택하느라 골몰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에게는 접미사나 구두점같이 일견 하찮게 보이는 것들조차 무겁고 버겁기만 했다.// 그는 평생 단 한 편의 시만 남겼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서랍에는 수만 가지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것들이 주는 질감이 너무나도 독특해서 그 누구도 섣불리 그것들을 주워 담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 그 시인의 자취를 따라 물방울이 구르기 시작한다. 항해 도중에 조사를 쓸 자리라도 만난 것처럼, 물방울은 바다 위에서 잠시 멈칫거리기도 한다. 나비 한 마리가 섬 꼭대기에 앉아 날갯짓을 하고 있다. 분명 지구상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 어떤 음악가는 음표의 길이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음을 쪼갰다가 늘였다가 다시 이어붙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온종일 파도의 넘실거림에 대해 떠올렸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아니라 파도의 ‘넘실거림’에 대해. 그의 손가락은 물결치고 그의 입은 연방 씰룩거렸다. 몹시 서글프게도, 음들은 좀체 자리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마디 하나를 완성해도 남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의 생활은 도돌이표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32분 음표처럼 위태로워졌다가 숨표처럼 헐떡거리기를 반복했다. 간혹 온음표가 등장해 맘 놓고 한숨을 내쉴 때도 있었지만, 음에 둘러싸인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제자리표를 찍고 긴 잠에 들었다. 자신(自身, 自信)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새벽이 밝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다음 마디가 시작되었다.// *// 그 음악가가 대체 누구냐고 물을 때조차 물방울은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물방울은 자신의 몸을 연주할 사명을 결코 잊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을, 물방울은 좀체 놓으려 하지 않았다.// 구름이 걷히자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총천연색 자신이 자랑스러워져 어깨를 잠시 으쓱거렸다. 격랑이 시작될 징조가 보였다. 몇 개의 예민한 섬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 어떤 화가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묘사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언가를 똑같이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변하는 공기의 색깔에 대해 잠깐 떠올리고는 무심결에 창밖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푸른가? 푸르다면 대체 얼마만큼 푸르지? 그 푸름은 대체 어떤 종류의 푸름인가? 그 푸름 뒤에는 무엇이 있지? 그는 결국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발이 묶여버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는 그만 바닥에 파란색 물감을 엎지르고야 말았다.// 그는 일단 보이는 것을 크로키로 표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일단 색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도와 명도에 대해 골몰하다가는 평생 그림 한 점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그는 자동적으로 물감에 눈길이 가는 것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자기 자신이 채도와 명도를 잃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푸른 눈이 광채를 잃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는 우울해졌다.// 크로키를 그리다가 그는 결국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그는 작업실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방울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 눈물이 바닥에 있던 파란색 물감과 섞였다. 오묘한 마블링이 시작되었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바로 이 색이야! 그는 창밖으로 바다를 내다보았다. 오늘만큼은 바닷물에 하염없이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잘 여문 물방울이 굴러간다. 쟁반 위의 옥구슬이나 지붕 위의 참새가 아닌, 그저 한 점의 물방울로서. 바다 위의 물방울이 아니라, 우연히 바다 위에 존재하게 된 물방울로서. 물방울은 그 자체로 둥글고 꽉 차 있다. 바야흐로 기표가 존재성을 획득하는 시간이다. 물방울은 그렇게 스스로 하나의 공간이 되고, 원래 공간이었던 것을 지배하게 된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 바닷가에는 바람이 불고 햇볕이 내리쬐고 소금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물방울이 떠다닌다. 순리를 터득한 존재처럼, 더없이 편한 포즈로.// *// 지금 여기에는 색과 음과 말이 있다. 색은 번지고 음은 퍼지고 말은 내뱉어진다. 이것은 경향이고 수순이며, 나아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네가 그것들을 쥐락펴락하는 동안, 세계의 모든 에너지가 너를 향해 집중된다. 잠시 동안이지만, 너는 시공간의 중심이 된다.// 이윽고 시가 완성되고 음악이 완성되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큰일이 벌어지기 직전 혹은 벌어진 직후처럼, 바다가 잠잠해졌다. 물방울이 오롯해졌다.// *// 그리고 우리는 방금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터득했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서 우리는 펜을 들고 붓을 들고 고막을 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기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인데 말이다. 물방울이 고개를 들고 다시 항해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우리는 자유에 대해, 진화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물방울 한 점이 바다를 들썩이게 만든다. 물방울은 그저 몸을 한 번 뒤틀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을 신나게 미끄러뜨렸을 뿐이다. 바다 위에서 물방울의 뒤척임은 나비의 날갯짓만큼이나 위태롭고 강력하다. 예의 그 예민한 섬들이 격랑에 몸을 떨고 있다. 무시무시한 물방울효과.// *// 우리는 눈을 감는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귀를 연이어 두드린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썰물.//

풀쑥 / 오은
몸을 열면 질병이/ 입을 열면 거짓말이/ 창문을 열면 도둑이, 도둑 고양이가 튀어나온다// 우편함을 열면 눈알이/ 내일을 열면 신기루가/ 방문을 열면 호랑이가, 종이호랑이가 튀어나온다// 속이는 것은/ 속없는 겉이 하는 일//

7 a.m. / 오은
1. 아빠가 커튼을 활짝 연다. 오늘은 해가 뜨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엄마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말한다. 일요일은 생식을 하는 날이잖아요. 딸이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며 엉클어진 머리를 동여맨다. 오늘은 학교에 가는 날이 아니잖니. 아빠가 소파에 걸쳐 있는 신문을 펼치며 묻는다. 그 신문 그제 신문이에요. 아들이 눈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 나온다. 녀석아, 잠옷도 거꾸로 입고 다니니. 엄마가 핀잔을 하며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오늘부터 3일 간 단수인 거 모르셨어요? 딸이 얼굴에 분칠을 하며 곱게 눈을 흘긴다. 그놈한테 너랑 그만 만나라고 어젯밤에 연락했다. 아빠가 TV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한다. 케이블이 끊어져서 오늘부터 바둑 채널은 안 나와요. 아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화장실 도어를 발칵 연다. 노크는 기본이 아니니. 엄마가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으며 화를 낸다. 누가 발 닦는 수건을 거기다 걸어놓았지? 현관에서 하이힐을 신으며 딸이 심드렁히 말한다. 나가서 들어올 생각은 아예 말아라. 아빠가 소파를 주먹으로 탁 치며 소리 지른다. 우리도 다 컸다고요. 양치질을 하던 아들이 우물거리며 응수한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교양이 없니. 바닥에 치약 거품을 닦으며 엄마가 짜증을 낸다. 애들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게요? 안절부절 못하는 아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오늘은 좀 늦을 거예요. 숄더백을 멘 딸이 현관문을 세게 닫아버린다. 아주 문을 부수지 그러니. 엄마가 현관 밖으로 총총 사라진 딸에게 윽박듯이 말한다. 엄마, 옆집에서 들어요. 양치질을 마친 아들이 턱을 이리저리 뒤틀어 이상한 소리를 낸다. 그 짐승 울음 같은 건 대체 누가 가르쳤니. 아빠가 샹들리에 아래에서 맴맴 맴돌며 공격하듯 묻는다. 왜 하필 거기서 정신없이 빙빙 돌고 그래요. 갑자기 설거지감이 생각난 엄마가 싱크대를 향해 잰걸음을 한다. 엄마, 오늘부터 물이 안 나온다니까요. 아들이 바닥에 벌렁 누워 윗몸일으키기를 하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창문을 닫아야겠다. 아빠가 황급히 커튼을 닫는다. (거봐요,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는 다니까요)//

호텔 타셀(Hotel Tassel)의 돼지들 / 오은
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아르누보 식이었지요/ 이 말은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돼지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저렇게 끼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면 몰라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요즘엔 유기농 비료를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 약고 퍅하고 야한 농담을 즐기죠/ 젊은 돼지들의 토실토실 오른 살을 부러워했고/ 항상 네 다리를 벌리고 잠잤습니다/ 인간의 아이가 태어날 때면 엉덩이로 꼬리를 뭉갠 채 잠들었지요/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는 돼지들도 있어요/ 그들은 다만 낄낄거릴 따름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식충이들 / 오은
밥을 먹는다 습기 먹은 김을 먹고,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고기 2인분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탄내도 덤으로 먹는다 풀 먹은 옷을 입고 담배를 뻑뻑 먹으며 출근을 한다 동료들에게 빌어먹을 골탕도 먹고 겁을 먹고 찾아간 부장에게 욕도 한 두어 바가지 얻어먹는다 독서 좀 하려 했더니 책 모서리는 개먹어 있고, 코 먹은 소리로 친구에게 전화하지만 전화는 먹통이고 가슴은 먹먹해진다 지금 이 순간, 공주님들은 이슬을 먹고 부잣집 어린이들은 꿈을 먹고 화투판에서는 똥을 먹는 아주머니들도 있겠지 연탄가스를 먹는 이들, 본드를 먹는 이들, 미역국을 먹는 이들, 아무렇지도 않게 꿀꺼덕 검은 돈을 먹는 이들도 있을테지// 퇴근 후, 술을 처먹고 아편 대신 육포도 씹어 먹고 좀먹는 속이 걱정되어 보약도 챙겨 먹는다 왕년에는 식은 죽 먹기로 1등을 먹었었는데, 어떤 일이든 척척 거저먹었었는데, 식욕은 왕성해지는데 먹어도 먹어도 떨어지는 게 없다니! 독하게 마음 먹고 회사의 공금을 좀 먹어 볼까?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 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 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고 배우자의 영혼도 야금야금 갉아먹을 테지// 나는야 벌레 먹은 사과처럼 흉해져서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다가 자살골을 먹고 스스로 입을 열어 레드카드를 먹는, 자면서도 어김없이 끊임없이 틀림없이 산소를 먹는, 그러면서도 항상 배고프다고 소크라테스처럼 투덜거리는// 당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앉은자리에서 손 하나 꿈쩍 않고/ 1,397바이트를 소화시킨 무시무시한 당신은//

나무의 일 / 오은
나무가 책상이 되는 일/ 잘리고 구멍이 뚫리고 못이 박히고/ 낯선 부위와 마주하는 일/ 모서리를 갖는 일// 나무가 침대가 되는 일/ 나를 지우면서 너를 드러내는 일/ 나를 비우면서 너를 채우는 일/ 부피를 갖는 일// 나무가 합판이 되는 일/ 나무가 종이가 되는 일/ 점점 얇아지는 일// 나무가 연필이 되는 일/ 더 날카로워지는 일// 종이가 된 나무가/ 연필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밤새 사각거리는 일// 종이가 된 나무와/ 연필이 된 나무가/ 책상이 된 나무와 만나는 일/ 한 몸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날이 되는 일// 나무가 문이 되는 일/ 그림자가 드나들 수 있게/ 기꺼이 열리는 일/ 내일을 보고 싶지 않아/ 굳게 닫히는 일/ 빗소리를 그리워하는 일// 나무가 계단이 되는 일/ 흙에 덮이는 일/ 비에 젖는 일/ 사이를 만들어/ 발판이 되는 일// 나무가 우산이 되는 일/ 펼 때부터 접힐 때까지/ 흔들리는 일//

부재중 전화 / 오은
딴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에 금이 가 있었다// 너는 그 시간에 다른 공간에 있었다// 금이 간 시간 속으로/ 에테르*가 다했다//
* 에테르(ether) : 맑고 깨끗한 대기(大氣). 빛을 파동으로 생각했을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여겨졌던 가상 물질이다.

기다리는 사람 / 오은
골목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도 있고, 큰길에도 있고 마트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다. 학교 정문에도 있다. 아들이 엄마를 삼십 분째 기다린다. 남자가 여자를 삼십 일째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삼십 년째 기다린다. 몸이 몸을 기다린다. 마음이 마음을 기다린다. 언제나 기다린다. 어디서나 기다린다. 도처에 기다림이 있다./ 이번 달 생활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 성공을 기다리는 사람, 경쟁자가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어제의 영광을 다시 기다리는 사람, 내일의 행복을 처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기다림을 반복하는 사람과 기다림을 번복하는 사람이 있다. 골목을 서성이다 휴대전화를 여는 손이 있다. 간절한 순간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전속력으로 뛰어간다. 기다린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모르고 이기적으로 뛰어간다. 기다림은 충돌하는 법이 없다. 하나의 열정이 하나의 기다림을 스쳐 지나간다. 헐떡이는 사람 뒤로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다. 뛰고 있는 두 개의 심장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기다림이 그림자처럼 길어지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언제 올 지 섣불리 예측하지 않는다. 온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다리겠다고 겨우 말했을 때 그사람은 이미 뒷모습이었다. 기다림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뒷모습은 멀어져갔다. 뒷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기다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림은 해소되는 법이 없다. 앞모습으로 뒤를 좇는 사람이 있고 뒷모습으로 앞을 향하는 사람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삼십 분이 삼십 일이 되고/ 삼십 일이 삼십 년이 되고// 만날 때는 안녕하고 싶어서 안녕/ 헤어질 때는 안녕하지 못해서 안녕// 기다리는 사람이 골목에 있었다./ 기다릴 때까지 있었다.//

반지하 / 오은
반은 지하라는 말은/ 반은 지상이라는 말도 될 텐데// 공간은 왜 아래를 향할까/ 말은 왜 아래를 지향할까// 피곤한 날에는/ 하늘이 더 높아 보였다// 사람은 왜 위를 향할까/ 왜 자꾸 비상하려고 할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땅속에 눕는 기분을 상상했다// 반삶이라는 말은 없고/ 반죽음이라는 말만 있듯이// 한숨은 왜 땅으로 푹 꺼질까/ 왜 새싹으로 다시 돋아나지 않을까//

투성이 / 오은
자외선이 안 좋대/ 방사능이 안 좋대/ 먼지가 안 좋대/ 미세먼지는 더 안 좋대// 속마음을 털어놓으려고/ 걱정투성이가 불만투성이에게 다가갔다// 날이 왜 이리 더워?/ 말이 돼?/ 내일은 더 더울 거라고 하네./ 믿겨?// 걱정투성이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걱정만 더 깊어졌다// 불만투성이가 걱정투성이를 이끌고/ 거짓말투성이에게 갔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만인이 평등해/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어/ 내일은 오늘보다 근사한 하루가 될 거야/ 믿음만 있으면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어// 거짓말투성이의 입이 열리자/ 가뜩이나 많았던 것이 더 많아졌다// 걱정이 산더미인데/ 그 위로 불만은 쌓이고/ 거짓말은 터무니없고// 사상누각의 오늘/ 앞은 뿌옇고/ 날은 푹푹 찌고// 앞날을 예감하듯/ 실수투성이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인공장 / 오은
무인공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사람이 없어도 사람을 견디는 기술을. 사람이 없어도 사람인 채 버티는 기술을. 일은 기술과 상관 없었다. 아침을 먹고 스위치를 켜는 것. 저녁을 먹고 스위치가 켜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 아침을 먹고 저녁을 먹는 것이 차라리 더 고된 일이었다. 무인공장에서 일어나 무인공장으로 출근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이 없어도 되는 곳으로 아침을 먹고 스위치를 켰다. 보지 않은 사이에 스위치가 꺼질까 걱정되어 점심은 걸렀다. 사람을 맞이할 필요도, 사람을 배웅할 필요도 없었다. 출근시간이 왔다가 노동시간이 왔다가 밥시간이 왔다가 다시 노동시간이 왔다. 정확한 간격으로 밥시간과 퇴근시간이 왔다. 기술적이었다. 퇴근이라고 쾌재를 부르면 메아리가 되어 공장에 울려 퍼졌다. 예술적이었다. 무인공장에 출근했다가 무인공장으로 퇴근했다. 무인공장에서 잠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시간이 갱신될수록 시간개념은 점점 희미해졌다. 시간은 가지 않고 늘 오기만 했다. 이상했다. 그렇게 오래 근무해도 기술은 늘지 않았다. 수상했다. 무인공장에 내가 있었다. 무인공장인데 내가 있었다. 무인공장인데 내가 있는 것이 유일하게 습득한 기술이었다. 어느 날에는 스위치를 켜는 심정으로 불쑥 내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무인공장과 달리 나는 이름이 잇었다. 무인공장과는 달리, 나는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 스위치를 껐다. 공장 내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제야 일이 기술가 상관있다는 걸 알았다. 해고를 당할 때에야 무인공장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해고를 당했는데 정작 공장에서 빠져나갈 기술이 없었다. 무인공장에서는 유입만 있고 유츌은 없었다. 제시간은 항상 찾아오기만 했었다. 곤욕은 곤혹 전에 찾아와 곤경에 처한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이 없어도 되는 곳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없어야 하는 곳에 사람이 있었다. 한번 꺼진 스위치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사람 구실을 하는 게 곤란해졌다. 비로소 무인공장이 무인공장다워졌다. 뭔가를 원해서 뭔가를 원하지 않아서 입은 늘 벌린 채였다. 아침을 먹어도, 점심을 걸러도, 저녁을 먹어도 입은 늘 벌어진 채였다. 무인공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사람 없이도 사람을 견디는 기술을. 사람 없이도 사람인 채 버티는 기술을.//

그날의 전날 / 오은
그날의 전날에는 비가 내렸다.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비가 내렸다 길은 얼어붙는 대신 질척이기로 마음먹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내일는 반드시 눈이 내릴 거라고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도움이 되는 일이다 재미는 없는 일이다 TV를 끄려는 찰나, 아나운서가 말했다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는 않는 것은 돈이 되는 일이다 모험은 없는 일이다 눈알을 굴리고 귓바퀴를 굴리고 마침내 머리를 굴리는 데 성공했다 유명한 정치인이 돈을 굴려 큰돈을 만들었다고 했다 저지르는 데 성공하고 저지른 것을 숨기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유명 정치인이 범죄를 저질러 더욱 유명했졌다는 내용이었다// -내일 눈이 내리면 눈을 굴려 눈덩이를 만들자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자/ -비는 싫은데 빗소리는 좋아 눈은 좋은데 눈밭은 싫어// 우리는 내일 서쪽에서 뜨는 해를 보기로 약속하고 눈을 감았다 반달같은 눈썹과 초승달 같은 눈썹이 그날을 향해 파르르 떨었다.//

당신에 관하여 / 오은
당신은 지금 외롭다 당신은 헐벗고 굶주렸고 춥고 아프다 머리가 지끈거리다가 무릎이 쑤시다가 발목이 결리다가 이가 시리다 당신은 지난 일 년 새 식구들을 죄다 잃었고 보험사기단에 걸려 단단히 쓴맛도 보았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절도 혐의로 쫓겨났다 뭇매를 맞고 교문 밖으로 내쳐질 때 말리던 선생님도 없었다 천사인 줄만 알았던 양호선생님은 침까지 퉤 뱉어주었다 어려울 때 전화할 친척들도 없었다 아니 친척들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하나같이 영구 결번이었다 당신은 통장 같은 걸 가져본 역사가 없고 우유급식을 해본 기억도 없다 저축일이 되면 새집 지은 머리만 자꾸 긁적였다 눈치 없는 새들은 비듬 같은 알들을 무턱대고 까댔다 기름진 비듬을 훌훌 털어내면 주위에 있던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짝꿍이 결석했을 때 남은 우유도 당당히 차지하지 못했다 용기가 없어서였다 힘이 없어서였다 주변에 힘세고 용기 있는 친구가 없어서였다 오락실에 가도 동전이 없었다 지폐를 바꿔줄 오락실 주인이 없었다 사실은 동전이고 지폐고 돈이 없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바닥에 떨어진 동전 하나 없었다 돈 몇 푼 뺏기고도 울지 않는 꼬마들이 없었다 실은 일러바칠 엄마아빠 없는 꼬마들이 없었다 그리고 일 년이 흘렀다 그간 당신은 터를 잡고 앉아 행인들의 관상이나 사주팔자를 봐주었다 전화기로 사진을 찍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점술 따위를 보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앞으로 뭐 먹고 살까 궁금했지만 정작 당신 자신의 점은 보지 못했다 사주 같은 건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가끔 당신을 측은히 여긴 국밥집 주인이 시래기 듬뿍 얹어 국밥을 말아주면 당신은 허발을 하고 덤벼들었다 그 시래기들도 벌써 다 소화되고 없다 뜨스웠던 국물도 어느 담벼락에 스며든 지 오래다 국밥집 할머니도 이제는 죽고 없다 국밥집이 있던 자리엔 빙수집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당신은 지금 당장 퇴근하고 들를 단골술집 하나 없다 실은 다닐 회사가 없다 같이 술 마실 친구가 없다 술 마실 친구의 여자친구도 없다 그 여자친구 앞에서 잡을 폼도 없다 인연 같은 게 아예 없는 거다 근사한 양복이나 고급구두가 있을 리 없다 설사 있다 한들 입고 갈 데가 없다 당신은 오늘 낮, 마지막 재산이었던 토정비결을 팔아 빙수를 사먹었다 헐벗은 자에게 빙수는 무던히도 찼다 따라서 당신은 춥다 당신은 외롭고 방금까지 혀가 지독히 아렸다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너무나 배가 고프다 당신,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낸다 그러나 아뿔싸! 당신은 지갑이 없다 지갑에 든 돈이 없다 이쯤 되면 당신이 슬플 이유는 충분하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려는 찰나, 당신은 당신이 눈물샘이 없다는 걸 안다 어떤 소설도 당신 인생만큼 슬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운도 참 없지, 당신은 글재주도 없다 콱 죽어버려서 보험금이나 타 먹을까? 아쉽지만 들어 논 보험도 없고 보험수혜자도 없는 당신이다 당신은 허영허영 슈퍼로 걸어 들어가 뜨신 호빵을 열쌔게 우겨넣는다 하얀 우유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다 놀란 주인여자가 경찰을 부른다 당신은 체포되고 욕도 한 사발 얻어먹을 것이다 아무도 당신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루팡이나 장발장이 아니다 친척들은 더욱 더 몸을 꼭꼭 숨길 것이다 혀가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다 천사 같은 간호선생님이 루주 섞인 침을 당신의 엉덩이에 퍽 꽂는다 놀란 당신, 물고 있던 우유와 빵을 다 토해낸다//

벽돌 / 오은
얼굴이 여섯 개/ 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이 있었다/ 얼굴을 하나 가질 때마다 그림자가 생겼다//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각도가 생겼어 모서리가 됐어 너 때문에 부피가 생겼어 사람들이 들고나올 만한 너 때문에 무게가 생겼어 사람들이 치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겼어 너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어 뒤통수에 혹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앞이마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림자가 거대해졌어// 그것을 묵묵히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백육십 개가 넘는 얼굴을 등에 지고 삼백육십 일이 넘는 날을 넘는 사람이 있었다 곱절이 제곱이 되는 삶이 있었다// 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상상하게 됐어 굽는 것은 얼마나 뜨거울까 쌓아 올리는 것은 얼마나 지겨울까 찍어 누르는 것은 얼마나 잔인할까 찍어 눌리는 것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그것을 밟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뭉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돌이 벽을 만나던 순간이었다/ 벽돌이 돌벽이 되던 순간이 있었다// 얼굴이 여섯 개/ 얼굴 위로 다른 얼굴이/ 얼굴 옆으로 다른 얼굴이// 그림자는 깔려 죽으면서 태어났다//

응시하는 사람 / 오은
벌판이 있다 드넓다 그 위를 말이 달린다 자유롭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푸르다 생동감 있다 바로 옆에 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다 노랗다 멋들어지다 서서, 누워서, 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다// 실은// 말은 쫓기고 있었다 말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벌판이 드넓어서 달리는 데 문제는 없었다 숨을 데도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다행이자 불행이었다 말을 잡으려는 대상이 있었다 그게 누군지 말만 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자유롭지 않아서 맹렬히 달렸다 자유를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는 중이었다// 아무도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나무는 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뿌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누워 있는 나무가 서 있는 나무를 잡아 끌었다 서 있는 나무는 더 자라려고 정수리에 온 기운을 모으고 있었다 생동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다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눕히려는 나무와 어떻게든 눕지 않으려는 나무가 있었다 두 그루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무엇이 변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벌판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무 두 그루는 푸르고 노랗게 다정할 것이다// 장면을 완성하는 이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다// 겨울철, 소변을 볼 때마다 내 몸에서 따뜻한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섬 / 오은
눈 감고 네 발 전체를 섬이라고 상상해 봐 이를테면 열도 같은 거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되지 섬은 바로 네가 품고 있는 거니까 양말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봐 물을 콸콸 틀어 놓고 슬그머니 발을 밀어 넣는 거야 섬에 비가 내리니? 폭포가 쏟아지니? 차가워서 흠칫 놀란 모양이구나 네 발이 파닥파닥 튀고 있잖니 걱정마 네 섬에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거니까 푸른 등을 가진 물고기들, 지금부터 일제히 솟구친다 알겠지?// 그 섬에 가고 싶니? 굳이 누굴 찾아갈 필요는 없어 섬은 바로 내가 품고 있는 거니까 이제 네 손을 다리라고 상상해 봐 가만히 다가가 발을 고옥 쥐는 거야 마른 손이 젖은 섬에 가는 길, 마른 네가 젖은 네게 가는 길, 열리고 있니? 내가 뭐랬니 푸른 이끼들이 힘줄을 타고 네 심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잖아 너는 이렇게 푸르러, 푸르러, 푸르르다구! 준비됐다면 눈을 떠도 좋아 자, 이제 건너갈 수 있지?//

나는 오늘 / 오은
나는 오늘 토마토/ 앞으로 걸어도 나/ 뒤로 걸어도 나/ 꽉 차 있었다// 나는 오늘 나무/ 햇빛이 내 위로 쏟아졌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위로 옆으로/ 사방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오늘 유리/ 금이 간 채로 울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고였다/ 진짜 같은 얼룩이 생겼다// 나는 오늘 구름/ 시시각각 표정을 바꿀 수 있었다/ 내 기분에 취해 떠다닐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종이/ 무엇을 써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텅 빈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사각사각/ 나를 쓰다듬어 줄 사람이 절실했다// 나는 오늘 일요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오늘 그림자/ 내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잘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 공기/ 네 옆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너를 살아 있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오늘 토마토/ 네 앞에서 온몸이 그만 붉게 물들고 말았다//

면접 / 오은
이름이 뭔가요?/ 전공은 뭐였지요?/ 고향에서 죽 자라났나요?// 여기에 쓰여 있는 게 전부 사실입니까?/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에 다녀왔다// 서 있어도/ 앉아 있는 사람보다 작았다// 가장 많이 떠들었는데도/ 듣는 사람보다 귀가 아팠다// 눈사람처럼 하나의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낙엽처럼 하나의 방향만 갖고 있었다// 삼십여 년 뒤,/ 답이 안 나오는 공간에서//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녹지 않았다/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미니 시리즈 / 오은
느닷없이 접촉사고/ 느닷없이 삼각관계/ 느닷없이 시기질투/ 느닷없이 풍전등화/ 느닷없이 수호천사/ 느닷없이 재벌2세/ 느닷없이 신데렐라/ 느닷없이 승승장구/ 느닷없이 이복형제/ 느닷없이 행방불명/ 느닷없이 폐암진단/ 느닷없이 양심고백/ 느닷없이 눈물바다/ 느닷없이 무사귀환/ 느닷없이 갈등해소/ 느닷없이 해피엔딩// 16부작이 끝났습니다/ 꿈 깰 시간입니다//

그 무렵 소리들 / 오은
정수리가 토마토 꼭지처럼 힘없이 떨어져나갈 무렵,// 팬파이프 소리, 피아노의 스물네 번째 건반 소리, 병든 아이의 숨소리, 마지막이 가까스로 유예되는 소리, 돌들이 튀어오르는 소리, 해바라기씨가 옹기종기 모여 한꺼번에 마르는 소리, 당신의 입술이 벌어질 때 나는 최초의 소리, 모래알들이 법석이는 소리, 조개들이 통째로 기어가는 소리, 눈물이 볼을 타고 견디듯 흘러내리는 소리, 티슈 한 장이 먼지 부연 선반 위로 떨어지는 소리, 수억 광년 묵은 별똥별이 전쟁터에 불시착하는 소리, 틀어막은 여자의 입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겨우 새어나오는 비명 소리,// 말들이 징검다리고 밥이고 우주고 엄마고 바로 당신이었던 그 무렵, 낙오된 귀를 열어젖히는 한없이 낯선 소리, 에르호 에르호……//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 오은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대명사와 조사가 결합하면 가능해진다/ 나는 누구에 속하는지 자신이 없었다 냄비 속에서 불안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배고픔과 배 아픔이 동시에 찾아왔다// 아침에는 심술을 부리고 도리질을 쳤다 손길이 다가오면 뿌리쳤다/ 자발적으로 가난해졌다// 언제고 활짝 피어날 수 있단다 대명사와 조사가 결합하면 막연해진다/ 나는 언제에 속하는지 자신이 없었다 냄비가 뜨거워서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쉽게 달아오르고 재빨리 식어버렸다// 낮에는 냄비 바닥처럼 우는 소리를 했다 전체가 까매지고 한곳은 특히 새까매졌다 우발적으로 우울해졌다// 밤이 되었다//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한 말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움찔움찔 몸서리를 쳤다 부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일 할 말을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설래서 이불을 또 한 번 뒤집어썼다 한여름에도 꼭 덮고 자야 돼 덮어야 안심이 된다//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명사와 조사가 결합하면 근사해진다//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밤에는 착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불을 덮고/ 가만히 밤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돌멩이 / 오은
뻥뻥 차고 다니던 것/ 이리 차고 저리 차던 것// 날이 어둑해지면/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내가/ 길목에서/ 이리 채고 저리 채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여기저기에 있었다// 날이 깜깜해지면/ 돌담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돌멩이처럼 한곳에 가만히 있었다// 돌멩이처럼 앉아/ 돌멩이에 대해 생각한다// 돌멩이가 된다는 것/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온몸이 된다는 것/ 잘 여문 알맹이가 된다는 것// 불현듯 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네 가슴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철석같은 믿음이 된다는 것// 입을 다물고 통째로 말한다는 것// 날이 밝으면/ 어제보다 단단해진 돌멩이가 있었다/ 내일은 더 단단해질 마음이 있었다//

바람직한 사람 / 오은
강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네가 사람이야? 고성이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사람인가? 자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사람인데, 확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길 포기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에게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사람으로 호명된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이 좀 사람 같았다. 사람으로 호명되지 못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눈초리와 콧등과 입매가 실시간으로 변했다. 사람 같았다가 사람 같기도 했다가 어느 순간, 사람과 흡사해졌다./ 강당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사람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수용소 같기도 하고 큰 방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모델 하우스 같기도 한 공간이었다. 연설을 할 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여차하면 싸움도 벌일 수 있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이 사람에게 소리 질렀다. 사람이었던 사람이 움찔했다. 아직 사람이 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사람이길 바라는 사람들, 그 사람만은 아니길 바라는 사람들, 그럼에도 사람이 되길 바라는, 사람 이전의 사람들이었다. 뭘 바라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가 바람직한 것인지,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이러는 거야? 사람이 사람을 보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사람답게 사람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청춘 / 오은
거센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칼이 꽃이 되는 일/ 피가 뼈가 되는 일// 어떤 날에는/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내 마음이 아니니까// 자유는 늘 부자연스러웠다// 몸의 부기를 빼는 일/ 마음을 더는 일/ 다시/ 예사소리로 되돌리는 일// 꿈에서 나와 길 위에 섰다/ 아직, 꿈길 같았다//

짠 / 오은
잔이든 시선이든/ 마주칠 때/ 액체가 흐른다// 마음에 금이 간다// 집에 오는 길에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림자가 제대로 있는지/ 발자국이 제대로 찍히는지/ 혹시라도// 주워 담을 것이 있는지/ 한 방울이라도// 마주치되 맞추지는 못해서/ 거리는 늘 파편이었다//

내일의 요리 / 오은
내일은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식욕이 베이킹파우더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모레를 위해서라도/ 사방에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뒷맛이 씁니다// 오늘은 밥을 먹습니다/ 마음이 글루텐처럼 죽죽 늘어납니다/ 피부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첫맛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어제는 쌀을 씻었습니다/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명사를 위해/ 너무 많은 동사들을 소모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해가 기울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양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밥은 끓기도 전에/ 식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ㅁ놀이 / 오은
오늘도 너는 말놀이를 한다. 재잘재잘. 도중에 말이 막히면 너는 물을 마신다. 벌컥벌컥. 그리고 너는 물놀이를 한다. 첨벙첨벙. 도중에 배가 고프면 너는 미음을 먹는다. 허겁지겁. 그리고 너는 맛놀이를 한다. 우걱우걱. 도중에 배가 부르면 너는 몸놀이를 한다. 폴짝폴짝. 그리고 너는 망놀이를 한다. 호시탐탐. 도중에 도둑을 잡으면 너는 멋놀이를 한다. 찰랑찰랑. 그리고 너는 무(無)놀이를 한다.// 놀이를 안 하는 게 지루해지면 너는 문놀이를 한다. 찰칵찰칵. 도중에 잠이 오면 너는 몽(夢)놀이를 한다. 꿈틀꿈틀. 그리고 꿈에서 너는 말놀이를 한다. 딸깍딸깍. 말을 타는 도중에 멀미를 하며 너는 맥놀이를 한다. 두근두근. 어푸어푸. 도중에 머리카락이 잡히면 너는 몇놀이를 한다. 십중팔구. 그리고 너는 맘놀이를 한다. 무럭무럭. 도중에 또다시 배가 고프면 너는 맘 놓고 마음을 먹는다. 거푸거푸. 그리고 너는 못놀이를 한다.// 놀이를 못 하는 게 억울해서 너는 ㅁ놀이를 한다. 입(口)으로 들어가서 누군가가 ㅂ을 던져줄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설 / 오은
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스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노폐물을 배설했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 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란드* / 오은
나는 란드에서 태어났다 부동산에서, 재화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중개로, 써비스로// 핀란드에서 나는/ 이가 나면서부터 자일리톨이 잔뜩 들어간 껌을 씹었다 단물 빠진 껌을 앞니 뒤에 숨기면서부터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하는 법을 배웠다 양들처럼 두 가지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침묵하기, 동시에 무럭무럭 자라나기/ 폴란드에서 나는/ 글을 깨치면서 시를 읽었다 시엔키에비치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심보르스카는 언제나 너무 멀리 있었다 호기심은 낯설고 결핍은 낯익었다 낯 뜨거운 일들은 밤에 벌어진다는 걸 알았다 낮은 이미 충분히 뜨거웠으므로/ 네델란드에서 나는/ 대마초를 피울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노천 카페에서는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엽서를 싸게 팔았다 대통령같이 아무 데도 없는 것들과 축구공같이 어디에나 있는 것들에 시종 둘러 싸여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겨울이 꼭 친구 같았다 반쪽 같았다/ 그린란드에서 나는/ 순간을 얼리는 법을 터득했다 별을 헤고 있으면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새우잡이를 해야 겨우 세우(細雨)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지구가 온난해지자 젖은 옷은 마르고 지하에 있던 자원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발견의 순간에는 주인공이 “이누크!”라고 외쳤다 성엣장이 떠내려가듯 유유히 발음하는 게 중요했다 란드에 남은 마지막 에스키모와 키스를 한 순간,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른 이누크가 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외로움을 다스리는 훈련을 했다 당시에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은 총 아홉명이었다 까만 눈과 까만 머리카락은 가장 독특한 액세서리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가 어음장처럼 날아왔다 나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숫자를 셌다 숫자는 두 자리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홀수여서 나는 덜 외로웠다 더 이로웠다// 나는 란드에서 태어나 란드에서 자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란드, 돈이 되는 란드/ 여기는 땅이다, 네가 와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아무리 참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온화하고 냉혹한 땅,// 란드//
* 그린란드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

음악 / 오은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다/ 혼자 서 있다/ 그에게 빛이 쏟아진다/ 빛있다는 것은/ 곱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한때의 감정에 휘말린다는 것/ 질 수 없어서/ 두 손을 든 채 시작할 수 없어서/ 우리는 알록달록한 색안경을 쓴다/ 너는 빨간색/ 나는 파란색/ 색안경을 쓴다는 것은/ 표정을 들키지 않겠다는 것, 마음을 선선히 내주시 않겠다는 것/ 우리가 다 모이면 무지개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석의 악보는/ 반듯이 접혀 있다/ 반드시 접혀 있다/ 순순히 다음 국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정적이 흐른다/ 그는 우리가 까만 점들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빨간색 덩어리로 보인다/ 눈을 감았다 뜨면 파란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연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다는 것은/ 내 앞에 장막을 친다는 것, 집중하겠다는 것, 스스로 까매진다는 것/ 들리기만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 선글라스로 눈물을 감추고/ 색안경으로 마음을 숨겼지만/ 선글라스가 입을 막지는 못해서/ 색안경이 귀를 가져주지 못해서/ 버릴수록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막을수록 스며드는 것이 있었다/ 지면이 융기하고/ 평면이 부피를 얻고/ 2차원의 악보가/ 3차원의 리듬을 얻는 데/ 고작 몇 분이었다/ 의성어가 끝나고/ 의태어가 시작되었다//

서바이벌 / 오은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만 중요했다// 살다의 반대말은 죽다가 아니야/ 떨어지다지/ 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군가는 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부로 너는 우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감정은 수용성(水溶性)이라/ 떨어진 자는 떨어져서 울고/ 떨어지지 않은 자는 떨어지지 않아서 운다// 편성표가 말한다/ 슬퍼할 시간을 딱 일주일 주겠다/ 그 사이/ 지난주에 네가 살아서 열광하던 사람들이/ 너를 집요하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너는 갈수록 가볍고 희미해질 것이다// 네가 없는데도/ 남은 자들은 우리를 만든다/ 취향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비슷한 것이 하나 없는데도/ 살아남았으니까/ 또 한고비를 넘겼으니까/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함께 슬퍼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규모는 점점 작아진다/ 하나에 가까워진다//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 정확히 일주일 후,/ 우리가 입을 모아 말한다/ 유일하게 우리가 우리 같은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침을 삼키는 순간// 하나만 남았다/ 나만 남았다// 오늘부로 나는 우리라는 말을 쓸 일이 없게 된다//

1년 /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용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 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바늘 상점 / 오은
바늘을 사러 바늘 상점에 갔다// 얼마나 더 가늘어질 수 있니/ 긴바늘이 물었다// 얼마나 더 팽팽해질 수 있니/ 짧은 바늘이 물었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앗는데/ 어느새 바늘방석에 앉아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은 했니/ 코바늘이 물었다// 엉킨 마음을 들켜버렸다// 실이 얼마나 가는지/ 실이 얼마나 팽팽한지/ 실은 얼마나 간절한지/ 실은 얼마나 뜻밖인지// 째깍째깍/ 초바늘이 실에게 묻고 있었다// 정오가 되었다/ 가늘고 팽팽한 시간이었다// 상점 안에 있는 바늘들이/ 일제히 바늘귀를 열었다// 누구라도 찌를 만바느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밀을 엿들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다// 바늘 상점에 햇살이 들이닥쳐/ 비치되어 있는 바늘들이 빛이 되었다// 상점을 나오는데/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실답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몸이 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관절마다 바늘이 돋아 있었다// 바늘을 사러 바늘 상점에 갔다/ 거대한 바늘이 되어 바늘 상점을 나왔다//

봄밤비 / 오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김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기우가 폭우가 되는 날이 많았다 놀란 모래알들이 법석이고 있었다 뭉치고 있었다// 비를 기다리기 위해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낮이 길어지면 지루해서 하품을 해댔다 봄 안에서 봄을 기다렸다 보지 않은 것처럼, 아직 볼 게 남은 것처럼/ 밤은 남몰래 어두워졌다// 봄밤에는 산책하는 연인들이 있었다 모래알들을 밟으며 앞길을 내다보았다 막막했다 눈썹달을 바라보며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봄이 코앞이라고 믿기로 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봄을 기다렸다 너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까마득하구나/ 밤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가 내렸다/ 봄밤에 밤비가 내렸다/ 봄밤에 있는 사람들은 취약해졌다// 한밤중에 비를 맞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한봄이었다 호우였다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뒤꿈치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비바람이 바람비가 되었다// 여태 겨울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고개 숙이고 다니는 날들이 많았다 머리채를 잡아채이듯 이따금 고개가 확 뒤로 젖혔다 속으로는 구구단을 외우고 있었다 팔육은사십팔, 팔칠은오십육, 팔팔은육십사… 팔팔 끓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떨어진 것이 정수리 밖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구일은구, 구이는십팔…//

말실수 / 오은
한 사람은 말만 기억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실수만 기억한다// 한 사람은 말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의 뉘앙스만 기억한다// 표정은 알고 있었다/ 말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는지/ 실수가 언제 싹텄고 어떻게 부풀어 오를지/ 왜 다른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차가워졌는지/ 표정만 알고 있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같은 곳을 향해 갔다가/ 다른 곳을 향해 사라졌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마침내 한사람이 되었다/ 똑같은 표정으로 지독하게 걷고 있었다// 마음은/ 말의 어느 구절에도 없었다// 도정(道程) 그 어떤 돌부리에도 없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방 -J에게 / 오은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 들어갔어. 숨을 힘껏 들이쉴 수 없었어. 그 냄새들이 내 몸속으로 다 날아들까 봐. 내가 그 방의 냄새를 다 앗아갈까 봐. 냄새 때문에 내가 옅어질까 봐. 지워질까 봐. 오직 냄새가 나를 증명할까 봐. 내가 냄새처럼 고였다가 냄새처럼 머무르다가 냄새처럼 사라질까 봐.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이 그냥 방이 되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았어. 냄새가 있었다는 사실만 아슴아슴 떠오를 것 같았어.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이라고 말했어. 방과 냄새가 한 몸이 됐어.// 좋은 냄새를 남겨두고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나왔어. 좋은 냄새가 아직 주위에 남아 있었어. 내 몸에 남아 있었어. 방에서 나와서 방에서 점점 멀어지는데 여전히 곁에 있었어.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어. 숨이 있었어. 몸이 반응하고 있었어. 헐떡임이 있었어. 다른 방에 들어가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어. 내내 좋을 것 같았어. 내리 냄새가 날 것 같았어. 남겨둔 것이 모자란 것처럼 절박했어.// 방을 빼도 방은 남아 있었어. 둘이 들어갔다가 혼자 나왔지만 냄새는 언제나 냄새들로 있었어. 나에게서 너를 빼도 아직 내가 있었어. 반을 빼도 반이 남아 있었어. 온기 같은 허기가 남아 있었어. 냄새가 기억에서 멀어진 만큼 냄새가 좋았다는 사실은 더 분명해졌어. 좋은 냄새가 더 좋은 냄새가 되고 있었어. 냄새란 말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상서로운 냄새가 났어. 냄새가 있었어. 냄새들이 있었어.// 좋은 냄새를 잊고자 무작정 다른 방에 들어갔어. 어떤 방에 가도 좋은 냄새가 기어이 새어 나왔어. 그 냄새에 나는 기꺼이 스며들었어.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이제 멀리 왔는데, 너무 멀리 와서 어디 있는지조차 까마득한데, 좋은 냄새는 더욱 가까워졌어. 타고난 냄새처럼 자꾸 살갗을 파고들었어. 나는 “방.”이라고 말했어. 방과 내가 한 몸이 됐어. 빈 방이 좋은 냄새로 가득 차올랐어. 냄새의 방향을 따라 방 안이 집요해졌어.// 창밖으로 연기가 보였어. 좋은 냄새가 나던 방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어. 좋은 연기로. 풍기는 것에서 피어오르는 것으로. 좋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좋은 연기가 나는 방으로, 나는 확산(擴散)하고 있었어. 기운이 되기로 몸소 마음먹었어. 몸과 마음이 한 몸이 됐어. 한마음이 됐어. 한방이 됐어.//

​표리부동 / 오은
어제밤 꿈에는 네가 나왔다/ "잘지내?"라고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잘지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까봐/ 누구보다 네가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 나쁘다/ 꿈 속에서도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 치 기분 / 오은
깃털을 보았다/ 마음이 가벼워지려는 찰나,/ 깃털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절로 깜빡였다// 저 멀리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눈이 부셨다// 햇볕이 따갑다고 해도 좋다/ 햇볕이 뜨겁다고 해도 좋다/ 온몸으로 햇빛을 보았다// 바람이 포근하다고 말해도 좋다/ 바람이 부드럽다고 말해도 좋다/ 온 마음으로 공기를 마셨다// 오늘 치 기운이 생겼다/ 오늘 치 기분이 생겼다/ 생긴다는 것/ 없던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 당분간 내 것이 하나 는다는 것// 몸속에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걷지 않아도/ 움직움직하고 있다는 것만 안다// 깃털을 보았다/ 떨고 있는 깃털을 보았다// 방으로 돌아오면/ 따갑고 포근하다/ 뜨겁고 부드럽다/ 오늘 치 기억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보았다// 잠들기 직전에 떠오르는 풍경이/ 꾸무럭꾸무럭/ 꿈에 나타난다// 꿈에는 솟구치는 깃털이 나온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비로소 내일 치 기분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시인의 말 / 오은
어떤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 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어떤 날에는 알록달록한 낱말들로 무채색의 시를 쓰는 꿈을 꿨다. 그림자처럼 평면 위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한동안 내가 몰두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입 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 귀를 벌리면 나비떼, 입을 기울이면 나이테. 터지고 있었다.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무것이나.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영혼을 삶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2013년 봄의 어떤 날/ 오은

 



오은 시인
1982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작란(作亂)’ 동인이다.

제15회 박인환문학상, 제1회 구상시문학상, 제20회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유에서 유》《왼손은 마음이 아파》《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이 있다.

 

 

[직설]시를 읽는 이유

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처음 만난 자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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