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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하석 시인

부흐고비 2021. 7. 15. 09:04

신천 / 이하석
비슬산의/ 숭엄과 신화의 바위가/ 검은 속 왈칵왈칵 쏟아내어/ 질펀한 서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 물 대구시내 들어오는/ 가창 끝머리쯤에서/ 맑은 죽음들 품어 쓰다듬는 할머니가 떠먹고,/ 한바탕, 서러운 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 깨움을 들고서야 겨우,/ 어미 강이 되는 것입니다./ 수달이든 왜가리든 고라니든 인간이든/ 선 것들 입에 젖 물린 채/ 마구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 죽은 이들의 자식들 여전히 여기서 자라기에/ 대구분지는 그렇게 문득 또, 환하게/ 젖는 것입니다./ 한바탕, 새로 저항해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신천 / 이하석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또는 폭풍우를 숨은 채 꿈꾸며./ 물 속 나사의 뜻은 훌러 내린다, 강철과/ 알미늄과 합성세제에서 떨어져 나가며,/ 물 공기 시간을 하나로 풀어 놓으면서,/ 녹물처럼 반란하며, 얼굴 붉히며./ 나사에 걸린 물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에/ 벌써 힘이 빠진다./ 풀들과 거머리와 모래들을 비켜서/ 이윽고 숨죽인 소리로 흐르다/ 그치는 물.// 노란 해 잠자는 물 속 떠도는/ 나사들 하염없는 밑바닥 꿈꾸며 가라앉고,/ 들판에 닿기 전에 벌써 힘 빠지는 물.//

버려진 병 / 이하석
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및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질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흙들 그 속을 채워, 병들은 침묵한다,/ 어느덧 묵묵한 흙무더기로 속을 감추면서.//

병 2 / 이하석
쥬스, 코카콜라, 사이다, 뜨거운/ 소주 같은 것들 사람들의 어깨를 넘어서/ 떠나가 버렸다, 질퍽하게. 미치광이 길을 따라/ 여름은 발가벗긴 채, 버려진 병의 밑바닥으로/ 이끌려 왔다. 발가벗긴 채 모든 것은 내동댕이쳐졌다./ 병들끼리 부딪치며, 그 소리에 시끄러워하며,/ 흙들의 어둠 속에 빠지면서, 이제는 누구나 먼지 속/ 혼음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가누구냐고요?내용이없으니아무것도아니지요뚜껑이필요없는빈병일뿐그냥엎드린채더낮게고개숙이고더깊숙한곳으로몸이나파묻을뿐속은비었지만허전하지않아요우린아무것도아니라니까요// 청정한 세계를 담기 위하여 빈 병은 엎질러진다./ 엎질러진 다음 냉정해지는 유리. 스스로 버려지면서/ 병은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들만의 세계 쪽으로/ 주둥이가 빠진다. 고요하다. 남은 빈 병들은 엎질러지며/ 그들이 둘러싼 세계가 거꾸로 그 자신들을 껴안는 것을/ 느낀다.//

뒤쪽 풍경 1 / 이하석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 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 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

뒷쪽 풍경 2 / 이하석
먼지 속에서 뒤척이며 찢어진 신문에서 떨어져 나와/ 푸른 여자 먼지 일으키며 날아갔다./ 비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채 햇빛에도 바랜 채/ 뒹굴던 깡통들 뻔뻔하게 흙 속에 처박히고,/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들 뚫어 버린다./ 나비 올 때쯤 기약도 없이 꽃피는 민들레, 저 혼자/ 씨앗 흩이고 쓰러진 후, 그 곁에 내던져진 채/ 몇 개의 사건들 기억해 내려고 심각해진 남자들의/ 찢어진 얼굴들. 그 얼굴들만 휴지로 빠져 나와/ 바람에 사라지는 것들 속에 저절로 섞이며,/ 혹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평온하게/ 따로 미끄러지면서.//

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의자의 구조 / 이하석
의자 위엔 대개 구름이 내려와 앉아 있다/ 누구든 그 위에 앉으면 그 무게만큼 구름이 떠올라/ 그의 머리가 구름 속에 꽂힌다/ 어디선가 우레 치고 큰비 내리는데/ 그는 복잡한 생각에 싸여 앉아 있다/ 제 의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힘준 발가락 느끼며/ 그 아래는 대개 구조가 단순하다/ 의자 다리는 네 개/ 그 사람 다리는 두 개/ 여섯 개의 다리 중 두 개에는 발가락이 달려/ 모든 균형이 잡힌다//

긴 나무 의자 / 이하석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남녀가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쓸어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 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놓으면 의자는/ 제 깡기를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의/ 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른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분홍강 / 이하석
내 쓸쓸한 날 분홍강 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 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 때 우리는 함께 이 곳에 있었고/ 분홍강 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 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밀양강 1 / 이하석
인가 쪽을 달래는 강물로 산자락을 깎는 역사가 아프다. 방해와 변형의 마음이 이룬 둑 위에서 자다가 문득 다가서는 낯선 물소리에 꿈은 다급해진다. 나의 전부를 흘려보내고 난 다음 인적 없는 쪽으로 칭얼대는 강.//

꽃질 / 이하석
성주서 시집 온 마산댁은/ 아버지와 천둥치며 날 만들어/ 꽃질들 가에 새로 세워놓았지요// 오래된 솔숲 마을은/ 너른 들로 그 소문 열어놓았는데/ 엄마가 팔아 나를 산 대가천이/ 그 들 휘감아 안았지요//

풀씨 하나 떠돌다가 / 이하석
깡통들 빈속에 고함 숨긴다, 반짝이는/ 쇠 조각에 부딪치며, 흐린 하늘 빈속에 차고/ 넘치며, 아랫도리 벗겨져 붉게 푸르게 흩어지며,/ 불에 그을려 푸른 여인의/ 입술 타버렸고, 고운 눈 땅 속에 처박힌다./ 여인의 눈 밑 상표들도 노랗게 땅에 묻히고/ 그 위 어둠과 비와 햇빛과/ 비닐의 찢긴 팔이 와서 감는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얼었다가 흐려지는/ 하늘, 치약 껍질이 긋는 허공 가득히/ 빈속 잠재우는 눈도 내리고, 이윽고 오는/ 봄. 풀씨 하나 떠돌다가, 철조망 안/ 쓰레기 하치장에 떨어져 싹을 틔운다,/ 허물어진 연탄재 구멍 속으로 하늘 치어다보며./ 그 싹 풀들로 자라나 쇠와 유리 조각과/ 빈 깡통 덮어, 사월이면 풀의 상공에/ 꽃도 피워낸다. 스스로 이룬 풀씨/ 다시 사방에 날리며.//

나의 아름다움 -릴케의 시*를 따서 / 이하석
누가 우는데/ 저 혼자만 우는 게 아닙니다/ 나도 왈칵, 뜨거워집니다// 누가 즐거운데/ 저 혼자만 즐거워하는게 아닙니다/ 나도 덩달아, 들썩입니다// 누가 부르는데/ 저 혼자만 부르는게 아닙니다/ 나도 가쁘게, 기척합니다// 물론 당신이 벙글면/ 나도 피어납니다// 이런 게 나의 아름다움이죠/ 그 힘으로 일어납니다//

* 릴케의 시, [마음이 무거울 때]

만금이년 젖 먹자 / 이하석
우리 만금이 늘 새롭다고 새만금이/ 헌 것 그대로가 새 것인 새만금이/ 그대로 늘 새로운 새만금이// 젖 먹어라// 우리 찾아가는 삼보일배 길에/ 무릎 까져 흐르는 고통의 피가/온 몸 흐르는 땀방울 방울 방울이/ 다 젖이다// 이 길 막는 이들/ 새 것만 우기며 만금이 겁탈하고 죽이는 이/ 젖 못 얻어먹으리라// 헌 것 그대로가 늘 새 것이 되는/ 만금아 천만금아 만만금아/ 우린 네가 낳은 딸이고 아들이거니/ 미륵이거니// 만금이년 살려 젖 얻어먹자/ 많이 먹고 억만년을 또 드넓게 크자//

구름 / 이하석
30층 쯤이면 구름체계와 연대하는 창구(窓口)가 왜 없겠는가/ 창 열어두고 담배를 거푸 피워대는 이는/ 어쨌든 구름공장의 직원을 꿈꾸겠지?//

구름의 키스 / 이하석
구름이 어디서든/ 팽창팽창/ 피어오른다./ 그걸 올려다보는 재미로/ 여름을 난다.// 보라, 한 구름이/ 여자 모양으로 목을 늘여서/ 구름 남자에게 뭉게뭉게/ 다가가는 걸.// 구름 여자의 입술이/ 구름 남자에게 팽창팽창/ 닿으면/ 까치 부리 안처럼 단순한 남자의 안에도/ 뭉게뭉게/ 바람이 분다.// 누가 내 입/ 핥고/ 간/ 기억처럼/ 내 입안에도/ 구름의 말이/ 뭉게뭉게/ 씹힌다.//

숲 / 이하석
사람들 숲에 들자 그늘 속 어룽대는 햇빛으로 문신을 한다. 금방 서로 부시게 바뀌는 얼굴들. 그러나 이내 몇 잔씩 저마다의 생애의 상처 속으로 들이붓는 막걸리들이 그 얼굴들을 붉게 발효시킨다.//

나무 / 이하석
지난 가을에 무성한 바람의 기억들 떨쳐버리고/ 망각의 비탈로 밀려났다고 여겼는데,/ 언제 기억 되찾았는지,/ 우리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문득 전신이 푸르스름해져 있다.// 바람기가 곧 무성해진다는 걸 드러낸 게다./ 우리 자는 사이 밤을 치대던 천둥./ 그 환한 예언의 소리 온몸으로 맞은 어혈 같다./ 그러고 보니 이월의 끝이고 삼월의 초입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절로/ 제 온몸의 봄을 당연한 소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기세는 여름으로 이어져 무성해진다.// 나는 바로 보고 말해야겠다,/ 나무는 모든 계절의 끝머리쯤에서/ 망각되거나 의심되어지는 게 아님을,/ 언제나 그렇듯 나무가 선 그곳이/ 모든 계절의 출발점인 것을,/ 나도 그렇게 비탈에 서 있음을.//

새 / 이하석
새는 초소 위 안테나 끝에 앉아서 울기를 좋아한다./ 유연하게 내려앉아 흰 날개를 접으면/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울음 뭉텅이 같다./ 바다 쪽으로 엎드린 초소.// 내면을 감춘 나무 그늘 아래 매복한 채/ 군인은 철조망 너머 또 아는 새가 날아오는지 살핀다.// 수상한 병사다./ 속눈썹이 예쁜 그는 새에게 제 밥을 내준 적도 있다.//

초록의 길 / 이하석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개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의 마른 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쯤 뜯겨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 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닳아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 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있으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 때, 애통해 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 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길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의 깊은 곳으로 왔다. 처음엔 들판에서 쉽게 이어진 초록의 길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를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풀무치의 눈으로 보면-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익은 탑 / 이하석
탑이 쌓이건 무너지건 도로변 흥정은 자주 유쾌하다/ 무너지면 포도 위 나딩구는 사과들까지 날렵하게 주워/ 할머니는 매번 정성들여 다시 쌓는다// 상원사 폐탑 사진을 내 방의 책상 위에 세워두었지만/ 그건 그것이고,/ 푸성귀와 함께 길가에 늘어놓고 사과 한 상자를 종일 앉아서 파는 할머니는 고운 탑을 하루에도 수백 번 우리 동네 앞 길가에 쌓는다// 제일 아래층은 다섯 개,/ 그 윗층은 세 개,/ 그 위 꼭대기층은 한 개로/ 한결같이 가지런하게 쌓여지는 삼층탑들// 폐탑이란 있을 수 없는 저 탑의 높이는 가장 맛있는 높이/ 어느 누구도 올려다볼 수 없어 아이들까지도 내려다보는,/ 그 높이가 아주 낮아도 거룩하게 까마득해 할머니가 내내 그윽해하는,/ 황혼 어른댈 녘이면 없어졌다가 아침 해 그림자 짧을 때 쯤 늘 새로 나타나 세워지는/ 우리 동네의 싱싱한 거리탑들//

연탄재들 / 이하석
인재부근 산골 부대 쓰레기 하치장,/ 마분지 조각 쇳조각 껌종이 서류 같은 것들/ 불에 그을어, 연탄재 더미 사이로 몸을 숨긴다./ 하치장 부근의 오리나무도 불에/ 그을어, 어깨가 쳐진 채로 가지 하나를/ 힘겹게 하늘로 밀어 올린다./ 민들레꽃이 황토 비탈에서 잠깐 피었다 진 후/ 병사들은 다시 주위의 풀들을 뽑아 버렸다./ 깊은 밤 먼 논의 개구리 울음 소리에/ 연탄이 하나 허물어져 내린다./ 뼈들은 바람에 실리어 가고/ 마음은 흙에 묻히며.//

내 놓은 길 / 이하석
각자 바람 가두고/ 사는/ 아파트에도/ 정원에도/ 굳이/ 담배 피우는 시인에게 내 놓은 듯한/ 바깥으로/ 트인/ 길이 있다//

그래, 길이 있다 / 이하석
그래, 길이 있다/ 굴참나무 울창한 숲을 안으로 가르며/ 전화 줄처럼 명확하고도 애매하게/ 길이 나 있다/ 아침을 지나 아무도 없는 숲 안에서/ 나는 외롭고, 지나치게, 무섭다/ 길 저쪽 깊은 숲속으로 곧장 난/ 길 저쪽 어쩌면 길 저 끝에/무엇인가가 있는 듯 느껴진다/ 굴참나무 잎들이 쌓인 숲 저 안/ 어둠의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곳//

가야산 / 이하석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얼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 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대가천 1 / 이하석
어떤 구애로 저 아래 불이 저리도 밝은가. 어둠 속에 나를 지우고 서서 밤새도록 깨쳐지지 않는 흔들리는 먼 불을 본다.// 바람이 빽빽한 물들의 아래를 쓸며 지나간다. 새벽 자갈밭에서 재처럼 퍼져 한숨 쉬며 또 돌아갈 걱정에 싸인다.//

대가천 2 -은어낚시 / 이하석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을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 그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은어를 본다,/ 언어에 기대어서./ 이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 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 그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딸기 잼 / 이하석
에스프레소를 머금는데/ 풍경의 지저귐이 창밖에서 들여다본다.// 할 수 없이 스콘을 따로 주문한다./ 함께 나오는 딸기 잼이면/ 에스프레소의 트집을 잡을 수 있겠지.// 풍경의 지저귐이 창밖에서 들여다본다./ 아침 창밖은 아직도 간밤의 어둔 기억을 헤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서로 감전될 수 없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햇빛으로 제 잎들과 향기의 피켓들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의 역방향이다.// 다만 에스프레소를 되새겨 마시고, 입가심으로/ 조금씩 스콘을 딸기 잼 발라 먹는다./ 풍경의 지저귐이 창밖에서 들여다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날이,/ 바깥의 어떤 풍경에도 물끄러미,/ 에스프레소를 삭히는 일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고통의 여운은 의외로 오래/ 통증의 풍경을 그려낸다.// 혼자 남겨졌다고 여기면서, 우기면서 결국 혼자 남겨진 이는/ 그렇게 자신의 빈 주소의 명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는, 괜한 자살심리로 에스프레소의 조그만 잔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도 풍경이, 갈색과 검은색 짓이겨진 미래의 바닥이 아득히, 있다./ …우리는 그 바닥에도 내려가 뜨겁게 누워보기도 했지.// 이제 내가 카페를 나가버리면 누구의 바깥이 되어 되돌아올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고 해도/ 스콘 없는 대답의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시킬 수도 있다.//

통영 / 이하석
거리는 바람의 비탈, 바다로/ 흘러내린 빗물 길이다.// 저녁때 붉은 물결에 쓸려갔다는// 김춘수의 소식.// 아침 녘에 조개껍질처럼 바다를 게워내며/ 모래 우에 희게 밀려 나와 있다.// 밤새 모래에 새긴 미래의 기억들조차/ 밀물의 질문인 양 붐비었다.//

영춘화(迎春化) / 이하석
그러니까 봄은 공공적이어서/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기습처럼, 사치로/ 나누어진다네// 그렇게, 골목에 내놓은 화분이 먼저 피어내지만,// 여늬 꽃처럼 오만하지 못해서/ 땅에 닿을 듯 기면서/ 겨우 얼굴을 쳐드는 것이네// 향촌동 이름에 걸맞게 향기 바라 키웠다고/ 그렇게 봄이 오면 좋았으리라고/ 근대 문화의 거리가 되면서 오르는 전세 값 감당 못해 더 후미진 동네로 이사 가는/ 할머니가 또 되돌아보네// 이삿짐에서 떼 내어 화분을 골목에 놓고 가는 건/ 동네 사람들에 대한 기약 인사일까?/ 다른 꽃들보다 먼저 봄을 피우고 마는 꽃이라서/ 그런 기쁨도 슬픔도 이젠 감당 못한다며/ 자꾸 뒤돌아보네//

제비꽃 / 이하석
웅크린 바위 피운 꽃이/ 악수 청하는 적의 손처럼/ 흔들린다// 나의 웅덩이는 어둡게 닦은 수면의 백지에/ 그 화해의 수결(手決)을 확실하게 인쇄해놓는다//

어느 날 문득, 가만히 / 이하석
한국작가회의대구경북지부가 2019년에 낸 시선집을 읽는다. 그 안에 내 시도, 있다. 아직, 새초롬하게, 있다. 짚어나가다가 많은 이들의 말들에 밑줄을 그으며 자꾸 내 말도 더 기웃거린다. 요 몇 해까지만 해도 왁자하니 함께 있었던 이들의 시들이 더러, 가만히, 빠졌다. 문득 내 나이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챈다. 그래, 그래, 어느 날 문득 내 시도 이 책 속에 없으리라. 그러면 나는, 가만히, 삐치는 게지. 그렇다고 모든 사랑들로부터 빠진 말이라고 두어두기는 이미, 쉽지 않겠지. 내 말은, 그제사, 그 밖의 밖에서, 가만히, 누군가에 의해 밑줄이 쳐질까, 그렇게 놓여나질 까라고 물끄러미, 또 기웃대어지는 것이다.//

골목들 / 이하석
뜯어내는 집이/ 황혼 같네/ 기둥과 대들보의 근육들이/ 뒤틀렸네 추억처럼/ 돌이킬 수 없어 보이네// 그러나 다 들어내진 않고// 교묘한 손질로 겨우/ 정서의 높낮이를 다시 짜 맞추네// 그 옆으로는 시멘트로 깁스한 건물들,/ 추억 파스로 땜질하고 덧댄 상처들의 건물들이/ 제화점들, 성인텍들과/ 서로 한 동네로 간섭하네// 전쟁 통에 밀려와 쓸리던/ 화가와 시인들이 떠난 다방 자리도/ 엇나간 풍경으로 기울다가/ 리모델링 되어 카페들로 거듭나네/ 거기 무슨 색들과 말들이 더 남았을까/ 나는 기웃거리며 뒤적이며/ 무너진 추억의 퍼즐조각들을 줍게 될까?// 바랜 향촌동 골목들이여/ 오래 속 끓이고 전전긍긍하던/ 우리 추억의 실핏줄들이여/ 황혼같이, 리모델링을 거듭하여 되새기는/ 이상한 새것의 껍질들이여/ 투억만 덕지덕지한 근대의 현대여// 숨바꼭질처럼,/ 늙은 가수의 노래처럼,/ 황혼같이,/ 밤을 꼬박 새운 아침같이,/ 여전히 숨어드는 생들을/ 더욱 더 가지고/ 내다보는 이들이여//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 이하석
바다 다슬기들은 민물에 삶긴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뺀찌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의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 채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살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 원 또는 6백 원어치의 껍질들만 남겨두고/ 애인들은 가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 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인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상응 / 이하석
못둑 위에서 너는 검은 염소처럼 가만히 뿔 세운 채/ 못둑 아래 서 있는 나와 내 집을 내려다본다./ 못물보다 더 아래의, 고요한 깊이 가늠하듯이.//그러면 나는 또 못물 바닥의 돌처럼 바람 기운에 어룽지며/ 그늘의 잎들 다 턴 채 빨간 등들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 한 그루를/ 환하게 못둑 위로 올려보낸다.//

이중섭 / 이하석
경복여관에 묶으며 은지화를 그렸다네/ 여관 가까운 백록다방 구석에서도/ 은종이에 심화心畵를 새겼다네// 아이들이 고기와 놀고 있는 집/ '초토의 시'* 표지로 그려준 그는/ 거식 拒食과 몽상의 난민// 늘 제 가족들을 그려서/ 그의 그림들만은 자못 명랑했다네// 지금은 아프게 지펴지는/ 그리움이 은빛처럼 펼쳐지던 풍경//
* 구상 시절 표지화를 이중섭이 그렸다

은종이 / 이하석
바브민트의 옷을 벗긴 다음 소년은 철조망에 반짝이는 천사를 달아 두었다. 봄이 와서 소년의 주머니 속 뽀빠이가 팔을 올리듯이 천사들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다시 로보트 태권 V를 철조망에 매달았다. 철조망 안 어두운 몸들을 세운 풀들 위로 로보트 태권 V는 철권을 흔들고 작년의 은종이 천사들이 찢긴 날개로 혼곤한 세상의 봄 속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그 봄을 사랑했다.//

종이놀이 / 이하석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숫타니파아타//
1984년 1월, 우리 시쟁이들 몇은 대구에서 소리를 접고 펴는 일을 벌였다.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명을 받으며 시를 쓰고 고치는 행위를 해 보였다. 나의 시를 사람들에게 읽게 한 후, 고쳐 써선 다시 읽히고 고쳐 썼다. 그건 나의 놀이였을까? 아니면 나를 지켜본 그들의 놀이였을까? 또는 그건 놀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들은 그 때 그 자리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1. 소리// 종이를 찢는다. 오오하고/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구긴다. 히유하고/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유리잔 너머 남자가 노랗게 돌아보고 여자가 분홍 잠옷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를 접는다.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부딪치며 부스럭 소리가 난다. 부스럭거리는/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째애앵/ 찢어진다. 유리잔에 금이 갔나보다./ 나는 시를 긋는다. 종이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들린다.// 나는 시를 구긴다. 종이로 시를/ 접는다. 내 시의 종이는 끊임없이 찢기고 접혀지며/ 부스럭거린다. 시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난다. 시를 찢으면 히유하고/ 종이 찢겨지는 소리가 난다. 히유와 오오가 부딪치며/ 시가 접혀진다. 쫘악, 하고 시는 곧잘/ 찢어진다.// 나는 시를 찢는다. 나는 아무 종이에나/ 시를 구긴다. 아무것도 아닌/ 찢김, 아무것도 아닌 구겨짐, 아무것도 아닌/ 접히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내던짐, 아무것도 아닌/ 부딪침, 아무것도 아닌 떨어지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2. 시// 종이가 하얀, 또는 노란 빛 속에서/ 펴진다. 내가 들어 있는 빛을 둘러싼 어둠 속엔/ 숨죽인 백여 명의 어깨들이 있다. 어두운/ 눈들과 귀들이 있다. 나는 시를 쓴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 손과 어깨를/ 보고 있다. 강한 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어둠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나는 시를/ 쓴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흰 빛의 종이 위에, 어둠으로.// 유리잔이 맑게 놓이고,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여자가 분홍 잠옷만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이 씌어져 있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이 구겨지며 남자의 어깨와 닿는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닿은 채로/ 쫘악, 찢기는 소리를 낸다. 아름다와 운 삶이 서로 떨어/ 진다. 찢어지는 소리 멀리,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리가 반짝인다. 나는 시를/ 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끊임없이 누가 나를 보고 있고, 내가 종이를 접을 때/ 빛 속에 숨어 있던 그늘 몇 장이 은밀하게 접혀진다./ 또는 내가 종이를 찢을 때 몇 개의 어둠은/ 튄다. 찌직하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찢을 때 시가 찢기는 소리가 히유, 하고/ 들린다. 어둠 속에서 흠흠, 기침 소리도 난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어둠 속엔 숨 죽인 채 나를 보는 백여 명의 마른/ 침들이 각자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간다. 마른침이/ 올라가는 쪽으로 찢기는 종이 소리는 깡통 속/ 반 쯤 채워진 모래 소리이다.// 나는 시를 만든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린다./ 나는 등을 구부린 채 볼펜으로 시를 쓴다. 모래알이/ 바람에 쓸린다. 나는 어깨를 추스리며 종이를 구기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소리가 허물어진다. 나는 다리를 펴거나/ 이따금 기지개를 켜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위로/ 따스함이 배어든다. 그들은 기침을 하면서/ 나를 본다. 모래가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왼 주먹에/ 턱을 괴고 나를 본다. 모래가 일어서며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옆구리로 숨을 쉬며/ 나를 본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리고 모래밭은 경전처럼/ 펄럭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허벅지로 숨을 쉬며/ 시를 만든다. 누가 모래를 밟는 소리.//
3. 사랑// 종이가, 고즈너기, 빛 속에서, 펴진다. 펴진/ 종이 위에,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쓰다가/ 구겨 버린다. 구겨지는 소리가 빛을 흔들고/ 탁자 위 몇 장의 흰 종이를 흔든다./ 의 바깥, 구겨진 종이 내던져진 어둠 속에/ 눕고 싶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수치와 암담함의 백지가 만져진다.// 유리잔이 놓인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분홍 잠옷만으로 앉아 있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자가 씌어 있다./ 찢어 버리고 싶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을/ 구기면 남자의 어깨에 닿아 짖이겨진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은/ 닿은 채로 쫘악, 찢어진다. 아름다운과 삶이 떨어져/ 내동댕이쳐진다. 유리잔의 날카롭게 부서진 잔해 속에/ 노랑과 분홍이 서로의 몸을 찌르며 엎질러진다.// 나는 시를 만든다. 알 수 없다. 또는 시가 나를/ 만든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시.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독자. 알 수 없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나.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내 구겨진 종이의/ 몸을 펴고 싶다. 알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다시 내가 구겨서 던진 종이를 주워 펴 본다./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펴진 종이 위에 씌어 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는 유리잔의 금처럼 찢겨진 자국이/ 짓이겨져 있다. 새 종이를 꺼내,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다시 쓴다. 종이 위 볼펜을 쥔 손아귀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어둠과 시와 삶이, 노오란 파란/ 또는 무지개를 이룬 섬세한 모든 색들이/ 다림질한 책상보처럼 곱게 펴져 어른댄다./ 종이를 함부로 찢거나 구겨서 버리지 말라./ 나는 사랑이라고 쓴 종이 위에/ 내 몸을 펴며 포갠다.//

향촌동 / 이하석
대구의 중심이라는 기억을 꼭, 쥔다/ 추억의 치우친 골짜기이면서// 골목들 여전히 얽힌 걸 풀지 않아서/ 이곳에 들면 뉘든/ 서로 더 구불구불 통한다// 예술가들 술기운 우거져/ 병목되던 바람지대이자/ 구름지대// 외따른 그런 역사歷史로/ 여전히 산 골목으로 지피는/ 중심의 방언들//

경주 남산 / 이하석
돌은 하나의 사원이다. 시간을 질러갈 수 있는, 인간에 가/ 장 가까운 별이다. 경주 남산 돌에는 슬픔과 상처가 미소로 피어 있는 모양이다. 슬픔과 상처가 미소가 되어오는 그 시간을 헤아리노라면 스스로 꽃이 되겠다. 감모여재(感慕如在)라는 말 떠오른다. 돌멩이 하나 주워다가 놓고 기도하자./ 상처가 미소가 될 때까지.//

것들․1 / 이하석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냈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졌다 끊임없이/ 치운다// 여기 널부러진 생각들,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더욱 제 몸들 부서지게 파도 덮치길 기다리며/ 우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그 중 생각의 빈통은 모래를 담은 채 자족한다/ 그 모래는 여름엔 뜨겁고/ 겨울엔 차디차다/ 우리는 겨울에 거기 앉아서 또 사랑을 나눈다// 여름은 홍수가 되어 그런 모든 것들을 쓸어가/ 바다를 파고든다/ 바다는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고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치워야 한다//

것들.2 / 이하석
한 조류학자의 조사 결과 도시에서 살아남은 새는 더 크게 노래한단다/ 소음 속에서 새들은 더 큰 소리로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더 크게 부른다 그래서 짝을 찾지만/ 더 빨리 죽는다// 나는 연인에게 속삭인다/ 큰 소리는 되레 사랑을 깨기 십상이니까/ 처음엔 속삭인다 그게 효과적인 전략이니까/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소음이 없는 건 아니다/ 보라 이 먼지 알갱이들 모든 마음의 편린들인/ 아황산가스에 부식된 정신들의 기계들 삐걱대며 질러대는 소리들/ 서로의 감정이 부딪쳐 내는 욕망의 모래의 편린들/ 사막으로 가는 바람의 혼란들// 그러니 속삭이는 듯 보여도/ 기실 나는 한껏 목청을 높여 말하는 셈이다/ 새들처럼 더 큰 소리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전략이 아니라 생존에 걸린 문제라서,/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목이 따갑다 이렇게 사랑을 나누는 한/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자라는 산 -동시 / 이하석
산 위에 나무 한 그루만 심어놓아도 매년 가서/ 그새 얼마나 자랐나 살피게 되지// 산에는 나 말고도 나무가 많이 자라네/ 삼년 전에 심은 나무가 벌써 내 키를 넘었네// 내가 심은 나무 때문에 해마다/ 산이 조금씩 더 높이 자라네//

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 이하석
가랑비가 끝장난 길 위에 내린다./ 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둔 시 쓴 종이를/ 감춘 손으로 한 번 더 구긴다./ 감춘 시를 써왔구나, 나는./ 부패한 물들이 하수구로 흘러들고/ 나의 그림자가 그 위를 맴돌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사람들은 우울하게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서 있다./ 붉은 블록 조각들 처참하게 깔린 길 위로/ 전경들과 대학생들 뒤엉켜 피흘리고 흩어진 다음,/ 버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문득 제각기 갈 길이 바빠지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모든 길이 비에 젖어/ 젖지 않은 종이가 없다.//

우포늪 백일장 / 이하석
햇빛 노랗게 피운 수생 식물의 꽃 아래는/ 축축한, 어두운 설화들의 서식처여서/ 온갖 생각들의 뿌리들이 얽혀 있다.// 꽃그늘 뜯어먹고 사는 우렁이는/ 가장 긴 설화의 주인공인 양 그 밑바닥 어기적거린다./ 진흙 위에 마침표 없는 산문을 길게 적는다.// 물거울의 빛과 그늘로 얼룩진 채/ 나도 그 어룽대는 이야기 받아 적는 척/ 겨우 짧은 시 한 편을 써낸다.//

마애란 / 이하석
그 꽃, 산길 소나무 뿌리 맡에 잎도 없이 솟아있었지// 뜻밖,이었지// 바람 안으로 모으며/ 연자줏빛 또렷하게 흔들고 있었지// 줄기를 당겨보다가 가만 두었지/ 작은 힘에도 쉬 떨어져버릴 것 같아서// 내 맘에만 사진 찍어두었지// 그 인화(印畵)도 마애(磨崖)가 될까?// 다음해에 그곳에 가니 그 꽃은 올라오지 않았지/ 그 다음해에 그 곳에 가니 그 꽃은 올라오지 않았지/ 내 맘의 돌은 이지러지고 삭아내렸지// 그 소나무 뿌리 맡을 파보면 그 꽃의 뿌리라도 나올까?/ 그새 소나무 뿌리는 더 굵어졌지// 어떤 꽃이 날 향해 피어있기나 했던가?/ 더 꽃 필 나의 뜻밖,은 또 어디일까?// 꽃 하나 혼자 보았던 일을 자꾸 의심하는 남자가/ 돌아다보이지만//

내 편들 / 이하석
갈대들은 제각기/ 바람의 정처(定處)/ 누굴 만났느냐고 서로 귀싸대기를 후려친다// 여울로 돌들 꿴 목걸이 걸친 산그늘이/ 찬물에 목을 움츠린 채 굳어 있다// 일렁이는 강변의 파동도서관은/ 자주 열어놓는 책/ 쪽마다 펄럭이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만 자꾸 밑줄을 친다// 개들은 한결같이 목줄에 끌려 나와선 똥만 싸놓고/ 날아가는 왜가리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존재/ 그들이라고 왜 제 똥을 하늘로 던지고 싶지 않겠는가?//

고추잠자리 / 이하석
그가 날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여린, 모든 설명과 죄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그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났다고./ 이 턱없는, 아슬아슬한,/ 사랑이 실은 나의 힘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미세하게 얽어짜인 미궁들을 비켜서/ 그만이 아는 미로의 해답을 더듬어서/ 그가 내게 왔다./ 그 길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길// 그를 붙잡으려고 볼펜을 놓다가 밀린 서류를 챙기느라 나는 또 깜빡 빠져든다. 아침에 샤워한 등이 에어콘 기운에 닿아 무감각해진다.// 그는 붉은 섬광처럼/ 내 서류 위에 날개 그늘을 드리운 다음/ 찬바람에 떠밀려 방음의 천정을 휘젓다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누가 문을 연 실수를 범했나보다.// 누가 투덜대며 문을 닫는 소리에 바깥에서 침입하던 소리들이 끊겨, 나는 잠시 멍한 적막 속에 빠져든다./ 내 주위에서 몇 사람이 황급히 서류 속에 몸을 숨기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본 이들임을 알겠다. 그들은 창밖의 가볍고 투명한 날개의 침입자들을 잠시나마 은밀히 지켜보았겠지./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문 닫기 전에 빠져나갔고/ 그래, 그는 내게 왔다가, 문득, 가버렸다./ 그는 잘 돌아갔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서// 실바람처럼// 그가 간 길을 나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타이피스트 김양은, 지난 주말에 산에 갔다가/ 폭우를 만나 숲에서 허둥댔는데/ 그것들이 나뭇잎 뒤에 실바람처럼/ 붙어 있더라고 말한다.//

가비야운, 나비 / 이하석
저 가비야운 나비/ 가 넘는, 바다// 섬 없는// 나비, 나비라고/ 석양이 가로막지 않는다// 바람보다 나비가 힘이 세다는 건 다 안다// 폭풍을 뚫느라 단련된 강철 어깨의 신비한 문신이 있다// 나비는 늘 바다가 넓지만/ 나비는 언제나 자신에게 바다보다 작지 않다//

폭포의 시 / 이하석
큰 소리로, 너무 당당하게/ 쏟아져 내리며 모든 죄를/ 내게 흠뻑 뒤집어씌운다// 그러면서 제 무지개 띄우는 후안무치의,// 저 깡패 같은 표현이 또, 좋다//

블루콤마 / 이하석
강변 카페는 전망만 밝힌다. 안은 바깥 향한 유리창들만 쭉 신경 써서 둘러놓았다.// 거기 앉아서, 나도 내다보는 자,/ 커피만 쓰게 받아들이는// 유리창 밖이 더 유리하다면/ 내다보는 내가 도리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블루콤마의 주인도 내다보는 자에 속하지만, 자주 카페 밖으로 나가 강변 풍경이 되어서 담배를 피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그럴 때마다 연기가 급히 그의 몸을 부풀리다가 위축시킨다. 제 생을 제대로 왜곡시킬 줄 아는 것 같다. 나도, 카페의 손님들도 그 모습을 멍하니, 내다본다. 하지만 결국,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울컥해진다.// 그보다 블루콤마에서는, 어쨌든, 강을 외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니 늘 잘 내다보지만, 그 때마다 쇠백로가 제 발 담군 물속에서 물고기들을 부리로 꼭,꼭, 집아내는 게 푸르게 보인다. 언제나 밖으로만 있는 쇠백로에게는 그게 가장 큰 일이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빨간 건물 / 이하석
아이가 뛰는 공을 따라 빨간 건물 뒤로 들어가버렸다// 빨간 건물 뒤는 광장일까, 모진 벼랑일까?/ 아이는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아이는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하얀 티를 입고 있었지// 오후 두 시 쯤 자전거 탄 여자가/ 빨간 건물 뒤에서 나온다 흰 티를 입고 있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둘러 페달을 밟는다/ 다만, 건물 뒤에서 어깨를 내민 나무의/ 푸르름이 냉정해져 있다// 빨간 건물 뒤는 세계일까?/ 사방으로 무엇이 무지해서 또는 환해서/ 놓친 공들만이 휘둥그레 설레고 있을까?// 여기, 흰 티를 입은 날짜는 화창하고,/ 빨간 건물 뒤에서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누런 가방 / 이하석
가방들을 두고 침묵의 마을이라 한 화가를 기억한다/ 그의 가방은 잘 열리지 않고/ 늘 구석에 놓여 있었겠지/ 주인의 마음처럼// 지퍼란 지퍼, 멜빵이란 멜빵,/ 끈들은 모두 가지런히 빠짐없이/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여행 중인 검은 가방들이 서울역 무궁화호 개찰구 가까운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인공 쇠가죽의 불빛 덮어쓴 위쪽은 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아래쪽은 불룩하니 캄캄하다/ 가방 주위 어딘가에 있을 주인의 주머니도 가방만큼 자주 열리지 않아/ 뭐든 타협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갈 데가 있고/ 집요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쁘게 일어설 때까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방들은 완강하게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킨다// 안에 든 게 뭐든 제 것이 아닌/ 가방은 아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 열어보려는 이도 없이 가방들은 버려진 채 떠도는 늙은이들의 어깨처럼/ 위가 짓눌린 채 구겨져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 이하석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들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 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 길을 타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바다의 해산 / 이하석
서해는 온갖 너울 뒤집는 말로서도 뭐든 낳아놓는다,/ 끓는 속 밀어낸 파도로 제 가장자리 긁어대어/ 해변 노니는 이들 어머, 어머, 하며 뒷걸음질 치게 하면서도,/ 우리가 찍어 포개놓은 발자국들 순식간에 지워버리면서도.// 그렇게 제 가장자리를 내처 긁어대면서도/ 솥의 바다 가득 미역국처럼 끓어 넘쳐서/ 해안선을 언제나 멀리 둘러친다.// 그러니까 미역국처럼 끓는 바다는// 애 낳는 새댁이 고함치며 퍼덕여서 끝내 거뜬히 몸 풀어내는 것처럼/ 젖은 제 속 피워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내의 해산기에 맘 졸인 채 조심스럽게 바다 밀며, 어선 몰고 나온 사내는/ 빨리 돌아오라고 파도 끈 당기는 아내의 손가락 힘 느끼며/ 미역국 가득히 끓는 솥의 바다 속에서 퍼덕이는 무지개만 건져 올린다./ 수평선 너머 구름이 김처럼 피어오르고,/ 마침내 파도의 지붕 위로 으앙! 아기 울음 실린다.//

모래알 소리 / 이하석
모래 언덕에서 몸을 빼어 빈 깡통은 바다로/ 굴러내린다, 소금물이 속에 차 올라 물보라 속/ 헛된 꿈을 게워내면서.// 깡통들끼리 모인 골짜기, 바위와 모래뿐인/ 어슴푸레한 속, 물풀들은 스스로의 발목을 끊으며/ 달아나고, 소금은 반짝거리며 흩어진다./ 낮 동안 수면에도 떠올라 다투던 쇠들/ 다시 몇 개의 알 수 없는 휴전을 나눠 갖고 잠기고,/ 깡통들의 모서리 입 다문 조개들의/ 동리 어귀 물풀들의 뿌리 끝이 분명해진다./ 이윽고 깡통 속 모래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어두워진다.//

돼지감자 / 이하석
1// 왜 잔인한 기억의 흙들에 뿌리 내려 저리 퍼렇게 우거질까? 슬금슬금 밭떼기 가에서 솟아오르더니 여름 오기 전 못된 질문처럼 숲을 이룬다.// 2// 여름이 지쳐갈 무렵 노란 꽃들이 숲의 상부에 피어나 마구 주위를 살핀다. 자신의 뿌리 감추려 눈치 보는 걸까? 그 뿌리들이 여전히 주검들에 닿아있다면, 가을에 밭주인은 울퉁불퉁하게 뭉쳐진 덩어리들을 캐내면서 문득 새로 드러나는 대답의 뼈들인가 싶기도 하리라.// 3// 돼지감자 뿌리는 당뇨 등에 좋단다. 주검들이 북돋워서 무성하게 했다면, 저 숲 갈아엎어 그 뿌리 맺힌 응어리들을 수확한 게 내 트라우마인 그리움의 치료약이 되기도 할까? 뚱딴지* 같으니라구? 글쎄, 저것들 점점 더 번져나가 총살한 이들 파묻은 언덕 덮은 것 보라구. 그게 자연스럽다면, 숨기려는 게 아니라 보듬는 것 아니겠어?//
* 돼지감자의 다른 이름

담배 / 이하석
담배 때문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텔레비젼에선 야단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싸우며/ 여전히, 담배 연기가 아늑하게 인간의 내외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나도 결국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고, 그래서/ 오히려 끊는 게 더 공포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내 자신에 대해 한다// 끊어야 한다면 담배보다 오히려 더 해로운 것들,/ 연애나 결혼, 또는 이렇게 시 만드는 일들 ....../ 이 치명적인 것들 끊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 담배갑이 여기,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그리고 재떨이는 거기 놓여 치워지지 않는다/ 각이 져 있거나 둥글게 파여진 라이터들은/ 아름다운 무늬나 디자인이 새겨지거나 조각되어 그들 곁에 늘 있다/ 그것들은 서로 없어지지 않는다/ 끊을 수 없는 사랑처럼 끈질기게/ 서로 연기 한 모금씩 피워서 나누어 가지길 기대하며 있다//

봄 전시 / 이하석
분황 과시// 나지막한/ 가계 집 노부부가 내놓은 화분에/ 진달래가 피네// 이웃 가게가 그 옆에 내놓은 상추 상자는/ 덩달아 파릇해지네/ 새 싹들이 쏘옥, 쏙, 速, 速 올라오네// 어라, 복수초도 피었네/ 수선화 꽃대도 휘영청 올라오네/ 국밥집 앞에도/ 막무가내 솟구쳐오르는 게 있네// 집집마다 대문 밖으로/ 버리지 않고 피는 물 뿌리는/ 내놓은 사랑으로/ 환한 소문들이 젖네// 다닥다닥 붙은 헌 집들/ 速, 速 봄 피워 골목에 내놓아서// 가장 이른, 色의 전시네//

가을 / 이하석
꽃 앞에서 웃음 짓는 이는/ 제 자신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내게도 꽃 시절 있었다고,/ 열매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고,/ 도시의 장날, 거대 아파트 코스모스 화단 두른 축대 아래까지 밀려와 전을 편 할머니는/ 자꾸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웃는다,/ 이젠 별 것 별 것 다 판다며./ 어디로건, 누구에게나/ 수줍게 환한 날.//

전어(錢魚) / 이하석
서유구는 전어를 두고 “사고자 하는 이는 돈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특별난 맛을 강조한 말이겠지만, 보기에 특별하지 않는 고기를 구워먹는 자리는 그리 비싸지 않는 밤의 뒤안이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후배는 어물전에서 사온 전어를 주모에게 구워 달래서 안주로 삼지만, 소주 마시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졌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나와 내게 돈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안간힘하면서도 고기 이름에 돈 전자가 들어간 이유를 꼬집어 뼈 채로 먹어도 되는 전어 속의 미세한 가시를 연신 발라낸다. 민물과 해수가 격렬하게 만나는 강 하구에서 상류로의 꿈 지피며 지내다가 가을이면 다시 파도 작은 만에 들어와 겨울을 나는 전어처럼 그는 내게 와서 새삼 요즘 부쩍 유행하는 고기 몇 마리 구워 달랑 안주로 벌여놓고 얼마나 먼 데로 소주병을 따는가?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술값을 내야하고, 만처럼 잔잔하게 뒤척이며 그를 흔들어주어야 한다, 전어의 잔가시 많은 불그스레한 속살 헤적여 살만 발라내는 후배의 오랜만의 꽤 부유한 취흥도 소주로 계속 지피면서.//

눈 내리는 저녁 / 이하석
대구탕을 저녁으로 시키고/ 우선 입가심으로 붕장어 회 한 접시와 소주 몇 잔./ 양상추와 미역 조각들 버무린 위에 얇게 썰어놓은 회는/ 잘게 다진 청양고추 한 숟갈에 고추장 듬뿍 뿌려서 섞는다.// 붕장어의 깡마른 맛이 씹히고, 술이 몇 순 배 돌면/ 저마다의 삶에 대한 정치적인 계산도 쉬 이루어지고,/ 그다음 대구탕이 환하게, 나온다./ 밥은 제켜놓고 국물부터 마신다./ 술기운에다, 그걸 창밖의 어둠과 섞어 마시는 이도 있다./ 알과 살점들 부유하는 국물은 뜨거울수록 시원하다는 평이다.// 실내엔 총선을 앞두고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는 정치얘기들이 자욱하고/ 창 밖에는 삐라처럼 분분하게 날리는 게 있다./ 나는 대구탕이 피어 올려 김 서린 창을 손바닥으로 그어서/ 갑자기 눈으로 환해진, 캄캄한 밤을 내다본다./ 후륜구동이라 눈이 오면 내 차는 젬병이다. 시 외곽은 이미 눈이 쌓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시내에 갇힌 신세라 어쩔 수 없이 여관에서 자고 가야겠지./ 정치도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옆 자리 사내들의 정치얘기도 폭설 기운에 주춤해진다./ 그래도 곧 정치 모리배들이 명함들을 들고 찾아오리라./ 대구탕은 더 시끌벅적하게 끓여지리라./ 모든 정치는 내게 확실한 편을 요구하지만,/ 술버릇 나쁜 이의 끊임없는 원 샷 요구와 다름없는 것./ 그러면 나는 슬며시 바다에나 들듯 나가버려야 하리라.//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어쨌든 붕장어와 대구의 바다를 위해 원 샷으로 건배를 하고 싶다./ 대구탕 휘젓는 누군가의 어깨 위에 쌓이는 눈이 제 가슴 안쪽으로 어군(魚群)의 진행처럼 쏟아져 내리는 걸/ 슬쩍 내보이는 이 있다./ 소주로 지핀 그의 바다가 또 깊은 데서 결빙한다.//

시 / 이하석
불꽃 들국 꽃묶음은 필통에 꽂혀/ 연필의 내 어깨에 불을 당기려 한다/ 뾰족하니 끝이 솟구치는 모양으로// 바깥에선 비바람 뒤섞이고 창이 덜컹거린다/ 꽃을 말려 오래 불 쬐려고/ 묶음 채 거꾸로 벽에 걸어둔 사람은 오지 않고// 향기가 차면 창문을 열어, 벽으로 흐르는/ 방 안 공기와 함께 내보낸다/ 갇힌 시여 꽃묶음 거꾸로 건 사랑이여/ 그 향기가 내게 가득 차면/ 숨이 막혀 죽으리라.//

시인 / 이하석
시를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일에 끼어드는 일// 그러니까 시인은 언제나 참여자이다/ 군인이 제 총을 손으로 쓰다듬듯/ 그는 말들을 쓸어모은 쓰레기통을 종이 위에 부어/ 더욱더 버리고 헤적인다// 펴 놓은 종이의 왼쪽에 있는 말들과/ 오른쪽 구석에 몰려 있는 말들도 있고/ 그걸 구획지어 찢어놓기도 한다// 종이가 구겨져 있다면, 거기 누군가의/ 지문도 구겨진 채 왼쪽 구석에서/ 오른쪽 귀퉁이로 온몸 무게로 그은 흔적을 남긴다/ 그건 통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일까// 언제든 사랑하는 일에 끼어들어/ 손 다치는 일 일어날 게다/ 누군가는 거기 죽음 직전까지 밀고간 몸을/ 위험한 말들 너머로 보고 읽을 것이다//

젊은 시인 / 이하석
백지 같지만, 아주 희진 않고/ 황촉규마냥 솟아 큰 꽃 환히 피울 듯 고개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엇에건 잘 슬피 물들고, 그래도 늘 깨끗하게/ 보인다, 본다// 절망도 젊은, 약은 점쟁이 같으니라구/ 그의 언어는 가슴에서 나오다가 어깨를 돌아 날이 서서/ 우리 뒷덜미 치며 바람처럼 머리칼 흐트린다/ 어떤 말이든 무슨 강이건 막말로 맨몸으로 건너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폐교 / 이하석
어둠 속 높이 선 이순신은 전신이 파랗다/ 온통 바다 아래 잠긴 듯하다/ 폐교운동장 침범하는 학교 앞 새로 핀/ 유흥가 불빛 때문이다/ 어떤 밤에 빨갛게 달아 오른 때도 있다// 운동장 안 넘보는 건 취한 불빛만이 아니다/ 누가 애완하다 버린 짐승들조차 동네 떠나지 않고/ 그의 어둠 뒤지며 노략질 한다/ 밤의 폐교 안은 내란으로 내몰린 바다처럼 들떠 있다// 아이들 소리 하나하나 풍선처럼 떠올라 사라진 하늘엔/ 별들만 왁자지껄하나니, 은비늘 쌤통 뾰루지들 돋아 있다//

별밤 / 이하석
평생 밭일해온 어머니를 오랜만에 찾은 시인이 하늘 보며 "와, 여긴/ 별들도 많네요!" 하자, 어머니는 "시인이 어째 그 정도밖에 안 돼?" 적어도/ 이쯤은 말해야지"라며 목소리를 챙긴다. "아이고 무시라. 별밭이네!"//

3분간 / 이하석
씻은 그릇을 헹구는데, 누가 죽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젼을 덮는 비애 속/ 장의 행렬이 서서히 나아간다. 거룩한/ 죽음인 모양이다. 행주로 그릇들을 닦아/ 찬장에 챙기면서 그녀는 한 죽음이 장엄한 장식으로/ 아늑한 빛으로 덮이는 것을 힐끗 본다./ 어린이 프로는 막 끝난 듯, 아들은 과자를 물고/ 안델센을 읽고, 그녀는 탁자 가에 묻은 도마도/ 캐찹을 닦아내면서 09 : 03의 숫자 아래서 아나운서가/ 하염없이 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른히/ 본다. 된장그릇을 찬장 속 간장종지 곁에 조심스럽게 놓을 때/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수돗물에 씻으며 보니/ 죽은 이의 딸이다. 09 : 04의 숫자가 그 여자의 풍성한/ 검은 머리칼 위로 찍힌다. 아들이 안델센을/ 놓고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그녀는 숟가락들을 물에서 건져내어 마른 행주로/ 닦으면서, 장의차를 장식한 것이 국화… 국화, 꽃, 사이로/ 아이가 뛰어… 아니… 현관문을 지나 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본다. 09 : 05의 숫자가 전신주가 팔을 벌린/ 시가지 위로 장의 행렬을 멀리한 채 찍힌다./ 아나운서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텔레비젼 아래로/ 떨어져 재떨이에 쌓이고, 그녀는 남은 물을 하수구에/ 붓는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때맞춰 요리 강좌의 자막이/ 국화 꽃꽂이 위로 흐른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MADE IN U.S.A / 이하석
이슬 투명한 물방울의 아침/ 빈, 얇은, 명료한 차가움 속으로/ 돌들과 쇠들 산그림자들 비쳐든다./ 깡통 곁 허물어진 흙들에 볼 비비며/ 달개비꽃 벙그는 한때. 휴지 속에 구겨진 채/ 여자 노랑머리칼엔 달개비꽃 꽂혀/ 낡은, 흙 묻은 글씨로 날아가는 상표.// 불꽃도 깡통 태우고 찬란히 하늘 날아가 버렸다./ 빈 몸만 남아 재 끌어모을 때 싸늘한 녹슨 쇠의/ 고즈넉한 성이 하나/ 달개비꽃 밑으로 허물어지고.//

강변 유원지 1 / 이하석
강물에 반쯤 몸 담그고, 사이다 병은/ 주둥이 속으로 속의 작고 깊은 하늘을/ 내보인다. 햇빛 속에서, 병 속의 물과/ 강물은 같이 썩는다. 물결이 뜨거운 모래를 적시며/ 기어올라 깡통 하나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 녹물을 흘리며, 깡통에는 몇 개의 이즈러진/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고 있다. 사랑의/ 표시일까, 그것을 이젠 해독할 수 없다.// 엉겅퀴꽃 그늘에 숨어들던 눈을 치뜨고/ 여자는 발로 모래를 헤집으면서,/ 강가에 선 남자의 맨발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남자 양말 구겨져 던져진 모래밭 위,/ 여자의 그림자가 짧게 흔들린다. 햇빛 속에서/ 남자의 발 밑에서 강물은 뒤척인다. 아지/ 랭이로 뜨거움은 피어오르고.//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교통사고 / 이하석
차가, 달려온다. 그의 몸은, 멈칫,/ 솟구치고, 순간, 모든 시선을 팽개치며,/ 내동댕이쳐진다. 그의 팔은 꺾이고,/ 찢어진 채, 나부끼는 옷조각들, 화학섬유 가벼이/ 무늬를 흩이며 난다. 급한 브레이크로/ 뜨겁게 정지한 채 멍해진 바퀴 밑,/ 몇 개의 돌들은 튀어오르며, 긴장된/ 그의 가슴을 쥐어박는다. 젠장, 신, 세, 조졌군, 하고/ 운전수가 투덜거릴 때, 그의 구두는 황급히/ 하수구로 뛰어들고, 그의 반짝이는/ 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급히/ 차들을 세운다. 그의 주민등록증은 무표정한/ 얼굴 하나를 경찰관의 발 앞에, 내동댕이/ 친다. 경찰관은 갑자기 분노해서, 그를 노려보면서,/ 차를 걷어찬다. 부서진 유리창 속에 경찰관의/ 얼굴이 어둡게 비친다. 사람들은, 웅성대며,/ 그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유리창을 떠나 부서졌고,/ 경찰관은 호각을 불어,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의 피는 부서진 차의 기름과/ 녹물에 엉기면서, 고즈넉히, 또는 급히,/ 땅 속으로 스며든다, 경찰관도 그도/ 아무도 모르게.// 그가 실려서 어디론가 떠난 후,/ 도로 인부는 그의 피부터 흙으로 덮는다./ 크레인으로 들어올려져 차도 떠나고,/ 사람들도 흩어진 후, 비로소 인부는 담배를 피워 물며,/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길에서/ 주운 몇 개의 단추는 먼지와 흙을 닦은 후/ 얼른 주머니에 챙긴다. 하수구에서 주운/ 두 쪽의 구두를 인부는 제 신과 바꿔/ 신는다. 푸른 유리조각이 인부의 빗자루에 쓸려/ 길가 풀덤불 속에 버려질 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핏물이 유리에 묻어 급히 흙속으로/ 숨는다. 향기로운 풀잎 그윽한 오월의 정오를/ 인부는 나른히 그 곳을 곧 떠나간다.//

세 사내 / 이하석
대구 변두리, 토지 구획 정리 작업장의 한 구석,/ 세 사내가 불을 쬐고 있다./ 서리의 한 끝, 날카로운 마른 풀들 부서진 길 가에서/ 판자조각들은 붉은 불길 솟구치며 타오른다./ 기침이 한 사내를 폭풍 속 전나무처럼 흐트러놓는다./ 또 한 기침은, 자신이 키운 낯익은 둔덕 쪽으로 번지는/ 불을 발끝으로 지우는 또 한 사내를 빈 깡통처럼 굴린다./ 그리고 또 한 사내는 말 없이/ 분할된 들판길을 건너오는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켜뜬 채.//

김씨의 옆 얼굴 / 이하석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 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 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 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패인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 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 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의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옆,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 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터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깡통 1 / 이하석
풀숲 빈 깡통들은 모여서 흩어지면서,/ 쉬 녹슬어 버리는 자신들과 헤어지려고 애쓰면서,/ 스스로 무거워지는 몸을 스스로 자꾸만 비우면서,/ 자신들이 누운 곳을 언제나 빈 터로/ 만들어 버린다, 봄 오는 연탄재 더미 속/ 연탄재를 또 한 번 부서뜨려 놓으면서./ 풀꿈의 고통 속 초록은 무성해지고/ 깡통 속 그 그늘들은 드리워진다./ 달개비꽃 피는 양지쪽으로 뻗는 풀의 발가락 황홀할 때/ 깡통들은 달개비의 햇빛을 날카로운 이빨로 벗겨 놓으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몸을 또 몇 번이나 비운다.// 아름답다고말해줄까달개비야/ 내가벼운몸뿐으로는/ 네이름도그이상의무엇도감당할수없군// 몸뿐이라는 깡통의 말에 달개비는 수줍게/ 웃는다, 깡통을 벗어나려는 고통 뒤에 스스로의 몸을/ 감추면서. 깡통들은 은연중 그 수줍음에 걸려/ 투명해져 버린다, 무게가 없는 몸을 풀의 고통 위에 띄우며.// 웃지마라달개비야네수줍음뒤켠의더깊은어둠에비쳐내몸이나타나는구나내몸은앙상하구나그러나저어둠을욕해선안된다달개비야인간인저어둠에비쳐우리는나타나는것우리는어차피인간의편이지만지금은시들어버려진몸그러나너는수줍음만끝내보일뿐우리를받아주지않고지금은우리들만으로떠돌뿐인몸들을자꾸비워낼뿐// 지금은이라는 자신의 말에 깡통은 수그러지며/ 쭈그러든다. 지금은 쭈그러들 뿐이야,/ 깊숙하고 더욱 차가운 쪽으로 빠져들며,/ 모든 것을 제 자신이 헐어 버리며,/ 팽개쳐진 몸의 마음도 팽개치면서.//

나른한 현장 / 이하석
분홍빛 스타킹이. 한 켤레. 구겨진 채/ 길게 놓여 있다. 초록의 융단 위에./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오를 듯./ 검은 숄이 그 밑에 놓이고. 따스한 기운 속/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의 기억을 드러낸다./ 스타킹의 발치에는. 마루 바닥에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하체를 찍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던져져 있다. 사타구니의 검은 숲은/ 늘 스타킹 속 장미 팬티 안에서 젖어 있던./ 그녀의 가랑이의 어둠을 보여 준다. 그 아래/ 흑갈색의 무늬 아로새겨진 빗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 그러나 이것들/ 속에 그녀는 없다. 이 정물의 풍경 속. 나른한/ 초록의 융단 위에 그녀는 찍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들을 다 벗어 놓고/ 어디로 갔나?//

기지촌 / 이하석
공군 기지의 꿩들과 참새들은 숲속에 숨어서/ 지저귄다, 숲 위 하늘엔 인간들의 무수한 길들이/ 누워 있고. 나무들이 낮게 엎드린 사이로/ 활주로도 길게 예리한 굉음의 길로 누워 있다./ 잔디의 발뿌리가 닿지 못하는/ 흰 페인트 길에 번쩍이는 햇빛.// 폭탄을 적재한 비행기들은 정확하게/ 하늘 길을 안다. 하느님도 연들이 가는 꿈나라도 없이/ 하늘은 높고 푸르다고, 기지촌 아이들은/ 모형 비행기 놀이 속에서 느낀다./ 꿩 울음 소리로 봄이 와서 아이들의 신발에 닿아/ 잔디의 발뿌리가 또 근지럽다.// 꿩을 찾아 숲속에 들어간 아이들은 잡초 속 꿩의 길에 누워 있는 타이어 조각과 병 조각들 빈 깡통 무더기 속에 부서진 거울 한 쪽이 떨어져 흙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아이가 쓱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으니, 거울 속 아이의 손가락이 지나간 쪽으로 비행기도 길도 없는 하늘이 한 쪽 문득 푸르게 비쳐 왔다.//

날아 오르는 명태 / 이하석
1// 말라 비틀린 희푸른 몸 솟구치며/ 검푸른 또는 청회색 머금은/ 붉은 기운 감도는 현암 속을/ 어둠의 불기운 속을/ 날아 오릅니다.// 바람의 칼날에 날카롭게 조각된 흰 구름의 가로/ 펼쳐진 깊푸른 어둠의 바다가 보입니다.//
2// 창은 명태의 눈알처럼/ 하늘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려놓은 명태의 눈알처럼/ 녹차의 연두빛 물에 푸르스럼한 하늘이 빛납니다. 침대 주위에 쌓아둔 화구들에 기댄 기름 먹은 풋잠이 깹니다. 대낮인가 봅니다. 밖이 부드러이 환하니 봄인지도 모르죠. 녹차 잔을 의자에 내려놓고 일어나 벽에 마른 명태들과 함께 걸린 바지를 걷어 내려서 다리를 찔러 넣습니다. 세 마리의 명태들은 한껏 벌려진 입이 실에 꿰여서 철사옷걸이에 매달린 채 벽에 걸려 대롱거립니다. 명태의 휘부연 아가미 주위에는 푸른 좀이 슬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장엘 나가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지 못했지요. 바지 끝단이 헤어져, 명태들로부터 좀들이 건너와 헤쳐놓은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제는 밤 늦게 명태를 그리는 작업을 했고, 새벽에도 깨어나 홀로 캔버스에 청황빛 하늘을 입혔습니다. 이젠 잠시 쉬러 들에나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아파트를 나서면 역이 나오고, 역 앞 나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5분쯤 흐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양이나 월배행 시내버스가 오겠지요.//
3// 들에 나가면 고분 발굴 광경을 볼 때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구멍을 파고 들락거립니다. 때로 이런 광경도 보이지요. 무덤 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흰 담배연기가 가늘게 피어 오릅니다.// 때때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보기도 하지요. 어둡고 습기 찬 돌방 속에는 천년 동안 먼지가 쌓여 검푸른 토기와 청동 말안장을 덮고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낀 어둠을 살피노라면 문득 발 밑에 무엇이 꿈틀하니 밟히는 걸 느낍니다. 조심스레 손으로 잡아 올려보면 그것은 푸른 먼지 또는 도마뱀의 꼬리 같습니다.// 시간은 도마뱀같은 걸까요,/ 잡았다고 느낀 순간 본체는 사라져 버리고/ 그 꼬리만을 남기는.// 그래, 들에 갔다 온 직후에는 잠깐동안이나마 그려놓은 명태의 몸에 생기가 느껴집니다. 사나왔던 시절을 가두어 지나와 헐렁해진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화폭 앞에 서면, 명태들은 추운 바다 빛 눈망울을 부신 듯 부릅뜹니다. 들의 흙속에 옛 사람들의 방이 있듯 화가의 방 안엔 명태의 하늘이 무수히 날아 오릅니다.//
4//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의 삶은 실패했네./ 일방적인 평가지요. 누가 날 안단 말예요./ 평생을 썩은 나무등걸만 구해와서 깎는 사람의 숲을 나는 압니다./ 평생을 통만 만드는 이의 하늘을 나는 압니다./ 평생 돌만 모아 귀꽃을 돋치는 이의 땅을 나는 압니다./ 그 덧없고 값 없는 짓거리들, 하며 당신들은 비웃겠지요./ 나는 스스로의 일 속에 나를 몰아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그것도 생산이라고/ 나는 그걸로 가족들을 먹이고 화구들을 샀지요./ 나는 스스로의 삶만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를 가둔 건 내가 아니라고도 해야겠지요./ 나를 가둔 사람들에게 나는 명태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삶을 지킨 거예요./ 실패하지 않았어요.// 나는 명태를 그리며 그것들을 하늘로 날리며/ 나를 지켜준 방 속에 잘 있습니다./ 거기에도 물론―생각하기에 따라서는―사방으로/ 검은 하늘과 누런 땅이 있고/ 그리하여 하늘이며 땅인 자리로/ 늘 옮겨앉습니다, 하늘과 땅이 맞부딪는 곳으로/ 패랭이꽃 같은 문이 나 있는.//
5// 그의 삶은 실패했네/ 그는 죽음의 문턱에 두 번이나 섰었네/ 마른 쑥부쟁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발 아래 늘 캄캄한 방을 느꼈네// 그는 다만 색깔문제로/ 붉은 벽 속에 끌려 내려갔네/ 해방 직후였네 제길할/ 그들은 그의 화폭 속의 하늘이 붉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네/ 그 후로 붉은 색은 결코 쓰지 않았네/ 실패한 삶을 살았네// 그는 실패한 삶을 살았네/ 죽은 명태만 그렸네/ 명태는 한국인만이 식용으로 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이 명태로 말라붙은 걸까/ 마른 명태는 입 한껏 벌리고 끊임없이 소리치지, 들어봐, 들리진 않을 테지만 비틀린 몸이 짜내는 기막힌 소리가 그 속엔 있지, 고통이든 환희든 명태는 비틀며 소리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은 끝까지 실패했네/ 그는 노년의 문턱에서 큰 병을 만나/ 죽음의 방문을 열기까지 했었네/ 고통으로 입 한껏 벌리고/ 마른 얼굴의 주름 위로/ 눈물을 흘렸네 실패의 연속이었네// 그 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실패했네/ 죽음의 문 밖을 나와 비로소/ 명태를 하늘로 날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전시장에서 아내는 허무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네/ 명태는 끊임없이 날아 오르고/ 날아 오르는 그 높이만큼 그의 삶은/ 공허하게 떠올랐네/ 그래도 그의 명태의 하늘은 불타고 푸르르며/ 때로 무한의 깊이로 나타났네//
6// 내가 날린 명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날아 오르지요. 보세요.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삶을 가두어놓은 방이/ 명태의 하늘로 열리면/ 방이 곧 하늘입니다./ 무덤의 안이 옛 사람들의 별자리인 것처럼.// 벽에 걸린 화폭들 속으로 명태들은/ 푸르고 노란 또는 불타는 붉은 하늘을/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오릅니다./ 물론 저 아래서도 함성이 폭풍처럼 올라옵니다./ 풀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떠오르는/ 또는 부딪침으로써 서로 확장되는 소리일까요?/ 매일 사람을 자기 위에 세우는 들이/ 스스로의 속의 무덤을 하늘 쪽으로 보여주기 위해/ 몸 뒤집는 소리일까요?// 재생이 하늘 저 편으로만 열린다면/ 나는 하늘 저 편으로 명태를 날립니다./ 그런다음 나는 새롭게 돌아오는 밀물 가에/ 또는 바람에 퍼득이며 피는 제비꽃의 들녘에/ 당당히 서고 싶습니다.//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 이하석
낮이거나 저녁이거나/ 또는 한밤중이거나/ 잔주름지는 물의 푸르고 노란/ 또는 검은 자갈들 비치는 내에// 그것은 있다// 모래무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큰 머리 주억대며/ 은백색의 흰 배와 검은 등이 빛나는 몸에/ 여섯 개의 흐린 무늬가 찍힌, 모래 같은/ 그 고기는 수염을 떨며 모래 속에 파고들고/ 때로 모래를 불어 물결에 흘린다// 그것은 냇물을 자맥질하면서/ 거꾸로 선 떡버드나무의 하늘을 휘젓고/ 그러면서 그게 내겐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 때문에/ 냇물은 흐르는 소리 높이거나 낮추고/ 거꾸로 선 나의 머리 아래로/ 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일까 까만 물풀일까/ 내가 한때 한껏 몸 기울인 채 보았던/ 연꽃의 그 아래의 어둠일까 빛일까/ 빈 병일지도 모른다/ 모래에 반쯤 몸을 묻고/ 양각된 글자와 그림들 물로 모래로 매끈해진/ 주둥이를 뻥하니 벌린 채/ 때로 물 아래서 번쩍이는// 모래무지가 낸 길이 아른거리는/ 물결 아래의 모래 위로 나서/ 모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 어귀에 죽음과 생성의/ 그늘은 어른거린다/ 그걸 비켜가지 않으려고 그 길에 내려섰다가/ 아얏 하고 맨발은 마음보다 먼저 오그라지며/ 물 밖으로 튕겨 나간다/ 유리 조각에 찔렸나보다/ 아니면 내가 찾으려는 그것이/ 날 밀어낸 것일까//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 이하석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얼굴은 캄캄하게 그늘져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마 쯤에/ 달팽이의 더듬이 같은 게 돋아나 있는 듯하다/ 윤곽만이 외부의 빛을 역광으로 받아/ 고양이나 곰의 털 같은/ 머리털과 수염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때때로 뭐라고, 말, 한다/ 입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두운 내부에서/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 하다/ 누군가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의 내부에선가 아르렁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이마에 돋아난 안테나들의 불이 켜지고 꺼진다/ 근심의 신호인지 기쁨의 표시인지/ 확인되지 않는//

단추 1 / 이하석
열 일곱 개의, 또는 스물 한 개의/ 단추들이 그녀를 가두었다./ 마음도 어항 곁에서 흔들리는/ 머리칼도 잠그고, 그녀는 검게/ 고개 숙였다. 누구에게나 검게,/ 고요하게, 그녀는 문을 닫아걸었다./ 남자의 겨드랑이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단추로 바꾸어 달면서/ 그녀는 하느님에게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홀로 있다. 밤마다 그녀의 단추는 떨어져 내려/ 침대 밑을 구르며 문설주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럽다./ 그녀는 단추만 보이면 주워선 잽싸게/ 스스로의 옷에 달았다. 마침내는 성기에까지도/ 단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언제나 어두운 골목 끝에 서서/ 그녀는 검게 빛났다. 어느덧 세상의 들판은 어두워졌고/ 곡식들은 빈 쭉지만을 땅에 떨어뜨렸다.//

동물도감 / 이하석
그가 기르던 너구리가 튀었다, 간밤/ 프라스틱의 쭈그러진 구멍을 통하여. 한때의/ 그의 집안 내력을 훔쳐서 너구리는 빌딩의 숲을 지나/ 달아나 버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의 기침 아래로 난 매캐한 수은의 길도 주저않고./ 너구리는 무사히 이 도시를 빠져 나갔을까, 젠장, 절망적인/ 그리움이 그를 저녁이면 문 밖에다 세웠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세일즈맨 박씨는/ 주위가 허전해졌다. 그가 너구리 따위를 키우려들다니,/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 도둑맞은 그의 삶이/ 그의 출근길을 빠져나가 새로운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 버렸다. 그는 동물도감을 낯선 집에 월부로 떠맡기면서/ 이따금 도시 밖으로 파란 빛깔이 깡충대며 산을 오르는 것을/ 힐끔거렸다. 제기랄, 지랄 같은 그리움의/ 봄.//

부재 / 이하석
장미꽃 화병은 투명하고 장미꽃은/ 붉은 그늘 속에 모돌씨를 숨긴다. 저 쪽 못가/ 흰 나무의자에 마주앉은 두 여자. 그 중 한 여자를/ 기다리며 모돌씨는 붉은 안락의자에 앉아/ 탁자 위 장미꽃 화병 아래 재떨이 속에/ 담뱃재를 쌓는다.// 재는 쌓이고, 두 여자는 모돌씨를/ 얘기한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그들은 다툰다. 이건, 그이가 옛날에/ 내게 보냈던 사랑의 편지예요. 보세요./ 난, 안, 봐요. 난, 지금, 그이를, 사랑해, 요. 물이/ 기슭을 친다. 모돌씨의 손이 탁자를 잘못 건드려/ 장미화병이 넘어진다. 왈칵, 물이 붉은/ 융단 위로 쏟아진다. 레지는 웃으면서/ 괜찮아요 그까짓 것, 꽃의 물을 새로 갈고/ 탁자를 닦은 후 다시 놓아 준다. 미안, 해요.// 햇빛이 떡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쏟아져/ 흰 나무의자에 어른거린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를, 사랑,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가, 필요,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알, 았어요. 만나지 않, 겠어요. 갑자기/ 장미꽃 화병이 모돌씨가 탁자를 잘못 짚는 바람에/ 흔들하고 엎질러진다. 물이 왈칵, 쏟기고/ 꽃이 융단 위로 떨어진다. 레지는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와 꽃을 줍고 탁자를 닦으면서, 괜찮아요,/ 치워드릴까요? 라고 말한다. 치워 주세요, 아예,/ 없는 게 낫겠어요, 모돌씨는 갑자기 불안해서/ 소리친다. 치워 버리세요.// 저쪽 물가의 흰 나무의자가 비고/ 이쪽 도심지 다방의 붉은 의자도 빈다. 레지는/ 이쪽 의자의 탁자의 재떨이를 치운다./ 장미꽃 화병이 다시 놓여지고 젊은 남녀가/ 그 자리에 앉는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레지는 웃는다. 커피? 쥬스?/ 난 커피. 난,/ 아무거나.//

비무장지대 / 이하석
시월, 철원평야 가로질러 청둥오리 떼 남으로/ 날아온다, 철조망에 푸른 그림자 걸려 퍼덕이며./ 걸린 그림자 미쳐 못 건진 채 새들 날아가고,/ 쇠들만 널린 들판, 쇠 조각들 밤마다 일어나/ 그 그림자들 찢어 놓는다./ 이윽고 새들 울음 긴 포물선으로 남은 채/ 얼어붙는 하늘 밑 들판은 살 비비는 풀들 짓이기며/ 엎어져 버린다. 한꺼번에 큰 겨울이 오고/ 포탄의 심지 파고 들며 흙들 속 뻗어 나오던/ 풀 뿌리들 다리 오그리고, 자욱이 씨앗 날리던/ 하늘 북풍에 날아가고, 쟁기와 낫 사라진 들판,/ 철새들 그림자만 어지럽게/ 널려 마른 풀들이 덮는다.// 녹슨 철조망 새로 보수하는/ 봄. 청둥오리 떼 아득히 가는 북쪽 하늘,/ 철조망에 걸려 새로 칠한 페인트 묻은 푸른/ 그림자들 퍼덕거리고, 들판을 기어가는 풀 뿌리 지뢰 밟아,/ 흙들 싹트는 씨앗 움켜쥔 채/ 공중으로 흩어진다.//

원통리 1 / 이하석
전쟁은 모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고/ 내던졌다. 원통리 민둥산의 완만한 능선 밑에/ 엎드린 흉기를 덮으며 사방으로 뻗는 풀들을 달래는/ 흙들. 흙들 속에서 때때로 터지는 폭탄들이/ 풀들의 다리 짜르고, 풀덤불 속 잠자는 토끼의/ 귀를 찢는, 밤낮으로 쌓인 재들만 날리는 산./ 무덤들의 주인들도 혼비백산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찬비 내려 눈 녹는 오월, 묻혀 있던 쇠들 솟아나/ 골짜기마다 죽인다 죽인다는 말들만 짙어진다./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잡다 놓친 노루, 쇠들에 걸려/ 넘어지고, 골짜기 음지에 수줍게 남은 잔설이/ 노루가 밟은 지뢰에 놀라 흩어진다./ 산 아래는 죽인다는 말로만 덮어 오는 신록,/ 바람도 산등성이를 넘자 살기등등해진다.//

부서진 활주로 / 이하석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못 1 / 이하석
우리는 인간의 손들 사이를 빠져나와 많은/ 거대한 쇠들에서도 멀어졌다, 반짝거리는 침들/ 끊임없이 무디어지라고 외치면서. 가을 밤,/ 흙속에서 우리는 자려고 한다, 풀들의 뿌리 밑에/ 누워서, 붉게 녹슨 몸들을 더욱 안으로/ 꼬부리면서. 쓰레기 하치장 부근,/ 활자 날아가 버린 신문지를 끌어 덮으며,/ 우리도 이미 많은 것들을 날려 보낸 후.// 쉬이 잠이 오리라. 빗물에 눕는 풀들 소리 없이/ 흐느끼고, 밤이 빗물 속에 모든 어둠을 풀어 놓을 때/ 못들의 잠은 때로 반짝거린다, 흙속에서/ 자갈 틈서리에서 또는 철교의 침목 곁에서./ 빗물에 지워지며 눕는 마음, 껌종이와/ 타임지와 서양 여자 노랑머리 퇴색한/ 휴지 속에서 그들의 꿈은 심한 욕지거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못 2 / 이하석
그들은 녹슨 몸 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속, 헐어 버린 건물 안,/ 이전해 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 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핀 1 / 이하석
돌멩이들에 걷어채여, 핀은 어깨와/ 손이 상했다. 풀들을 찢으며 꽃의 눈을 찌르며/ 신문지 조각들을 땅에 박아 놓으며, 핀은 어깨와/ 손뿐인 몸으로 길고 오랜 여행을 했다./ 돌 틈에 누워 핀은 이제 아무 데도 걸림 없이/ 땅 속에 기어든다, 녹의 껍질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그 자신이 땅의 껍질이 되어,/ 이제는 무엇을 찔러 고정시켜 놓을 일도 까닭도 없이./ 돌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핀은 막연하게/ 빈 얼굴로 밖을 내다본다.//

비밀 / 이하석
그 나무는 신의 모습으로 서 있었네./ ─모든 나무는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해 뜰 무렵 출근길에 인도와 차도 사이, 아슬아슬하게,/ 나무의 서쪽으로 드리운 그 그림자에/ 내 그림자의 가슴을 맞추었네./ 다른 사람들이 버스가 오나 하고/ 동쪽으로 목을 뺄 때에,/ 슬쩍.// 그게 `일치'라는 암호를 쓰는/ 내 비밀이네./ 여러분들도 도시인이라 물론 많은 비밀을 가졌을 테지만.// 해질 무렵 버스에서 내려/ 동쪽으로 뻗친 그 나무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몰래 맞추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붐벼/ 또 뒤섞였네.//

서시 / 이하석
우리가 갈 곳을 지우며/ 안개가 검게 흰 진창 위로 피어/ 오른다. 먼 데로 도주하는 마음이/ 돌아보는 밤.// 꼭두새벽에 돌아온다./ 진 데를 빠져나와 비로소 잠 밖으로 몸을 털 때/ 우리의 길을 지우는 찬밤의 흰 꼬리가/ 아침해가 내린 그물에 휘감기는 게 보인다.//

순례 1 / 이하석
어디에서든 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세상에는 온통 부러지고 망가진/ 길들뿐. 기름과 석탄 사이를 걸어서/ 졸면서 또는 기도하는 몸짓으로/ 어두운 어깨만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먼지를 덮어 쓴/ 풀들은 깡통들의 투명한 표정들을 감추고 있고,/ 바람이 나무둥치를 흔들 때, 나무들/ 쇠 껴안은 붉은 뿌리에서부터 쓸쓸해지고./ 머리에 구름과 모래를 인 사람들이/ 나무 뿌리들이 감춘 물 속으로 그림자 던지며/ 지나갔다. 그들은 깡통과 비닐을 비껴 흐르는/ 길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기름들을 쏟고/ 깡통들을 풀밭에 던졌다. 그들은 스스로 흩으러 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 인간들이 지나간 들판에 버려진 채로/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들만이 남아/ 어느덧 신성한 기운에 싸여 갈 뿐.//

순례 2 / 이하석
바다 밑 빈 병들 서걱거리는/ 바위 틈으로도 인간들은 웅성거리며/ 지나갔다. 모래를 껴안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병들, 인간들의 말과/ 몸짓들과 신성을 게워 내며.// 미역들은 초록의 몸을 바닷물에 풀어/ 모든 길들을 인간 쪽으로 열었다. 그 길을 떼지어 걸어/ 그들은 바다를 열었다, 몇 개의 쇠들을 흘리며/ 고통과 안식을 꿈꾸며. 말미잘의 동네 어귀/ 또는 꽃게의 마을 어귀에는 동전과 고무줄과/ 팬티 천 조각들이 쌓여 숨을 죽인다, 고요히/ 누구나 차츰 해류에 투명해지며./ 인간들의 말들을 풀어 놓고, 말미잘과 꽃게들은/ 동료의 시체들을 팽개치고 떠날 뿐.// 저무는 동네 어귀에 빈 병들과 빈 깡통들이 쌓은/ 탑 위로 모래는 덮어 온다, 어둠처럼./ 탑을 쌓는 것만으로 인간의 길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말미잘들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어깨를 밀면서 깊은 곳의 신성을 힘겹게 짊어진다.//

밖 / 이하석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어떤 어두운 밝음이/ 어떤 미로가/ 나를 이끌 것인가// 나는 내다본다/ 속에서 어둠의 뇌성은 치고// 나가고 싶다/ 초록의 문을 열고 싶다 나는/ 또 나가고 싶잖은 마음이 인다/ 또는 잠시 나가 패랭이나 캐서/ 화분에 심어보고 싶다/ 이 위태로운 어질어질함// 누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만진다/ …밖에서…누가/ 내 방의 어두운 창유리를 닦는다//

안 1 / 이하석
구석진 내 넋의/ 차고 빛나는 유리덮개를 닦으면/ 꿈인가 강 저 편 언덕의 푸른 풀춤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내지르는 함성의 몸짓일까/ 강물엔 햇빛 들끓고/ 끊임없이 흐르며 사방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부르고// 그러나 나는 다만 은밀히 내다보며/ 나의 춤을 휘장 속에 숨기며/ 또 내다볼 뿐/ 유리창 안으로/ 내 말과 춤을 어둠에 문지를 뿐//

용정 가는 길 / 이하석
들뿐인 구릉 위에 서니/ 하늘이 넓어/ 내가 잘 드러난다// 광야엔/ 굉장한 넓이의 침묵이/ 고요의 굉장함이/ 날 보고 뭔가를 말하라고/ 긴장해 있다// 숨을 수 없어/ `나는 한국인!'이라 소리치니/ 내 소리가 두 말로 갈라진다/ 저 아래서, 서로 맞받는 메아리처럼/ 두 말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쳐 피 흘린다// 돌아보니 마른 수수밭머리에/ 큰 바람이 먼지를 말아올린다//

야외소풍 1 / 이하석
도로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만/ 달리는 길// 도로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불빛 속 벗어나지 않은 채 달리며/ 나는 화살표가 비켜가는 숲의/ 캄캄한 안을 힐끗거린다// 갑작스레 비치는 헤드라이트에/ 망연자실해진 나무들 아래/ 감춰져 있던 흰 길들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인다// 빌딩숲 밑에서 모든 길들로/ 욕망을 열어두고 잠든 거지처럼/ 저 숲길로 자못 숨어드는 마음의/ 화살표는 어디?//

야외소풍 2 / 이하석
소나무는 죽는다/ 도시에서 뻗어나온 길들이 칡넝쿨처럼/ 감고 올라와 전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바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칡뿌리를 캐다가 나의 마음이/ 그 뿌리에 걸려 죽은 나무 베어넘긴 골짝으로/ 굴러 떨어진다//

유리 속의 폭풍 / 이하석
구름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면서 전신주를 꺾는다./ 흰 기둥들은 꺾인 채 완강하게 서 있고,/ 전선들은 끊어진 채 전신주와 구름 사이를 토막토막 잇고 있다./ 그 아래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가 뭉쳐진 채 솟아오른다.// 신호등 아래서, 솟아오르는 은사시나무의 윗가지 너머/ 푸른 신호등이 건너 편 인도 위로 켜지길 기다린다./ 푸르고 노란, 또는 남빛의, 검은 차들은/ 은사시나무 새로 솟는 윗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만 뒤섞으며/ 나의 앞을 어지럽게, 어디론가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또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또는 그런 곳들로부터 와선 또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길 건너 온통 거울로 벽을 바른 금융회사 육 층 건물의/ 거울 속에 비쳐 있어야 한다. 폭풍의 구름 아래/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 아래/ 너무 어두워 이 쪽에선 보이지 않지만/ 나는 조그만 덩어리로 비쳐 있어야 한다.// 구름의 갈기가 뒤섞이면서 전신주가 꺾인다./ 심상치 않는 폭풍이 오려나보다./ 내가 길을 건너갈 때에도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의 덩어리 아래로/ 나는 보이지 않고 검기만 한 그 속에/ 푸른 신호등만이 켜져 있다./ 푸른 신호등 아래 은사시나무 가로수와 나는 안 보인다./ 다만 빨리 건너가야 할 뿐이다. 건너가서 재빨리/ 저 유리를 빠져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그 속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눈에 내가 안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휘젓는 폭풍을 그 속에서 보았으니까.//

측백나무 울타리 / 이하석
버스에 부딪혀/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뒤집혀져,/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러나, 다아,/ 살았다./ 죽음의 냄새 같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측백나무 향기.//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신성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려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이쪽 켠에/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고.//

컵 1 / 이하석
유리창 밑 쇠의자 위, 그 캄캄한/ 공간에 빈 컵이 놓여 있다./ 컵에 비친 노을 속, 어슴프레한 붉은/ 얼굴이 하나 캄캄한 머리칼 늘어뜨린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차고 강한 철제의/ 의자 모서리에서 돋는 녹의 붉은 반점들은/ 어둠을 향해 녹아 내리고, 허물어져 가는/ 빈 집은 창만이 맑다.// 컵에 묻어 있는 것. 사랑 같은 것 또는 혼곤히/ 남아 있는 진홍색 루즈는 흙빛깔이 되고 싶어한다./ 그 순간 컵 속에서 맑은 수줍음 하나가 끓어 오르고/ 컵은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수줍음만 남아/ 이룩한 고요가 집마저 무너뜨린다./ 그 다음 이 폐허의 구석에서 사랑처럼/ 풀과 흙냄새가 피어 오른다.//

타이프라이터 1 / 이하석
금융 회사의 김양은 손을 다쳤다, 타이프라이터 속에/ 서류를 끼워 넣다. 화장실에서 손을 붕대로 감은 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조그맣게/ Q자는 열리고, 때로 붕대를 만질 때 마다/ 몇 마디 말이 변기 속으로 급히 빠져 나갔다./ 클립에 끼워진 하루를 처리하는 손이/ 금융 회사의 현관 유리에 붉게 걸릴 때,/ 그녀의 머리칼은 흘러 내리고, 엉덩이는/ 타이프라이터처럼 삐걱거렸다./ 그녀는 오늘 밤 남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손이 젖어서, 타이프라이터의 숫자를 잘못 찍어/ 해고되었다.//

폐차장 / 이하석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치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체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도 젖으며, 흙이 되고/ 더러는 독이 되어 풀들을 더 넓게/ 무성하게 확장시킨다.//

폐차장 1 / 이하석
산에 가 붙들리고 싶다./ 너의 어깨 위로 너의 모자 그늘 아래로/ 산이 멀리 있다.// 우리가 다툰 지도 오래 되었다./ 우리의 욕망이 서로 높아가는 만큼/ 산은 저렇듯 낮고낮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우리는 욕망의 기름 덮인 검은 흙 위에 앉거나// 기름으로 탄 쇳조각 더미에 기대어 일어나며/ 늘 서로 조금씩 달아나면서/ 주검으로나마 저 산에 갈 수 있을지 서로 지쳐 묻는다.//

 



이하석 시인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현대시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투명한 속』『金氏의 옆 얼굴』『우리 낯선 사람들』『측백나무 울타리』『금요일엔 먼데를 본다』『녹』『高靈을 그리다』『것들』『상응』『연애 間』, 시선집 『유리 속의 폭풍』『비밀』『고추잠자리』『환한 밤』, 육필시집 『부서진 활주로』 등.

김수영 문학상, 도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구시 문화상,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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