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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안도현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겨 치직치직 녹는 눈//
연어 [일부분中] / 안도현
우리 연어들이 알을 낳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알을 낳고 못 낳고가 아니라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알을 낳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우리가 쉬운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새끼들도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할 것이고, 곧 거기에 익숙해지고 말 거야. 그러나 우리가 폭포를 뛰어넘는다면, 그 뛰어넘는 순간의 고통과 환희를 훗날 알을 깨고 나올 우리 새끼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게 되지 않을까?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먼 훗날 우리 새끼들의 뼈와 살이 되고 옹골진 삶이 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쉬운 길 대신에 폭포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뿐이야.
* <연어> 전문 보기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낙동강 / 안도현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서울로 가는 全琫準(전봉준) / 안도현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당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혜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난하다는 것은 / 안도현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래를 기다리며 /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국방색 바지에 대하여 / 안도현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저 국방색 바지.//
그대에게 / 안도현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그대에게 가는 길 / 안도현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를 위하여 / 안도현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할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기관차를 위하여 / 안도현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힘으로는 될 수 없는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섬일 뿐이야// 내 어린시절, 기차를 몇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곳 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 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길을 만들어 달릴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간다 싶을때 힘을내/ 달릴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꽃 / 안도현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아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꿈 할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뻐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어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냉이꽃 / 안도현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개망초꽃 /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탱자꽃 / 안도현
탱자 울타리 탱자꽃 되려고/ 올망졸망 입 다문 흰 꽃망울들 보니/ 앞가슴 볼록해진 뒤로 나하고 목욕 절대 안 하는/ 유경이 생각난다//
명자꽃 / 안도현
그해 봄 우리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 이파리 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 낯설었을 초경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낙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홍등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 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자진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 해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동백꽃 지는 날 / 안도현
나 오래 참았다/ 저리 비켜라/ 말 시키지 마라// 선운사 뒷간에 똥 떨어지는 소리//
제비꽃에 대하여 / 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 / 안도현
가야 할 나라 아직 멀고/ 그리운 일 너무 많아 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 나는 길 잘 못 든 눈발로 서성이면서/ 흰 빨래에 배인 겨울을 짜내면서 어머니는/ 서둘지 말아라 얘야 봄이야 오지 않을까만/ 바라보는 하늘에 뜨는 저 대륙의 구름/ 우리 낮은 산과 말 없는 들판이/ 엎드려 언 손을 뜨겁게 서로 문지르며/ 비어 있는 가슴속에 넣어 주고/ 살아온 세월을 기꺼이 용서해 주는/ 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 푸른 병정이 된 친구들 떼지어 돌아오는지/ 끝이 없다 이마 위엔 저기압의 군단/ 발 밑에는 풀잎들의 힘찬 노래 자랑/ 모든 길들은 더듬거리며 들로 나가지만/ 아버지 계시지 않는 땅에 어머니/ 혼자 어떻게 농사 지으시겠어요/ 떠나야 해요 설레임보다 먼저 황사가/ 바다를 건너 오는 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 너무 그리워서 먼 나라로 가고 싶다/ 가는 도중에 우리가 오랑캐꽃이 되어/ 친구들의 발소리에도 소름 돋아 떨지라도/ 그때 오는 봄을 맞이할지라도//
대숲이 푸른 이유 / 안도현
대숲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려고/ 바람이 대숲으로 들어가네/ 댓잎들이 배때기를 일제히 뒤집은 채/ 바람을 밀어내려고 버티네/ 이것 좀 봐 화가 잔뜩 난 바람이/ 한 손으로 대숲의 머리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대숲의 종아리 후려치네/ 대숲이 왜 저렇게 푸르냐 하면/ 아으, 한평생 서서 매맞은 탓이라네//
고추밭 / 안도현
어머니의 고추밭에 나가면/ 연한 손에 매운 물 든다 저리 가 있거라/ 나는 비탈진 황토밭 근방에서/ 맴맴 고추잠자리였다/ 어머니 어깨 위에 내리는/ 글썽거리는 햇살이었다/ 아들 넷만 나란히 보기좋게 키워내셨으니/ 진무른 벌레먹은 구멍뚫린 고추 보고/ 누가 도현네 올 고추농사 잘 안되었네요 해도/ 가을에 가봐야 알지요 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모닥불 / 안도현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 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놓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뜨거운 밤 / 안도현
아,고 잡거들이 말이여,불도 한점 없는 거 뭣이냐 깜깜한 뮛동가에서 둘이서/ 불이 붙어가지고는 누가 왔는지, 누가 지나가는지 , 누가 처다보는지 모르고/ 말이여, 여치는 싸랑싸랑 울어댓쌓은디 내가 어떻게나 놀라부럿는가 첨에 는/ 참말로 귀신들이 아닌가 싶어 대가리 털이 바짝 서두만 가만히 본께 두 년놈들이 깨를/ 홀라당벗고는 메뚜기같이착싹 붙어가지고는 일을 벌이는디,/ 하이고매 숨이 그만 탁 막혀 나는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겠고 그런다/ 좋은 구경 놔두고 꽁무니 빼기도 그렇고 마른침을 꼴딱 삼켜가면서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디 글쎄, 풀들이 난데없이 야밤에 짓뭉개져가지고는 푸르딩딩 멍든/ 자죽처럼 짓뭉개져가지고는 아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바로 고것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나 참별 생각도 다해봤는디 말이여,그때 말이여 반딧불하나가 눈을 깜빡깝빡하면서/ 싸가지 없이 나를 빤히 보고있었던 거 아니겄어, 한마디로 챙피해두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가 다 봤을거 아녀, 처음부터/ 끝까지 저도 다 보고있었으면서 말이여, 하이고매,//
만두집 / 안도현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단발머리 너는/ 창밖 은행잎 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두값도 내지 않고 나와버렸다/ 네가 뒤쫓아오기를 바라면서/ 왜 그냥 가느냐고 이대로는 못 간다고/ 꼭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너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네가 보고 싶어도/ 매일 가던 너의 만두집에 갈 수 없었다//
숭어회 한 접시 /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우물 / 안도현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웃집 / 안도현
이웃집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 개 데리고/ 우리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 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 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 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월경(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낡은 자전거 / 안도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철길 / 안도현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나란히 떠나가리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우리 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
정든 세월에게 / 안도현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가을 햇볕 /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엔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 안도현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가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겨울 밤에 시 쓰기 / 안도현
연탄불 갈아보았는가/ 겨울 밤 세시나 네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귀금속 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하고 왔거나/ 술 한잔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등바등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 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시나 네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 안도현
기다려도 오지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나그네 / 안도현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하고/ 백 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 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마지막 편지 / 안도현
내 사는 마을쪽에/ 쥐 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밤에도 울지 않으려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아픔을 덮고 슬픔도 가려주리라//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했었다는 그 말은 하지 말라/ 그대가 뜨락에 혼자 서 있더라도/ 등뒤로 지는 잎들을 내게/ 보여 주지는 말고/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 행여 내가 바람되어 문 두드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알 수 없는 그윽한 기쁨에/ 돌아 앉아 몸을 떠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이제 이 세상을 나누어 껴안고/ 우리는 괴로워 하리라// 내 마지막 편지가/ 쓸쓸히 그대 손에 닿거든/ 사랑이여,/ 부디 울지 말라/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대가 길이 되어 가거라.//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양철 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 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결혼이란 -남진우, 신경숙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며 / 안도현
결혼이란 그렇지요,/ 쌀 씻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 같이 듣는 거지요/ 밥 익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 같이 맡는 거지요/ 똑같은 숟가락과 똑같은 젓가락을/ 밥상 위에 마주 놓는 거지요/ 결혼이란 그렇지요,/ 한솥밥 먹는 거지요/ 더러는 국물이 싱겁고 더러는 김치가 맵고/ 더러는 시금치 무침이 짜기도 할 테지요/ 결혼이란 그렇지요,/ 틀린 입맛을 서로 맞춘다는 뜻이지요/ (서로 입을 맞추는 게 결혼이니까요)/ 결혼이란 그렇지요,/ 혼자 밥 먹던 날들을 떠나보내고/ 같이 밥 먹을 날들을 맞아들이는 거지요/ (그렇다면 밥을 다 먹은 뒤에는 무얼 할까요?)/ 혼자 잠들던 날들을 떠나보내는 거지요/ 같이 잠드는 날들을 맞아들이는 거지요/ 결혼이란 그렇지요,/ 둘이서 하나가 되는 일이지요/ 그리하여 하나가 셋을 만들고 넷을 만들고 다섯을 만드는 거지요/ 그 날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외딴방' 에서 혹은,/ '숲으로 된 성벽' 에서 말이지요,/ 밥도 먹고 떡도 먹고 술도 먹는 일이지요//
사랑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싸우는 것 / 안도현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연애편지 / 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분홍 지우개 / 안도현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 안도현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먼 산 / 안도현
저물녘/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숨기고/ 그대의 먼 산 되지요//
저물 무렵 / 안도현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 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것도 같습니다//
간격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1970년대 편물점 단칸 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 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 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날, 살이 올랐다네.//
찬밥 / 안도현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저녁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낭만주의 / 안도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廢船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라?/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印稅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詩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 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 왔던 거야/ 생각해 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 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 주었을 거야/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絶交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詩人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사라진 똥 / 안도현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ㄸ오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공양 / 안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갱죽 / 안도현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표절 / 안도현
가을날 그는 방에서 오건烏巾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녹침필綠沈筆을 흔들면서 바다에 노니는 물고기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때 홀연 문종이 바른 창이 환해지더니 기울어진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드리워졌다/ 그가 붓에다 묽은 먹을 묻혀 그 그림자를 기쁘게 모사하였더니,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쫓아와서는 국화꽃 가운데 와 앉더라는 것이었다/ 나비의 더듬이가 마치 구리줄같이 또렷해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는 그것마저 세밀하게 그려넣었다/ 그러고 나니 또 문득 참새 한 마리가 가지를 잡고 매달리기에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참새가 놀라 날아갈까봐 급히 또 베껴 그리고는 붓을 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을 잘 마쳤다. 나비를 얻었는데 참새를 또 얻었구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를 읽다가 누가 표절해 쓸까봐 급히 여기 옮겨 적는다//
안도현(安度昡) 시인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했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월시문학상 대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강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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