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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동환 시인

부흐고비 2021. 7. 21. 09:52

웃은 죄 /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대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봄이오면 / 김동환

봄이오면/ 산에들에 진달래피네/ 진달래 피는곳에 내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처자 꽃따러오거든/ 꽃만말고 이마음도 함께따가주/

봄이오면 하늘위에 종달새우네/ 종달새 우는곳에/ 내마음도 울어/ 나물캐는 아가씨야/ 저소리듣거든 새만말고/ 이소리도 함께들어주/

나는야 봄이되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 붙인다오/ 나는야 봄이되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 꽃되어서 웃어본다오//

 

 강이 풀리면 / 김동환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아무도 모르라고 / 김동환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나 혼자 마시곤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시집  『국경의 밤』  -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1925년 3월에 초판, 그 해 11월에 재판되었다.

 

꿈을 따라갔더니 / 김동환
꿈을 따라갔더니/ 옛날의 터전이 보이고요,/ 호박넝쿨 거두던 따님도 보입데다.// 꿈을 따라갔더니/ 어릴 때 놀던 금잔디벌이 놓이었구요,/ 도라지 캐러 다니던 마을 색시도요.// 나는 어찌도 반가운지 꿈 같아서/ 휘파람으로 고요히 따님을 부르니// 그는 호박넝쿨을 안고 달아나고요,/ 색시를 따르니/ 도라지괭이를 던지고 돌아섭데다.// 아하 옛날은 가고요 꿈만 깃구요,/ 이 꿈조차 마저 간다면/ 나는 어쩌리.//

방화범(放火犯) / 김동환
그 여자(女子)가 가만히 와서는/ 가슴에 불을 지르고 달아납데다.// 눈보라 불어 추워 떨 때에도/ 그이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도망(逃亡)합데다.// 아무리 땀 배는 유월(六月) 볕에라도/ 그이가 지나간 뒤는 석탄(石炭)불이 붙어집데다.// 그리면 나는 혼자서/ 밤새도록 눈물로 불을 끕니다.// 이번이나 이번이나 하고서/ 그를 잡으러 파수(把守) 보노라면,// 어느 틈에 벌써 꿈속에 달려들어/ 온몸에 불을 달아놓고는/ 혼(魂)까지 깡그리 도적하여 갑데다.// 아하, 날마다 저녁마다 달려들어/ 못 살게 구는 방화범(放火犯)이어!//

물결 / 김동환
물결!/ 국토(國土)의 언덕을 스치며 지나는 바다 물결,/ 빨간 등대(燈臺)불을 물고 뜯는 물결에도 밤바다 물결,/ 때리며, 부수며, 노래 부르며/ 백사장(白沙場)에 달려드는 까―만 밤바다 물결,/ 몹시 초조(焦燥)하며 그리고 용감(勇敢)스러운 선구자(先驅者)처럼,/ 늘, 불길이 되어 아침에도 밤에도/ 포효(咆哮)하며 절벽에 달려드노나.// 오, 파도(波濤)여, 멀리 해심(海心)으로부터/ 둥실둥실 떠 들어와 해안(海岸)에 왓― 하고 폭발(爆發)되는/ 장렬한 밤바다 물결이여!/ 쥐 한 마리 잡는 데도 전심력(全心力)을 다하는/ 남양토인(南洋土人)들과도 같이,/ 죽기를 한(限)하고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밤바다 물결,/ 칼을 짚고 일어서는 무부(武夫)와도 같이,/ 준마(駿馬)에 안장 놓는 기사(騎士)와도 같이 한껏 거룩하여라.// 오호, 물결이여, 등대(燈臺)불에 비치는 밤바다 물결이여/ 마지막 피를 토(吐)하고 간 정사자(情死者)의 모양같이,/ 온몸이 불길이 되어 아침에도 밤에도/ 서로 부둥켜안고/ 하소연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노나.// 학(鶴)은 수령(秀嶺)에 깃을 들이고/ 양(羊)은 깨끗한 종이에 입을 대인다고,/ 아름답고 한숨 많은 이 땅을 스치며 지나는/ 어여쁜 밤바다 물결이여,/ 사랑하는 이 자태(姿態)같이 귀엽기도 하노나!// 오호, 강산(江山)의 굽이굽이를/ 말갛게 닦는 밤바다 물결이여,/ 백사장(白沙場) 위엔 외자국 길/ 낙인(落人)이 디디고 간 외자국 길/ 실비 드내리는 물가엔 임자 없는 외배,/ 님이 마지막 버리고 간 외배/ 끌었다 안았다 일생(一生)을 헛장난으로 보내는 가엾은 물결이여!// 그래도 울어라, 물결이여, 선풍(旋風) 만난 대해원(大海原)같이/ 울 대로, 끓을 대로, 힘껏/ 그래서 이 땅 위 백성(百姓)의 식은 마음을 빨갛게 태워라,/ 산송장이 작열(灼熱)해 춤출 때/ 그로써 아름다운 아이 젖 빠는 소리 들리리,/ 아, 밤마다 저녁마다 국토의 언덕을 스치며 지나는/ 밤바다 물결이여,/ 오뉴월(五六月) 삼복(三伏)에 마개 빼논 맥주병(麥酒甁)같이/ 늘 끓어올라라, 기운 있게!//

북청(北靑) 물장사 / 김동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드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北靑) 물장사.// 물에 젖은 꿈이/ 북청(北靑) 물장사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北靑) 물장사.//

선구자(先驅者) / 김동환
눈이 몹시 퍼붓는 어느 해 겨울이었다,// 눈보라에 우는 당나귀[驢馬]를 이끌고 두만강(豆滿江)녘까지 오니,/ 강(江)물은 얼고 그 위에 흰 눈이 석 자나 쌓였었다.// 인적(人跡)은 없고, 해는 지고―/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려 망설이다가/ 대담(大膽)하게 얼음장 깔린 강(江)물 위를 건넜다.// 올 때 보니/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移徙)꾼들 손에/ 널따란 신장로(新長路)가 만들어 놓였다,/ 지난 밤 건너던 내외곡길 위에다―//

표박(漂泊) / 김동환
바다로 갈까, 꽃이 그립고/ 산(山)오로 돌아들까, 노래가 아깝다,/ 그러니 산(山)에도 말고 바다에도 말고.// 청루(靑樓)엔 창녀(娼女) 있고/ 주사(酒肆)엔 빨간 술 있으니,/ 청춘주사(靑春酒肆)에 한꺼번에 가단 말가.// 아모커나 청춘(靑春)엔 웃음이 그립고/ 세상(世上)엔 노래가 드물다니,/ 웃으며 노래 부를 곳 찾으러.//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울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초인(超人)의 선언(宣言) / 김동환
소리개거든 그저 쏘아라, 하늘에 뜬―/ 어쩌면 맞을까고 망설이지 말고 먼저 쏘아라.// 풀밭에 떨어졌거든/ 어디를 맞았는가 살피기 전에/ 먼저 숨이 끊어졌는가 보아라!//

곡(哭) 폐허(廢墟) / 김동환
오호, 동경(東京)이여,/ 낙일(落日)에 외싸여 대지(大地)에 엎디려 우는 옛날의 도부(都府)여,/ 재 속에 파묻힌 찬연(燦然)한 전당(殿堂)과 누대(樓臺)에 조사(弔辭)를 드리는 시민(市民)이여,/ 애닯아라 이 ‘문명(文明)의 몰락(沒落)’을 바라보는 서러운 그 눈이여,/ 이제는 황금(黃金)과 미인(美人)을 지키던 옛날의 기사(騎士)는/ 창궁(槍弓)을 내던지고 폐허(廢墟)의 제단(祭壇)을 향(向)하여 만가(挽歌)를 부르노나./ 아하, 오동(梧桐)마차(馬車)에 실리어 묘지(墓地)로 향(向)하는 ‘문명(文明)의 말로(末路)’여,/ 미(美)와 부(富)와에 결별(訣別)치 않을 수 없던가, 오호, 동경(東京)이여,// 아하, 옛날의 동경(東京)이여!/ 대지(大地)에 우는 소리―연기(煙氣), 화염(火焰), 피, 사람의 반역(反逆),―그래서 굴종(屈從)―발광(發狂)―홍소(哄笑)―호읍(呼泣),/ 아하, 동경(東京)이여! 이렇게 처참(悽慘)하게 인류(人類)의 기억(記憶)을 불살라버리는 이날을 상상이나 하였던가./ 역사(歷史) 재조(再造)의 위대(偉大)한 힘 앞에 우두두 떠는 가련(可憐)한 이재(罹災)의 시민(市民)을 그려나 보았던가./ 아하, 한 옛날의 영화(榮華)에 고별(告別)하는 성채(城砦)여,/ 대자연(大自然)의 세례(洗禮)에 오열(嗚咽)하는 시민(市民)이여!/ 울기를 그치고 웃기도 그만두어라,/ 힘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그렇다 힘이다! 지나간 옛날을 탈환(奪還)함에는 오직 커다란 힘이 있을 뿐이다./ 아, 인류(人類)여, 여명(黎明) 전(前)에 선 저 동경(東京)의 비장(悲壯)한 울음소리에 고요히 듣는 귀를 가져라.// ―대진재(大震災)* 나던 때//
* 대진재(大震災) :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일본 표준시)에 일본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대지진(관동대지진)

손님 -무정(無情)(李光洙)에서 / 김동환
계월향(桂月香). 아직도 새벽빛이 아니 보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찌찌 울던 영혼(靈魂)을 거둬 안고 독수리 나래 같은 어떤 커다란 힘 가진 짓을 바라서 안기려 헤매칩니다. 그때 대동강(大同江) 가에서 옷깃을 바람에 펄펄 날리면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던 패성중학생(浿城中學生)이 한번 다녀간 뒤로 강(江)물 위에 떠도는 노래라고는 아침저녁으로 물동이 인 색시의 띄워놓고 가는 갈잎소리와 세상(世上)을 슬퍼 한탄(恨歎)하는 창녀(娼女)의 뿌리고 가는 눈물소리만 고요히 수류(水流)를 거슬릴 따름이외다. 구태여 노래를 찾는다면 날마다 능라도(綾羅島) 기슭을 스치는 얼음장 속의 아침 햇살이 봉황(鳳凰)을 물어뜯듯 달려드는 것과 또 한 가지 청류벽(淸流壁)을 감도는 초(初)저녁 달잡이 어사(漁師)의 그물 뿌리는 자취가 남아 있는가 합니다.// “남 다 자는 속에 나만 혼자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하던 그 힘 있는 노래는 영영(永永) 구천(九天)에 스러지고 오직 몰락(沒落)하는 옛날의 도읍(都邑)을 조상(弔喪)하는 애조(哀調)만을 띤 만가(挽歌)뿐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아하! 애닯어라 지나간 옛날이여” 하고 부를 때마다 청춘(靑春)의 붉은 마음은 그저 황량(荒凉)한 폐허(廢墟)로 화(化)하여집니다. 재 속에서 푸드득하고 나래를 털고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사(死)에 직면(直面)한 백조(白鳥)의 떼와 같이 우리 앞에는 오직 난세(亂世)의 노래가 남아 있는 줄 압니다. 아, 이제는 눈물조차 아니 내립니다, 양창곡(楊昌曲)을 그리워하고 탁문군(卓文君)을 꿈꾸던 옛날의 향기(香氣)로운 눈물은 말라지었습니다, 이제는 아마 온통 온몸이 화석(化石)같이 되어, 쓰고 단 것을 다 잊어버려지겠지요. 아, 나는 차라리 돌부처 되렵니다. 추우나 더우나 가만히 눈감고 국사당(國師堂)에 앉았는 돌부처님이 되렵니다. 오늘은 그대 손이 분향(焚香)내나 맡았거니와 그 내일(來日)은 또 누구에게서,// “에그 영채야 네나 내나 왜 이런 조선에 낫겠니?!”// 박영채(朴映彩). 그럼, 어디에 났으면 좋았겠소, 짜작돌밭에 피는 개나리꽃이 귀엽다면 더 귀여웁지요, 울지를 마세요. 월향 언니의 뜨거운 눈물이 이 마음을 적시면, 나도 언니같이 봄이 와도 꽃필 줄 모르는 마른 고비 될 터인데, 내야 아무래도 그늘에 피는 봉숭아꽃, 핀대도 보아줄 이조차 없는 속절없는 꽃이지만, 그래도 아무 때나 고이고이 피었다가 그리운 님을 맞을라오. 님도 안 오고 봄비도 아니 내려준다면 그대로 피지도 말고 지렵니다. 향기로운 냄새나 뒷날 여러 동무에게 보내고저,// “언니, 가지를 마세요, 네? 세상이 아무리 쓰리다 해도 그래도 아까운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두!”// 이형식(李亨植). 무릎을 꿇고 설게 우는 소녀(少女)들이여, 울음을 그치세요, 그대들이나 우리네나 다 같이 길 걷는 길손들이외다, 지향(指向)도 없는 머나먼 길을 허덕이면서 걸어가는 외로운 길손들이외다. 냇가에서 비바람을 만나 외배를 붙잡고 저어가는 어려운 처지(處地)에 놓인 동무들입니다, 진흙비에 온몸이 젖구요, 돌개바람에 수족(手足)이 식어갑니다. 우리는 이 빗살과 바람을 피합시다. 소녀(少女)여, 내 품에 안기세요, 청춘(靑春)아, 색시를 붙잡아라. 파선(破船)만 안되고 목숨만 붙어 있노라면 저쪽으로 가지겠지요. 아, 새벽이 와도 우리네 맞을 새벽, 어두운 밤이 와도 우리네 허덕일 밤, 주인도 없고 이끄는 자(者)도 없는 우리네 길은 험(險)하기도, 모험(冒險)에 가까운 일이랍니다. 아하, 어여쁜 소녀(少女)들이여, 그래도 가기는 가십시다. 넘을 산(山)이 많아도 어떻게 넘을까 말고 먼저 넘어봅시다. 설마 나선 길이니 되돌아서기야 하리까.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개나리꽃도 한때는 봄이 와주는 법(法)이라고, 어서 길을 떠납시다. 새벽길을 떠납시다, 모든 벗들이여 어서 네?// 신우선(申友善). 쫄깍쫄깍 울지를 말게나. 자네가 부자집 사위 되더니 우리네도 사랑나라의 자녀(子女)들이 될 터인데!// 김선형(金善馨). 그래요! 삼랑진(三浪津)서 음악회(音樂會) 때엔 여러분이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지 않았어요. 보채는 아기에 국 한 그릇 말아주라고요. 우리네도 이렇게 안타까워서 발버둥치느라면 아무리 냉랭(冷冷)한 ‘도덕(道德)’이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붙여주겠지요. 아무리 모색스럽고 무정(無情)한 세상(世上)이라도 가슴을 벌려 “인제 오느냐” 하고 반가히 안아주겠지요. 어서 걸읍시다. 동만 트면 어련할라구. 왼길로 가거나 오른길로 걷거나, 새벽길을 향(向)하야 갈 바에는 마찬가지니, 어서 바삐바삐 떠납시다. 짐을 꾸리세요, 예쁜 젊은이들이여, 벌써 동쪽이 우스러히 터 오르는데!// ―“얘들아, 이불을 걷어라 어서 어서!/ 손님들이 오신단다/ 새벽이란 손님들이!”//

울 수도 없거든 -해파리의 노래(金岸曙)에서 / 김동환
색시. 노―란 금(金)잔디 깔릴 때 오신다더니만,/ 흰 눈이 치맛자락을 덮어도 기별(寄別) 없구요,/ 돌씨 지나게 무슨 일을 하세요.// 그립다 그립다 못해서 이제는/ 눈물조차 마르고요,/ 울음도 없는 쓰린 날은 더 더 괴롭답니다,/ 가슴속엔 회오리바람.// 청년(靑年). 그러길래 죽구 싶다지요./ 기별(寄別)도 할 수 없구요, 돌아가지도 못하길래/ 꿈에나 만날까고, 밤을 그리워하니/ 밤이 와도 잠은 안 오고,/ 그리운 옛날은 볼 수도 없답니다./ 빨간 진달래꽃이 가슴을 덮을 때!/ 고요히 고요히 눈 감고 옛날의 노래 부르렵니다.// 에익, 못난 것들이여, 그래도 웃어라./ 웃을 수 없는 것을 웃어라!/ 아무래도 웃을 수 없다고?/ 그러거든 울어라, 힘껏 울어라!/ 울 수도 없거든 죽어라!/ 님을 위하야 목숨을 끊어라./ 사랑하는 이라면 어려울까, 그것이/ 나라를 위하거나, 세상(世上)을 위하거나 그리운 님을 위하거나 그게 어려울 일일까?/ 사랑으로 죽는 무덤가에는 꽃이 핀다더라,/ 아, 청춘(靑春)아,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가슴을/ 안아줄 오직 죽음을 찾아라!//

영탄 -만세전(萬歲前)(廉想涉)에서 / 김동환
김천형님(金泉兄任). 김의관(金議官)이 ‘차지(差支)’라고 하더라./ 흰 옷에 딸깍나무신 끄는 격(格)으로, 하하하/ 하하하, 입살맛은 다 같아요!/ 을라(乙羅)나 정자양(靜子樣)이나 다, 그러니 그러는 게지요./ 아무튼 인바네스를 피(避)하는 이나,/ 천대를 밧으며 상투를 그냥 두는 이나,/ 오십보(五十步) 백보(百步)인가 봅데다그려.// ×/ ―피는 물보다 더 거느니/ 흰옷의 정령(精靈)이 무지개 싹듯이 차츰 싹어지는데!//

주영의 고백 -「汝等の背後より」(中西伊之助)에서 / 김동환
슬픈 빛을 담은 파래진 주름살을 후두두 떨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는 날더러,/ “법률(法律)을 해라, 너는 법률(法律)을 해라, 그래서 설치를 하여라!”/ 조그마한 딸은 그 말씀을 거슬리고요,/ 기어이 연애(戀愛)를 하였어요./ S중위(中尉)를요―신춘용(申春容)을요―/ 그리다가 나라를 사랑했지요, ×××를 지니고서,// ―꿈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마지막 날 토마스 신부(神父)와도 같이,/ 눈물만 글썽글썽 하시어서!// ―옳다, 사랑이 너의 전부(全部)다,/ 목숨밖에 가진 것 없는 너희네는/ 살겠거든 사랑하여라, 힘껏!// 도토리 -개척자(開拓者)(春園)에서 / 김동환
성재(性哉). 누나야, 이것을 마시렴./ 이 약(藥)을 화학실험실(化學實驗室)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머니 근심도 제(除)하시게!// 성순(性淳). 싫어요, 나는/ 높은 묏부리에 핀 개나리꽃도/ 빗방울에 맞으면 그만 진다구요,/ 귀여운 세상에 낫다가 고이고이 지렵니다./ 비록 피어보지도 못한 대로 간대도, 나는!/ 민(閔). 도토리다! 순(淳)아 너는 도토리다!// ―한알 쌀이 땅에 떨어져 칠십 배 된다./ ―예수//

국경의 밤 / 김동환 - * 한국의 근대문학 사상 최초의 서사시
1부// 1장//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상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명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2장//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 산림실이 화부(花夫)떼 소리언만.//

3장// 마지막 가는 병자의 부르짖은 같은/ 애처로운 바람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못 건넌 채 얻어맞은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가며 운다 -/ 겨울에도 한 삼동,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긋는 소리언만,//

4장/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 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파수막)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빨-간 불빛이 보인다./ 까-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5장//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 벌에는/ 외가지 백양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안고 춤을 춘다,/ 가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놓으면서 -//

6장// 전선이 운다, 잉 - 잉 – 하고/ 국교(國交)하러 가는 전신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백양도 산곡도 외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따라 간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밤마다 밤마다 외로이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 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고동이 텄는데.//

7장//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 줄 모르는/ 간 건너 산천으로서는/ 바람에 눈보라가 쏠려서/ 강 한판에/ 진시왕릉 같은 무덤을 쌓아놓고는/ 이내 안압지를 파고 달아난다,/ 하늘땅 모두 회명(晦暝)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백설로 오백 리, 월광으로 삼천 리,/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8장// 그날 저녁 으스러한 때이었다/ 어디서 왔다는지 초조한 청년 하나/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나 오르명내리명/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 "달빛에 잠자는 두만강이여!/ 눈보라에 깔려 우는 옛날의 거리여,/ 나는 살아서 네 품에 다시 안길 줄 몰랐다,/ 아하, 그리운 옛날의 거리여!"/ 애처로운 그 소리 밤하늘에 울려/ 청상과부의 하소연같이 슬프게 들렸다./ 그래도 이 마을 백성들은/ 또 '못된 녀석'이 왔다고,/ 수군거리며 문을 닫아 매었다.//

9장// 높았다 - 낮았다 - 울었다 - 웃었다 하는/ 그 소리 폐허의 재 속에서/ 나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외우는 백조의 노래같이/ 마디마디 눈물을 짜아내었다, 마치/ "얘들아 마지막 날이 왔다"하는 듯이/ "모든 것이 괴멸할 때가 왔다"하는 듯도./ 여럿은 어린애고 자란 이고/ 화롯불에 마주 앉았다가 약속한 듯이 고요히 눈을 감는다./ 하나님을 찾는 듯이 -/ "저희들을 구해 줍소서"/ 그러다가 발소리와 같이 "아하" 부르는 청년의 소리가 다시 들리자,// "에익! 빌어 먹을 놈!"하고 침을 배앝는다,/ 그 머리로서는 밀정하는 소리가 번개치듯 지나간다,/ - 그네는 두려운 과거를 가졌다/ 생각하기에도 애처로운 기억을 가졌다./ 그래서 그물에 놀란 참새처럼/ 늘 두려운 가슴을 안고 지내간다,/ 불쌍한 족속의 가슴이 늘 얼어서!//

10장// 청년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옛날의 거리여!/ 부모의 무덤과 어릴 때 글 읽던 서당과 훈장과/ 그보다도 물방앗간에서 만나는 색씨 사는/ 고향아, 달빛에 파래진 S촌아!"/ 여러 사람은 더욱 놀랐다 그 대담한 소리에/ 마치 어느 피 묻은 입이,/ '리벤지'를 부르는 것 같아서,/ 촌 백성들은 장차 올 두려운 운명을 그리면서/ 불안과 비포(悲怖)에 떨었다,/ 그래서 핫! 하고 골을 짚은 채 쓰러졌다.//

11장// 바람은 이 조그마한 S촌을 삼킬 듯이 심하여간다/ S촌뿐이랴 강안(江岸)의 두 다른 국토와 인가와 풍경을 시름없이 덮으면서// 벌부(筏夫)의 소리도, 고기잡이 얼음장 그는 소리도, 구화(溝化)불에 마주선 중국 순경의 주정소리도,수비대 보초의 소리도/ 검열 맡은 필름같이 뚝뚝 중단되어가면서, 그래도/ 이 속에도 어린애 안고 우는 촌 처녀(처녀)의 소리만은 더욱 분명하게/ 또 한 가지/ 방랑자의 호소도 더욱 뚜렷하게,/ 울며, 짜며 한숨짓는 이 모든 규음(揆音)이/ 바숴진 피아노의 건반같이/ 산산이 깨뜨려놓았다, 이 마을 평화를 -//

12장// 처녀(妻女)는 두렵고 시산하고 참다못하여/ 문을 열고 하늘을 내다보았다/ 하늘엔 불켜논 방안같이 환-히 밝은데/ 가담가담 흑즙 같은 구름이 박히어 있다./ "응, 깊고 맑은데-"하고 멀리 산굽이를 쳐다보았으나/ 아까 나갔던 남편의 모양은 다시 안 보였다/ 바람이 또 한 번 포효하며 지난다/ 그때 이웃집으로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우물가 버드나무 째지는 소리 요란히 난다 -/ 처마 끝에 달아맨 고추 다램이도 흩어지면서/ 그는 "에그 추워라!"하고 문을 얼른 닫았다.//

13장// 먼 길가에선 술집막(幕)에서 널문 소리 들린다,/ 이내 에익… 허… 허… 하는 주정꾼 소리도/ "춥길래 오늘 저녁 문도 빨리 닫는가보다"하고 속으로 외우며/ 처녀(妻女)는 돌부처같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근심 없는 사람 모양으로./ 이렇게 시산한 밤이면은/ 사람 소리가 그리우니/ 웩 - 웩 - 거리고 지나는 주정꾼 소리도.//

14장// 처녀(妻女)는 생각하는 양 없이/ 출가한 첫해 일을 그려보았다 -/ 밤마다 밤마다 저 혼자 베틀에 앉았을 때,/ 남편은 곤히 코구르고 -/ 고요한 밤거리를 불고 지나는/ 머슴아이의 옥퉁소 소리에/ 구곡의 청제비 우는 듯한 그 애연한 음조를 듣고는/ 그만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하였더니/ 그저 섧고도 안타까워서 -// 산으로 간 남편이 저물게 돌아올 때/ 울타리 기대어 먼 산기슭을 바라보노라면/ 오시는 길을 지키노라면/ 멀리 울 리는 강아지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더니/ 갓난애기의 첫해가 자꾸 설워서 -// 그보다도 가을밤 옷 다듬다/ 뒷서당집 노훈장의 외우는 "공자 왈, 맹자 왈"소리에/ 빨래 다듬이도 잊고서 그저 가만히/ 엎디어 있노라면/ 마을돌이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구운 감자 갖다주는 것도 맛없더니/ 그래서 그래서 저 혼자 이불 속에서/ 계명(鷄鳴) 때 지나게 울기도 하였더니,// "아. 옛날은 꿈이구나!"하고 처녀(妻女)는/ 세상을 다 보낸 노인같이 무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녀(妻女)는 운다,/ 오랫동안을 사내를 속이고 울던 마음이/ 오늘밤 따라와 터지는 것 같아서,/ - 그는 어릴 때 아직 머리태를 두었을 때 -/ 도라지 뿌리 씻으로 샘터에 가면/ 강아지 몰고 오는 머슴아이, 만나던 일/ 갈잎으로 풀막을 짓고/ 해 지기도 모르게,/ 물장구 치고 풀싸움하고 그러던 일,// 그러다가 처녀(妻女)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옳아, 그이, 그 언문 아는 선비! 어디 갔을까?"/ 하고 무릎을 친다./ 그리고 입속으로 "옳아, 옳아, 그이!"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꿈길을 따르면서 - 옛날을 가슴에서 파내면서.//

15장// 바깥에선 밤개가 컹컹 짖는다./ 그 서슬에 "아뿔사 내가 왜?"하고 처녀(妻女)는/ 황급히 일어나 문턱에 매어달린다, 죄 되는 일을 생각한 것같이./ 그러나 달과, 바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산 봉화당 꼭지에선/ 성좌들이 진치고 한창 초한(楚漢)을 다투는데//

16장// "아하, 설날이 아니 오고, 또 어린애가 아니었더면/ 국금(國禁)을 파하고까지 남편을/ 이 한밤에 돈벌이로/ 강 건너 외땅으로 보내지 않았으련만/ 무지한 병정에게 들키면 그만이지./ 가시던 대로나 돌아오시랴./ 에그, 과부는 싫어, 상복 입고 산소에 가는 과부는 싫어"/ 빠지직빠지직 타오르는 심화에/ 앉아서 울고 서서 맴도는/ 시골 아낙네이 겨울밤은 지리도 하여라./ 다시는 인적기조차 없는데/ 뒷산곡에는 곰 우는 소리 요란코.//

17장// 이상한 청년은 그 집 문간까지 왔었다,/ 여러 사람의 악매(惡罵)하는 눈살에 쫓겨/ 뼉다귀 찾는 미친 개모양으로 우줄우줄 떨면서/ 모막살이집 문 앞까지 왔었다, 누가 보았던들/ 망명하여 혼 이방인이 보리(補吏)의 눈을 피하는 것이라 않았으랴./ 그는 돌연/ "여보, 주인!"/ 하고 굳어진 소리로 빽 지른다./ 그 서슬에 지옥서 온 사자를 맞는 듯이/ 온 마을이 푸드득 떤다,/ 그는 이어서 백골을 도적하러 묘지에 온 자처럼/ 연해 눈살을 사방에 펼치면서 날카로운 말소리로/ "여보세요 주인! 문을 열어주세요"//

18장// 딸그막딸그막 울려나오는 그 소리,/ 만인의 가슴을 무찌를 때/ 모든 것은 기침 한 번 없이 고요하였다./ 천지 창조 전의 대공간같이……/ 그는 다시 눈을 흘겨 삼킬 듯이 바라보더니/ "여보, 주인! 주인! 주인?"/ 아, 그 소리는 불쌍하게도/ 맥이 풀어져 고요히 앉아 있는 아내의 혼을 약탈하고 말았다./ 사내를 사지(死地)에 보내고 정황없어 하는 아내의 -//

19장// 처녀(妻女)는 그 소리에 놀랐다./ 그래서 떨었다 밖으로선 더 급하게/ "나를 모르세요? 내요! 내요!"/ 하고 계속하여 난다, 그러면서/ 주먹이 똑 똑 똑 하고 문지방에 와 맞힌다./ 처녀(처녀)의 가슴도 똑똑똑 때리면서/ 젊은 여자를 잠가둔 성당 문을 똑똑똑 두다리면서.//

20장// 처녀(妻女)는 어떨 줄 몰랐다,/ 그래서 거의 기절할 듯이 두려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남편이 떠날 때,/ 동리 구장이 달려와 말모개를 붙잡고/ "오늘 저녁엔 떠나지를 마오, 부디 떠나지를 마오, 이상한 청년이 나타나 무슨 큰 화변을 칠 것 같소, 부디 떠나지를 마오, 작년 일을 생각하거든 떠나지를 마오."/ 그러길래 또 무슨 일이 있는가고,/ 미리 겁내어 앉았을 때 그 소리 듣고는/ 그는 에그! 하고 겁이 덜컥 났었다./ 죽음이 어디서 빤-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몸에 오소속 소름이 친다//

21장// 그의 때리는 주먹은 쉬지 않았다, 똑 - 똑 - 똑 -/ "여보세요, 내요! 내라니까"/ 그리고는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있다, 한참을./ "아, 내라니까, 내요, 어서 조금만"/ "아하, 아하, 아하 -"/ 청년은 그만 쓰러진다./ 동사(凍死)하는 거지 추위에 넘어지듯이,/ 그때 처녀(妻女)는 제 가슴을 만지며/ "에그, 어쩌나, 죽나보다 -"하고 마음이 쓰렸다./ "아하, 아하, 아하, -"/ 땅속으로 꺼져하는 것 같은 마지막 소리/ 차츰 희미하여가는데 어쩌나! 어쩌나? 아하 -/ "내라니까! 내요, 아, 조금만……" 그것은 확실히 마지막이다./ 알 수 없는 청년의 마지막 부르짖음이다 -// 이튿날 첫아침 흰 눈에 묻힌 송장 하나가 놓이리라./ 건치에 말아 강물 속에 띄워보내리라,/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방랑자를 -/ 처녀(妻女)는 이렇게 생각함에,/ "에그 차마 못할 일이다!"하고 가슴을 뜯었다./ 어쩔까, 들려놓을까? 내 버려둘까?/ 간첩일까? 마적일까? 아니 착한 사람일까?/ 처녀는 혼자 얼마를 망설이었다./ "아하, 나를 몰라, 나를- 나를, 이 나를……"/ 그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꼭 한 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물귀신에게 홀린 제주도 해녀같이/ 그래서 문고리를 쥐었다./ 금속성 소리 딸까닥하고 난다,/ 그 소리에 다시 놀라 그는 뒷걸음친다.//

22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청년이었다./ 그는 창살에 넘어지는 아낙네의 그림자를 보고는/ 미친 듯, 일어서며, 다시/ "내요 - 내요 -" 부른다./ 익수자(溺水者)가 배를 본 듯, 외마디 소리, 정성을 다한 -// 23장// 처녀(妻女)는 그래도 결단치 못하였다,/ 열지 않으면 불쌍하고, 열면 두렵고,/ 그래서 문고리를 쥐고 삼삼 돌았다./ "여보세요, 어서 조금만 아하……"/ 그러면서 마지막 똑똑을 두다린다,/ 마치 파선된 배의 기관같이/ 차츰차츰 약하여져가면서 -//

24장// 처녀(妻女)는 될 대로라듯이 문을 열고 있다,/ 지켜섰던 바람이 획! 하고 귓볼을 때린다,/ 그때 의문의 청년도 우뚝 일어섰다/ 더벅머리에 눈살이 깔리고, 바지에 정강이/ 달빛에 석골조상같이 꿋꿋하여진 그 방랑자의 꼴!//

25장// 어유(漁油)불이 삿!하고 두 사이를 흐른다,/ 모든 발음(撥音)이 죽은 듯 하품을 친다./ "누구세요, 당신은 네?"/ 청년은 한 걸음 다가서며/ "내요, 내요 내라니까 - "/ 그리고는 서로 물끄러미 치어다본다,/ 아주 대담하게, 아주 심정(沈精)하게//

26장// 그것도 순간이었다/ "앗! 당신이 에그머니!"하고 처녀는 놀라 쓰러진다./ 청년도/ "역시 오랫던가 아, 순이여"/ 하고 문지방에 쓰러진다./ 로단이 조각하여논 유명한 조상같이 둘은 가만히 서 있다,/ 달빛에 파래져 신비하게, 거루하게.//

27장// 아하 그리운 한 옛날의 추억이어./ 두 소상(塑像)에 덮이는 한 옛날의 따스한 기억이어!/ 8년 후 이날에 다시 불탈 줄 누가 알았으리./ 아, 처녀와 총각이어,/ 꿈나라를 건설하던 처녀와 총각이어!/ 둘은 고요히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따스한 늘을 들춘다 -/ 국경의 겨울밤은 모든 것을 싸안고 달아난다./ 거의 10년 동안을 울며불며 모든 것을 괴멸시키면서 달아난다./ 집도 헐기고, 물방앗간도 갈리고, 산도 변하고, 하늘의 백랑성 위치조차 조금 서남으로 비틀리고/ 그러나 이 청춘남녀의/ 가슴속 깊이 파묻혀둔 기억만은 잊히지 못하였다,/ 봄꽃이 져도 가을 열매 떨어져도/ 8년은 말고 80년을 가보렴 하듯이 고이고이 깃들었다/ 아, 처음 사랑하던 때!/ 처음 가슴을 마주칠 때!/ 8년 전의 아름다운 그 기억이어!//

2부// 28장// 멀구 광주리 이고 산기슭을 다니는/ 마을 처녀떼 속에,/ 순이라는 금년 열여섯 살 먹은 재가승(在家僧)의 따님이 있었다./ 멀구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 게다가 웃울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 백두산 천지 속의 선녀같이 몹시도 어여뻤다./ 마을 나무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을 썼다./ 될 수 있으면 장가까지라도! 하고/ 총각들은 산에 가서 '콩쌀금'하여서는 남몰래 색시를 갖다주었다./ 노인들은 보리가 설 때 새알이 밭고랑에 있으면 고이고이 갖다주었다./ 마을서는 귀여운 색시라고 누구나 칭찬하였다.//

29장// 가을이 다 가는 어느 날 순이는/ 멀구 광주리 맥없이 내려놓으며 아버지더러,/ "아버지, 우리를 중놈이라고 해요, 중놈이란 무엇인데"/ "중? 중은 웬 중! 장삼입고 고깔 쓰고 목탁 두다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중이지, 너 안 보았디? 일전에 왔던 동냥벌이 중을"/ 그러나 어쩐지 그 말소리는 비었다./ "그래도 남들이 중놈이라던데"하고,/ 아까 산에서 나뭇꾼들에게 몰리우던 일을 생각하였다./ 노인은 분한 듯이 낫자루를 휙 집어 뿌리며,/ "중이면 어때? - 중은 사람이 아니라든? 다른 백성하고 혼사도 못하고 마음대로 옮겨 살지도 못하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가/ "잘들 한다. 어디 봐! 내 딸에야 손가락 하나 대게 하는가고"/ 하면서 말없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낯에는 눈물이 두루루 어울리고,/ 순이도 그저 슬픈 것 같아서 함께 울었다, 얼마를.//

30장// 재가승(在家僧)이란 - 그 유래는/ 함경도 윤관이 들어오기 전,/ 북관의 육진 벌을 유목(遊牧)하고 다니던 일족이었다./ 갑옷 입고 풀투구 쓰고 돌로 깎은 도끼를 메고,/ 해 잘 드는 양지볕을 따라 노루와 사슴잡이하면서/ 동으로 서로 푸른 하늘 아래를/ 수초를 따라 아무데나 다녔다, 이리저리./ 부인들은/ 해 뜨면 천막밖에 기어나와,/ 산 과일을 따 먹으며 노래를 부르다가/ 저녁이면 고기를 끓이며 술을 만들어,/ 사내와 같이 먹으며 입맞추며 놀며 지냈다./ 그러다가 청산을 두고 구름만 가는 아침이면/ 산령에 올라 꽃도 따고, 풀도 꺾고 -//

31장// 말은 한가히 풀을 뜯고 개는 꿩을 따르고,/ 하늘은 맑았고, 푸르고/ 이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이 일족이/ 잡아서 먹고서, 먹고서 잡아가지고 -/ 그래서 술을 먹고 계집질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싸움하고 영지를 빼앗고, 암살이 일어나고 -/ 추장, 무사, 처, 모, 아이,석부(石釜), 초의(草衣) -/ 이것이 서로 죽고, 빼앗고 없어지고 하는 대상/ 평화스럽고 살벌한 세대를 오래 보내었다.//

32장// 새벽이면 추장이/ "얘들아 일어나거라!"하는 소리에,/ 천막 속 한자리에서 잠자던 부부와 부모와 처자와 모든 것들이/ 이슬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장정은 활을 메고 들에 나가고/ 처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쪼인다./ 추장은 연해 싸움할 계획을 하고서 -/ 일족은 복잡한 것을 모르고 그날 그날을 보내었다.//

33장// 그네들은 탐탐한 공기를 모르고 성가신 도덕과 예의를 모르고/ 아름다운 말씨와 표정을 몰랐었다/ 그저 아름다운 색시를 만나면 아내를 삼고/ 그래서 어여쁜 자녀를 내어 기르고/ 밤이면, 달이 떠 적막할 때,/ 모닥불 옆에서 고기를 구워서는/ 술안주하여 먹으며, 타령을 하면서/ 짧은 세상을 즐겁게 보내었다/ 몇백 년을 두고 똑같이.//

34장// 그러나 일이 났다./ 앞마을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고 떠들 때,/ 천막에다 여러 곳에서 나많은 장정들이 모조리/ 석부를 차고 활을 메고/ 여러 대 누려 먹은 제 땅을 안 뺏기려,/ 싸움터로 나갔다./ 나갈 때면 울며불며 매여달 리는 아내를 물리치면서/ 처음으로 대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보면서./ 남은 식구들은 떠난 날부터/ 냇가에 칠성단을 묻고 밤마다 빌었다, 하늘에/ 무사히 살아오라고! 싸움에 이기라고!/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엔 슬픈 기별이 왔었다,/ 싸움에 나갔던 군사는 모조리 패해서 모두는 죽고/ 더러는 강을 건너 오랑캐령으로 달아나고,/ - 사랑하던 여자와 말과 서부와, 석퉁소를 내 버리고서./ 즉시 고구려 관원들이 왔었다 이 천막촌에/ 그래서 죽이리 살리리 공론하다가/ 종으로 쓰기로 하고 그대로 육진에 살게 하였다,/ 모두 머리를 깎이고 -//

35장// 몇백 년이 지났는 지 모른다./ 고구려 관원들도 갈리고/ 그 일족도 이리저리 흩어져/ 어떻게 두루 복잡하여질 때,/ 그네는 혹 둘도, 모여서 일정한 부락을 짓고 살았다./ 머리를 깎고 동무를 표하느라고 남들은/ 집중이라 부르든 말든 -/ 재가승(在家僧)이란 그 여진의 유족.// 그래서 백정들이 인간 예찬하듯이/ 이 일족은 세상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며 지냈다.// 순이란 함경도의 변경에 뿌리운 재가승의 따님./ 불쌍하게 피어난 운명의 꽃,/ 놀아도 집중과 시집가도 집중이라는 정칙받은 자!/ 그러나 누구나 이 중을 모른다, 집주이란 뜻을/ 그저 집중 집중 하고 욕하는 말로 나뭇꾼들이 써왔다//

36장// 마을 색시들은/ 해 지기까지 하여서 물터에 물 길러 나섰다,/ 국사당 있는 조그마한 샘터에로,/ 그곳에는 수양버들 아래,// 오래 묵은 돌부처 구월 볕에 땀을 씻으면서/ 육감을 외우고 앉아 있었다./ 지나던 길손이 낮잠 자는 터전도 되고 -/ 그 아래는 바로 우물, 바가지로 풀 수 있는 우물,/ 여러 길에 쓰는 샘물터가 있었다./ 또 그 곁에는 치재(致齋) 붙이던 베 조각이 드리웠고,/ 나무꾼이 원두 씨름아여 먹고 간 꺼-먼 자취가 남았고/ 샘물 우엔 벌레 먹은 버들잎 두어 개 띄웠고 -//

37장// "순이는 벌써 머리를 얹었다네,/ 으아, 우습다 시집간다더라, 청혼왔다구."/ "부잣집 며느리 된다고, 어떤 애는 좋겠다"/ 하며 여럿은 순이를 놀려대이며/ 버들잎을 가려가며 물을 퍼 담았다./ "밭도 두 맥 소쉬 있고 소도 세 마리나 있고 흥!"/ "더구나 새신랑은 글을 안다더라, 언문을"/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며/ 마을 처녀들은 순이를 놀려대었다.//

38장// 순이는 혼자 속으로/ 가만히 '시집' '신부'하고 불러보았다./ 어여쁜 이름이다 함에 저절로 낯이 붉어진다,/ "나도 그렇게 된담! 더구나 그 '선비'하고"/ 그러다가 문득 아까 아버지 하던 말을 생각하고/ 나는 집중 집중으로 시집가야 되는 몸이다 함에/ 제 신세 가엾은 것 같아서 퍽 슬펐다./ "어찌 그 선비는 집중이 아닌고? 언문 아는 선비가, 에그 그 부잣집은 집중 가문이 아닌고? 가엾어라"/ 그는 그저 울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여지면서/ 멀리 해는 산마루를 넘고요 -//

39장// 얼마나 있었는지 멀리 방축 건너로/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하는 나무꾼의 목가가 들릴 때,/ 순이는 깜짝 놀라 얼른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았다/ 가을바람이 버들잎 한 쌍을 물동이에 쥐어넣고 -// 40장// 동무들은 다 가고/ 범나비 저녁바람 쏘이려 나왔을 때,/ 하늘이 부르는 저녁 노래가 고요히 떠돌아/ 향기로운 땅의 냄새에 아울려/ 순이를 때릴 때, 그는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 성장한 처녀의 가슴에 인생의 노래가 떠돌아 못 견디게 기쁘었다,/ 그때 어디서 갈잎이 째지며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새알 만한 돌멩이 발충에 와 떨어진다//

41장// 순이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로 돌아섰다./ 귓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소년은 뛰어나왔다. 갈 밖으로 벙글벙글 웃으면서/ "응, 순이로구나!" 하면서 앞에 와 마주섰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콩쌀금'을 내어 슬며시 쥐어준다./ 순이는 오늘따라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였다 늘 하던 해죽 웃기를 잊고 -/ "너 멀구밭으로 갔던? 어째 혼자 갔나?"/ "나허구 같이 가자구 하지 않았나? 누가 꼬이든?"/ "……"// "어째 너 나를 싫어하나? 응"/ 순이는 그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년은 빨개진 소녀의 귓볼을 들여다보며/ "왜 울었니? 누구에게 맞았니?"/ "누가 맞았다니!"/ "그럼 어째 말을 아니 하니?"/ 그래도 순이는 잠잠하다./ 소년은 손뼉을 치며 하하하 웃으면서/ "옳지 알았다 너 부끄러워 우니? 우리 아버지 너 집으로 혼사말 갔다더니 옳지 그게 부끄럽구 우냐!"/ "……"/ "얘 너는 우리 집에 시집온단다, 권마성(勸馬聲) 소리에 가마에 앉아서 응"/ 순이는 한 걸음 물러서며/ "듣기 싫다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그리고는 물동이 앞에 와 선다./ 아무 말도 없이 고요히 – 수정(水精)같이/ 소년은 웃다가 이 눈치를 차리고 얼른 달려들어/ 물동이를 이워주었다./ 그리고는 뒷맵시와 불그레한 뺨빛을/ 또 한 가지 여왕같이 걸어가는 거룩한 그 자태를 탐내보면서/ 마치 원광 두른 성녀를 보내는 듯이 한껏 아까워서 -//

42장// 조선의 시골에는/ 백일에 짓는 사랑의 궁전은 없으랴./ 종이 무서워 무서워 상전을 바라보듯/ 거지가 금덩이 안아보듯/ 두려움과 경이가 큐-피트의 화살이 되었다.//

43장// 그러는 속에도 사랑은 허화(虛火),/ 봄눈을 뒤지고 나오는 움같이/ 고려 지방족의 강득한 씨는/ 아침나절 호풍이 부는 산국(山國)에도 피기 시작하였다./ 여성은 태양이다! 하는 소리가/ 소년의 입술을 가끔 스쳤다,/ 두 절대한 친화력에 불타지면서/ 사랑은 재가승과 언문 아는 계급을 초월하여서 붙었다.//

44장// 그뒤로부터/ 비 오는 아침이나 바람 부는 저녁이나/ 두 그림자는 늘 샘터에 모였다/ 남의 눈을 꺼리면서,/ 물 우엔 갈잎 마음속엔 '잊지 말란 풀'//

45장// 뻐꾸기 우는 깊은 밤중에/ 처녀의 짓두그릇엔 웬 총각의 토수목 끼었고/ 누가 쓴 '언문본'인지 뎅굴뎅굴 굴렀다/ 순이의 맘에는 알 수 없는 영주가 즐어앉았다./ 콩쌀금 주던 미소년이 처녀의 가슴에 아아/ 언문 아는 선비가 안기었다.//

46장// 소년은 -/ 날마다 꼴단 지고 오다가 그 집 앞 돌각탑 우에 와 앉았다,/ 땀 씻을 때에 부르는 휘파람 소리는/ 어린 소녀에게 전하는 그 소리라./ 사랑하는 이의 사랑받으면서/ 꿈나라의 왕궁을 짓는 하루 이틀/ 아침은 저녁이 멀고 저녁은 아침이 그리운/ 만리장성을 쌓을 때 -//

47장// 쌓기는 왕자, 왕녀의 사랑 같은 사랑의 성을/ 두 소년이 쌓았건만,/ 헐기는 재가승의 정칙이 헐기 시작하였다./ 꽃에는 벌레가 들기 쉽다고/ 아, 둘 사이에는 마지막 날이 왔다,/ 벌써부터 와야 할 마지막 날이/ 전통은- 사회 제도는/ 인간 불평등의 한 따님이라고,/ 재가승의 자녀는 재가승의 집으로/ 그래서 같은 씨를 십대 백대 천대를/ 순이도 재가승의 씨를 받아 전하는 기계로 가게 되었다.// 죽기를 한하는 순이는/ 울고 떼쓰다가 아버지 교살된다는 말에/ 할 수 없이 그해 겨울에 동리 존위(尊位)집에 시집갔었다,/ 언문 아는 선비를 내어버리고 -// 여러 마을의 총각들은 너무 분해서/ "어디 봐라!"하고 침을 배앝으며/ 물긷기 동무들은/ "어찌 저럴까, 언문 아는 선비는 어쩌고, 흐흥, 중은 역시 중이 좋은 게지"라고 비웃었다.//

48장// 이 소문을 듣고 소년은 밤마다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단 한 번만 그 색시를 만나려 애썼다./ 광인같이 아침 저녁 물방앗간을 뛰마니며/ "어찌 갔을까, 어여쁜 순이가/ 맹세한 순이가 어찌 갔을까?"하면서.//

49장// 열흘이 지나도 순이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이게 무슨 짓입니까/ 팔목에 안기어 풀싸움하던/ 단순한 옛날의 기억을 이렇게 깨뜨려좋습니까?"/ "아, 순아, 어디 갔니 옛날의 애인을 버리고 어디 갔니?/ 너는 참새처럼 아버지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너는 참새처럼 내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순아, 너는 물동이 이어줄 때,/ 언문 아는 집 각시 된다고 자랑하더니만/ 언문도 내보리고 선비도 없는 어디로 갔니?"// "멀구알 따다 팔아 열녀전을 쌓겠다더니/ 순아, 열녀전을 버리고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부엉이 운다 부엉새가 운다 뒷산곡에서/ 물레젓기 타령하던 때에 듣던 부엉새가 운다 아, 순아!"//

50장// 소년은 너무도 기막혀/ 새벽에 칠두성을 향하여/ "하늘이시여, 칼을 주소서, 세상을 무찌를/ 순이가 살고 옛날의 샘터가 놓인 이 세상을 무찌를!"//

51장// 에라, 나 보아라!/ 자유인에 탈이 없는 것이다,/ "가헌(家憲)'이라거나 '율법'이라거나,/ 모두 짓밟아라/ 뜯어고쳐라 추장이란 녀석이 제 맘대로 꾸며논 타성의 도덕률을/ 집중을 사람을 만들자,/ 순이는 아버지의 따님을 만들자,/ 초인아, 절대한 힘을 빌려라./ 이것을 고치게, 아름답게 만들 게/ 불쌍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게./ 큐피트의 지나간 뒤는 꿈이 쓰러지고,/ 박카스의 노래 뒤는 피가 흐르나니.//

52장// 몇 날을 두고 울던 소년은 열흘이 되자/ 모든 바람이 다 끊어지고 할 때/ 산새들도 깃든 야밤중에,/ 보꾸러미 하나 둘러메고 이 마을을 떠났다/ 마지막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이 땅을 안 디딜 작적으로 -/ 구름은 빌까 험하게 분주히 내왕하는데.//

53장// 소년이 떠난 뒤/ 하늘은 잊은 듯이/ 해마다 해마다 풍년을 주었다/ 때맞춰 기름진 비를, 자갈 돌밭에/ 출가한 순이의 맘에도 안개비를/ 농부들은 여전히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갔다./ 마을 소녀들은 멀리 따러 다니구요/ 언문 아는 선비 일은 차츰차츰 잊으면서.//

54장// 몇 해 안 가서/ 무산령상(茂山嶺上)엔 화차통/ 검은 문명의 손이 이 마을을 다닥쳐왔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전토를 팔아가지고/ 차츰 떠났다./ 혹은 간도로 혹은 서간도로/ 그리고 아침나절 짐승 우는 소리 외에도/ 쇠 찌적 가는 소리 돌 깨는 소리,/ 차츰 요란하여갔다,/ 옷 다른 이의 그림자도 붇고,//

55장// 마을 사람이 거의 떠날 때/ 출가한 순이도 남편을 따라/ 이듬해 여름 강변인 이 마을에 옮겨왔다./ 아버지 집도 동강(東江)으로 가고요 -//

56장// 멀구 따는 산곡에는 토지 조사국 기수가 다니더니,/ 웬 삼각 표주가 붙구요,/ 초가집에도 양(洋)납이 오르고 -//

57장// 촌부들이 떠난 지 5년/ 언문 아는 선비 떠난 지 8년.// 이것이 이 문간에서/ 서로 들추는 아름다운 옛날의 기억,/ 간첩이란 방랑자와 밀수출 마부의 아내 되는 순이의/ 아! 이것은 둘의 옛날이 기억이었다.//

3부// 58장// -- 청년/ 너무도 기뻐서/ 처녀를 웃음으로 보며/ "오호, 나를 모르세요. 나를요?"/ 꿈을 깨고 난 듯이 손길을 들어,/ "아아, 국사당 물방앗간에서 갈잎으로 머리 얹고/ 종일 풀싸움하던 그 일을-/ 또 산밭에서 멀구 광주리 이고 다니던/ 당신을 그리워 그리워하던/ 언문 아는 선비야요!"/ "재가승이 가지는 박해와 모욕을 같이하자던/ 그러면서 소 몰기 목동으로 지내자던/ 한때는 봄이 온다고 기다리던 내야요"// -- 처녀(妻女)/ "언문 아는 선비? 언문 하는 선비!/ 이게 꿈인가! 에그, 아!, 에그! 이게 꿈인가,/ 이 추운 밤에, 당신이 어떻게 오셨소,/ 봄이 와도 가을이 와도 몇 가을 봄 가고와도/ 가신 뒤 자취조차 없던 당신이/ 이 한밤에, 어떻게 어디로 오셨소?/ 시집간 뒤 열흘 만에 떠나더라더니만."// -- 청년/ "그렇다오, 나는/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에 못 이겨 열흘 만에 떠났소,/ 언문도 쓸데없고 밭 두렁도 소용없는 것 보고/ 가만히 혼자 떠났소./ 8년 동안 -/ 서울 가서 학교에 다녔소 머리 깎고,/ 그래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을 알고/ 페스탈로치와 루소와 노자와 장자와/ 모든 것을 알고 언문 아는 선비가 더 훌륭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고향이 그립고 당신을 못 잊오 술을 마셨더니,/ 어느새 나는 인육을 탐하는 자가 되었소,/ - 네로같이 밤낮 -/ 매독, 임질, 주정, 노래, 춤,-깽깽이-/ 내가 눈 깨일 때는/ 옛날이 육체가 없고 옛날의 정신이 없고 아 옛날의 지위까지.// 나는 산송장!/ 오고갈 데도 없는 산송장./ 아, 옛날이 그리워 옛날이 그리워서 이렇게 찾아왔소,/ 다시 아니 오려던 땅을 이렇게 찾아왔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 아하, 어떻게 있소, 처녀 그대로 있소? 남의 처로 있소! 흥,/ 역시 베를 짜고 있소? 아, 그립던 순이여!/ 나와 같이 가오! 어서 가오!/ 멀리 멀리 옛날의 꿈을 둘추면서 지내요./ 아하, 순이여!"// -- 처녀(妻女)/ "아니! 아니 나는 못 가오 어서 가세요,/ 나는 남편이 있는 계집,/ 다른 사내하고 말도 못 하는 계집./ 조선 여자에 떨어지는 종 같은 팔자를 타고난 자이오,/ 아버지 품으로 문벌 있는 집에 -/ 벌써 어머니질까지 하는 -/ 오늘 저녁에 남편은/ 이것들을 살리려,/ 소금 실어 수레를 끄을고 강 건너 넘어갔어요/ 남편도 없는 이 한밤에 외인하고 -/ 에그 어서 가세요 -"// "내가 언제 저 갈 데를 간다고?/ 백두산 위에 흰 눈이 없어질 때,/ 해가 서쪽으로 뜰 때 그때랍니다,/ 봄날에 강물이 풀리듯이요 -"// "타박타박 처녀의 가슴을 드디고 가던 옛날의 당신은/ 눈물로 장사지내구요./ 어서 가요, 어서 가요 마을 구장에게 들키면/ 향도 배장(鄕徒排杖)을 맞을 터인데"/ 그러면서 문을 닫는다 애욕의 눈물을 씻으면서 -// -- 청년/ "아니, 아니 닫지를 마세요,/ 사랑의 성전문을 닫지를 마세요./ 남에게 노예라도 내게는 제왕,/ 종이 상전 같은 힘을 길러 탈을 벗으려면/ 그는 일평생 종으로 지낸다구요/ 아, 그리운 옛날의 색시여!"// "나는 커졌소, 8년을 자랐소,/ 굴강한 힘은 옛날을 복수하기에 넉넉하오./ 율법도 막을 수 있고 혼도 자유로 낼 수 있소./ 아, 이쁜 색시여, 나를 믿어주구려,/ 옛날의 백분의 일만이라도."// "나는 벌써 도회의 매연에서 사형을 받은 자이오,/ 문명에서 환락에서 추방되구요,/ 쇠마치, 기계, 착가(捉枷), 기아(飢餓), 동사(凍死)/ 인혈을, 인육을 마시는 곳에서 폐병균이 유리하는 공기 속에서/ 겨우 도망하여 온 자이오/ 몰락하게 된 문명에서/ 일광을 얻으러 공기를 얻으러,/ 그리고 매춘부의 부란한 고기에서,/ 아편에서 빨간 술에서 명예에서 이욕에서/ 겨우 빠져나왔소,/ 옛날의 두만강가이 그리워서/ 당신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당신이 죽었더라면 한평생 무덤가를 지키구요/ 시집가신 채라면/ 젖가슴을 꿈으로나 만질까고,/ 풀밭에서 옛날에 부르던 노래나 찾을까고 -"// -- 처녀(妻女)/ "무얼 또 꾸며대시네,/ 며칠 안 가서 그리워하실 텐데!"// -- 청년/ "무엇을요? 내가 그리워한다고."// -- 처녀(妻女)/ "그러믄요! 도회에는 어여쁜 색시 있구 놀음이 있구,/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날마다 밤마다 퍼붓는 함박눈밖에/ 강물은 얼구요 사람도 얼구요,/ 해는 눈 속에서 깼다가 눈 속에 잠들고/ 사람은 추운 데 낳다가 추운 데 묻히고/ 서울서 온 손님은 마음이 여리다구요./ 오늘밤같이 북풍에 우는 당나귀 소리 듣고는/ 눈물을 아니 흘릴까요?/ 여름에는 소몰기, 겨울에는 마차몰이 그도 밀수입 마차랍니다,/ 들키면 경치우는-/ 단조하고 무미스러운 이 살림,/ 몇 날이 안 가서 싫증이 나실 텐데 -"// "시골엔 문명을 모르는 사람만이/ 언문도 맹자도 모르는 사람만이/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만이/ 소문만 외우며 사는 곳이랍니다."// -- 청년/ "아니, 그렇지 않소,/ 내가 도회를 그리워한다고?/ 비린내 나는 그 도회에를/ 우정을 도량형으로 싸구요,/ 명예하는 수레를 일생 두고 끄으는/ 소와 막잡이하는 우둔한 차부들이 하는 곳을."// "굴뚝이 노동자의 육반 위에 서고/ 호가사 잉여가치의 종노릇하는/ 모든 혼정(魂精)이 전통과 인습에 눌리어/ 모든 질곡밖에 살 집이 없는/ 그런 도회에, 도회인 속에,"// "데카당, 다다, 염세, 악의 찬미/ 두만강가의 자작돌같이/ 무룩히 있는 근대의/ 의붓자식 같은 조선의 심장을 찾아가라고요!/ 아, 전원아, 애인아, 유목업아!/ 국가와 예식과, 역사를 벗고 빨간 몸뚱이/ 네 품에 안기려는 것을 막으려느냐?-"/ 그러면서 청년은 하늘을 치어보았다./ 모든 절망 끝에 찾는 것 있는 듯이 -/ 하늘엔 언제 내릴는지 모르는 구름기둥이/ 조고마한 별을 드디고 지나간다./ 멀리 개 짖는 소리, 새벽이 걸어오듯 -/ 8년 만에 온 청년의 눈앞에는/ 활을 메고 노루잡이 다닐 때/ 밤이 늦어 모닥불 피워놓고/ 고리를 까슬며/ 색시 어깨를 짚고 노래부르던 옛일이 생각난다./ 독한 물지 담배 속에/ "옛날에 남 이 장군이란 녀석이……"/ 하고 노농(老農)의 이야기 듣던/ 마을 총각떼의 모양이 보인다./ 앗! 하고 그는 다시금 눈을 돌린다.// -- 처녀(妻女)/ "그래도 싫어요 나는/ 당신 같은 이는 싫어요,/ 다른 계집을 알고 또 돈을 알구요,/ 더구나 일본말까지 아니/ 와보시구려, 오는 날부터 순사가 뒤따라다닐 터인데/ 그러니 더욱 싫어요 벌써 간첩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내가 미나리 캐러 다닐 때/ 당신은 뿌리도 안 털어줄 걸요,/ 백은(白銀) 길 같은 손길에 흙이 묻는다고/ 더구나 감자국 귀밀밥을 먹는다면 -"/ "에그, 애닯아라./ 당신은 역시 꿈에 볼 사람이랍니다, 어서 가세요."// -- 청년/ "그렇지 않다는데도,/ 에익 어찌 더러운 팔자를 가지고 났담!"/ 그러면서 그는 초조하여 손길을 마주 쥔다,/ 끝없는 새벽하늘에는/ 별싸락이 떴구요 -/ 그 별을 따라 꽂히는 곳에/ 북극이, 눈에 가리운 북극이 보이고요./ 거기에 빙산을 마주쳐 두 손길 잡고, 고요히/ 저녁 기도를 드리는 고아의 모양이 보인다,/ 그 소리 마치/ "하늘이시여 용서하소서 죄를,/ 저희들은 모르고 지었으니"하는 듯./ 별빛이 꽂히는 곳, 마지막 벌판에는/ 이스라엘 건국하던 모세와 같이/ 인민을 잔혹한 압박에서 건져주려고/ 무리의 앞에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초인의 모양이 보이고요,/ 오, 큰 바람이어,/ 혼의 수난이어, 교착이어!// "버린다면 나는 죽어요/ 죽을 자리도 없이 고향을 찾은 낙인(落人)이에요,/ 아, 보모여 젖먹이 어린애를/ 그대로 모른다 합니까"/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두루루 흘렀다.// -- 처녀(妻女)/ "가요, 가요, 인제는 첫닭 울기,/ 남편이 돌아올 때인데/ 나는 매인 몸, 옛날은 꿈이랍니다!"/ 그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애처로운 옛날의 따스하던 애욕에 끌이면서,/ 그 서슬에 청년은 넘어지며/ 낯빛이 새파래진다 몹시 경련하면서,/ "아, 잠깐만 잠깐만"/ 하며 닫아맨 문살을 뜯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옥소 철비(鐵扉)와 같이 굳어졌다,/ 옛날의 사랑을 태양을 전원을 잠가둔/ 성당을 좀처럼 열어놓지 않았다./ "아, 여보 순이! 재가승의 따님,/ 당신이 없다면 8년 후도 없구요,/ 세상도 없구요"// -- 처녀(妻女)/ "어서 가세요, 동이 트면 남편을 맞을 텐데"// -- 청년/ "꼭 가야 할까요,/ 그러면 언제나?"// -- 처녀(妻女)/ "죽어서 무덤에 가면!"/ 하고 차디차게 말한다.// -- 청년/ "아, 아하 아하 ……"// -- 처녀(妻女)/ "지금도 남편의 가슴에 묻힌 산송장,/ 흙으로 돌아간대도 가산(家山)에 묻히는 송장,/ 재가승의 따님은 워난 송장이랍니다!"/ -- 여보시오 그러면 나는 어쩌고./ -- 가요, 가요, 어서 가오. 가요?/ 뒤에는 반복된는 이 요음(擾音)만 요란코 -//

59장// 바로 그때이었다,/ 저리로 웬 발자취 소리 요란히 들리었다./ 아주 급하게 - 아주 황급하게/ 처녀(妻女)와 청년은 놀라 하던 말을 뚝 그치고,/ 발자취 나는 곳을 향하여 보았다./ 새벽이 가까운지 바람은 더 심하다,/ 나뭇가지엔 덮였다 눈더미가,/ 둘의 귓불을 탁 치고 달아났다.//

60장// 발자취의 임자는 나타났다./ 그는 어떤 굴강(屈强)한 남자이었다 가슴에 무엇을 안은-/ 처녀(妻女)는 반가이 내달으며/ "에그 인제 오시네!"하고 안을 듯한다,/ 청년은 "이것이 남편인가"함에 한껏 분하였다./ 가슴에는 때아닌 모닥불길./ "어째 혼자 오셨소? 우리 집에선?"/ 처녀(妻女)의 묻는 말에/ 차부(그는 같이 갔던 차부였다)는 얼굴을 숙인다/ "네? 어째 혼자 오셨소 네?"/ 그때 장정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보꾸러미를 가리킨다/ 처녀(妻女)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이게 무언데?"하고 몸을 떤다/ 어떤 예감에 눌리우면서.//

61장// 처녀(妻女)는 하들하들 떠는 손으로 가리운 헝겊을 벗겼다,/ 거기에는 선지피에 어리운 송장 하나 누웠다./ "앗!"하고 처녀(妻女)는 그만 쓰러진다,/ "옳소, 마적에게 쏘였소, 건넛마을서 에그"하면서/ 차부도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다./ 백금 같은 달빛이 삼십 장남인/ 마적에게 총 맞은 순이 사내 송장을 비췄다./ 천지는 다 죽은 듯 고요하였다.//

62장// "그러면 끝내 - 에그 오랫던가"/ 아까 총소리, 그 마적놈, 에그 하나님 맙소서!/ 강녘에선 또 얼음장이 갈린다,/ 밤새 길 게 우는 세 사람의 눈물을 얼리며 -"//

63장// 이튿날 아침 -/ 해는 재듯이 떠 뫼고 들이고 초가고 깡그리 기어오를 때/ 멀리 바람은/ 간도 이사꾼의 옷자락을 날렸다.//

64장// 마을서는,그때/ 굵은 칡베 장삼에 묶인 송장 하나가/ 여러 사람의 어깨에 메이어 나갔다./ 눈에 싸인 산곡으로 첫눈을 뒤지면서.//

65장// 송장은 어느 남녘진 양지쪽에 내려놓았다,/ 빤들빤들 눈에 다진 곳이 그의 묘지이었다./ "내가 이 사람 묘지를 팔 줄 몰랐어!"/ 하고 노인이 괭이를 멈추며 땀을 씻는다,/ "이 사람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네!"하고/ 젊은 차부가 뒤대어 말한다.//

66장// 곡괭이와 삽날이 달가닥거리는 속에/ 거-먼 흙은 흰 눈 우에 무덤을 일궜다,/ 그때사 구장도 오구, 다른 차꾼들도, 청년도/ 여럿은 묵묵히 서서 서글픈 이 일을 시작하였다.//

67장// 삼동에 묻히운 '병남(丙南)'의 송장은/ 쫓겨가는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순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며/ '밤마다 춥다고 통나무를 지피우라더니/ 추운 곳으로도 가시네/ 이런 곳 가시길래 구장의 말도 안 듣고 -"//

68장// 여러 사람은 여기에는 아무 말도 아니 하고 속으로/ "흥! 언제 우리도 이 꼴이 된담!"/ 애처롭게 앞서가는 동무를 조상할 뿐.//

69장// 얼마를 상여꾼들이/ 땀을 흘리며 흙을 뒤지더니,/ 삽날소리 딸까닥 날 때/ 노루잡이 함정만한 장방형 구덩 하나가 생겼다.//

70장// 여러 사람들은 고요히/ 동무의 시체를 갖다 묻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71장// 거의 묻힐 때 죽은 병남이 글 배우던 서당집 노훈장이,/ "그래도 조선땅에 묻힌다!"하고 한숨을 휘-쉰다./ 여러 사람은 또 맹자나 통감을 읽는가고 멍멍하였다./ 청년은 골을 돌리며/ "연기를 피하여 간다!" 하였다.//

72장// 강 저쪽으로 점심 때라고/ 중국 군영에서 나팔소리 또따따 하고 울려 들린다.//

 



김동환(金東煥, 1901년~1958년) 시인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금성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강릉(江陵), 아호는 파인(巴人)이다.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하였고, 한국 최초의 서사시《국경의 밤》의 시인. 처음에는 신경향파에 가까운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점차 서정성에 기댄 시를 많이 썼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직후인 7월 23일 납북되었으며 1956년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위임되었다가 1958년 노동자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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