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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광균 시인

부흐고비 2021. 7. 22. 09:16

와사등(瓦斯燈) /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광장 / 김광균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體鏡)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늘어선 고층 위에 서걱이는 갈대밭/ 열없는 표목(標木) 되어 조으는 가등(街燈)/ 소리도 없이 모색(暮色)에 젖어// 엷은 베옷에 바람이 차다/ 마음 한 구석에 벌레가 운다// 황혼을 쫓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 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은수저 / 김광균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외인촌 / 김광균
하이얀 모색(慕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에/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대낮 / 김광균
칸나의 입술을 바람이 스친다/ 여윈 두 어깨에 햇빛이 곱다.// 칸나의 꽃잎 속엔/ 죽은 동생의 서러운 얼굴/ 머리를 곱게 빗고 연지를 찍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대낮/ 비인 마당 한 구석에서/ 우리 둘은 쓸쓸히 웃는다//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장곡천장에 오는 눈 / 김광균
찻집 미모사 지붕 우에/ 호텔의 풍속계 우에/ 기울어진 포스트 우에/ 눈이 나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 소음의 호수 잠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우에/ 낡은 필림 같은 눈이 나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나리는 눈발이 속삭인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눈 오는 밤의 시 / 김광균
서울의 어느 어두운 뒷거리에서/ 이 밤 내 조그만 그림자 우에 눈이 나린다./ 눈은 정다운 옛이야기/ 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 좁은 길에 흩어져/ 아스피린 분말이 되어 곱-게 빛나고/ 나타-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 그 우를 지나간다./ 눈은 추억의 날개 때묻은 꽃다발/ 고독한 도시의 이마를 적시고/ 공원의 동상 우에/ 동무의 하숙 지붕 우에/ 카스파처럼 서러운 등불 우에/ 밤새 쌓인다.//

 

시인(詩人) / 김광균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에 二천원 아니면 三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노을에 가고 없다//

詩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 김광균
朱安묘지 산비탈에도 밤벌레가 우느냐,/ 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 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보고 있다.// 가물에 들끓는 서울 거리에/ 정다운 벗들이 떠드는 술자리에/ 애달프다/ 네 의자가 하나 비어 있고나.// 월미도 가까운 선술집이나/ 미국 가면 하숙한다던 뉴요크 할렘에 가면/ 너를 만날까./ 있다라도 「김형 있소」하고/ 손창문 마구 열고 들어서지 않을까./ 네가 놀러 와 자던 계동집 처마 끝에/ 여름달이 자위를 넘고/ 밤바람이 찬 툇마루에서/ 나 혼자/ 부질없는 생각에 담배를 피고 있다/ 번역한다던/ 리처드 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 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 철쭉꽃 피면/ 강화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 좋아하던 존슨 부라운 테일러와/ 맥주를 마시며/ 저 세상에서도 흑인詩를 쓰고 있느냐./ 해방 후/ 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땅 진흙밭에/ 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 詩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 김광균
해바라기의 하-얀 꽃잎 속엔/ 퇴색(退色)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黃昏)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헤뜨리고 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무덤 위에 등불을 키려/ 나는 밤마다 눈멀은 누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빛이 파-란 산길을 넘고.//

목련 / 김광균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 지도 이제는 10여 년/ 목련은 해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을고 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이맘때면 돌아오셔서/ 꽃피는 마당을 서성거리고/ 방안의 애기들을 들여다보실까/ 손수 가꾸신 가지에 봄이 나리고/ 바람은 먼 곳에 사람 소릴 가져오는데/ 임자 없는 꽃나무 두엇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에워싸고 있고나/ 목련은 슬픈 꽃/ 사월이 오면 나뭇가지 사이로/ 어머니 백발은 어른거리나/ 지금쯤은 먼 곳에서/ 옛 마당에 핀 꽃을 잊지나 않으셨는지//

다시 목련 / 김광균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니 가신 지 스물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내리더니/ 목련은 한 잎 두 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 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 볼까//

복사꽃과 제비 -어린이날을 위하여 / 김광균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찾아왔구나.// 어린것 껴안고 뜨거운 눈물로 뺨을 부비노니/ 너희들 키워줄 새 나라 언제 세워지느냐.// 낮이면 꽃그늘에 벌떼와 함께 돌아다니고/ 밤이면 박수치는 파도 우로 은빛 마차 휘몰아가고// 거칠은 바람 속에 다만 고이 자라라/ 온 겨레의 등에 진실한 땀이 흐르는 날/ 너 가는 길에 새로운 장미 피어나리니/ 황량한 산과 들 너머/ 장미여 삼천리에 춤을 늘여라.//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돌아왔구나.//

뻐꾹새 / 김광균
애기의 무덤은/ 산너머 꽃밭/ 한쌍의 뻐꾹새가/ 지키고 있다.// 강보에 싸서/ 묻고 올 때는/ 눈물도 안내고/ 돌아섰지만// 난 지 두 이래에/ 죽어간 애기/ 젖이 먹고플 때면/ 울지나 않나.// 아무도 없는/ 비인 산에서/ 애기는 혼자서/ 뭘하고 노나.// 인왕산 허리에/ 해질 때마다/ 창문을 열고/ 바라보지만/ 애기 무덤 가는 길은/ 뵈지도 않고// 산에는 안개/ 바람소리뿐.//

향수 / 김광균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매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류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 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오기//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떨기 들국화 처럼 차고 서글프다//

뎃생 / 김광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한려수도 / 김광균
한려수도가 안개 속을 달리어간다.// 갈매기 날개 위에/ 떠올랐다 잠기어가는 섬 섬들/ 그곳에는 누가 사는지/ 한 줄기 밥짓는 연기/ 어두워오는 파도 위에 서리어 있다.// 三仙島 가까이/ 낡은 배는 기웃거리고/ 삼천포 향하여 기적을 울리고 가나/ 밀려나가고 또 되돌아오는/ 바닷물의 나즉한 통곡 소리뿐// 이 沙望 파도 끝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소리와 함께 저무는 인생 이에/ 내 조그만 思念의 배는 돛대를 내리고/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는 것일까// 해도 저물고 섬도 저물고/ 한려수도는 끝이 없고나/ 껴안고 싶은 섬들 하나 둘 사라진 뒤에/ 떼지어 오는 바람 배 난간을 때리고/ 나는 어두운 램프燈 아래 기대어 앉아/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모-든 것에 눈을 감는다.//

海邊가의 무덤 / 김광균
꽃 하나 풀 하나 없는 荒凉한 모래밭에/ 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 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며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黃土 무덤 위에 한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 잠들게 하라.//

등(燈) / 김광균
벌레 소리는/ 고운 설움을 달빛에 뿜는다./ 여윈 손길을 내어젓는다.// 방안에 돌아와 등불을 끄다./ 자욱—한 어둠 저쪽을/ 목쉰 기적이 지나간다.// 비인 가슴 하잔히 울리어논채/ 혼곤한 벼개머리 고이 적시며//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위에/ 차단--한 내 꿈 위에// 밤새 퍼붓다.//

목상 / 김광균
집에는 노처(老妻)가 있다/ 노처(老妻)와 나는/ 마주앉아 할말이 없다.// 좁은 뜨락엔/ 오월이면 목련이 피고/ 길을잃은비둘기가// 두어마리잔디밭을/ 거닐다간다.// 처마끝에등불이켜지면/ 밥상을마주앉아/ 또할말이없다.//

망우리(忘憂里) / 김광균
아 벌써 가느냐고 언제 또 오느냐고/ 무덤 속에 벗은 쓸쓸한 얼굴을 한다.//

新村서 -스케치 / 김광균
구름은 한 떼의 비둘기/ 꽃다발같이 아련하고나// 전봇대 열을 지어/ 먼 산을 넘어가고/ 늘어선 수풀마다/ 초록빛 별들이 등불을 켠다// 오붓한 동리 앞에/ 포플러나무 외투를 입고// 하이얀 돌팔매같이/ 밝은 등불 뿌리며/ 이 어둔 황혼을 소리도 없이/ 기차는 지금 들을 달린다//

성호 부근(星湖附近) / 김광균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멀―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교사(校舍)의 오후 / 김광균
時計堂 꼭대기서/ 下學종이 느린 기지개를 키고/ 白楊나무 그림자가 교정에 고요한/ 맑게 갠 사월의 오후/ 눈부시게 빛나는 유리창 너머로/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 어두운 교실 검은 칠판엔/ 날개 달린 돼지가 그려져 있었다.//

정거장(停車場) / 김광균
긴 하품을 토하고 섰던 낮차가 겨우 떠난 뒤// 텅 비인 정거장 앞마당엔/ 작은 꽃밭 속에 전신주 하나가 조을고 섰고/ 한낮이 겨운 양지 쪽에선/ 잠자는 삽살개가 꼬리를 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치어다보고 짖고 있었다.//

황혼 / 김광균
산은/ 누구의 무덤이기에/ 저무는 하늘에 늘어서서/ 말이 없고나.//

언덕 / 김광균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사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을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노신(魯迅) / 김광균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오후(午後)의 구도(構圖) / 김광균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 밖에/ 나직이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장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이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기인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커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

3·1날이여! 가슴아프다 / 김광균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나를 키워준 자장가다/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이 요람의 노래 속에 자라났다/ 아 봄은 몇 해만에 다시 돌아와/ 오늘 이 노래를 들려주건만/ 3·1날이여/ 가슴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이십칠년전 오늘을 위해/ 누가 녹스른 나발을 들어 피나게 울랴/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눈물에 어린 조국의 깃발은/ 다시 땅 속에 묻혀지는가/ 상장(喪章)을 달고 거리로 가자/ 우리 껴안고 목놓아 울자/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기적 / 김광균
잠결에/ 기적이 들린다./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중에/ 멀리서 가차이서/ 기적은 서로/ 쓸쓸한 대화를 주고 받는다.// 밤중에 들리는 기적 소리는/ 멀리 간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들을/ 생각케 한다./ 내 추억의 축대 우에/ 차례차례로/ 불을 켜고 간 사람들/ 그들의 영혼이/ 지금 도시의 하늘을 지나가는지./ 기적이 운다./ 기적은 공중에서/ 무엇을 알고 있나./ 나는 얼결에/ 잃어진 생활의 키를 생각한다./ 기적이 운다./ 발을 구른다./ 고가선 우에 걸려 있는/ 마지막 신호등을 꺼버리고/ 아 새벽을 향하여/ 모다들 더나나 보다.//

녹동(綠洞)묘지에서 / 김광균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려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荒土)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산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葬布)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 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 놨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 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죄그만 묘표(墓標) 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대화 / 김광균
머레덩쿨이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내리고/ 파랑새 한 마리 푸른 해빛을 쪼옵고 있는/ 낙엽이 그윽한 수풀 가에서/ 가엾이 두 눈이 먼 계집애를 만났습니다./ 눈부신 치맛자락 물결 우에 서리이고/ 외로운 암사슴같이 시냇가에 울고 있어요.// 그것은 어려 죽은 네 누이란다./ 이마에 작은 별을 가지고/ 두 볼이 장미같은 계집애였다./ 뚫어진 지등(紙燈) 우에 밤비 뿌리고/ 호롱불이 바위 우에 졸던 밤에/ 초라한 무명옷에 눈물 지우며 호올로 산길을 넘어갔었다./ 청동화로에 촛불이 타고/ 녹슬은 촉대 우에 함박눈이 퍼붓던 겨울 밤이면/ 흩어진 오색꿈 고요히 지켜주고/ 밤바람이 서글픈 바닷가에 나가면/ 아득한 물거품 속에서/ 나를 부르는 이가 누구입니까./ 이끼 앉은 돈대 너머 흩어진 오동잎이 곱게 빛나고/ 수풀 가에 흰비둘기 떼지어 우던 날/ 흰구름을 헤치고 가서 안 오는/ 네 아버지의 그리운 목소린 게지./ 어머니 이 화창한 하늘 아래 왜 우십니까./ 들길 우엔 하-얀 영란(鈴蘭)이 졸고/ 파도 소리가 산 너머 고요합니다./ 땅 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은빛 마차를 내어주셔요./ 흰국화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누나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렵니다.//

안개의 나라 / 김광균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이해인 시인(李海仁 詩人) 앞 / 김광균
오랫동안 편지 한 장 못 드리고 적조하였습니다./ 제가 사는 성북동 뒷산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暗鬱한 겨울을 기다리는 荒凉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편지는 몇 번 망설이다 붓을 들었습니다./ 나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로 받아 주시고 또 받아 주실 줄 믿습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신문이 없어서 가끔 일간 스포츠를 읽습니다만/ 저는 스포츠와는 담을 싼 사람이고 紙質,/ 內容(때로 여배우의 스캔들을 싣습니다),/ 독자층 (등)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신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낙엽에 대한 글은 근래에 제가 읽은 글 중에 매우 감명 깊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글을 왜 이런 품위없는 신문에 내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신문이나 마음에 드시는 잡지에 실으시는 것이 옳은 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저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만 오늘 본 글 속에 시가 세 편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보고 즐기는 것은 매우 적은데 이것으로 시를 안 쓰시고/ 散文을 쓰셨나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散文은 피하고 살아 왔습니다./ 산문을 쓰는 동안에 詩가 새어 나가 詩의 金庫가 바닥이 나는 듯한 불안 때문입니다./ 요즘 일본에서 삼십년만에 좋은 靑音에서 마리아 릴케 全集이 나와/ 큰 맘 먹고 SEA MAIL로 갖다 읽고 있습니다./ 이해인씨가 日語를 읽으시는지 아닌지 모르오나 일어를 읽으시면 一讀을 권하고 싶고/ 모르시면 지금부터라도 일어를 배우시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매우 주제넘은 소리를 쓴 것 같습니다. 어리고(?) 불쾌하신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시간이 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생활의 조그만 변화에도 詩는 萬變하는 것 같습니다./ 詩作에 겁이 나시는지 모르오나 주저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를 써 주십시오.// 저는 나이탓도 있습니다만 나의 一生에서 詩를 빼면 참 형편없는 인간이 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11월 24일 성북동에서/ 김광균 올림//

 



김광균(金光均, 1914년~1993년) 시인
본관은 웅천(熊川)이고 호는 우사(雨社)·우두(雨杜)이며 경기도 개성 출생이다. 송도상업학교(松都商業學校)를 졸업하고 고무공장 사원으로 군산(群山)과 용산(龍山) 등지에 근무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한 「가신 누님」(中外日報, 1926)을 비롯하여 「야경차(夜警車)」(동아일보, 1930) 등이 그의 습작품에 해당된다면, 『시인부락(詩人部落)』(1936), 『자오선(子午線)』(1937) 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설야(雪夜)」는 시단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게 한 것이다. 이후 『와사등(瓦斯燈)』(남만서점, 1939)·『기항지(寄港地)』(정음사, 1947)·『황혼가(黃昏歌)』(산호장, 1959) 등 3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건설실업공사를 대신 운영하며 중견 기업으로 키워내는 등 후대엔 시인의 길이 아닌, 기업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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