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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정대 시인

부흐고비 2021. 8. 9. 09:11

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는 늑대와 같다 / 박정대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사람이 웃는 줄 알았다/ 간밤 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창밖엔 눈이 내렸는지 온통 하얀데/ 아침부터 동백나무 숲이 창가로 와/ 나를 깨우며 우는 줄 알았다//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빅또르 쪼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지나온 길을 말해주었다/ 팔에 돋아난 힘줄은 알타이산맥보다 더 선명했다/ 그가 마시던 잔에는 어떤 노래가 담겨 있었던 걸까/ 그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또 다시/ 다음에 부를 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그가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다/ 간밤 늦게까지 책을 읽으며 노래를 들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세상을 향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늑대와 같다고 생각했다// 동백꽃잎 환하게 떠가는 강물을 보다가 알았다/ 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는 늑대와 같다//

시 / 박정대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키치라 해도 좋소/ 무더운 여름밤을 건너가기엔 그 말투가 좋았던 것이오/ 자정이 넘은 코케인 창가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적막한 거리 풍경이 좋았던 것이오/ 햇빛 씨의 열기가 대낮의 조국을 뜨겁게 달구고 그 열기는 밤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소/ 111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폭염이라 했소/ 폭탄을 맞은 폐허의 도시처럼 허공에 떠도는 풍문은 흉흉했소/ 어디를 가도 숨이 가빠오는 숨 막힐듯 뜨거운 열기의 나날이었소/ 111년 전이면 1907년인데 나의 말투는 1907년의 고독 씨처럼 어느덧 그 시절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오/ 러브가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시는 또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조국이 이토록 뜨거운데 내가 어찌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를 쓸 수 있겠소/ 밤이면 코케인에서 술을 마셨소/ 창가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나는 좋았소/ 그렇게 여름을 지날 수만 있다면/ 말투야 어떻든 괜찮았던 거요/ 술을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 새벽이면 생각했던 거요/ 나는 줄곧 적막한 새벽의 길을 걸어/ 거대한 고독의 시간을 횡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대낮과 제국의 반대편이었고/ 오롯이 자기 꿈 동지였다는 것을 말이오/ 검은 말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 밤이었소/ 여전히 깊고 어두운 검은 밤이오//

유령(劉伶) / 박정대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生.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座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시인박멸 / 박정대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간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모든 시는 끝내 미완으로 남으리니/ 커피를 마신 심장에 담배 연기를 풀어 시로 만들라/ 설령 그것이 사제폭탄이 되더라도/ 그대가 폭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니/ 커피와 담배가 만드는 시/ 침묵이 만드는 열렬한 고독작렬의 시를/ 그대는 오늘도 세상의 창가에 두고 가느니/ 세상에 창궐한 시인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족의 시인이 탄생하리라//

내 청춘이 지나가네 /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앵두꽃을 찾아서 / 박정대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꽃을 보기에 그대만한 장소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사 고요히 철들어 나, 앵두꽃을 보러 그대에게로 가노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실은 없고 그 사실 앞에서 앵두꽃이 피지 않는 곳 또한 없음에랴//

그대의 발명 / 박정대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 박정대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하얀 돛배 / 박정대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 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 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사곶 해안 /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홍명희 생가 / 박정대
퇴락한/ 홍명희 생가에 들어서니/ 먼저 날 맞아주는 건/ 박쥐 한 마리// 잡초 무성한 앞뜰엔 옥잠화 몇 송이// 뒤뜰엔/ 두 개의 우물과/ 한 개의 펌프// 이곳에서도/ 한때는 부용꽃/ 환하게 피었으리// 아, 벽초/ 그대는 언제/ 마음까지 월북했던가// 그대가 벗어놓고 떠나버린/ 이 地上의 남루한 외투 한 벌// 그대 생가에 와서/ 난 비로소 그대 생각// 삐걱이는 대청마루에 앉아서야/ 볕 잘 들던/ 그대 문장 생각//

음악들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결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애도 일기 / 박정대
빛이 슬픔에 닿자 장마가 끝났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 장마가 끝나자 애도 일기가 시작되었다/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잔다리 위구르족 마을에서는 양 몸통에/ 커다란 막대기를 끼운 채 양 통구이를 만들고/ 여인네는 달군 화덕에 반죽을 붙여 낭을 굽고 허브 차와 호두로 저녁을 준비하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국수를 즐겨 먹는 위구르족은 소금만으로 간을 한 국수에/ 허브로 만든 양념장을 넣고 담백하고 조촐한 저녁을 먹지/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떨어진 후 밤 열시쯤 저녁을 먹는다네/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어떤 위구르 가족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별빛처럼 반짝이는 삶을 나누네/ 위구르족의 수염은 양의 수염/ 양의 생애가 끝나자 수염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고독이 출렁거리는 슬픔에 닿자 저녁이 되었다/ 고독의 라마단은 그때부터 시작되므로 태풍이 몰려오는 밤의 한가운데 앉아/ 누군가 종교처럼 술을 마시지/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올라올 때 인류의 마지막 열차처럼 덜컹거리는 건물의/ 이 층 창가에 앉아 미친 듯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지/ 태풍이 몰려오는 검은 밤에는 흑맥주를 마시자/ 지금은 한 마리 태풍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고독 곁을 지나가는 자정/ 저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애도의 한 방식/ 수염이 돋아난 천사가 인류의 마지막 이 층 창가에 앉아 여전히 중얼거린다/ 이것은 밤새 태풍에 펄럭이는 한 마리 시/ 그것은 애도의 대상/ 저것은 송강호의 염소수염//

마두금(馬頭琴)* 켜는 밤 /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메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래된 해방구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의 언덕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두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 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놓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몸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 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장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이 갈증처럼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으로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의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마두금 : 악기의 끝을 말 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장만옥 / 박정대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 박정대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 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의열(義烈)하고 아름다운 / 박정대
낡은 흑백사진 속의 얼굴처럼 흐린 하늘, 톱밥난로 속에서 의열의열 소리를 내며 바알갛게 타오르는 불꽃들/ 터져 나오는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가루약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용의 뿔처럼 흩어져 간 동지들을 생각한다/ 자꾸만 기침이 난다 말을 한다는 건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눈이 내릴 듯 달무리 가득한 밤 그는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구름이 운반하는 음악들 어쩌면 아침이 오기 전에 눈발로 떨어질 것이다/ 마음은 늘 절벽 같아서 한 발만 내디디면 지상에서 아름답게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다는 건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눈은 밤새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처럼 내려서 무장무장 쌓이는데 허공을 가로지르며 지상으로 걸어오는 눈발들, 하얗게 진군하는 푸르디푸른 불꽃의 마음들/ 누군가 밤새 기침을 하더니 기침은 허공으로 다 흩어져 버렸나/ 허공으로 흩어진다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생각을 좇아서 다다른 아침/ 이토록 광활한 고독과 침묵은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아름다운 걸까/ 아침의 방문을 열면 봉창을 통과한 햇살이 환하게 펼쳐진 한 장의 들판을 물고 다시 날아오른다/ 오 밤새도록 내리고 다시 날아오르는 의열하고 아름다운 이것은 무엇인가//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 아무르강(헤이룽강:흑룡강) : 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하여 중국 둥베이의 국경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타타르 해협으로 들어가는 강. 헤이룽강은 상류의 실카강과 오손강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세계 8위)가 된다. 러시아어 '아무르'는 에로스라는 뜻으로 같은 강을 두고 중국인들이 '검은 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데 반해 러시아인은 '사랑의 신'이라 부르고 있다.
* 정암사(淨巖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 갈래사(葛來寺)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 :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여래의 사리를 수마노 탑에 봉안하고, 이를 참배 하기위해 건립한 법당이다. 적멸보궁이란 모든 바깥경계에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암사는 '적멸궁'이라고 하고 있다.
* 2005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슬라브식 연애 / 박정대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륙 산간 지방에 내린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양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나는 연애 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 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 하는 것이다/ 천 일 밤낮을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 박정대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이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그래피티 / 박정대
스웨터는 점진적으로 고쳐지고 있소/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나는 문득 불란서 고아요/ 낡은 밤에 녹색 의자에 앉아 어둠 속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보고 있소/ 눈이 내리는 밤이면 어둠은 한 마리 젖은 짐승처럼 꿈틀거리오/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처럼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만나 몽마르트르언덕 위를 뒹굴고 있소/ 화목난로 불꽃이 파놓은 다락방 동굴의 밤이오/ 멀리 있는 중국집은 중국풍으로 눈을 맞고 가까이 있는 빵 가게는 인디풍으로 눈을 맞고 있소/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나는 지금 불란서 고아요/ 낡고 오래된 밤에 앉아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소/ 눈은 허공에서 멈칫거리다 또 다른 공허로 이동하오/ 이동하는 눈을 바라보는 눈은 검고 아름답소/ 검고 아름다운 그대의 눈동자를 생각하오/ 낡고 오래된 검은 밤에 앉아 나는 불란서 고아처럼 그대를 생각하오/ 검은 밤 검은 말을 타고 떠난 그대를 생각하오/ 육체는 육체에 부딪혀 맑은 종소리를 내고 영혼은 또 다른 영혼에 부딪혀 하얀 눈송이로 돋아나는 밤/ 차가운 밤의 계단에 앉아 나는 혁명적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오/ 눈이 내리오 눈은 밤새 눈의 언어로 속삭이고 심장은 밤새 눈의 속삭임을 듣고 있소/ 전직 천사가 피워 올린 담배 연기는 지상의 깃발처럼 펄럭이고 밤새 다락방으로 내려 쌓인 눈송이들은 천창 위에 앉아 겨울의 시를 쓰고 있소/ 모두가 뒷골목과 바람의 고아요/ 마치 우리가 우리의 고아이듯/ 끝내 나는 나의 고아요/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낡은 밤을 수선해 들으며 나는 문득 불란서 고아요/ 낡고 오래된 검은 화폭에 그려지는 그래피티의 밤이오//

불란서 고아의 지도 / 박정대
파리 리슐리외도서관에 앉아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리다 보면 밤이 오고 있을 게요/ 어둠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저녁이면 나는 그대와 함께 따스한 불빛이 있는 주점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을 게요/ 11월의 파리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가끔은 눈발이 날리지만 이곳엔 영혼의 동지들이 있으니 그리 춥지는 않을 게요/ 지금쯤 카페 로통드에선 모딜리아니가 손가락 구멍이 뚫린 장갑을 끼고 장 콕토의 초상화를 그리고/ 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를 꾀어내 술을 마시기 위해 클로즈리 데 릴라로 가고 있을 게요/ 로트렉은 물랭루주로 가기 위해 몽마르트르언덕을 천천히 내려오고 위트릴로는 세탁선과 테르트르광장을 지나 포도밭 쪽에 있는 라팽 아질로 가고 있을 게요/ 밤의 도서관에 앉아 불란서 고아의 지도를 그리다 보면 밤하늘엔 달무리가 돋아나고/ 퓌르스탕베르광장 들라크루아박물관 다락방을 빠져나온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몽파르나스 쪽으로 산책을 시작할 게요/ 되 마고와 플로르를 지나온 바람은 몽파르나스쪽으로 불고/ 지금 몽파르나스엔 비가 내리고 비는 잠시 후 눈발로 바뀌겠지만/ 몽파르나스엔 아직도 망명 중인 레닌이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카페 르 돔에 들러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있을 게요/ 그 옆엔 카페 쿠폴이 있지요/ 목재와 석탄을 쌓아두던 창고를 개조한 예술가들의 카페/ 공연을 할 때면 400석가량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붉은 차양 모자를 쓴 쿠폴/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쿠폴에서 공연을 해요/ 공연이 끝나면 ‘밤의 허기’라는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고 밤새 술을 마셔요/ 여전히 퓌르스탕베르광장엔 비가 내리고 밤이 깊어지면 비는 눈으로 바뀌겠지만/ 누군가 두고 온 다락방은 밤새 또 누군가의 내면처럼 젖어가겠지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 올 때까지//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 박정대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네/ 솔잎에 맺힌 빗방울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네/ 어제는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를 주문하고 오늘 아침엔 자전거로 출근하는 길에 은행에 들려 입금하였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란 뭔가?/ 오늘은 날이 흐리네 흐리다 맑기도 하네/ 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 거라는데 제일 싼 프랑스를 주문하고 그리운 그대에게는 여전히 가지 못하네/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네/ 솔잎에 맺힌 빗방울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네/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프랑스가 있고/ 동네에서 가장 먼 곳에는 봄 같은 그대가 있을 테지만/ 동네에 홀로 남아 사막의 별이나 바라보고 있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네온사인 간판을 단 별들의 주점을 바라보고 있네/ 보지만 말고 이제는 가야지/ 이이제이(以荑制荑)할 바람을 타고 가야지/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네/ 솔잎에 맺힌 빗방울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네/ 후두둑 후두둑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처럼/ 솔잎에 맺힌 빗방울처럼//

혁명은 한 마리의 감정 / 박정대
나는 걸어가면서 파리 대평원을 흡혈하였다, 파리의 하수구는 그때 생겨났다/ 걸어가는 풍경들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을 때마다 복사꽃 복사꽃이 피었다,/ 페르 라셰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르/ 생 라자르 역은 중국식당 옆에 있었다/ 중국식당은 작은 타박 옆에 타박은 복숭아나무 옆에 있었다/ 복사꽃이 피어날 때 설거지를 시작하여 복사꽃이 떨어질 때 설거지를 마쳤다/ 지상에 놓인 수만 개의 혈관을 따라 나는 그대 속으로 잠열(潛列)하였다/ 담배 연기는 내 영혼의 복사꽃/ 혁명은 한 마리의 감정/ 파리 대평원의 밤하늘엔 잠열(潛列) 같은 초저녁 별들이 총총/ 밤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리는 별들이 흐르는 인간의 아름다운 하수구였다/ 전직 천사의 입장에서 볼 때 파리라는 도시는 이렇게 발명되었다//

로맹 가리 / 박정대
바람이 분다, 사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두 개의 중국인형이 있는 되 마고에 앉아 그대를 생각했어/ 저녁이었는데, 적막에 관한 아주 길고 느린 필름처럼 파리의 석양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석양이 오다니!/ 나는 환각과 착각 속에서 백야를 봤어/ 결전의 날, 마침내 나는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그대가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전의 날은 왜 또 그렇게 쓸쓸한 적막처럼 내게로 불어왔던 것인지// 저녁이었는데, 그대 떠나고 없는 거리는 붐비는 상념처럼 쉽게 어두워지지 않았어/ 이상하게도 어두워지지 않던 밤 9시의 뤼 뒤 바크에서, 뤼 뒤 바크의 적막 속에서, 뤼 뒤 바크의 적막을 서성거리다가 어느새/ 나는 두 개의 중국인형에 당동했던 거야// 저녁이었는데, 내가 마시는 크로넨버그 1664 맥주의 거품처럼/ 파리의 밤은 도대체 어두워지지 않았어// 낮에 다녀온 진 세버그의 무덤에 그대 대신 짧은 편지 한통을 남기고 왔지/ 그녀에게 할 말이 잇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았어/ 고독이 완성된다면 그건 바로 무덤에서일 거야/ 두 겹의 삶이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곳도 끝내 그곳이겠지// 저녁이었는데, 나는 유령처럼 두 개의 중국인형 카페에 앉아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당의 종루를 바라보며 구원받지 못할 영혼처럼 술을 마셨지// 죽음 이후에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한잔 마실 수 있는 술집이 있다면 기꺼이 나는 그 쪽으로 가겠어!// 바람이 분다, 누군가는 살아 있는 것이다/ 닫혀 있던 시간의 창문을 열면 고독한 그대 눈동자의 별빛들이 보여/ 떠도는 별들, 메마른 생의 대지를 다 읽으며 지나온 그대의 쓸쓸한 눈빛// 저녁이었는데, 그대가 벗어놓고 떠나버린 허름한 대지, 헐렁한/ 대기 속에서 두 개의 중국인형처럼 나는 두 개의 상념에 잠겨 있었어// 육체의 고통, 육체의 몽상/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등의 불꽃들이 뛰는데, 뛰어오르는데 내가 찾아 헤매는시냇물 같은 영혼은 어디에 가서 여치들하고나 놀고 있는 것인지// 저녁이었는데, 바라보던 풍경에서 문득 시선을 거둬 오래도록 그대 눈동자를 바라보는 건 지금 그곳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풍경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별빛을 향해 담배를 피워 무는 건 그대에게 고백할게 있다는 뜻이지/ 아, 나도 미친 듯이 고요하게 살고 싶어라!// 저녁이었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의 문턱에 잠시 상념을 걸어놓고 이렇게 담배 연기로 그대 이름의 시를 써본다// 로맹 가리, 이런 게 시가 되지 않으리란 걸 나는 알아// 시가 아니라면 넋두리겠지/ 이 세계의 내면을 향한 웅얼거림 같은 거/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 삶에 대한, 아주 고요한, 한 잔의 적막 같은 거// 그러니까 지금은 그대 고독이 키운 영혼의 늑대를 우우우 달빛의 울음소리를 내며 지상의 어깨 위로 귀환하고 있는 깊은 밤이야// 두 개의 중국인형이 깊은 어둠을 내려다볼 때면 이곳에도 밝은 달이 뜨고 지구의 푸른 언덕 위를 넘어가는 두 개의 그림자를 볼 수 있으리// 바람이 분다, 우리는, 아무튼, 살아낸 것이다//

나타샤 댄스 / 박정대
나타샤가 춤을 춥니다. 아주 깊은 러시아의 밤이구요/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는 난로를 지피고 물을 끓입니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서서히 끓어오릅니다, 물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구요/ 흰 눈이 이렇게 펑펑 쏟아지는 밤이면 고통이며 고독도 눈발에 묻혀 고요한 잠에 듭니다/ 이곳에서는 어디에도 세월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월은 아무도 모르게 자작나무 속에서 자작자작 자신을 쌓아갑니다/ 땔감이 아주 많이 쌓여 있는 훌륭한 밤입니다/ 겨울 내내 땔 수 있는 땔감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지요/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타샤는 밤새 춤을 춥니다, 이곳은 물론 눈이 펑펑 내리는 러시아의 깊은 밤이구요/ 톨스토이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숲 속에 누워 책을 읽습니다, 레핀 삼촌은 온종일 화덕 옆에서 그림을 그리구요, 나는 오고 가는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기적적으로 평화롭습니다/ 시베리아 호랑이들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갑니다/ 먼 별빛들도 지상과는 아주 먼 곳에서 그들의 길을 따라 고요히 흘러갑니다/ 잘 마른 나무들은 밤새 아궁이에서 그들만의 음악을 연주하구요/ 나타샤가 춤을 춥니다, 물론 여기는 러시아의 깊은 밤이구요, 펑펑 눈이 쏟아지는 러시아의 환한 밤이구요//

생의 접경지대 / 박정대
낯선 날들이 다가오리/ 오래도록 떠돌던 마음의 국경 이제사 떠나왔으니/ 낯선 바람들이 몰고 가는 말발굽 소리 생의 접경지대를 떠도는데/ 처음 보는 풀잎들과 처음 듣는 시냇물 소리/ 낯선 날들이 다가와 새롭게 천막을 치며 고요하고 섬세한 부족을 이루리/ 떠돎이 이루는 그때 그때의 생이 소리없이 이어지리, 늑대들을 기르며/ 자작나무 숲을 지나 또 다른 생으로 나아가리, 구름들과 함께/ 흙냄새와 더불어 바람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리/ 생은 움직이는 것, 바람과 더불어 나아가는 것/ 낯선 날들이 다가와 우리를 축복할 때/ 생의 변방을 떠돌던 마음이/ 이제사 마음의 국경을 버리고 바람 속에 섰나니/ 그대는 흘러가는 구름/ 그대는 내 머리 위에 흩날리는 낙엽/ 낯선 날들이 다가와 그대와 나는/ 생 속에서 사랑도 모르고 사랑하리/ 서로의 냄새에 취해 아,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하리/ 사랑하며 걸어가리/ 걸어가며 노래하리/ 마음의 국경선을 지나/ 이제사 우리, 가까스로 생의 접경지대에 당도했으니//

베티와 나 -영화 37도 2부 / 박정대
조금은 어두운 대낮/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 아, 난 어지러워/ 무너진 언덕 너머에는/ 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 신열의 바다가 있네/ 어디라도 가려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 있네/ 베티,/ 내 푸른 현기증과/ 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 베티 기억하고 있니/ 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 그 아래로만 흐르던 물결,/ 물결 속의 달/ 바람불어,/ 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 함께 출렁거리던/ 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 기억해?/ 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37도 2부의 숨결들/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조금은 어두운 대낮,/ 막판의 희망이/ 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 박정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기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을 찾아 나는 나섰다/ 그런데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나 낯설었는데, 어쨌던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네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랬동안 불멸을 꿈꾸어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쉬고 존재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 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의 술고래 낚시 / 박정대
저 숲속 깊은 곳으로 가면 무가당 담배 클럽이 있다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애연가 클럽으로 알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끊으려는 금연 동맹 정도로 아는데, 무가당 담배 클럽은 도심에 호랑이를 풀어놓기 위한 시민 연합과 차라리 그 성격이 비슷하다네, 얼음이 물이 되고 종달새가 우는 봄이 오면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 봄을 맞이하여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지난겨울 클럽에서 읽던 책들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서 떡을 만들어 먹는 일,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 맥주의 강을 망치로 부수어 마시는 일 그리고 그 강물 속에서 술에 절어 겨울잠을 자던 술고래들을 낚시하는 것, 그렇다면 술고래들의 겨울잠이 무가당 담배 클럽에 무슨 해를 끼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얼음 맥주의 강에서 얼음장을 깨고 술고래들을 낚는 일은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라네, 술고래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무가당 담배 클럽의 마을에는 기차가 드나드는 작은 역도 하나 생겨났지, 하루에 두 번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올 때면 술고래들은 잠에서 깨어나 펄쩍펄쩍 뛰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거라네, 술고래들은 아마 도시로 팔려나가 사람들을 위해 얼음 맥주의 호수를 망치로 부수는 일을 하겠지, 더러는 커다란 수족관 같은 데서 술 마시고 담배 피지, 더러는 커다란 수족관 같은 데서 술 마시고 담배피우는 연기를 하기도 하겠지,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는 올해도 상당한 숫자의 술고래를 도시와 계약했다니, 얼음이 물이 되는 봄이 오면 무가당 담배 클럽의 술고래 낚시가 더욱 바빠지겠네//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고대문학 신예작가상,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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