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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권혁웅 시인

부흐고비 2021. 8. 6. 09:05

황금나무 아래서 / 권혁웅
황금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세계수, 하늘을 향해 직립한 채/ 부채 모양의 금빛 엽편(葉片)들을 쏟아낸다// 나무가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저 금빛 환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무 위에 집을 짓는 족속이었을까// 아까부터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제단에 앉아 있다 저 신성한 이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가 나에겐 없다// 다만 나는 내 안에 기식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금빛 바람 위에 실어 보낼 뿐이다// 내 몸을 온통 물들이는 황금나무를 보며/ 나도 몇 번의 제의를 거쳐 온 듯하다/ 마르고 헐벗은 가지가 푸르고 노란빛으로/ 거듭 생을 치장하는 동안/ 내게도 두어 편 격절과 비약의 연대기가 있었다/ 이제 나무에 기대어 나는 내가 꾼 꿈들이/ 신화의 어느 먼, 지금은 잊혀진/ 하나의 가계(家系)였다고 생각하며// 투두둑 떨어지는 황금의 알들을 줍는다/ 저것들은 버리면 새들이 날개를 덮거나/ 미소가 피해가리라 진동하는 냄새는/ 새로운 탄생의 후경(後景)이었던 셈,/ 나도 언젠가 난생(卵生)의 꿈을 꿀 것이다//

버려짐 -야생동물 보호구역 9 / 권혁웅
1// 운명에 팔복(八福)이 있다면 팔자에는 팔고(八苦)가 있다 그를 만난 게 전자라면 그와 헤어진 건 후자다 텍스스뿔도마뱀(Phrynosoma cornutum)은 천척이 다가오면 꼼짝 않고 있다가 눈에서 피를 쏟는다 심하면 제 몸의 4분의 1까지 내다 버린다 난 이미 아프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다 네가 오면 피눈물이 아니라 순도 100프로 선지를 흘리며 울겠다는 거다 불쌍한 자해공갈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차바퀴들이 속도를 줄이지는 않는다// 2.// 이불 속에서도 열불은 난다 폼페이벌레(Alvinella pompejana)는 수심 3,000미터의 열수분출구 옆에서 산다 유황과 중금속을 뒤집어쓰고, 펄펄 끓는 물에 담겨, 칠흑 어둠 속에서, 엄청난 압력을 견디며 산다 제가 무량수불도 아닌데, 이불 밑에 불가마를 깔아 놓고 평생을 부다듯하겠다는 것다 네가 올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자리보전하고 누웠다고 해서 분가한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며느리와 명절날에만 온다//

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쳐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거기에 토해 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풀잎처럼 눕다 / 권혁웅
풀잎에 한 여자를 빗댄 적이 있었지 아무도 지나치지 않는 새벽이었어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내게 휘청하며 몸을 기댄 그런 풀잎 말이지 거기에도 길이 있고 여관이 있고 폐허가 있었어 그녀를 한번 건드리면 그 세상 다 쏟아졌을 거야 나는 조심조심 골목길을 돌아나왔네// 가령 먼지처럼 쓸쓸한 날에는 그 풀잎이 생각나곤 해 가볍게 가볍게 그 여자위에 앉고 싶었지 더럽히고 싶었어 둥글고 푸른 등허리를 내가 보아버렸던가? 골목은 돌아가도 돌아가도 끝이 없고 풀들은 나를 전송하며 길가에서 손을 흔들었다네// 지금도 골목을 돌아가면 그녀가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릴 것 같아 푸른 옷소매가 가끔 꿈에서 보여 나도 풀잎처럼 가만히 눕고 싶었어 그러면 그녀는 제 몸의 무늬를 보여주겠지 그 무늬 속에 숨고 싶었어 그래 맞아 나는 물그림으로 된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네//

수면 / 권혁웅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입술 3 / 권혁웅
한 겹 풍경을 열고 들어가면 촘촘히 심어진 가로수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지나간 쪽으로 나무들이 앞 다퉈 잎을 내곤 했습니다 웃음이거나 울음인 것들을 매달고 나무는 지금 무성합니다 거기엔 분절도 단락도 없어서, 물관을 바쁘게 오르내리는 홀소리들만 분주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내 손끝은 생장점을 품은 듯 저려왔지만, 그것이 목측目測을 가로막는 목책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촘촘하던 이유마저는 몰랐습니다//

수국 -젖가슴 6 / 권혁웅
귀신사(歸信寺)* 한구석에 잘 빨아, 널린 수국(水菊)들/ B컵이거나 C컵이다 오종종한 꽃잎이/ 제법인 레이스 문양이다 저 많은 가슴들을 벗어 놓고/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묻지 마라/ 개울에 얼비쳐 흐르는 꽃잎들을/ 어떻게 다 뜯어냈는지는 헤아리지 마라/ 믿음은 절로 가고 몸은 서해로 가는 것/ 땅 끝을 찾아가 데려온 여자처럼 고개를 돌리면/ 사라지는 것/ 소금 기둥처럼 풀어져 바다에 몸을 섞는/ 그 여자를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도금한 부처도 그대 눈빛도 다 서향(西向)이지만/ 그 여자, 저물며 반짝이며 그대를/ 단 한 번 돌아볼 테지만//
* 전북 김제 모악산 기슭에 있는 절 이름.

호구(糊口) / 권혁웅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 / 권혁웅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대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기침의 현상학 / 권혁웅
할머니가 흉곽에서 오래된 기침 하나를 꺼낸다/ 물먹은 성냥처럼 까무룩 꺼지는 파찰음이다/ 질 낮은 담배와의 물물교환이다/ 이 기침의 연대는 석탄기다/ 부엌 한쪽에 쌓아두었다가 원천징수하듯/ 차곡차곡 꺼내어 쓴 그을음들이다/ 할머니는 가만가만 아랫목으로 구들장으로/ 아궁이로 내려간다 구공탄 구멍마다/ 폐(廢), 적(寂), 요(寥) 같은 단어가 숨어 있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가끔/ 일산화탄소들이 비눗방울처럼 올라온다/ 할머니, 기침 하나를 펴서 아랫목에 널어둔다/ 장판은 담뱃재와 열기로 까맣고 동그랗다/ 기침을 꺼냈는데 폐 전체가 딸려 나온 거다/ 양쪽 폐를 칠하느라 염료를 다 써서/ 할머니 머리는 온통 하얗다//

도봉 근린 공원 / 권혁웅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즈음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두 손 두 발 다 들고 / 권혁웅
연포탕 속의 낙지가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냄비 바깥으로 손을 뻗는다 아니, 발이었나?/ 잠시 후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쫄깃한 육신을 탕 속에 흩뿌릴 테지만/ 그 전에 프리즌 브레이크/ 파이널 시즌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도 한 때,/ 그런 탈출을 꿈꾼 적이 있었지/ 멸치 육수가 흐를 듯 후덥지근한 솦속 빈터였다/ 뼈도 연골도 없이 그녀에게 매달렸지만/ 그녀가 앉은 벤치는/ 나박나박 썬 무처럼 너무 담백했다/ 우리 그냥 친구 하자고/ 우정이 애정보다 좋은 열두 가지 이유를 말하는/ 그녀의 입은 청량고추만큼이나 매웠다/ 냄비 속 연옥을 빠져나갈 수 없음을 느끼고/ 낙지는 마지막 먹물을 뿜는다/ 눈앞이 캄캄해진 내게/ 슬라이스로 썬 마늘을 투척하는 그녀/ 이게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네/ 우정과 정력의 모순형용 앞에서/ 후후 불며 나를 들이키는 그녀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파와 마늘 사이로 숨는 낙지와 나와 쑥스러운 쑥갓과/ 연포탕에는 그렇게뿐이 모여 있었다//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 권혁웅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 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시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피안에서 취객의 등처럼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스파이더맨 / 권혁웅
1// 거미인간에 관해 말하자 넓은 마당의 위아래, 전후좌우, 동서남북을 샅샅이 훑던 그의 거미손에는 걸리지 않는 게 없었다 그가 손바닥을 펴면 문짝, 신문지, 고장 난 석유난로, 콜라병 같은게 손에 와서 척척 붙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리어카를 끌고 그는 수도 없이 골목을 오르내렸다// 2// 넓은 마당은 방사형으로 가지를 친 수많은 길과 골목의 중심이다 거기서 동쪽 능선을 넘어가면 보문사가, 남쪽 고갯마루를 타넘으면 배성여상이, 서쪽 산정에 오르면 낙산아파트가 나온다 북쪽 길로 내려가면 삼선초등학교다 거기에 수많은 골목과 골목이 들러붙어 새끼를 쳤다// 3//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떤 이는 인자仁子다 건너편 등성이에 사는 성신여중 학생이다 좁다란 시멘트 길을 걸어 올라가던 그 아이의 실루엣을 이쪽 건너편에서 볼 때마다, 나는 거미인간이 되고 싶었따 그를 따라 리어카를 따라 소녀의 집까지 가보고 싶었다 다족류多足類의 발하나를 거기 걸쳐두고 싶었다// 4// 거미인간은 넓은 마당 한구석에 모아온 것들을 쌓아두었다 그 아이를 고치처럼 둘둘 말아 종이뭉치와 고철더미와 나무토막 옆에 두었다 이십 년 동안 모아두었다 이십 년 동안 소녀는 나처럼 낡아갔을까 거기서 방문을 드나들고 폐지를 학교에 내고 난로를 쬐고 콜라를 마셨을까// 5// 모든 길은 넓은 마당으로 모이고 넓은 마당에서 갈라졌다 우리는 골목에서 태어나 넓은 마당으로 갔다 우리는 거기서 걸렸다 거미인간만이 보문사와 낙산을, 배성여상과 삼선초등학교를, 나와 안자 시이를 넘나들었따 그는 자유인이었고 독재자였다 그의 많은 재산 가운데 약간을 대출 받아 이렇게 쓴다//

드래곤 / 권혁웅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산 186번지 넓은 마당 솜틀집에는 용구 엄마, 용구 아빠와 용구, 용철이와 용숙이가 살았다 장남 龍哲이는 현명하고 차녀 龍淑이는 현숙했는데 막내 龍九는 바보였다 이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 집 앞에서 자주 영구야 놀자, 노래를 불렀다 용구 엄마가 솜 막대를 들고 뛰어나오곤 했다// 용구 아빠는 술을 먹으면 솜 트는 기계가 솜을 부리듯 아이들을 편편해질 때까지 두들겼다 세 아이가 이불처럼 넓은 마당에 널리곤 했다 솜틀집에는 먼지가 많았고 솜 트는 기계는 쉬지 않고 이불솜을 지어냈고 이불솜은 구름처럼 푹신했다 용구네 아이들은 똘똘해서 모두들 그걸 타고 승천할 거라고 했는데,// 먼저 승천한 사람은 용구 아빠였다 어느 겨울, 눈이 많이 온 날, 용구 아빠는 얼어붙은 몸을 소주병 곁에 두고 사라졌다 그가 누워 있던 눈밭도 구름처럼 자욱했다고 해야 할까 세 갈래 길이 모이는 넓은 마당, 한 길은 산정으로 한 길은 개천으로 한 길은 대처로 이어졌다 용구 아빠가 산정으로 난 길을 떠메고 갔다// 개천으로 난 물길을 타고 간 사람이 용숙이었다 바다로 간 물길을 따라 일본까지 둥둥 떠갔다고 하는데, 거기서 물길을 몸으로 받아 퉁퉁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매달 십 오만 원이나 부친다고 용구 엄마가 자랑할 때, 모두들 여기가 개천이라고 한탄들이었다 솜틀집에선 상서로운 먼지가 햇살을 받아 뛰어 놀았고 용숙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돈으로 당당하게 대처에 가갔던 용철이는 뱀처럼 비실비실 넓은 마당에 돌아왔다 세 번 대학에 떨어지고 군대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 후에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안방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가 아무도 못 본 사이에 이불을 타고 날아올랐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솜틀집을 헐어 솜먼지들이 날아오를 때에도 거기 없었다니까 맞는 얘기 같다// 이번엔 용구가 대처로 떠났다 솜이불 위에서 놀다가 바늘이 몸이 들어왔다고 한다 넓은 마당에 그때까지 본 차 중에 제일 큰 차가 올라와서 용구를 태워갔다 용구 엄마가 넓은 마당이 떠나가라 울었으나 솜틀집에는 뼛가루 같은 먼지만 날렸을 뿐이다 넓은 마당에서 나간 길이 세 갈래였으므로 용구 엄마는 집을 지켰다// 용구 엄마는 나이를 먹으며 점점 작아져 갔다 처음엔 이불만 했다가 엉킨 이불솜만 했다가 부풀기 전의 목화솜만 해졌다 너무 작아져 나중엔 솜사탕을 만들어 파는 양철통에 담길 정도라고 했다 사람들은 결국 용구 엄마를 잊었으나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산 186번지 그 집을 여전히 용구네라 불렀다//

슈퍼맨 / 권혁웅
1/ 넓은 마당에 버드나무슈퍼가 있었다 주인은 대단한 사내였다 낮에는 백발에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새까만 머리에 꼿꼿한 허리로 일어섰다 주인이 둘이고, 둘이 父子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버드나무슈퍼에서는 밤낮이 바뀌었을 뿐인데 25년이 흘렀다// 2/ 봄이면 젊은 주인이 나무를 탔다 간판을 가린다며 짧고 굵은 가지를 가리지 않고 잘라냈다 몸통만 있는 버드나무, 늘어진 가지로 마당을 비질하지 못하는 버드나무, 평상에 그늘을 들이우지 못하는 버드나무, 슈퍼란 이름에 세들어 사는 버드나무가 거기에 있었다// 3/ 하얀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있었다 낮에는 며느리, 밤에는 아내가 되었던 여자, 버드나무 늘어진 가지를 치렁치렁 머리에 붙인 여자였다 그런던 그녀가 미련 없이 출가했다 단골손님들이 여자만 찾은 게 문제였다 주인은 역시 대단한 사내였다 여자 위에 올라타서는, 긴 생머리를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4/ 그건 여자의 두 번째 출가였다 상한 우유를 먹고(그 많던 우유 가운데 어떻게 상한 우유를 골라냈을까?), 몇 주 동안 설사를 하느라 가게를 비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늙은 주인이 슈퍼를 떠났다 버드나무 가지에 노란 등이 걸렸다 사내의 성이 김씨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렇게 25년이 흘렀다// 5/ 얼마 전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 슈퍼엔 젊은 주인이 떠나고 늙은 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대단한 사내였다 그 먼 곳에서 25년을 건너 어떻게 돌아왔을까? 어쩌면 여자도 환속했을지 모른다, 다시 가지를 낸 저 버드나무처럼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앉아서 상한 우유를 골라먹고 있을지 모른다고 나는 잠깐 생각했다//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 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헤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畵中之餠이라 할까 特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 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게 건넨 꽃은 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1993)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만리장성을 생각함 / 권혁웅
내 친구 왕종수,/ 나와 이야기할 때면 내 왼쪽 머리 위를 홀겨보던 친구/ 눈동자가 한쪽으로 몰려서 고개를 갸웃대던 친구/ 만나는 선생마다 째려본다며 먼저 패고/ 나중에 사과해서/ 과수원을 해도 좋았을 친구/ 등하교 길에 만나는 여학생을 좋아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더니/ 옆의 친구가 나서더라는 황당한 이야기/ 어느 날 놀라간 그 친구 집에서 만난/ 돌아온 외팔이, 소림사 지주승, 당랑권과 호권과/ 취권의 달인들,/ 쏼라쏼라 떠들며 접시를 날려서/ 자장면도 못 먹고 우리 집으로 쫓겨 온 날/ 나는 북경으로 돌아가야 한대, 울면서/ 내 왼쪽 머리 위를 홀겨보던 친구/ 아니, 내 등 뒤의 만리장성을/ 똑바로 쳐다보던/ 내 친구 왕종수//

이 저녁의 어두운 풍경 / 권혁웅
이 저녁의 풍경은 낯이 익다/ 나는 천변에 나와 썩은 물 위로/ 지는 해를 오래 바라보고 있다/ 짧은 소매에 반바지 입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 건너편 언덕의 저 부부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것이 산문적인 것은 아니다/ 저들은 완성된 하나의 문장을/ 조심조심 디디며 건너가는 중이다/ 개천 썩은 물 위를 부유하는 쓰레기들도/ 저처럼 모여 결승 문자를 이룬다/ 저 쓰레기들처럼 이합하거나 집산하는 삶도/ 해 지는 천변, 썩은 황홀 아래서는/ 모두 용서하라는 것일까/ 리어카 위의 木馬는 아이들을 태우고/ 아까부터 고개를 주억거린다 긍정은/ 목마를 흔드는 할아버지의 권태 속에도/ 저녁의 어스름 속에도 있다/ 저 물은 쉬지 않고/ 복개한 어둠 쪽으로 다음다음 흐르고/ 나는 모른다, 저 물이 공테이프처럼 뻑뻑하게/ 다만 뻑뻑하게 흘러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를/ 다만 나는 이 낯익은 저녁의 풍경에/ 마음을 걸어두고 그 마음 안쪽에/ 살림 차리고 싶을 뿐이다//

월하의 공동묘지 / 권혁웅
등이 가려울 때면 누군가 내 안에서, 나를 등지고/ 나가겠다고 긁어대는 것 같다// 베란다에 두고 키우던 강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뒷발로 서서 유리문을 두드리듯이// 고골을 묻은 지 15년 만에 개묘했더니/ 관에서 발버둥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활하면 뭐 해? 다시 관속인데,// 불사가 되겠다고 진시황은 수은을 원샷하고 그 결과/ 급사했다// 자기가 무슨 실버 서퍼도 아니고/ 옛날식 온도계도 아니고// 칠성판에 눕는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두툼하게 썬 광어회를 손으로 집을 때/ 그런 느낌입니까?// 아니면 운동화 신고 빗길 걸을 때/ 발가락으로 스며드는 빗물…… 같은 겁니까?// 죽은 이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영화 〈월하(月下)의 공동묘지〉// 독립운동가의 딸 명순은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오빠 춘식과 애인 한수의 옥바라지를 위해 기생이 되고,/ 춘식은 동생을 위해 죄를 뒤집어써서 한수를 풀어준다 감옥에서 나온 한수는 명순을 아내로 맞고 만주를/ 오가며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으나 집안의 하녀 난주의 유혹에 놀아나 조강지처를 버린다 난주는 의사/ 를 시켜 명순의 음식에 독을 타고, 원통하게 자살한 명순은 귀신이 되어 한수의 집을 찾아오는데……// 근데 독립운동은 뭐하러 했지?/ 자살할 건데 독은 왜 탔지?// 문이 열렸다고/ 한기 새나간다고/ 아까부터 LG 디오스 냉장고가 삑삑거리며 야단이다//

장동건 / 권혁웅
1//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장동건 고소영 커플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을 찍었다/ 그건 장동건과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장동건과 같은 각도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는 뜻/ 물론 만족스러운 높이를 위해/ 발밑에 쿠션이 필요했다/ 보라, 나는 장동건보다 더 많은 소품을 썼다/ 장동건은 장동건 만했지만 나는 나보다 컸다// 신부 들러리가 자꾸 웃었습니다/ 내 마음은 세빛둥둥섬처럼 어리둥절했습니다// 2// 나중에 창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현빈만 보았지만 현빈은 현빈이니까 멋있는 거지/ 장동건은 좀비가 되어서도 멋있네/ 이럴 때를 위해 꼭 한 번 이 말을 쓰고 싶었다// 개멋있네// 3//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친구에서 장동건이 칼빵 맞기 전에 유오성에게 날린 유명한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 그 말을 듣고 하와이에 다녀왔다/ 보라, 장동건은 하와이에 못 갔지만 나는 갔다// 하와이에서 화장실에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가 잃어버렸다/ 1분도 안 지나서 되돌아갔는데 없어졌다/ 누가 집어갔다, 똥도 안 누고/ 그래서 장동건에게 전화를 못했다// 몇 년 후에 하와이가 분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 거울을 보며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 말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니 시다……// 그래 이것이 장동건에 관한/ 내 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장동건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유오성이 대답했습니다/ 죽고 싶나?/ 마음이 용각산처럼 조용해졌습니다//

가정요리대백과 -밥상 / 권혁웅
1// 너는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첫째는 발끈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놈의 집구석을 그냥, 확,// 부드럽게 삶아서 찬물에 행구어 건진 다음 간장, 설탕, 참기름을 넣어서 조물조물 비비고 싶습니다만// 그건 당면 얘기고요 첫째는 제가 소금물에 데친 시금치라는 걸 압니다 둘째는 아직 뻣뻣해서 당근, 셋째는 너무 어려서 계란지단이지죠// 밥상은 얌전하고 일가는 단란합니다 깨소금으로 마무리되었거든요 그런데 잡채는 금방 쉬는 게 참 문제는 문제예요// 2// 첫째도 그렇지만 엄마는 둘째가 더 걱정입니다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거든요 이 집 가장은 혼자서만 빛이 납니다// 육십 촉은 되겠네요 유전 때문에 아빠는 오이처럼 민숭민숭하다가 미역처럼 풀이 죽었다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둘째와 아빠의 머리를 교대로 보면서 한여름 시원한 냉국을 들이킵니다 그놈, 아빠를 꼭 닮았어, 그러면서요// 둘째가 비뚤어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거기에도 깨소금은 들어갑니다 냉국도 금방인 게 문제예요// 3// 아이더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제발 묻지 마세요/ 그건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고려 삼계탕 집에서 / 권혁웅
네이키드 치킨이야, 올 누드야/ 부끄러워서 머리를 숨겼어/ 죽지 아래 묻었는데 깃털을 뜯다 함께 버렸나봐/ 너무 추워서 소름이 돋았어/ 벗은 등을 타고 뜨거운 물이 흘렀지만/ 고려장이야./ 병아리 떼 뿅뿅뿅 따라다니던 시절은 잊었어/ 40일 숙성 코스를 끝내고/ 굽은 등을 하고 산삼 캐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어/ 불은 찹쌀을 잔뜩 먹은/ 네이키드 치킨이야,엎드린 누드야/ 삼복이니 두 번 더 넘어져야 해/ 부끄러워서 두 다리를 꼬았어/ 그래도 丹心이야 타는 마음이야/ 달걀 대신 대추를 품었어/ 그래서 그대가 이열치열이라면/ 계륵이 되어도 좋아 계륵으로 남아/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도 좋아/ 그대 입이 닿는다면 후꾼,/ 달아오른다면//

춘천닭갈비 집에서 / 권혁웅
지금 당신은 뼈 없는 닭갈비처럼 마음이 비벼져서/ 불판 위에서 익고 있지/ 나는 당신에게 슬픔도 때로는 매콤하다고 말했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이는// 이미 오이냉국처럼 마음이 식었다고 일러주었지/ 그이를 한 입 떠 넣는다고 해서/ 당신 마음의 뼈는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닭 껍질처럼 오돌토돌한 소름은/ 숨길 수가 없는 거라고 얘기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앞치마를 두른 채 조금 튄, 당신의 슬픔을 받아내는 일/ 당신은 없는 그이를 생각하고/ 나는 고구마와 함께 익어가는 당신을 생각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삼각관계는// 떡, 소시지, 양배추, 쫄면으로 치장한다고 해도/ 그냥 먹고 남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나는 조금 속이 타서 찬물을 마셨지/ 나는 당신 앞에서 물먹은 사람이 되었지/ 그것도 셀프 서비스였지//

 

떡집을 생각함 / 권혁웅
​그 집은 온갖 진미의 공장,/ 집 주인이 가래떡을 넣고 돌리면/ 작고 하얀 얼굴들이 아옹다옹 한방에서 나와/ 떡국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지/ 그가 내놓은 시루떡은/ 팥고물로 새까맸지 안방 구들장처럼/ 다습게 녹아 있었지/ 아버지가 형과 누나와 나를 떡메로 쳐서/ 네모나게 잘라두면/ 그가 가루를 묻혀 인절미를 만들어냈지/ 우리 집에 없는 건 그 콩가루였네/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쑥떡 쑥떡/ 씹듯이 우리를 건너다 보았네/ 우리는 얻어맞은 찹쌀처럼 차지게 손을 잡았지/ 개피떡에 든 소처럼 조그맣게 웅크렸지 그가/ 아픈 자리마다 참기름을 발라주었네/ 먹다 남은 막걸리와/ 뜨거운 물을 멥쌀에 개어 증편을 만들 때엔/ 우리 마음도 함께 증발했지/ 그래, 우리는 그렇게 그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나는 백설기처럼 마음이 하얗게 되네/ 돌아보지 않아도 눈이 내리네//

국수 / 권혁웅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 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여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필멸의 고릴라 / 권혁웅
팔작지붕 위에서 이데아를 기다렸죠 도움닫기 하는 자세로 버림을 받았죠 지붕이 날아 갈까봐 거기 앉았던 건 아니에요// 세탁기는 수평을 잡으려고 저렇게 탈탈거리나요? 허우적대는 아이처럼 수면에 한 번 올라오려고 물을 뱉나요?// 베란다는 뛰어내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거기에 둔 게 갑자기 남편이 들어와서만은 아니에요// 냉장고가 토라진 바위라면 거기서 달걀을 꺼낼 수는 없겠죠 가슴을 두드린다고 고릴라는 아니지만, 그렇게 안 한다고// 고릴라가 제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죠 고릴라와 우리의 거리는 오랑우탄과 고릴라의 거리와 같다고 합니다 오랑우탄이 불멸이라면// 저 얼굴 까만 짐승은 더더욱 흙빛이 되어 덜덜 떨겠죠, 생명보험에 들지 않으면 자식들이 걱정이고 들어두면 아내가 무서워서,// 가만 보면 우두커니* 가운데는 꼭 원숭이가 있어요// 이마가 반질반질한 스님 한 분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르는 왁자지껄한 무리들은 모두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 우두커니란 본래 한옥지붕 위에 한 줄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조각상들을 일컫는다. 잡상이라고 하며, 앞에서부터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라 불린다.

밀실의 역사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로구나.(이곡 「소포기」) / 권혁웅
1. 사막// 방에 위도와 경도를 매겨, 지상과 일대일 축척을 실현한 이모에 관해선 방금 말했다 외할머니가 부를 때마다, 이모는 고비 사막을 넘어 달아났다 대상도 낙타도 없이……그곳을 건너가는 데 한 뼘이 걸렸다// 2. 벼랑// 형은 여름 한낮이면 다락에 올라가 오수를 즐겼다 가끔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디딤판 위에서 코피를 흘리며 코를 고는 형이 있었다 거기가 낙화암도 아닌데, 형은 삼천 번 정도는 몸을 날렸을 것이다// 3. 전장// 주인집 작은형은 평생을 그늘에서만 산 군주였다 형의 유일한 적수는 나였다 형은 기병과 포병과 보병과 전차와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내게 쳐들어왔다 나는 자주 말발굽에 밟히거나 코끼리와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했다// 4. 탑// 우리는 주인집 막내를 동장군(冬將軍)이라 불렀다 한밤에 변소에 갔다가 구멍에 빠졌던 애다 한겨울이어서 그 애는 똥탑을 기어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애를 피해다녔다 추위와 똥독을 이겨낸 불굴의 장수였으므로// 5. 식당// 주인집 작은누나는 가출한 후에 도루코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청춘을 보냈다 한번은 면도칼을 씹다가 주먹에 맞아 입 안이 통째로 날아갔다 한다 그래서 삼양라면을 한 올씩 삼키며 두 달을 살았다 입이 좁은 문이었던 거다//

지문 / 권혁웅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 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 권혁웅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 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 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 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파문 /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세상의 끝 / 권혁웅
동도극장을 아십니까?// 만약 아신다면 당신은 저 오랜 독재자가 말년을 보낼 즈음에 삼선동과 동소문동 어디쯤에서 살았던 것이 틀림없군요// 넓은 마당을 곧장 내려가면 삼선초등학교가 나오고 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경동고등학교가, 왼편으로 가면 한성여고가 나옵니다 삼거리는 어디나 연애담을 담고 있습니다 형들과 누나들이 거기서 만나 동도극장에 가곤 했답니다 학생주임이 몽둥이를 들고 그곳을 급습했지만, 아시다시피 필름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돌아가고 극장 안은 아주 어둡습니다// 내가 동도극장을 처음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두 번째 독재자의 취임기념우표를 사러 새벽길을 가는데, 머리가 떨어져나간 시체가 소복을 입은 채 으스스하게 서 있는 거였습니다 <목 없는 미녀>란 프로였죠 귀신은 우처국 앞까지 쫓아왔다가 날이 밝아서야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죠 얼굴이 없었는데 미녀인 건 어떻게 알았으며 소복을 입었는데 몸매는 또 어떻게 보았을까요?// 나중에야 그게 세상 끝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운명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슴프레 서 있긴 한데 도무지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이들 말이죠 동도극장이 꼭 그랬습니다 내가 철이 들 무렵 동도극장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내가 연소자 관람불가를 넘어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거지요 나는 지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동도극장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세상의 끝까지 가보지 못했답니다//

쑥대머리 / 권혁웅
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주전자 물을 뒤집어 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박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주부노래교실 / 권혁웅
저기 수면을 끌어당기는 마흔개의 빨대가 있다/ 들이친 비를 받아먹는 마흔개의 입이 있다/ 벙벙한 어안( 魚眼)은 한눈파는 법이 없어서/ 쉴 새 없이 오병이어를 쏟아낸다/ 음치가 음악치료가 되는 기적,/ 꽃미남과 함께하는 동대문구 주부노래교실/ 저기 수면 위에 내가 놓친 꽃잎이 떠내려간다고/ 스무살 때 이 두 손으로 뜯어낸 거라고/ 탬버린이 없는 손 대신 있는 몸으로 부르르 떤다/ 각광(脚光)은 아래를 비추는 환한 빛이다/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달아난 어린 손모가지가 그리워/ 마흔개의 입이 채무자처럼 외친다/ 이자는 필요 없으니 원금만 돌려다오/ 두 아이와 사모님을 돌려줄 테니 내게 청춘을 다오/ 저기 수면이 스무살 높이까지 낮아졌다/ 끝나면 모두들 천변에 체조하러 가야 한다//

노란 슬픔 / 권혁웅
<엄마. 나야.>라는 시집이 있다. 단원고 학생 34명의 생일을 맞아, 시인 34명이 대신해서 쓴 생일시 모음집이다. 치유공간 '이웃'에서 정혜신, 이명수 두 분이 기획한 치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편들이다. 아이의 시선과 목소리로 남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말 건네는 형식으로 적힌 육성시다. 맹골수로의 수심(水心)을 이기고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온 목소리다. 올해 1월에 이 책의 편집자 김민정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친구의 생일시를 청탁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책을 출간했잖아?" "세월호에 있었던 아이들이 몇 명인데> 2권, 3권 이어서 계속 출간할 예정이야." 아이가 짧은 생애 동안 지상에 남긴 선하고 다정한 기록을 찾아 읽으며 참 많이 울었다. 아이를 가슴에 묻고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는 부모의 사연은 비통했다.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 가장 어렵게 시를 썼다. 생일이 지난 뒤 정혜신 선생께서 메일을 보냈다. "부모님도 그랬지만 친구들이 정말 많이 울더라구요. 울고 나서는 또 아이들이 얼마나 홀가분하게 잘 먹고, 많이 떠들다 갔는지 몰라요. 우리가 흘린 눈물이 비통한 눈물이 아니라 맑은 슬픔, 투명한 그리움 같은 눈물이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해요." 주말 동안 전국을 뒤덮은 노란 리본은 우리를 묶는 맑고 투명한 슬픔이었구나. 우리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더 간절해졌을 뿐이다.//

청춘 1 / 권혁웅
그대 다시는 그 눈밭을 걸어가지 못하리라/ 그대가 낸 길을 눈들이 서둘러 덮어 버렸으니// 붕대도 거즈도 없이/ 돌아갈 길을 지그시 눌러 버렸으니//

청춘 3 / 권혁웅
심야의 고속버스는 운구행렬이다 나란히 누운 이들이 몽유의 도로 위를 둥둥 떠다닌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규칙적으로 곡을 한다 벗어둔 신발에 고인 추깃물이 출렁이며 바닥에 흐른다// 뒷 머리를 한 입씩 베어 먹힌 이들이/ 0시 20분의 터미널을 걸어 나오고 있다// 누군가 그대의 생각을 조금, 아주 조금/ 덜어간 것이다//

서울市 新林洞 山77 聖 金福禮의 하루 / 권혁웅
1/ 부엌 지붕 새로 스며든 빗물이 판자를 휘어놓았다 식기들이 비스듬히 걸터앉아 아침 햇살에 이빠진 웃음을 웃는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食口를 계산하는 그릇들도 이 집 식솔들이다// 2/ 지나는 곳마다 고개턱이어서 길들도 한숨을 부려놓는 곳, 그 길을 091021-2023527 김복례 할머니가 오른다 마을의 수도꼭지들이 할머니를 따라 쇳물을쿨럭거린다 소리의 音階를 밟으며 할머니 길을 오르신다// 3/ 이곳에 시멘트 숲이 얼기설기 솟았을 때 김복례할머니가 왔다 고려 때도 고려장은 없었다는데 자식들은 끈 떨어진 구슬들처럼 흩어졌다, 아니 구슬이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저녁마다 할머니는 방바닥에 대고 걸레 잡은 손을 휘휘 젓는다 아무도 못보게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4/ 산 아래는 지금 영구 임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포클레인은 술취한 애비를 닮았다 마구 家産을 부수어놓는다 레미콘이 임신한 여인네처럼 뒤뚱거리며 뒤를 따라온다 흙발로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뛰어 다니는 트럭들...... 시끄러운 이웃이다// 5/ 바람만 바람만 따라오던 넌출 가로등 돌아가고 건너편 산등성이 불빛들도 까무룩 조는 초여름 저녘, 김복례 할머니 형광등 값을 아끼려 일찍 자리에 든다 벌써 눕느냐고 칭얼대며 은초롱꽃들이 등을 켜들고 슬레이트 처마 아래를 들여다본다// 6/ 야채나 생선차도 이곳엔 들르지 않는다 해서 이곳엔 기다림이 없다 그저 마른 방구들 풀썩이며 노는 먼지들뿐이다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에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빛의 고딕 聖堂 서울市 新林洞 山77番地, 거기에 김복례 할머니가 산다//

노모(老母) / 권혁웅
먹은 밥과 마신 물은 구절양장으로 가지만 눈물이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니더라 그늘의 네 귀퉁이를 싸매고 거기에 사금파리를 보탰다 한들 그 물빛을 설명할 수 있을까 수위야 암만암만이지만 속에 자잘한 것들이 모두 조약돌 력(礫)이라, 오래 닳은 즐거움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알았다 연골이란 게 녹아서 눈물이 되어가는 뼈가 아니고 무엇이겠니? 이제는 곳곳이 누수로구나 나는 더 가벼워져야 하겠지 네 아버지는 염색만 하면 아직도 청화(靑花)일 텐데, 나는 울창한 수목에 다 가려진 혼행이겠구나 날 알아나 볼까, 하는 물음표가 족두리하님처럼 조그맣게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십육 년을 혼자서 사행(蛇行)했다 나는 몇 년을 더 구불구불 지나가야 하는 걸까//

입맞춤 / 권혁웅
1/ 나미브 사막의 웰위치아 미라빌리스(Welwitschia mirabilis)는 혀뿌리 같은 밑동에서 달랑 두 장의 잎을 내는데 잎 하나의 길이가 9미터에 이른다 가닥가닥 헤진 누비이불 같고 먼지 앉고 찢어진 리본 조각 같은데, 자기들끼리 엉겨서 1,500년을 산다 대서양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받아먹기 위해 그렇게 길어진 거다 비가 오지 않아도 간절한 잎은 서로의 침샘을 찾아간다 ‘함께’라는 말의 어원에는 혼자가 있다 너덜너덜해진 잎 끝은 1,500년 동안 닳아서 없어진다 너무 오래도록 그는 제 자신을 탐한 것이다// 2/ 네 영혼의 후반부는 ‘용서’라는 말로 채워진다 용서가, 용서를, 용서와, 용서는…… 틸란드시아 라티폴리아(Tillandsia latifolia)는 버림받은 얼굴로 아칠거리며 아타카마 사막을 굴러다닌다 침샘을 놓친 후에 뿌리마저 버린 것이다 공처럼 둥글게 생겨서 구르다 서로 만나도 잎을 낼 수가 없다 용서가 용서를, 용서와 용서는…… 서로를 용서할 수가 없다 공 속에는 뻣뻣하고 쫄깃한 잎이 들어서, 태평양에서 넘어오는 안개를 기다린다 결가부좌도 연좌도 없는 삶이어서 그 영혼의 전반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외전 십이지(外傳 十二支) / 권혁웅
1. 코끼리/ 덩치 전체가 살점으로 이루어진 짐승이 첫째 자리에 놓인다 기쁨과 눈물을 모두 여물 밥과 바꾼 것이다 저 덩치를 깎아내면 배꼽티를 입은 여자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비스켓을 낚아채는 저 코야말로 살의 유혹이다 그리로 콧물과 식수와 건초가 지나간다 혹자는 이 짐승과 짐승의 코를 큰 슬픔과 작은 슬픔의 상형이라고도 말한다// 2. 두꺼비/ 이 짐승은 가장(家長)들의 토템이다 우툴두툴한 등은 토막 난 가계(家計)를 닮았고 터무니없이 짧은 목은 부장(部長)의 호통 앞에서 진화한 결과다 혹은 물을 술로 바꾸는 영험이 있어서 밑 빠진 독을 받쳐주었다는 옛이야기도 전한다 가장이 실직하거나 보험 든 것도 없이 덜컥 암에 걸렸을 때 세간에서는 두꺼비, 돌에 치였다고 이른다// 3. 낙타/ 낙타(駱駝)는 곱사등이[駝]다 같은 짐승으로 타조(駝鳥)가 있으나 인자한 표정으로는 낙타가 으뜸이다 사막에만 출몰하는 짐승이나 최근에는 콘크리트로 지은 사막이 늘어나 서식지를 넓혔다 속눈썹이 두 줄이고 귀에 털이 나 있으며 물 없이 버틸 수 있어서 장님 삼년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을 견뎌야 하는 며느리들이 첫머리에 섬긴다// 4. 곰/ 미련한 자들의 대표로 곰을 치지만 미련한 자들은 정작 아무 짐승도 편애하지 않는다 곰 창(槍) 날 받듯 한다는 말이 있으나 자진하는 곰이 보고된 바는 없다 나무에도 잘 오르고 땅도 잘 파고 헤엄도 잘 쳐서 재주는 곰이 부린다고들 하지만 곰은 정작 사기를 당했을 뿐이다 겨울잠 자고 일어났더니 누가 쓸개를 빼갔더라 하는 식이다// 5. 오리/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한쪽 증인이 오리다 예로부터 오리와 닭을 한 데 묶는 쑥덕거림이 있어 왔다 오리 홰 탄 것 같다고 했으니 오리가 닭의 일을 대신한 것이고, 닭 잡아먹고 오리발이라 했으니 둘이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암탉이 오리알 낳고도 할 말이 있다 했으니 서로 동침한 사이가 아닌가? 그 죄가 사무쳐 지옥 불에 떨어진 오리를 유황오리라 부른다// 6. 개미핥기/ 개미핥기는 중남미산이다 외국인 노동자, 동유럽 영어 학원 강사, 베트남 처녀들이 이 짐승을 으뜸으로 친다 관처럼 생긴 주둥이 속에 긴 혀가 들어서, 개미집 속의 개미를 핥아 먹는다 개미 꽁지에서 나온 포름산은 시큼하고 톡 쏘는 맛이 난다 신산(辛酸)함이란 무릇 달달함이니, 개미 똥구멍을 빨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격언이 여기서 나왔다//
7. 제비/ 제비는 강남에 무리지어 서식하면서, 삐끼 짭새[雜鳥] 화사(花蛇) 등과 비슷한 생태지위를 누리는 짐승이다 인기가 좋아서 특별히 사랑 받는 개체가 되는 일을 제비뽑기라 하는데, 여기에 한 번 뽑히면 평생 연미복만 입고 살게 된다 장안의 남녀들이 이를 선망하여 떼로 몰려드니,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간다는 속담이 뜻하는 바가 이것이다// 8. 악어/ 물가에서 움직이는 건 다 잡아먹는 짐승이 악어다 제 식성을 한탄하여 먹이를 삼키며 우는 일이 왕왕 있는데, 이를 악어의 눈물이라 한다 그 고결함을 사랑하여, 귀부인과 골퍼들이 즐겨 자신의 토템으로 삼았다 악어 사는 못의 물고기가 싱싱하다는 말은, 이 짐승이 자신의 횟감을 얼마나 극진히 대하는지를 보여준다 귀부인들이 어린 남자를 볼 때도 그렇다// 9. 늑대/ 개는 늑대에서 나왔으나 짖고 늑대는 개를 낳았으나 운다 그 장탄식을 듣는다면 양의 탈을 쓴 늑대 따위가 얼토당토않은 묘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는 꼬리를 치지만 늑대는 꼬리를 만다 그 겸손을 본다면 시랑(豺狼)과 신랑을 혼동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이 짐승을 섬기는 무리가 있어 매달 보름에 계모임을 갖는데, 세간에서 이들을 늑대인간이라 부른다// 10. 고양이/ 사이코들, 매일 일기를 쓰는 자들, 거울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이 짐승을 섬긴다 점잖게 부뚜막에 올라도 손가락질을 받고 자주 얼굴을 닦아도 고양이 세수라 하여 욕을 먹는다 귀여운 얼굴에 세모눈이라, 인상도 그렇다 쥐를 좋아하지만 정작 쥐를 생각하면 겉과 속이 다른 짐승이라 비웃음을 당하니, 아 삶은 곤고하고 소문은 무성하도다// 11. 사슴/ 병자, 노약자, 임산부가 섬긴다 이들은 이 짐승이 다니는 길을 서성거리며 어쩌다 흘린 뿔 한 조각이라도 얻고자 애를 쓴다 뛰는 사슴 보고 얻은 토끼 잃는다는 말은 사슴의 귀함이 토끼의 천함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요,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 것은 사슴은 귀하고 말은 흔해서 착각하기 쉽다는 뜻이다 치병, 노환, 산통의 곤함이 그와 같다// 12. 딱따구리/ 마지막 자리는 악처, 선생, 놓아기른 아이, 약장수, 행보관, 굴착기 기사의 수호 짐승이 차지한다 앞산에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집에 있는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 찾는다고, 마누라가 한탄하면 가장은 이명과 편두통에 다시 두꺼비를 찾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옆에서 훈계하고 아이들은 밥 달라 울고 다시 약을 찾고……// 그렇게 한 갑자(甲子)가 돌아가니, 이를 윤회라 한다//

오늘의 운세 / 권혁웅
장마가 와서는 갈 생각이 없으니 이민이 최선이다/ 쥐띠, 오늘이 볕 든 날이니 마음껏 누려라/ 금전관계로 구설수 있으나 채무자에게 변고 있겠다/ ㅂ, ㅇ, ㅊ 성씨 철재 석재를 다루면 재미를 보겠다/ 소띠, 아파트 윗집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니/ 횡재수 있겠다 부동산에 투자하라/ 범띠, 해수욕을 하러 갔다가 쓰나미를 만난 격이다/ 차를 지인에게 빌려주면 사고를 면하겠다 ㄱ, ㄷ 성씨/ 떠내려 오는 돼지가 운명이니 세 살 연상을 찾아라/ 토끼띠, 불법 동영상과 정전, 음주단속을 조심하라/ 경찰과 진한 연분 있으니 팔자에도 없는 닭장에서 자겠다/ 용띠, 승천은 했는데 구슬이 없는 격이로구나/ 사람들이 뱀으로 생각하니 정체성의 위기를 겪겠다/ 뱀띠,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인연이니 일단/ 쓰러뜨리고 볼 것, 단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를 신중히 판단하라/ 말띠, 구추상강 낙엽귀근에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니/ 고지혈증이 오겠다 물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떠 있구나/ 양띠, 관귀가 길을 지키니 출행이 어렵다/ 보증을 섰다가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원숭이띠, 청산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절개를 지키나/ 조삼모사와는 아무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 닭띠, 먼저 횃대에 오르면 목이 돌아간다/ 그래도 새벽은 올 테니 끓는 물에 들어가겠구나/ 개띠, 연못의 물고기가 바다에 나갔으니/ 소금물에 비늘이 다 터진다 ㄴ, ㅎ 성씨 뒤에 오는 귀인에게/ 모함을 당할 수니 사면이 초가라, 뜻밖의 겁살 있겠다/ 돼지띠, 그냥 떠내려가다가 아까의 범을 만나면 된다/ 관재와 손재가 먹구름처럼 두터우니/ 쓸쓸이 쓸쓸을 불러모은다 해도 이 쓰레기들을/ 다 치울 수는 없으리라//

노인들 / 권혁웅
1/ 심해는 춥고 뻑뻑하고 캄캄하다 바늘방석아귀(Neoceratias spinifer)는 여러 달을 꼼짝 않고 누워서는 누군가의 기척을 기다린다 아귀들은 뼈와 근육이 약하다 옆지느러미는 짧고 뭉툭해서 안을 수 없고 입은 크고 가시가 돋아 무엇이든 걸리게 되어 있으니, 그에게는 포옹이 포식이다 혼자 사는 건 대개 암컷이다 수컷은 암컷을 만나면 먼저 물고 그 다음에 파고든다 몸속에 자리를 잡으면 암컷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그러니까, 그게, 서방인지 남방인지 걸인 하나 들어 왔다고// 2/ 독거가 있다면 취로사업도 있다 나무수염아귀(Linophryne arborifera)는 빛을 내는 나뭇가지를 몸 앞에 달았다 그러니까 그가 지나간 곳이면 어디든 길이 난다 수심 3,500미터에서, 발광하는 연둣빛 앞에서 아귀의 피부와 주름을 얘기하는 건 번문욕례다 가만 보면 그 등은 신행길을 밝히는 청사초롱 같기도 하다 춥고 뻑뻑하고 조용한 심해에서 그는 환한 묵음이다 어린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도 무단횡단하는 노파가 들을 리 없다 그러니까, 어서어서, 서방인지 남방인지 찾아가야 한다고//

돈 워리 비 해피 / 권혁웅
1.// 워리는 덩치가 산만한 황구였죠/ 우리집 대문에 줄을 매서 키웠는데/ 지 꼴을 생각 못하고/ 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며 달려드는 통에/ 동네 아줌마와 애들, 여럿 넘어갔습니다/ 이 피멍 좀봐, 아까징끼 값 내놔/ 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았지만/ 우리 워리, 꼬리만 흔들며/ 그 매, 몸으로 다 받아냈습니다/ 한번은 장염에 걸려/ 누렇고 물큰한 똥을 지 몸만큼 쏟아냈지요/ 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 할교에서 돌아와 보니/ 한성여고 수위를 하는 주인집 아저씨,/ 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금강야차처럼/ 우적우적 씹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씹을 듯했습니다// 2.// 누나는 복실이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해피야, 너는 워리처럼 되지 마/ 세달만에 동생을 쥐약에 넘겨주었으니/ 우리 해피 두배로 행복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어느날/ 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 개 집어들고는/ 해피를 뒤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왈왈 짖으며 용감한 우리 해피, 뒷산을 타넘어/ 내게로 도망왔지요/ 찾아온 아저씨들, 나일론 끈을 내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해피가 네 말을 잘 들으니/ 이 끈을 목에 걸어주지 않겠니?/ 착한 나,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줬지요/ 지금도 내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덟살, 해피가 두살 때 얘기입니다//

해는 보문사에서 뜨고 한성여고로 진다 / 권혁웅
넓은 마당의 해는 보문사에서 떠오른다/ 스님들 머리처럼 반질반질하고/ 헐벗었다 탁발하러 해는/ 넓은 마당 위 능선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과 속옷과 빨래를 얻고/ 경문 대신 햇빛을 조금씩 나눠준다/ 안방 구들장 위에 한 뼘,/ 손녀딸 방에 얹힌 할머니 천식에 두 뼘,/ 하지만 장롱으로 막아 꾸민/ 큰아들과 작은아들 방 책상에는/ 국물도 없다 서유석의 푸른 신호등을 지나/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를 지나/ 오미희의 가요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해는 먼길을 가야 한다/ 가장이 작업복처럼 쭈글쭈글해져서 귀가하기 전에/ 안주인이 영양크림과 스킨과 로션을 잔뜩 안고/ 외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마침내 해는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여고 품에 안긴다/ 딸아이들은 저마다 치마 안에 해를 감춰두고/ 고개를 넘어온다 깔깔거리며/ 넓은 마당으로 돌아온다 그녀들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할머니 기침소리를 들으며/ 삼십 촉짜리 알을 낳을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물에 뛰어들었다 우물 입구가 낮고 좁았으므로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서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때어 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床 위에서, 紙錢은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 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물때 / 권혁웅
아직 물때 아니라고 말하죠 그대 마음이 滿滿치 않다고 하지요 괜히 얕은 물가에서 자반뒤집기만 했다고요 그대를 다 들이켜고 싶은 욕심에 공연히 물배만 불렀답니다 가령 그대 쪽으로 물결 보내면 그대는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처럼 저 물결에 몸을 실어 내 마음의 밖에서 기연미연 했군요 그대 내 안에 들면 나를 가둘 테니까요 나 그대 안에 들면 한점 웅크린 섬으로 남을 테니까요 물때 지나치면 마음 묻은 자리만 얼룩진다고요 아직 물때는 아니라고 말하지요 그대 마음이 滿滿치 않다고 합니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는 법 / 권혁웅
숲의 나무들은 전진하지 않는다/ 제 몸 아무데서나 뻗고 싶을 때 가지를 낸다/ 산의 키를 몇 자씩 더하는 나무들의 아우성 때문에/ 겨울산의 실루엣은 늘 흐릿하게 번져 있다/ 숲은 우리 발자국을 가릴 뿐이다// 몸의 무게 중심을 나무와 나누어 가진 채/ 우리는 길게 입맞춤을 했다/ 서로 가지가 엉킨 나무이고 싶었다//

목련의 알리바이 -신발에 담겨 있는 것 2 / 권혁웅
오늘,목련이 모두 졌다 오래된 신발처럼 변색했다 신발은 흔적이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뒤꿈치 바깥이 깎인 것은 너를 지탱해온 신발의 기억,신발은 길을 끌고 천천히 이곳에 왔다 오늘 너는 신설(新說), 건국(建國), 성수(成遂) 등을 짚어 왔고 주렁주렁 달고 왔고 그리고 목련이 졌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목련은 가지를 끌고 와서는, 가지 끝마다 자리를 잡곤 했다 가지들이 노선(路線)처럼 산만했다 그 무성한 신발들이 다 떠나갔다 너는 여기에서 증발했다//

여우 / 권혁웅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여우가 그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를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 여우였다 긴 치마에 가방을 모아 쥔 손이 가지런했다 흰 발목과 꼬리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여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여우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겨우 열 다섯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삼 년 후에 다시 여우를 만났다 한성여자고등학교 하교길, 여우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몰래 여우를 따라갔다 골목을 돌아 한 대문 앞에서 꼬리를 놓쳤다 집에는 병든 노모와 아이들이 보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겨우 열여덟이었으므로,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대학 때에 그녀를 만났다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안 건 아홉에 하나였다 왜 열이 아니냐고 물어볼 사람은 없겠지 그녀와의 보금자리는 늘 풍찬노숙이었다 천 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나를 버렸다// 그 후로도 자주 여우가 출몰했다 어떤 여우는 몇 년 동안 내 그림자를 밟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어떤 여우는 내가 맛이 없다고도 했다 여우인 줄 알고 버렸던 그녀가 몇 년 후에 여봐란 듯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때마다 간이 아팠으나 며칠 후면 새살이 돋곤 했다// 나는 아직도 겨우일 뿐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음이 궁금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뒷이야기를 기록할 여백이 없다 여우는 겨우 말하면, 달아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우 이야기는 늘 미완이다//

달에 대하여 / 권혁웅
나는 감옥이었네/ 둥근 사랑 속에 백지처럼 얇은/ 한 여자를 가두었네 그 여자 몸둘 바 모르고/ 내 마음속을 떠돌다 지쳐/ 세상을 떠돌러 갔네 너무 가벼웠네/ 그 여자 산 너머 산, 들판 지나/ 들판을 만날 텐데, 구겨질 텐데...... 울면서/ 달빛은 촘촘히 세상을 가두네/ 이제 나 야위어 아무나 할퀼 지경이지만/ 애초에 모르진 않았다네/ 그 여자,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어렵게 어렵게/ 나를 무단 횡단한 거였네//

꽃잎과 담장 / 권혁웅
담장을 끼고 걷다보면 휘어진 길 저쪽에서, 누군가, 오래 전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날 때에도 여러 번 망설여야 한다 꽃잎 한 장과 다른 꽃잎 한 장 사이에서 나는 불편하다 멈칫거리며 꽃잎이 돋아나고 있다 꽃잎들은 어느 쪽 방향으로 돋아나는가 회전문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돈다, 거꾸로 돌고 싶은 이들은 손가락을 잃을 것이다 회전문이든 담장이든, 지나치면 제자리일 터이므로 망설이며 디디는 이 걸음이 내겐 길이요 꽃이다 담장을 끼고 걷다보면 휘어진 길 저쪽으로, 내가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출가하는 자작나무 -백담사 가는 길 / 권혁웅
눈을 뒤집어쓴 자작나무가 자작, 자작 도열해 있는/ 이 흑백의 풍경,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숨어 사는 마음들이/ 절을 지었구나 그대들이 버린 발자국,/ 여기에 길을 이루었구나/ 겨울 햇빛이 산등성이 나무들에/ 빗살을 긋고 있다/ 산은 오래 전의 토기 같다,/ 여기에도 열매를 모으고 고기를 구워/ 일가를 거두었던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方外의 시절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내가 가는 곳마다 杜門이나 不出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저 눈의 성채들,/ 나의 내면은 저 산의 외면이었으므로/ 도열한 자작나무처럼 나는 오래 背景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산은 제 안을 헐어/ 나무들을 내보내고 있다 햇살에 몸을 열어/ 질척이는 길을 세상에 放生하고 있다/ 출가하는 겨울의 긴 꿈으로/ 자작, 자작, 나무들/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고 있다//

사소한 기록 / 권혁웅
풍경 속에 눕고 싶다, 가령 배꼽티를 입고 지나가는/ 저 여자의 중심에 거리의 소실점이 모여들 때/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지워져 버리고 싶다/ 내가 이 거리에서 읽어낸 건 몇 장의 삽화,/ 몇 줄의 기록이었다 무엇이 근사하겠는가,/ 원본이 따로 없으니/ 나는 내 삶에도 밑줄을 긋지 않은/ 엉성하고 게으른 독자였다 팔짱 낀 남녀가/ 통독하듯 빠르게 보도를 걸어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저들은 다른 책을 펼칠 거야,나는 근시의 풍경/ 저 너머를 건너다본다 내가 모르는 것들,/ 예컨대 목격자를 찾습니다 흰색 소나타와 오토바이,/ 아르바이트生 구함,용모 단정,女,19세 이하는/ 내 노트에 기록될 수 없을 것이다 원본이 따로이 없으니/ 내가 최선을 다했던 건 담배를 버리기 전에/ 휴지통을 둘러본 일이었다/ 모퉁이의 나무는 지금도 잎을 떨구며 저리 난감하다/ 나무는 풍경이다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저 풍경과 하나가 된다면/ 그래서 내 얼굴이 저 나무나 보도블럭에서 읽혀진다면/ 잠시 지나치던 네가 쳐다볼 수도 있으리라 사소하게/ 물론 사소하게//

원형의 감옥 2 / 권혁웅
나무도,그늘 속 나도/ 무연히 서 있다/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는 한,/ 나는 밀봉되었을 따름이다/ 이 나무는 거대한 해시계여서/ 나를 가둔 채 오전에서 오후 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햇살에도 이렇게 빈틈이 많은 것을/ 나를 감시하는 그늘 속 눈들,/ 파파라치들이 저토록 많구나/ 기다린다는 건 타인의 시선에/ 개봉되는 것이다/ 지금 내 안은 여닫은 봉투와 같아서/ 나는 햇살을 가득 담은/ 푸른 그늘이다 나갈 때가 되었구나/ 다시는 돌아보지 말라고,/ 저 잎들의 뒷면에 적힌 에필로그를/ 바람이 언뜻 뒤집어 보여준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 권혁웅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당신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안개를 지켜보았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강물을 내려다본 것뿐인데/ 컵 속의 물이 얇게 얼어 있었지/ 철로는 어느 線이든 조금씩 더러웠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먼데서 얼크러진 길들이 천천히 다가왔으나/ 철로는 어느 線이든 조금씩 더러웠네/ 당신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안개를 지켜보았지/ 이제 당신은 종이컵을 구기고/ 신문지를 접어드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일곱시 사십분이거나,여덟시 이십분이었어도/ 상관은 없었네,/ 단지 조금 이르거나 늦은 개찰일 뿐/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11월은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네/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않겠지만/ 당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도/ 안개가 다섯시에서 여덟시까지/ 당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강박에 사로잡힌 시계 / 권혁웅
시계불알이 다녀갔다고 쓴다 무언가 저지른 느낌이라고 쓴다 주워담고 싶다고 아니 어쨌든 저지르고 싶다고 거듭 쓰고 지우다 찢어진 백지 같다고 쓴다 나는 백지를 구겨버린다// 이 방은 백지와 내통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나는 구겨진 백지 같은 얼굴을 천천히 편다 그 방도 구겨졌는지는 묻지 말기 바란다 하긴 그렇다 어떻게 방이 구겨질 수 있겠는가// 대답 대신 나는 얼굴을 펴서 지는 해를 받는다 노을을 받은 서쪽 창이 화끈하다 세상은 어두워지기 전에 낯부터 붉혔다 곧 이 방은 묵지가 될 것이다// 시계불알이 다녀왔다고 쓴다 강박은 균형감각이다 무언가 주워담고 싶다고 쓴다 아니 저지르고 싶다고 쓴다 해는 동쪽 창에서 뜰 것이다 어디선가 새가, 천천히, 울었다//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 권혁웅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 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波浪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이 저녁의 어두운 풍경 / 권혁웅
풍경 속에 눕고 싶다, 가령 배꼽티를 입고 지나가는/ 저 여자의 중심에 거리의 소실점이 모여들 때/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지워져버리고 싶다/ 내가 이 거리에서 읽어낸 건 몇 개의 이미지였다/ 무엇이 근사하겠는가, 나는 내 삶에도 밑줄을 긋지 않은/ 엉성하고 게으른 독자였다 팔짱 낀 남녀가/ 통독하듯 빠르게 보도를 걸어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저들은 이 거리를 다시 읽지 않을거야/ 아마 다른 책을 펼칠 거야, 나는 근시의 풍경/ 저 너머를 건너다본 내가 모르는 것들,/ 예컨대 목격자를 찾습니다 흰색 소나타와 오토바이,/ 아르바이트生 구함, 용모 단정, 女, 19세 이하는/ 내 노트에 기록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했던 건/ 담배를 버리기 전에 휴지통을 둘러본 일 따위였다/ 모퉁이의 나무는 잎을 떨구며 난감하게 서 있다/ 나무는 풍경이다, 나는 풍경 속에 눕고 싶었으나/ 저처럼 풍경이 나를 오래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 또한 저 풍경과 하나가 된다면/ 그래서 내 얼룩이 저 나무나 보도 블럭에서 얽혀진다면/ 잠시 지나치던 네가 쳐다볼 수도 있으리라 사소하게/ 물론 사소하게//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 권혁웅
아버지는 오후가 되면 직장동료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외근을 나오곤 했다/ 초여름 녹음이 당구장에서 얻어온 푸른 융처럼/ 부드럽고 아늑한 거기서/ 아버지와 직원들은 그곳에서 진지하게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닌 카탈로그는/ 아동문학전집, 건강 자석요, 장식용 청자, 알로에/ 개인용 휴대 헤어컬 등 다양했으나/ 아버지의 영업방식은 한결같았다/ 오늘의 운세를 타고난 사람에게/ 차비와 식비를 몰아주는 것,/ 늘 담배를 입에 물고 패를 뒤집느라/ 세우눈을 한 직원, 오른쪽 검지와 엄지가 없어/ 왼손으로 패를 섞곤 했던 직원,/ 허리가 아프다며 베개와 이불더미에 기대어/ 패를 치던 직원 그리고/ 아버지 가운데 하나가 그날의 일당을 타갔다// 청단처럼 푸르른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어느날, 새우눈을 한 직원이 판을 엎었다/ 손가락 없는 직원의 서툰 기술이 문제였다/ 허리 아픈 직원은/ 다친 허리 때문에 엎드려 있었고/ 말리던 아버지만 소주병에 맞았다/ 아버지 혼자 피박과 광박을 다 덮어썼다/ 병을 깬 직원을 청단처럼 서슬이 파랬고/ 병에 맞은 아버지는 홍단처럼 얼굴이 붉었다/ 마당의 닭들이 고도리처럼 날아올랐다// 청단처럼 푸르던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그 후로 아버진 스쿠알렌만 팔았다/ 심해 상어의 간에서 만들었다는 신비한 약/ 상어처럼 늘 움직여야 하는 아버지,/ 재수가 없던 아버지,/ 십여년 후 심해로 잠수해서는/ 다시는 올라오지 않던/ -지금도 재수를 떼는 어머니를 보면/ 그 시절이 여전하다는 걸/ 알 것 같다, 이를테면// 청단처럼 푸르던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커밍아웃 / 권혁웅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 권혁웅
날 저문 낙산(落山)에서 내려다보면/ 종로는 노란 밥알, 둥둥 떠다니는/ 빛의 바다였네/ 그 바다에서 밥물 끓어넘쳐 저 아래까지 거품이 밀려왔네/ 여자 하나,/ 짠물에 밥 말아 먹고 서둘러 이리로 오네/ 붉은 저녁이 천천히 사리지고 물고기자리 떠오르고/ 감은 눈 속에선 적군파(赤軍派)라도 쏟아진 것인지/ 밥물 끓는 냄새로 빈혈의 하루가 저무는데/ 그녀의 이름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동소문동에서 창신동까지/ 30 킬로그램 화장품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그 여자, 씩씩하게 걸어서 오네/ 장땡이라도 꽃밭에 뜬 보름달 앞에선 무용지물,ㅡ/ 사슴의 무리는 지아비의 손아귀에서 울고/ 전세 보증금은 삼팔광땡 앞에서 울어/ 사면이 도무지 초가였어도/ 그 여자, 쉬지도 않고 걸어서 오네/ 양손에 쌀 백 근을 나누어 들고/ 내 깔깔한 혓바닥에 벼이삭 심으러 오네//
* "떨어져 나가 않은 산 위에서"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 소월의 시 「초혼」에서.

산등성이 마을의 불빛들 / 권혁웅
멀리서 보면 그 마을의 불빛들은/ 저들끼리 일가를 이루어/ 바람에 깜박이곤 했습니다/ 별자리가 별을 낳듯/ 조그만 길들이 가등(街燈)을 낳고 담벼락을 낳고/ 시멘트 기와지붕을 낳았습니다/ 그 빛더미 어디선가 나 역시/ 4등성처럼 희미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옆집 사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치마 자리,/ 삼선교회가 만든 자리는 아브라함 좌(座)였을 테지만,/ 우리 집이 만든 성좌는 겨우/ 술자리였습다 나는/ 낮은 처마 아래서 성문종합영어를 펴들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든가/ 침묵은 금이다 같은/ 뜻 모를 구절을 암기하기도 했습니다만/ 돌아봐도 그곳은 여전히 캄캄하고/ 불빛들만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참다못한 별 하나,/ 가출하면서 성냥을 긋듯/ 슥, 타오르기도 했습니다만//

불가마에서 두 시간 / 권혁웅
누가 이 양떼들을 연옥불에 던져 넣었나/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에 인 어린 양과/ 불가마 속에서도 코를 고는 늙은 양들로 여기는 만원이다/ 올 가을에는 기어코 성지순례를 가겠다고/ 삼년 째 돈을 붓는 아마곗돈 회원들,/ 종말을 팥빙수와 바꾸고 나자 어린아이 머리통 같은/ 구운 계란이 굴러 온다/ 천국에서도 남녀칠세는 부동석이어서/ 파란 수건은 왼쪽, 빨간 수건은 오른쪽이다/ 당신 옆의 빨간 수건이 사라졌다면/ 그게 휴거다, 그는 당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펄펄 끓는 화마지옥으로/ 아니라면 게르마늄 천국으로 갔다/ 아, 두고 온 사람을 돌아보느라/ 소금기둥이 된 이들로 이루어진 소금동굴도 있다/ 바짝 마른 양피지들이 바이오세라믹 공정을 거쳐/ 기신기신 기어나온다/ 미역국처럼 몸을 푼 이들, 조물조물/ 몸은 빤 이들, 배를 두드리며 제자리에서 뛰며/ 냉온을, 말하자면 겨울과 여름을/ 교대로 겪는 이들로 여기는 만원이다/ 그들이 벗어둔 양털이/ 기와로 벗겨낸 피부처럼 땟국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한 세상 떠돌던 꿈처럼/ 행불자가 되고 싶었던 생시처럼// 옆 마을 어딘가에는 무릉이 있을 것이다//

 



권혁웅(權赫雄) 시인, 문학평론가
1967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0년 제6회 「현대시 동인상」, 2005년 제3회 「애지문학상」(평론 부문), 2006년 제4회 「유심작품상」(평론 부문),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15회 「현대시학작품상」, 2012년 제27회 「이상화시인상」, 제12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예중앙, 현대시학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2003~)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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