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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종해 시인

부흐고비 2021. 8. 23. 06:26

풀 / 김종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잡초뽑기 / 김종해
호미로 흙을 파면서/ 잡초를 뽑는다/ 잡초들은 내 손으로 어김없이 뽑혀지고/ 뽑혀진 잡초들은 장외場外로 사라진다/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나의 손도 떨린다/ 하늘은 이 잡초를 길러내셨으나/ 오늘은 내가 뽑아내고 있다/ 밭을 절반쯤 매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밭에서 잡초로 뽑혀나갈 명단 속에/ 아, 어느새 내 이름도 들어가 있구나!//

가족모임 / 김종해
우리는 섬으로 가야 한다/ 부산에 와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흰 파도가 어머니의 앞가슴에 레이스로 달려 있고/ 어머니가 거느리는 바다/ 바람 없는 날에도/ 당신이 날린 물새들이/ 살아가는 일 속에 지친 우리들 돛대 위에/ 깃발로 펄럭인다/ 잊지 마라, 우리들의 희디 흰 슬픔/ 아버지인 천마산이 밤마다 바다로/ 한 뼘씩 하산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인 부산아,/ 칠월이면 우리 또한 섬으로 가야 한다//

가족 / 김종해
천마산 눈썹 아래/ 초장동 산비탈이 있고/ 천마산 코딱지 같은 우리 집이 있고/ 충무동 푸른 바다가 있고/ 새벽 별을 보며 생선도가로 내려가는/ 이모 집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리치는/ 외삼촌 집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우리 집에 와서/ 해장술에 취한 천마산은/ 어머니에게 술국을 더 달라 한다/ 아버지와 형은 말없이/ 절구에 떡을 치고/ 누나와 나는 맷돌을 돌린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아우가 손을 놓을 때쯤/ 누더기 같은 우리의 희망이/ 빨랫줄에 펄럭일 때쯤/ 천마산은 바람과 안개를 거느리고/ 넌지시 산을 오른다//

어머니의 맷돌 / 김종해
맷돌을 돌린다/ 숟가락으로 흘려넣는 물녹두/ 우리 전가족이 무게를 얹고 힘주어 돌린다/ 어머니의 녹두, 형의 녹두, 누나의 녹두, 동생의 녹두/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녹두물이/ 빈대떡이 되기까지/ 우리는 맷돌을 돌린다/ 충무동 시장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의 남폿불이 졸기 전까지/ 우리는 켜켜이 내리는 흰 녹두물을/ 양푼으로 받아내야 한다/ 우리들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맷돌일 뿐/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타리로 서서/ 우리들의 슬픔을 막고/ 북풍을 막는다/ 녹두껍질을 보면서 비로소 깨친다/ 어머니의 맷돌에서/ 지금도 켜켜이 흐르고 있는 것/ 물녹두 같은 것/ 아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사모곡 / 김종해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 머. 니//

이모의 대나무 / 김종해
청상과부가 된 이모의 작은 땅에는 대나무가 자랐다./ 생선도가에서 떼온 이모의 생선상자에는/ 언제나 푸른 비늘이 돋았다./ 이모의 도마 위에 오른 생선들처럼/ 우리는 이모가 생선 회칼보다 무서웠다./ 책보따리 들고 학교는 가지 않고/ 충무동 진개장에서 한 사흘 떠돌다/ 우리는 들켰다./ 그날밤/ 청상과부가 된 이모의 작은 땅에서/ 무섭게 솟아오르는 대나무 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우리는 이모의 도마 위에 올랐다./ 바람도 숨을 쉬지 않았고/ 우리를 떠받쳐 주던 천마산도 눈을 가렸다./ 그날밤 우리의 종아리에선/ 충무동 방파제의 비명 같은 파도 소리가 들렸고/ 뒤집혀진 우리의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우시는 이모의 대나무 소리가 들렸다.//

나의 아내 뉴질랜드 / 김종해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아내가 가진 사막,/ 습기없는 사막 가운데서 자라는 풀,/ 터석을 보았다/ 아내의 사막에 바람은 불고/ 마른 터석은 굴러다닌다// 봄이 오는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만년설을 이고 귀국하는 아내/ 뉴질랜드의 터석은 굴러서/ 내 이순의 사막에 와서/ 딱 멈추었다//

잘가라, 아우* / 김종해
암 투병 1년여 간의 여명이 끝나고/ 마침내 호스피스 병동에/ 아우가 누워 있다/ 며칠 후, 며칠 후, 아우가/ 이승의 강을 건너간다/ 이별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병동은/ 차라리 산자들의 고문장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마저 나는 믿을 수 없구나/ 가슴에 담아둔 말/ 쏟지 못하고/ 아우여, 나는 아우의 여윈 손만 잡는다/ 눈을 감으면, 아우의 전 생애가/ 한꺼번에 온몸에 감전되어 흘러내린다/ 너를 위해 세상의 어떤 말이/ 위로가 되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아우여, 나는 너의 여원 손만 잡는다//
* 2014년 타계한 김종철 시인이 친동생.

나의 마을 / 김종해
12월 초순에도 빨간 겨울망개가 열리는 눈에 묻힌 나의 마을에는/ 난롯가에 앉아 두 볼이 붉은 아낙들이 커다란 귀바늘을 쥐고/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에 덮인 이 마을의 창틀마다/ 황홀한 화제와 불빛이 새어나고/ 한겨울밤 아낙들이 하는 그 고요의 뜨개질에/ 천사의 제일 아름다운 시와/ 꿈의 세포가 짜여진다/ 사나이들은 읽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색색의 수실로 뜬/ 아낙들의 꽃병에 꽂힌 겨울 흑장미의 보이지 않는 동요와 신비스런 소리를 듣는다/ 눈이 한밤내 내리는 날 밤은/ 영혼을 재는 저울을 들고/ 하늘에서 몰래몰래 강림한 겨울신들이/ 아낙들이 떠놓은 자수 속에 들어가/ 사슴이 되기도 하고 학이 되기도 하고/ 겨울 매화의 봉오리를 다소곳 열기도 한다//

별똥별 / 김종해
공구가 죽은 얼마 뒤/ 청산가리를 먹고 구짱이 죽고/ 우리들의 대장 만출이 녀석도/ 세상을 떴다// 우리는 그 녀석들이 사라진 하늘에/ 방패연을 띄웠다/ 천마산은 곤충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로하였으나/ 초또패의 잔당인 우리는/ 풀이 죽었고/ 곡정패는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유난히 달 밝은 날 밤에는/ 구짱의 하모니카 소리가/ 대나무숲에서 우리를 불렀고/ 그런 날 밤이면/ 나는 똥을 누고 싶었다// 가위에 눌린 채 어머니를 깨우고/ 옥수수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녀석들은 별똥별로 나타나/ 긴 옥수수 잎사귀로 내 등을 찔렀다// 똥은 나오지 않고/ 앉은 채로 걸음을 옮기면/ 녁석들은 또 별똥별로 따라왔다가/ 멀리 구덕산 쪽으로 차르르 흘렀다//

늦저녁의 버스킹 / 김종해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 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 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 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 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아내를 사랑하라 / 김종해
희수喜壽를 앞둔 노년의 나이/ 눈도 귀도 몸마저 조금씩 돌아가는 그 나이/ 지나온 세월이 남긴 행복과 불행을/ 묻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라// 반려자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년은 얼마나 슬픈가/ 아내가 죽어서 없는 것보다/ 아내가 살아 있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 아내와 함께하는 세상의 삶이 내게는 은혜롭다// 프로야구에 빠져 거실의 TV를 보다가도/ 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방영시간이면 방을 옮겨라// 주중엔 집안에 오래 머무르지 말며/ 없는 듯 지내고, 소리 내지 말라/ 아침에 아내가 외출하면 행선지를 묻지 말며/ 귀가 시간을 묻지 말라// 아내의 쇼핑/ 아내의 해외여행 경비 지출에/ 조금도 불편한 내색을 보이지 말며/ 압력밥솥의 밥은 손수 퍼서/ 식탁 위에서 조용히 먹을 것/ 먹고 난 뒤 그릇들은 즉시 씻어둘 것// 아내의 눈치를 보며 반주飯酒상을 차리려면/ 아내도 함께 즐길 안주감을 장만할 것/ 한 주에 한두 번 수산시장에 가서/ 아내가 좋아하는 바다생선류들을 장보아 올 것/ 생선 내장을 빼고 말리거나/ 냉동실에 넣기 위해 손질할 때도/ 칼 잡은 손을 놓지 말며/ 도마 근처에서 떠나지 말 것// 낮시간에 가끔 영화관도 함께 가라/ 가서, 눈가에 감도는 눈물도 아내 몰래 닦아내라// 아내가 죽어서 없는 삶보다/ 아내가 생기 있게 살아 있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 아직은 아프지 않고/ 이 세상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삶이/ 나에게는 은혜롭다//

고래들은 바다를 버렸다 / 김종해
지평선 위로 산이 꾸물거린다/ 비는 내려서 산을 적신다/ 검은 산은 비를 마시고/ 지평선 위로 비를 뿜어올린다// 오늘 저녁/ 비 오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한 잔 술에 취한다/ 선창에 기댄 채/ 나는 비를 맞고 있다// 사람마저 항해하기 힘든 도시/ 나는 비를 맞고 있다/ 고래는 왜 내가 살고 있는/ 지평선으로 헤엄쳐 왔는가// 내 젊은 날의 바다,/ 내가 뿜어올렸던 바다,/ 고래들은 모두 수평선을 버렸다//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 김종해
새해 첫날 아침/ 유리창으로 굵은 눈송이가 들이친다/ 바람은 눈송이를 이고 하늘로 오른다/ 나는 고층아파트와 함께 끝없이 하강한다/ 간밤의 어지러운 꿈속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지워지고/ 공중에서 새해를 맞는 아침은 눈세상/ 각을 세운 세상 속으로 나는 하강한다/ 사선을 그으며 파닥이는 눈송이들이 율동/ 세상 속으로 연착륙하는 눈송이는/ 저마다 하얀 날개를 갖고 있다/ 가슴 속의 각을 지우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눈송이/ 새해 첫날 아침 내리는 눈은/ 지상에 닿기 전에/ 내가 가진 세상의 각을 지우고 있다//

잔치국수 / 김종해
지금도 꿈을 꾸면/ 충무동 시장 안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가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올리면/ 두 개의 물통에 물이 넘치고/ 나는 아직도 키 작은 중학교 2학년/ 땅바닥에 물통이 닿을 듯 말 듯/ 물지게를 지고/ 어머니의 드럼통에 쏟아붓는다/ 양은솥에는 끓어오르는 멸치국물/ 대나무 소쿠리엔 국수 면발들이/ 허연 입김을 뿜어댄다/ 서러운 잔치가 끝났음에도/ 어머니는 잔치국수 다발을 다시 말아올린다/ 지금도 꿈을 꾸면/ 충무동 시장은 아직도 잔치판 속에 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 김종해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 시장 곳곳을 뒤진다/ 굶을 때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담긴 국수 면발과/ 가득 찬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면/ 어느새 배부르고 든든한 잔치국수/ 굶어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잔치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갓 삶아 무쳐낸 부추나 시금치나물,/ 혹은 아무렇게나 썰어놓은 김장김치 고명 위에/ 어머니 손맛이 밴 양념장을 끼얹으면/ 젓가락에 감기는 국수 면발이/ 입안에 머물 틈도 없이/ 목구멍을 즐겁게 한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를 위해/ 대나무 소쿠리엔 밥보자기를 씌운/ 잔치국수 다발/ 양은솥에는 아직도 멸치국수가 뜨겁다//

눈 /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비비고/ 눈이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리면/ 난/ 누군가를 업고 싶다.//

찔레꽃 -별들도 궁녀처럼 / 김종해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달빛 열두 필/ 한뜸 한 뜸 오려내어/ 찔레덤불 위에 부려지면/ 찔레꽃 향기 천지에 가득하다// 오월의 며칠/ 노란 꽃술 흰 드레스로/ 새벽같이 어머니는 오시고/ 별들도 궁녀처럼 가만가만 뒤따른다//

찔레꽃 -열매는 눈속에서 더 붉다 / 김종해
찔레꽃 열매는 눈속에서 더 붉다/ 바람에 날려/ 흰 꽃잎 다 떨어지고/ 꽃잎 매달린 자리/ 오늘은 별들이 내려와 매달려 있다/ 한번 바람 부니까/ 지난 봄 간곳 없고/ 사람이 살다간 자리/ 아슬하게 벼랑만 남아있다/ 붉은 열매 떨어진 자리/ 오늘은 눈이 흰 꽃잎 오려 붙인다//

모두 허공이야 / 김종해
이제 비로소 보이는구나/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이생의 슬픈 일마저 내 가슴에서 떠나는구나/ 귀가 먹먹하도록/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 나도 꽃잎 따라 낙하하고 싶구나/ 바람을 타고/ 허공 중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 무슨 묵언 같기도 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 봄날 허공 중에 떠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봄꿈을 꾸며 / 김종해
만약에 말이지요, 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 이월이요. 한 밤 두 밤 손꼽아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 산수유, 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봄바람 / 김종해
개같이 헐떡이며 달려오는 봄/ 새들은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꽃들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속치마 바람으로/ 반쯤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 가운데 숨은 여자/ 정숙한 여자/ 하얀 속살을 내보이는 목련꽃 한 송이/ 탓할 수 없는 것은 봄뿐이 아니다/ 봄밤의 뜨거운 피가/ 천지에 가득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뜨뜻해지는/ 개 같은 봄날!//

이 봄의 축제 /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5월의 사랑 / 김종해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섬으로 떠서/ 그대는 노오란 유채꽃으로 웃고 있누나/ 맑은 바람 있는 대로 풀어놓고/ 내 남쪽바다의 물결을 다스리누나/ 다도해의 봄밤은 깊어가는데/ 잠 못 드는 젊은 짐승/ 내 베갯머리에/ 물결로 와 찰싹이누나/ 초파일 꽃등행렬 위로/ 물인 듯 바람인 듯/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그대, 5월의 사랑아//

가을 길 / 김종해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길//

가을 문안 / 김종해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가을에는 떠나리라 / 김종해
바람 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가을보행 / 김종해
종로에서을지로로걸어가는동안/ 가로등에불이당겨지고/ 가만히나의얼굴에와떨어지는/ 한 장의잎사귀/ 나는뚫어진그空洞을주워들었다/ 그때나는알수없는부상을입었다// 내가갖는文章속에서나는단순하지못한낱말이다/ 복잡한몇개의미신과개성을포함한낱말이다/ 이가을잘이어지지않는언어의관절을앓다가/ 두주일만에종로로나와서갖는내개인만의회합/ 서점유리문에비친憂愁를밀고나와/ 종로에서을지로로걸어가는동안/ 나는하나님이경영하는마을의/ 제일불행한천사의발자욱을보았다// 온갖우상과환각과性問題들이들끓는/ 나의호주머니에/ 쩔렁이는몇잎의동전/ 공중전화통에서/ 잠시후하나님에게거는통화/ 갈색의공간에서새들은날아가고/ 수화기의귀지속에/ 얼굴보다큰한장의잎사귀가커다랗게덮인다// 종로에서을지로로걸어가는동안/ 내영혼에누전되어와닿는/ 그잎사귀의뚫린空洞이커져가는것을보았다/ 나는그때부터투명한유리속을걷는다/ 가로등에불이당겨지고/ 내가갖는등잔에서증발하는/ 온갖운명의문제/ 미궁으로가는버스에공복을실리고지폐를내주었다// 우리집방안의내장속에서/ 나는아내와아이들의家具가된다/ 아내의電蓄속에서/ 예리한바늘에꽂혀도나는/ 날마다반복되는가계부와/ 한주일에두번쯤교신하는本能과/ 아이들의눈속에서겨우돋아난감각,그환경의일부/ 종로에서을지로로걸어가는동안/ 나는다시영혼의깊은暗室에와갇혔다//

가을 속삭임 -인간의 아들아, 神의 어머니가 와서 너희 날의 아픔을 꿰/ 매려는 이 시각에 너희들은 모두 숨어 있구나. 어서 나오/ 너라, 시들지 않는 풀잎을 주리니 / 김종해
이제 날은 저물고/ 우리 깊은 마음에 구르는 한 장의 잎사귀에서도/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어서 흔들어 깨워라/ 우리 깊은 마음에 날려와 쌓이는 가랑잎을 타고/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이 가을에 우리가 까마득히 잠들고/ 우리 님이 떠나가면/ 또 다른 여인이 우리를 다시 낳아주지 않으리라/ 오래오래 닦아둔 은빛의 등촉대에/ 까물거리는 우리의 영혼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걱이는 갈대밭의 갈대꽃에게나 지껄이듯/ 이 가을에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원을 말해주어라/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가을 산새 / 김종해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가을 산새/ 가을이 되니까/ 저녁 햇살이 밥으로 보이니까/ 우리 집 찔레나무 덤불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서오릉 길 너머/ 봉산에서 내려온 가을 산새가/ 뭐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다/ 어린 날 귓속에 쟁쟁 울리는/ 엄마새 소리/ 종해야, 죽 먹고 자!/ 죽 먹고 자!/ 굶고 자는 아기새 위로/ 엄마새가 맨 앞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텃새 / 김종해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새는 언제나 언제나/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 저물녘 별들은 등불을 내거는데/ 세상을 등짐지고 앉아 깃털을 터는/ 텃새 한 마리/ 눈 날리는 내 꿈길 위로/ 새 한 마리/ 기우뚱 날아간다//

도시의 새 / 김종해
서울에서 가장 먼저 겨울이 오는 곳을/ 나는 모른다/ 겨울이 오든 말든/ 사람들은 종묘 앞 공원에 서성거리고/ 저마다 몰래 감춰둔 날개를 꺼내/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고 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들이 이 도시에서 막 떠오르는 찰나/ 사과탄 연기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포도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낙엽이지만/ 포도에 떨어진 그들의 옆구리에는/ 먼 겨울길을 가는 붙박이 철새의 날개가/ 비죽이 나와 있었다/ 나는 알지, 이 도시의 지붕/ 천년의 겨울이/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가로막고 있어도/ 저 뜨거운 날개가 있는 한/ 날아오르고 다시 날아오르고 할 것임을/ 나는 잘 알지//

겨울 메시지 / 김종해
시들 것은 다 시들고 떨어질 것은 모두 떨어졌다/ 들판이여, 목마른 이 땅을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새벽에 일어나 저희 우물을 긷던 그 부산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등불을 끄지 않고 이 밤에 다들 자지 않지만/ 오오, 이제 바람이 불면 마을의 문들을 꼭꼭 닫으시오/ 허나 대문에 빗장을 내다지르고도 저희는 잠들지 못한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익숙하게 부벼댈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저희의 불빛은 더 희게 번쩍인다/ 캄캄한 숲속에서 컹, 컹, 컹, 컹 울리는 저 울부짖음/ 사나운 한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그리운/ 이 외롭고 어두운 날/ 목마른 대지에 젖을 먹여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들판은 새로 태어날 제날을 안고 머리를 숙이었다/ 이 외롭고 어두운 날, 아버지여/ 시들은 풀꽃의 죽지 않은 뿌리, 짓밟히고 억눌린 모든 것의 얼굴들에/ 이제 곧 저희의 배가 가까이 옴을 예언하소서//

시인 선서 /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시를 읽다 / 김종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시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집 속에 끈끈하게 저희끼리 결속되어 있던 시들이 바닥에 부딪쳐 허공으로 일// 제히 튀어 오르고, 시의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성음으로 하얗게 허공에 반짝이다 천천히 천천히 높이를 버리고 떨어졌다// 바닥에는 피가 흘렀다 응고된 말들이 모두 풀어지니까 그게 모두 시처럼 보였다 시집은 시를 모두 버렸다 하얀 종이뿐이었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 김종해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아침에 짤막한 시 한 줄을 읽었는데, 하루종일 방/ 안에 그 향기가 남아 있는 시./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는 따뜻한 시./ 영혼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수 같은 시./ 눈물이나 이슬이 묻어 있는 듯한, 물기 있는 서정시/ 를 나는 좋아한다./ 때로는 핍박받는 자의 숨소리, 때로는 칼날 같은 목소리,/ 노동의 새벽이 들어 있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한철을 지내는 동안 떫은 불 다 빠지고/ 시인의 마음 안에서 열매처럼 익은 시./ 너무 압축되고 함축되다가 옆구리가 터진 시./ 그래서 엉뚱하고 다양한 의미로 보이기까지 하는/ 선시禪詩 같은 시./ 뿌리와 줄기도 각기 다르고, 빛깔과 향기도 다르지만,/ 최상의 성취를 꽃으로 빚어내는 하느님의 시./ 삶의 일상에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세상사의 중심을 시로써만 짚어내는 시인의 시./ 시로써 사람을 느끼며,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 을 자랑하고 싶은 시./ 울림이 있는 시, 향기 있는 시./ 나는 이런 시가 정말 좋다.//

아직도 사람은 순수하다 / 김종해
죽을 때까지 사람은/ 땅을 제것인 것처럼 사고 팔지만/ 하늘을 사들이거나 팔려고 내놓지 않는다/ 하늘을 손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아직 순수하다/ 하늘에 깔려있는 별들마저/ 사람들이 뒷거래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순수하다//

섬 / 김종해
동짓달 겨울바다가 시중을 들면/ 모후母后께서 지상으로 길을 내어 오시는/ 겨울섬 하나./ 짐이 날린 물새들이/ 섬을 물고 떠 있다./ 섬은 한시 짐 속에 있되/ 섬으로 가는 길 또한 끊겨 있다./ 세상일 서럽고 파도 높은 날/ 모후께서 보내주신/ 겨울섬 하나./ 오늘은 짐의 베갯머리에 와/ 찰랑이나니/ 섬은 짐을 떠나지 안고/ 모후께서 내린 달빛이/ 짐의 그름밤을 일깨우나니…//

섬 하나 / 김종해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대한민국이 유리창에 떠 있다 / 김종해
광화문 근처 아파트로 이사온 지 4년/ 삶의 가파른 벼랑을 날마다 오르느라/ 나는 대한민국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놈의 좌파와 우파, 온갖 노조와 이익집단이/ 광화문의 멱살을 잡고/ 대한민국의 숨통을 죄고 있을 때도/ 나는 귀를 막았다/ 아파트 창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내렸다/ 인왕산도 북악산도/ 아직 이삿짐을 풀지 않은 밤/ 한밤중 불면의 시간 속에/ 광화문이 조금씩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나는 예리한 그 소리를 들었다/ 이사온 첫해부터 들었던 그 소리는/ 수십만의 매미가 일제히 몰려와 내는 함성이었다/ 저 미물들이 내는 경고음에 잠을 설치며/ 내일 대한민국이 날아오르는 박동을 생각했다/ 광화문 근처로 이사를 오고 난 다음부터/ 나는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열혈 팬들이/ 문 밖에서 연호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밤마다 유리창에 등불처럼 떠 있다/ 그런 날 밤에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연다//

푸른 별에서의 하루 / 김종해
우주 바깥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언제나 푸른 별이다/ 작고 아름답다/ 저 푸른 별 안에서/ 나는 지금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길은 사막 같기도 하고 강물 같기도 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만리 바깥을 보지 말라던/ 앞선 사람들의 유훈을 깜박 잊어버렸다/ 푸른 별의 시공 속에 잠시 살았던/ 그 사람들이/ 가끔 꿈속에서 별로서 나타난다/ 푸른 별은 언제나 나의 일상 속에 있다/ 사람의 하루가 또 저물어가는구나//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 / 김종해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 봄날마저도 가슴에 노란 흉장을 다는구나/ 올해 봄이 왜 슬픈지 너희들은 알겠구나/ 진도 팽목항 애끊는 포구/ 애절하고 비통하다/ 억울한 죽음이여/ 사는 길 지켜주지 못해서/ 노랑 리본 가슴에 꽂고/ 엎드려 사죄한다/ 이 나라와 사회는 아직도 미숙하다/ 얼마나 많은 세월호가/ 우리 곁에서 또 침몰해야 하느냐/ 나라 안 방방곡곡 슬픔을 삼킨다/ 봄날마저도 상중(喪中)이라/ 꽃들마저 상복을 입는구나/ 하얀 미사포 머리에 썼구나/ 눈 감고 가는 봄날/ 천지가 하얗게 저물어 가는구나//

주여, 용서하소서 / 김종해
여름방학 중인/ 여자 중학교는 적막하다/ 빨간 4층 벽돌 건물 아래/ 여학생 하나 느닷없이 출현한다/ 초조하다/ 전후좌우를 경계하며 살핀다/ 급히 팬티를 내리고 스커트를 걷어 올린다/ 아, 엉덩이/ 하얗고 예쁜 꽃송이/ 쉬야를 한다/ 빨간 벽돌에 분사된 물줄기는 흘러서/ 하얀 엉덩이 뒤쪽으로 도랑을 이룬다/ 보지 마라!/ 눈을 감을 수도 없는 그 잠깐 사이/ 나는 중학교 이웃집 옥상에서/ 죄인이 된다/ 주여, 용서하소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 김종해
서울에 며칠째 폭염경보가 내려진 8월의 첫째 주/ 3.1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기미년 100주년/ 우리 조손(祖孫) 3대는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주들이 함께 하는/ 두만강 건너 옛 발해가 숨쉬는 땅/ 한겨울 혹한기에 바다가 얼면/ 간도지방에서 인마人馬와 함께 건너가던 땅/ 해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뜨거운 햇살 아래/ 신한촌이 자꾸 눈에 밟혔다/ 대한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며/ 새 삶과 자유를 갈망하던/ 유랑 한인(韓人)들의 고난이 시작된 곳/ 옛 개척리에서 쫓겨와/ 블라디보스톡의 변두리 산비탈/ 피땀으로 다시 일군 신한촌/ 지금은 이곳에 집시보다 더 슬픈/ 카레이스키들은 멀리 떠나고 없다/ 그 자리에 우리 조손(祖孫) 3대가 서서 올리는 묵념/ 한적한 신한촌 기념탑 앞에 서면/ 가슴이 시리다/ 세 개의 대리석 기둥 기념탑 주위로/ 계절마다 피고 지는 야생화가 자라고/ 누군가 잊지 않고 올려놓은 꽃바구니에는/ 민족의 번영을 기리는/ 한인들의 꿈이 담겨 있다//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을 밤에 찾아가다 / 김종해
페르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은 그의 고향 시라즈에 있다/ 허페즈 공원 안에 안치된 그의 유해는/ 14세기의 대리석 관 안에 그대로 누워/ 모든 페르시아 영혼들의 사랑을 받는다/ 여름밤에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경배했는데/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그의 관에 기대어/ 허페즈 시집을 읽고 있다/ 부러워라/ 사랑과 평화와 안식의 아름다움/ 이란 사람들은 누구나 허페즈를 사랑한다/ 이란 사람들의 집집마다/ 서가에 꽂혀있는 두 권의 책/ 한 권은 코란/ 한 권은 허페즈 시집/ 올해의 운수, 그날의 길흉을 점치려면/ 파랑새 점을 쳐보세요/ 새장 안에서 새가 물고 나온 점괘에는/ 이란 시성 허페즈의 시 한 구절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을 환하게 안내한다//

낮별 / 김종해
아이둘을 따라 어린이놀이터에 나왔습니다/ 새힘은 아홉 살 새별은 일곱 살/ 그네를 탑니다/ 이삭은 여섯 살 이솝은 네 살/ 시소를 탑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탑니다/ 번갈아 이웃동네 하늘까지 날아오릅니다/ 장마가 끝난 하늘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랗게 낮별이 되어 떠오릅니다/ 철봉에 매달린 나는 떨어질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새처럼 날아와/ 낮에 떨어지는 별동을 떠받쳐 줍니다/ 할- 아 - 버-지!/ 나는깜짝 놀라 철봉을 더 힘껏 쥡니다//

자살 / 김종해
찢어질듯한광음이울리고난후/ 무서운적막이나의몸위를비틀거리며쓰러졌다/ 깊이를모를어둠의층계를밟고/ 멀리서누가올라오고있다/ 아아, 그보다내가하강하고있는것일까/ 확고하고당당한발걸음이나를향해서/ 가장정확한보조와진동으로다가오고있다/ 존재의모든무게가혈관을통해/ 아직극복되지않은문제와어둠을적시고/ 모든사물의머리에선어지러이쇠사슬이뒹굴고/ 나는내가갖는최후의믿음을확신하였다/ 촉박하게타들어오는심지를타고/ 나의운명을불태울순간을기다리며/ 나는당기었던방아쇠의손가락을서서히풀었다/ 비겁한자들의속삭임이물러가고/ 부정한타당성유혹이지배하던/ 온갖힘이오그라들고/ 가슴에서흐르는깨끗한맑음/ 주여, 이제비로소목이마르나이다/ 이제부터비로소일을주시옵소서/ 구멍이뚫린가슴의뒤켠에선/ 아직도풀꽃이흔들리고있었다//

인사동으로 가며 / 김종해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등이 내걸리고/ 우모(牛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바람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 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을 비추며/ 나는 갑니다//

우리들의 우산 / 김종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에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 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젖지 않는 꿈, 젖지 않는 희망을/ 누가 간직하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의 난로 -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나의 말) / 김종해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난로를 보아요/ 연기마저 보이지 않는 불꽃/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는 화염을/ 나는 당신에게서 보아요/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화상을 입어요/ 나는 보아요/ 영원의 한 순간을/ 지상의 사랑이 떠올라 별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아요//

그대에게 띄운다 / 김종해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위태위태하게 적재되어 있고/ 야반에 고속으로 질주하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다발과/ 안전장치가 풀어진 뇌관/, 그리고 기타 등등의 물건 꼬리표에는/ 수신인의 주소,/ 내 불륜의 사랑이/ 모나미 사인펜으로 적혀 있다/ 이 밤 안으로 나의 덤프트럭을/ 불이 환한 그대 집까지/ 당도케 해야 한다/ 쌍라이트 환하게 켜고/ 고속으로 달리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있고/ 크라프트지 꼬리표가 달린/ 내가 있다.//

황톳길 / 김종해
황간에서 상주, 상주에서 두원 가는 길은/ 발바닥이 아프다/ 나는 여섯 살/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다/ 가도가도 황톳길/ 나는 주저앉아 있고/ 뒤따르던 제비꽃, 애기똥풀꽃이/ 황토분 바르고/ 엄마 등에 업혀서 쉬고 있다/ 소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농부가/ 엄마의 미색에 반해서/ 여섯 살 나를 번쩍 들어 소 등에 태웠다/ 무섭다고 악을 쓰며 나는 울었는데/ 발바닥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엄마와 단둘이 걷는 황톳길이/ 나는 더 좋았다//

물, 우리의 사랑법 / 김종해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우편 배달부 / 김종해
아직 바람은 차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그루 나목으로 서 있을 뿐,/ 저희 잎사귀와 푸르름을 달기 전의/ 신새벽 같은 그리움 속으로/ 우편 배달부이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집집마다/ 한 장 한 장 엽서를 보내 주시나니/ 아직도 봄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리움을 가진 분들게/ 우편 배달부이신 당신은/ 손수 한 장의 눈발로/ 지상에 강림하시나니/ 그 엽서 받아보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흘의 봄밤을/ 저희 땅에 예비하고/ 비로소 등불을 켜달고/ 먼길 채비를 하는 눈물겨운 풀잎들/ 아직 바람은 차고/ 이 2월에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새로 혼령을 받아 거듭거듭 일어서는/ 저 하찮은 풀잎이 하는일 하나만 보아도/ 우리 아버지 뜻을 알겠네.//

새벽 뜰에서 / 김종해
밤 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회항 / 김종해
겨울비 내리는 새해의 첫주말/ 나는 너를 보려고/ 김포에서부터 날아올랐다/ 내가 가진 두 장의 은빛 날개/ 두 눈을 감고서도 고향 가는 길을 나는 안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날기/ 그리움의 날기/ 나는 너를 보려고/ 시시때때 기체를 활주로로 끌어낸다/ 저 조그만 지상의 불빛이/ 우리 살아 있음의 사랑의 주소/ 겨울꿈들이 구름으로 떠올라 있는/ 네 하늘 위에서/ 그러나 나는 일순 멈칫거린다/ 접근 금지./ 겨울 폭우 속에 빗장을 굳게 잠근/ 네 공항 위에서 몇 바퀴 돌고 돌다가/ 네 얼굴 언저리/ 두 뺨 위를 돌고 돌다가/ 깜빡이는 비행등을 달고 회항하는/ 겨울의 내 사랑아//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 김종해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나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다/ 외로워지니까 추억이 그 자리를 넓힌다/ 내 안에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무인도뿐이다/ 저 혼자 바위가 되거나/ 바람이 되는 것이다/ 하루치의 미세량!/ 무인도에선/ 그리운 사람의 이름만/ 파도소리를 내고 있다//

반품 / 김종해
그대에게서/ 반품이 되어 돌아온 내 시詩를/ 오늘은 작두날로 썰어/ 파지로 버린다/ 전에는 국판 크기였는데/ 오늘은 탈색된 B6판 크기의/ 쓸모없는 세상의 한쪽에 비켜서서/ 작두날마저 먹지 못하는/ 파지로 버린다/ 몇 대의 트럭에 실려/ 파지공장으로 떠나는/ 저 낯익은 얼굴!/ 그 트럭 위에/ 오늘은 내가 반품으로 앉아 있다//

고별 / 김종해
지상의 시간이 끝난 사람이/ 잠자러 가는 시각,/ 인간의 이름은 모두 따뜻하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비밀 / 김종해
다섯 시간 동안 나의 영혼은 정전되었다/ 다섯 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의사들은 내가 가진 불가사의의 풀잎들을 뜯어맞추었다/ 세포의 하나하나/ 내가 가진 우수의 실뿌리를 잘디잘게 풀어헤쳤다/ 미세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미세한 모든 것이 의사들에게 낱낱이 포착되었지만/ 그러나 단 하나/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비밀만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수술이 끝난 뒤 일주일 동안/ 의사들은 내 몸에서 끓어오르는 高熱을 잡지 못하였다/ 수술 뒤 일주일 동안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열풍에/ 의사들은 지치고 두 손을 들었다/ 아아, 시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스스로 열풍을 거두어들였다/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단 하나의 비밀,/ 義와 사랑으로 수놓여진 그 주머니 속의 열기를/ 부활하는 나라의 새 아침에/ 무릎 꿇고 조용히 당신께 바치리라//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까닭 / 김종해
나는 내 차의 결함이 어떻다는 것을 모른다. 치질수술을 받지 않고, 이빨을 갈아끼우는 단순한 내 몸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나는 내 차의 결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0년식 콩코드의 노회한 숨소리가 조금씩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헐떡이고 있다, 밀리고 있다, 새고 있다라는 자각증상이 내가 밟은 타이어 자국마다 묻어났다. 순정부품으로 갈아끼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주 눈발처럼 차창에 달라붙는 저 쓸쓸함과 허전함과 무슨 순정부품으로 갈아끼울 것인가. 갈현동 언덕 아래서 멈칫, 나는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 김종해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새날은 더욱 눈부시다/ 서설이 깔린 길은 더욱 눈부시다/ 그대 식탁 위의 은식기마다 반짝이는 것은/ 햇빛 같은 사랑/ 가득 담겨 있을수록/ 내일은 푸르고 더욱 아름답다/ 새날을 받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 그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약간의 어둠이다/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내일 아침 햇살을 낳기 위해/ 오늘 밤을 진통하는 여인처럼/ 그대의 식탁 위엔/ 아무도 손대지 않은/ 한 세기가 차려진다/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오늘 아침/ 세상은 더욱 눈부시다//

  [시집]   항해일지

 

항해일지 1 -무인도를 위하여 / 김종해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嚴冬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항해일지 2 / 김종해
이웃에서 항해하던 배가 한 척 침몰하였다./ 야음(夜陰)을 타고 우리는 그가 살았을 때/ 떠 있던 그의 항로 위를 가 보았다./ 대전 오류동의 물살이 거세었나/ 하늘에는 별, 땅에는 시인(詩人)/ 이승을 밝히던 그의 항해등도 울음소리도/ 물결 속에 흔적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때묻은 돛폭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다감하던 우리의 선량한 어부,/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노질하는 우리의 돛대 위에 앉아 깃털을 날렸다./ 해저를 걸어/ 천주교 공동묘지에 그의 유해를 조용히 내렸다./ 해저 속에 그를 수장(水葬)하며 비로소 우리는/ 고인(故人) 몰래 눈물을 뿌렸다./ 감추고 억제하던 우리의 슬픔을/ 우리들이 맞이한 이날의 부음(訃音) 위에/ 비로소 마음놓고 뿌릴 수 있었다.//

항해일지 3 -시일야방성대곡 / 김종해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약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 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린다.//

항해일지 4 / 김종해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하였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무엇인가 그물에 걸려서 퍼덕일 것 같은 번쩍임의 예감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날마다 을지로나 청계천으로 노를 저어 가지만/ 헛일이었다. 아아, 헛일이었다./ 눈은 와서 이미 겨울바다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석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물 사이에 빠지는 눈오는 바다를 금전출납부 위에 올려놓고/ 아침마다 도장으로 눌러대지만,/ 계산기 위에 결재 서류의 숫자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지만,/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 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 놓는 저놈의 상어,/ 음흉한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아, 나는 왜 작살을 날려 저놈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나./ 춥고 어두운 겨울 항로 가운데/ 오늘은 한 젊은 수부가 사는 화곡동에 닻을 잠시 내리고 잔을 나누다.//

항해일지 5 / 김종해

항해일지 6 -암초 / 김종해
암초를 보았다 청계천이나 을지로, 삼일로나 종로 혹은 퇴계로의 어느 쪽이거나 노를 저어가는 곳마다 그것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어뢰마냥 둥둥 떠서 그것은 나의 배 곁에 따로 다가와 있었다. 항해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저 절대적인 힘의 덫을 우회하기 위하여 나는 한낮에도 날개를 접고 돛을 접고 점화하는 일마저 삼가야 한다 저 암초에 부딪혀 부질없이 사라져간 어리석은 수부들을 생각하라 우리가 날마다 떠 흐르는 바다 위에서 상하고 으깨어진 일이 어디 이것뿐이랴 진달래, 개나리가 그리운 오늘은 선창을 활짝 열고 4월에 침몰했던 젊은 수부들의 혼을 떠올리다.//

항해일지 7 / 김종해
을지로 쪽을 날마다 항해하다가 느낀 일이지만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 고요한 바다에서 해적들을 불러 모으리라 작심하였다. 을지로 2가에서 닻을 내리고 한밤중에 자주 나는 이 부근에 가라앉았던 해적선을 인양하려 했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갖고 있을 법한 해저 케이블에 걸려 쓰러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 퇴계로 목에서 흐르는 물살을 타고 1960년 4월에 가라앉았던 수부(水夫)들이 갑판 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시각에 황량한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해적들과 함께 나는 안개 자욱한 이 항구에서 무적(霧笛)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목발을 짚은 이 시대의 절름발이들, 애꾸눈이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싣고, 의(義)와 사랑을 선창 가득히 싣고, 개인적인 우수(憂愁)를 존중할 줄 아는 해적선의 수부들과 함께 날카롭게 이 시대의 물살을 가르고 싶었던 것이다.//

항해일지 8 / 김종해

항해일지 9 / 김종해

항해일지 10 -조개의 시 / 김종해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 놓고 서로 엉겼다./ 포장술집에서 우리는 밧줄을 잡아당기며/ 부담없이 정박하기 위해/ 한 잔, 한 잔, 한 잔을 붓고 또 부었다./ 너도 나에게 열어 주지 않았고/ 나도 너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우리의 단단한 껍질이 뜨겁게 달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맞물고 있는 두 개의 껍질,/ 상처받지 않으려는 조심조심조심 때문에/ 우리의 낱말 위에 새로 돋아난 단단한 조가비/ 그 속에서 우리가 숨기고 있는 슬픔이야/ 하얗게 진주가 되든지 말든지/ 가슴 아픈 소금이 되든지 말든지/ 오늘은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놓고 서로 엉겼다.//

항해일지 11 –잠수부 학재 / 김종해
잠수부 학재의 어머니는 점쟁이였다/ 그녀는 대를 흔들고 칼을 던져 점을 쳤는데/ 아들이 자라서 잠수부가 되리라고는 점치지 못했다/ 잠수부 학재가 물굽이를 넘나들며/ 해저에서 캐어올리는 것은 진주조개가 아니다/ 시퍼렇게 불어터진 난파선의 혼령이었다/ 그 시체들을 하나식 거머잡고 건져올릴 때마다/ 바다는 휘파람새의 깃털을 길게 날렸다/ 종로 3가의 포장술집에서/ 휘파람새의 휘파람 소리 같은 술잔을 들이켜며/ 오늘 내가 잠수부 학재를 떠올리는 것은/ 그가 이 도시의 어느 수면에서 자맥질하며/ 침몰해가는 우리 시대의 난파선을, 그 주검들을/ 그의 검고 억센 주먹으로 거머잡으러 오지 않나/ 두려워해서다//

항해일지 12 –용접공 김씨 / 김종해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는 평소 말이 없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란/ 그가 하루 종일 땜질하는 용접봉의 숫자보다 적다./ 용접공 김씨가 하는 일이란/ 도크 안으로 들어온 폐선의 내장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일이다./ 빨갛게 녹슬은 쇠붙이에 불을 당기고/ 그가 든 용접봉이 적개심으로 이글거릴 때/ 그의 언어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용접공 김시가 절단기를 들고 일하는 날은/ 바다는 흰 파도를 거칠게 물었고/ 해저의 먼 산악은 우뢰 소리를 내었다./ 그가 사용하는 용접봉은/ 전류의 충전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숨기고 있는 한(恨)으로 불꽃을 점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한(恨)을 숨기고 있었지만/ 젊은 나의 눈엔 그것이 보였다//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의 항해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가 든 그 용접봉이/ 종로 뒷골목의 거친 물목을 항해하는/ 나의 손에 어느 날 문득 쥐어져 있었다.//

항해일지 13 -해일 / 김종해
시인들은 서울의 수위(水位)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리고곧 해일이 일어나 바람 한점 없는 평온한 이 도시가 침몰될 것이라고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그들은 지진의 진앙지를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그물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하찮은 수부(水夫)인 나는 밑바닥에서 울렁거림과 부르짖음과 그날그날의 흔들림을 잘 알고 있다. 지진의 진앙은 해저의 어느 곳에 잠복된 지층의 엇갈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해저가 아닌 더욱 다른 의미의 지층간의 엇갈림 때문이란 것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하찮은 수부(水夫)에 지나지않으므로 형이상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도 약간의 미진이 또 있었다.//

항해일지 14 –조개의 시 2 / 김종해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어/ 뜨거운 모랫바람/ 햇살에 잘 익은 청동빛 근육/ 깊고 깊은 바다에서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종소리마저도/ 오늘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깨질지언정 열리지 않는/ 석회질 속에 깊이 감춘 슬픔 때문에/ 나는 걸어갈 수 없었어/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지킬 것 하나 없는 빈 공동(空洞)에/ 우리의 슬픔은 하얗게 진주로 굳어지고/ 갯흙바닥에 나뒹굴며/ 나는 결코 문을 열지 않기로 했어/ 안개를 걷으며 무적(霧笛)을 불며/ 그대 내 조가비의 햇살로 닿을 때까지/ 오늘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항해일지 15 –에게해에서 / 김종해
에게해(海)는 청람빛,/ 삶과 죽음의 일천 겁 물굽이를 돌아/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나는 나의 바다를 비워내다/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아침 종소리는/ 어디에서도 울려오지 않았지만/ 귤빛 젖가슴을 드러낸 그리스 소녀가/ 에게해(海)를 지키고 있었다/ 지진과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 그가 지키는 청람빛 바다에/ 잠시 닻을 내리다/ 바람은 머리칼을 날리며/ 대리석 신전의 일만 년 허적(虛寂)을 뒤적이지만/ 포세이돈, 그대만은 알리라/ 내가 숨기고 있는 한(恨)과/ 내 해저에 잠복한 큰 지진을 그대만은 알리라/ 에게해(海)는 청람빛,/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잠시 정박하다//

항해일지 16 –갠지스강에서/ 김종해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웠다/ 황토물에 몸을 씻는 고행자의 기구(祈求)를/ 갠지스강(江)은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늙은 갠지스강(江)이 인도를 안고 잠들었을 때에도/ 동방의 지혜로운 빛은 강물 위에 넘실거렸다/ 형제여, 나는 타고르의 음성을 들었다./ 형제여,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붉은 천에 묶은 2구의 시신이/ 물가로 걸어나왔다./ 죽은 자의 흰 뼈가 가라앉고/ 허무 사이로 빠지는 바람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별을 받아들였다/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우며/ 기우뚱기우뚱 삐걱거리며 흘러가는/ 이방인의 서툰 노질마저도/ 그녀는 부드럽게 품어 주었다//

항해일지 17 -셍 미셀 여자형무소 / 김종해
파리 정박 이틀, 나는 가보았다/ 셍 미셀 여자형무소의 단두대/ 돌벽으로 된 지하 암벽에/ 암혈의 어둠을 껴안고 죽어갔던 여인들을 만났다/ 죽을 때까지 돌벽에 새긴 저희의 이름/ 헬렌, 엘레나, 마들렌…/ 단 하룻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들은 차라리 지상의 자유와 공기를 버렸다/ 활달하고 부드러운 눈짓으로 그녀들은 달려나와/ 금빛 정조대의 열쇠를 흔들었고/ 나는 7백 년 저쪽의 시간의 벽 속으로/ 노질하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의 보랏빛 파리/ 술잔을 기울이며/ 정조대가 벗겨진 파리의 탄력을 힘껏 껴안았다//

항해일지 18 -아구탕집에서 / 김종해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 아구란놈이해진(海辰)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칼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버림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불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닥에더욱머릴쳐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몇천마리가눈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 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적개심./ 종삼(鍾三)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뿐이다.//

항해일지 19 / 김종해

항해일지 20 –순애에 관한 기억 / 김종해
오늘은잔잔,황사바람마저불지않았다. 어느바다에도물이보이지않았으므로나는노를젓지않았다. 항해등도꺼버리고드디어나는빈손으로표류하기시작하였다. 흘러간시간속에서부표가하나씩떠오르기시작했다.// ―대낮에씨를받기위해이웃의유부녀와아버지가화간(和姦)하고있을때말이지요. 그때종마가되어달리던아버지가말이지요. 어떤체위로신음소리를내고있는지말이지요. 궁금하게여기고있을어머니가말이지요. 그때어머니는두남녀의대낮정사를돕기위해그간음을지켜주기위해말이지요. 문바깥에서문고리를잡고보초를서고있었지요. 그때도어머니의남빛바다에는물이보이지않았는데요. 항해등도꺼졌는데요.// 그때다른여인의몸에서태어난여아(女兒)를나는항해중에여러번만났다. 순애야순애야, 그녀의얼굴은내가가진거울속에기끔비쳐보였는데성별만다른나의얼굴이었다. 아버지의생애를담은배가당감동의화장터에서소각되고난다음에도나의배는표류하였다. 아버지가물길을거슬러오르며꽃씨를심던그날불가사의한부표가오늘종로의물목에서불쑥떠올랐다. 순애야, 그러나나는너를알지못한다.//

항해일지 21 –아버지와 도끼 / 김종해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민중시를 쓰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낱 장사아치의 계산기가/ 더 소중스럽지만/ 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 말의 남발보다/ 땀 흘려 일하는 개인주의를 더 사랑한다./ 절망과 눈물과 구호를 단지 속에 묻어놓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십 년 전,/ 아버지가 쥔 도끼자루는 녹슬었지만/ 밑바닥을 살았던 아버지의 적개심이/ 이 가을에/ 문득 내 손에도 쥐어져 있구나.//

항해일지 22 –구짱의 허모니카 / 김종해
우리들의 대장 만출이가 청산가리를 먹고 먼 곳으로 사라진 얼마 뒤, 연초 밀조업자 ‘복상’의 아들은 우리 집 나무 판자 울타리에 와서 하모니카를 신나게 불었다. 그날 밤 그녀석도 만출이의 사주를 받고 이 지상을 몰래 떴다. 우리집 마룻장 밑에 숨겨 팔던 밀주가 단속반원에게 들켰을 때 제일 신나는 놈은 그녀석 ‘구짱’이었다. 밀주단속반원의 양복자락에 매달여 울던 젊은 어머니가 밀주 항아리들을 하나하나 곡괭이로 깨뜨려 부쉈을 때 쏟아지던 허연 밀주는 우리 어머니의 가슴에 감춘 젖이었다. 한이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젖을 두되가량 마시고 언덕위 옥수수밭 속에 숨어서 목놓아 울었다. 우리들의 뿌리 초장 동비알도 그때 어머니의 젖을 마시고 두달 동안 술에 취하여 비틀거렸고, 달밝은 밤에는 죽은 ‘구장’까지 와서 하모니카를 신나게 불어 제꼈다.// 사람들의 말과 자유마저 얼어붙은 바다, 부르튼 내 손이 이 겨울 도시 사이로 노를 젓고 가면서 (세종로에서 밧줄이 풀어져 잠시 닻을 내리고 그날의 어머니 젖같은 낮술을 마셨음.) 문득 나는 ‘구짱’ 네놈의 하모니카를 한번 불고 싶었다. 봄이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이 겨울 도시에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

항해일지 23 –공구의 날개 / 김종해
우리들의대장만출이가스스로저희삶과바다를반납한것(좋게해석해서)이라고가정한다면, 공구는정말달랐다.// 공구는정말달랐다. 그녀석은이른봄에제일먼저피는할미꽃이고, 이른봄에천사에게서제일먼저날개를받아날아다니는찔찌리새였다. 청승맞게새의울음소리를잘내는공구의겨드랑이에는언제나날개가두장달려있다.// 녀석이날개를퍼덕이며날아다닐때우리들은하늘속이거나별속에떠있었다. 위험해위험해, 초장동사람들은우리들이떠있는것이위험하다고항상공구의날갯죽지부터묶어놓았다. 우리들이숲속에서잡은찔찌리새를갖고놀다가새가죽자공구는울었다. 이른봄바다가보이는언덕에서새의장례식을올리며공구는한마리찔찌리새가되어울었다. 어른들에게날개를뺏긴공구는결코날지않았지만그대신한마리새가되어울었다. 며칠뒤공구가죽고우리들의머리위로처음보는커다란날개를퍼덕이며공구가날아올랐을때, 우리들은저마다함께날아오르려고버둥거렸지만모두땅으로떨어졌다. 그새는먼별속으로날아갔다.// 별을보며인사동에정박하다. 새벽두시, 수부들은부질없이날아오르기를다투며술을마시다. 공구가가진날개를빌지않고나는착실하게나의노만저으리라. 노를젓고저어서저별에닿으리라.//

항해일지 24 / 김종해

항해일지 25 –서울의 악어 / 김종해
서울대공원의 열대실에 죽은 듯이 엎드린 악어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 악어를 깨우려 들지만, 악어는 정작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도 정작 이 여름에 박제된 한 마리 악어일까. 종로나 청계천 물목을 어렵게 노질하는 수부, 내 친구 가운데도 악어가 한 마리 있다. 돈이든 여자든 먹성 좋게 해치우는 걸 나는 언제나 못본 척했다. 톱니같은 이빨로 강철과 대지를 잘라먹는 더 큰 악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같이 태풍이 이는 날은/ 나도 어차피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에나 가서/ 물질하는 한 마리/ 포악한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다.//

항해일지 26 / 김종해

항해일지 27 –시인 문병 / 김종해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이 쓰러지고/ 죽은 임홍재(任洪宰)가 누웠던 휘경동 위생병원/ 이승과 저승의 물길을 넘나들던/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 우리는 마음 졸이며/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귀기울였다./ 삶과 죽음의 절반/ 그때 중환자실에서/ 그의 아내가 외던 기도 소리/ 그의 가족들이 탄 배가 좌초해 있을 동안/ 우리는 진눈깨비 뿌리는 외항을 돌며 깃발을 흔들었다/ 고장난 그의 배가 수리되고 있을 동안/ 우리는 기울어진 그의 심전도를/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의 배가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기까지/ 우리 또한 가야 할 물길/ 젊은 시인이여, 일어나라/ 그대 찢어진 돛폭에 우리가 달 수 있는 것은/ 한 줄의 맑은 사랑/ 한 줄의 궁핍한 시밖에,/ 더 무엇을 바라랴.//

항해일지 28 -한려수도 물길에 사량도(蛇樑島)가 있더라 / 김종해
사량도 눈썹 밑에 노오란 평지꽃이/ 눈물처럼 맺힌 봄날/ 나도 섬 하나로 떠서/ 외로운 물새 같은 것이나/ 품어주고 있어라/ 부산에서 삼천포 물길을 타고/ 봄날 한려수도 물길을 가며/ 사랑하는 이여/ 저간의 내 섬 안에 쌓였던 슬픔을/ 오늘은 물새들이 날고 있는/ 근해에 내다 버리나니/ 우는 물새의 눈물로/ 사량도를 바라보며/ 절벽 끝의 석란으로 매달리나니/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내 섬의 평지꽃으로 내려오시든지/ 내 절벽 끄트머리/ 한 잎 난꽃을 더 달아주시든지//

항해일지 29 / 김종해

항해일지 30 –사랑의 화재 / 김종해
정박등을 켜고 임시로 닻줄을 내린 곳/ 서초동, 그러나 아직도 안개고 밤이다/ 봄은 선미(船尾) 끝으로 물결처럼 사라지고/ 한 평의 바다도 얻지 못한 채/ 저 피안의 수풀과 꽃잎은 사라져가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날마다 별로 떠 있어/ 이승의 노질이 서툴지 않구나/ 한 사람의 별, 한 사람의 새/ 한 사람의 섬/ 이런 단순한 사랑의 말을 읽기 위해/ 오늘도 갑판 위에 나와 등피를 닦다// ―그리워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사랑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김종해(金鍾海, 1941년~ ) 시인
1941년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대시〉동인이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발기위원, 민주평통 문화예술분과 상임간사, 한국시인협회 회장, 문학세계사 창립 대표, 계간 시 전문지 《시인세계》발행인 등을 역임하였다. 시집 《인간의 악기(樂惡)》(1966),《신의 열쇠》,《왜 아니 오시나요》,《천노, 일어서다》(장편서사시),《항해일지》,《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별똥별》,《풀》,《봄꿈을 꾸며》,《늦저녁의 버스킹》,《모두 허공이야》,《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등과 시선집 《무인도를 위하여》등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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