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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제천 시인

부흐고비 2021. 8. 19. 06:46

자음(子音) / 박제천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뼛속까지 에는/ 겨울바람에 全身을 내맡기면서 이 몸뚱이 속의/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그도 못하면 벌레가 슬지/ 않게 말려두기나 하면서 어느날 그렇게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바람에 내가 날려가 버리기나/ 바라면서 그것으로서 이승이며 저승이며 모두/ 마무리되어질 수 있기나 셈하면서 홀연히/ 허공에 피어나는 바람의 꽃을 지워버리면서//

자음(子音) 2 / 박제천
自畵像을 한장 그리려다가 지쳐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을 지우기 위해/ 고무지우개를 집어들었다가는 코까지 지워버리기 일쑤다/ 애당초 自畵像을 그리려 마음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려나가다 보니/ 그것들이 눈에 익었고 그러다 보니 3分의 2쯤 내 얼굴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破綻은 그때부터였다. 눈이 좀 커보이거나 귀가 조금은 작아보이고/ 코도 너무 삐뚜러져 보였다 하는 수없이 지우개로 모두 지워버린 도화지 한 장/ 수없이 지운 자국이 너무도 뚜렷한 종잇장 하나가 내 自畵像일 수밖에//

자음(子音) 3 / 박제천
못을 박다보면 언젠가도 이렇게 힘껏 장도리로 못대가리를 때려 박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아마 내가 누워있던 棺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갇혀 있던 어느 房門은 아니었을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면 못대가리를 때려박는 손놀림이 더욱 빨라지고 힘도 더욱 강해진다/ 다시는 나오지 말아라 거기 그렇게 꽁꽁 묶인 채 누워 있거라 거기 그렇게 오도가도 할 것 없이/ 房이나 지키거라 산다는 것이 대수냐 잡념을 갖고 못을 박다보면 도망가지 못하게 못을 쥐어잡고/ 있는 엄지손가락을 때려서 피멍이 들게 마련이다 詩란 것도 쓰다보면 이렇게 마음과는 딴 판이지 않느냐//

SF -투명인간 / 박제천
친구는 죽어서 철원평야에 묻히고/ 눈이 내려 한자나 쌓인 철원평야의 언덕에서/ 우리는 친구의 무덤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불룩불룩 솟아난 눈무덤을/ 삭정이로 쿡쿡 질러보면서/ 친구는 이제 투명인간이 되었구나/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이 세상 떠도는 투명한 혼이 되었구나/ 중얼중얼 눈은 내리고/ 내려서 우리 또한 눈사람을 만들고/ 순백의 심장, 순백의 눈동자로/ 머잖아 우리 또한 투명인간이 되겠구나/ 투명한 혼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지내겠구나/ 친구가 묻힌 철원평야 언덕에 서서/ 우리가 돌아갈 길을 지워버리는 눈을 보면서/ 눈속에 새로 생긴 투명한 길을 보면서/ 땀내나는 살덩어리,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는/ 두 뺨을 눈으로 씻어내다가/ 문득 투명인간이 되어/ 저기, 눈시린 길에서/ 바삐바삐 오고 있는 친구를 보았다.//

SF -교감 / 박제천
금강초롱 꽃잎 속 황금 꽃술로 발돋음하는 너를 본다/ 기치료를 받고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배꼽/ 금강초롱 꽃잎 속 배꼽에서 배꼽으로 퍼져나가는/ 우주의 파동을 느낀다/ 꽃잎 가득, 배꽃 가득,/ 눈부신 햇살도 눈시린 눈발도 모두 받아들여/ 황금꽃술로 발돋음하는 너를 본다/ 단전에 가득 불을 피워 덥히는 내 삶도/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해소 기침도/ 예서 물려받았단다/ 꽃잎 속에 손을 넣으면/ 문득 외계의 하늘이 서른세 하늘로 층층이 쌓이고/ 그 어느 하늘에 금강초롱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의 배꼽 있으니/ 나 있는 여기서도 개벽의 꽃 속으로 들어가는 길 보이느니,/ 그곳에서 내 배꼽을 꼭꼭 누르는 손길을 느끼느니//

SF -달항아리 / 박제천
항아리를 보면 붕어 불러들이던 된장항아리 생각난다항아리를 보면 잡은 붕어 내보이던 투명한 달항아리 생각난다항아리를 보면 그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잠자던 관항아리 생각난다그러다 문득 비를 생각하면, 항아리 또한 비가 된다개여울 속 하늘 속 땅 속 어느 곳이든 내가 만든 비들은 하나같이 항아리같은 추억, 항아리같은 사랑, 항아리같은 죽음을 만든다그런 항아리 가득 볼펜을 꽂아놓고나는 문득 비의 자서전, 항아리의 자서전을 구상한다청개구리가 된 부처를 받아들이는 비의 일생,살도 정도 불에게 내어주고, 사리와 뼈만 남은 부처를 그 안에 쉬게 하는 사리 항아리의 일생그러다 문득, 붕어라고 쓰면 붕어가 뛰어나오고 된장이라고 쓰면 된장내 구수해지는 입체 볼펜으로 항아리 하나를 그린다, 그 안에 전생의 메모리칩이 내장된 내 항아리 하나를 하늘에 띄워놓고 흥얼거린다달아 달아 천년만년 나랑 놀던 달아.//

1986년 3월 23일 / 박제천
冠座의 R별이 초청장을 보내온 것은 20년 전이었으나 별들에의 여행을 망설이고 있었다 여권이나 여비 때문은 아니었다 작심하는 대로 언제 어디서나 다녀올 수 있었다 그곳 사정을 몰랐고, 또 오래 기다렸던 일이므로 하루하루 뒤로 밀어왔었다 1986년 3월 23일 42회 탄신기념일 밤 12시 나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칫솔 한 자루(이가 아주 나쁘므로) 빗 한 자루(머리카락 숱이 적고 가늘어 바람에 잘 날리므로) 향 한 자루(기원할 일이 많으므로) 담배 한 갑으로 행장을 꾸렸다 눈을 감자마자 나는 대기권 밖을 날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리라 생각했었는데, 공연한 걱정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혹성의 주민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다가 지구로 가는 유성이 충돌할 듯이 스치며 지나갔다 지구에서 만날 때를 위해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아쉽게도 얼굴을 익혀두지는 못했다 1억광년쯤에서 한숨돌리며 담배를 피웠다 은하에 푸른 담배연기가 번져났고, 불티들이 혜성의 꼬리처럼 길게 불타올랐다 이윽고 길게 불타올랐다 이윽고 길을 재촉하자, 곧 목적지가 다가왔다 별산 그 중턱쯤에 바로 내가 찾는 무덤이 있었다 어머니! 20년 만에 불러보는 내 목소리가 너무 커 별을 진동시켰다 그 서슬에 놀라 눈을 뜨니, 어느새 잠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첫번째 방문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다녀가라는 전갈이 그 뒤에도 있었으나 버스를 세 번 갈아타더라도 오는 공휴일에는 차라리 어머니가 묻혀 있는 망우리를 다녀오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근황(近況) / 박제천
밤마다 배를 몇 척씩 꾸려서 떠나 보낸다 오늘 내가 만난 물빛 한 지게, 달빛 두 지게만으로도 滿船이 되는 나의 작은 배들이여 그대들 물길의 安全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물빛 一千隻, 달빛 二千隻의 배를 하염없이 떠나 보낼 뿐이다 어둠마저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그곳에 舍利 몇 알로 길을 밝히며 찾아나설 그날까지 다만 밤마다 배를 몇 척씩 꾸릴 뿐이다 어제 부친 一片의 苦惱 一片의 鳶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나의 작은 배들이 싣고 가는 밤마다의 밤 그것이 오직 나의 財力일 뿐이다//

나무 사리(舍利) / 박제천
백년생의 자연목에 서툰 도끼질을 해대다본즉 여기저기 도끼입이 벌어졌다 전기톱을 갖다대기만 하면 날이 날아갔는데 도낏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무 살 속에 총알들이 수없이 박혀 쇠이빨인양 날을 잘라먹었다 강원도 심산, 구름을 밟으며 올라탄 산정의 나무들은 아름이 넘었다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톱이며 도끼를 몇 자루 날리는 하루품 끝에 나무 하나를 넘기면 온산이 쩌렁쩌렁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서 시경詩經의 벌목쟁쟁伐木丁丁,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이 떠올랐다 산이 사내처럼 우는 소리, 나무가 사내처럼 나뒹그러지는 소리에 사내들의 몸에 박혔던 총알들이 반짝이며 튀어나왔다 발자국 하나 거리의 수풀이지만 지뢰탐지기를 들여대고서야 아기손가락만한 총알을 주웠다 나무 하나에 왜 그리 총알이 많이 들었던지 큰스님 몸을 태우면 쏟아져 나온다는 사리들도 나무의 사리와 같아 산 세상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레이저 총알을 받았던 거겠지 정관모의 온통 붉고 검은 원주들을 보다가 6.25나무의 아가리가 생각났다 그 아가리가 덥썩 베어문 입자국이 내 안 어디에 있나부다.//

비천(飛天) / 박제천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이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이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램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었다 구름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내 몸 속의 피와 눈물을 말렸고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 산과 강의 구석구석에 묻어 두었고 불의 넋 물의 흐름으로만 남아 땅속에 묻힌 하늘의 소리 하늘로 올라간 땅 속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떠돌음이여 그러나 나를 하늘도 바다고 어둠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게 하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묶어두는 이 기묘한 넋의 힘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게 하는 이 소리의 울림이여.//

도깨비가 그리운 날 / 박제천
도깨비가 되고 싶은 날은 도깨비가 되자/ 스무살 짝사랑 찾아 이 구석 저 구석/ 휴대폰 거는 몽달비 도깨비도 만나 보고/ 그리운 이에게 밤새도록 삐삐를 쳐 대는/ 반딧불 도깨비도 만나 보자// 도깨비가 그리운 날은 도깨비가 되자/ 도깨비감투를 눌러쓰고 투명도깨비가 되어/ 비디오테이프를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당나라 때 귀신이 된 이하도 만나 보고/ 만주 벌 사신총에 들어앉아/ 불타는 눈, 불타는 일, 떨리는 황금빛 못젖을 번적이며/ 고구려를 불러 대는 도깨비 맏형도 만나 보자// 도깨비가 된 날은 도깨비만 만나자/ 사람 사는 어려운 일 제껴 두고/ 도깨비방망이나 두드리며/ 사람보다 어여쁜 도깨비들과/ 컴퓨터 노래방에 들어앉아/ 목이 쉬도록 그리운 이들이나 불러 모으자//

붉은 울음꽃 / 박제천
검붉게 색이 바뀌고 때묻어 내용을 알 길 없는 동판화 하나 내게 있습니다 선을 따라 손톱으로 때를 후벼내다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림 하나 내게 있습니다 어린 짐승 한 마리가 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온 몸으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낱낱의 그 소리를 들춰보는 밝은 햇빛이 너무나 눈부셨습니다 둘러보면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 모래구덩이에 들어앉아, 차라리 이렇듯 스스로를 놓아둔다면 모래알이 이윽고 몸을 덮어버리고 지상에는 어디 누가 있었던 자취조차 보이지 않을 모래밭이었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어도 심장이 썩지 않아 죽은 지 120년이면 되살아난다는 무계국 사람인양 동판화 속의 모래밭에 파묻은 열아홉 살의 내가 웬일로 오늘 되살아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의 어떤 풀은 잎이 둥글고 줄기가 없으며 붉은 울음꽃을 피울 뿐 열매를 맺지 않으며 너무 먼 곳에 있어 다만 바라만 볼 뿐 가질 수 없다 합니다.//

물의 집 / 박제천
빈 방에서 새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온다들여다보니 백자주전자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기 새소리는 간 데 없다 작설차를 우리는 동안 참새 입술 닮은 잎들이 정담을 나누었나 무심히 주전자 안을 들여다보니 물 속에 무슨 소리의 무늬가 설핏 보이는 듯싶다 우듬지 가득 받아든 햇빛, 뿌리가 탱탱하게 빨아올린 땅속 어둠이 서로 섞여들며 물이 하고 싶은 소리, 잎이 하고 싶은 소리를 물무늬 지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다 사람 몸속 어둠을 다 씻어야 해 맑은 기운으로 온몸을 감싸돌아야 해 그 소리 귀 기울이다보니 참 착하다. 참 맛있다 백자 주전자를 기울여 맛깔난 소리를 잔에 가득 채우는 이 황홀 나는 오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물의 말을, 새소리처럼 맑은 잎들의 말을 배부르게 먹었다.//

모래의 집, 불의 집 / 박제천
여섯 살짜리 손녀 정주가 모래집을 짓는다--여기는 할머니 집이야까슬한 마음의 모래알들이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루었다--모래집 속에 할머니가 계셔모래의 집을 들여다보며문득 불의 집을 떠올렸다엊그제, 화장장의 분화구에서 아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불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그로부터 내 가슴에도 불의 집이 생겨났다그, 불의 집은 휴화산처럼 불을 숨기고 있다혼자 캄캄하게 마음의 집을 지키고 있노라면불의 집이 나타나고, 불길이 다시 솟아오른다보이지는 않지만, 저 불 속에 아내가 있을 것이다땀을 흘리며 만든 모래집을정주는 다시 뭉개고, 새 모래집을 짓는다나도 불의 집을 보기만 하곤, 다시 지워버린다정주와 나는이렇게 매일 새 집을 짓는다--할머니에게 늘 새 집을 지어줄 거야//

시계의 추억 / 박제천
오늘밤에도 밤하늘에서 아버지 대장간 신을 만났다/ 불물이 들끓는 화로에서 집어올린 불점들,/ 모루에 올려 다듬은 푸른 시침 붉은 분침을/ 밤하늘의 문자판에 새기는 아버지 별,/ 밤하늘 여기저기 흩어진 별들의 조각보를 이어/ 무릎담요를 만드는 어머니 별,/ 그 아래 누이며 형들의 깜박이 별들도 보인다.// 사람들은 죽어서 별이 되고,/ 문자판의 시침이 되거나 초침이 되어 반짝인다./ 사람들은 죽어서 시계가 된다./ 추억이 되고 기다림이 된다.// 추억은 끊어져나가도 삶은 계속된다.// 나무가 되어 허공에 뿌리내리거나/ 물고기가 되어 시계 속을 떠다닌다.// 내 안의 우주,/ 천마가 달리고, 용이 날아다니는 하늘도/ 한마음의 조화,/ 별들의 시계가 가르쳐주는/ 마음의 우주// 지상에서의 내 삶은 헛되고 헛되니/ 오늘도 밤하늘, 내가 떠나온 고향을 바라보며/ 아버지별, 어머니별,/ 뭇별들의 추억을 마음에 아로새긴다.// 오후 5시, 오전 2시, 시침이 움직일 적마다/ 시간은 과거를 불러들이고,/ 과거 속에 생생한 우리의 미래는/ 형해만 남은 추억의 탑,/ 그 시계의 문자판이 보여주는/ 풍등의 별,/ 마음하늘에 떠다니다/ 스스로 폭발하는 풍등의 꿈// 밤하늘의 문자판이 보여주는/ 아버지별, 어머니별, 가족의 별,/ 뭇별들이 혹은 유성이 되어, 혹은 혜성이 되어/ 우리 삶 속을 떠다니는/ 꿈의 우주,/ 추억이 되고 기다림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서/ 별이 되고, 시계가 된다.//

눈에 관하여 / 박제천
눈이 내리는 날이면 들판으로 나가자/ 하느님이 보내는 편지를 읽기로 하자/ 예쁜 여자처럼 긴 머리카락을 날리는 나무들은/ 듣기에도 정겨운 모음이 되고/ 그 아래 구석구석 자리를 잡은 돌들은 자음이 된다/ 여기 저기 서 있는 눈사람의 마침표/ 눈밭속에 뛰어다니는 벌레들의 느낌표/ 말줄임표로 다가오는 아득한 눈보라의 입맞춤 속에/ 하느님의 사랑 편지가/ 온 들판을 가득 채운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들판으로 나가자/ 눈밭 아래 꽝꽝 얼어붙은 얼음장 거울에/ 언 볼 달구며/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듣기로 하자.//

눈이 눈에게 / 박제천
눈이 와서 눈이 선한 날에는/ 마음에 들어앉은 수미산 한 채가/ 슬그머니 나들이를 나서네/ 그 품 속에 자라던 나무들도, 새들도/ 부지런히 따라나서네/ 눈이와서 마음이 환한 날에는/ 눈에 사는 무지개 한 줄기가/ 수미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바쁘게 달려가네/ 그 보자기 속에 숨겨둔 강물들도, 물고기들도/ 번쩍이며 따라가네/ 눈밭에 서서 바라보는/ 수미산도 예쁘고/ 무지개도 예쁘지만/ 눈이 와서 하늘도 땅도 맑은 날에는/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무슨 금옥과 같이/ 마음에, 눈에 찰랑이네.//

눈송이 하모니카 / 박제천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에는 은빛 하모니카를 불자/ 하모니카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점2분음표, 점4분음표가/ 눈사람을 만들고,/ 수수깡안경, 털실모자를 쓴/ 눈사람이 함박눈을 뛰어다니는 고향을 보자// 내가 부는 하모니카,/ 은빛이 벗겨져/ 누런 구리빛이 드문드문 드러난,/ 고장난 하모니카 소리에/ 더운 눈물, 더운 입김이/ 내리는 눈, 눈발을 비로 바꾸더라도// 눈이 오는 날에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은빛 하모니카를 불자/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에서 고향을 보자/ 내리는 눈이 불꽃 되어 가슴을 덥히는 축복을 보자//

눈부처 / 박제천
돋보기를 쓰고부터,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가령, 눈이 오는 날에/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눈 속의 어린 새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눈사람들이 말갛게 비쳐보였다// 눈의 나라 숲속 여기저기에서/ 나무가 되어 웅크린 초록의 새들이/ 사이사이 기지개를 켜거나 깃을 쳐서/ 조금씩 눈을 털어내며/ 저마다 눈사람 하나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세발까마귀며 금계며 봉황과 같은 새들도/ 반짝이며/ 함박눈을 타고 넘어와/ 눈사람마다 은빛 눈썹날개를 달아주는 게 보였다// 눈사람들이 눈의 날개를 휘저을 때마다/ 함박눈이 쏟아져/ 이 세상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있는 게/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에/ 환하게 비쳐보였다.//

설청(雪晴) / 박제천
함박눈이 눈을 가리는 날, 내게로 날아오는눈송이들이 무슨 깃털과 같아함박눈 속에 무슨 큰 새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깃털 하나씩 날리며, 무슨 소식을 알리는 것 같아함박눈 글씨 받아쓰고, 받아쓰며함박눈 뒤덮는 날, 내게로 날아오는눈송이마다 번쩍이는 거울을 달고 있어서내리는 눈송이로 눈송이의 거울을 닦고 닦아서거울 속 눈송이 속 거울 속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니함박눈 개이는 속으로 눈부시게 눈부시게 날개치며해를 타고 따라가는 세발까마귀,몽당연필 침발라 함박눈 글씨 받아쓰며 세발까마귀 따라가는 어린 나를 보았네//

꿈을 꾸며 / 박제천
깊은 잠 속의 나무들이 꾸는 꿈은 무엇입니까/ 깊은 잠을 깬 나무들이 눈을 뜨고 견디는 꿈은 무엇입니까/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가 봅니다/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 높이 키를 올리며/ 가지를 펼쳐 봅니다/ 어느 날 문득 눈이 트고 그 눈에서 잎이 피어납니다/ 어느 날 문득 온몸에 푸른 기가 돌고 마침내 그 기운이/ 몸을 불태웁니다/ 그 불길이 머흘 쯤 기다렸다는 듯 잎들이/ 다투어 떨어져 나갑니다/ 그 잎들이 다 지고 나면 다시 잠이 옵니다/ 생각해 보면 한 그루 나무라 하여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 줄기 바람이거나 한 뿌리 풀꽃이거나/ 피와 살을 지닌 우리들 사람이라 하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꾸는 꿈, 잠들어서나 깨어서나/ 우리가 꾸는 꿈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습니다/ 꿈 속의 삶, 삶 속의 꿈이 한가지로 뒹굴 뿐/ 무엇이 다른지 알 리가 없습니다.//

눈감으면 보이려나 / 박제천
지난봄의 일은 모두 시름뿐/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대 모습/ 해가 갈수록 더욱 흐릿해/ 오히려 눈을 감으면 보이려나/ 만나고 싶어라/ 그대 그리워 헤매는 쑥대밭이 아니라/ 그 어디에 쓰러져/ 잠들어 버릴 것만 같네//

달은 즈믄 가람을 비추시도다 / 박제천
달은 즈믄 가람에 떠 흐르고 있습니다/ 즈믄 가람마다 떠 흐르는/ 달은 언제나 하나의 이름/ 나의 얼굴입니다/ 부처여/ 바로 그대의 얼굴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저 무수의 별들이/ 저마다 비춰주는/ 그대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나는 문득/ 이 작은 별의 한 점 등불을 생각해 냈습니다// 빛은 기름이 되어 온몸을 불사룹니다/ 바람은 심지가 되어 마음의 갖가지 갈래들을 한 줄기로/ 세워줍니다/ 그런 등불이/ 이 세상의 한 귀퉁이부터/ 어둠을 조금씩 지워나가고 있습니다.//

우표를 들여다보며 / 박제천
눈이 오면 갑자기/ 그 마을에는 새들이 나타난다/ 머리 가득 눈을 이고 선 나무마다/ 새들이 붉은 열매 푸른 노래로 매달려/ 마을을 온통 잔치판으로 바꾼다/ 눈이 오면 갑자기/ 그 바다에는 새들이 나타난다/ 가슴을 열어 이 세상 웃음소리를 받아넘기는/ 물결마다/ 새들은 흰 깃을 날개마다 동여맨 채 초록의 치마끈을 풀어당기며/ 몸을 푸는 먼 바다의 출렁임을 부리로 찍어 본다/ 눈이 오는 그림 속 세상의 바다와 마을을 바라다보며/ 나는 갑자기/ 이 세상 어두운 곳마다 눈을 내려쌓이게 하는/ 하늘님의 눈나라를 다녀오고 싶어/ 새가 되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우표를 한 장 산다.//

백지의 우주 / 박제천
이 한 장 백지의 우주에서/ 나는 문득 뱃사람이 된다/ 백지 한 장의 무게 속을 뚫고 들어가/ 닻을 내리면/ 여기저기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 선/ 블랙홀/ 누군가 시위를 당긴 불별들이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시간 내내/ 내가 찾아가야 할 혹성은 언제나 5억 광년의/ 거리에서 반짝이고/ 나를 찾아오는 태양은 어느새/ 새해의 아침을 보여 준다/ 지나간 밤들을 돌이켜보면 아름답다/ 괴롭고 아프고 미운 것들이/ 허물을 벗어던진 채 싱그러운 속살을 보여준다// 이 한 장 백지의 우주에/ 나는 문득 색색의 크레용으로/ 내가 사는 나라의 강과 산, 사람들과/ 그들의 감정을 그려 나간다/ 세모꼴의 희망 원뿔꼴의 사랑// 여기에 나타나는 것들은 모두/ 기다림의 몫이다/ 백지 한 장의 무게로/ 둥둥 떠서// 각자의 별로 빛나는 새해의 운명이다//

풍경소리를 들으며 / 박제천
풍경을 하나 얻었습니다 옛절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고물상 한구석에서 이리저리 뒤채이면서도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던 풍경를 얻어 내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 걸어두었습니다.// 그 옛날 산에서 불던 바람은 아니련만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며 저도 모르게 아아 아아 기쁨의 웃음소리를 온몸으로 토해내고 그러다가는 옛추억이 생각난 듯 아아 슬픔의 울음소리를 길게 남기는 풍경이었습니다// 풍경의 기쁨이 무엇이고 슬픔이 무엇인지 알 길 없는 나는 오직 소파에 편히 누워 그 녀석이 그래도 고물상에서 먼지를 쓰고 있기보다는 나으려니 여길 뿐입니다 그뿐입니까 어느 누구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딩그렁 뎅그렁 제 마음 속의 사연을 다 펴내고 있지 않습니까.//

월명(月明) / 박제천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용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쳐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 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 박제천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신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태어나는/ 푸른 노을이 너의 이름이다/ 바람 속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바다의 신음소리/ 들끓는 소용돌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가 너의 이름이다// 나는 너의 참이름을 모르고 있구나/ 잠들어 있는 사이/ 너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 죽어 움추리고 있는/ 것들마저 하나같이/ 뒤바꾸어 놓았구나// 검고 붉은 바늘을 번쩍이며 바늘 점마다 흰 피를/ 흘리며 지나가는 강물의 이름은/ 어제만 해도 물푸레나무였다/ 온 몸에 꽃불을 놓으며 스스로 타들어가는 산의 이름은/ 어제만 해도 모래무지였다// 저렇듯 토끼라거나 다람쥐라거나 여우라거나/ 딱따구리라고 불리는 저것들도/ 내가 알기엔/ 영이 숙이 순이 경이와 같은/ 어여쁜 여인들이었다// 어린 내 그림책에 선묘화로 나타나 있던/ 금붕어 곰 책가방 사슴들처럼/ 누군가의 크레파스 칠 범벅에 새로이 태어나는/ 나무들, 돌멩이들, 손가락들, 구두들/ 세상은 이제 수많은 소리로 가득차고/ 이윽고 너희들도 다투어 제 이름을 소리 높이 외쳐댄다/ 나는 인간, 나는 창틀, 나는 두부 한 모//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이름을 잊고 싶다/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이제도록 머리통에 꾸겨넣는/ 빨래들, 비둘기들, 휴지조각들// 내가 만나는 그 모든 이름을 기억하리라던/ 여섯 살 적 그 아침 이래/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이름들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겠다/ 어둠인 그들에게//

날치의 붉은 알이 / 박제천
날치의 붉은 알은 한덩어리 화염을 연상시킨다/ 불의 이빨들이 그 화염을 오드득오드득 씹어 삼키는 소리,/ 그보다는/ 해저의 모래알들 사이에 불의 씨알을 슬고/ 껍질뿐인 채 심해의 어류를 따라 떠도는 날치의/ 영혼을 연상해 본다// 안개비에 몸이 젖은 날/ 푸른 불꽃을 피어올리는 정종대포를 훌훌 불어마시며/ 등푸른 생선의 횟살을 한 점씩 집어먹으며/ 생선칼로 살을 저며나가는 주방의 손놀림을 재미삼다가/ 고개 돌려, 문득/ 안개비 너머, 안개의 계곡을 건너다보며/ 껍질뿐인 채 지느러미를 놀리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날치의 뒷모습을 본다// 귀신보이는 나이 마흔을 지나 헛것까지 다 보아내는/ 쉰줄들어/ 응어리마다 덩어리진 노염의 붉은 씨알들,/ 어디다 토해낼 길 없어/ 줄창 뱃속에서 불길을 키우는 화염덩어리를/ 한마리 초식동물인양 되새김질 하며/ 오드득 오드득 소리내어 씹어먹으며/ 누군가 살을 저며나가는 소리를 듣기도 하며// 내 오늘은 벗어놓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 헤엄치느니//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 박제천
한 마음의 열두가지 지옥을 다 비우는,/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한 물줄기의 수만 물방울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오늘은 당신이 분수가 되는 날// 푸르름의 목어, 눈부심의 풍경 다 내어건/ 향기로운 절 한 채 지어서/ 마음이 추운 이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오늘은 당신이 집이 되는 날// 하찮은 돌멩이나 풀줄기, 꾸겨진 종이장 하나에까지/ 햇빛의 광명을 가득 채워/ 숨쉬게 하는,/ 오늘은 당신이 내가 되는 날// 한 마음의 열두 가지 생각을/ 한 생각으로 바꾸어// 오늘은 내 안을 텅 비우는 날.//

풀밭에서 / 박제천
풀밭에 누워, 풀이 되어 바람 부는 대로 기우뚱거리자/ 다른 풀들이, 머리카락만 한 버러지들이/ 괴상한 풀 쪽으로 눈길을 모운다 어떤 놈은/ 가까이 달려와 발가락이고 귓불이고 깨물어본다// 풀이 되어 좋구나/ 등짝 아래 흙 속에서 흙의 기운이 타고 올라와/ 머리뼈 등뼈 꽁지뼈를 덥혀주고/ 감은 눈 다문 입에는 나비도 날아와 앉는구나/ 이대로 흙도 되고, 바람도 될까/ 썩은 내 몸에서 기어나오는 수천 마리 버러지 떼들/ 세상에 풀어보낸 다음// 저만치 서있는 나무를 단숨에 사랑병 들어 잎지게 하고/ 그 옆의 바윗덩이에 근심병 씌워 단번에/ 쩍쩍 금이 가게 하는/ 내 버러지들 바라보기 안쓰러워/ 그만 나는 다시 사람이 되기로 한다// 버러지들 오장육부에 다 쓸어담고,/ 풀밭에 누워/ 한숨 눈부치다 깨어나기로 한다.//

나의 화원 / 박제천
그 화원에 가득찬 꽃들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기역을 살짝 누르면 가볍게 향기의 꽃술을 흔드는 감꽃이 나타난다/ 니은을 두드리면 눈내리는 골짜기에 피어난 눈꽃이 떠오른다/ 스페이스 바를 건드리면 반음쯤 소리를 죽인/ 공기들이 보이지 않는 뿌리쪽으로 모여든다// 뿌리들은 매우 바쁘다/ 모자 위에 달아놓은 이름표들이 호명될 때마다/ 재빨리 꽃을 피워야 한다/ 진달래 개나리는 물론 튤립이며 춘검을 보여줘야 한다// 그 화원에 오늘도 나는/ 깨알같은 자모들의 씨를 뿌린다/ 언젠가 그 것들이 싹을 내밀면/ 나는 또 새 모자를 씌우고 이름표를 달 것이다/ 그로써/ 한 생애의 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뿌리에 모아둔 천둥의 소리, 번개의 빛을 피워보일 것이다.//

첫사랑 엽서 / 박제천
살구꽃 피는 우물은 나만의 보물창고// 우물 속 깊이 얼굴을 묻고, 아무개야 소리치면/ 아무개야 메아리지며 달려오는 발소리,// 아무개야 아무개야 아무개야 부르면/ 우불 속 낮달 거울에 어리는 얼굴,// 아무개야 아무개야 아무개야 목이 메이면/ 내 가슴 속 우물에도 참방참방 솟아오르는/ 그리운 얼굴// 살구꽃 황홀한 꽃잔치 한마당.//

시의 엽서 -心法宮篇 / 박제천
아무래도 내가 살기에 적당치 않은 이 별을 떠나기에 앞서 宇宙의 黑板 여기저기에 白墨으로 나의 별을 그려 보지만 웬일일까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처음부터 나의 별은 따로이 정해져 있어 그 걸 찾아낼 동안만 이 별에 살기로 되어 있었던 걸까 저 宇宙로 무수히 내가 띄워보낸 詩의 葉書들이 다리가 되기엔 아직도 그 數가 부족한 걸까 떠나기도 전에 미리 서운해 하는 이 별의 바람, 떠날 채비를 미리미리 일러주는 이 별의 물이여 저 宇宙의 어느 별에서 나를 기다릴 그대들의 兄弟여 아무래도 나는 얼마쯤 더 이 별에 살기로 되어 있나보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心法唱篇 / 박제천
물소리 위에 흐르는 달을 한 벌 떠낸다/ 原板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은 희미한 달빛이/ 숨을 죽이고 있다 물이 불어 번쩍거리는/ 달을 바람에 말린다 바람이 데리고 가는/ 그 물방울들 속에 사는 작은 새들이 놀라서/ 뛰어나오고 그 서슬에 原板이 물소리/ 속으로 깊숙히 사라진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대머리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내 寫眞이여//

사기 등잔과 함께 / 박제천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로 가리/ 닳아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 찌꺼기, 군데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 있는 뼈와 살의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 보여라.//

연(鳶)을 띄우며 / 박제천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저것은 鳶이 아니어라/ 얼레를 풀며 마음껏 줄을 놓아보내는 저것은 결코 鳶이 아니어라/ 천 톤쯤의 바람을 싣고 다른 하늘로 떠나가는 저것은 절대로 鳶이 아니어라/ 저것은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누군가 키를 부리는 한 척의 배/ 한마당 기다림의 삶이 돛으로 전신을 펴보이는 한 척의 배/ 火星 아니면 土星쯤에서 닻을 내리고 백년 뒤의 나를 맞이할 한 채의 집이어라/ 그리운 이를 찾아 마음껏 물길을 돌려갈 한 척의 배여라/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鳶은 가오리鳶도 太極鳶도 아니어라/ 피도 살도 다 버리고 뼈마저 빻아서 뿌리고 난 다음의 빛만 남은 별이어라//

입춘부 / 박제천
고로쇠나무에 등을 기댔더니, 어느 순간 서늘한 손길아, 요녀석이 내게 지금 氣를 보내오는 구나고로쇠나무 잎으로 손부채를 만들어고로쇠나무의 물을 한 모금 먹었더니, 뱃속이 서늘해진다요녀석이 지금 내 뱃속을 제 세상으로 만드는구나머잖아 내 눈, 내 입, 내 귀에서도푸른 눈이 트고, 고로쇠나무의 어린 잎이 하나 둘 돋아나겠구나이 봄엔 아예 나도 고로쇠나무가 되어 뿌리 아래 갇혀 있던 봄 기운을 물관이 터질 듯 타고 오르는, 이 솟구치는 노래를 전해주어야겠다그리운 이가 등을 기대면,//

봄의 神에게 / 박제천
봄밤이다, 복사나무 마디를 뚝뚝 꺾는 소리, 인동덩굴 서로 껴안는 소리, 뿌리아래 작은 벌레들이 더드미를 세우는 소리, 날개를 손질하는 소리, 굳은 어깨 관절이 풀리는 소리, 얼음이 종이짝처럼 바스라지는 소리, 남천나무 열매가 얼음물에 녹아 나가는 소리,// 화엄세계다, 쌓인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쑥내음, 눈매가 푸른 냉이내음, 지난 가을 떨어진 비자열매 매자열매 들뜨는 내 음, 웅크린 바위마저 코를 벌룸이며 들여 마시는 자연의 술내음, 산도 나도 천지도 취해 기지개를 켜다가 팔자걸음을 걷다가// 누군가,/ 봄밤에 깊이 숨어/ 당사주를 보는 자에게/ 낭랑하게 소리의 금강경을 읽어나간다/ 진달래꽃 복사꽃 입안 가득 틀어넣고/ 반야심경을 외어나간다/ 누구인가.//

춘뢰(春雷) / 박제천
이름 모를 비슷비슷한 씨앗을 뿌린 뒤 이윽고 얼굴을 내민 새싹의 떡잎을 들여다보는 이 봄날의 아침을 누구에게 주랴/ 아직은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한 송이 꽃의 삶을 갖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여윈 가슴을 누구에게 주랴/ 이 크고 작은 새싹들의 五線紙에서 문득 하늘로 날아 오르는 저 새, 빛이라거나 별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저 밝음을 누구에게 주랴/ 청명한 저 새의 날아감 뒤에 그리움처럼 내 가슴의 밑바닥에 괴어 잔잔히 떨리는 햇빛의 무늬, 이 무늬를 그 누구에게 주랴/ 먼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 소리의 울림만 구름으로 남아 떠도는 하늘 아래 아직 이름 지어지지 않았으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이 새싹의 아픔을 그 누구에게 주랴.//

 

심우도에 대한 박체천 시인님의 시


심우도 / 박제천
점멸// 오늘밤 별 하나 이 땅으로 달려오는 걸 보았다 몇 광년의 길을 혼자서 달려온 별, 그리고는 다 불붙어 타버린 운석 하나로 이 땅에 살기로 한 별, 별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온몸에 불이 붙더라도 그리운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개똥밭에 참외로 뒹굴 더라도 이승으로 건너오는 것이다 불이 붙어 다 타버린 영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돌이 된 별은 1 억년이 걸리더라도 제 짝만 찾으면 다시 별이 되어 하늘로 오르 는 것이다 붕새가 물고기였다가 새가 되어 북명에서 남명으로 옮기듯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오늘밤 저 별이 하염없이 달려오 며 보여주는 점멸의 불빛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명인// 칼의 명인을 만났다.// 그가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위에/ 이윽고 부조처럼 흐릿한 상이 떠올랐다/ 그 얼굴 모습에 손을 갖다대면 온기가 전해져왔다/ 누군가의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라볼수록 아려지는 바위의 가슴을 음각으로 파내었기에/ 바위 속으로 사라지는 어둠을 따라가면 그 속에 들어앉은/ 누군가의 얼굴이 점묘화처럼 떠올랐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심산에서/ 바위 속 그리운 얼굴을 찾아내고 있었다//

봄날 -심우도 / 박제천
봄날이다 이런 날엔 고비사막에 엎드려 있던 황사들도 황룡이 된다 북해에 떠다니던 곤이 하늘로 떠올라 붕새가 되듯 황룡은 수천 킬로를 날아다닌다 이런 날 내 눈에 박힌 모래알들은 황룡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비늘들이다// 봄날이다 이런 날 옛 중국 황제들은 왕관을 꾹꾹 눌러썼다 한다 뒷머리에 나 있는, 고기비늘처럼 뒤집힌 머리칼이 한번 치솟으면 누군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한다// 봄날이다 내게도 노여움의 역린(逆鱗)이 남아 있는가 이런 날 모자를 꾹 눌러써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던 있던 소 한 마리가 난데없이 뿔을 쳐들고 씩씩거릴 때가 있다 이놈의 소가 만리장성이라도 쳐들어갈 듯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눈알을 부라리면, 속수무책, 아무리 소 엉덩짝을 후려갈겨도 소용이 없다// 봄날이다 이런 때는 무협지가 제격이다 장풍도 심검도 필요없다 오직 경혈을 다스려 쌓은 내공으로 단전의 힘을 북돋고, 씩씩거리는 소 코뚜레를 휘어잡아 긴 동안거 속으로 되돌려보낼 뿐// 봄날이다 이런 날 눈에 박힌 모래알뿐이 아니라 이무기처럼 마음속 밑바닥에 숨어 있는, 오래 된 모래먼지들까지 훌훌 털어 날려보낼 일이다//

명인 -심우도 / 박제천
칼의 명인을 만났다.// 그가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위에/ 이윽고 부조처럼 흐릿한 상이 떠올랐다/ 그 얼굴 모습에 손을 갖다대면 온기가 전해져왔다/ 누군가의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라볼수록 아려지는 바위의 가슴을 음각으로 파내었기에/ 바위 속으로 사라지는 어둠을 따라가면 그 속에 들어앉은/ 누군가의 얼굴이 점묘화처럼 떠올랐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심산에서/ 바위 속 그리운 얼굴을 찾아내고 있었다//

연꽃 -심우도 / 박제천
연꽃 보러간 연꽃 늪에서 연꽃은 보이지 않고/ 우산만한 연잎에 모여든 빗방울들만/ 비에 젖은 나를 기다리네/ 어떤 빗방울은 제 몸속에 피보다 붉은 연꽃을 피워내고/ 어떤 빗방울은 아직 피워내지 않은 꽃줄기마다/ 가시를 번쩍이고 있네/ 어떤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는 꽃술마다 눈을 달아서/ 늪 가득히 띄운 채/ 연꽃 보러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느니/ 연꽃 보러간 연꽃 늪에서/ 보이지 못한 연꽃 속 연실처럼 자라나는/ 내 얼굴, 내 마음 속 죄만 들키고 말았네/ 군데군데 입을 벌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땅속 진흙처럼 어지러운/ 내 마음의 진창을 들키고 말았네.//

날개 -심우도 / 박제천
시력이 약해지더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갑자기 하나같이 예뻐 보인다/ 무심히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가 옥돌로 보이고/ 영화에서 본 듯한 여자들이/ 입체 안경을 쓴 양 눈앞에 어른거린다/ 또, 이제 갓 태어난 것들/ 토끼며 오리며 닭의 병아리들과 눈맞출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들의 아버지가 된 양 가슴이 설렌다/ 그 중에서도 살맛나게 경이로운 건/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 때/ 두 살배기 손주인 정주가 바람처럼 내게 안겨오는 일,/ 눈 깜박할 사이 단숨에 날아오는/ 그 등 뒤에 나폴거리는 어리디 어린 날개를 보는 일,/ 눈 나쁜 것도 잊은 채 번쩍 들어 천정까지 올리면/ 까르륵 터뜨리는 웃음소리로/ 눈부시게 흩날리는 깃털들을 바라보는 일//

두충잎 연초 -심우도 / 박제천
나는 오늘 신선들이 즐겼다는 두충잎 연초를 피었다/ 두충잎을 들여다보면, 엽맥들이 방사선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길의 어디쯤에서 길눈을 잃었다/ 나는 다시 두충잎 연초를 피어물었다/ 봄에 피는 자잘한 흰 꽃잎의 연기를 튀밥인양 잘근잘근 씹으면/ 두충잎에서 흘러나오는 은백색 고무 실이 나를 꽁꽁 묶어/ 공중으로 던졌다 다시 땅에 떨어져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허공의 길 어디쯤에서 길눈을 잃고 헤매는 나를 만나러/ 나는 계속해서 두충잎 연초를 피어물었다/ 담배잎 연초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지켜보고자/ 내 안에 길을 만드는 또다른 나를 지켜보고자/ 두충잎 연초를 피고 있었다//

사랑노래 -심우도 / 박제천
오늘밤, 나는 내 지옥의 하나를 너에게 보낸다/ 봉두난발로 헤매던 지난 여름 남쪽마을에서 보았던 감나무,/ 그때 눈으로 가져온 땡감을/ 마음으로 익혀낸 홍시 한 알을 너에게 보낸다/ 겁먹지 마라,/ 보이지 않는 무지개의 피처럼/ 붉은 홍시 속에 내 마음의 열두 가지 지옥이/ 과육의 뼈로, 살로, 물로 어우러졌느니// 오늘밤, 삭히고 삭힌 내 사랑지옥의 하나/ 너에게 보내노니/ 네 지옥나무의 우듬지에 등처럼 환히 밝혀놓아라//

바다 민박 -심우도 / 박제천
등허리도 춥고 가슴속에 불길도 일지 않는 날/ 바다를 찾아가 민박을 했다/ 미역냄새 나는 갯벌을 걸어도/ 퐁퐁퐁 구멍을 내고 바깥을 내다보는/ 새끼 게 한 마리 없었다/ 밤늦도록 술 취해 바라보는 물이랑에도/ 문어단지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물결마다 눈 내리듯 별들이 무수히 떨어져내렸지만/ 떨어져내린 곳마다 은빛 미늘로 번쩍였지만/ 바다는 누군가 그리울 때처럼/ 어둠의 물무늬를 하염없이 낚고 있었다/ 돌아와 혼자 먹는 밥상엔 싸시랭이젓도 없고/ 바다냄새 나는 비웃젓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사람/ 바다가 되어 달려드는 나를/ 바다 민박집에서 기다렸다//

눈 -심우도 / 박제천
순간, 장미줄기의 마악 솟아오르는 눈(嫩葉)과 내 눈이 마주쳤네 푸른 눈썹잎사귀 아래 붉은 혀를 내미는 눈과 눈이 마주치자 눈이 부셨네 장미의 입술이 열리며 수없이 많은 붉은 혀들이 눈으로 돋아나 내 눈 속에 담겨왔네 순간, 내 눈 속에 박힌 눈의 붉은 혀들이 일제히 덩굴을 감아 온몸에 피어올랐네 온몸을 둥글게 말아쥔 장미덩굴 앞에서 눈으로 솟아나는 장미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내 몸도 그만 하나의 눈이 되고 말았네 그렇게 장미꽃불빛이 되어 한세상 환히 밝히고 있었네//

동치미 -심우도 / 박제천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에는/ 뼛속깊이 시원해지고 환해지는/ 겨울 동치미를 마시자// 한입 베어 물면/ 가슴속 저 바닥의 찌꺼기까지/ 활활 불태우는/ 겨울 동치미 고추를 먹자// 눈송이 눈송이 잦아드는/ 동치미 속/ 어려비치는 얼굴// 사각사각/ 살얼음 속 무 살 베어 무는/ 발소리, 들려오는 날//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에는/ 겨울 동치미가 되자/ 동치미 되어, 그리운 얼굴들 되돌려주는/ 동치미 거울이 되자.//

선묘 -심우도 / 박제천
눈 오는 날/ 부석사 선묘각에서 선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무량수전 뒤켠 맞배집 한칸 방에 들어/ 선정에 든 듯 적막한 눈빛으로/ 문 밖 세속의 사내는 안중에도 없이/ 소백 준령 굽이치는 먼 등성이 너머/ 난바다에서 끊임없이 반짝이며 달려오는/ 눈송이들만 보고 있었다// 그림 속 곱게 단장한 선묘는 저 혼자 놓아둔 채/ 무량수전 한귀퉁이에서/ 가볍게 제 몸을 들어올리고 있는 부석을 찾아갔다/ 사람의 땅에서 한 발 뛰어올라/ 허공에 새겨놓은 사랑/ 선묘의 부석 위로 눈보라처럼 들끓는 사랑의 이야기가/ 눈꽃으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눈송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눈꽃을 피울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난바다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화오름 -심우도 / 박제천
매화오름에서 괴석 하나를 보았다/ 온몸에 입이며 눈이며 귀와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누군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상하고 죽었다 한다/ 그래선가 괴석에는 무슨 핏물처럼 붉은 무늬들도 새겨져 있었다/ 군데군데 파여들어간 부분을 들여다보면/ 바위를 종이 삼아 무엇인가 새겨놓은 것 같았다// 보고 들은 대로 말하고 싶어/ 온 몸뚱이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귀 기울이면/ 저 혼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끝이 없어/ 그 소리 껴안으며 온몸이 상처딱지로 덮여가는 것 같았다.//

완당에게 -심우도 / 박제천
철쭉오름에서 내가 만나본 괴석은 돌시계 모양이었다/ 햇빛 환한 날이면 아직도 순결한 피의 분수가 뿜어나오는 듯한/ 철쭉 무덤을 지키며/ 이 생에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서/ 바다만 보이는/ 철쭉오름 외딴 낭떠러지에서 발을 돋우며/ 소나기가 초침처럼 후두둑 스쳐가며 써주는 비의 문자/ 시침으로 박히는 햇빛의 문자나 골똘하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사람의 귀로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초음파의 물결이 보여주는/ 내 안에 패여진 시간처럼,/ 응어리지고 상하고 떠돌아다니는 상처나 추스르며/ 상처 속에 숨겨둔 죽음이나 후벼내느니/ 그래선가 괴석의 온몸에 새겨진 시계무늬 또한/ 옛사람이 알려주는 내 상처의 문자처럼 보이느니// 탁본이라도 하면/ 내 안의 돌시계, 괴석의 돌시계에/ 엉켜 있는 피의 이내, 철쭉꽃 무더기가/ 금방이라도 예서체로 튀어나올 것 같느니.//

점멸 -심우도 / 박제천
오늘밤 별 하나 이 땅으로 달려오는 걸 보았다 몇 광년의 길을 혼자서 달려온 별, 그리고는 다 불붙어 타버린 운석 하나로 이 땅에 살기로 한 별, 별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온몸에 불이 붙더라도 그리운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개똥밭에 참외로 뒹굴더라도 이승으로 건너오는 것이다 불이 붙어 다 타버린 영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돌이 된 별은 1억년이 걸리더라도 제 짝만 찾으면 다시 별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이다 붕새가 물고기였다가 새가 되어 북명에서 남명으로 옮기듯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오늘밤 저 별이 하염없이 달려오며 보여주는 점멸의 불빛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은하 -심우도 / 박제천
칼 세이건은, 우주에는 1천억개 정도의 은하가 있으며, 그 각각의 은하에는 1천억개 정도의 별이 있고, 아마도 모든 은하 속에는 그 별과 같은 수의 행성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도 오늘 1천억개 정도의 별이 살고 있는 나무를 만났다. 무심코 나뭇잎에 입술을 대었더니, 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나뭇잎의 혀, 나뭇잎의 숨소리, 나뭇잎의 진액, 아마도 1천 미터 아래의 흙에서 끌어올렸을 대지의 정기가 내 입 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나무의 불룩 튀어나온 젖가슴을 껴안았더니, 나무의 나이테마다 흐르는 겹겹의 은하, 그 은하마다 반짝이며 떠도는 별빛들이 쏟아져나와 내 몸 안을 성좌도처럼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의 산천이 사람의 세포와 혈관에 다름아니었다는, 내 몸 또한 저 나무의 뿌리와 수액, 나이테에 다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마의 발톱 -심우도 / 박제천
칼라하리사막의 모래땅에 자라는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깍지를 낀 채/ 모래땅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움켜쥔 채/ 모래땅 속 깊이 숨어 있는 젖줄을 줄기로 끌어당겨/ 트럼펫을 부는 양, 있는 힘껏 벌린 입속으로/ 선홍의 목젖이 드러나도록 젖줄을 빨아당기는 양/ 꽃잎 가득 피의 노을을 머금고 있는 그 꽃을 아시는가/ 광막한 모래땅의 적막을 피의 흐름에 새기며/ 몸을 태울 듯 달구는 햇볕과 몸이 부서져라 얼리는 달빛 아래/ 한 생애의 고통을 거두어 탱탱하게 부풀린/ 그 알뿌리를 아시는가// 내 사막의 어깨에 뿌리를 내린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두 어깨 속 깊이 파고든/ 내 살아온 동안 응어리지고 옹이진/ 적막한 피의 흐름,/ 갈퀴손으로 깍지 낀 채/ 살의 고통을 빨아들이는 선홍의 입술,/ 내 몸을 알뿌리삼아 피어나는 악마의 발톱을 아시는가.//

불면 앨러지 -심우도 / 박제천
복사꽃 점점, 푸른 잎의 하늘에 손톱만한 달인양 색색의 알전구를 켜드는 밤, 문득 복숭아 앨러지가 생각난다 복숭아 캔만 만져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고, 복사나무 곁만 지나가도 복숭아귀신이 털북숭이 손으로 덥썩 손을 잡는 것 같아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만다는 복숭아 앨러지// 바람 부는 대로 무지개빛 알전구들이 점멸하는 밤이면 채 열매를 맺지도 못한 백도 황도 천도 복숭아들마저 온몸이 간지러워 색색의 불빛 사이로 씨눈을 내놓은 채 잠 못드는 복숭아 앨러지를 아시는가// 복사꽃 등불밑에 우련히 드러난 내 마음에도/ 구석구석 돋아나는 복사꽃 물이 든 붉은 반점의 앨러지가 있어/ 더는 참을 수 없이 근질근질거리며/ 솟아나는 열꽃을 어쩔 수 없어/ 달 속으로 달 속으로 한밤내 타박타박,/ 달 속 모래사막을 땀 흘리며 걷는 불면의 앨러지가 있느니// 이래도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복사꽃 피는 밤이 오거든/ 그 달이 보여주는 슬로우 비디오나 보시게나./ 달의 어둠 속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보시게나.//

무제 -심우도 / 박제천
꽃이 피면/ 꽃이 지면//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멈춰도// 비를 맞으며/ 비를 그으며// 시를 쓰고/ 시를 버리고// 무제라는 제목의 시를 한편 써나가고 있다/ 언제 끝이 날지는 그대와 나만 아는 시를 쓰고 있다.//

융프라우 -심우도 / 박제천
소방울소리에 문득 잠이 깨었다/ 방울소리에 섞여 드문드문 소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몸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소 한 마리가 콧김소리도 요란하게/ 하늘 한가운데로 떠가고 있었다/ 등에다 걸머진 집 한 채도 보였다/ 도대체 저 집, 저놈의 소가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채찍을 찾는 내 손에 소방울이 쥐어졌다/ 융프라우 산비탈 기념품점에서 사온/ 스위스産 소방울이 청명하게 울리며/ 문득 정신이 되돌아왔다/ 융프라우 만년설을 누비다 온 소방울이/ 밤이면 마음대로 집을 이끌고 구름 사이를 떠돌다/ 소방울소리에 코가 꿰여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 살기에 바빠 제멋대로 지어놓은 마음의 집 한 채,/ 저 역시 밤이면 헤매다 오는 것을 나만 몰랐다.//

빙하 바이러스 -심우도 / 박제천
빙하 바이러스가 바다에 지어놓은 내 집을 덮쳐왔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내 집, 내 사랑이 얼음가루를 뒤집어썼다/ 굴뚝으로 달아놓은 산호초 구멍마다 얼음가루가 쌓이고/ 바다 속에서 기르던 애완 물고기들도 얼음물고기가 되어 흘러다녔다/ 시스템의 패스 워드로 사용하던 그대 눈의 홍채도 얼음으로 굳어버렸고/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불러내던 이름의 자모들은 저마다 얼음꽃이 되어/ 해초의 긴 머리칼 사이에 머리핀인양 파고들었다/ 바다는 일시에 아이스크림 곽이 되고, 내 집은 그 얼음곽 속/ 한 조각의 얼음과자가 되어 누군가 먹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빙하기의 내 삶도 저러했을까/ 벌거숭이 얼음 속에/ 갇혀버린 내 집, 내 사랑,/ 얼어붙은 삶의 화면, 정지된 사랑에 마우스를 던져버리자/ 순간, 수천만의 색채가 으깨진 얼굴 하나,/ 마음이라고 이름붙일 수밖에 없는 내 얼굴이 나타났다// 모니터의 얼음바다 저 밑에 턱하니 버티고 있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마음 하나와 맞닥뜨렸다.//

 

박제천 시인님의 '莊子詩'


莊子詩 그 하나 / 박제천
全身을滿月의활로꾸부려/ 音樂의불붙는시위에살을먹이네/ 배는/ 한몫의樂器/ 弦과弦사이에櫓를넣어휘저을적마다/ 밤무지개를타오르다떨어지는/ 波濤소리/ 못보던새들의울음이天地에가득차고새들의깃은/ 물살속에서퍼덕이네/ 航海中의배는/ 무심히돛폭을펼쳐바람의空閨를채우네.//

장자시莊子詩 그 둘 / 박제천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상형象形의아름다운음정音程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虛空에서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거니/ 바다아래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셋 / 박제천
바닥모를깊이의안을헛짚을때가바로병病의처음이네/ 바다가까운낭떠러지의풀집에누워/ 바닷속의한점바위의검은돌빛으로꿈을굳히네/ 사뭇소용돌이를이루는깊이에돌뿌리를내리고/ 가슴을흔드는피는그대로금이되어/ 금마다바닷물을들이네/ 우레雨雷가말하는천상天上의소문所聞/ 어신魚身에번뜩이는용궁龍宮의빛깔/ 병病의처음에마지막을알때뉘라몸을도사리지않으리.//

장자시莊子詩 그 넷 / 박제천
꾸겨둔선線하나가녹이슨채바람에실려떠나가거니/ 잘가거라/ 만리萬里의뱃길을도는만년萬年이한마리누에잠이언만/ 뉘라손을붙잡으랴/ 가까이갈수록뜨거워지는한덩이금은金銀의말조차수천수만의그림자로/ 이세상世上의여기저기를떠돌고있느니.//

장자시莊子詩 그 다섯 / 박제천
강설기降雪期에주어지는모이는눈뿐이니눈속을서성이며/ 내발소리가휘몰아오는것도눈뿐이니4천四千마디로된/ 꿈벌레인나는마디마다능금알만한검정소인消印을등에지고/ 백설白雪의땅어디를벗어날수있느냐/ 전신全身을삐걱이다마침내몇개의대못으로나남아/ 소용돌이속을헤매이곤하는저승의목선木船을타기전에/ 4천개四千個의우울한그림자를이끌고눈밭을돌며어디를갈수있느냐.//

장자시莊子詩 그 여섯 / 박제천
마른번개빛에드러난바다의척추희디흰뼈사이에발을딛고서서비를맞네/ 하나하나의빗방울속에들끓는새들8만4천八萬四千가지새들이/ 일시에날개를펴나를나르네/ 용골龍骨을돌린뒤의물이랑으로.//

장자시莊子詩 그 일곱 / 박제천
물고기의청신淸新한몸뚱아리를오려내는가위/ 비늘을터는에스프리/ 금을그어만월滿月을도려내는콤파스/ 망사로거는달빛/ 비타민병甁에서숨쉬는일광日光을촬영하네/ 바다에서떠오르는붉은해/ 구식舊式의내사진기안에서춤추는피사체/ 벽壁에는중국中國의관운장청룡도關雲長靑龍刀/ 번뜩이는칼날끝에바다가몸져앓고있네.//

장자시莊子詩 그 여덟 / 박제천
꿈의위촉委囑에매여벌거벗은겨울의아이들은비둘기/ 비둘기의나래에묻혀하늘은색채色彩를뒤집어쓰네/ 겨울의아이들은유인油印된꿈의말저바다의하나섬이네/ 용龍의구름을지즐타고겨울의아이들은눈멀리/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의바람실은저바다의깨어있는섬이네/ 기러기길을쓸어가는물결이네/ 별들이하나씩떨어져불붙을때저바다의살아있는섬/ 겨울의아이들은어둠의주름주름에서스스로의발견發見으로/ 번뜩이는등燈아래내가풀어놓은꿈의말/ 바닷물을밀어내는저희탄력彈力으로부딪치고부딪치다가/ 포말泡沫로부딪쳐부딪치고있네.//

장자시莊子詩 그 아홉 / 박제천
전신全身의정기精氣로싸우네/ 손바람에무너지는심장心臟무너지는방房무너지는생애生涯/ 한잔盞의차茶를마시고빈잔盞에쓸어넣는고안考案의꿈/ 유폐幽閉에지치지않고칼끝으로벽壁을저미며/ 영감靈感의칼끝으로뇌腦를깨우며/ 뱃속의정기精氣만으로중국술사中國術士와결투決鬪를하네/ 아얏!얏!기합氣合도늠름하게무너진방房을거듭세우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 / 박제천
정액精液처럼끈끈한손길의말을버리면/ 꿈의껍질이벗겨지고하이얀뇌골腦骨만햇볕에쪼그라드네/ 상상想像의날랜눈이슬그머니소매에가둔/ 천체天體의여러별들그것들이이마를맞대어나르던죽음의/ 반짝인빛이었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하나 / 박제천
한적漢籍갈피에서날리는지혜智慧의숨소리/ 깨어있는나의안에서해를길어올리는두레박소리/ 출렁이는물속의아픔이손가락끝에서얼굴을드러내네/ 거슬러오를수없는시대時代/ 내여윈늑골肋骨의틈에서해를밀어올리는장자莊子/ 그의바람이산山갈치를떨어뜨리네산山갈치가퍼덕이고햇빛은/ 창槍처럼그것의등을꿰어바다로도로던질것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둘 / 박제천
미명未明의하늘을거둬들이는저것명료明瞭히빛나는저것이태양太陽일까/ 무슨패옥佩玉처럼귀를기울이고어두운방에앉아/ 손톱끝의어둠은손톱속에발톱끝의어둠은발톱속에거둬들이며/ 오롯한광채光彩로빛나는나도태양太陽일까/ 푸른해오라기의날개를단해바라기가눈높이를날아다니고/ 한톨빛의씨앗은눈에서익어수천수만의민들레꽃실을방房가득히뿜어내는데.//

장자시莊子詩 그 열셋 / 박제천
꿈의열쇠를달궈내는풀무속불붙는방房의/ 불붙는쇳조각/ 불붙는보석寶石의심장에서낱낱이뛰어나와내살로파고들던유년幼年의쇳조각/ 머루나다래모양의그흔적에/ 확대경을비추면/ 달빛속에목금木琴소리로근교近郊의나무들도다가오고/ 청산별곡靑山別曲도다가오고/ 나무들의수액樹液에젖은손가락집게에집혀나도수액樹液으로풀려지고마는/ 한폭의묵화墨畵/ 내검은핏속을떠도는금은金銀의/ 별들은모두유년幼年의선물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넷 / 박제천
스스로의노래에홀린채외곬으로뛰어가는이질주/ 나를비추는거울이여너의무서운침실에갇혀서/ 나의질주는끝없으나시렁위의불빛은언제나그그림자를펄럭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다섯 / 박제천
풀잎벽壁을더듬다손에집히는생금生金의광맥/ 눈부셔라단시短詩처럼날카로운잎끝에베이어/ 흐르는피선험先驗의강물에서그물을들고내가채쳐올리는/ 사금沙金조각/ 호기豪氣로운꿈의별이손바닥에놓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여섯 / 박제천
몇억億광년光年의별빛을받아그대의심장을뚫는나의총銃소리로/ 코일처럼꿈을몰아감은그대의신경이풀려지는소리로/ 죽어서사수좌射手座로날아가는그대의마지막목소리로/ 피를흘리는풀들의번뜩임조차사람을다치게하는데/ 그대의넋은유유히시야視野를떠돌아다니네/ 희미한빛인채죽은살속의납도들여다보고납속의무엇과입도맞추네/ 스타라이트스코프로도보이지않던그대의넋과내넋의싸움이시작되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일곱 / 박제천
물결들이서로부딪쳐높이키를세울때그머리에/ 관冠으로서리는바람은/ 노래부르는아뽈리네에르의장미薔薇꽃/ 말의춤을짜넣은아뽈리네에르의비단/ 문득가벼이웃으며풋물같은빛의속을더듬어어디엔가/ 금金으로괴는나의오늘을드러내보이기도하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여덟 / 박제천
노래의부채를버리네/ 젊고늙은모든노래를묻어버리네/ 불붙는여름을멀리보낸뒤/ 피리소리스며창호지窓戶紙를이루고완자문살로나뉘어지는/ 수은水銀은달빛/ 산건山巾이나흰종이에그리고있네/ 몇마리딱다구리가그렇지그렇지나무를두들기네.//

장자시莊子詩 그 열아홉 / 박제천
생목生木울타리엮어물기듣는달을걸고사향麝香노루구름뛰고/ 산간약수山間藥水개울비구니比丘尼꽃가슴흐르고/ 경經소리제등提燈하고/ 환영幻影만남은남근男根한뿌리남몰래처녀림處女林곳곳에심고/ 목어木魚두들기는풍경風磬은은하고.//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 / 박제천
말의심지에불을붙이고이마위에도금화金貨/ 한닢만한불을켜달고종횡縱橫으로어둠속에/ 모발毛髮을날리는넋이여심지에/ 불이붙은말은폭죽爆竹처럼불꼬리를끌며나를떠나가도/ 나의눈은그쉬이쉬이하는소리를따라가/ 말의남루한환상幻想의잿더미를서성이게되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하나 / 박제천
홍역紅疫앓는나의뿔피리소리는뜨거워라/ 드문진통陣痛의손뼈를꺾으며어머니의손뼈를꺾으며/ 뿔피리소리는삐이삐이울어라나이든내가슴속의/ 이무기처럼슬픈날이면하늘에서땅에서울어라/ 어린바다의물구비가혈관속을흘러라.//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둘 / 박제천
무지개의가파른벼랑을기어오르네벗겨진/ 손바닥으로일곱개個의허리에혈인血印을찍네/ 이세상의어디에서도부르면달려올나의것이네/ 가장치열한연소를겪은뒤의내가슴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셋 / 박제천
한무더기의햇빛을온몸으로뿜어내네/ 죽어서살아나는나무南無의땅에뿌리를내리며/ 싱싱한음계音階의꼭두서니쯤무지개를불러앉힐때도/ 발치에떨어져쌓이는말의낙엽落葉들/ 땅에엎디어얼굴을비비다무명無明으로스러지는말의낙엽落葉들을잊을수없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넷 / 박제천
신경질의여윈그림자로고사리과科식물植物의줄기 끝에/ 신경의줄은풀려엉기이고삶을재는그림자마저도도르르말리네/ 여러개의손가락이엮어세운십자가十字架에지등紙燈의흐린불빛이걸려/ 내삶의편린片鱗을가벼이흔들어주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다섯 / 박제천
어둠은늙은나무도불붙이네/ 아닌밤의정염情炎에창포물에머리채를씻다가/ 나래옷만걸친알몸의여자女子들은은하銀河가까이흰젖줄을뿜어올리네/ 능금한알을던져도점점점부풀어오르는원圓이되어도화색桃花色/ 이상李箱의69인양두근거리며거기가득차있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여섯 / 박제천
어느아득한성운星雲의골짜기불밭으로스러지네/ 욕정慾情의개가허망을짖어대는소리네/ 빛머귀나무상장喪章을이끌고별들이다가와/ 그네들눈으로비취이던조명照明옷을걷네환몽幻夢을끝내네/ 피로한언어言語는맨살을드러낸채풀각시곁을서성이고있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일곱 / 박제천
경쾌輕快한휘파람을불며여인女人은꽃이되누나/ 단추와같은꽃방울흔들며/ 타누나/ 잠자는듯한팔이꽃가지에에테르처럼/ 취醉해/ 꽃가지에남실이는영혼靈魂불꽃타누나/ 열병熱病들린여인女人은마침내타누나.//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여덟 / 박제천
난바다까지눈빛을나르는시간時間의얼굴로/ 늘잠자면서깨어있는예외例外/ 한알의구슬때로광휘光輝에찬꿈덩어리를나의그물은거둬들이나히스테리의/ 물결이그때마다내가낚은그것들을놓아주네.//

장자시莊子詩 그 스물아홉 / 박제천
프리즘속의한올거미줄에매달린무명無名의벌레/ 나의생애生涯는움직일수없네/ 이왕국王國의거미는보이지않고/ 하릴없이거미줄에뿌리를내리고내머리는기묘奇妙한꽃으로피어보지만/ 향香과꿀이없다네/ 가다가프리즘이/ 아득한하늘용龍의눈알처럼/ 전갈좌나카시오페아좌의미리내를떠돌다/ 골수의오뇌를짜내어새별을만들어띄울때나/ 나도더듬이를하나잘라분가分家를시킬뿐이네.//

장자시莊子詩 그 서른 / 박제천
손오공의9만리九萬里구름을타도바늘귀속의비좁은길에누워도/ 핏줄속에서부르르부르르몸을떠는번뇌의벌레를피할수없네/ 풍금風琴에서나오는자장가라네/ 솟아오르는봄나물달래무침의미각이라네/ 번뇌가별것인가/ 눈에잘드는것들이갑자기겹쳐/ 꿈틀거리든가거꾸로걸어오는것이지.//

장자시莊子詩 그 서른하나 / 박제천
살속벌레마저꿈틀거리고되살아나는간지러움에/ 연록軟綠의눈을가느러이모으며/ 나무들은꿈꾼다/ 천리안千里眼소소트리스부인夫人의재채기에/ 나무들은노櫓를젓는다/ 가장아름다운물소리가옆구리에서새어나오는/ 선박船舶이다.//

장자시莊子詩 그 서른둘 / 박제천
장고를치네가슴속에절로불이이네가슴속이새카매지네/ 흐르는물에발을담그고꿈이세우는궁宮의용머리를밟겠네/ 수틀속의해바라기가물길에흔들리고/ 알라딘의램프가켜졌다꺼졌다/ 오래헤매이려네헤매임이끝나도헤매이려네.//

장자시莊子詩 그 서른셋 / 박제천
천상天上의궤도軌道마다장미밭을일궜네/ 내생애生涯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 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 흩날리는장미꽃잎이여.//

 



박제천 시인
1945년은 성동고등학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하여 4학년 1학기 수료 후 육군 복무(1966~1969) 만기 전역하였으나 복학 포기하였다. 1966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제 시 부문 완료하여 등단. 시집으로 ≪장자시≫ ≪心法≫ ≪律≫ ≪달은 즈믄 가람에≫ ≪어둠보다 멀리≫ ≪노자시편≫ ≪너의 이름 나의 시≫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 ≪나무 사리≫ ≪SF—교감≫ ≪아,≫ ≪달마나무≫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녹원문학상, 월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했다. 문학아카데미 대표, 계간 ≪문학과창작≫ 발행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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