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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승훈 시인

부흐고비 2021. 8. 20. 08:34

흐린 밤 볼펜으로 / 이승훈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흐리게 흐리게 무엇을 쓰랴// 무엇을 찾아/ 무엇을 찾아 쓰랴/ 서럽던 날들을 쓰랴/ 사라진 바다를/ 바다 위의 구름을 쓰랴/ 용서하랴 부서지랴// 축복받은 날들은/ 모조리 아름답던 날들/ 이렇게 흐린 밤/ 목메이는 밤/ 무엇을 쓰랴// 이 백지같은 외롬/ 마음껏 찢어지는 외롬/ 하염없는 날들만 하염없으니/ 영원히 저무는 병원 하나만/ 노적처럼 흔들리는 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아/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떠날 수 없고/ 머물 수 없으니/ 바위같은 가슴이나 울리면서/ 이제 무엇을 쓰랴//

풍선기 1호 -신동문의 「풍선기 1호」를 모방하여 / 이승훈
초원처럼 넓은 강의실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백묵 가루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그리움을 하늘로 띄웠으나 교수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너를 위하여 미열을 견디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너라는 애초부터 알 수 없던 고향 대신에 머언 창 너머 지나가는 솜덩이 같은 기차만을 지킨다//

저녁 기차 / 이승훈
저녁 기차를 타고/ 눈발이 날리면/ 너와 함께/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 언제나 생각 뿐이지/ 사는 게 지겹다고/ 말은 하지만 한번도/ 떠날 수 없었어/ 저녁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없었어/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면/ 그동안 살아온 게/ 치사해 더러워/ 지겨워 역겨워/ 거적을 쓰고/ 살아온 것만 같아/ 엄살이 아니야/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든다/ 저녁 기차는/ 들은 척도 않고/ 오늘도 칙칙퍽퍽/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도 저녁 기차는/ 가느다란 아편 같다//

담배 / 이승훈
깊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면 담배 생각이 나고 난 기사 옆 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말한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러세요 어떤 기사는 허락하고 에이 좀 참으세요 어떤 기사는 참으란다 깊은 밤엔 많은 기사들이 담배를 허락하고 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가 떨어져 기사에게 담배를 빌릴 때도 있다 어느 해던가? 성냥을 켜던 나를 보고 기사가말했지 선생님 이상하네요 아니 켜기 쉬운 라이터를 두고 왜 성냥을 넣고 다니십니까? 네 성냥이 좋아서요 라이터는 무겁고 성냥은 가볍잖아요? 그런 밤도 있었다//

도라지 / 이승훈
요만한 여유가 고맙다 여유는 나를 버리는 일 오오 욕심 욕심 고정관념을 버리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 피운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러니까 망각이다 처음엔 말보로를 피우다가 도라지로 바꾼 건 인후염 탓이지 만 오늘 저녁 도라지도 있고 파아란 도라지꽃도 있고 갑자기 도라지꽃 생각이 난다 도라지 도라지 산도라지 내가 피우는 당신 요만한 여유라도 생긴 건 모두가 당신 때문이고 저녁에 마시는 하이트 때문이다//

학교 / 이승훈
그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는 책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책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가 의자에 앉자/ 그만 의자가 부서졌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학생들이 마악/ 웃었습니다/ 그는 공부할 게/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그만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젠 끝난 거야]/ 그리고 그는 웃었습니다//

쏘파 위치에 대하여 / 이승훈
난 쏘파 위치만 바꾸며 세월을 보낸다고 시를 썼다 이런 나를 두고 허혜정은 쏘파의 배치에 집착하는 편집증은 기이한 것이며 쏘파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화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자아를 <나>라는 쏘파에 이르게 하려는, 끝없는 나라는 주체의 공간에 배치하려는 노력이며 결국 쏘파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틈새를 만드는 일이며 채워넣는 일이며 세계의 틈을 열고 구멍을 메꿔넣는 일이라고 말한다 (허혜정, 「타이어 또는 말 아래의 공간」, 『현대시학』,1997.10) 과연 그렇도다 쏘파를 옮기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틈새, 어디에도 없는 나를 만드는 일이다 허혜정의 글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나도 이승훈의 시를 분석한다 그의 시에서 위치 바꾸기를 강조하면 위치는 입장이고 시각이고 중심이다 그는 끝없이 중심에서 벗어나기, 이탈을 꿈꾼다 그리고 입장은 서는 일이다 서야 한다 그의 몸도 추억도 페니스도 시체처럼 시체처럼 서야 한다 시체를 잡아 먹으며 서야 하지만 또 위치는 정하기이며 그것은 흐름을 파괴하고 무를 파괴하고 이 흐름의 파괴, 고정이 의미를 낳는다면 그가 쏘파 위치를 바꾸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을 상징하고 거리엔 바람이 불고 겨울저녁 그는 시체처럼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움직인다 쏘파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있는 틈새 또다른 동굴이다 오오 동굴! 이 동굴을 들고 그러나 이 동굴에 대해선 말하지 맙시다 그의 시에 대해서도 쏘파에 대해서도 글쎄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말한 건 수선소 여인 갑자기 바바리 한쪽 팔 길이가 기인 것 같아 (아내 몰래) 들고 간 나를 보면서 이 추운 저녁 아파트 앞 지하상가 수선소 여인은 글쎄 신경이 너무 예민하다고 그냥 입으라고 돌려보냈지만//

작은 방에 대한 회상 / 이승훈
겨울 저녁이면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언제던가 그해 겨울 저녁에도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갔다고 시를 썼다 당신은 없고 빈방에 모자를 걸어두고 왔다는 내용이다 그때만 해도 시적이었군! 당신 없는 방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밖에는 눈이 내리고 당신 혼자 사는 작은 방 벽에 모자를 걸어놓고 돌아왔다고// 그해 겨울 어머니는 개포동 독신자 아파트(13평)에 혼자 사셨다 난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작은 방에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뒷산에 산책을 나가신 날도 있었다 난 어머니가 없는 빈 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어머니가 읽다 둔 원불교 경전도 보고 혼자 돌아온 날도 많다 어머니는 지난해 겨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밤에 난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겨울 저녁이면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당신은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있었지 밖엔 바람이 불고 난 목에 마후라를 하고 눈 내린 골목을 돌아갔다 아아 옛날 춘천에서다 난 당신을 찾아갔다 어머니도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계셨지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난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물론 당신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모든 당신은 어머니다 춘천은 너무 멀다 개포동도 너무 멀다 아무튼 난 누군가를 따라 이 세상에 왔다 내가 노래한 작은 방은 모두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내가 그동안 방에 대해 시를 쓴 건 어머니, 그리고 당신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모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난 시를 쓰다 말고 책상에 이마를 처박는다 오 언제나 겨울 저녁이 문제로다//

우리들의 밤 / 이승훈
꿈이란 무엇이며/ 어둠이란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인가/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이란 무엇인가/ 쓸쓸한 사람 곁에 누워 있는/ 비쩍 마른 나는 무엇이며/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 내리는 밤/ 문득 들리는 네 가슴의/ 시냇물 소리란 무엇인가/ 치욕이란 무엇이며/ 추위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 불을 켜고/ 잠이 안 와 돌아눕는/ 이 외롬이란 무엇이며/ 어둔 창을 열고/ 약을 먹는 나란 무엇인가/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어둠 속에 잠시 타오르는/ 불빛 불빛 같은 것/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허나 밤이 좋다 / 이승훈
허나 밤이 좋다/ 악몽만 있는 밤이/ 창백한 망치로 두드리는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밤이/ 나는 좋다/ 그래도 나는 밤이 좋다/ 꿈 속에 떠 있는 밤/ 의식 없는 밤/ 나는 밤의 주인은 아니지만/ 밤의 주인은 떠난지 오래다/ 몇 번이나 돌아누우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밤/ 아무도 없는 밤/ 한번도 꿈꾸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밤/ 과거만 있는 밤/ 코도 없는 밤/ 코만 있는 밤/ 지남철도 없는 밤/ 이 구부러진 밤이/ 나는 좋다 횔더린의 궁핍한/ 시대도 미래도 모조리 잠든 밤/ 불빛도 불빛도 죽은 밤/ 비행기도 없는 밤이/ 나는 좋다/ 누가 뭐래도 좋다/ 영혼 따위가 없는 밤/ 몽상 따위가 없는 밤/ 악몽만 있는 밤 한없이/ 식어가는 육체만 있는/ 이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이 밤이/ 나는 좋다/ 너무 좋아서/ 이윽고 나는 밤을/ 꽉 깨물어 버린다//

이곳에서의 삶 / 이승훈
죽은 듯이 살았다/ 빛나는 것은 없었다/ 하염없이 살았다/ 땅에 침을 뱉었다/ 한번 더 뱉었다/ 머언 데로 한없이/ 가까운 데로 달려갔다// 오오 죽음이 다 된 삶/ 나를 떠나게 하던 삶/ 내가 떠나던 삶/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삶/ 내가 기도한 삶/ 그토록 커다랗던 삶/ 그토록 커다랗게 나를 가둔 삶/ 내가 크게 크게 가두었던 삶// 시방 여름 대지에서/ 만나면 외면해야 할/ 흐린 날들의삶/ 비린내 투성이 삶/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던 삶// 저 삶이 하루종일/ 연기만 나는 삶이/ 허나 영원히 사랑했던 삶이/ 나를 영원히 사랑했고/ 내가 영원히 사랑할 삶이/ 시방 이렇게 불탄다/ 삶은 삶 속에 나를 가두고/ 나는 내 속에 삶을 가둔다//

사는 기쁨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타르디유 / 이승훈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이건 이미지가 아니다/ 이건 시가 아니다// 그런 밤이 있다/ 그런 새벽이 있다/ 그런 저녁이 있다// 그가 시쓸 때/ 그가 목욕할 때/ 그가 술에 취해/ 앉아 있을 때//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그런가?/ 의심스럽다면/ 독자들도 연습삼아//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힘든 일이 아니지요// 수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사랑하는 남자의 몸을/ 조용히 기다리듯이/ 능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기다림 속엔/ 포기와 노력이 있지요// 없는 사람과/ 없는 물건이/ 이 밤 속에/ 나타난다/ 사라진다// 나타남과/ 사라짐은/ 결국 하나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노이로제가/ 되어 간다//

새로운 눈물 / 이승훈
새로운 눈물은/ 깊은 밤에 왔다/ 산을 넘어 왔다/ 불안을 이긴 밤에/ 문득 찾아왔다/ 새로운 눈물은/ 어느날 그립다는 말 속에/ 불타며 왔다/ 눈에 덮인 산과 함께/ 불 꺼진 밤과 함께/ 갑자기 왔다/ 새로운 눈물 속에/ 너는 작은 역(驛)이었고/ 너는 작은 새였고/ 너는 작은 바다였다/ 작은 바다 속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불안을 이긴 밤에/ 산너머 산너머/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눈물은/ 나를 감싸고 가슴에/ 쾅쾅 못을 박았다//

풀잎 끝에 이슬 / 이승훈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일월(日月) / 이승훈
이 신발 너에게 주고/ 가리라/ 일월(日月)이여 이 옷도 너에게/ 주고/ 눈 내리면 눈도 주고/ 가리라/ 흐린 가을 저녁/ 찬비는 내리고/ 일월(日月)이여/ 있음은 무엇이고/ 없음은 무엇인가/ 언제나 벼락이 있고/ 멀쩡한 대낮에 비가 오네/ 그러므로 일월(日月)이여/ 좀 더 닦아야 하리/ 이 책상도 닦고/ 벽도 닦고 거울도 닦고/ 가으내 아픈/ 이 팔도 닦고/ 책 속의 글자들/ 오오 글자들도 닦아야 하리/ 가을 가고/ 겨울 오는 아침에/ 눈이 오네//

아름다운 계절 / 이승훈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꽃이 피던 계절/ 그러나 꽃이 지고/ 갑자기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네가 웃던 계절/ 그러나 너의 미소가 사라지고/ 갑가지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그러나 네 목소리 들리지 않고/ 난 휴지조각 위에/ 시를 쓰네/ 이 흐린 저녁에/ 시를 쓰네/ 하얀 종이 위에 쓰는 게 아니야/ 난 지금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휴지조각 위에/ 그러니까 휴지가 된 마음 위에/ 감기에 시달리며/ 시를 쓰는 거야/ 너의 미소가 태어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시를 쓰는 거야/ 너를 위해/ 실의에 빠진 봄 너를 위해/ 이 시를 쓰는 거야//

봄이 오던 날의 대화 / 이승훈
여자:다시 태어난다면/ 무얼 하고 싶어?// 남자: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게 죄야// 여자:그러니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그땐 물새만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 여자:그래 그런 화가/ 물새만 찾아다니는// 남자:언제나 물새만 그리는// 여자:밥은 누가 먹여 주고?// 남자:그렇군 다시 태어나면/ 밥 걱정이나 없었으면// 여자:한세상 물가에서/ 오리 뻐꾸기 귀뚜라미// 남자:뻐꾸기는 물새가 아니야// 여자:왜 아니지?// 남자:어째서 뻐꾸기가 물새야?// 여자:내가 물새라면/ 물새가 되는 거야// 남자:그렇군 원칙은 없으니까// 여자:다시 태어나면 정말/ 무얼 하고 싶어?// 남자:시인은 괴로워// 여자:편안한 시인도 있지// 남자:그럼 시를 못 쓰지// 여자:다시 태어나면// 남자:언어는 골치가 아파// 여자:과연 우린/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남자:난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여자:그건 나도 그래/ 남자:나무를 봐/ 여자:봄이 오려나 봐/ 남자:벌써 봄이 온다고?// 여자와 남자 멍하니/ 창 밖을 본다//

가을 / 이승훈
하아얀 해안이 나타난다. 어떤 투명도 보다 투명하지 않다. 떠도는 투명에 이윽고 불이 당겨진다. 그 일대에 가을이 와 머문다. 늘어진 창자로 나는 눕는다. 헤매는 투명, 바람, 보이지 않는 꽃이 하나 시든다. (꺼질 줄 모르며 타오르는 가을.)//

또 가을이다 / 이승훈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고향 / 이승훈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너는 거기 있구나/ 옛날처럼 내 상처/ 다스리며 말없이 서 있구나/ 가을 해 부서지는 길거리에/ 사금파리 울음 감추고/ 너는 나를 맞는구나/ 술 마시고 보낸 밤들/ 훌훌 털고 10년 만에 문득/ 버스 타고 내려가면/ 너는 들국화처럼 피어 있구나/ 화만 나던 날들이었다고/ 너와 마주앉아 말하면/ 모든 화 말끔히 씻기며/ 눈내린 겨울 아침/ 마후라를 하고 찾아가던/ 골목에 너는 아직도 서 있구나/ 몸은 야위었지만/ 하얀 스웨터를 입고/ 커단 눈으로 웃으며/ 나를 맞는구나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옛날에 너를 버린 건 나야」/ 나직히 말해도 너는 웃고만 있구나/ 가을 해 너무 고운 아스팔트에/ 말없이 서 있는 너/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아/ 옛날 골목 찾아가면/ 있는 건 너의 흔적 뿐/ 오오 고향에 있는 건/ 언제나 고향의 흔적 뿐//

춘천을 생각하며 / 이승훈
속물이 다 된 내가 대견하다 오오 고맙고 고맙다/ 오늘 저녁에도 고맙다 내가 춘천에 산다면 이런 저녁이면/ 안개 속을 헤매리라 춘천엔 안개가 있고 춘천은 춥고/ 난 황량한 석사동에서 겨울 저녁이면 버스를 타고/ 싯벌건 노을을 향해 떠나리라// 춘천은 내 고향 그러나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다/ 어린 시절 가정 문제고 젊은 시절 내면 문제고 30대에/ 나를 휩쓸고 간 안개 같던 여자 문제지만 개인 문제를/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건 피해야 한다// 오늘도 가을이다 흐린 가을 언제나 춘천은 흐린 가을/ 여자 문제로 아내와 싸운 것도 흐린 가을 둑길에서다/ 춘천에서 나는 정신의 한량, 추억의 백수, 어두운 시를 쓰던/ 우수의 건달, 그러나 이젠 속물이 다 된 내가 대견하다/ 이젠 속물이라도 되었으니 잘 된 일이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끝내자//

잡문 / 이승훈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다 어제가/ 꿈이라면 오늘도 꿈이다 오늘도 꿈이다 꿈이 현실이다/ 오오 이 말을 하려고 내가 쉰이 넘게 시를 썼구나/ 이 말을 하려고 그동안 악마가 들끓고// 이 말을 하려고 그동안 천사도 천사도 들끓고 내가 나를/ 끌고 가고 골목으로 끌고 가고 골목의 열반에 닿으려고/ 골목의 피안에 닿으려 고 당신의 피안에 닿으려고 당신의/ 피안에 닿으려고 애를 썼지만// 오늘부터 이 세상이 열반이고 쓰레기가 열반이다/ 미국 간 다영이는 편도선을 앓고 편도선 약 펜프렉스를/ 붙여준 것이 이틀이 넘는다 이틀이 뭐야? 더위는/ 계속되고 아침부터 더운 날// 이제 내가 할 일은 일체공양 이 더운 여름 공양하는/ 마음으로 덕이 없는 나는 오늘부터 연꽃을 보는 마음으로/ 앞에 쓴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공양하는 마음으로 좀더 머리를 숙이고 그런 마음으로/ 비는 오지 않지만 그런 마음으로//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 이승훈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 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 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 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 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 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 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 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 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 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 상 위 전기 스탠드를 켜면/ 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 책상 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 위의 사과를 먹으면/ 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 무적이 울면 새벽 연필을 깎으면 이마에 술기운이 남아/ 있으면 다시 잠이 안 오면 문득 무섭다는 느낌이 들면/ 턱을 고이면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쓰면 돌덩어리/ 우울 황폐한 새벽 인생은 그를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를 속이고 그를 감시하는 이 인생이라는 놈!//

사랑 / 이승훈
비로소 웃을 수 있고 한가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비가 와도 비가 와도 비/ 를 맞을 수 있고 서점에 들려도 마음/ 이 가벼울 수 있고 책들이 한없이 맑/ 아지는 걸 볼 수 있게 된 건 투명한 책/ 들 앞에 두렵지 않게 된 건 모두 어제/ 네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기 때문/ 이야 네가 있는 곳! 따뜻한 곳! 그곳/ 으로 오라고!//

사랑의 시작 / 이승훈
피범벅 겨울이 가고/ 넌 커단 가방 하나 들고 나타났지/ 아니 커단 기차를 들고 나타났지/ 그 기차에 타라고 말했지/ 난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떠났다/ 지금도 떠난다/ 계속 떠난다/ 이 기차, 이 구름, 이 항아리 속에/ 내가 있으므로/ 이 방 속엔 내가 없다/ 이 학교에도 없다/ 이 거리에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간 거야?/ 아마 네가 들고 온 기차 속에 있겠지/ 이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네가 온 다음/ 난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니야/ 네가 오다니?/ 다신 오지 않으리라 믿었지/ 너, 이 봄, 이 아련한 날들, 이 도취의 날들,/ 이 피안의 날들,/ 이제 네 속에 내가 있다/ 이제 내 밖은 온통 너다/ 꽃으로 뒤덮인 들판,/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은 날들,/ 모두가 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내가 몰고 가는 쏘나타,/ 내가 들고 가는 가방,/ 내가 들리는 술집,/ 내가 시를 쓰는 이 볼펜,/ 이 백지,/ 지금 차 밖에 내리는 어둠,/ 왕십리의 불빛,/ 깊은 밤 의왕 터널을 지나 나타나던/ 수원의 불빛,/ 깊은 밤 찾아간 카페,/ 카페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 내가 걸치고 간 겨울 바바리,/ 모두가 너다/ 피투성이 황혼 다음에/ 문득 네가 오고/ 이제 내가 보는 것,/ 내가 만지는 것,/ 내가 듣는 것,/ 모두가 너다 난 사라지고/ 요란한 폭음 속에 폭음 속에/ 하얀 비행기 하나 떠 간다/ 넌 다리 없는 새라고 말했지만//

말의 사랑 / 이승훈
그러나 말에 사무치고 말이 가는 곳에 사무치고 말의 헤맴에 사무칩니다 말의 원한이 아니라 말의 사랑이 뼈에 사무칠 때 우린 깨어납니다 말을 사랑하십시오 인간이 아니라 말에 사무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해가 지고 밤이 옵니다 말에 사무쳐서 말을 여의고 사라진 말속에 불을 켜십시오 아니 불이 당신을 켭니다 말에 사무칠 때 말은 사라지고 사무침만 남습니다 사무치는 인생을 사십시오 사무치는 사랑, 사무치는 슬픔, 사무치는 리듬, 사무칠 때 깨어납니다//

A와 나 / 이승훈
A는 고통이다. A가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히 채운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A는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밤이다. A와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밤에도 낮에도 지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A는 결코 죽을 가능성이라곤 없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난 글쓰는 사람 / 이승훈
난 글쓰는 사람/ 불행이여 우린 실컨 싸웠다/ 난 위대한 작가가 아니야/ 난 위대한 시인도 아니야/ 난 글쓰는 사람/ 난 글을 사랑하는 사람/ 난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 언어여 우린 실컨 싸웠다/ 이제부턴 휴식이다/ 재를 재떨이에 털고/ 난 입에 담배를 물고/ 이 글을 쓴다/ 난 글쓰는 사람/ 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난 언어와 노는 사람/ 난 당신과 노는 사람/ 나의 병은 글쓰기 나의 병은/ 나의 건강 오늘도 글을 쓰고 지치고/ 언어여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애인, 나의 정부,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나의 숨결, 나의 가슴/ 나의 가슴의 흉터, 나의 섹스/ 서지 않는 섹스 오 내 사랑,/ 나의 항구, 나의 결핍, 나의 몸/ 이유는 없다/ 난 그냥 글쓰는 사람/ 난 그냥 걷는 사람/ 난 그냥 사랑하는 사람/ 매미가 울고 햇살이 내리고/ 나무가 크고 차들이 지나가듯이/ 그냥 글쓰는 사람/ 난 글쓰는 사람/ 내가 쓴 글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 이 글쓰기가 나를 낳고/ 나를 키우고 나를 병들게/ 하고 나를 나이 먹게 한다/ 오 맙소사!//

내 친구 개미 / 이승훈
넌 카페가 무언지 알 거다 내가 자주 들르는 카페는/ 두 곳이다 하나는 인사동(천도교 회관 지나 고려원/ 옆)에 있고 하나는 내가 사는 서초동에 있다 인사동/ (아아 아닌지 모른다 인사동이 아닐 거다 난 시를/ 쓰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나 생각해본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승훈 씨가 편집한, 고려원에서 나온 책을/ 서가에서 뽑아 살펴본다 종로구 경운동 70 그래/ 경운동이로군) 카페에는 길을 향해 난 커단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앞 나무 의자에 앉으면 유리창 너머 길이/ 보이고 해가 지는 골목도 보이고 가을 저녁 낙엽이/ 지는 나무도 보인다 고려원에 들르는 날은 야간/ 강의가 있는 목요일 저녁이다 시간이 남으면 해질/ 무렵 그 카페에 앉아 저무는 길을 보고 지나가는/ 미인들도 보고 나처럼 못생긴 중년 남자들도 보고/ 책도 보고 담배도 피우고 서초동 카페는 목요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허전해서 들른다 넌 허전하다는 게/ 무언지 알 거다 작은 카페 벽엔 검은 거울이 있고/ 빠에 앉으면 거울 속에 내 얼굴이 흐리게 나타난다/ 흐린 흐린 가을밤 혼자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공상도 한다 술에 취하면 거울 속에 흐린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고 난 갑자기 부끄러워 일어선다 이런/ 밤의 심정을 시로 쓴 적이 있지만 이 시를 읽은/ 제자는 너무 감상적이라고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 난 그의 말을 따랐다 이 시는// 술 마시는 밤이 외롭더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동대문을 지날 때/ 동호대교를 지날 때// 사는 게 외롭더라/ 너무 피곤하더라/ 아파트 앞 카페에/ 말없이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밤이 외롭더라// 밤 열두시가 외롭더라/ 1년이 외롭고 10년이 외롭더라/ 의미가 없으면 없는 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나는 게 외롭더라// 처럼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해도 감상적이다 아아 난/ 이다지도 감상적인가? 어린애들도 아닌 대학교수가/ 이다지도 감상적이라니 쯧쯧 그러나 넌 감상이 무언지/ 알 거다 벽거울이 있는 카페에 앉아 늦은 밤 맥주를/ 마시는 이승훈 씨는 지친 모양이다 넌 지쳤다는 말이/ 무언지 알 거다 지친 다음에 지친 다음에 찾아오던/ 오한도 웃음도 알 거다 난 지금 보도블록 위에서/ 만난 너를 생각하며 이 시를 쓴다 넌 내 친구니까//

난 나를 본 적이 없다 / 이승훈
더운 여름 아파트 앞 구두 수선소 작은 의자에 앉아 구두 고치는 걸 구경할 때 수선소 아저씨가 말하네 글쎄 언젠가 교수님 지나가는 걸 보고 어떤 손님에게 저 분이 알아주는 대학 교수라고 했더니 그 분 말씀이 교수 같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아닙니다 알아주는 대학 교수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인데 아주 소박하신 분입니다 그래요? 난 웃으며 말했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교수가 도무지 왜소하고 품위가 없잖아요? 여기 앉아 저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본다면 나도 그럴 겁니다 난 나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난 당신의 아저씨 / 이승훈
오늘부터 난 아저씨야/ 가벼운 가벼운 여름이야/ 아저씨는 지나가는 아저씨/ 웃는 아저씨/ 난 겨울 한강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니야/ 난 고개를 숙이고 웃는 아저씨/ 작은 목로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 아름다운 당신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난 당신 아저씨야/ 당신 애인이 아니라 당신 아저씨/ 이름 없는 아저씨/ 모자를 쓰고 마포 삼겹살집에 앉아/ 이룬 것도 잃은 것도 없는 황혼 아저씨/ 비 아저씨/ 빗물 고인 아스팔트나 바라보는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지 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마/ 난 아저씨가 좋아/ 끄노 아저씨도 있지/ 프랑스에서 시를 쓰던/ 기인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저씨/ 인생을 반납한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그동안의 먹구름도 천둥도 모조리 한강에/ 버리고 온 아저씨!//

너 / 이승훈
가을이 오던 날/ 때르릉 전화가 오던 날/ 전화가 오고 갑자기/ 불이 나고 어디서 불이 나고/ 허겁지겁 모자를 쓰고/ 나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너 있는 곳 찾아/ 엉터리 시 박쥐같던 학문/ 모조리 버리고 부랴부랴/ 너를 찾아 나섰다/ 사방에선 바람이 아니라/ 물이 쏟아지고/ 가을이 오던 날/ 물이 콸콸 쏟아지고/ 물은 폭풍이 되어 쏟아지고/ 빌딩에서 쏟아지고/ 버스에서 쏟아지고/ 쏟아지는 폭포 속에서/ 나는 다이얼을 돌리고/ 정말 다이얼을 돌렸다/ 쏟아지는 폭포 속에서/ 쏟아지는 추억 속에서/ 쏟아지는 너의 얼굴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정말 고운 너의 얼굴/ 하늘을 찌르고 나를 찌르는/ 고운 얼굴이었다/ 쏟아지는 가을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가을이 오던 날/ 때르릉 전화가 오던 날//

너 / 이승훈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무수한 너 / 이승훈
길을 가다가/ 문득 살펴보면/ 이 팔도/ 이 머리도/ 무수한 너로 덮인다/ 그렇다/ 내가/ 걷는 게 아니다/ 거리를 걸어가는 너/ 시장을 보러 가는 너/ 운전을 하는 너/ 친구들 속에서 더욱/ 외로워지는 너/ 해질 무렵 유리창에/ 물고기를 그리는 너/ 편지를 쓰는 너/ 기다리는 너/ 돌아눕는 너/ 그런 네가/ 나를 이룬다/ 나를 이루고/ 나를 부수고/ 다시 이루는/ 끝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너!//

너를 본 순간 /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저린 외로움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아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너를 만난 날 / 이승훈
너를 만난 날은/ 날개 달린 날이다/ 현실이 사라지고/ 다른 현실이/ 태어난 날/ 그러니까 그날은/ 초현실의 날이다 훨훨/ 새가 날아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만신창이가 되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문득 가을이 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필연의 날이다/ 머리에서 손이 빠져 나오고/ 다리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던/ 허리에서 설탕이 쏟아지던/ 불안 비참 치욕 따위가/ 지루하고 맥이 없던 날들이/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아아 내 어깨 쭉지에/ 문득 날개가 돋던 날/ 너를 만난 날//

너를 만나고 / 이승훈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너한테 너한테 배웠다/ 사는 게 난리지만 그동안/ 너를 만나고/ 난리가 끝난 줄 알았지/ 그러나 아니야/ 네가 떠난 다음 또 난리가 나고/ 이 난리는/ 내가 만든 난리/ 겨울저녁에 시작된 난리가/ 봄이 오는 저녁에도 계속되고/ 난리는 난리는 불이 아니야/ 불이라면 끌 수도 있지만/ 난리는 사랑이야/ 사랑은 저주받은 사람들의 직업이야/ 겨울저녁 싯벌건 노을이야/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야/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고역/ 이 업보 이 가난/ 하얀 닭이나 백 마리 기르면/ 난리가 끝날까?/ 이 난리가 지금도 계속되는 난리가/ 끝이 없네/ 천 마리 닭이나 기르면 끝나리/ 어젯밤에도 술만 마시고/ 돌아왔네//

너를 안으면 / 이승훈
너를 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바람불던 저녁도 사라지고/ 무슨 정신도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병든 거리도/ 소리없이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불안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마흔 개의/ 어둠이 사라지고/ 너의 얼굴에/ 나를 묻으면/ 마흔 개의/ 감옥도 사라지고/ 우울도 사라지고/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던/ 밤들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손을 대면/ 나의 손도 사라진다/ 이젠 네가 있으니까/ 이젠 네가 나이니까/ 너의 가슴에/ 텀벙 뛰어든다/ 그래서 이젠/ 너의 얼굴도/ 볼 수 없다//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 이승훈
봄날 오후/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따신 해/ 이마에 받으며/ 서 있던 너/ 병든 네 옆에 얌전히/ 자고 있던 고양이/ 봄날 햇살 속에/ 말없이 서 있던/ 네가 보던 건/ 먹빛 슬픔/ 바람 속을 지나가던 열차/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후리지아/ 오늘도 쌀가게 앞에 네가/ 있을 것만 같아/ 나는 고양이 한 마리 사러/ 시장으로 간다/ 후리지아는 너의 이름/ 후리지아 옆에 잠들던/ 고양이도 너의 이름/ 먹빛 슬픔 속에/ 오늘도 작은 마을/ 햇살 내리는 골목/ 어느 쌀가게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너//

너라는 역 / 이승훈
어제 저녁 사랑에 도달한 나는 어제 저녁 너라는 역에/ 도달한 나다 너라는 역에 금잔화 불타는 작은 역에 금/ 잔화만 불타는 너의 몸에 너의 가슴에 너의 눈에 너의/ 코에// 지금도 도달한다 사고가 극한에 네가 있다 너라는 몸/ 이 있다 덧없는 순간들이 진리다 이 덧없음 속에 활활/ 타는 금잔화 속에 포옹 속에 눈물 속에 죽음과 삶 속/ 에 저무는 가을//

너라는 햇빛 / 이승훈
나는 네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제비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개 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갇히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 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네가 찾는 것 / 이승훈
여름날 오후/ 헌 책방에서/ 네가 찾은 건/ 책이 아니다/ 땀을 흘리며/ 네가 찾는 건 너의/ 마음인지 모른다/ 여름날 오후/ 모자를 쓰고/ 먼지 속에서/ 네가 부지런히 찾는 건/ 시간인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 헌 잡지를 뒤지며/ 헌 잡지에 문득/ 코를 박는 건/ 너의 가슴을/ 박는 건지 모른다/ 길 모퉁이 허름한/ 책방에서 오늘도/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손과 가슴과/ 부르튼 입술은/ 달리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헌 책방으로 달려가/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얼굴은/ 문득 흐려진다//

당신 / 이승훈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피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당신의 방 / 이승훈
당신의 방엔/ 천 개의 의자와/ 천 개의 들판과/ 천 개의 벼락과 기쁨과/ 천 개의 태양이 있습니다/ 당신의 방엘 가려면/ 바람을 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 당신의 방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 이승훈
당신은 그동안/ 너무 무겁게 살았지/ 이젠 가볍게 살아야 해/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순진하게 되는 것/ 아름답게 되는 것/ 향기롭게 되는 것/ 고통보다 환희/ 분노보다 용서/ 절망보다 희망/ 복잡한 건 단순하게/ 당신은 쉰이 넘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실수도 많았지만/ 머리도 세었지만/ 당신 머리엔 새가 날아와/ 놀아야 해/ 봄이 한창일 때/ 꽃이 한창일 때/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신은 그때를 잊어야 해/ 오늘은 화창한 날/ 오늘은 여름이 오는 날/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여름이 오는 날/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시간은 많지 않아/ 공부할 시간도/ 술 마실 시간도/ 좋은 사람과 만날 시간도/ 그러니까 순진하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무엇보다 아름답게/ 살아야 해//

돌아오지않는 법 / 이승훈
너를 기다리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너를 기다리며 머리를 빗고 거울을 닦고 커피를끓이고 책상을 닦고 벽에 다른 그림을 건다 너를 기다리며 한낮에도 스탠드를 켜고 커튼을 내리고 슬리퍼를 끌고 복도를 방황한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너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네가 돌아올 때까지 가방이나 뒤지고 연필이나 깎고 가슴 속에 귀뚜라미나 기르고 하루 종일 몸에서 열이 나고 빌어먹을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물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법도 있는 법?//

격언 / 이승훈
난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당신도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우린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니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야/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우린 빈혈이니까//

언어 / 이승훈
내가 산 곳은 언어, 언어 속에 내가 있다 아니 언어가 나다/ 나는 말하고 나는 침묵하고 나는 기침하고 나는 담배를 피우고/ 난 정치는 모른다 난 국문과 교수도 아니다 이 글 속에서 이 언어/ 속에서 아니 이 언어의 들판에서 난 염소 옆에서 담배를 피우/ 고 염소도 담배를 피우고 비가 오면 이 언어 속에서 우산을 쓴다/ 당신과 만난 곳도 여기 이 하얀 원고지 위에서! 어머니와 싸/ 운 곳도 여기! 이 하얀 얼음 위에서! 해질 무렵 개미를 연구한/ 곳도 이 백지 위에서! 그동안 난 헤맨 게 아니다 언어가 헤/ 매고 지금 저무는 하루도 언어 속에 저문다 물론 언어는 피로하다/ 당신들이 언어를 죽이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언어, 그것, 알 수 없는 힘이다//

이 종이에 / 이승훈
이 종이에/ 무얼 쓸까/ 이 하얀/ 이 창백한/ 이 물보라치는/ 얇은 종이에/ 너의 이름을 쓸까/ 가을의 뼈에 대해 쓸까/ 네가 찾아온 날의/ 환희에 대해 쓸까/ 지나가는 가느다란 바람에/ 날려 버릴까/ 푸른 건 가냘프다고 쓸까/ 이 하얀/ 이 부끄러운/ 이 죄많은/ 얇은 가슴에/ 가을은 스미건만/ 무슨 목적이 있느냐/ 오는 부는바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시간이 정지한/ 가을 햇살에/ 발을 담그면/ 발은 그대로/ 폭포가 되는/ 이 가을/ 하얀 종이에/ 슬픈 에세이를 쓸까/ 슬픈 독수리 하나/ 떠 있다고 쓸까/ 이 병든/ 이 하얀/ 이 펄럭이는 가슴에/ 정말 무얼 쓸까//

시 / 이승훈
나는 시를 쓴 다음 가까스로, 거의 힘들게, 어렴풋이 발생 한다. 나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 속에 태어난다. 시 속에 태어난다. 시 속에 내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시는 시라는 장르에 속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장르에 참여한다. 참여한다는 건 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속함을 의미하고, 시는 시라는 장르에 속할 때, 말하자면 시라는 장르로 일반화될 때 이미 시가 아니다. 우리 시단엔 이런 의미로서의 귀속, 너무나 시같은 시, 장르라는 일반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시들이 너무 많다.// 일반화된 시는 시가 아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 의해 시 속에서 시를 향해 시와 싸우며 시라는 길 위에서 헤매는 일이다. 헤맬 때 시가 태어난다. 시가 무엇인가를 알면, 도대체 시가 있다면, 우린 시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화는 모든 시의 숨결을 죽인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쓰는, 내가 쓰면서 생각하는 시는 이런 의미로서의 사가 없는 시다. 시가 없을 때 시가 태어난다. 아아 시가 없을 때 시가 없을 때 시가 있다면 시를 쓸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시대의 문학이라는 유령과 싸운다// 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이 문학이라는 이름이 이상하게도 이 땅에선 무엇이나 말해선 안된다는 점잖은 인습으로 고착된 지 오래다. 우리 문학이 답답한 건 이런 인습 때문이다. 인습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이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모든 제로의 가능성은 제로의 불가능성이고 이 불가능성이 또 가능성이다.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나 말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고 이 불가능성이 또 가능성이다 나는 시를 쓴다. 아니 산문인가?//

망할 놈의 시 / 이승훈
용기도 없고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다/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밑빠진 나날 입도 없다 입도 없다/ 아아 사랑했던 너의 얼굴도 없고 기차도 없고 다리도 없고/ 건너야 할 다리도 없고 오늘도 없다/ 오늘도 없는 것들을 위하여 시를 쓴다/ 시를 어떻게 쓰나/ 망할 놈의 시를/ 쓸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없는 얼굴이 나를 감싸면 없는 해가 생기고 없는 풀이 생기고 없는 시가 생길 테니까/ 없는 내가 마침내 없는 기차를 타고 없는 너를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말짱 애들 장난 같고/ 그런 걸 믿고 살아온 게/ 망할 놈의 시/ 시 같다!//

한국적 작문 -프레베르를 모방함 / 이승훈
"아주 젊었을 때 그는/ 굉장히 수줍고 우울했다/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다/ 그후 그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등이 굽고부터는/ 여행을 싫어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났을 때/ 등은 그대로 굽었지만/ 그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닭 / 이승훈
물고기가 되기도 하고 통곡이 되기도 한다 아니다 닭은 몰려오는/ 비행기 저렇게 굶주리는 비행기 하아얀 닭은 하아얀 물고기 하아얀/ 통곡 온통 고독하다 비행기가 몰려온다 굶주림이 몰려온다 나는 방/ 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러면 방안에 가득 차는 하아얀 닭/ 들이 밤새도록 푸드득거리고 나도 덩달아 푸드득거린다//

갈매기 나라 / 이승훈
막차를 타고 어머니, 갈매기 나라에 갑니다./ 갈매기 나라엔 갈매기만 삽니다./ 바람 부는 밤에 갈매기 나라가 보입니다./ 내 머리가 갈매기 나라에 닿습니다./ 이제 내 머리, 인간을 떠나 갈매기와 함께 있으니, 갈매기는 끼륵 거리며 바다의 상처를 알려 줍니다./ 눈물 한 방울이 썩어 마침내 바다가 됩니다./ 바다, 밤마다 무서운 생(生)의 플랑크톤, 플랑크톤이 내 머리로 들어와 존재가 됩니다//

최승자 / 이승훈
“오늘 신문 봤어요? 최승자가 누구야요?” “응. 최승자 시인? 몇 년째 정신분열증 이야.” “그런데 최승자가 시는 잘 써요?” “시가 좋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야.” “그런데 뭐 허무가 보인다더니 정신병자가 되었잖아요? 부처님 말씀이 일체유심조라고 마음을 그쪽에 쓰니까 정신병자가 된 거야요. 이상인가 뭔가 하는 시인도 정신병자 아니야요?” 겨울 오전 주방 식탁에 앉아 밥 먹을 때 전기 청소기 들고 아내가 하는 말이다. “나도 오십보백보야.” 한 마디 하려다 그만 둔다.//

암호 / 이승훈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사진 / 이승훈
비오는 밤/ 비에 젖은/ 계단을 내려간다// 에프론을 두른/ 아내의 얼굴이 흔들린다/ 바람이 분다/ 축축한 생각들이 굴러떨어진다// 사납게 소리치는 시간을/ 잃어버린 내 머리가/ 사납게 기어다니는/ 자애의 힘이여//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한없이 깊은 계단을/ 굴러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암흑이 된다//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위독(危篤) / 이승훈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토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비명 / 이승훈
아아 캄캄한 하늘에/ 누가 가느다란 초록빛 선을 긋는다/ 암흑의 얼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바다에 내가 떠 있다// 별들이 알을 까기 시작한다/ 기일게 늘어진 어둠의 혈관이/ 파열되면서 흘리는 현란한 밀알들// 자욱한 바다로 내가/ 알을 까며 지나간다/ 벌레 울음소리가 은폐된다/ 노오란 꽃들이/ 암흑의 잠을 뚫고/ 마침내 출렁대는 시간의/ 內壁에 푸른 시를 박는다// 아이들이 사방에서 쿵쿵 뛰며/ 멀고 먼 살들의 낭하로 몰려간다/ 나는 어두운 하늘에/ 작은 벌레를 그리고/ 퍼어런 팔들이 비명을 지르는/ 바다에 붉은 달을 그린다//

고함 / 이승훈
붉은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은 자정이다/ 피를 보고 놀란 두 눈이/ 절망의 현미경을 오래 보는 두 눈이다// 누가 이 땅에 태어나/ 푸른 별 박히는/ 내 머릿속 고함을 듣는다/ 한없이 떠내려가는/ 붉은 고함을 지르며/ 가라앉는 시퍼런 바다/ 바람부는 밤에도 울음들이 떠 있다// 기인 팔들이 휘어안은/ 마음의 풀잎이 칼을 토하고/ 징그러운 남자의 칼/ 따스하고 무섭게 번쩍이는 칼/ 피를 보고 놀란 두 눈이// 절망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幼年의 별이 낭자히 떨어지는/ 아 시간의 깊은 고함 소리/ 불의 혀가 키쓰하고// 기갈처럼 허어연 폐벽을 스치며/ 달리는 것은 자정이다/ 기름에 젖은 문명이다/ 한없이 떠내려간다//

사물(事物) A / 이승훈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命令의 겨울 地下室에선 더욱 眞摯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精神의 땅을 판다. 頑强한 時間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液體로 變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마리 흰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밤비 / 이승훈
밤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고/ 님은 떠난다/ 추운 밤 불빛에 젖는 이 종이가/ 나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을 밤/ 비는 내리고 바람이 자면/ 빗소리 이 종이를 뚫고/ 나를 뚫는다 밤비 속에 밤비 속에/ 허옇게 센 머리 펄럭이며/ 이런 시를 써서 무얼 하나?/ 가을 밤 비는 내리고/ 님은 떠나고 나는 기침을 하고/ 계속 입을 틀어 막는다//

모욕 / 이승훈
그리움과 모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 머언 들 위로는 마른 바람 일고/ 하아얀 불이 탄다// 벙어리같은 시를 쓰며/ 풀잎에 어린 햇살처럼/ 나는 살고 싶었다 파열하는/ 마음만이 그 뜻을 안다// 하늘 한 조각 베어먹고/ 배 고프면 웃는다 그래도/ 살아나는 웃음이 희열이 되는 날// 헤매이는 날// 마파람에 얼굴 트며/ 벙어리 벙어리 말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목마른/ 그대와 나, 아아 그리움과 모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

놓아버리고 가자 / 이승훈
놓아버리고 가자. 꿈 속의 길, 꿈 속의 사람,/ 꿈 속의 산. 허물어도 잃음이 없다. 새여, 날/ 아가도 날아감을 모르며, 나뭇가지에 앉아도/ 흔들림을 모른다. 매일 지나가도 중학교 뒷/ 길, 누가 깨끗이 쓸고간 뒷길, 내가 밟고 간다./ 아무도 없는 중학교 뒷길, 내가 중학교 뒷길/ 이다. 내가 중학교 건물 볼 때 중학교 건물이/ 나를 본다. 어디서 닭이 운다.//

 



이승훈(1942년~2018년) 시인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 공대에 입학하여 공대 시절인 1963년 《현대문학》에 시 <낮> 외 2편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동 대학 국문과 3학년으로 전과, 졸업 후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시집으로 <사물(事物) A> <환상의 다리> <당신의 초상(肖像)> <사물들>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 <밝은 방> <나는 사랑한다> <상처> <한국명시감상> <아름다운 사람 그리운 시간> <너를 본 순간> <인간들 사이에서> <시집 샤갈>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백남학술상, 이상시문학상, 김준오 시학상을 받았으며, 2008년엔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평생 시에 담고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남기려 했던 것

[강원도민일보 김진형 기자] “그럼 됐다.그럼 됐어.무엇이 더 필요한가.무릎을 펼 수 있는 작은 정자면 된다.나처럼 할 일 없는 노인,그것도 병이 든 노인이 걷다가 잠시 무릎이나 펴고 앉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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