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김용호 시인

부흐고비 2021. 9. 4. 01:57

주막(酒幕)에서 / 김용호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향수(鄕愁) / 김용호
바다 저편에/ 산이 있고// 산 위에/ 구름이 외롭다.// 구름 위에/ 내 향수는 조을고// 향수는 나를/ 잔디밭 위에 재운다.//

 

고향으로 간다 / 김용호
어느 간절한 사람도 없는 곳/ 고향으로 간다// 머나먼 날 저버린/ 고향으로 내가 간다// 낡은 옷 훌훌이 벗어버리고/ 생미역 냄새 하암북 마시며 고향으로 간다// 잃어버려, 끝내 잃어버려/ 없는 고향이라 포개둔 그리움이 한결 짙어/ 눈감아도 뛰놀던 예옛 어린 시절/ 좁은 골목 골목들이 서언하게 다가오구나// 세월이 흘러/ 세월이 흘러/ 맴도는 지점에서 소용돌이가 되는 황혼 무렵// 통곡은 이미 사치스러운 것/ 무딘 신경에/ 새론 출발의 기적을 울리며/ 고향으로 간다// 없는 고향이라 사뭇 그리워/ 그 그리움을 캐러 고향으로 내가 간다//

 

푸른 별 / 김용호
고향 뒷산/ 노비산* 언덕 위의 소년은/ 꿈이 많았더란다// 구름에도/ 풀밭에도/ 곧잘 꿈을 심었더란다// 심구곤/ 자라나는 꿈이 하도 벅차서/ 흐느끼며 우러러본 하늘// 별들이 의좋게 반짝거리는 밤엔/ 구슬픈 곡마단의 트럼펫 소리에 귀가 젖어/ 고스란히 별과 함께/ 그냥 샌 밤이 있었더란다 나의 푸른 별을 안고//

* 노비산 : 마산에 있는 조그만 산 이름

 

눈 오는 밤에 / 김용호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매화 / 김용호
孤高를 자랑하기엔/ 아직도 구두창 밑이 흙투성이다.// 冬眠처럼 누운 것보담/ 거리에 나가 차라리 가쁜 호흡을 퍼붓자// 눈이 내리고/ 발자죽 하나 하나에/ 印쳐지는 索漢이/ 바싹 바싹하는 이런 무렵에/ 매화는 한결 돋보인다고 한다.// 참/ 고운 여운을 곱디고운 나래다.// 남으로 향한 창가에 온기가 있어/ 너처럼 나도 외롭지 않을 때가 있다.//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 김용호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5월이 오면 / 김용호
무언가 조용히/ 가슴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5월의 유혹 / 김용호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치오르는 가슴을랑/ 네게 맡기고 사양에 서면/ 풍겨 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이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여/ 감미롭게 핀/ 활홀한/ 5월//

 

 

너를 숨쉬고 / 김용호

 

날이 날마다/ 오가는 길에/너만 있어//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너만이 있어// 어항 속/ 한마리 운명의/ 금붕어처럼// 너를 숨쉬고/ 나는 살아간다.//

← 이중섭(1916~1956)의 그림(가로·세로 15×16㎝) ‘너를 숨쉬고’는 김용호 시인의 詩를 바탕으로 그렸다. 그림 뒷면에 시 전문이 육필로 씌어 있다.

 

 

담배 / 김용호
두 손가락에 끼이어/ 삶과 주검의 허무를 알으켰다/ 두 입술에/ 물려/ 사랑과 미움의 갈등을 배웠다// 머-ㅇ히/ 들창 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너 함께 이루어진 날// 내 삶은/ 색동저고리를 벗고/ 하이얀 소복을 입었다.//

 

날개 1 / 김용호
거리에 서면/ 부후연 먼지와 거센 바람// 파아란 하늘이 그리워/ 발돋움하면/ 넌, 나를/ 절름발이라 하는구나// 어디메로 가는 구름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보던 구름이기에/ 움패인 마음 한구성에/ 철늦은 비를 따루느냐// 먼지도/ 바람도/ 비도/ 모두 멎어라// 천길 땅 속, 뻗은 뿌리에/ 싹은 터라/ 내/ 날고 싶구나/ 짧은 한쪽 다리를 어루만져/내 날고 싶구나// 날개 돋칠 두 어깨에/ 힘은 솟아라//

 

날개 2 / 김용호
사닥다리를 조심스레 하나하나 올라갔습니다./ 年輪이 다 찬 꼭대기에서/ 어머니/ 나는 또 어디로 옮아가야 합니까?// 저어 까마아득한 하늘 속에 녹아 버리기엔/ 아직도 未練이 감탕처럼 날 휘감고/ 되내려 가긴 이미 時間이 발판을 떼어버렸습니다.// 속절없는 나의 曲藝에 풋내기 애들의 손뼉이 울리고/ 누군가/ <피에로>/ <피에로>/ 하며 외치는 소리.// 어머니/ 어찌하여 당신은 나에게 날개를 주시는 걸/ 잊으셨습니까?//

 

            저 구름 흘러가는 곳 / 김용호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 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 1960년 개봉 영화 ‘길은 멀어도’(감독 홍성기, 주연 최무룡, 김지미)의 주제가

 

운명 / 김용호
손바닥을/ 거울인 양 들여다보고/ 쓰디-쓴 인생의/ 소태물을 마신다.// 파리한 내 얼굴에/ 새겨진 네 이름// 東/ 西/ 南/ 北// 오가도/ 닿을 곳 없어// 이제 나는/ 운명의 연못에 사는/ 한 마리 금붕어가 되었다.//

 

상밥집 / 김용호
밥 한 숟갈에도/ 눈물이 고였다.// 물 한 모금에도/ 설움이 어렸다.// 눈물을 삼키고/ 설움을 마시고// 문득/ 푸른 산 저 너머/ 고향 하늘이 그리워// 좁은 골목을 나서며/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연가 / 김용호
길들은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를 정답게 바라봅니다.// 물결이 모래를 어루만지며/ 밀려오고 밀려가고// 산듯한 바람이 즐거움을 싣고/ 속삭이며 불어오는// 그리운 사람아!// 손곱내 나는 그 섬등에서/ 그대 나를 부르는 듯 부르는 듯// 나는 오늘도/ 산호처럼 빠알간 사랑을/ 그대 가슴에 수놓는다.//

 

너 생각뿐 / 김용호
삼삼그리면/ 눈을 부비어보고// 하두 보고프면/ 쩔래 쩔래 머리를 뒤흔들어도 보고// 못 이루는 사랑일 바엔/ 아예/ 지우고 잊어버리자// 하고, 어제도 오늘도/ 너 생각뿐//

 

릴르 브린느에게 / 김용호
너는 내 안에 너무 가까이 살고 있어/ 이미 보이지 않는 먼 섬이 되었다.//

 

바위처럼 / 김용호
굴 껍질 향내 듯 나는// 바위에 홀로 앉아/ 바다를 어루만지면// 물결이 부드런 손을 내밀고/ 내게로 안겨온다.// 아득한 그날을 그려/ 향수에 젖은 바윗돌들// 이제 말문을 닫혀/ 아무 말이 없다.// 나도 바위처럼 살다/ 이 물결에 안겨 죽을까부이//

 

끝내 한 잎의 落葉인 것을 / 김용호
흔들리는 바람 속에 종언이 있다. 허공// 자연 속에, 자연은 아슬아슬하게도 지고 이별은 슬픈 깃발을 올려 나부낀다.// 얻은 것과 잃어버린 것과 매맞은 것과 사무치도록 외롭던 좀먹은 나날과 헤어도 헤어도 모자라던 그 하나와.// 한 점 바람에도 역사는 흔들리어 뚫린 가슴과 무덤 있는 노오란 풍경과 시지프스의 인내가 끝내 줄을 끊어 유한의 둘레에서 무한으로 뻗힌 길.// 한 잎 낙엽이 지고 연달아 몇 잎이 지고 우수수 수없는 낙엽이 진다. 간밤, 비가 축축이 젖은 心情 위를 스스로 밟고 가면, 아득히 핀 소년의 꿈이 산마루에 무지개로 걸려 있고, 이제 한 개 돌이 되어 비문에 새겨질 생명이 조용히 진다. 낙엽들의 바싹바싹 하는 여운.// 나도 한 잎 낙엽일 뿐, 끝내 그뿐인 것을.//

 

산 / 김용호
터-ㄱ 버티고/ 앉았는 것은/ 여간해 끄떡 않을/ 믿음성 있는 자세다// 윗머리를/ 하늘 높이 뻗친 것은/ 추구의 행방이/ 어디인가를 알리는/ 솔직한 신호다// 그렇기에 산은/ 속새들의 지껄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명상은 높아 높아/ 가을 호수처럼 맑다//

 

江가에서 / 김용호
얼음장 밑으로/ 조용히 강물이 흐른다.// 아직도 봄은/ 갇혀 있나부다.// 찬손 모아 입에 대고/ 호호 불면 따스한 입김.// 이처럼 봄은/ 내 입 안에 서려 있나부다.// 버들강아지 불룩한 강가에서/ 떠나간 그날의 사람,// 그래서 봄은/ 내게서 아주 떠나 갔나부다.// 그러나 2월은/ 봄을 잃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 핑크 비취의/ 봄의 볼을 기다리는 마음.//

 

千환짜리 시 / 김용호
露天 막걸리집이라/ 술잔을 달이 떠/ 李太白이 부럽잖습니다.// 머언 항구를 떠나 천 리 예까지 왔어도/ 강파른 생활의 언덕은/ 마찬가지 창백합니다.// 곱창에 불이 옮아/ 등잔 대신 상머리가 밝은데/ 죽어 다시 타는 그 어진 소에/ 내가 화장되고 있는 걸/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곱창처럼 사람들 입에/ 꼬옴 꼬옴 되씹힐 수 있는 그런 詩를/ 몇 개나 쓰다 죽어야 합니까// 문득 가을 바람이/ 더운 이마를 스쳐가면// 한번 멋지게 울어봤으면 좋을/ 소낙비 같은 게 기둘려지는 밤입니다.//

 

낙동강 1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강아!// 칠백 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너 함께 길이길이 살 약속을/ 오목조목 산비탈에 깃발처럼 세웠다.// 내 사랑의 강 !/ 낙동강아 !//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 요람이었더냐./ 너는 얼마나 그리운 자장가였더냐.// 앞집 영이와 풀싸움하던 그 언덕에는/ 언제나 우리들의 끔을 재우던/ 황혼의 보금자리가 비좁게 따뜻하였고// 툇마루처럼 올라다니던/ 동리 어구 - 전설의 할무니/ 세 아람이나 되는 은행나무엔/ 우리들의 콧물이 마를 사이도 없었다.//

 

낙동강 2 / 김용호
그러나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별은 얼마나 총명한 하늘의 아들이었더냐/ 우리들은 얼마나 총명한 이땅의 아들이었더냐/ [하늘천 따짜지 가매솥에 누른밥]하며/ 콧물이 점점 소매 끝에서 줄어들고/ 수박참외를 하루밤 호-올닥 매어 놓았던/ 그 원두막 [오랑이 딱딱] 할아부지가/ 어딘줄 모르게 시언 섭섭이 떠나가고/ 나룻배 사공-한룡이의 멋떠러진 노래가/ [저 건너 갈미봉]에서/ 무언가 응 [이이다사 마다사]로 바꿔져갈 때/ 우리들은 어린양만 피워서는 안될/ 어무니의 한숨을 기-ㄴ 겨울밤 호롱불 밑에서보았다.//

 

낙동강 3 / 김용호
이듬해 봄!// 우리들은 삶의 고달픈 행로의 첫 걸음을/ 지개에 걸머지고/ 마을 뒷산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이 촉초-ㄱ이 올라붙은/ 포푸라 나무가지로 끊어 만든/ 우리들의 쌍나팔 -- 피리가/ 순이를 씬나물 맨나물 쑥들을 캐는/ 산기슭을 헤쳐지나/ 머 -ㄹ 리 마을을 얼룩송아지 엄매- 하는 소리는/ 마을의 춘궁을 또한번 알이었다// 그 봄은 그렇게도/ 우리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슬픈 교훈이었다// 팔월 한가위 --- 아부지가 우리들의 노리개/ 땅총을 사가지고 온 읍내// 정월 대보름 -- 줄싸움 구경들/ 엄마 등에 업혀 갔다는 읍내// 인제 우리들은 나무를 등에 업고/ 읍내를 찾아가는 씩씩한 일군이 되었다// 삼십리길 -- 읍내의 못보던 경이는/ 우리들의 얼마나 동경의 세계였더냐// 햇곱한 지게에 찾아드는 어둠과 적료를 안고/ 돌아오는 논 무덕 위엔/ 피로와 배고픔이 가시발처럼 얽혀졌는데 ......//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이때부터 너는 하나의 슬픔을 안고 흘러갔다// 황혼은 언제/ 조고만 어린 가슴에 몇장의 연꽃을 피었더냐// 그리하여 나무하다 말고/ 쇠줄 두가닥이 머얼리 합치는 그곳에도/ 기차는 자빠지지도 않고/ 용하게 달리는 이유가 몹시도 알고 싶었다//

 

낙동강 4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우리들의 설움이 너 함께 얼어붙고/ 또다시 너 함께 풀리고/ 세월을 하나의 밀물이던가/ 삼십리 밖 읍내의 못보던 경이는/ 차츰차츰 이곳에도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붉은 기!/ 흰 기!// 돌돌 말렸다 풀렸다 하는 땅을 재는 자/ 어느새 새끼쇠줄이 논바닥에 들어눕고/ 흙구루마는 영이와 풀싸움하던/ 그 언덕을 짓밟고 달아났다// 기어이 귀신이 산다는/ 은행나무 목이 다라난 그날 아침// 마을의 할부지 할무니들은/ [이제 동리사람이 모두 죽는다]고// 땅을 뚜디리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이의 탐색은/ 그런것에 눈도 거듭떠 보지 않았다/ ....그것은 크고 뻗는/ 우리들의 푸른 하늘의 의욕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그 경이의 밀물로/ 끝내 제살부치는 되지 않았다// 조사모사가 우물가에 모이고/ 가로수 혓바닥에 귓속말이 잦아갈 때/ 고향은 하루 하루 호방넝쿨 시들듯 시들어갔다// 그리하여/ 노래속에도 읇지 못한 노래가/ 세월을 안고 너 함께 흘러갔다// 아! 초조와 희망은/ 우리들의 숙명이던가//

 

낙동강 5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오리온의 별들이 일찍/ 우리들께 들려 준 이야기는 무엇이며/ 약속은 무엇이더냐// 우리들은 그것을 안다/ 우리들은 그것을 잊지않았다// 두팔을 벼개 삼아 밤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그는 우리들의 앞길을 밝히는 하나의 등대였다// 아! 그러나 ...... 그러나 ....../ 그것마자 영원한 동경의 세계였다// 우리들은 얼마나 착한 백성이었더냐/ 우리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무리였더냐//

 

낙동강 6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밀물과 밀물의 부닥침 속에도/ 일찍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무른 적이 없다// 너 하나만은/ 최후까지 지켜줄/ 우리들의 단 하나의 희망이었기 때문에 --// 그러나/ 그 희망마자 하루밤 사이/ 아 - 니 순간의 거품처럼/ 사라질 운염이었던 것을/ 가슴에 천 만번 뜯고 뜯어도 알길이 없다// 초조와 불안과 공포가/ 나흘낮 -- 사흘 밤 ---/ 우리들의 앞가슴을 차고 뜯고/ 울대처럼 선 온 산맥의 침묵이 깨어질 때/ 고숨도치처럼 뺏뺏한 대지를/ 한손에 휘어잡고 매어친// [꽝] 하는 너의 최후의 선언은/ 우리들의 절말 그것이었다// 언제 너는 노아의 주구가 되었더란 말이냐/ 언제 너는 폭군 네로를 꾀하였더란 말이냐//

 

낙동강 7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우리들은 너에게 고함친다/ 너의 폭위는/ 우리들 하나의 크나큰 시련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한마리 참새도 너의 폭위 앞에/ 그의 생명을 능이 상우지는 않았다/ 하물며/ 우리들의 새빨갛게 타는 생명을 짓밟기엔/ 네 함은 너무나 약하였다// 우리들은 사무치는 원한과/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또다시 털고 일어설/ 하나의 신념을 찾았다// 구름은 한갓 하늘을 떠도는 [유랑민은 아니었다]/ 그는 갈망과 추구의/ 생명의 깃발을 싣고/ 설계하고 건축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괴하고/ 또다시 탐구의 이동을 꾀하는/ 아! 지혜롭고 자유스런/ 선망할 하나의 생명이 아니었더냐//

 

낙동강 8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이제 좀 지나면/ 돈냉미 상추쌈에 봄잠이 잦을 때다/ 우리들은 숫가락 몇개 바가지를 찼다/ 그렇게도 가뜬한 우리들의 살림살이었다// 북쪽 --/ 북쪽은 구름이 깃들인 고향/ 우리들은 구름의 의도를 따라 북쪽으로 간다// 할무니 어무니/ [쇠마차 타면 서울 구경 내일 아침 한다지"] 하던/ 당신들의 평생소원/ 그렇게도 타고 싶어하던 [쇠마차]가/ 지금 철교를 구얼고 달려오지 않습니까?// 아하!/ 기쁨의 물결이 일 당신들의 얼굴얼굴이/ 왜 그렇게도 앙상한 나무 가지처럼/ 뻣뻣하고 어둡고 차단 말씀이십니까?//

 

낙동강 9 / 김용호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삼월에도 삼진날/ 흥부에게 줄 행복의 씨를 물고/ 제비가 틀림없이 이 마을을 찾던 그 때는 어느 때며/ [용 못된 강철이]가 산다는 그 바위가/ 우리들께 영원을 이야기한 때는 그 어느 때냐?......//

 

낙동강 10 / 김용호
아! 그리운 내 사랑의 강!/ 낙동의 강아!/ 너는 왜 말이 없느냐// 너의 슬픔은 무어며/ 너의 기쁨은 무어냐//

 

거울을 들여다본다 / 김용호
거기/ 나의 實體가 보이질 않는다.// 허망한 세월 속에/ 나는 서서히 용해되어 갔나부다.// 戰慄이 있어 소릴 높이 외쳐본다.// 아무런 反響이 없다./ 그 투명한 유리 입김// 낯선 딴 實體가 나의 공간을 占據하여/ 나는 거울 속에 있고 나는 그 거울 속에 없다.//

 

해마다 4월이 오면 -모든 영광은 「젊은 사자들」에게 / 김용호
1/ 화산이 터졌다. 불길이 용솟음쳤다./ 억눌렸던 분노의 지열이 일시에 치솟았다./ 경보는 삼월 십오일! 내 고향에서 울렸다./ 남쪽 바다의 성난 파도가 그 신호였다.//
2/ 해마다 사월은 왔다./ 사랑하는 내 나라, 그리운 고향에도 --/ 그러나 「사월은 가혹한 달이었다./ 죽은 흙에서 리라꽃을 키우며/ 기억과 원망을 뒤섞어서/ 둔한 초목의 뿌리를 봄비로 일깨우려 했다.」/ 그렇다. 「죽은 흙에서 리라꽃」을 --./ 사월은 와도 봄은 오지 않았다./ 가혹했다. 봄이 없어 꽃은 가슴속에 피다 말고 졌다./ 아! 쓰레기통에서 꽃은 필 수 없지 않은가./ 부패 속의 구더기 때문, 꽃은 필 수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사랑하는 내 나라는/ 불안한 지역이었고 절망의 지대였다.//
3/ 사월은 오고 봄은 왔다./ 民主와 自由를 위해 만발한 「젊은 꽃」이여/ 이 아름다운 꽃에/ 누가 「죽음의 흙」을 던졌던가./ 보라! 「봉사와 질서」는 그 가면을 벗어/ 「민중의 지팡이」는 이 나라 꽃송이를 후려갈기고/ 「쏘라고 준 총」은 그렇다 틀림없이/ 이 나라에 아름답게 필 꽃송이들에/ 우리들의 아들을, 딸을, 동생을, 조카를/ 그 正義의 머리통에, 가슴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젊음에겐 정지나 후퇴가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전진뿐이다./ 목마른 낮과 밤을 엮어/ 목숨에 심지를 달고 불을 켠 젊음이여!/ 「부정과 불의」를, 「횡포와 억압」을/ 「사악과 허위」를 산산이 쪼각내는/ 저 우렁찬 함성을 절규를 듣는가, 들었는가/ 온 자유세계 인민들이여!/ 피에 젖은 갈망과 희구와 염원의 저 외침을 --.//
4/ 드디어 젊음은 이겼다. 주권을 되찾았다./ 民主 勝利의 깃발을 하늘 드높이 들었다./ 피를 흘리고, 피가 뒤끓고 피가 통하는 곳에/ 아! 쓰레기통에서는 장미가 필 수 없다는/ 경멸과 치욕과 굴레를 말짱 벗고/ 희망과 새로운 신념을 우리들은 얻었다./ 길이 길이 기억하라! 銘肝(명간)하라./ 사월 이십육일!/ 지축을 흔드는 승리의 뒤안길에/ 피다 말고 진 꽃송이들이여!/ 어찌 碑銘(비명)에만 새기랴! 그대 이름을/ 우리 붓을 가다듬어 靑史에 쓰리라/ 우리들은 「우상」을 원치 않는다./ 오로지 원하는 건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씩씩하고도 굳센 그대들의 모습인 것을 --//
5/ 이제, 감격은 해방의 그날처럼/ 분수가 되어 하늘로 치솟아 흐르고/ 무지갠가,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한 빛깔!// 아는 이, 모르는 이 굳게 손을 잡으며/ 피의 승리에 눈물짓는 젊음이여!/ 자유의 기수여! 민주의 횃불이여!/ 우리들의 나라! 민주의 나팔수여!// 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냐/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벅찬 기쁨이냐, 즐거움이냐.//
6/ 여태까지 우리들을 슬프게 한 것/ 여태까지 우리들을 괴롭게 한 것/ 여태까지 우리들을 분하게 한 것// 그 모오든 것은/ 이제부터 없어져야 한다./ 송두리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四捨五入」도 「사바사바」도 「빽」도 「나이롱국」도// 白書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란」걸작도/ 「가죽잠바」도 그렇다 겨레를 좀먹는/ 모오든 어휘들랑 없어져야 한다.// 가난과 싸우며 정성껏 바친 우리들의 세금이/ 「도금한 애국자」들에게 횡령당함을 거부한다./ 그 어느 정당도 착복함을 완강히 거부한다.// 민족과 조국의 이름으로 기만을 일삼는/ 政商輩(정상배)와 아첨의 무리들은/ 송두리째 뿌리를 뽑아야 한다.// 인민에겐 준법을 강요하며/ 불법을 자행하는 위정자는 없어야 한다./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든 「귀하신 몸」은 다시 나타나선 안 된다.// 우리들의 나라! 사랑하는 내 나라는/ 인민으로 이루어진 인민을 위한/ 인민의 진정한 나라라야 한다.//
7/ 해마다 사월이 오면 꽃이 피리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은 피리라/ 젊음이 가꾼 「민주의 꽃」이/ 해마다, 해마다 곱게 피리라/ 피고 피어 온 동산에 만발하리라// 그 꽃을 향해 우리들은 나비가 되어/ 모두 날아들리라./ 사월은 따뜻하리라. 꽃은 활짝 피리라./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렇게 노래하리라./ 「사월은 가장 즐거운 달/ 산 흙에서 민주의 꽃을 키우고/ 기억과 願望(원망)을 뒤섞어서/ 찬란한 영광의 그날을 모두 회상하리라」고.//
* 《조선일보》 1960년 4월 28일자 석간에 발표

 

조국에게 / 김용호
너의 짓밟힘 속에/ 나도 짓밟혀/ 뭉개진 기형아로 태어나고// 너의 그 가난 속에/ 나도 가난해/ 굶주려 영양실조가 되고// 숨가삐 가시덤불 헤쳐/ 언덕에 오르면/ 하늘하늘 고운 하늘이 안겨/ 사뭇 정다운데/ 길은 아직도 멀어// 조국이여!// 짓밟힘 속에 태어났기에/ 나는 너를 아끼노라.// 빼앗긴 가난 속에 자라났기에/ 나는 너를 두둔하노라.// 다하지 못한 어제와 오늘/ 다하는 그날을 위하여/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진혼(鎭魂)의 노래 / 김용호
내, 죽거들랑 아무도 울지 말라// 다만/ 내, 사랑하던/ 하늘의 별이여!// 잠시 눈을 감아다오// 生命은 꽃처럼 지고/ 다시 피어/ 나날이 세월이 흐르는데// 바람이여!/ 하늬바람이여!/ 나지막이 꽃잎을 흔들어다오// 내 永遠히 잠잘 때//

 

조선 / 김용호
배앵 뱅 돌다 돌아오면/ 여위어도 그리운 너// 없는 게 슬픔이 아니었고/ 들볶이는 게 딸 질색이었다// 하고픈 말이 많아도/ 두 눈만 꺼음벅 마음속으로 주고받고// 또다시 밖에 나서도/ 갈 곳 없어 주춤거리던 발길// 나는 이제 버리자/ 지팡이를 짚던 버릇을// 오목조목 산기슭에나/ 드문드문 시냇가에나// 푸그은이 자리잡은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즐거움// 내 사랑의 조국/ 너 이름은 조선이었다//

 


 

김용호(金容浩, 1912년~1973년) 시인
경상남도 마산(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생이며 아명(兒名)은 김만석(金萬石)이며 호(號)는 학산(鶴山), 야돈(野豚), 추강(秋江)이다. 마산공립보통학교와 마산상고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 졸업. 1930년 동아일보에서 시 《춘원(春怨)》으로 문단에 첫 등단했다. 시집으로 <향연(饗宴)>(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별>(1951) <남해찬가>(1952) <날개>(1956) <항쟁의 광장>(1960) <의상 세례(衣裳洗禮)>(1962) <시원 산책(詩園散策)>(1964) 등이 있고 저서에는 <시문학 입문> 역서에 <문학 원론>(허드슨 원저) 등이 있다. 단국대학교 문리대학장 역임.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동엽 시인(2-1)  (0) 2021.09.06
이영도 시조 시인  (0) 2021.09.05
이승하 시인  (0) 2021.09.03
김규동 시인  (0) 2021.09.02
한하운 시인  (0) 2021.09.0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