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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승하 시인

부흐고비 2021. 9. 3. 07:54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 이승하
귀기울이면 저 강 앓는 소리가 들려오네// 신음하고 있는 700리 낙동강/ 내 유년의 기억 속 서걱이는 갈대밭 지나/ 가물거리는 모래톱 끝까지 맨발로 걸어가면/ 시야엔 출렁이는 금비늘 은비늘의 물살/ 수백 수천의 새들이 나를 반겨 날고 있었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많은 물떼새들/ 왕눈물떼새․검은가슴물떼새․꼬리물떼새․대기물떼새……/ 수염 돋은 개개비란 새도 있었네/ 물떼새 알을 쥐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낙동강/ 내 오늘 한 마리 물고기처럼 회유해 왔네// 아무것도 없네, 그날의 기억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라고는/ 나루터 사라진 강변에는 커다란 굴뚝의 도열, 천천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네, 천천히/ 땅이 죽으면 강도 따라 죽을테지 등뼈 휜 물고기의 강/ 대지를 버린 내 영혼이 천천히 황폐해 가듯// 할아버지랑 그물 망태기를 들고 강에 나가면/ 참 많은 물고기를 맛볼 수 있었네/ 잉어․누치․가물치․뱀장어․미꾸라지……/ 수염 돋은 동자개란 놈도 가끔 보였네/ 지금 그 물고기들 낙동강을 버렸다고 하네// 내가 세제를 멋모르고 쓰는 동안 거품을 물고/ 내가 폐수를 슬구머니 버리는 동안 거품을 물고/ 신음하는 강, 그 새 그 물고기들 다 어디론가 떠나/ 내 발길 바다에 잇닿는 곳까지 왔네, 낙동강구/ 을숙도를 보고 눈감고 마네, 삐삐삐 삐리삐리 뽀오르르 뽀르삐/ 눈감으면 바다직박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네.//

사랑의 탐구 / 이승하
나는 무작정 사랑할 것이다/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지라도/ 사랑이란 말의 위대함과/ 사랑이란 말의 처절함을/ 속속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나는 한사코 생을 사랑할 것이다/ 포주이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 나이 어언 스물이 되었건만// 사랑은 늘 5악장일까 아니 여탕(女湯)/ 꿈속에 그리는 그리운 고향 그 고향의/ 안개와도 같은 살갗일까 술 취한 누나의/ 타진 스타킹이지 음담패설 속에서만/ 한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땐 목청껏 노래불렀다/ 방천 둑길에서 기타를 오래 퉁기고/ 왠지 부끄러워 밤 깊어 돌아왔더랬지/ 배다른 동생아 너라도 기억해다오/ 큰 손 작은 손 손가락질 속에서 나는/ 자랐다 길모퉁이 겁먹은 눈빛은 바로 나다// 사랑은 그 집 앞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세월처럼 머무르지 않는 것일까 낯선 누나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지 젓가락 장단에 잠 설치지만/ 사랑이란 다름 아닌 침묵하는 것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것 쓰다듬어주면서/ 네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한다고/ 고개 끄덕여주는 것.//

수화 / 이승하
빛바랜 목소리/ 설움을 딛고 나부끼기 시작하면/ 나는 눈을 열고/ 너를 듣는다/ 눌린 냉가슴을 비집고 나와/ 조심스레 흔들리는 깃발/ 가장 명징한 언어로도/ 너는 늘 욕구 불만인가/ 한때의 눈물겨운 팬터마임/ 떨리는 입술 새로, 손가락 새로/ 빠져나간 언어는 처연히 나뒹굴고/ 자신의 이름마저 몰래 지워지지만/ 나는 믿고 싶다/ 들끓는 몸짓으로 빚어낸/ 언어의 무늬 고운 도자기/ 언젠가는 산산이 깨어져/ 사람들의 가슴마다 뿌려질 것을/ 믿는다/ 아니다, 아니다, 화음을 울리며/ 산것들의 가슴마다 뿌려질 것을.//

바람 그리기 / 이승하
황혼의 감천*으로 너를 보낸다 누이야// 네가 혼자 사분거리다 냇둑을 뛰어가면/ 다옥한 네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났다/ 망각의 시내 이편에서 나는 지켜보았다, 너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었다/ 하나씩 발 아래 옷이 쌓이면/ 도리암직한 네 몸 청동빛이 났다/ 그때 감천은 무르춤하였고,/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 울음 참고 나는 오래 지켜보아야 했다/ 그 무력했던 날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감천아, 감천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 감천(甘川):김천시 외곽을 흐르는 시내.

짐진 자를 위하여 / 이승하
너의 짐을 져주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고통에 짓눌려 딱정벌레처럼 위축되어/ 이게, 기어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촉각 잘린 귀뚜라미처럼/ 관절염 앓는 어머니처럼/ 나는 살아가고 있는데/ 네가 캄캄한 밤에 돌이 되어/ 내 앞에 엎드리면/ 나는 너를 지고/ 너의 짐까지 지고/ 어디쯤에 이르러 숨 돌려야 할까/ 울음 참으며 당도한 곳이 막다른 골목이면/ 울음을 그냥 터뜨려야 하는지/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기 때문에 무력감에 절망하고/ 공포에 질려 부르짖기도 하지만/ 기적을 꿈꾸진 않으리라/ 부끄러움에 떨며 받아들이리라 너의 짐을/ 나의 짐 위에 너의 짐을 얹어/ 더 어두운 세계를 찾아서 갈 터이니/ 자거라 지금은 잠시 자두어야 할 때.//

선운산가 / 이승하
해질녘에/ 선운산*에 올라 그대 이름 불러보네// 날릴 것 다 날려 목구멍만 남았네/ 초로(草露) 같은 이 내 목숨 아직도 붙어 있어/ 살겠다고 살겠다고 버르적거리다/ 이제는 악만 남았네/ 갈쿠리 같은 손만 남았네// 먼 변방 어디 수자리 나가셨더라면/ 먼 이역 어디 전장터 나가셨더라면/ 죽어도 나라 위해 죽었으니 우국 충절일 텐데/ 그대는 한 민족을, 벗하면 이웃을/ 따져보면 먼 겨레붙이들을/ 마구 때려 죽였다니 그해 5월에/ 마구 찔러 죽였다니 그해 5월에/ 그 낯선 도시에서/ 당신도 총에 맞아 죽었다니// 네 편 내 편/ 편가르고 싸우다 죽어도/ 죽어서 썩어지면 추깃물 흐를 몸들/ 죽은 사람에게 죄를 물으랴 벌을 내리랴/ 밤아, 어서 빨리 오너라 어서 밤이 와/ 살아 용서치 못하는 사람들 다 잠들고/ 살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들 다 잠들면/ 제 명에 못 죽어 떠도는 혼백들 다시 만나/ 서로 용서하라 하늘로 다 올라가라// 억장이 무너져 살가죽만 남았네/ 초로 같은 이 내 목숨 아직도 못 버려/ 시름겹다 시름겹다/ 버르적거리다 죽으면/ 양지바른 언덕에다 합장하여 다오// 마파람 다시 불어/ 선운산에 올라 그대 이름 불러보네.//
* 禪雲山:'高麗史'의 「樂志」에 제목과 유래만 전하는 부전 가요, 혹은 그 가요에 나오는 산 이름.

생명 / 이승하
수술실 밖에서 인부들이/ 겨울을 날 나무들에게/ 가마니 옷을 입혀주고 있다/ 봄이 오면 나무들 움트고/ 꽃 피어날 것이니, 자거라/ 긴 겨울에는 자는 법이란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하늘에는/ 새 십여 마리/ 자신의 의지로 남으로 날고 있다/ 봄이 오면 저 새들 돌아오고/ 새들 새끼 칠 것이니, 가거라/ 긴 겨울에는 떠나 있는 법이란다// 생후 2개월 된 집의 아기/ 응급실 침대에다 눕히고/ 옷을 벗겼다/ 메스가 다시 벗길 살, 숨/ 할딱거리는 생명체/ 환자복을 입히니 맞지 않아/ 허수아비 같구나 옷 속에서 노는 손발// 이제 잠시 후면 아기는/ 전신 마취될 것이다/ 내 새끼의 인생에/ 명년 봄이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봄은 너의 것이니, 깨어나기를/ 긴 겨울에도 사람은 잠자지 않는 법이니.//

생명法 -아들에게 / 이승하
살아 있는 한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씨 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싹 돋고 싶어서 돋아나겠느냐/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싹이 돋고/ 때가 되면 잎이 지는/ 저 많은 생명체들의/ 생존에의 의지를 보려무나/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생명 이외에는 한 가지도 없다// 나라고 내 조상의 생명법을/ 다 알 수는 없다/ 내 살아 있으니 누군가 그때/ 살아 숨쉬었을 것이다/ 목마를 때 물을 찾고/ 바람 찰 때 고개 수그리는/ 저 많은 생명체들의/ 향일에의 의지를 보려무나/ 아들아/ 하늘 아래 이유 없이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절로 저절로 자라나는 듯하지만/ 태양의 도움 없이 자라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살고 싶어 살아가는 것이다/ 한시라도 더 머물고 싶은/ 이 땅이 배신한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캄캄한/ 하늘의 저주가 지상에 미쳐/ 숨쉴 공기와 마실 물이 사라지고 있으니/ 태양을 보며 외쳐라 살고 싶다고/ 살아 있고 싶다고 외쳐라/ 태양이 너를 돌봐줄 것이니/ 운행하는 성좌가 너를 인도할 것이니// 아들아/ 나는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별의 질서를 헤아리지 않고/ 죽음 가까이에 다가가서야 비로소/ 생명의 외경을 깨달았다/ 나는 근심하며 죽어갈 것이다.//

아들은 가렵다 / 이승하
아들이 긁고 있다 팔과 다리/ 목과 배에 피 맺힌다 팔과 다리에 피 맺힌다/ 아들의 손을 꼭 잡는다 잡고서 놓지 않는다/ 그만 좀 긁어 그만 좀 긁어라 얘야/ 자다가도 긁고, 일어나면 긁기부터 한다/ 태어나자마자 만난 가려운 세상/ 가렵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안 돼 밀가루로 만든 건 먹으면 안 돼/ 과자와 고기를 먹으면 더 심해지는 가려움증/ 앙상한 몰골로 과자와 고기만 먹으려 한다/ 햄버거․피자 가게를 지날 때마다 먹고 싶어/ 울상을 짓는다 고기와 달걀이 빠진 김밥/ 맛깔스러움과 즐거움이 빠진 김밥/ 소풍날 울먹이며 도시락을 받아 간다// 벌겋게 된 피부가 햇살 아래서 일어난다/ 살비듬이 떨어져 나간다/ 미친 듯이 긁고 싶기만 한 세상/ 맺힌 피 줄줄 흘러내릴 때까지/ 가려워서 긁고 긁고 또 긁는 내 아들/ 문명의 튼튼한 몸이 덮친 아들의 피부.//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 이승하
볼품 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 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다 / 이승하
몸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 눈을 뜨신 아버지/ 가족 한 번 쳐다보고/ 천장 한 번 쳐다보고/ 눈을 감았다가 금방/ 다시 뜨신다./ 이 세상 이 순간 이렇게/ 뜨기는 싫으신 듯//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원한 암흑./ 죽음의 세계일 테니/ 한 번만 더 눈을 뜨자/ 한 번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사물을 보자고/ 자, 한 번만 더 눈을 뜨자고/ 아버지는 안간힘을 하고 계신 거다/ 삶의 마지막 암벽에/ 지금 매달려 계신거다// 오르고 미끄러지기를/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예닐곱 번/ 마지막 기운마저 빠지자/ 눈을 크게 떴다가/ 감으신 아버지/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신 뒤/ 숨을 멈추셨다/ 그 몇 방울의 눈물로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 된다//

어머니가 가볍다 / 이승하
아이고/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 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척추를 다치신 어머니// 받아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할머니의 젖가슴 / 이승하
양지쪽에 앉아 계신 팔순 넘긴 할머니/ 하얀 머리카락 백목련 같은데/젖가슴 꺼내놓고 또 만지고 계시네// 하야 이리 와본나/ 가슴에 다시 젖이 돈다 아이가/ 젖멍울이 다 아푸다/ 하야 니가 좀 만져봐라// 내 어릴 때 밤마다 파고들어/ 만지며 잠들었던 할머니의 젖가슴/ 쪼글쪼글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는데/ 치매의 몸에도 봄기운 도시는지/ 옷고름 풀어헤치고 양지쪽에 앉아/ 젖가슴 꺼내놓고 나를 부르시네/ 개나리 진달래 꽃길로 나서며//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일촌 간장 맺힌 설움에/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네// 고개를 끄덕이며 창부타령 한 자락/ 나비처럼 나풀나풀 우리 할머니/ 가슴 다 내놓고 저승길 걸어가시네.//

광대를 찾아서 3 -처용과 붉은 악마 / 이승하
때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였지/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던 그대/ 안방에 다리가 넷인데도 춤추던 그대/ 분노가 춤이 되는 세계/ 우리 모두 그 세계의 자식들이거늘/ 풍악이 울리면 함께 춤추고/ 흥이 오르면 노래 자청하고/ 우리 모두 처용 광대의 후예인 것을// 녹색 잔디에 불이 일어난/ 서기 2002년 6월이었지/ 대~한민국! 함성을 지르는/ 도깨비들이 있었어 그놈들은/ “오~ 필승 코리아”란 글자가 적힌/ 요상한 방망이를 들고 있었지// 예선전, 16강, 8강, 4강……/ 그놈들은 그예 스탠드에서 내려와/ 손에 손 잡고 춤추기 시작했어/ 벽을 넘어서 한 마음으로 둥글게/ 둥글게 강강수월래를 추었어/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웃으며 노래하며 빙글빙글 돌며 놀았지/ 그놈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광대였어// 신바람을 억누를 수 없어/ 흥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밤이 새도록 춤추고 노래부르고……/ 그 옛날 처용이 그러했듯이/ 그 옛날 처용 광대가 그러했듯이//

시원하게 / 이승하
내 한 생을 살면서/ 목 타는 누군가를 위해/ 물 한 모금 달라고 애걸하는 누군가를 위해/ 시원한 물의 시 못 보여준다면/ 밥 먹는 일이 무슨 의미 있는가/ 내 똥이 거름이 되지 않는데// 칫솔 하나를 사 써도 포장은 쓰레기/ 칫솔도 몇 달 안으로 쓰레기가 된다/ 식물이 애써 만든 산소를/ 동물인 나 숨쉬면서 이산화탄소로 만들었다/ 원유를 정제하여 만든 휘발유를/ 인간인 나 운전하면서 배기가스로 만들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아버지/ “승하야 살짝 나가서 담배 좀 사오너라.”/ “아버지, 담배는 절대 안 된다고 하잖아요.”/ “마지막으로 한 대만 피우자.”/ “안 되요. 그럼 또 중환자실로 옮겨야 되요.”/ “딱 한 대만 피우자.”// 시원하게 한 번은 피우고 싶어서일까/ 이라크에서 죽어간 부상병/ 병원 침대에서 죽어가는 아버지/ 죽기 전에 들이마신 한 모금의 담배/ 그 담배 같은 시 한 편/ 쓰고 나서 나 시원하게 죽고 싶다//

전갈자리 / 이승하
사막의 전갈도 짝짓기할 시간이다/ 사랑은 깊은 밤에 하는 것이다/ 애무는 어둠 속에서 하는 것이다/ 밤이 되어야 보이는 것이 달뿐이랴/ 광년 거리 저 너머의 별들뿐이랴// 너는 밤의 일부/ 네가 없으면 밤도 없으리/ 네가 사라지면 우주의 한 구석도 사라지리/ 영원한 암흑이 되리// 네가 살아 있기에/ 이 세상에는 밤이 오고 낮이 온다/ 지상은 지금 캄캄한 밤이기에/ 너는 따뜻한 가슴을 내게 보여주어야 한다/ 또 얼마를 아파해야/ 생명 하나가 태어나는 것이냐//

고해성사 / 이승하
고해에 노를 저어 가는/ 저는 아직도 사람입니다/ 모든 고뇌하는 넋은/ 고뇌의 깊이로 말미암아/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한번쯤/ 사람답게 살라고 낳아주셨으나/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더럽혀지고/ 자주 참담해지고// 이 밤에 날벌레들이/ 형광불빛을 향해 머리 박고 달려듭니다/ 제가 살아온 날수만큼 많은 미물이/ 저로 인해 죽을 것입니다/ 제가 살아온 달수만큼 많은 사람이/ 저로 인해 괴로웠을 것입니다/ 죄 얼마나 더 지어야/ 단 한 번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완전한 어둠 속에 꿇어앉아/ 몇 시간째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홀로 기도하는 밤에야/ 제 자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사람 같은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한 자식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

귀향 / 이승하
그리 멀지도 않건만/ 고향으로 가는 일이 참으로 힘들구나// 허나,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의 고향으로 나 있는 법/ 그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꿈을 키웠던 그곳/ 사춘기 시절엔 줄곧 떠나고 싶었던 곳이어서/ 그대 고향을 버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지/ 연어도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한가위로다/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두둥실 떠 있는 원반형의 달/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사랑을 잃고 술에 취해서 쳐다보았던 달/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 인생행로 걸어도 달려도/ 어느 길 할 것 없이 험하기만 했다/ 망망대해 달려도 멈추어도/ 어느 뱃길 할 것 없이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나 있는 길에서는/ 지친 새도 날개를 접을 수 있다/ 그대 탯줄이 거기 묻혀 있기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기에// 싸늘히 식은 가슴 지닌 이들이/ 고향에 돌아온 날은 왁자지껄하리라/ 따뜻한 고봉밥 넘치는 술잔/ 사투리가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고/ 잊어버린 친척 아이 이름을 묻는다/ 잃어버린 내 별명을 여기서 찾는다//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이여/ 이번 한가위만 같아라.//

김천 우시장 탁배기 맛 / 이승하
이전 맛 같지 않구마/ 소 팔러 우시장에 나온 아부지를 따라와/ 승하야 니도 한 잔 묵거라/ 뜨물 같은 탁배기 한두 잔 얻어 마시던/ 그 술맛은 어데로 가삐맀는지/ 씹다 더 달싹해졌는데 더 씹다/ 어무이 치료비 마련할라꼬/ 큰맘 묵고 끌고 나온 한우 암소/ 하이고 나 원 참/ 200만 원도 안 준대여/ 또 소값 파동이래여?/ 소고기, 비육우 무데기로 수입한 탓이래여?/ 이번엔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이라네/ 내도 84년 폭락 때 죽은 뒷집 박씨 아저씨처럼/ 솔랑은 이 우시장에 두고 가까/ 우시장에 소 내삐리고 와/ 농약 묵고 탁 죽어삐리까/ 소야, 니는 죽어 괴기 될 자격이 없고/ 내는 살아 소 키울 자격이 없다 칸다/ 소야, 내 손으로 널 잡아먹긴 싫었는데/ 내가 널 백지 델꼬 왔다/ 에라이 속이 씨려 속 달랠라꼬/ 마시는 술맛이 왜 이 모양이고/ 움메에 우는 소 눈을 쳐다보며/ 우시장 한 켠에 앉아서 마시는 탁배기//

늘 혼자였던 섬 / 이승하
혼자 잠든 긴 밤들이 있었다/ 바람 소리 물결 소리 자장가 삼아/ 앓아도 혼자 앓았던 많은 밤들이 있었다// 독도를 삼키려 하지 말아라/ 독도를 내 것이라 말하지 말아라// 내 돌품에 뿌리내린 식물들이 알고 있다/ 내 돌머리에 깃든 새들이 알고 있다/ 내 돌밭에 기어다니는 바닷게들이 다 안다// 나 혼자서/ 밤에는 동해 저 큰 바다 다스렸고/ 낮에는 저 뜨거운 태양과 싸웠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죽도가 아닌 독도/ 독도는 온전히 내 것이로다//

이 사진 앞에서 / 이승하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을 돌리는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TIME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 2020학년도 수능특강 수록


별 / 이승하
그때 고개를 드니/ 동쪽 하늘에서 살아 숨쉬는 밝은 새벽별/ 어제 빛났던 별이 오늘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제 이름을 갖고 빛나는 별보다 더 많은 무명의 별이여// 별이 있었던 것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칠흑의 밤에도/ 저 하늘 위에는 길을 찾는 이들을 인도할/ 별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빛나는 별은 없지만/ 별이 지향하는 것은 영원이 아닌가/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별빛이 아닌가// 영속하는 것, 영원히 빛나는 것/ 그 빛을 찾아서 밤하늘을 보면/ 싯다르타가 득도했을 때 눈맞추었던 그 별/ 별 하나가 이웃 별들을 불러 모으고 있을 것이다.//

뼈아픈 별을 찾아서 / 이승하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젊은 별에게 / 이승하
다시 밤이다/ 시야에 출렁이는 겨울 별자리 어디/ 자전과 공전의 질서를 깨뜨릴 수 없어 고뇌하는/ 젊은 별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신호하라/ 내 짙푸른 꿈 하나 쏘아 올릴 터이니// 광년의 거리 밖 너의 괴로움과/ 내 바람의 외투를 걸치고 길 나서던 날들의 절망감이/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내 아무런 확신 없이 떠돌던 삶이/ 네 울분으로 들끓는 코로나/ 백만 도가 넘는 뜨거움을/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고생대, 중생대, 참 얼마나 많은 화석된 시간을 지나/ 겨울 별자리와 나는 이 밤에/ 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대좌하고 있는가, 밤마다/ 내 참 얼마나 많은 별에다/ 기성(旣成)에 대한 증오의 화살을 쏘아 올렸던가/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은 없었으니// 멀고 먼 시간의 바다인 황도/ 12궁이 가리키는 세상을 향해 떠났었다, 그날 이후/ 내 죄악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굴복했던가/ 소리내어 울면서 버린 동정을/ 얼마나 오래 저주했던가/ 나보다 더 오래 질서이신 신을 저주한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싶다, 그를 힘껏 포옹하리// 지금은 밤이다, 끝 모를 어둠/ 몸부림치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밤이지, 시작 모를 어둠이/ 지상에 가득 찰 종말의 날이/ 내 생애의 어느 날이 될지라도/ 어둠 속에서 표류하는 젊은 별이여/ 너를 축복하리, 환하게 웃으며 반기리, 환히/ 환희의 날이 너와 나의 사후에 올지라도// 왜 이리 두려울까, 두렵지만 지금은 밤이니/ 질서에 길들기를 거부하는 젊은 별이여/ 희뿌연 새벽이 오기 전에/ 내게 신호하라, 내 온몸으로 뜨겁게/ 뜨겁게 너와 결합하고 싶다.//

겨울 새벽 별 / 이승하
사고로 죽은 자식 뼛가루 뿌리고/ 벗은 소리내지 않고 오래 울었다/ 별이나 보러 가자/ 너와 나의 오랜 취미는/ 별에다 멋대로 이름 붙이는 것 아니냐// 벗의 차는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에서도/ 1시간을 더 콜록거리며 달렸다/ 치악산 근처 삼형제봉 능선/ 자, 네가 아들을 데리고 즐겨 왔던/ 버려진 화전민촌 덕초현 마을이다// 모든 별은 과거의 별이다/ 벗은 망원경으로 오리온 성좌/ 1,300광년 그 먼 과거를 보고/ 나는 쌍안경으로 안드로메다 성운/ 2백만 년을 달려온 무리를 확인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은 몇 개나 될까?/ 많아야 육천 개 정도래/ 그럼 별 전체는 몇 개나 될까?/ 대략 십을 스물두 번 곱한 숫자래/ …그만큼 많은 아이가 죽었겠지?// 벗의 대답에 할말 잃고 있는데/ 바람 갑자기 소리지르며 솟구치고/ 별은 더 초롱초롱 빛난다/ 너는 빛나는 저 별에다/ 죽은 자식 묻고 싶었던 게지.//

시간에게 묻는다 / 이승하
시간이여/ 무수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데/ 네가 필요한 것이냐/ 무수한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데/ 네가 필요한 것이냐/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느냐/ 영원히 나누어져 순간들이 되느냐/ 가뭇없이 흘러만 가느냐/ 언제 출발하여 어디까지?// 시간이여/ 고통에도 무슨 뜻이 있느냐/ 사후 세계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천국이 아니냐 혹 열반이 아니냐/ 천국과 열반이 아닐지라도/ 오라 고통이여/ 인간들의 오랜 벗,/ 지층을 뚫고 별을 헤아리며/ 화석을 부수고 미라를 만들며.//

어느 갓장이에게 들은 말 / 이승하
뭐 부끄럽지 않소/ 10년을 배와 재우 손에 익힌 것이/ 밤일꺼지 해가민서 한 달에/ 재우 두세 개 맨들어내는 것이/ 뭐 부끄럽지 않소이다/ 말총으로 날줄을, 쇠꼬리털로 씨줄을/ 절이고 절인 걸 또 절이고 절여/ 날줄 오백 열두 줄을 맨들기꺼지/ 기양 맨드는 기 내 일이라/ 눈 어둡어지는 것도 몰랐지만/ 배우로 온 사람 장사하겠다고 가고/ 공장에 다니는 기 낫겠다고 떠나고/ 이젠 늙은 마누라가 내 조수여/ 그래 자석새끼들한테 안 가르쳐준 것이/ 부끄럽다면 하냥 부끄럽소/ 개명한 시상에서 갓을 누가 쓴다냐/ 예를 누가 지킨다냐/ 조선色을 누가 돌본다냐/ 날 보로 왔으니 시인 양반/ 노래나 한 곡조 불러줌세/ 울 아배한테 배운 갓일 노래// 한 코 떠라/ 두 코 떠라/ 세 코 떠라/ 속히 떠라// 양태 뜨는 소동들아/ 한 코 떠서 어머님 젖값 갚고/ 두 코 떠서 아버님 술값 갚고//

자살한 시인을 위한 송가 / 이승하
어떤 여자가 좋다고? 야한 여자가?/ 어디로 가자고? 장미여관으로?/ 그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곁에 이성이 없어서? 대화 나눌? 교접할?// 그대에게는 단 한 명의 친구가 필요했겠지/ 단 한 명의 가족이 필요했겠지/ 단 한 명의 선배가 단 한 명의 동료가/ 곁에는 신도 없고 인간도 없고 쾌락도 없고// 생로병사…… 몸은 쇠약해지게 마련/ 희로애락…… 마음은 시들해지게 마련/ 술과 담배…… 몸을 갉아 먹고/ 돈과 이성…… 마음을 궁핍하게 하고// 아내도 없이 자식도 없이/ 대화도 없이 교접도 없이/ 촛불도 없이 태극기도 없이/ 김춘수의 꽃도 없이 김수영의 풀도 없이// 천재와 천치는 글자 한 자 차이/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할 말이, 쓸 글이 없다면 다 죽어야 하는가/ 나는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 마광수의 시 「자살자를 위하여」에 나오는 구절.

어둠 끝에 서다 -영화배우 이영호* 님께 / 이승하
그대 이제 아침노을을 보지 못하겠구나/ 아침 하늘을 수놓는 새떼의 일제 비상을/ 그대 그리 좋아했던 영화를/ 그 영화 여주인공의 묘한 미소를// 밤이 다 갔는데 아침 오지 않을 때/ 그대는 손 내밀어 만져보아야 한다/ 사물은 차갑고, 사람은 더 차갑겠지만/ 지팡이를 안내견 삼아 그대 살아가야 하리//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리/움직임으로써 살아있음을 증명하던 것들/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젠 알아볼 수 없고/ 그대 스스로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어둠 속의 실체들// 냄새를 찾아서 코 벌름거려야 한다/ 소리를 찾아서 귀 곤두세워야 한다/ 감촉을 찾아서 손 내밀어야 한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면/ 툭 치고 아무 말 없이 지나쳐 가는 행인들// 약을 잘못 먹어 잠시 실명했을 때/ 이 세상이 낭떠러지 끝에 있었다/ 그곳의 지독한 안개 더 지독한 침묵 뒤/ 앰뷸런스의 클랙슨 소리 귀청을 때리고// 차갑게 돌아앉은 사물에 손을 대면/ 체온이 전해질까, 벽들이 다가설까/ 어둠 한가운데 서 있는 그대 벌거벗은 몸을/ 손 내밀어 이젠 더듬더듬 만져보겠구나//
* 영화배우 이영호 씨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하였다.

시인 구상이 화가 이중섭에게 / 이승하
중섭이 그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곡기 다 끊고 밤에 술 마시고 낮에 물마시고/ 헌헌장부 그 큰 키로 성큼성큼 걷는 모습 눈에 선한데/ 누구도 그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네// 사위는 백년지객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대 일본 가서 찬밥 신세 문전박대 당했다고 했지/ 아내 남덕이와 두 아들 태현이 태성이 눈에 밟혀서/ 은박지에다 그리고 또 그리고/ 울다가 엽서에도 그리고/ 꿈에라도 만나면 그날은 행복했다지/ 중섭이 도대체 어디로 숨은 겐가// 그대가 표지 그림 그리고/ 내가 원고를 모았지, 응향凝香……/ 그때 우리 참 젊었다 자넨 소를 따라다녔고/ 난 이남으로 탈출하였지// 자네 노래 다시 한 번 듣고 싶으이*/ 테너 목소리, 술집 처마 쩌렁쩌렁 울리던 그 목소리/ 내 시집에 자네 그림 「달과 까마귀」 얹고/ 내 건네는 술잔에 자네 눈물 섞어 마시다/ 하룻밤 사이 빈털터리 되면/ 자넨 빚 못 갚는 그림 또 그리고/ 난 돈 안 되는 시 다시 쓰지 뭐// 뭐라도 먹어야 그림 그리지 않나/ 세발자전거 사주기로 한 약속 못 지킨 게 한이라고/ 곡기 다 끊고 밤에 술 마시고 낮에 물 마시고/ 어디로 사라진 겐가 소 눈망울을 한 사람아//
*이중섭은 살아생전에 독일 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시에 김대현이 곡을 붙인 「낙화암」을 즐겨 불렀다.

화가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 / 이승하
상常이/ 보고 싶구려/ 사흘만 안 봐도 보고 싶으니/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나 부부였나// 집을 갖고 싶었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집 한 채면/ 나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고/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지// 50년 10월 송도원의 집 폭격으로 불타고/ 부산 범일동의 하꼬방에 살면서/ 낮이면 부두에서 하역작업/ 무얼 짊어져도 자식 굶기는 아비였지// 제주시까지는 배편으로 서귀포까지는 걸어서/ 게 잡아먹고 조개 캐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넓고 넓은 바닷가의 오막살이 집 한 채/ 쌀 사 먹을 길은 막막하였다// 다시 범일동으로 범일동 판잣집으로/ 자네는 집이 있지 가족이 있지/ 아 하늘 아래 나는 집이 없구나/ 장남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노는 상이! 홍洪이!// 具常兄前 李仲燮弟*//
* 이중섭은 구상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늘 ‘형’으로 불렀다. 구상 시인의 장남 이름이 구홍이었다.

회복기의 아침에 / 이승하
장기의 일부를 도려냄으로써/ 수술은 일단 성공적으로 끝났다// 길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여분의 시간들을 게워내고 있는 태양/ 태양의 알갱이들이/창으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렇게 종알댄다/ 이제부터 네 앞의 생은/ 덤의 생이란다/ 네가 쌓아갈 시간의 봉분은/ 너 자신의 것이므로 알아서 하렴/ 크든 작든// 작든 크든/ 저 나무가 저토록 잎 푸른 것은/ 뿌리가 아팠기 때문일 게다/ 보이지 않는 곳의 뿌리/ 물을 찾아서 땅 깊은 곳으로// 돌을 스쳐 바위를 피해/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기 위해/ 뿌리는 많은 날을 참았을 게다/ 자기만이 아는 겹겹의 아픔을// 꽃나무가 꽃 한 송이 피워낼 때/ 땅강아지가 땅 한 뼘 기어갈 때/ 아무런 아픔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벌목 / 이승하
나무들을 마구 베어낸 숲/ 숲이 벌거숭이가 된다/ 밑둥치만 남은 나무들이/ 서른 살 넘은 자신의 나이를 말해준다// 시민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진다/ 방방곡곡 깨끗한 자전거도로/ 자전거 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을 위하여 / 이승하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사는 나무/ 나무의 집은 나무/ 벌레들이 집을 지어 같이 살고/ 새들도 둥지 틀고 함께 산다/ 매미들의 쉼터 딱따구리들의 놀이터// 폭풍 몰아치는 밤에는 나무도 몸을 떨고/ 폭설 퍼붓는 밤에는 가지도 뚜두두둑 부러진다/ 자신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운데/ 나무야 너는/ 네 몸 네 마음 지키며 살아왔구나// 바람 부는 대로 휘어져도 꺾이지 않고/ 잎 피우는 일이며 잎 떨어뜨리는 일이며/ 그것이 제일인 양 때가 되면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나무/ 생명체는 한 번 죽기 전 한 생을 살 뿐// 그 마음으로 살다 그 자리에서 죽어/ 스스로 마련한 무덤/ 고사목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네 자리를 지키라고/ 그 일이 아주 어려울 거라고//

독수리 길들이기 / 이승하
굶긴다 창고에 가둔다/ 그렇게 살코기를 듬뿍 먹이더니/ 그렇게 창공을 자유롭게 날게 하더니// 가느다란 빛 두어 줄기 들어오는/ 좁고 어두운 창고 안에서/ 날고 싶어서 날개를 퍼덕이면서/ 벽에 부딪친다 머리 박으며 울부짖는다/ 창고 안은 온통 깃털 피 킷털 핏자국/ 퀭한 눈이지만 충혈된 눈동자/ 살기를 띠고 노려보고 있다// 창고 밖 고기 굽는 냄새/ 쥐새끼 한두 마리로 연명케 한다/ 작은 인기척에도 신경질적인 반응/ 온몸의 신경이 마침내/ 팽팽히 당긴 활이 될 무렵/ 뼛가죽과 눈만 남는다/ 움직이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을 때까지/ 굶긴다 독수리 거의 죽었다// 때는 이때다/ 물에 불려 핏기를 완전히 뺀 고깃덩어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주기 시작한다/ 먹어라 지금 바로 피 뚝뚝 흐르는 살코기 먹으면/ 설사나 죽는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다/ 죽어가던 독수리 이렇게 살려낸다// 이윽고 초겨울, 사냥철이다/ 사냥꾼과 완전히 한 몸이 된 독수리/ 창공을 날다 늑대를 향해 급강하한다//

상처 / 이승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입은 타인한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인간복제 / 이승하
한때는/ 꽃이 화들짝 피어나는 것이/ 신비였네 뜰 앞의 꽃들이/ 우수수 한꺼번에 지는 것이/ 경이로웠네/ 만월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별똥별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꽃이 피면 우주가 열리고/ 꽃이 지면 우주가 닫힌다고 말한/ 시인은 이제 무엇을 노래해야 하나/ 크리스마스이브쯤 태어날 것 같은/ '가'가 '나'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복제 인간 그 친구에게/ 물어보고 싶네//

아내 닮은 로봇을 기다리며 / 이승하

기호로 이루어진 아내 닮은 로봇 지아지아*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 저녁 밥상 차려놓고/ 인간아내가 나를 밤 깊도록 기다렸듯이// 울고 웃고 화도 내는 아이보*야/ 반인반마의 센토*야/ 영화 <스타워즈>의 R2D2, C3PO야/ 기호를 인식하려고 하지 말고/ 너희들도 기호를 만들어보렴//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날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우셨으나/ 인간은 이제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와 힘을 합쳐/ 기호의 왕국을 세우고 있다// 기호로 이루어진 아내 닮은 로봇 지아지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느라 바쁘다/ 그 옛날 인간아내가 나를 밤 깊도록 기다렸듯이/ 나는 지금 아내 닮은 로봇을 기다리고 있고//
* 지아지아(Jia Jia):중국 과학기술대학의 첸 샤오핑과 그의 동료들이 3년에 걸쳐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
* 아이보(AIBO):일본 소니가 개발한 강아지 로봇의 이름.
* 센토(Centaur):KIST가 1994년부터 5년 동안 15명의 박사와 70여 명의 연구원을 참여시켜 만든 로봇의 이름.
* 휴머노이드(Humanoid):인간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로봇.

강한 걸로 넣어주세요! / 이승하

남자는 밤에 강해야 한다고?/ 남자가 밤에 강하지 않으면?// 빨간색 스포츠카에 비스듬히 앉은 그대는/ <원초적 본능>에 나온 샤론 스톤/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 나를 쏘아보고 있다// 휘발유의 본능을 깨운다!/ 엔진파워가 강해지는 휘발유―이맥스/ 오래도록 쌩쌩하게 지켜줘/ 나 한화에너지의 모델이 됐지// 뭐야? 아직도 운전을 못 배웠다고?/ 당신 남자야? 여자 운전할 줄 모르면 저리 가!/ 나, 엄청 비싼 차야// 나, 차야/ 몸값이 비싸지/ 차량 홍수의 거리를 걸어갈 때/ 인적 드문 거리를 내달릴 때/ 근원적인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느낌/ 최신형에 최고가, 최고의 상품/ 인간으로 치면 최고의 스타/ 나를 향한 부러운 눈길을 자주 느껴// 나, 차야/ 몸체가 견고하지/ 쇠파이프만큼이나 강한 범퍼/ 나와 충돌하면 뼈도 못 추릴 걸/ 위로 눈 치켜뜬 헤드라이트/ 도도한 내 눈길에 꼬리 내리는 싸구려 차들/ 난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내 표정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 차야/ 으리번쩍하지/ 내 몸매가 잘빠졌다고들 해/ 관능적인 곡선, 풍만한 자태/ 여체의 굴곡을 잘 아는 이가 나를 디자인했어/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가 있는/ 내 몸은 보험에 들어 있어/ 가장 좋은 보험에/ 다치면 안 되지 치료비가 비싸니까// 나, 차야/ 강철인간이야/ 내 눈앞에서 너희들 까불지 말아/ 깝죽대지 말란 말야/ 기분 나빠도 너를 들이받지는 않겠지만/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면/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나 초고온의 불에도 달궈졌었어/ 밀림의 고무나무로 만든 내 신발값을 너희가 알아?// 나, 차야/ 조용히 살고 싶어/ 시커먼 방귀를 뀌는 놈/ 영 시끄럽게 구는 놈들처럼/ 나 방정맞지 않아/ 멋진 세상을 나 다만/ 내 마음이 내킬 때 달릴 뿐이야/ 이어폰 귀에 꽂고 강변도로를 달리는/ 저 잘빠진 인간친구처럼 말이야//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 이승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서울 거리/ 백화점마다 영롱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을 반짝이며 때로는 눈 흘기며/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불빛 춤을 춘다/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캐럴송까지 기호가 되는 러시아워의 거리// 저 트리들이 저 대형 전광판이 종일 저렇게/ 빛을 뿌리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원자력발전소 앞바다는 더 따뜻해졌겠군/ 핸들을 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앞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10초마다 바뀌는 전광판의 기호記號/ 기호를 보여주는 저 거대한 화면// 살아생전에는 아예 팔리지 않은/ 고흐의 그림도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이중섭의 소 그림도 박수근의 자매 그림도/ 지금은 기호記號다/ 값으로 자리매김 되는/ 거대한 건축물들과 진귀한 예술품들/ 독자의 기호嗜好를 몰라서/ 절판된 책의 마모된 영혼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 코/ 메리 크리스마스! 축 성탄!/ 그리스도조차도 기호가 되는 날이니/ 성탄 전야의 바겐세일/ 내 영혼…… 팔린들 반값이겠다/ 팔리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세계는 넓고 기호는 많다/ ―김우중 회장 영전에// ☜, ☞, ♨, ☎, %, &, ∞, ∝, √, ∽, ±, ₩, $, ¥, £, @, ※, Å, §. ≒, ㉿, #, ♬, ∴, ∵, ∀, ∃……// 수억의 기호 중에서/

 

이 두 기호는 세계를 호령했지//

이렇게 생긴 ‘대우’라는 기호도 있었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쓴/ 회장님이 경영한 대우의 기업광고// 세계경영, 다음 세대와의 약속입니다/ 다음 세대는 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세계의 중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 22만 대우인이 세계경영으로 만들어 갑니다/ 세계의 일터로 더욱 땀 흘리고 노력하는―/ 대우가 있습니다//

대우가족//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때/ 가족 같았던 대우가족 많이 울었네/ 길 가다가 보도블록 틈새로 고개 내민 들풀을 보면/ 나도 대우가족처럼 울고 싶네/ 대우받는 가족// 씨 뿌리지 않았는데 피어 있는 풀들이/ 저렇게 어여쁜데 기호 없이는/ 나 소비할 수 없다/ 저렇게 끈질긴데 기호 없이도/ 나 소유할 수 있다/ 또다시 새로운 기호를 만들자/ 나 자신을 복제하자// 복제되는 인간, 대우받는 인간이//

나는 투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승하
저 기호에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이 기호는 나에게 돈을 가져다줄까/ 셈하는 동안 주식은 곤두박질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때로 이 땅을 떠나고 싶지만/ 대박을 향한 꿈이 발목을 잡는다// A는 말한다/ “사람에 투자하지 말고 사물에게 투자하십시오.”/ B는 말한다/ “형태에 투사하지 말고 기호에게 투자하십시오.”/ C는 말한다/ “이 지상에 투자하지 말고 예수님께 투자하십시오.”// 세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지만/ 돈이 없으면 투자는 물론이거니와/ 배팅할 수 없다 모험을 할 수 없다/ ―인생 대역전/ 기막힌 찬스가 왔을 때//

도로 표지판을 보다 / 이승하
돌아서 가시오 돌아서 간다/ 이리로 가면 안 됩니다 그리로 가지 않는다/ 지구를 덮은 기호 기호들/ 바퀴벌레 같은 기호 코로나19 바이러스 같은 기호/ 내 앞에 덜컹 나타나고/ 내 뒤에 죽어라 하고 따라붙는다/ 은총을 베풀고 복음을 전한다// 기호가 나에게 설교한다 나는 믿는다/ 지상 어디에나 선지자의 목소리/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는 하지 마시오/ 쇠로 만들어진 얼굴 위에/ 페인트로 분장하고 나선 기호 기호들/ 기호의 왕국에서 나는/ 꿈을 버린다// 이런 꿈을 꾸라고 명령하는/ 팻말들 표지판들 상업광고들/ 나는 늘 기호가 가리키는 대로/ 간다 마음 놓고 가다가도/ 멈추라고 할 때는 반드시 멈춘다/ 돌아서 가시오 돌아가지 마시오/ 어딜 가시오? 당신 돌았소? 거길 가다니!//

가자지구의 도로 표지판 / 이승하

돌아가라 이곳은 위험하다/ 노란색 바탕의 까만 기호보다/ 총탄 자국들이 위험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 들어와 함부로 돌아다녔다가는/ 골로 간다 가자, 가자지구로// 가자지구―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 왜 죽음의 계곡으로 변한 것일까// 기호는 끊임없이 경고한다/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모험심을 발휘하고 싶다가도/ 기호의 경고에 자제한다 우리는/ 기호 덕에 목숨을 건지기도 한다// 골란고원―빛살 가득한 은총의 땅이/ 왜 통곡의 벌판으로 변한 것일까// 브랜드여 내 사랑 브랜드여// 來美安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한자로 된 글자 3개일 뿐인데/ ‘e-’가 대관절 무엇이관데/ e-푸른 세상이란 브랜드일 뿐인데/ 집값을 올리고 있다 그 집에서 살면/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기분? 럭셔리한 느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구요?/ 브랜드를 입고 있다는 자부심/ 명품을 들고 산다는 만족감/ 나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이런 기호들 덕분에 남들과는/ 신분이 다르다 수준이 틀리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자랑한다// “서류뭉치 속의 똑같은 한 장이 되긴 싫다”*고 고집 센 그가 말할 때/ 솔직히 나도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 “대한민국 1%의 자존심”**이라고 잘난 그 녀석이 말할 때/ 솔직히 나도 차를 바꾸고 싶었지/ 나도 잘나가는 집단에 속하고 싶다/ 나도 폼 나게 살아가고 싶다/ 짝퉁이면 어때// 이 땅의 무슨 무슨 족이 되기 위하여/ 이 땅의 무슨 무슨 세대가 되기 위하여/ 쿨한 뉴요커처럼 살아보기 위하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사먹는다/ 오늘도 나는 눈뜨자마자, 눈감을 때까지/ 고품격 기호로 내 몸을 치장하고/ 새로 탄생한 기호로 내 혼을 도배한다//
* 맥주 카스 광고에 나오는 카피.
** 쌍용자동차 렉스턴 광고에 나오는 카피.

유행어 연구 / 이승하
무인도 아닌 이 사회에서 사는 한/ 우리는 모두 정치적 인간/ 10의 14제곱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소우주/ 수많은 개수의 기호(유권자)에 둘러싸여/ 기호(정당)를 만들며, 기호(정적)를 비난하며/ 기호(국민)를 우롱하며 살아간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 민족을 둘러싼 기호들/ 대동아공영권,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신사참배, 토지조사……/ 광복 이후 우리를 둘러싼 기호는/ 1945~1949년:38따라지, 마카오 신사, 모리배, 사바사바, 빨갱이, 토지개혁……/ 1950~1953년:인해전술, 각하, 1ㆍ4후퇴, 민의, 화폐개혁……/ 1954년:자유부인, 4사5입, 국물……/ 1955년:햅번 스타일, 개판, 사모님, 요새 아다라시가 어딨노……/ 1956년:맘보바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갈아봤자 별수없다/ 죽나 사나 결판내자 ↔ 트집 말라 건설하자/ 정치가 만든 말들, 유행이 낳은 말들/ 정치와 유행은 늘 기호를 만들기에/ 선거 때마다 유행하는 말들이 있게 마련/ 기호 없이는 정치도 못한다//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유행을 만들기 위해/ 기호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10의 14제곱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동물의 왕국/ 기호의 왕국에서 우리는/ 정치적 의사를 기호로 표시한다//

 



이승하 시인
1960년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김천에서 성장했다. 1972년 성의중학교에 입학한 후, 문학창작에 대한 재능을 알아본 권태을 교사로부터 3년간 시·산문에 대한 개별 첨삭지도를 받았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입학했다. 1996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1년 시 <집짓기>로 『시문학』 전국대학 문예작품 공모에 당선되어 첫 회 추천의 특전이 주어졌으나, 추천완료 등단을 미뤘다. 그러다가 1984년 시 <畵家(화가) 뭉크와 함께>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사랑의 탐구'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 지훈문학상, 중앙문학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들소리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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