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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시인은 4.19 때만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었다고 말했다
[칸타타 금강] 일시 : 2013년 12월 1일 장소 :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제작 : (주)포스오페라 원작 신동엽 / 작곡 이현관 / 각색 이경식 미술 이택희 / 지휘 윤의중 / 해설 원창연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테너 임정현 외 |
산문시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대통령이라고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 아이의 손을 이끌고 백화점거리 칫솔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 주머니 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커,럿셀, 헤밍웨이, 장자...휴가 여행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있을 때 그걸본 서울 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한마디 남길뿐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땅에서 하늘로 치 솟는 무지개빛 분수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죽이는 시늉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 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마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놀러가더란다.//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아사녀(阿斯女)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아사녀(阿斯女)의 울리는 축고(祝鼓) / 신동엽
1// 줄줄이 살뼈도 흘러나려 내를 이루고 원한은 물레밭을 이랑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짓는 하늘 속으로 진주(眞珠)배기 치마폭 화사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황토벌, 전쟁을 불지르고 간 원생림(原生林)에 한가닥 노래 길이 열려 한가한 마차처럼 대륙이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傳說)밭으로./ 가슴 뫼로 허리 논으로 마음 벌판으로 장마철 비바람은 흘러나리고./ 산골 물소리 만세소리 폭폭이 두 가슴 쥐어 뜯으며 달팽이 장장마다 호미 세 자루 조밥 한 줌 흘려보낸 철도연변 원분(怨墳)은 천만리(千萬里) 멀었다./ 구름이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낙지뿌리 와 닿은 선친들의 움집뜰에 왕조(王朝)적 투가리 떼는 쏟어져 강을 이루고, 바다 밑 용트림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역사밭을 얼음 꽃피운 억천만 돌창떼 뿌리 세워 하늘로 반란한다.// 2//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푸른 가슴 턱 차도록 머리칼 날리며 늘메기 꿀 익는/ 유월의 산으로 올라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벗겨진 산골짝마다 산 열매 익고/ 개울 앞마다 머리 반짝이는 빛나는 탄피(彈皮)의 산./ 포푸라 늘어진 등성이마다/ 도마뱀 산동리(山洞里) 끝/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십삼도 강산 가는 곳마다 매미 우는 마을. 무너진 토방 멀리 도시로 가는 반질 달은 나무 부리 흰 신작로를 달리어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고초장 땀 흘리던 순이네 북간도. 자운영 독사풀 뜯어 헛간집 이어 온 삼복(三伏), 부대끼며 군침 씰룩이던 황소 혓바닥처럼 검은 진주쌀 핏대 올린 연산군의 자유 많은 연설 소리를 들어 보아라.//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콩밭마다 딩굴던 향기 진한 대가리./ 팔월이 오면 점심 마당 농주(農酒)통,// 구슬 뿌리며 역사마다 구멍 뚫려 쏟아져 간 아름다운 얼굴, 북부여(北扶餘)의 가인(佳人)들의 장삼자락 맨 몸을 생각하여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황진이(黃眞伊) 마당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당, 놋거울 속을 아침 저녁 드나들었을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의.//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엔 고개마다 괴나릿봇짐 쇠바퀴 밑으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 소리를 들어 보아라.// 3// 목메어 휘젔던 울창한 숲은 비 젖은 빛나는 구름 밭에 휘저오르고.// 멍석딸기 무덤을 나와 찔레덤풀로 기어들은 발해(渤海)는 바위에서 성긴 숲으로 숲에서 다시 불붙는 태고적 산불로 어울려 목숨과 팔뚝의 불붙는 천지로 타오른 그날 임진난리의 우렁찬 외침을 귀기울여 보아라.// 침을 삼키며 싱싱한 하늘로 올라 보아라.// 이랑진 빨래터 강마을마다 매듭 고흔 손으로 묻어진 어여쁜 지뢰(地雷)의 얼굴, 신무기(新武器)의 오손도손한 살림살이를 구경하여 보려무나.//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밀짚모자 깃을 추켜 이마 훔치던 경부선(京釜線) 가로수 총메인 소녀.// 참쑥 뭉쳐 꿀꺽이며 압록강으로 제주도로 바다로 골짜기로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들의 터진 맨발을 생각하여 보아라.// 귀밑머리 날리며 이월의 동산에 올라 미소짓던 사람아. 다사로와라. 우리들의 전답(田沓)만은 상처 없이 누워있었구나.// 하여 목 마치게 바위뿌리 나무등걸 쥐어뜯으며 뱃바닥 얼굴 가슴 닳도록 영웅(英雄)스레 기어오른 산마루턱 턱마다 가슴턱 차이도록 트인 동해,// 구름 속 꿈틀거리는 의지 굳은 봉우리마다 아우성 섞인 억천만.// 억만년 여름날의 뼛죽 지글거린 하늘 끝 억심을 구가하여 보아라.//
3월 / 신동엽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드리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들은/ 광화문 창 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 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 앞/ 걸어가는 행렬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자나만 가는데.// 동학이여, 동학이여./ 금강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으로 갈거나/ 사월이 오기 전,/ 야산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봄은 /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버리겠지.//
너에게 / 신동엽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눈 터/ 군 돋듯// 허구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목숨 / 신동엽
목숨은 때 묻었나/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로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의 추억 속에서/ 나의 목숨 안에 와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으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귀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와라.//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 신동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 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고/ 평화로운 눈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여자의 삶 / 신동엽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 그믐/ 그리고 석양/ 눈ㅅ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 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수운 피만/ 흰 볼기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어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여자는/ 물./ 갈대가 아니라, 물./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물//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신.//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 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넌,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넌,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넌,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 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종로5가 / 신동엽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 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발 / 신동엽
백화점 층계를/ 비 뿌리는 오후, 내려오던 다리.// 스카아트 속을/ 한가한 미풍은 왕래하고 있었지만/ 깜정 힐 위 중력(重力)을 주면서/ 가벼운 오뇌 속삭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어/ 너희들의, 걸음은/ 어데까지 가고 있는 걸까.// 희끗희끗 눈발 날릴 때/ 중학교 원서 접수시키러 구멍가게 골목/ 종종치던 종아리.// 송화강(松花江) 끝에서도 왔다/ 구름 같은 흙먼지,/ 아세아 대륙 누우런 벌판을/ 군화 묶고 행진하던 발과 다리,/ 지금은 어데 갔을까.// 꽃 피는 남국/ 부드러운 모래밭 해안에 배가 닿으면/ 부지런히 신무기를 싣고 뛰어내리던/ 이유없는 발톱.// 보리밭을 밟고 있었다,/ 물방아 위에도 있었다,/ 해수욕장에선/ 그 싱싱한 허벅다리 사이로/ 태양이 지고.// 깎아놓은 유리창 위 비는 내리고/ 넘치는 가슴덩이/ 찰떡같이 몸부림은 흐느낀 때,/ 노래하고 싶었다./ 뱀같이, 열밤(涅槃)같이, 경련하다 급기야/ 나른하게 죽어 뻗던 그 흰 다리.// 다리,/ 너를 보면/ 빛나는 여름/ 우뢰소리 들으며 산맥을 넘던/ 낭만,// 나리꽃 동산에 전쟁은 가고/ 채소밭 가운데 섰던/ 국적 모를, 두 개의 무릎뼈에도/ 눈은 없었다.// 어머니를 불렀지./ 집행장 문앞/ 엉버티었지, 안 가겠다고/ 있는 힘 다하여 안간힘하며/ 마지막 땀 흘리던/ 연약한 다리여.// 밀회(密會)도 실어 날렀지,/ 착취로 기름진 아랫배,/ 음모로 반짝이던 골통들도 실어 날랐지,/ 그리고 눈은 없어도/ 링 위에선 멋있게 그놈의 턱을 걷어찼다.// 다들 남의 등 어깨 위로 올라갔지만/ 아직 너만은 땅을 버리지 못했구나/ 넌 우리 조국/ 넌 하층구조/ 내 한(恨)을 실어오고 또 실어간다.// 백악관 귀빈실 주단 위에도 있었어,/ 대영제국 궁전 금의자(金椅子) 아래에도 있었어,/ 종로 삼가 창녀 아랫목에도 있었지,/ 발바닥/ 코 없는 너를 보면/ 눈물이 날밖에.// 강산은 좋은데/ 이쁜 다리들은 털난 딸라들이/ 다 자셔놔서 없다.// 일어서야지,/ 양말 신은 발톱 흉물 떨고 와/ 논밭 위 세워 논, 억지 있으면/ 비벼 껴야지,/ 열번 부러져도 그 사랑/ 발은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하여 있는 것,/ 발은 인류에의 길/ 멎고 멎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있는 것,/ 다리는, 절름거리며 보리수 언덕 그 미소를 찾아가려 나왔다.// 다시 전화(戰火)는 가고/ 쓰러진 폐허/ 함박눈도 쏟아지는데/ 어데서 나왔을까, 너는 또/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고향 / 신동엽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응 / 신동엽
응 그럴걸세, 얘기하게/ 응 그럴걸세/ 응 그럴걸세/ 응, 응,/ 응 그럴 수도 있을걸세./ 응 그럴 수도 있을걸세./ 응, 아무렴/ 그렇기도 할걸세/ 저녁이니, 암, 그녁이나/ 응, 그래, 그럴걸세/ 응 그럼, 그렇기도 할걸세./ 허/ 더 하게!//
새해 새 아침은 /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修道者)의 눈/ 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하다커니// 눈이 휘동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동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봄단장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초가을 / 신동엽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나/ 네모진 궤상 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멕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밑, 또/ 오는 것인가······.//
* 금풍(金風) : 서풍
좋은 언어 /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아가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고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굽이돌아 적셔보세요.// 하잘것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진달래 山川 /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이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새로 열리는 땅 / 신동엽
하루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瀑布)처럼/ 역사(歷史)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령(嶺)넘으면/ 정전지구(停戰地區)*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 가/ 새벽 열려라.//
* 정전지구 :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지역
* 바심 :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
* 초연 : 화약의 연기
향아 / 신동엽
향(香)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未開地)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지어 춤추던 절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풍경 / 신동엽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異國)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山麓)/ 토막(土幕)가 서성거리는 초병(哨兵)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 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준 와이샤쓰를 입고/ 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 오늘 밤, 사해(死海)가의/ 이스라엘 선술집서,/ 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핀,/ 지중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엔,/ 온종일, 상륙용(上陸用) 보오트가/ 나자빠져 뒹굴고.// 흰구름, 하늘/ 제트 수송편대가/ 해협을 건너면,/ 빨래 널린 마을/ 맨발 벗은 아해들은/ 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 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 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 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 팔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 동방대륙에서/ 서방대륙에로/ 산과 사막을 뚫어/ 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 노오란 무우꽃 핀/ 지리산 마을,/ 무너진 헛간엔/ 할멈이 쓰러져 조을고// 평야의 가슴 너머로./ 고원(高原)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油田)지대로./ 모여 간 탱크 부대는/ 지금, 궁리하며// 고비 사막,/ 빠알간 꽃 핀 흑인촌(黑人村)./ 해 저문 순이네 대륙/ 부우연 수송로 가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촌 아가씨들이/ 빨래하며,/ 아심아심 살고/ 있을 것이다.//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 신동엽
그렇지요, 좁기 때문이에요./ 높아만 지세요, 온 누리 보일거에요./ 잡답(雜踏) 속 있으면 보이는 건 그것뿐이예요./ 하늘 푸르러도 넌츨 뿌리 속 헤어나기란 두 눈 먼 개미처럼 어려운 일일 거에요./ 보세요./ 이마끼리 맞부딪다 죽어가는 거야요./ 여름날 홍수 쓸려 죄없는 백성들은 발버둥쳐 갔어요./ 높아만 보세요, 온 역사 보일 거에요./ 이 빠진 고목(古木) 몇 그루 거미집 쳐 있을거구요./ 하면 당신 살던 고장은 지저분한 잡초밭, 아랫도리 붙어 살던 쓸쓸한 그늘밭이었음을 눈뜰 거에요./ 그렇지요, 좀만 더 높아 보세요./ 쏟아지는 햇빛 검깊은 하늘밭 부딪칠거에요./ 하면 영(嶺) 너머 들길 보세요./ 전혀 잊혀진 그쪽 황무지에서 노래치며 돋아나고 있을 싹수 좋은 둥구나무 새끼들을 발견할 거에요./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늦지 않아요./ 이슬 열린 아직 새벽 벌판이에요.//
빛나는 눈동자 /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진이(眞伊)의 체온(體溫) / 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 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를 다듬고 계실 눈 어둔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歲暮)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일까.// 문경 새재 산막(山幕)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인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그 소년의 염원(念願)이 멎어 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 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花潭) 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은 소생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에 어느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끼리 인천바다 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끼던 그 말없는 표정들처럼.// 나도 먼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한 해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4월은 갈아엎는 달 / 신동엽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산(山)에도 분수(噴水)를 / 신동엽
산에도 들에도 분수를./ 농촌에도 도시에도 분수를.// 태양 쏟아지는 반도의 하늘, 사시사철 시원한/ 의지, 무지개 돋게./ 산에도 들에도 분수를./ 목장지대 우거지고 남북평야 기름지게./ 속 시원히 낡은 것 밀려가고 외세도 근접 못하게,/ 태백산 지맥(地脈) 속서 솟는 지하수로 수억만 개의 분수 터놨으면.// 농어촌에도 김포공항에도 분수 치솟았으면./ 침략도 착취도 발 못 붙이게./ 반도를 가로지른 가시줄, 씻겨 가 버리게,// 우리의 머리마다 속 시원한 분수.//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보리밭 / 신동엽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뻐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北扶餘)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적 사냥 다니던/ 태백(太白) 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이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마려운 사람들 / 신동엽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땅 살 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來日)은 이길 것이다 /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어느 해의 유언 / 신동엽
뭐……./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 / 신동엽
<序話>//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물맛이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양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날이었죠./ 꽃이 핀 高原은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꽃으로 날 불렀죠.// 바다 언덕으로 나가고 싶어요./ 밤하늘은 참 좋네요. 지금 地球는 旅行을 한다나요?/ 冠座星雲 좀 보세요. 얼마나 먼 세상일까요......./ 기중 넓은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럼 그의 바깥엔 다시 또 딴마당이 없는 것일까요?// 자, 손을 주세요 밤이 깊었어요./ 먼저 쉬세요. 못잊으려나 봐요-우리가 抱擁턴/ 하늘에 솟은 바위, 그 밑에 깔린 구름/ 불 달은 바위 위에서 웃으며 잠들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당신의 붉은 몸.// 언제든 필요되거든 조용히 시작되는 序舞曲으로 그 白鶴의 大圓 휘파람 하세요./ 돌아가 묻히겠어요, 陽달진 당신의 꽃 가슴으로, 아마 운명인가 봐요./ 그럼 안녕히.//
<第一話>// 그늘 밑 꽃뱀 얽혀 있는 山中에서 山蔘을 찿고 있었네./ 그날 蔘은 보지 못했으나, 女人을 만나, 정성을 다한 씨 심거 주었네./ 나락이며 보리며 木花씨며 耕地에 뿌리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마다 않데./ 地球는 이미 먼저 나온 사람들이 한 몫씩 나누어 갖고 말아 버렸데./ 땅 한번 디뎌도 稅金이 쫓아 오데. 바람 마시는 값으론 코를 베어 주었네.// 憶光 하늘 아리 절름거리며 지나간 초록빛 나그네 하나 있었다니라. 하여/ 앞도 뒤도 없는 이야기 몇 맏, 路邊에 뿌려놓고 憶光하늘 아래 神明은 처음으로 그곳서 빛나,/ 벋은 무지개 宇宙를 벗어나 스러져 갔다니라.// 이르노니,/ 지금 예까지 와 있는 歷史의 重量이여./ 당신의 보따리 속에 든 人口며 昆蟲이며 傳統이며 文明이며,/ 모두 한떼 뭉쳐 머리에 이고 하늘 향해 앞 발 버팅겨 보시지.// 짓궂은 이야기다./ 虛虛 萬年/ 草原이 있고, 냇물이 있고, 陽달이 있고, 毒蛇가 있고,/ 암과 숫 쌍쌍이 엉켜새끼 치곤 죽어져 갔다.//
<第二話>// 간밤에 밟히어 간 가난한 목숨들의 冥福을 위하여, 지금 어디선가 아우성치고 있을 못된 餓鬼들을 위하여 그리고는 내일날 太陽빛 찬란히 빛나 있을 死刑執行場 꽃바람부는 郊外, 잔디밭 언덕으로 끌려 나갈 아름다운 人類들의 눈물을 위하여.// 내 동리 불사른 사람들의 勳章을 용서하기 위하여 코스모스 뒤안길 보리밥 사발 안은채 죽어있던 누나의 사랑을 위하여.// 監獄돌 묻으러 갈 꽃상여의 길닦이를 위하여, 아프리카 沙漠에서 日射病으로 눈먼 植民地兵士들의 月給봉투를 위 하여, 그리고는 먼 훗날, 당신이 서 있을 大地를 쪼개고 솟아나올 始生代岩層 깊숙히 우리의 大敍事詩를 새겨 넣기 위하여.//
<第三話>// 내가 온달 때 당신은 구름 덮으시더라./ 나는 遠視. 그래서 당신은 멀리 있어야/ 잘 생각난다 일렀더니, 싫어도 당신은 끄덕이시더라.// 무엇을 너는 내게 요구코 있는 건가./ 나의 肝 말인가?/ 금이빨 말인가?/ 귀 말인가?// 옛날엔 명실상부 직업전투가가 있었삽니다./ 이 族 저 族 팔려다니며 城門지기 호랑이잡이-이마에 뿔돋리고 양 어금니 째져나온 불쌍한 종족들이 살었답니다.// 그뒤에 그들은 출세한 적도 있었읍니다. 內城에 들어와서 王座를 마련코, 部族눕혀 九重궁궐 쌓아올리고, 백성 목덜미 위 君臨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나도 물론 氏族전쟁엔 나가 보았읍니다./ 槍 들고 도끼 들고 코거리하고 귀거리하고./ 닥히는대로 대갈통을 바수어 함지박처럼 머리에 엎어 쓰고./ 가슴팍을 꿰어선 나무에 매달아 두고.// 못난 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린 세월 숨 쉬어간 사람들이여,// 도끼는 신기해도/ 손재주가 만든 것이며/ 비행기는 날쌔도/ 땅에서 뜨는 것이다.// 떡쇠의 입에는 쌀이 하루 세사발,/ 首相님의 大腸에는 비게가 하루 세사발,/ 憲章은 尊嚴해도 개호주의 안경이다.// 못난 짓 그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랜 세월 버둥겨 간 사람들이여,// 까마귀는 내려와 선달이 가슴 위에/ 구데기를 쪼아서 주둥일 닦앗고,/ 장군님의 尊顔위에 태연히 앉아서/ 눈깔을 빼 먹고선 갸웃거릴 것이다.// 내 고향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일까?/ 봄, 갈, 여름, 내 生地에 펴나는 꽃은 무슨 꽃일까?/ 두견이, 패랭이, 들菊?// 거짓말이다. 그런 꽃은/ 내 고향 山川에/ 펴나지 않는다.// 들길을 가루질러 달구지가 지나갔다./ 낯 익은 얼굴들이 호박처럼 매달려/ 메마른 돌맡 위에 부숴져 가고 있었다.// 벗이여, 눈보라 쌓이는 밤/ 이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면,/ 다수운, 다순 피가 돌고 있을 것인가?// 벗이여, 廣漠한 원시림/ 人間된 거죽 홀홀히 찢어 던지고/ 어두운 골짝 山짐승 마을에/ 山돼지가 되어 두더쥐처럼 살아갈 순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바람 하늘 높이 흘러가고/ 億萬年 햇빛 머리 위에 퍼붓는다.// 어디를 흘러가는 싸움떼이기에/ 그 많은 다툼에도 是非가 남았느뇨.// 어디를 흘려가는 목숨들이기에/ 양뿔이 빠지고도 꼬리마저 잘려 있느뇨.// 하면 오늘밤은 어떻게 할 테란가/ 「傳愛」로운 폭약이여, '정의'로운 침략이여./ 메마른 공분모가/ 화려한 문명시엔 유세스런 장막이고, 이도령은 당신네/ 호랑이굴 아구리에 네 다리로 막고 서서/ 꽃혀오는 화살은 등가죽으로나 헤이고?// 산과 산./ 산과 산,// 모과나무 가지엔 무엇이/ 걸레처럼 발기발기 찢어져/ 걸려 있었고.// 돌벼개,/ 바위 그늘.// 땀으로 세수하다/ 이슬에 목 축이며// 동으로, 서으로,/ 남으로, 북으로.// 오늘에 미친 사람/ 내일로 바람자케,// 내일로 죽힌 사람/ 모레에 환생하케./ 하여 원수로 죽은 사람/ 원수로 더불어 복수케 하며,// 독엔 독으로/ 창엔 창으로/ 바퀴엔 바퀴로.// 태양 밑에 있고 싶은자 있게하고/ 없고 싶은 자 없게 하라./ 싸우고 싶은 자 저희끼리 싸우게 하고/ 독존하고 싶은 자 철창 속에 독존케 하라.// 투구를 쓰고 싶어 하는 자/ 쇠항아리를 만들러 깊숙이 씌워주라./ 영웅이 되고파 서두르는 자 로케트에 매달아/ 대기 밖으로 내던져버리라.// 무엇이 남겨졌고/ 무엇이 돌아갔는가.// 빛나는 여름./ 구슬 뿌리며/ 산맥을 넘어간,// 소녀들의/ 흰 발이여.// 지금은 바람 잔/ 언덕 위.// 패랭이./ 민들레,/ 들노래처럼/ 사라져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第四話>// 「正어두운 대지에 한 가닥 양기 있어, 무릎모두 우고 일어앉는 그림자-형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손은 머릴 간조롱이고 동트는 대지 溪谷과 한 올기 맨발벗은 肉魂은 살어.// 태백 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제비/ 돌아와 흙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산천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에 태어나 말썽없는 꾀벽동이로/ 딩글벙글 자라서, 씨뿌릴 때 씨 뿌리고/ 거둬들일 때 거둬들이며, 이웃마을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 잔치에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평생 살다가 묻혀가도록 내버려나두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永遠回歸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나고,/ 자넨 저만큼/ 이낸 이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땅 위에 눅고/ 사람과 사람과의/ 重複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 기생을 모를/ 사람들,// 산정의 帝王...../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아래 저렇게 많이/ 山의 傾斜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千꼴 萬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大地에는 地勢도 靈泉도 솟는다. 하데마는,/ 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人肉으로 構築된/ 말하자면 寄生塔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이야.// 헌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때에 붙어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하는 격,/ 王宮과 統治權엔 아랑곳 없으니까./ 二次大戰 저물어가기 얼마전의 이야길세/ 豆滿江邊 어느 촌락이 지나던 길/ 한 할아버지로 부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만 귀찮게 찝쩍이느냐 말이요./ 내 멀쩡한 四肢로 땅을 잃고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海蔘장 점북과 바꿔 오구,/ 시집 보내구, 장가 보내구, 장 사는데,/ 글쎄 뭘 어떻거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坊坊 曲曲 벋어 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着根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년 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第五話>// 가리워진 안개를 걷게 하라./ 國境이며 塔이며 御用學의 울타리며/ 죽 가래로 밀어 바다로 몰아 넣으라.// 하여 하늘을 흐르는 날새처럼/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萬가지와 萬노래를 한가지로 흐르게 하라.// 보다 큰 集團은 보다 큰 體系를 건축하고,/ 보다 큰 體系는 보다 큰 惡을 釀造한다.// 組織은 형식을 강요하고/ 형식은 僞造品을 모집한다./ 하여, 傳統은 궁궐 한의 上典이 되고/ 造作된 權威는 주위를 浸蝕한다.// 國境이며 塔이며 一萬年 울타리며/ 죽 가래로 밀어 바다로 몰아 넣으라.//
<第六話>// 없으려나봐요, 사람다운 사낸.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이 숱 많은 흰가슴, 텃집 좋은 아랫녁, 꽃닢 문 입술/ - 보드라운 大地에 누워 허송 세월하긴, 어머니, 차마 아까와 못견디겠네요./ 荒原 말굽 달리던 黃河期 사내 자꾸 그립어요./ 어데요? 그게 어디 사람이예요? 第二級齒車라고 명패까지 붙어있지 않아요? 어머니두.// 저건 꼭두각시구, 저건 주먹이구, 저건 머리구./ 별수 없어요, 어머니 저 눈면 技能子들을 한 십만개 긁어 모아 여물솥에 쓸어옇구/ 푹신 쪼려 봐 주세요. 혹 하나쯤 온전한 사내 우어날지도 모르니까요.// 해두 안되거든, 어머니, 생각이 있어요./ 힘은 좀 들겠지만 地上에 있는 모든 숫들의 씨 모주리 썩어 받아 보겠어요. 그 반편들 걸./ 욕하지 마세요. 받아넣고 정성껏 조리해 보겠어요./ 문제없어요, 튼튼하니까!/ 하나쯤 만들어질 수 있을것 같아요./ 온전한 아기하나 낳아보겠어요./ 제기랄, 빈집 뿐일세 그려. 주인은 없는데/ 하인과 客들이 얼싸붙고 닭 잡아라, 절 받아라, 난장이니 썅.// 비로소, 말미아마, 바야흐로다?// 거북등에 가 집짓고 늘어 붙는 소라./ 잠자는 코끼리 등에 올라 國境들을 그어/ 놓고 다퉈쌌는 개미 떼.// 깊은 地獄의 아구리에 白紙한장 깔고/ 누운 곰의 행복한 눈./ 쇠기둥과 가시줄로 천당을 지어놓고/ 門 지키는 수고./ 貴婦人 발톱에 메니큐어를 칠해 주고/ 밥 얻어먹는 專門家.// 해 저문 바닷가의 구두 修繕家씨,/ 斷崖 위의 理髮師선생,/ 山麓의 狩獵家박사,// 그만 돌아들 오시지,/ 三問 草屋 燈비친 창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매미는 언제까지 뜻모를 소리만 울어 예는가?/ 溫室 속에서 울어예는 매미는 무엇을 먹고 살아쌌는가?/ 노동은 머리 위에 나비꽃이나 한마리 매미를 달기 위해, 열두 해 긴 세월 밭가는 돼지?// 돼지는 노래하라,/ 밭을 갈면서/ 씨를 뿌리라. 한알 한톨/ 피맺힌 말씀으로.// 돼지는 말씀하라,/ 밭을 갈면서/ 豫報하라 날씨도./ 失業케 하라 王도.// 한알 한톨/ 피 맺힌 말씀으로.//
<後 話>// 숱한 봄 여름, 가을, 잊어진 세월/ 陽地 바른 盆地 雜草의 떼는/ 무성케도 이루어 쓰러져 갔다.// 무너진 살림살이 해마다 쌓여/ 마흔 아홉두께의 肥沃한 層을 입었을 때,// 그곳에선 肉身 같은 미끈한 줄기가/ 아름다운 향기를 四地에 뿌리며/ 하늘거리는 妖花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한 그루 佛典을 꽃 피우기 위하야/ 先史 五千年은 묻히어 갔고,// 한 그루 피어난 聖書의 地層에는/ 九十九億 創世人民의/ 몸부림 든 思想이 썩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 무삼 꽃이 내일 날 피어날 것인가?// 雜草의 茂盛을 나래 밑에 거느리며/ 七千年 늙어온 몇 그루 古木-// 당신네 말쌈도, 지혜의 法悅도,/ 文明의 행복도, 그대네 作業도,/ 늘어붙어 地層 이룰 甲蟲의 무덤.// 精神을 장식한 百花 萬象여,/ 몇 萬年 풀밭 이룬 人種의 가울이여,// 허물어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무삼 꽃이 내일 날엔 피어날 것인가?// 宇宙밖 窓을 여는 맑은 神明은/ 太陽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 太陽빛 거느리는 맑은 事의 江은/ 宇宙 밖 窓을 열고 춤춰 흘러갈 것인가?//
-幕-//
불바다 / 신동엽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진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소녀(少女)의 앙탈 / 신동엽
내가 운다고/ 오는 비가 안 오나 뭐/ 개구리도 우는데/ 울테야, 울테야..//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 신동엽
잔잔한 바다와 준험한 산맥과 들으라/ 나의 벗들이요/ 마지막 하는 내 생명의 율동을// 미웁던 것이나 귀엽던 것이나/ 이제는 잘 있으라 나는 가련다// 생각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법열과/ 또한 얼마나 많은 인간의 추악을 보았단 말인가// 단풍든 고덕산에 함께 올라/ 저 멀리 서해바다와 저 멀리 지리산 줄기를 더듬으며/ 소리 지르며 놀던 학우들의 이름이여// 아침저녁으로 웅장한 한강철교를 지나 통학할 때/ 시대의 풍운아처럼 차린 청년에게/ 수줍은 추파를 던지던 수많은 여생도들의/ 인사 없이 사귀인 그리운 얼굴들이며// 첫사랑의 불타는 정열을 나에게 쏟아주고/ 그리운 이내 나를 배반하고 가버린/ 요염한 눈모습이여/ 가시지 못할 내 마음의 여신이여// 단장의 비명을 울리며 전기고문 받던/ 그래도 나에게 위안을 잊지 않던/ 이름 없는 영웅 내 감방의 친구여// 나는 추억하나니/ 괴로웠던 것이나 행복했던 것이나/ 이제 와서는 내 마음을 현혹케 하는/ 온갖 영상들// 꽁지벌레처럼 쫓아다니는 학정자의 학살을 피하여/ 서울로 망명할 때/ 남부여대의 피난민이 오르내리는 천안고개/ 호젓한 소롯길에서/ 우리 함께 붉은 까치밥을 따먹으며 길 걷던/ 영리한 소녀 잊지 못할 얼굴이여// 불덩어리 번갯불처럼 쏟아지는 기총소사 밑에서/ 나의 팔에 안겨 언덕을 넘어서던/ 누나 잃은 소년이여/ 까무러쳤던 얼굴이여// 탈옥수의 심정으로 채찍에 끌려 남하할 때/ 찬 눈을 뭉쳐 먹어가며 넘던 문경새재 고개에서/ 기한과 피로에 반죽음이 되어 조국을 원망하던/ 낯설은 수만 청년의 떼지기여//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 낯선 집 돌각담 밑에 내 지쳐 쓰러졌을 때/ 행주치마 바람으로 나와 깜밥과 동김치를 쥐어주던/ 따뜻한 인정의 아가씨여, 따뜻한 아가씨의 얼굴이여// 다만 만백성이 만백성을 위하여 평화스러이 노래 부르며/ 일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보고 싶었기에/ 불태워 보낸 젊음이었노라, 혀를 깨물어/ 분류처럼 내달려온 젊음이었노라// 피비린 낙동수를 반찬삼아/ 주먹밥 먹던 교육대에서/ 탐욕의 희멀건 눈으로 가련히 두리번거리던/ 무고한 젊은이의 피눈물이여/ 조선 사람들의 병들었던 모습이여// 나는 회상하나니/ 이 온갖 희락과 질곡의 골짜기를/ 그리하여 또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의 벗들에게/ 상상 속에 향연을 베풀어 호소를 보내나니// 사람과 소가 죽어 나자빠져 딩구는/ 낙동강 나루터에서나/ 눈물을 짜가며 건너던 뼈시린 냇물에서나/ 하루하루의 피곤을 풀어보는 주막집에서나/ 알지 못하는 새에 정의가 깊어가던 해후의 길벗/ 그 처녀들의 환영이여// 경부선 열차지붕/ 쌀장사하는 수많은 전재민들 틈에 끼여 된서리를 맞아 가며/ 또는 시나브로/ 인가와 도로를 피하여 밤을 새우던 산중에서/ 우러러보던 별이여, 눈물로/ 우러러보던 북극성이여// 한강 보오트장에서 화창한 남산공원에서/ 그대들이 마주친 인상 깊은 미모의 대학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사모해서는 아니 될/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지금쯤 어디메 산맥에서 푸른 영을 타고 있을/ 맥고모자 그늘 아래 웃음 웃던 얼굴이여// 오다가다 말없이 지나친 뭇 얼굴들/ 내 시 낭독에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군중들/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모르는/ 온갖 연분 있는 사람들의 심장이여// 나는 가련다/ 아름다운 처녀지 우에 자유스러이 피어나려던 내 청춘은/ 노망든 독재자와 이방권력에 의하여 무참히/ 꺾이어버렸다/ 초야의 신부처럼 감격에 부풀었던 나의 희망은/ 억울히도 짓밟혀버리었다.// 자유로운 하늘이여/ 자유로운 원시림이여/ 공화국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올라가는/ 죄 없는 나의 고향 아득한 한촌이여// 나는 본 일이 있는 그리고 비록 나를 못 봤을지 언/ 하나도 아니요 백도 아니요 십만도 아니요 더 많은/ 그리운 사람들의 마음이여// 나의 발바닥과 손길과 숨결이 스쳐간/ 나무며 돌이며 벌판이며 아름다운 강산이여// 들으라 마지막 하는 내 생명의 율동,/ 지금도 살육의 제단에서 고혈에 포화가 되어/ 수무족도 하는 여름밤의 부나비 떼를 보노라// 그러나 들으라 나의 벗들이여/ 먼동 트는 대지요/ 내 그대들의 추억을 지니고서 어찌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벗들이여 나는 똑똑히 보았노라/ 산월달이 된 자유의 여신을/ 그리하여 탄생될 자유의 여신을 그대들에게 부탁하며/ 나의 청춘은 어린 산아를 위하여 피가 되려 하노라/ 독재정치에 희생이 된 내 생명은/ 신성한 평회를 위하여 주춧돌이 되어 지리라// 들으라 잊지 못할 나의 벗들이여/ 나를 추모하는 뭇 벗들이여/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이것만이 내 생명의 율동이 요구하는 벗들에 향하는/ 마지막 바람이어라.//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시인
충남 부여 출생. 전주사범학교와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었으며, 1961년부터 명성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1967년에 4,800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을 발표함으로써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작품과 더불어 민중의 정서에 따른 시적 형상을 창조했다. 이주요 작품으로는 <껍데기는 가라>, <금강(錦江)>,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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