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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김억의 첫 시집이자 조선 근대문학 최초의 창작시집이다.
총 83편의 시를 9장으로 나누어 수록하였으며, 총 162쪽(18.7cm×12.7cm), 국한문 혼용.
서문 / 김억 해파리의 노래 같은 동무가 다 같이 생(生)의 환락에 도취되는 사월의 초순 때가 되면 뼈도 없는 고기덩이밖에 안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限) 끝도 없는 넓은 바다 위에 떠놀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라임’도 없는 이 몸은 가엾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설고도 곱습니다. 해파리 노래에게 인생에는 기쁨도 많고 슬픔도 많다. 특히 오늘날 흰 옷 입은 사람의 나라에는 여러 가지 애닯고 그립고, 구슬픈 일이 많다. 이러한 ‘세상살이’에서 흘러나오는 수 없는 탄식과 감동과 감격과 가다가는 울음과 또는 웃음과, 어떤 때에는 원망과 그런 것이 모두 우리의 시가 될 것이다. 흰 옷 입은 나라 사람의 시가 될 것이다. 이천만 흰 옷 입은 사람! 결코 적은 수효가 아니다. 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뭉치고 타는 회포를 대신하여 읊조리는 것이 시인의 직책이다. 우리 해파리는 이 이천만 흰 옷 입은 나라에 둥둥 떠돌며 그의 몸에 와 닿는 것을 읊었다. 그 읊은 것을 모은 것이 이 『해파리의 노래』다. 해파리는 지금도 이후에도 삼천리 어두침침한 바다 위로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부드러운 몸이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설움을 한없이 읊을 것이다. 어디, 해파리, 네 설움, 네 아픔이 무엇인가 보자. 계해년 늦은 봄 흐린 날에 춘원(春園) 머리에 한 마디 나는 나의 시집에 대하여 긴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가난한 이년 동안의(1921~1922) 시작(詩作)에의 노력이라면 노력이라고도 할 만한 시집을 세상에 보내게 됨에 대하여 행여나 세상의 오해의 꾸지람이나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다시없는 원망입니다. 시에 대하여는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 아직도 이른 줄로 압니다. 그저 순실(純實)하게 고요하게 시의 길을 밟아 나아가면 반드시 이해받을 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이 시의 배열에 대하여는 연대 차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시편을 다 모아 놓으면 꽤 많을 듯합니다마는 시고(詩稿)를 다 잃어버리고 말아서 어찌할 수 없이 현재 저자의 수중에 있는 것만을 넣기로 하였습니다. 더욱 마지막에 부록 비슷하게 조금도 수정도 더하지 아니하고 본래의 것 그대로 붙인 ‘북의 소녀(小女)’라는 표제 아래의 몇 편 시는 지금부터 구년 전의 1915년의 것이었습니다. 하고 그것들과 및 그밖에 몇 편 시도 오래된 것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저자 자신의 지나간 날의 옛 모양을 그대로 보자 하는 혼자 생각에 바꾸지 아니 합니다. 어찌 하였으나, 저자인 내 자신으로는 대단한 기쁨으로 이 처녀시집을 보낸다는 뜻을 고백하여 둡니다. 1923년 2월 4일 밤에 저자 |
1부. 꿈의 노래 |
꿈의 노래 / 김억
밝은 햇볕은 말라가는 금잔디 위에/ 바람에 불리우는 까마귀의 나래에 빛나며,/ 빈산에서 부르는 머슴꾼의 머슴 노래는/ 멈춤 없이 내리는 낙엽의 바람소리에 섞이어,/ 추수를 기다리는 넓은 들에도 빗겨 울어라.// 지금은 가을, 가을에도 때는 정오,/ 아아 그대여, 듣기조차 고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대의 ‘꿈의 노래’를 부르라.//
잃어진 봄 / 김억
첫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물 긷는 따님의 얼굴이 우물 위에 어리울 때,/ 거름 실은 소[牛]를 몰고 가는 농군의 싯거리 노래는/ 앞산 밑을 감도는 뱃노래와 함께 들리는/ 내 고향 어린 때의 그 봄날이 그리워.// 안개가 따사로운 햇볕을 섧게도 덮으며/ 진달래의 갓 핀 꽃이 빨갛게 꿈 깰 때/ 채전(菜田) 가의 냉이 캐는 아이들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뜰 안에서 어미 찾는 병아리 소리에 섞이는/ 내 고향의 어린 때의 그 봄날이 그리워.//
피리 / 김억
빈 들을 휩쓸어 돌며,/ 때도 아닌 낙엽을 최촉(催促)하는/ 부는 바람에 쫓기어,/ 내 청춘은 내 희망을 버리고 갔어라.// 저 말리 검은 지평선 위에/ 소리도 없이 달이 오를 때,/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옛 곡조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내 설움 / 김억
능라도(綾羅島) 기슭의/ 실버드나무의 꽃이/ 한가로운 바람에 불려,/ 수면에 잔무늬를 놓을 때,/ 내 설움은 생겨났어라.// 버들꽃의 향내는 아직도 오히려,/ 낙엽인 나의 설움에 섞이어,/ 저 멀리 새파란 새파란 오월의/ 하늘 끝을 방향 없이 헤매고 있어라.//
풀밭 위 / 김억
맡으면 향(香)내나는 풀밭 위에/ 황금색(黃金色)의 저녁볕이 춤추며/ 들벌레소리가 어지러울 때,/ 또다시 나는 혼자 누워서/ 구름끝에 생각을 보내고 있노라.// 떠서는 잠겨드는 심사(心思)와도 같이/ 저 멀리 구름 속에 이동(移動)이 잦을 때,/ 어디선지 저녁 종(鐘)이 빗겨 울리어,/ 저 멀리 먼 곳으로 야속케도 심사(心思)가 끌려라.// 달은 혼자서 방향(方向) 없이 아득이면서/ 하늘길을 걷고 있어라.// 고요한 밤거리에는/ 잃어진 꿈과도 같게/ 곱게도 등(燈)불이 졸고 있어라.//
바다 저 편(便) / 김억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저 멀리 머나먼 바다의 저 편(便)에/ 그윽하게도 보이는/ 흰 돛을 달고 가는 배, ……//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水平線) 위로/ 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 언제나 하소연한 나의 꿈, ……//
달과 함께 / 김억
조는 듯한 등(燈)불에 덥히운/ 권태(倦怠)의 도시(都市)의 밤거리에/ 고요하게도 눈은 내리며 쌓여라.// 인적(人跡)은 끊기고/ 눈이 멎을 때,// 보라, 이러한 때에, 깊고도 넓은/ 끝도 없는 밤바다에/ 하얗게도 외로운 빛을 놓으며,// 달은 혼자서 방향 없이 아득이면서/ 하늘 길을 걷고 있어라.// 고요한 밤거리에는/ 잃어진 꿈과도 같게/ 곱게도 등불이 졸고 있어라.//
배 / 김억
끝도 없는 한바다 위를/ 믿음성도 적은 사랑의 배는/ 흔들리며, 나아가나니,// 애닯게도 다만 혼자서,/ 그러나마 미소를 띠우고/ 거칠게 춤추는/ 푸르고도 깊은 한바다의 먼 길을/ 사랑의 배는 나아가나니,/ 아아 머나먼 그 끝은 어디야.// 희미한 달에 비치어 빛나며, 어두운/ 끝 모를 한바다 위를 배는 나아가나니.//
갈매기 / 김억
봄철의 방향(芳香)에 취한/ 웃으며 뛰노는 바다 위를/ 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 이지러지는 저녁 해가/ 고요히 남은 볕을 거둘 때,/ 어두워가는 바다 위를/ 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 소리도 없이 잠자코 넘어가는/ 저녁 바다 위에 혼자서 스러지는/ 어린 날의 황금의 꿈은/ 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와도 같이……//
잃어지는 기억(記憶) / 김억
고요한 밤의, 고요히 쉬는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별의 희미한 빛과도 같이,/ 아름다운 여름의 온갖 빛을 다 잃은/ 있을 듯 말 듯한 향내를 놓는 꽃의 맘이여.// 뒤설레이는 바람의 하룻밤을 시달린/ 명일(明日)이면 말라 없어질, 생각의 꽃의/ 떨면서 헤치는 적은 향내를/ 곱게도 맡으며, 버리운 맘이여, 사랑하여라.//
눈 / 김억
죽은 님의 넋 위에도 내려오는 눈./ 잃어버린 사랑의 무덤 위에도 오는 눈./ 어린 맘의 꽃 위에도 내려붓는 눈./ 한 유월의 낮잠의 꿈에도 오는 눈.// 닥치면 보드라운 손끝에도 녹는 눈./ 덮으면 일어나는 불도 꺼지게 하는 눈./ 즈려밟으면 아무 저항도 없는 눈./ 차기는 하여도 한없이 보드라운 눈.// 님이여, 당신은 눈, 눈은 당신./ 맘이여, 당신은 눈, 눈은 당신.//
2부. 해파리의 노래 |
임금과 복숭아 / 김억
임금(林檎)은 그 빛이 새빨갛지요,/ 그리고 복숭아도 그 빛이 새빨갛지요./ 임금은 속 과육이 희지요,/ 그리고 복숭아는 속 과육이 붉지요.// 여기 임금과, 그리고 복숭아가/ 다같이 새빨갛게 익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임금과 같이 새빨갛게 익은 그대의 맘./ 그리고, 복숭아와 같이 새빨갛게 익은 나의 맘.// 그대는 임금, 그리고 나는 복숭아,/ 둘이 함께 잃어버린 사랑의 혼을 찾읍시다.//
안동현(安東縣)의 밤 / 김억
안동현에 하얀 눈이 밤새도록 내립니다./ 곱게도 오늘밤은 눈 위에 누워 잠자코 있습니다./ 볼수록 캄캄한 밤은 볼수록 희여만 집니다.// 안동현에 뽀얀 정(灯)불은 밤 깊도록 깜빡입니다./ 쿨리[苦力]는 오늘밤도 눈 속에 쌓여 헤매고 있습니다./ 볼수록 희미한 불은 볼수록 꺼질 듯만 합니다.// 안동현에 소리 없이 내려붓는 눈,/ 안동현에 속도 없이 반득이는 불,/ 안동현에 볼수록 까매지는 밤,/ 내 맘에는 하염없이 눈물집니다.//
눈 2 / 김억
무겁게도 흐리진 머리털 아래의,/ 회색 구름이 차게도 하늘을 덮은 듯한,/ 향내의 흰 분(粉)에 얼굴을 파묻고 섰는/ 겨울의 아낙네여, 그리고 애인이여.// 떠오르며 흩어지는 연기의/ 쓰러져가는 한때의 옛사랑을/ 무심스럽게도 바라보고 있는/ 담배를 피우는 애인이여, 아낙네여.// 옅은 웃음을 띠우며/ 맘의 찬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애인이여,/ 날은 흐린 어둑한 십일월의/ 고요한 저녁의 아낙네여.// 애인을 버리고 가려는 애인이여,/ 두꺼운 목도리를 둘러 맨 아낙네여./ 지금은 겨울, 겨울에도 눈 오는 때,/ 맘하여라,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나니,// 하염없이도 땅 위에 내리는 눈,/ 사방과 사방을 둘러싸는 눈,/ 그리하여 눈 속에서 맘과 맘은 잠들었어라.//
별 낚기 / 김억
애인이여, 강으로 가자, 지금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거리로 가자, 지금은 밤, 낚아질 때다./ 어두운 강 위에는 빛나는 별이 반득인다./ 어두운 거리에는 빛나는 정(灯)불이 반득인다.// 애인이여, 강으로 가자, 지금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거리로 가자, 지금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강 위에서 고요히 별을 낚자./ 애인이여, 거리에서 고요히 불을 낚자.// 애인이여, 지금은 밤, 강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지금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낚을 것 같으면서도 암만해도 못 낚을 별./ 잡을 것 같으면서도 암만해도 못 잡을 불.// 애인이여, 지금은 밤, 강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지금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낮이 되면 별은 숨고 만다./ 낮이 되면 불은 꺼지고 만다.// 애인이여, 너는 밤의 강 위에 빛나는 별./ 애인이여, 너는 밤의 거리에 빛나는 불./ 너의 맘은 낚을 것 같으면서도 못 낚을 별./ 너의 맘은 잡을 것 같으면서도 못 잡을 불.// 애인이여, 지금은 밤, 강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이여, 지금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너의 맘은 낮이 되어도 숨을 줄을 모르는 별./ 너의 맘은 낮이 되어도 꺼질 줄을 모르는 불.//
십일월(十一月)의 저녁 / 김억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 수풀로/ 적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며/ 저녁 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움[悔恨]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安息)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靈)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가을 2 / 김억
쌔듯하고도 적막한 가을,/ 맑고도 어뜩스러운 하늘,/ 힘이라곤 조금도 없는 듯한 일광(日光),/ 거울을 씻어놓은 듯한 수면.// 바람결에 사랑과 미움을 노래하는/ 나무와 나무, 그리하고 낙엽과 낙엽.// 혼자 고적하게 남긴 내 맘은/ 참말로 의지할 곳도 없어지누나,// 저것 보아, 태양조차 혼자 떨어져/ 구름 뒤에 숨어서 흐득여 울고 있다.//
실제(失題) / 김억
즐거운 아침볕은 사람의 위에 빛나며,/ 기쁨의 웃음은 사람의 얼굴에 있어라,/ 모든 것은 이리도 곱게, 이리도 평화롭게/ 하느님의 주신 길을 밟으며 지내가건만,// 아 서러워라, 쥐어뜯고 싶어라,/ 나의 사람이여, 아아 그대여,/ 내 맘에는 한도 없이 눈물 짓나니.//
고적(孤寂) / 김억
바다에는 얼음이 덮히고/ 대지(大地)는 눈속에 잠들어,/ 가이없는 나의 이 `고적(孤寂)'은/ 의지(依支)할 곳도 없어지고 말아라.// 보라, 서(西)녘 하늘에는/ 눈썹같은 새빨간 반(半)달이/ 스러져들며, 새까만 밤이/ 헤매며 내리지 않는가.//
사계(四季)의 노래 / 김억
고운 생각 가득한 나물광주리를 옆에 끼고/ 인생의 첫 이슬에 발을 적시는 봄철의 따님이여,/ 꽃을 피우려는 고운 바람에, 그대의 보드라운/ 가슴의 사랑의 꽃봉우리는 지금 떨고 있어라.// 미칠 듯한 열락에 몸과 맘을 다 잊고 뛰노는/ 황혼의 때아닌 졸음을 그리워하는 여름의 맘이여,/ 행복의 명정(酩酊), 음울(陰鬱)의 생각은 지금 그대를 둘러싸고/ 끝없는 꿈으로 피곤한 ‘인생(人生)’을 곱게 하여라.// 빛깔 없게도 고개를 숙이고, 묵상(黙想)에 고요한 가을이여,/ 냉락(冷落)을 소곤거리는 낙엽의 비 노랫가락은/ 들을 거쳐, 넓다란 맘의 세계에도 빗겨들어,/ 곳곳마다 ‘죽은 맘’의 장사(葬事)에 한갓 분주하여라.// 흰 옷을 입고, 고요히 누웠는 겨울의 베니스 여신이여,/ 건독(乾毒)만 남고, 눈물 흔적조차 없는 너의 눈가에는/ 아무리 잃어버린 애인을 그립게 찾는 비를 띠었어도/ 쓸 데조차 없어라, 한때인 사랑은 올 길이 없어라.//
3부. 표박 |
표박(漂泊) / 김억
1/ 황혼의 하늘가에/ 홋홋할 손 바람이러라,/ 흰 눈을 둘러싸는 밤은/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여라./ 이러한 때, 지나간 옛날의/ 곱다란 고산(故山)의 어린 꿈은/ 속절없이도 가엾게/ 몸을 에워싸며 울어라.// 2/ 산이면 넘어가고/ 바다면 건너가려는/ 한정도 없는 하늘에/ 나의 표박은 떠서 돌아라./ 서녘의 저편 가에는/ 오늘도 새빨간 황혼의 빛이/ 헤매이며 넘으려 하여라.// 3/ 아아 어찌하랴, 나의 맘은/ 하늘의 구름과도 같아서/ 맘 아닌 바람에 쫓기어,/ 동서남북에 정향(定向)이나 있으랴./ 쉴 틈이라곤 조금도 없어라.// 4/ 표박의 하늘가에/ 조각으로 떠도는 몸은/ 낙엽과도 같이,/ 구름과도 같이,/ 날리워도 가며/ 불리워도 가서/ 끝이 없어라, 한이 없어라.// 5/ 아아 서러워라, 나의 고적(孤寂)이여,/ 네 손을 내가 잡고 혼자 울만한/ 따사로운 고적도 지금의 내 몸에는,/ 다 쓰러지고, 고적도 없는 고적이/ 혼자서 남모르게 흐득여 울어라.// 6/ 어두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 흐름의 떠도는 몸에는 끝없는 우수(憂愁)./ 모든 것은 하나조차 쓸 데가 없어라,/ 목숨이 무엇이며,/ 사랑조차 무엇이랴./ 나는 혼자서 다만 걷노라.//
4부. 스핑쓰의 설움 |
하품론(論) / 김억
움직일 수도 없는 피로(疲勞)로 나오는 하품,/ 하소연하게도 잃어진 생각 때문에 생기는 하품,/ 그 다음에는 ‘사랑’을 파묻는 보드라운 하품,/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리어 나오는 하품,/ 그러하고도 오히려 하품이 또 있다 하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한가로운 하품이러라.//
입 / 김억
온갖의 화병(禍病)은 입으로 들어가고,/ 온갖의 화복(禍福)은 입에서 생겨라,/ 그러하다, 나의 이 입으로 읊어진 노래는/ 세기(世紀) 끝에 생기는 Malady(멜라디)의 쓰린 신음,/ 사랑의 사체(死軆)를 파묻는 야릇한 숨소리러라.//
아침잠 / 김억
아침을 지낸 백열(白熱)의 여름 볕에/ 눈을 비비며 깨기는 깨었으나,/ 나는 직업도 없는 게으른 녀석,/ 남은 반일(半日), 오늘을 어이 보내며,/ 오려는 내일을 몰라 하노라.//
붉은 키스 / 김억
첫가을의 햇볕에 빨갛게도 익은/ 복숭아 빛과도 같은 따님의 입술에/ 사람은 붉은 키스의 무덤을 쌓고는/ 높디나 높게 ‘망각(忘却)’의 비석(碑石)을 세워라.//
탄식(歎息) / 김억
밉살스러운 녀석이라며,/ 꿈에조차 생각지 않겠다고/ 굳게도 결심하는 그 사이에/ 어느덧 그날의 광경이 보입니다.// 정말로 그때는 잘도 지내서.// 맘에도 없는 녀석이라며,/ 다 잊은 줄로 믿으며/ 아니, 아니, 웃는 그 동안에/ 어느덧 그날의 설움이 또다시 생깁니다.// 정말로 잊을 수는 바이없어.//
새빨간 핏빛의 진달래꽃이 질 때 / 김억
새빨간 핏빛의 진달래꽃이 질 때,/ 애닯은 맘의 진달래꽃이 떨어질 때,/ 속을 볶이게 하는 저녁볕이 넘을 때,/ 저무는 봄에도 젊은 날이 져갈 때,/ 촌집의 정(灯)불이 발하게 빛을 놓을 때/ 어이없이도 나의 영(靈)은 혼자 울고 있어라.//
애닯기도 하여라 / 김억
애닯기도 하여라, 새빨간, 새빨간/ 저녁의 볕은 넘으며 어두우려 할 때,/ 아직도 사막을 걷는 낙타의 설움,/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인생의 몸.// 어찌하면 사막이 그리우며,/ 어찌하면 무거운 짐이 즐거우랴,/ 내 몸은 이 때문에 파리했노라,/ 아아 오늘도 새빨간 저녁의 볕.//
화인(火印) / 김억
푸시식, 푸시식……/ 여보세요, 애인이여,/ 어찌하면 남의 가슴 위에/ 이렇게도 아프고 쓰라리게/ 새빨간 화인(火印)을 눌러 줍니까?/ 한번 화인 맞으면 고칠 수 없는/ 영구한 허물이 생기겠습니다,/ 하여 언제나 그 상처가 혼자 남아/ 철을 따라 아프게 되겠습니다.// 푸시식, 푸시식……/ 여보세요, 애인이여,/ 사랑의 뜨거운 키스의 감주(甘酒)에 취한/ 당신의 가슴에는 동계(動悸)가 높습니다,/ 암만하여도 이 동계를 고쳐드리려면/ 따끔하도록 화인을 눌러야/ 취한 것도 깨어 정신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이 화인을 한번 맞으면/ 언제나 그 여독(餘毒)은 남아 생각나게 됩니다.//
달 / 김억
오늘 밤에도/ 고요히 외롭게도/ 같은 길을 걸어 올라오는/ 달이여.// 둥글고 넓은 하늘에는/ 그대의 걸음이 몇 번이던고!/ 핼금하게도 역증난/ 그대의 얼굴에는/ (보아라, 아직도 오히려)/ 권태의 미소가 떠돌고 있어라.//
5부. 황포의 바다 |
황포(黃浦)의 바다 / 김억
기나긴 긴허리의 길을 다 지낸 뒤에는/ 외마디의 골짜기 되는 큰고리를 들어라./ 그러고는 우뚝 섰는 높은 영(嶺)의 달바위재를/ 한걸음, 한걸음 숨차게 올라서면은,/ 하얀―바다, 넓기도 하여라,/ 이는 나의 고향의, 황포의 바다!//
실제(失題) 2 / 김억
바람은 개바주 틈에서 섧게도 울며,/ 이름 모를 작은 새가 실버드나무에서/ 꿈같은 노래를 혼자 좋아 부를 때,/ 앞바다로는 고기를 낚으려,/ 뒷동산으로는 꽃을 꺾으려/ 오가던 옛동무의 잃어버린 얼굴의/ 내 고향의 그리운 그 봄날은 지금 어디로……//
참살구 / 김억
고소한 참살구씨라고/ 서로 아껴가며 까 먹던 것이,/ 나중에는 두 알밖에 안 남았을 때에/ 이것은 심었다가 종자(種子)를 하자고,/ 네 살 위 되는 누님이 나를 권했소./ 살구씨를 심은 지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진달래꽃이 진 뒤에는/ 그 살구나무에 하얀 꽃이 피게 된지도 오래였소./ 맛있는 참살구라고/ 어린 동생들은 귀해 하며,/ 해마다 늦은 보리가 익었을 때에/ 그들은 종자 하자는 말도 없이,/ 야단을 하면서 번갈아 따먹소./ 누님이 돌아가신 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살구꽃이 진 뒤에는/ 그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였소.//
사향(思鄕) / 김억
하늘 공중 높게도 떠도는 제비의 몸으로도/ 한때의 제철을 따라 옛길을 찾아오거든,/ 한가하게도 뱃소리가 들리는 황포(黃浦)의 해안,/ 잔디밭에는 꽃이 피고, 솔밭엔 송화(松花)가 나는/ 푸른 하늘 아래의 옛 마을, 낯익은 내 집을,/ 때의 봄철, 내가 어찌 잊을 줄이 있으랴.//
꽃의 목숨 / 김억
잠깐 동안이러라,/ 가을 저녁의 애달픈 꽃이여./ 목숨은 너무도 짧아라,/ 긴 여름날의 설익은 꿈이여./ 그러나,/ 명일(明日)을 모르는 꽃의 목숨에는 방향(芳香)이 숨었고,/ 짧음의 설익은 꿈속에는 행복의 밀실이 있어라.//
이슬 / 김억
나의 생각 가득한/ 따사롭고도 찬 이 물방울./ 밤마다 내리는 이슬방울이 되어/ 밤마다 밤마다, 나의 사람아, 꽃이여,/ 너의 새빨간 침대를 적셔주려노라./ 아침 여명의 첫 볕에 녹아진단들 어찌하랴,/ 이슬의 방울, 생각의 눈물이여.//
봉선화(鳳仙花) / 김억
새빨간, 새빨간 핏빛의 꽃이여,/ 그윽하고도 가엾은 정오의/ 뜨거운 사랑 때문에,/ 부끄러운 듯이도 미소를 띠고/ 너는 머리를 숙이고 있어라./ 아아 새빨간, 새빨간 상사(相思)의 꽃이여,/ 오늘 하루도 어느덧 넘으려 하여라.//
초순(初旬)달 / 김억
죽어가는 하룻날의 끝과/ 생겨나는 하룻밤의 처음과의/ 어두움도 밝음도 아닌/ 황혼의 서녘 하늘에,/ 짧은 목숨과도 같이/ 애닯은 사랑과도 같게,/ 한동안 떠돌다 가는 쓰러지는/ U자 같은 새빨간/ 초순의 반달이여.//
눈물 / 김억
밝아오는 첫 녘의 하늘에/ 쓰러져가는 희미한 옅은 빛의/ 별보다도/ 아직도 오히려 핼금하게 빛깔도 없게/ 히용 없는 미소를 띤/ 그대의 두 눈 속에 고인 듯 만 듯하게 고인/ 그때의 그 눈물방울을,/ 나는 지금 멀게도 이역(異域) 길가의/ 여름밤의 별 하늘을 혼자서 우러르며,/ 외롭게도 가슴에 그려보노라.//
남기운 향(香)내 / 김억
떨어지기 쉬운 ‘기쁨’의 꽃에는/ 끝없는 ‘설움’의 향내가 숨어 있나니,/ 꽃은 너무도 믿음성이 적고/ 향내는 너무도 살뜰하여라.//
가는 봄 / 김억
어린 맘아,/ 오월의 밤하늘에는 쓰러져가는 별,/ 가는 봄철의 저녁에는 떨어지는 꽃,/ 오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어린 맘아,/ 봄날의 꽃과 함께, 밤하늘의 별과 함께,/ 고요하게도 남모르게 넘어가는 청춘을/ 오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야자(椰子)의 몸 / 김억
야자나무의/ 나의 이 몸에도 봄의 꽃은 피어라./ 오오 그러나 몸은 바닷가의 야자꽃./ 날이 지나, 익어서 떨어만 지면/ 바다는 한도 없이 넓고 깊어라.//
죽음 / 김억
죽음이란 잠일까,/ 꿈도 없는 새카만 잠일까?/ 그렇지 않으면 꿈일까,/ 새카만 잠 속에 생기는 밝은 꿈일까?/ 우리들은 그것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러기에 죽음이란다./ 그것이 죽음이란다.//
언제 오셔요 / 김억
언제 오셔요, 내 사람아,/ 언제 오셔요, 내 님이여,/ 날은 어둡고 바람은 붑니다,/ 이번 가시면 언제 오세요./ 언제 오셔요, 내 사람아,/ 내일 오셔요, 내 님이여,/ 바람은 불고 해는 집니다,/ 이번 가시면 다시는 못 오셔요.//
6부. 반월도 |
밤의 대동강(大同江) 가에서 / 김억
나의 발 가에서/ 작은 노래를 놓으며 흘러가는/ 대동강의 밤의 고요한 물은,/ 흘러가는 때와도 같이, 소리 없어라.// 강 위에 떠도는 등불의/ 붉게도 희미도, 푸르게도 빛나는/ 놀잇배의 취한 손의 뒤설레는 소리는/ 피곤한 기녀(妓女)의 무심한 수심가(愁心歌)와 함께 빗겨 들려라.// 쳐다보면 위에는 아득하게도 검은 하늘,/ 내려다보면 아래엔 희게도 번득이는 강물,/ 밤은 나의 위에도 있으며, 아래에도 있어,/ 온갖 세상의 갖가지 습속만이 멀어져라.//
강(江)가에서 / 김억
실버드나무 가지에 새눈이 돋아나오며,/ 해죽해죽 웃으며 흐르는 강(江)물에 씻기우는/ 강(江) 두던에는 새 봄의 기운(氣運)이 안개같이 어리울 때,/ “나를 생각하라”고, 그대는 속삭이고 갔어라.// 넘어가는 새빨간 핏빛의 저녁 노을이,/ 늦어가는 소녀(少女)의 나물 광주리에서 웃으며,/ 꿈을 잃은 늙은이의 가슴을 덮어 비추일 때,/ “나를 생각하라”고, 그대는 속삭이고 갔어라.// 악조(樂調)의 고운 꿈길이 두 번 보드라운 바람을 따라,/ 저멀리 먼 바다를 건너 새 방향(芳香)을 놓는 이 때,/ “나를 생각하라”신 그대는 찾기조차 바이 없어라./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노래 부르며,/ 물결의 기억(記憶)이 흰 모래밭을 숨어드는 이 때,/ “나를 생각하라”신 그대는 찾기조차 바이 없어라.//
기억(記憶)은 죽지도 않는가 / 김억
얼을 뽑아내는 낙열(樂悅)의/ 썩 깊은 악곡(樂曲)에도 오히려 ‘외로움’은/ 쉬지 않고 삼가는 발소리로 머릿속을 오가나니,/ 아아 이는 그대를 잃은 옛 조기(調記)인가.// 문득스럽게도 생겨난 사랑과 기쁨의/ 문득스럽게도 자취도 없이 쓰러져 없어진,/ 바람결에 좇아다니는, 그 기억의 곡조는/ 때의 봄철, 흐르는 강물과도 같게,/ 아양스럽게도, 애처롭게도 살뜰하게도/ 또다시 지나간 ‘맘’을 붙잡고 흐득이나니,/ 아아 이는 그대를 잃은 옛 곡조런가.// 만일에 이 곡조를 설은 기억이라면/ 설은 기억의 곡조는 죽을 줄도 모르는가.//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 김억
혼자서 능라도(綾羅島)의 물가 두던에 누웠노라면/ 흰 물결은 소리도 없이 구비구비 흘러내리며,/ 저 멀리 맑은 하늘, 끝없는 저 곳에는,/ 흰구름이 고요도 하게 무리무리 떠돌아라.// 물결과 같이 자취도 없이 스러지는 맘,/ 구름과 같이 한가도 하게 떠도는 생각./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어제도 오늘도 흘러서 끝남 없어라.//
삼월(三月)에도 삼짇날 / 김억
잎 피고 꽃 열리려는 때가 되거든/ 꽃의 서울, 환락의 평양을 잊지 말아라,/ 잔잔한 대동강 위에는 떠노는 기러기,/ 능라도(綾羅島)에는 새움을 돋히는 실버드나무의.// 보아라, 모란봉(牧丹峯) 가의 소나무 아래에는/ 삼가는 듯이 소근거리는 모란꽃 같은 말이/ 애인과 애인의 입술로 숨어 헤매지 않는가.// 오늘은 삼월에도 첫 삼짇날,/ 강남의 제비도 옛길을 안 잊고 오는 날,/ 애인의 첫 삼짇날은 인세(人世)뿐만이 아니여./ (보아라, 공중에도 떠도는 애인의 첫 삼질!)//
기억(記憶) / 김억
그러하다, 인생은 기억, 기억은 잔회(殘灰)의/ 쓸 데도 없는 지나간 꿈은 지금 와서/ 나의 불서러운 이 몸을 붙잡고/ 이리도 괴롭히며, 이리도 아프게 하여라.// 그러하나, 지금 나의 이 몸에 매달려,/ 그윽하게도 삼가는 듯하게도/ 저, 지나간 옛날의 한때의 꿈은/ 흐득여 울며, 나더러 돌아가라 하여라.// 그러면 나는 이르노니,/ 인생은 꿈, 꿈은 망각의 바다에서/ 스러져 자취조차 없어질 그것이라고,/ 가을 지고, 겨울 와서 해조차 바뀌는 때의.//
별후(別後) / 김억
그대의 흐득여 우는 소리에 따라 나오는/ 무거운 그 말은 잊을 수가 바이없어,/ 서럽게도 외롭게 빗겨 울기는 하여라,/ 아아 그러나 나는 아노라,―/ 그대는 벌써 나를 잊고 있어라,// 하룻날의 길거리에 핼금하여진 황혼의/ 빛깔도 없는 수풀 속에서 옛 깃을 찾으며,/ 아득이며 도는 소조(小鳥)와 같이 맘이 볶이기는 하여라,/ 아아 그러나 나는 아노라,―/ 그대는 벌써 나를 잊고 있어라.// 지금 그대는 내 곁을 떠나 잊지 않으매,/ 그대의 무거운 말만이 가슴에 숨어들어/ 지나간 날의 옛 곡조가 노래하기는 하여라,/ 아아 그러나 나는 아노라,―/ 그대는 벌써 나를 잊고 있어라.//
가을 3 / 김억
그저 가을만은/ 돌아가신 옛 님의 생각처럼,/ 살뜰하게 가슴 속에 숨어들어라.// 지금이야 야릇하게도 웃음을 띤 눈이나/ 핼금하게 파리한 가엾은 그 얼굴과,/ 하얗게도 병적(病的)의 연약한 손가락이나마,// 그나마 다 잊혀지고, 남은 것이란/ 살뜰하게도 잊지 못할 달큼한 생각뿐.// 살뜰하게도 못 잊을 그 생각만은/ 없어져 다한 옛 꿈을 쫓는 듯이도,/ 날카로운 ‘뉘우침’의 하얀 빛과/ 어둑하게도 모여드는 ‘외로움’을/ 하소연한 맘속에 부어 놓을 뿐.// 그저 가을만은/ 가신 님의 옛 생각처럼,/ 못 잊게도 가슴 속에 숨어들어라.//
7부. 저락된 눈물 |
설은 희극(喜劇) / 김억
골패짝은 사거라,/ 그러나,/ 골패질은 말아라,/ ―법률은 이렇게 정하였어라.// 아내는 돈으로 사거라,/ 그러나,/ 계집은 돈으로 사지 말아라,/ ―도덕은 이렇게 말하였어라.//
기도(祈禱) / 김억
구하면 주지 못할 것이 없는 ‘우주’의 저자(著者)시여,/ 팔을 팔배 하면 팔십팔 되게 하시는 전능자(全能者)시여,/ 어제 이 죄인이 장에 갔다가, ‘우정’이란 괴물을/ 술 한 잔으로 사서 죄인의 소유를 만들었습니다,/ 만은 오늘은 술 한 잔 값이 없어 그것을 잃었습니다./ 어찌나 죄인 맘이 섧고 서어하겠습니까―/ 간절히 비옵나니, 잃어버린 ‘우정’이란 그 괴물을/ 아무쪼록 다시 찾아서 죄인의 것을 만들어 주소서./ 구하면 주지 못할 것이 없는 ‘우주’의 저자시여.//
저락(低落)된 눈물 / 김억
임금(林檎)과 사람을 혼동하는/ 솜씨 좋게 요리를 만드는 애인은,/ 임금 알을 벗겨 조각조각 나오던 솜씨로,/ 한 그릇밖에 안 되는 ‘사랑의 요리’를/ 골고루 솜씨 있게 나누어서는/ 고운 노랫가락에 미소를 띠며,/ 여러 사람의 앞에 놓인 꽃 식탁 위에/ 한 그릇씩 한 그릇씩 내어 놓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요리를 먹었을 때부터/ 모든 것은 일변하여 지구는 쓸 데 없이 돌아가게 되며,/ 이전에는 한 방울이 성자(聖者)의 말과 같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던 눈물이 갑자기 낙저(落低)되어,/ 그때부터는 눈물 한 방울에 오전(五錢)도 못 가게 되었습니다.//
비극(悲劇)의 서곡(序曲) / 김억
여보세요, 어찌 나를 꽉 껴안았느냐고 말씀입니까?/ 내가 그대를 꽉 껴안기는 미(美)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의 그 미를 빼앗고 싶었습니다)/ 만은 그 미는 도망가고 그대의 육체만 남았습니다.// 여보세요, 어찌 내 얼굴을 뚫어지도록 보느냐고 말씀입니까?/ 내가 그대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보기는 미소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의 그 미소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만은 그 미소는 쓰러지고 그대의 입술만 남았습니다.// 여보세요, 어찌 내 잠을 깨웠느냐고 말씀입니까?/ 내가 그대의 잠을 깨우기는 꿈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의 그 꿈을 빼앗고 싶었습니다)/ 만은 그 꿈은 간 곳 없고 그대의 잠만 깨었습니다.// 여보세요, 어찌 탐스럽게 나를 보느냐고 말씀입니까?/ 내가 도적이 아닌 것은 알지요, 만은/ 탐나는 것이 하나 있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내게다 그대의 맘을 부내에 넣어 내어주십시오.//
우정(友情) / 김억
사랑은 젊은 봄날의 꽃보다도 가엾고,/ 우정은 술잔에서 술잔으로 떠돌아가며/ 거짓의 울음과 가엾은 웃음을 흘리다가는/ 어리운 담뱃내보다도 더 쉽게 스러지나니,/ 다음에 남은 설움이야 한이나 있으랴.// 사람아, 기운 있게 인생의 길을 밟는 우리의/ 맘과 맘과는 한 번조차 맞은 적이 없어라,/ 그러면, 늦은 봄날의 꽃도 지는 이 저녁에/ 나는 떠들어가는 술잔을 입에 대이고/ 우정 가득한 그대의 얼굴을 혼자 보며 웃노라.//
탈춤 / 김억
여러분, 서러움과 즐거움을 맛보려거든,/ ‘도덕’의 예복과 ‘법률’의 갓을 묘하게 쓰고/ 다 이곳으로 들어오십시오, 이곳은/ 인생의 ‘이기(利己)’ 탈춤 회장(會場)입니다./ 춤을 잘 추어야 합니다, 서툴어 넘어지면/ 운명이라는 놈의 함정에 들어갑니다,/ 하면 ‘행복의 명부(名簿)’에서는 이름을 여의며,/ 다시는 입장권인 인생권을 얻지 못합니다./ 인생은 짧고 춤추는 시간은 깁니다,/ 한 분(分)만 잃으면, 한 분만큼의 행복의 춤이/ 없어지게 됩니다, 선(善)은 빨리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빨리 춥시다, 좋다 좋다, 얼씨구……//
8부. 황혼의 장미 ㅡ東京의 金廷湜에게 이 시를 보내노라 |
실제(失題) 3 / 김억
내 귀가 님의 노랫가락에 잡혔을 때에/ 그대가 고운 노래를 내 귀에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노래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님의 맘의 꽃밭에서 노닐 때에/ 그대가 그대의 맘의 꽃밭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맘의 꽃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입이 님의 보드라운 입술과 마주칠 때에/ 그대가 그대의 보드라운 입술로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입술은 닫혀지지 않았습니다.// 내 코가 님의 스며나는 향내에 취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스며나는 향내를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향내는 맡아지지 않았습니다.// 내 꿈이 님의 무릎 위에서 고요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무릎 위로 내 꿈을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꿈은 깨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 내 맘이 깨어 두 번 그대를 찾을 때에는/ 찾는 그대는 간 곳이 없고 님만 남아 있습니다,/ 아아 이렇게 나의 살림은 밤낮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랑의 때 / 김억
첫째./ 어제는 자취도 없이 흘러갔습니다,/ 내일도 그저 왔다가 그저 갈 것입니다,/ 그러고, 다른 날도 그 모양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때는 한동안 기쁨의 꽃을 피웠다가는/ 두르는 동안에 그 꽃을 가지고 갑니다,/ 곱고도 설건마는 때의 힘을 어찌합니까,/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둘째./ 물은 밤낮으로 흘러내리고/ 산은 각각(刻刻)으로 무너집니다,// 세상의 곱다는 온갖 것들은/ 나날이 달라지며 사라집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과 함께 춤을 출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의 사랑에/ 몹쓸 때가 설움의 종자를 뿌립니다,/ 이 종자의 움을 따서 노래 부르면/ 도리어 사랑을 모르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도 그만두고 말까요.//
때 / 김억
때의 흐름으로 하여금/ 흐르는 그대로 흐르게 하여라,/ 격동(激動)도 시키지 말며,/ 또한 항거(抗拒)도 말고/ 그저 느리게, 제 맘에 맡겨/ 사람의 일 되는/ 설움의 골짜기로 숨어 흘러/ 기쁨의 산기슭을 여돌아,/ 넓다란 허무(虛無)의 바다 속으로/ 소리도 없이 고요히 흐르게 하여라./ 그리하고 언제나/ 제 맘대로 흘러가는 ‘때’ 그 자신으로 하여금/ 너의 앞을 지나게 하여라.//
죽은 기억(記憶) / 김억
언제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선 머리를 숙이고/ 고요도 하게 하염없는 생각에 잠겼는/ 옛날의 서러운 기억.// 좀도적놈처럼 삼가는 발걸음으로/ 살짝 와서는 잠잠한 맘 위에/ 지나간 그날의 먼지와 바람을/ 일으켜 놓고는 살짝 없어지는 기억.// 오늘도 해는 넘어, 가까워오는 어둠의/ 넓다란 하늘에 별 눈이 하나 둘 열릴 때,/ 어둑스러운 흐릿한 맘의 구석에서/ 혼자서 살짝살짝 걸어오는 그 기억.// 갔다가는 오고, 왔다가는 가는,/ (이렇게 해를 몇 번이나 거듭했노!)/ 머나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옛 꿈의/ 서러운 기억의 기억!//
낙엽(落葉) / 김억
산산한 게, 몸이 오싹 떨리지./ 지금 추억만은 우리의 동산은/ 달빛에 비치어 은색에 싸였다/ 자, 내 사람아, 동산으로 가자.// 갈바람은 솔솔 스며들지./ 나뭇잎에 비가 내려붓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린 꿈의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옷을 새빨갛게 벗기운 포플러는/ 바람결이 휙 하고 지날 때마다/ 검은 구름이 덮인 하늘을 향하고/ 아직도 오히려 새봄을 빌고 있다.// 오오, 내 사람아, 가까이 오렴,/ 지금은 가을, 흩어지는 때/ 흩어지는 낙엽의 우리의 소리를 듣자,/ 명일(明日)이면 눈도 와서 덮이겠다.// 가을을 만난 우리의 사랑,/ 겨울을 맞을 우리의 꿈,/ 열정이나 식기 전에 더운 키스로/ 오늘의 이 밤을 새워보자.//
전원(田園)의 황혼(黃昏) / 김억
집이면 집마다 떠오르는 연기,/ 서녘 하늘에는 곱게도 물들인 붉은 구름,/ 공중으로 올라서는 헤매며 사라질 때,/ 나뭇가지에서는 비둘기가 울고 있어라.// 안개는 숲속에서 생기는 듯이 스며서는/ 조는 듯 고요한 넓은 들을 덮으며,/ 어두워가는 밤 속에서 새 꿈을 맺으려는/ 촌락에는 들벌레 소리가 어지러워라.// 이러하여 핼금한 둥근 달이/ 하염없는 곤피(困疲)의 걸음을 이을 때,/ 나무 아래에는 시비(是非)도 없는 농인(農人)의 간담(間談),/ 저 산기슭의 교회당에서는 찬송의 노래,// 깊어만 가는 밤에는 이것밖에/ 아무 것도 들림 없이 고요하여라.//
상실(喪失) / 김억
가을의/ 샛말간 하늘에/ 한 조각의 검은 구름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떠가다가는 사라지고/ 스러졌다가는 뜨고는 한다.// 고요한 나의 밤바다의/ 고요한 한복판에는/ 이름 모를 무엇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구슬프게도 다만 혼자서/ 잔 물살을 내이고 있다.//
봄은 와서 / 김억
봄은 와서,/ 창 앞에 뜰에는 속살거리는 병아리 소리,/ 문 앞에 밖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 집 뒤의 산에는 벙벙하는 후투티 소리,/ 먼 산에는 아지랑이가 보이 하여라// 봄은 와서,/ 돌돌 흐르는 냇물의 소리,/ 철석거리는 빨래의 마치 소리,/ 살살 부는 보드라운 바람 소리,/ 하늘에는 따사한 해가 떴어라.//
유월(六月)의 낮잠 / 김억
유월의 뜨거운 낮볕은/ 남김없이 밝을 때,/ 감겨 오는 눈에는/ 푸른 하늘이 오락가락하여라.// 수풀 밖의 벌레소리는/ 희미하게도 들리며/ 말 없는 때는 가기만 하여/ 낮잠은 끝없이 깊어져라.//
9부. 북방의 소녀 |
북방(北邦)의 따님 / 김억
맑은 물결 흘러드는 황포(黃浦)의/ 고요한 바닷가에 목숨을 받아,/ 푸른 언덕의 어린 풀잎 아래서/ 남모르게 나는 자라난 따님이노라.// 떠도는 갈매기의 높게도 노래하는/ 높았다 낮았다 물결치는 벼랑가의/ 바람에 나부끼는 해당화의 향 꽃 아래서/ 어린 꿈을 혼자 깔고 누웠던 따님이었노라.// 빛나던 새벽별이 이지러지며,/ 첫 봄철의 아침볕이 곱게 빛날 때,/ 돋아나는 잔 풀밭의 첫 이슬을 밟으며/ 어린 나물과 피어나는 꽃도 뜯었노라.// 거칠은 곡조를 번갈아 바꾸어 부르며/ 양인 듯 무리지어 다니는 흰 돛의 배를/ 이른 아침 늦은 저녁에 혼자 보면서/ 즐거운 내 여름을 꿈으로 보내었노라.// 아름다운 세상의 아름다운 가슴에는/ 아름다운 따님의 설움도 숨어 있어라./ 고요한 늦은 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동무 찾는 내 노래야 섧지 않으랴.// 애닯기도 하여라 북방의 겨울이여,/ 바다는 얼어붙어 물결이 끊기고/ 흰 눈은 내려 푸른 풀밭을 덮어서/ 한때 한철의 즐거움은 자취조차 없어라.// 목숨은 짧으나 사랑은 길어라,/ 흰 옷에 검은 머리 드리운 나의 이 몸은/ 언제 벌써 이 세상의 아름다운 사랑에/ 얄밉게도 목숨과 맘을 바치고 말았어라.// 사람아, 누가 고운 따님의 가슴을 알으랴,/ 살기도 사랑으로 죽기도 사랑으로,/ 처음과 끝을 한길 같은 사랑의 목숨에/ 매달리어 죽으려는 참맘을 누가 알으랴.// 사람아, 누가 꿈에나마 알 수 있으랴,/ 하늘 눈을 울리어 눈물 짓는 사나이의/ 흐르는 맘은 때때마다 달라지지 않는가,/ 아아 믿지 말아라. 사랑을 말아라.// 맑던 하늘은 갑자기도 흐리어,/ 뜻도 아닌 소낙비는 땅을 덮게 되어라,// 아아 따님아, 웃으면서 우는 따님아,/ 맑은 하늘인 맘을 믿으려고 말아라.// 넘어가는 저녁볕이 구름을 붉히는/ 가을의 소곤거리는 바람이 하소연할 때,/ 남녘 서울로 멀리 떠난 나의 벗에게/ 얼마나 고요케도 나의 꿈을 보냈노.// 어디나 한길같이 쌓인 같은 흰 눈에/ 영구히 깊이 잠든 맘의 그믐밤,/ 생각은 있어 비록 날아간다 하여도/ 아아 북방의 외로운 따님의 가슴이야 어찌하랴.// 생각에서 생각으로 빗기어 나는/ 뜨겁고도 곱다란 곡조는 있으나/ 그것을 그려낼 말과 글은 없어,/ 내 가슴의 곡조에 울어줄 반향(反響)은 바이없어라.// 맑은 물결 흘러드는 황포(黃浦)의/ 고요한 바닷가에 목숨을 받아,/ 푸른 언덕의 어린 풀잎 아래서/ 남모르게 나는 자라난 따님이노라.//
유랑(流浪)의 노래 / 김억
흐름에 따라 돈다 땅 끝에서 땅 끝에/ 구름길 자취 없다 떠도는 외손,/ 갈바람 살살 불어 벌레 소리 애달프다,/ 생각은 끝이 없다 오늘과 내일.// 바람에 따라 돈다 가람에도 뭍으로/ 빈 들은 쓸쓸하다 홀몸의 외손,/ 먼 앞길 해는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 생각은 끝이 없다 아침과 저녁.// 흐름에 따라 돈다 땅 끝에서 땅 끝에/ 하늘에 별 빛난다 떠도는 외손,/ 풀밭에 꿈을 펴매 이 세상은 쓸쓸타/ 생각은 끝이 없다 긴 밤과 대낮.// 바람에 따라 돈다 가람에서 뭍으로/ 몸 하나 바람 없다 홀몸의 외손,/ 죽으면 남음 없어 때바퀴는 빠르다,/ 생각은 끝이 없다 죽음과 삶.//
난홈의 노래[나눔의 노래] / 김억
이 위엔 제 운명의 지배를 따라/ 없어진 과거 꿈을 좇으려 말고/ 맘 한 바 새 생애(生涯)에 새 길 잡으라,/ 한없는 먼 앞길에 난홈은 섧다.// 이 위엔 제 운명의 지배를 따라/ 애닯은 눈물만을 흘리려 말고/ 가슴과 가슴 맺자 앞길 걸으라,/ 한없는 먼 앞길에 난홈은 섧다.// 이 위엔 제 운명의 지배를 따라/ 아끼는 소 매노라 때는 흐르매/ 난홈아 저녁볕에 옛날 어디랴,/ 한없는 먼 앞길에 난홈은 섧다.// 이 위엔 제 운명의 지배를 따라/ 라인은 프름하라 때는 흐르매/ 만남아 어느 편인가 다시 잊으랴,/ 한없는 먼 앞길에 난홈은 섧다.//
망우(亡友) -S.W 군(君)의 영(靈)에게 / 김억
그대는 암만해도 올 길 없어라,/ 그대는 암만해도 돌아가셨다,/ 그대는 몸이 죽어 올 길 없어라,/ 그대는 고요하게 돌아가셨다.// 그대의 덥게 타던 가슴의 생각,/ 그대의 희멀금한 병색(病色)의 얼굴,/ 지금은 사라지어 듣기 어렵고,/ 지금은 깊이 묻혀 볼 길 없었다.// 흘려도 닿지 않는 두 눈의 눈물,/ 돌아봐도 닿지 않는 옛날의 생각/ 그대는 그러나마 잊지 않으매,/ 그대는 그러나마 알지 못하매.// 물같이 때바퀴는 흘러가는데,/ 물같이 세상 맘은 잊어 가는데,/ 그대여, 깊은 잠에 고요하여라,/ 하늘아, 그의 영(靈)에 은혜 하여라.//
삼년(三年)의 옛날 / 김억
봄철의 아지랑이 끼여 오를 때/ 옅푸른 어린 풀을 함께 밟으며/ 달콤한 첫사랑에 몸을 잊음도/ 어느덧 해를 모아 삼년이러라.// 아카시아 아래의 그대 무릎에/ 누워선 끝없는 꿈 길이 맺으며/ 내 세상의 웃음을 서로 바꿈도/ 어느덧 해를 모아 삼년이러라.// 햇볕에 낯을 붉힌 내리는 낙엽/ 함께 앉아 옛 기억을 속에 그리며/ 사랑의 가을날을 서러워한 것도/ 어느덧 해를 모아 삼년이더라.// 때 아닌 가을바람 멍에 하여서/ 애닯게도 이별을 맘 아파하며/ 뜬 기약의 만남을 속삭인 것도/ 어느덧 해를 모아 삼년이러라.// 파리한 그대 얼굴 꿈에 보고는/ 이향(異鄕)의 겨울밤을 앉아 새우며/ 유리(流離)의 쓰린 몸을 탄식한 것도/ 어느덧 해를 모아 삼년이러라.//
무덤 / 김억
꽂은 꽃이야 곱건 말건/ 붓는 눈물이야 덥건 말건/ 깊이도 자는 이의 가슴에야/ 느낄 줄이나마 있으랴.// 하늘빛이야 밝건 말건/ 돋는 해야 따스하건 말건/ 곱게도 잠든 이의 가슴에야/ 이런 생각이나마 있으랴.// 가신 이가 잠자게 누웠고/ 가려는 이 또한 모르거니,/ 무덤에서 스며 흐르는/ 곱다란 설움만 예나 이제나.// 있다는, 산다는 모든 것들은/ 한결같이 그대의 팔에 안기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철마다/ 분노(憤怒)와 즐거움도 없이 잠잠하리.// 벗이여, 젊음에 뛰노는 벗이여,/ 울다 남은 눈물이 아직도 남았는가,/ 지금 때는 때를 따라 어두워지어,/ 늙음의 저녁은 차차 가까워 오나니.//
봄의 선녀(仙女) / 김억
꺾일 줄 모르는 회색의/ 깊은 안개에 잠겼는,/ 또는 볕도 없는 흐림의/ 그윽한 음울(陰鬱)의 날에,// 내를 피우며 먼 미지(未知)의 나라로/ 오는 꽃수레의 구르는 소리에/ 하늘은 울며 땅은 흔들리어/ 가만히 푸른 길이 지어질 때,// 아름다운 볕과 고운 꿈은/ 흐득이는 분수(噴水)의 맑은 곁에,/ 님프는 꽃밭에서 헤매이며/ 어린 양(羊)은 판신(神)과 함께 놀아라.// 때소리의 긴 빗기움에/ 따스한 맘을 다같이 모아,/ 발 가에 엎드려 소곤거리나니,―/ 봄의 선녀(仙女), 평화의 님이여.//
성락(聲樂) / 김억
울려 나오는 악성(樂聲)의/ 느리고도 짧은/ 애닯은 곡조에/ 나의 사라진 옛 꿈은/ 그윽하게 살아/ 내 가슴 아파라.// 설움 가득한 악성(樂聲)의/ 빠르고도 더딘/ 애닯은 곡조에/ 뒤숭숭한 그 생각은/ 고요하게 와서/ 내 눈물 흘러라.// 가슴 울리는 악성(樂聲)의/ 넓다랗고 좁은/ 애닯은 곡조에/ 스러져가는 내 영(靈)은/ 새롭게 눈뜨며/ 그윽히 웃어라.// 스며 흐르는 악성(樂聲)의/ 높다랗고도 낮은/ 애닯은 곡조에/ 푸른 위안(慰安)의 바람이/ 한가롭게 불며/ 거리를 돌아라//
나의 이상(理想) / 김억
그대는 먼 곳에서 반득거리는/ 내 길을 밝혀주는 외로운 빛,/ 한줄기의 적은 빛을 그저 따르며/ 미욱스럽게도 나는 걸어가노라.// 그대가 있기에 쉼도 없고/ 그대가 있기에 바람도 있나니,/ 아아 나는 그대에게 매달리어/ 티끌 가득한 내 세상에서 허덕이노라.// 나는 아노라, 그대의 꽃에는/ 목숨의 흐름이 무늬 고운 물결을 짓는/ 아름다운 봄날의 꽃밭 속에서/ 화평(和平)의 꿈이 웃음으로 맺어짐을.// 나의 발은 피곤에 거듭된 피곤,/ 나의 가슴에는 가득한 새까만 어두움!/ 아아 그대 꽃 없다면, 나의 몸이야/ 어떻게 걸으며 어떻게 살으랴.// 아아 애닯아라, 그대의 꽃은/ 한 끝도 없는 머나먼 지평선 끝!/ 그러나, 나는 그저 걸으려노라,/ 눈 먼 새 외동무를 따라가듯이.//
* 시집은 83편 수록되어 있으나 77편만 검색 발췌. 6편 개인 검색 불명.
봄은 간다 / 김억
밤이로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봄바람 / 김억
하늘하늘/ 잎사귀와 춤을 춥니다.// 하늘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하늘/ 떠서 도는 하늘바람은// 그대 잃은/ 이내 몸의 넋들이외다.//
코스모스 / 김억
하이얀 코스모스 혼자 피어서/ 늦가을 찬 바람에 시달리우네/ 불서러운 그 경상(景狀) 하도 애연해/ 손잡으니 가엽다, 꽃지고 마네.//
비 / 김억
포구 십 리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의 한나절을/ 모래알만 울려 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 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魚泳島)라 갈매기떼도/ 지차귀가 축축히 젖어/ 너흘너흘 날아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 리/ 배를 타면 어디를 가노/ 남포 사공 이 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삼수갑산(三水甲山) / 김억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 첩첩에 흰 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蜀道難)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 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연분홍 / 김억
봄바람 하름 하름 넘노는 길에/ 연분홍 나팔꽃이 눈을 뜹니다.// 연분홍 날래날래 못내 반가와/ 나비는 훌레훌레 춤을 춥니다.// 봄바람 하름 하름 넘노는 길에/ 연분홍 나팔꽃이 나부낍니다.// 연분홍 날래날래 바람에 지니/ 나비는 히끅히끅 돌아섭니다.//
사공의 아내 / 김억
모래밭 스며드는 하얀 이 물은/ 넓은 바다 동해를 모두 휘돈 물.// 저편은 원산 항구 이편은 장전(長箭)/ 고기잡이 가장님 들고나는 길// 모래밭 사록사록 스며드는 물/ 몇 번이나 내 손을 씻고 스친고.// 몇 번이나 이 물에 어리었을까?/ 들고 나며 우리 님 검은 그 얼굴.//
조약돌 / 김억
하소연 많은 열여덟 이내 심사(心思)/ 풀을 길 없이 선창(船倉)가 홀로 나가/ 하나둘 조약돌을 모으노라면/ 어느덧 여름날은 넘고 맙니다.// 떠도는 배는 한바다의 저 먼 곳/ 외대백이 흰 돛대 행(幸)여 보일까/ 손작란(作亂) 삼아 조약돌 헤노라면/ 어느덧 외대백이 잊고 맙니다.//
물레 / 김억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生)은 시름에 돈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외마디 겹마리 실마리 풀려도/ 꿈 같은 세상은 가두새 얽힌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언제는 실마리 잠자던 도련님/ 인제는 못 풀어 날 잡고 운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원수의 도련님 실마리 풀어라/ 못 풀 걸 왜 감고 날다려 풀리나.//
님 따라 나서자 / 김억
역천(逆天)을 부를것이 순천(順天)을 받들것이/ 대장부 세상났다가 그저 옐줄 있는다.// 이목숨 귀할시고 모두들 아낀다면/ 일월(日月)의 충의도고는 보잘것이 있는고.// 설사(設使)에 죽어라도 충혼(忠魂)은 그저남아/ 사악을 눕히기전야 가실줄이 있과저.// 신풍(新風)이 부는고야 육탄이 튀는고야/ 풍탄(風彈)이 튀는곳에 거칠것이 없나니.// 맘들을 한데모아 역천(逆天)을 부서지고/ 님따라 손높이들고 나설때는 왔나니.//
오다 가다 / 김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 리 포구(十里浦口)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 천 리(水路千里)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황해(黃海)의 첫봄 / 김억
1/ 양지(陽地)귀 잔디밭에/ 속잎 푸르고/ 바다엔 얼음 풀려/ 오가는 흰 돛/ 어야데야 배소리/ 하늘에 찼소// 하늘 중천(中天) 내 천자(川字)/ 행렬(行列)을 지어/ 넓은 들을 날도는/ 기럭 그기럭/ 기러기는 왔노라/ 잘도 울것다.// 2/ 십리포구(十里浦口) 질펀타/ 두둥실 뜬 배/ 고기잡이 노래에/ 포구(浦口) 아씨네/ 제 속은 딴 데 두고/ 웃지만 마소// 무심(無心)타 갈매기도/ 한(限)껏 목놓아/ 여저기 노래노래/ 쌍쌍(雙雙)이 돌며/ 새라 새 봄 제 흥(興)에/ 잘도 놀것다.//
신작로(新作路) / 김억
행객(行客)은 오고가고 가고옵니다./ 자욱은 자욱밟아 티끌이외다,/ 바람부니 그나마 티끌 납니다./ 님이어, 이 한 생(生)은 신작로(新作路)외까.// 신작로(新作路)는 이내 맘 분주도 하이/ 밤낮으로 행객(行客)은 끊일 때 없네,/ 먼지 속에 발자욱 어지러우니/ 꿈타고 지내신 님 어이 찾을고.// 행(幸)여나 님 오실까 닦은 신작로(新作路)/ 낯설은 행객(行客)들만 뭐라 오갈고/ 쓸데없는 자욱에 먼지만 일고/ 기두는 님 행차(行次)는 이 날도 없네.// 신작로(新作路)엔 자동차(自動車) 달아납니다,/ 길도 없는 바다를 배는 갑니다,/ 빈 하늘 푸른 길엔 새가 납니다,/ 임이여 어느 길을 저는 가리까.// 저기서 풀밭 속에 길 있습니다/ 외마디 자욱길로 어지럽쇠다,/ 아무도 안다니어 고요하외다,/ 임이여, 가십시다, 저 길이외다.//
눈 올 때마다 / 김억
하얀 눈 볼 때마다 다시금 생각나네/ 어린적 겨울 밤에 옛날 듣던 이야기./ 송이 송이 흰 눈은 산(山)과 들에 퍼 불제/ 다스한 자리속에 찬 세상(世相)도 모르고―.// 산(山)에는 신령(神靈)있고 물에는 용왕(龍王)님이/ 다같이 맡은 세상(世上) 고로이 다스리매/ 귀(貴)여워라, 산(山)새는 노래로 공중(空中) 날고/ 고기는 넓은 바다 맘대로 헴치느니.// 같은 해 고은 달을 이 인생(人生) 즐길 것이/ 하늘에 홀로 계신 전능(全能)하신 하느님/ 모두다 살피시며 죄(罪)와 벌(罰) 나리시매/ 세상(世上)은 평화(平和)스레 이렇듯 일없느니.// 집을 떠나 몇해나 이 세상(世上) 헤맸던가,/ 거울 보니 아니라 얼굴도 주름 졌네/ 까닭스런 세고(世苦)에 부대낀 탓이런가/ 나는 지금(只今) 비로소 이 인생(人生)을 묻노라.// 산신령(山神靈)과 용왕(龍王)님 어디로 도망가니/ 전능(全能)한 하느님도 본색(本色)이 드러났네,/ 빈 하늘 내 천지(天地)라 비행기(飛行機) 높이 날 제/ 이 지상(地上) 볼지어다 하루나 평안(平安)한가.// 시퍼런 하늘 오늘도 눈 기색(氣色)은 도는데/ 늙으신 어머님은 손자(孫子)를 데리시고/ 북방(北邦)의 같은 겨울 눈 쌓인 칩은 밤에/ 아직도 그 이야기 되풀이 하실런고.//
김억(金億, 일본식 이름: 岸曙生, 1896년~ ?) 시인
호는 안서(岸曙), 본관은 경주,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필명으로는 안서(岸曙) 및 안서생(岸曙生), A.S., 석천(石泉), 돌샘 등을 썼다.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김억은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저작물 수가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국 전쟁 때인 1950년 9월 10일 납북되었고,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출처: 위키백과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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