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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錦江)>은
실존인물 전봉준과 가공인물 신하늬를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을 주제로 백제에서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이 시를 발표한 1967년까지
민중 역사를 다룬
전 3부 26장의 장편서사시다.
1부는 1, 2로,
2부는 제1장부터 26장까지,
3부는 後話<1>, <2>로 구성 되었다.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래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가 되면 그 하늘 아래로 오포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치는 동짓날/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막히는 삼복(三伏) 순이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매밋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2//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새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제1장// 반도는,/ 가는 곳마다/ 가뭄과 굶주림,/ 땅이 갈라지고 서당이 금갔다./ 하늘과 땅을/ 후비는 흙먼지.// 1862년/ 전봉준이 여덟살 되던 해/ 경상도 진주에서/ 큰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세금./ 이불채 부엌세간 초가집/ 다 팔아도 감당할 수 없는/ 세미(稅米), 군포(軍布),/ 마을 사람들은 지리산 속 들어가/ 화전민 됐지.// 관리들은 버릇처럼 또/ 도망간 사람들 몫까지/ 이징(里徵), 족징(族徵)했다./ 총칼 앞세운 진주병사/ 백낙신.// 3천의/ 농민들이 대창 들고 관청에 몰려와/ 병사 내쫓고 아전 죽이고/ 노비문서 불살라버렸다.// 정부는 병사를 잡아/ 더 좋은 기름고을 벼슬을 주고,/ 다음해, 윷놀이가 한창인 정월 대보름날/ 진주농민 마흔일곱 명을 묶어/ 교수했다.// 1871년/ 경상도 문경에서/ 농민군 2천명이/ 동학교도 이필의 지휘로/ 관아를 습격, 죄수들을 석방하고/ 노비문서 불사르고 창고를 때려부숴/ 쌀을 꺼내다가 농민에게 나눠줬다.// 황해도,/ 평안도,/ 이곳 저곳에서/ 농민반란은 터졌다.//
제2장// 짚신 신고/ 수운은, 3천리/ 걸었다.// 1842년/ 경상도 땅에서 나/ 열여섯 때 부모 여의고/ 떠난 고향.// 수도 길./ 터지는 입술/ 갈라지는 발바닥/ 해어진 무릎// 20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딩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 학정/ 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 2천년 전/ 불비 쏟아지는 이스라엘 땅에선/ 선지자 하나이 나타나/ 여문 과일 한가운델/ 왜 못박혔었을까.// 3천년 전/ 히말라야 기슭/ 보리수나무 투명한 잎사귀 그늘 아래에선/ 너무 일찍 핀/ 인류화(人類花) 한 송이가/ 서러워하고 있었다.// 1860년 4월 5일/ 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 수운은,/ 하늘을 봤다./ 바위 찍은 감격, 영원의/ 빛나는 하늘.//
제3장// 어느 해/ 여름 금강변을 소요하다/ 나는 하늘을 봤다.//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을/ 갈가리 찢어/ 꽃 풀무 치어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죽음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이다.// 어제/ 발버둥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는 세상을 밟아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아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는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야/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는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버린/ 오, 인간정신미의/ 지고한 빛.//
제4장// 수운은/ 왕명으로 체포되어/ 대구 감영 속 감금되었다가,/ 1864년 3월 10일/ 대구 노들벌에서 순교했다./ 해월이 옥리를 매수하여/ 수운을 탈옥시키려고,/ 옥 안에 들어섰을 때, 수운은/ 담뱃대 하나 해월에게 쥐어주며/ 빨리 돌아가라 할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주막집,/ 등잔불 아래 마주앉은/ 문경 접주 이필, 제 2 세 동학교주 해월,// 선사에게서 받은 담뱃대를 쪼개니/ 종이 심지./ 종이 심지를 펴보니/ 깨알 같은 붓글씨,// 그대 마음이 곧 내 마음이어라/ 우리의 죽음은 오히려 지붕 떠받드는/ 기둥으로 영원한 것.// 나는 고이 하늘의 뜻에 따르려노니/ 그대는 내일 위해 어서/ 먼 땅으로 피하라.// <등명수상(燈明水上) 무겸극(無謙隙)/ 주사고형(柱似枯形) 역유여(力有餘)// 오(吾)는 순수천명(順受天命)하니/ 여(汝)는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 들에선 농부들이/ 거름을 퍼내고/ 거름 무덤에선/ 아침 햇살 속/ 흰 김이 무럭 피었다.// 장꾼으로 변장한/ 해월, 이필, 그리고 몇 사람은/ 상주의 들을 거쳐/ 문경 새재 아흔아홉 굽이 휘어/ 태백산을 찾았지.// 왕실에선 천냥의 현상금 걸어/ 해월을 수배하고./ 일찍이 수운은/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노비도 농사꾼도 천민도/ 사람은 한울님이니라// 우리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니라/ 우리의 내부에 한울님이 살아 계시니라/ 우리의 밖에 있을 때 한울님은 바람,/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울님을 깨달을 뿐,/ 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하니라./ 모든 중생이여, 한울님 섬기듯 이웃사람을 섬길지니라.// 수운은/ 집에 있는 노비 두 사람을/ 해방시키어/ 하나는 며느리/ 하나는 양딸,// 가지고 있던/ 금싸라기땅 열두 마지기/ 땅없는 농부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제5장// 진달래,/ 지금도 파면, 백제 때 기왓장/ 나오는 부여 군수리/ 농사꾼의 딸이 살고 있었다.// 송화가루 따러/ 금성산 올랐다/ 내려오는 길/ 바위 사이 피어 있는 진달래/ 한 송이 꺾어다가/ 좋아하는 사내 병석 머리맡/ 생화 해줬지.// 다음 담 날/ 그녀는 진달래,/ 화병에서 뽑아, 다시/ 금성산 기슭/ 양지쪽에 곱게 묻어줬다.// 백제,/ 천오백 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진달래./ 부소산 낙화암/ 이끼 묻은 바위서리 핀/ 진달래,/ 너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었다.// 숨결을 들었다,/ 손길을 만졌다,/ 어제 진/ 백제 때 꽃구름/ 비단 치마폭 끄을던/ 그 봄하늘의/ 바람소리여.// 마한 땅,/ 부리달이라는 사나이가/ 우리 아들 다섯살배기를 맴매했다./ 귓가에 희미한 먹이 졌다.// 귓가의 먹을 본 동네 할아버지/ 아소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흙길에 앉아서 울었다.// 마을 앞엔 정자나무가 있었고/ 정자나무 옆엔 두렛마당,// 동네 할아버지 아소는 부리달을/ 두렛마당에 불러다 놓았다./ 흙바닥에 나무개피로 조그만/ 동그라미 그어놓고 부리달로 하여금/ 사흘 밤낮을, 동그라미 속에 서 있게/ 벌줬다.// 아소도 그 옆 또하나의/ 조그만 동그라미 그어놓고/ 사흘 밤낮을 서서, 밤이슬 맞으면서/ 함께 울었다.//
제6장//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 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 왕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꽃.//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을/ 아침 저녁 나누었다.// 가을이면 영고, 무천,/ 겨울이면 씨름, 윷놀이,/ 오, 지금도 살아있는 그 흥겨운/ 농악이여.// 시집가고 싶을 때/ 들국화 꽂고 꽃가마,/ 장가가고 싶을 때/ 정히 쓴 이슬마당에서/ 맨발로 아가씨를 맞았다./ 아들을 낳으면/ 온 마을의 경사/ 딸을 낳으면/ 이웃마을까지의 기쁨,// 서로, 자리를 지켜 피어나는 꽃밭처럼,/ 햇빛과 바람 양껏 마시고/ 고실고실한 쌀밥처럼/ 마을들은 자라났다.// 지주도 없었고/ 관리도, 은행주도,/ 특권층도 없었었다.// 반도는,/ 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백성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늙으면 마을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반도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의 청춘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 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올라와/ 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산짐승, 유한 약탈자/ 쫓기 위해 백성들 문밖 세워뒀던 문지기들이,/ 안방 기어들어와 상전노릇 하기/ 시작한 것은,// 이조 5백년의/ 왕족,/ 그건 중앙에 도사리고 있는/ 큰 마리낙지.// 그 큰 마리낙지 주위에/ 수십 수백의 새끼낙지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정승배, 대감마님, 양반나리, 또 무엇// 지방에 오면 말거머리들이/ 요소요소에 웅거하고 있었다/ 관찰사, 현감, 병사, 목사,// 마을로, 장으로/ 꾸물거리고 다니는 건 빈대,/ 봉세관, 균전사, 전운사, 아전, 이속, 관세위원/ 그들도 벼슬은 벼슬이었다.// 벼슬자리란 공으로 들어오지/ 않는 법,/ 밑천을 들였으면/ 밑천을 뽑아야,// 그리고 지금이나/ 예나, 부지런히 상납해야/ 모가지가 안전한 법,// 그래서 큰 마리낙지 주위엔/ 일흔 마리의 새끼낙지가,// 일흔 마리의 새끼낙지 산하엔/ 칠백 마리의 말거머리가,// 칠백 마리의 말거머리 휘하엔/ 만 마리의 빈대 새끼들이,// 아래로부터, 옆으로부터,/ 이를 드러내놓고 농민 피를 빨아/ 열심히, 상부로 상부로/ 올려 바쳤다.// 큰 마리낙지는/ 그럼 혼자서 살쪘나?// 오늘, 우리들 책 끼고/ 출근 버스 기다리는 독립문 근처/ 상전국 사신의 숙소 모화관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무슨 호텔, 아니면 무슨 대사관,// 해마다 왕실은/ 33만냔의 금은보활,/ 청나라 황실에 상납./ 그리고 37만 냥의 돈 들여/ 상저국 사신, 술과 고기와 계집으로 접대했다.// <혹, 노예들에 의해/ 우리 왕실 밀려나게 됐을 때/ 즉각 귀국 군대로/ 도와주옵소서.>// 신라왕실이/ 백제, 고구려 칠 때/ 당나라 군사를 모셔왔지./ 옛날 사람 욕할 건 없다.// 우리들은 끄떡하면 외세를/ 자랑처럼 모시고 들어오지.// 8.15후, 우리의 땅은/ 디딜 곳 하나 없이/ 지렁이 문자로 가득하다.// 모화관에서 개성 사이의 행길에 끌려나와/ 청나라 깃발 흔들던 눈먼 조상들처럼,// 오늘은 또, 화창한 코스모스 길/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불쌍한 장님들은, 대중도 없이 서양깃발만/ 흔들어댄다.// 허나/ 다녀가는 높은 오만들이여/ 오해 마시라,/ 그대들이 만져본 건 역사의 껍데기,// 알맹이는 여기/ 언제나 말없이 흐르는 금강처럼/ 도시와 농촌 깊숙한 그늘에서/ 우리의 노래 우리끼리 부르며/ 누워 있었니라.// 누구였던가, 무엇에 당선만 되면/ 다음날 당장 미국에건너가/ 더 많은 동냥, 얻어올 수 있다고 장담했던/ 정치거지는,// 내 진실로 묻노니 그대들이 구걸해 온/ 동냥돈이, 단 한 번만이라도 농민들의/ 밥사발에, 쌀밥으로 담겨져본 적이 있었는가.// 후진국의 땅은 포도주,/ 포도주는 썩어야 맛이 날가./ 빠다와 재즈와 딸라와/ 양키이즘으로, 우리의 땅은/ 썩혀졌을까.// 원조물자, 딸라는 효모,/ 발효한 항아리에서 포도주 빼가기에/ 바쁜 넥타이 맨 장사군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방마다에서 한국의 토산물/ 흥정되고, 자본의 앞잡이들은/ 한국지도 위 등불 밝혀놓고/ 분주히 주판알 튀긴다// 자본이 벨을 누르면/ 중앙청 정승 대감들이/ 맨발로 달려와/ 머리 조아리고,// 다음날 그들/ 은행실 벼슬아치들은/ 호남평야 원주민의 쌀값을/ 매폭 인하.// 자본실이 가지고 들어온/ 설탕값을 스물세 곱으로 올린다.// 달라의 냄새란 좋은 것,/ 미나리처럼 쭉쭉 뻗은/ 코리아산 여대생들/ 라이프지 끼고 그 근처 와/ 온종일 빙빙 돌지.// 눈먼/ 백성들이여,/ 가도 가도/ 끝이 없을/ 눈먼 행렬이여,// 오늘의 하늘 아래/ 반도에 도사리고 있는/ 큰 마리낙지, 작은 마리낙지,/ 새끼 거머리들이여,// 눈도 코도 없이/ 벌거벗고 대낮 거리에 나온/ 화냥년들과 놀아나는/ 부잣나라 지키는 문지기들이여,// 갈라진 조국./ 강요된 분단선,// 우리끼리 익고 싶은 밥에/ 누군가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너와 나를 반목케 하고/ 개별적으로 뜯어가기 위해/ 군가가 우리의 세상에/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4월달, 우리들, 밥은/ 익었었는데/ 누군가가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연인이여, 너와 나의 쌀밥에/ 누군가 쇳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구나.//
제7장//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이 시간의 물결 위/ 잠 못 들어/ 뒤채이고 있는/ 병 앓고 있는 사람들의/ 그 아픔만이/ 절대한거.//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니고/ 철들면서부터/ 그 지루한/ 30년, 50년을/ 굶주려본 사람은/ 알리라,// 굶주리고 아들 딸애들의/ 그, 흰 죽사발 같은/ 눈동자를,/ 죄지은 사람처럼/ 기껏 속으로나 눈물 흘리며/ 바라본 적이 있은/ 사람은 알리라,// 뼈를,/ 깎아 먹일 수 있다면/ 천 개의 뼈라도 깎아 먹여주고/ 싶은,/ 그 아픔을/ 맛 본 사람은 알리라.// 이미 끝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라,/ 이미 죽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어라.//
제8장// 하늬는/ 한쪽 발을 조금/ 절었다.// 세살 때/ 김진사가 마당에/ 내던졌었다.// 대문 여닫는 소리/ 박쪽 굴러다니는 소리/ 검불이 이리저리 날리고// 먼 마을에서/ 대감집 닭이 세월도 없이/ 길게 울 때,// 이런 땐/ 틀림없이 나무뿌리/ 소나무 껍질, 일찍 나온 냉이/ 쑥뿌리 찾는 굶주린 행렬들이/ 산과 들판/ 시래기처럼 하이얗게/ 널리고,// 누구네 집 재를 내는/ 머슴은/ 대왕펄 보리밭에서/ 부옇게 재 뒤집어쓰고/ 재채기에 체머리 흔들고 있으리라.// 그렇지/ 또 있다./ 갈대꽃 날리는 강언덕/ 옷보자기 낀 아낙네가/ 치맛자락 날리며,/ 지금도 나룻배,/ 기다리고 있겠지,/ 맞바우.// 하늬는,/ 김진사네 집 머슴/ 돌쇠가 주워다 기르고 있었다.// 세 살짜리는/ 날마다/ 배가 고팠다,/ 아랫목에 묻어둔/ 콩강개도 없이// 그날은/ 김진사 집에/ 서울 사는 정대감이 오시는 날.// 동네 노소부녀 다 동원해서/ 한달 전부터 길을 닦고/ 환영준비에 바빴다./ 마을 사람은 돈있는 사람의/ 종이었으니까.// 배가 고픈 하늬는/ 엎디어서 울었다/ 코를 땅에 박고/ 지치도록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연놈들이 말 잘 안 듣는다고/ 노발대발, 치알치는 유첨지를 호령하던/ 김진사가 신발한 채 행랑방에 뛰어들어/ 우는 아이 마당 박으로 집어던져/ 돼지우리 속 떨어졌다.// 삼신할머니가 받았음일까,/ 발목 복숭아뼈가 조금 삐져나왔을 뿐,/ 우는 소리가 뚝 그치고/ 한 손으로 머리 긁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날부터 하늬는/ 부소산 너머 뒷개 사는/ 趙할머니가 앞치마에 꾸려다/ 길렀다.// 조할머니의 남편은 광해군 때/ 애매한 역모죄로 귀양가 죽었다,/ 더없이 선량한 선비, 눈이 너무/ 맑아서 죄지을 줄 모르는 선비는/ 돼지죽 속 진주처럼 밀려나는 법일가.// 하늬는 열두살 나던 해/ 조할머니를 잃었다./ 아홉 해 동안 조할머니는/ 서기 어린 하늬의 뇌 속에/ 한서, 불경, 수십권을 읽혔다.// 하늬의 아버지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다,/ 비가 오는 날, 돌쇠 앞에/ 흠씬 젖은 여인이 나타나/ 무명보자기에 싼 걸/ 맡기고 갔다.// "이 아이 조상은 묻지 말아/ 주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만/ 보살펴주세요./ 은공 잊지 않겠어요,/ 혹 못 돌아오더라도./ 이름은 하늬예요,/ 성은 신."//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무명보자기와, 몇닢의/ 동전 방바닥에 놓고/ 빗속을 사라졌다.// 아기의 손엔/ 콩알만한, 노리개 은방울이/ 쥐어져 있었다.// 하늬는,/ 철들면서부터 돌쇠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의 몸에서, 콩알만한/ 그 수수께끼 같은 노리개 은방울이/ 떠날 날 없었듯.//
제9장//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의 구름.//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 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무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불쌍할 뿐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석양,/ 읍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하늬는 기다리고 있었다.// 향나무가 두 그루 미루나무가 하나/ 무덤이 밭 가운데 있었다.// 스물다섯에 만난 여자,/ 그리고 일년을, 깨알 쏟아지듯/ 다정하게 살림한 여자./ 하늬는 괴로웠다,// 벌거벗었던 마누라의/ 붉은 육체,/ 몸부림치고 있었다/ 흐느끼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늙어빠진/ 김진사와// 그러면 그 김진사의 꼬임으로?/ 천둥번개 우르렁거리고/ 홍수같은 소나기 밤새/ 퍼붓던 어느날 밤/ 그녀는, 하늬의 품속에서/ 무서운 이야길/ 고백했었다./ 그리고 자길 죽여달라고/ 가슴 쥐어뜯으며/ 통곡했었다.//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인가,/ 눈을 뜨지 못한 짐승,/ 그렇다,/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 눈 뜨지 못한 짐승들이/ 사람 탈을 쓰고/ 밀려가고 있는가.// 허나 어찌할 건가/ 우리는 또 무언가./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저 여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핏속서 저러고 싶어/ 꿈틀거리고 있을 건가.// 그렇다면/ 봇물을 막는 뚝이여/ 너는 죄인./ 한 생명을 독점하려는/ 소유욕이여/ 네가 죄인.// 터놓아라. 강물./ 제멋에 이리저리/ 흘러다니도록,/ 터놓아라, 강물.// 하늬는 기다렸다./ 두 남녀의/ 그 목줄기에 솟았던/ 굵은 심줄의 가련함을/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늬는 하늘을 봤다/ 영원의 하늘,/ 내것도,/ 네것도 없이,/ 거기 영원의 하늘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늬의 발밑엔,/ 꿈틀거리던/ 두 마리의 버러지.// 그렇다,/ 불쌍하달밖에 없었다/ 자기의 생 영위키 위해/ 삐걱비걱 땀 흘리며/ 하루를 숨쉬던 허리.// 내것/ 네것/ 없는 하늘 소리가/ 무한에 와서/ 무한으로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 수숫잎을/ 흔들면서 한무더기가/ 지나간다.// 오, 아름다운 노을/ 저 노을을 볼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아름다운 하늘/ 저 노을을 볼 때 어떻게 이 세상,/ 서러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늬는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같이 투명한 마음으로./ 한덩이의 하루살이떼가/ 원무하여 풀밭으로 쏟아진다,// 목화밭과 수수밭 사잇길에서/ 그녀는 나타났다,/ 조기를 한 꾸러미 들고 있었다.// 이쪽을 보았다/ 금강의 낙조 속에서/ 보았다.// 불빛이 튀는 걸까/ 먼빛으로도 그건/ 탄력있는 징그러움이었다.// 웬일일까,/ 그녀는 돌아서서 뛰었다/ 조기 꾸러미를 논배미 던지며/ 달렸다.// 살 맞은 뱀./ 어디로 숨는 걸까,/ 무얼 보았단 말인가/ 절벽./ 먹구름,/ 고향,/ 돌, 절벽.// 그녀가 솔밭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뛰기 시작했다.// 콩밭이 지나갔다,/ 황토의 흙, 뫼, 대추나무,/ 우물바닥이 지나갔다,/ 척추 퍼붓는 땀의 비,/ 목화밭, 언덕,/ 소나무 숲, 개울,// 강이 보였다,/ 흰 물굽이,// 언덕 위 바위,/ 바위의 싸늘한 감촉,// 두 짝의 흰/ 고무신을 보았다.// 물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이름모를 새가/ 날고 있었다,// 강 건너 언덕에선/ 황소가 풀을 뜯고.//
제10장// 가을이다./ 하늘에는/ 흰구름이 두 송이/ 열차 속 사귄 손님처럼/ 속삭이며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북한산 골짝/ 머루,/ 도토리, 다래,/ 개암,/ 열매 터지는 소리/ 버섯,/ 억새, 통통 여문 벌레 소리.// 하늬는/ 가을 산을/ 헤매고 있었다.// 허리엔/ 두 켤레의 짚신/ 그리고 괴나리 봇짐.//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여인,/ 단풍 물든 자작나무 가지를 헤치며/ 옷보자기 기고/ 산속에 나타난 궁녀.// 맑은 하늘 밑/ 물건 없는 산속을/ 수놓은/ 하늘거리는 짐승,// 땅의 끝에서/ 땅의 끝으로/ 피란길 떠나는/ 행색이었을까.// 지친 이마,/ 쏟아진 어깨,// 하늬를 보고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때까치가/ 머리 위 울었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날리는/ 붉은 단풍잎은/ 날짐승인가,/ 전설인가,// 금빛 꾀꼬리가/ 한 쌍/ 영원의 공간 속을/ 횡단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을을 열어놓은/ 산골짜기에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바위 붙들고/ 그녀가/ 멎어섰다./ 한쪽 무릎 접으며/ 다소곳 앉았다.// 산속에 핀/ 무지개./ 향내가 골짝을 흔들었다./ 눈빛이/ 바위 속 젖어들었다.// 보랏빛 들국화/ 한송일 꺾어 들고/ 하늬는 다가갔다./ 바위 위 놓여 있는/ 여인의 손 위/ 자기 손을 포개 얹었다.// 다스운 살결,/ 인의 마음은/ 높게 물결치고 있었을까.// 윤기 짙은/ 검은 머리 위/ 굽어 든 하늘.// 하늬는 여인의/ 숱 많은 머릿다발 속에/ 보랏빛 들국활/ 꽂아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입가엔/ 눈물처럼 스며 밴/ 미소.// 얼마가 지났을까,/ 억겁쯤 지났을까,// 그녀는 눈을 떴다/ 미소./ 발밑 억새꽃 한 모감/ 뽑아/ 공손히 두 팔 드려/ 남자에게 바쳤다.// 하늬는/ 억새꽃을 받아/ 입에 물고,/ 여인의 손목 쥐며/ 얼굴 들여다보았다.// 흘러가는 강물./ 가까운 거리에서/ 원초스런 눈짓으로/ 일진, 일퇴,/ 속삭이고 있는/ 둘의 눈동자,/ 열려있는 창문이었다./ 자기들의/ 내실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열려있는 창문/ 둘이서, 시간을 거스르며/ 서정을/ 두레박질하고 있었다.// 사슴이 이따금 찾아와/ 입술 적시고 가는/ 숲속의 호수,// 열두 개의 보석을/ 쪼개고 들어가면,/ 자리하고 있을/ 이슬 젖은 선녀의/ 안마당,// 지나간 바람과/ 내일의 하늘이/ 사이좋게 드나들고 있을/ 투명한 하늘,// 이야기가/ 소용없었다/ 촉촉히 젖은/ 둘의 입술,/ 가늘게 떨리면서/ 열렸단 멎고/ 열렸단 말 뿐,// 손과 손/ 마음과 마음/ 역사와 역사는/ 얽혀 흐르면서/ 뼈 없이 녹아,/ 구석과 구석을 적시고/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여/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해조(諧調)의 음악이 되어// 무한한 공간을/ 흘러가고 있었다.//
제11장// "궁에서/ 도망나오는 길이에요/ 눈독들이는 그 늙은이들의/ 입김이 싫어 못배기겠어요./ 추석이 지나니 고향 생각도 나고./ 아버지 장사지내러 왔었어요,/ 제 고향은 황해도 해주.// 경복궁 개축공사 부역일에/ 아버지가 끌려왔었어요,// 육십 넘은 아버지./ 짐하다 바위 밑 깔려/ 사하셨대요,// 한강가/ 제 손으로 묻어드렸어요./ 돌아가는 길 어느 노파에 끌려/ 관으로 들어갔죠."// "우물 점이 있군요,/ 당신의 이마엔,/ 언제부터 그 하늘의 그늘/ 생겼는지 기억하세요?"//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성이 도장印자에요/ 이름은 진아."// "이상하군요, 어젯밤 나는/ 삼청동 객사에 묵으면서/ 꿈을 꿨소.// 나라 위 자욱히/ 안개가 덮여 있더군,/ 고구려 성의 왕관을 주웠어요/ 휘황찬란한.// 금강산에서 내려왔다는/ 흰말이 내 앞에 무릎꿇더군./ 그래 신발 대신 왕관을 신었는데/ 한쪽 발에 신을 신이 없어/ 걱정하다 잠을 깼소."// "저도 꿈을 꿨어요/ 백제 땅 금강이래요.// 목욕하고 나오다/ 모래밭에서/ 사슴의 뿔을 얻었어요//.그 사슴의 뿔이 갑자기/ 용이 되어 하늘로 꿈틀거리며/ 오르더군요.// 선생님, 저는 지금/ 도망가는 몸이에요./ 고향도 안되고/ 어디 가면?"// "우스운 인연이군요/ 고구려의 밭,/ 백제의 씨,// 우리들의/ 편안할 곳은 지금/ 아무데도 없으오./ 하늘과 땅,/ 눈먼 구데기처럼/ 땅에 엎디어 매질 받으며/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뿐/ 벙어리가 된/ 노예들의 땅.// 그러나,/ 가십시다. 진아라고 했죠?/ 금강 언덕/ 초가삼간.// 아직/ 차령산맥 남쪽에/ 서기(瑞氣)가......"// 석양./ 가랑잎 위에서, 돌의 알몸뚱이는/ 꽃뱀처럼 얽혀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을의,/ 바람과 햇빛과 산속의/ 정기를 발아들이면서, 둘의 피는/ 음악처럼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설악산/ 양양골에선/ 해월이 양지밭에 앉아/ 짚신을 삼고 있었다.//
제12장// "독일 윈극장에선/ 교향곡 [운명]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손과 귀,/ 베토벤, 그는 1872년에 죽었던가,/ 그 음악은 이조말의 반도 하늘에도/ 메아리쳐 오고 있었을까,// 베트남 정글 속에선,/ 불란서 식민지 침략군 맞아 싸우는/ 원주민의 우렁찬 함성,// 일본에선/ 2백년의 봉건쇄국주의가/ 문을 깨치고/ 미일수호조약을 체결,/ 기름기 오른 군벌 자본가들이/ 요정에 앉아 공장을/ 설계하는 날,// 경복궁에선/ 조대비가, 중국 곤륜산서 따온/ 사슴 사향,/ 양지바른 대청마루앉아/ 천산남로 거쳐온, 중국상인과/ 흥정하고 있을 때.// 1845년,/ 전봉준은/ 서해가 보이는 고부 땅/ 두승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내려오는/ 농민의 아들,/ 키는 절구통 같은 오 척,/ 시원한 이마/ 맑고 두리두리한 눈동자가/ 벌어진 어깨 위에서 빛났다.// 편안한 코,/ 우렁우렁한 음성은/ 듣는 사람의/ 살 속에 스몄다./ 어려서부터/ 말이 없었는 편.// 서당에서 책끼고/ 돌아오는 길,/ 양지쪽 메운/ 동네 아이들의 맨발과/ 두 줄기 콧물 보면,// 함께 뛰어들어/ 자치기, 연날리기,/ 말타기, 씨름을/ 이끌었다.// 고욤나무,/ 대나무가 많은 마을/, 병으로 십여년 누워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농사일도 하고/ 서당 훈장일도 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어/ 이따금/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추석날이면/ 국화,/ 칠석날이면/ 참외,// 세월은 갔다./ 철이 들수록/ 그는 말수가 더/ 적어갔다.// 어느날,/ 삼례장 갔다 오는 길/ 길가 주막집 들러/ 막걸리 두 대접 마시고/ 나오니 누군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충청도, 동학접주 서장옥,/ 첫눈에 썩/ 뛰어난 그의 인품에/ 놀란 서장옥이,/ 부지런히 풋고추 고추장 찍어/ 입가심하고 뒤를 Ek라나섰다.// 밀밭길 걸으면서/ 열혈파 서장옥은 동학 얘기를 했다./ 소맷속서 꺼내 주는/ 필사본 동경대전에서/ 들기름 냄새가 풍겼다.// 개화정변에 실패,/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상투 깎고 어두운 마음/ 동경 은좌거리를/ 걸어오고 있을 때,// 1888년/ 전봉준은, 서장옥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했다.// 태백산 속/ 은신해 있던 해월이/ 보은으로 나왔다./ 나흘을 걸어 보은 땅/ 속리산 기슭 초가집에서/ 전봉준은 해월을 만났다.// 수중 십만리/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가시밭길 삼만리/ 맨발로 걸어온 사람의/ 얼굴이었을까// 나무뿌리 같이 드러난,/ 뼈로 얽어놓은/ 육신,/ 그 속에서/ 하늘이 주었을까,/ 깊은 눈동자만, 조용히/ 세상을 뚫어보며/ 빛나고 있었다.// 해월은,/ 1898년 6월 2일/ 서울 광화문밖 형장 교수대에서/ 순교하던 일흔두 살,/ 34년간을, 탄압에 쫓기며// 동학을 물고/ 전국 방방곡곡/ 농어촌 찾아/ 노동자를 조직,/ 포교했다.// 상여꾼,/ 장돌뱅이,/ 거지,/ 엿장수/ 로 변장하고// 어느 여름/ 동학교도 노인 집에서/ 저녁상 받았다.// 수저를 들으려니/ 안방에서 들려오는/ 베 짜는 소리,// "저건/ 무슨 소립니까?"// "제 며느리애가/ 베 짜는가봅니다."// "서선생,/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 분이 바로/ 한울님이십니다.// 어서 모셔다가/ 이 밥상에서/ 우리 함께 다순 저녁/ 들도록 하세요."// 서노인이, 며느리 데리고 나와/ 상머리에 앉을 때까지/ 해월은 경문 외며 정좌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해월을 전송하러/ 서노인 집안이 동구밖/ 논길까지 나왔다,// 막내아이가/ 따라나오며 우니/ 서노인은 눈을 부릅떠/ 위협, 쫓아보내려 했다,// 해월은,/ 주인을 가로막아/ 어린이의 머리 쓰다듬으며/ 그 자리 흙바닥에/ 무릎꿇었다,// 그리고 서노인에게/ 말했다,// "이 어린 분도/ 한울님이세요,/ 소중히 받드세요."// 가는 곳마다,/ 내일 떠날지/ 오늘밤 떠날지/ 알 수 없는 빈 집,/ 쓰러진 외양간에 묵으면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노끈을 꼬고/ 구럭을 얽고/ 과수나무를 심고/ 채소씨를 뿌렸다.// 할일 없으면/ 꼬았던 노끈 풀어서/ 다시 비볐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몇날 안 가 또// 딴데로 떠나셔야 할 텐데/ 그런 일 해/ 뭘 하시렵니까?"// "안될 말,/ 한울님께서 사람을 내신 건/ 농사지으라고 내신 건데/ 농사짓지 아니하고/ 생산하지 아니하면/ 양반보다 나을 게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을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 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농장은/ 모든 인류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 게 아닌가."//
제13장// 쑥냄새 풍기는, 해월 묵고 있는/ 초가집엔 하루에도/ 수십 명씩,/ 멀린 황해도, 평안도에서까지/ 농사꾼 교도들이/ 과나릿봇짐 얽메고/ 드나들었다.// 비록 굶주리고/ 헐 벗은 행색들일망정,/ 눈동자마다에선 광채가 빛나고,/ 멀리서 온 동지들을 만나/ 서로 주먹 싸 쥐며, 눈물로/ 반가워하고,// 왕가의 기둥뿌리가 썩었음을,/ 세상은 말세임을,/ 양반이 각지에서 마지막 발악하고 있음을,/ 서울장안, 부산항군, 이미/ 왜국 상인, 왜국 간판에게 아랫배까지 내주기 시작했음을/ 개탄했다.// 한 달을 묵으면서/ 각지의 농민 지도자들과 사귄/ 전봉준은 자기가/ 외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합천 해인사/ 경주 토함산, 마산, 진주 촉석루/ 여수, 순천, 화엄사를 거쳐/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봉준은 그해 겨울/ 뜻 아니, 아끼던 아내의/ 죽음을 만났다.// 동네 사람들 사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론,/ 봉준은 아내의 죽음을 두고/ 몇날 며칠/ 식음을 전폐했다.// 황토현 남쪽/ 양지바른 기슭/ 가루 고운 흙 속에/ 자기 손으로 묻고/ 잔디를 입혔다./ 밟으면서 울었다.// 봄이면 꽃/ 여름이면 하늘/ 가을이면 귀뚜라미/ 겨울이면 추위// 전봉준은 자주/ 아들의 손을 이끌고/ 아내의 무덤 앞 찾아와/ 말없이/ 몇 시간씩/ 서 있다 가곤 했다.// 그림이었으리라,// 서해에 노을이 물든 석양,/ 그리고 달밤/ 동네 사람들은 언덕 위/ 어른과 소년/ 두 사람의 그림잘/ 자주 보았다.// 그후, 봉준은 가끔 두루마기 빨아 입고/ 서울을 다녀왔다.// 밤길,/ 새벽길, 소맷자락으로 땀 씻으며/ 그의 집 드나드는/ 사람의 수도 많아갔다.// 남원 사람 김개남,/ 그는 이미 열세살 때/ 세미 받으러 와/ 늙은 아버지께 행패하는/ 관속 두 사람/ 한아름에 몰아/ 수챗구멍 쑤셔박은 일로/ 곤장 백 개 맞은, 그러고서도 웃으며 일어났다는/ 8척장사.// 얼굴이 흰, 칠보 사람/ 손화중, 그는 임진왜란 때/ 전주성의 이조실록/ 내장산으로 묘향산으로 끌고 다니며/ 보전케 했던/ 손홍록 장군의 후손,/ 가녀린 미남으로/ 일찍부터 해월의 감화 받은/ 그러나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밖에 많은 호남지방/ 동학접주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음해 여름/ 봉준은 두벌김 매놓고/ 서울을 다녀왔다// 서소문밖, 객주집에/ 두 달을 묵으면서/ 인심,/ 세정을 살폈다.// 같은 방 묵게 된/ 충청도 사람/ 신하늬와 의형제를 맺었다.// 전봉준과 신하늬는, 마치/ 하늘이 마련해놓은/ 연분이기라도 한 것처럼/ 만나자 첫눈에/ 배포와 뜻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들어갔다.// 두살 위인 전봉준이 형/ 하늬가 아우,/ 그들은 해만 뜨면/ 거리 구경,/ 해만 지면 돌아와/ 등잔불 아래 엎뎌/ 세상얘기로/ 밤을 새웠다.// 남별궁,/ 지금 반도호텔이 서 있는 자리엔/ 그때 남별궁이 있었다,/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의 숙소,// 이미 남별궁 근처, 일본인들의/ 전횡 무대,/ 언제 보아도/ 게다 신은/ 닷도상 옆에/ 수십명의 갓 쓴/ 벼슬아치/ 장사치들이 올망졸망/ 모여 서서/ 손을 비비는/ 광경.// 자본,/ 대포/ 를 앞세운/ 明治의 진출 앞에// 벌써 냄새/ 잘 맡는/ 사대가 빌붙기 시작한 걸까,// 청나라 주었던/ 남한산성을/ 이젠/ 사무라이에게 주고 싶어/ 저리 간사/ 떨고 있는 걸까,// 예나 이제나/ 식민지하의/ 관리들이 배우는 건/ 오직 하나/ 아첨과 비겁,//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왕실에서는 조심조심/ 청의 원병을 청했던 것./ 청은 원세개를 서울에 주둔시켰다,/ 1천명의 군대와 함께// 금은,/ 아편,/ 비단,// 그리고 상전국으로서의/ 권력을 함께 가지고 온/ 그들의 주변에는/ 정치 장사꾼/ 여자,/ 소매 상인,// 주둔군은/ 한가지 한가지/ 사기 시작했다,// 곶감, 대추, 명태, 돼지,/ 여자, 집, 명동 일대의 대지,/ 그리고 비단에 약한/ 조선사람들의/ 마음까지를,// 그래서 명동/ 금싸라기 땅은/ 지금까지도 그의/ 아들의 소유,// 그런데 또 일본이 왔다.// 이조말의/ 반도는 흡사/ 접시 위 올라앉은/ 벌거벗은 생선,// 멀리는 불란서, 미국, 영국,/ 러시아,/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 마치 그들은/ 내기나 하려는 듯,/ 네가 두 발짝/ 나는 세 발짝/ 나는 세 발짝/ 너는 여섯 발짝/ 접시 위 생선을 두고/ 한 발 한 발/ 접근해오고 있었다.// 청국의 왕실과/ 이왕가의 왕실 사이엔/ 주종의 관계 맺었다지만/ 양쪽 다/ 왕실의 지붕은 이미/ 무너지며 있었고// 그래서/ 무너지는 옷을 벗고/ 실권자인 군부가/ 주인이 되어 반도를/ 호령하려 한 것,// 2천만의 농민이/ 제주에서 두만까지 사이/ 뜸물처럼 엎디어/ 땅을 갈고,/ 2천만의 농민이/ 엎디어, 이루어놓은/ 육체의/ 산더미 위// 왕권은 대초롱을/ 깊이, 깊이 박고/ 김대감,/ 박정승,/ 아전,/ 이속들과/ 힘을 모아// 2천만 농민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이성계가 파놓은 우물,/ 그리고 대대로 전승되는/ 그 살기름의 우물터는,// 대대로 모든 지식분자들의/ 아귀다툼의 마지막 겨냥,/ 출세의 최종 목표,// 흙냄새 섞인,/ 기름이 스며나오는/ 우물의 흡구에/ 누구든 한번/ 코를 박아본 사람이면/ 간도/ 눈도 미쳐서// 세상없는 놈이 와,/ 뒷덜미 도끼로 찍어도,/ 목이 잘리우고도/ 혼만은 살아서/ 흡구 근처 떠나지 못하고/ 추억이 되어 빙빙/ 남아 돈다.// 고시공부 한다는 건/ 출세하기 위한 것,// 출세한다는 건/ 피 빨아먹는 자리,/ 놀고 먹는 자리,/ 백성의 피기름 솟는/ 흡구 자리 하나/ 차지한다는 것,// 피라밋처럼/ 정상을 향해/ 벼슬길로/ 기어오른다,// 형제의 등을 밟고/ 친구의 목을 부러뜨리고/ 제 자신의 낯짝도/ 쥐어뜯어가며/ 벼슬 높은/ 정상으로/ 정상으로,// 여기저기/ 나 있는/ 달 표면의 자죽 같은/ 흡구 곁으로/ 기어올랐다.// 오늘, 얼마나 달라졌는가.// 변한 것은 무엇인가/ 서대문 안팎, 머리 조아리며/ 늘어섰던 한옥 대신/ 그 자리 헐리고 지금은/ 십이층 이십층의 빌딩/ 서 있다는 것,// 진고개에 청계천, 이쪽 저쪽/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의/ 옷맵시가, 갓에서 넥타이로/ 변모했다는 것밖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지금도 우물터/ 피기름 샘솟는/ 중앙 도시는 살찌고/ 농촌은 누우렇게 시들어가고 있다.// 우리들의/ 움직이는 발/ 한 발자국// 움직이는 손/ 한 팔짓이// 누구의 등을 안 파고/ 견딜수 있단 말인가.// 잡초만 무성하는/ 악의 밭,/ 유린과 착취가/ 무한대로 자유로운/ 버려진 땅,// 불성실한 시대에 살면서/ 우리들은,/ 비지 먹은 돼지처럼/ 눈은 반쯤 감고, 오늘을/ 맹물 속에 떠 산다.// 도둑질/ 약탈, 정권만능/ 노동착취,/ 부정이/ 분수없이 자유로운/ 버려진 시대// 반도의/ 등을 덮은 철조망/ 논밭 위 심어놓은 타국의 기지.// 걸보고도/ 우리들은 꿀먹은 벙어리/ 눈은 반쯤 감고, 월급의/ 행복에 젖어/ 하루를/ 산다.// 그날/ 하늬와 봉준이 본/ 이왕가의 내면도/ 그러한 것이었을까.//
제14장// 1892년,/ 해월은 전국 교도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11월 1일/ 매서운 북풍 속서/ 호남평야 삼례역/ 3천 군중이 모였다,// 보리밭 속서/ 충청, 전라, 양 관찰사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동학을 허하여주옵소서./ 지금 각 지방에서는 군수로부터/ 서리 근교, 간사한 토호 양반에/ 이르기까지 아침저녁으로/ 우리 죄없는 농민들의 가산/ 탈취하며, 살상 구타 능욕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오직 정부가 우리 동학을/ 사학시(邪學視)하여 제 1세 교주 수운선생을/ 참수한 데에 비롯되나니/ 억울하게 순교한 수운선생의/ 원을 이제라도 풀어주옵소서.// 우리의 도가 척양척왜, 광제창생, 보국안민,/ 사인여천일진대 이 어찌 사도가 되옵니까."// 닷새 만에/ 전라관찰사 이경직의/ 깃 달린 편지를 받았다.// "동학은 왕실이 금하는 바라./ 어리석은 농민들이여, 칼로 베이기 전에/ 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 정학(正學)을/ 취하라.// 앞으로 관리들에겐/ 푼전도 뜯어가지/ 못하게 이르겠노니."// 동이나 서나 세리들의 입은/ 열두 개, 적당한 기회에 적당한 말을/ 적당히 지껄여 놓고 잊어버린다.// 3천의 군중은/ 보은, 동학 총본부를 거쳐/ 서울로 모였다.// 광화문 앞 광장/ 3천의 군중이 바둑판처럼/ 땅을 짚고/ 엎디어 있었다.// 1893년 2월 초순/ 제 2차 농민평화시위운동.// 입에 물 한모금 못 넘긴/ 사흘 낮과 밤/ 통곡과 기도로 담 너머 기다려봐도/ 왕의 회답은 없었다.// 마흔아홉 명이 추위와/ 허기와 분통으로 쓰러졌다./ 그러는 사흘 동안에도/ 쉬지 않고/ 눈은 내리고 있었다.// 금강변의 범바위 밑/ 꺾쇠네 초가 지붕 위에도/ 삼수갑산 양달진 골짝에도, 그리고/ 서울 장안 광화문 네거리/ 탄원시위 운동하는 동학 농민들의/ 등 위에도,/ 쇠뭉치 같은 함박눈이/ 하늘 깊숙부터 수없이/ 비칠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날, 아테네 반도/ 아니면 지중해 한가운데/ 먹 같은 수면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을까.// 모스코, 그렇지/ 제정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푸쉬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인간 정신사의 하늘에/ 황홀한 수를 놓던 거인들의/ 뜨락에도 눈은 오고 있었을가.//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그렇다/ 이날 그는 눈을 맞으며/ 페테부르그 교외 백화나무 숲/ 오바 깃 세워 걷고 있었을까.// 그날 하늘을 깨고/ 들려온 우주의 소리, [비창]/ 그건 지상의 표정이었을까,/ 그는 그해 죽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다/ 그리고 짐승들의 염통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북한산, 백운대에서/ 정릉으로 내려오는 능선길/ 성문 옆에선,/ 굶주리다 죽어가는 식구들/ 삶아먹이려고, 쥐새끼 찾아나온/ 사람 하나가,/ 눈 쌓인 절벽 속을/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수유리 골짝 먹는/ 멧돼지 두 마리가, 그/ 남루한 옷 속서/ 발을 찢고 있었지.// 산은 푸르다,/ 말없이 푸르기만 하다./ 오늘도 일요일이면, 낯선 사람들과/ 수통의 물 나누며 오르는/ 보현봉,/ 반도에 눈이 내리던 그날에도/ 말없이 서울 장안을/ 굽어보고만 있었다.// 광화문이 열렸다./ 사흘 동안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군중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문은 금세 닫혔다,/ 들어간 사람도, 나온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 그 사이/ 쥐새끼가 지나갔단 말인가, 아니야,/ 바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굳게 닫힌 광화문의 빗장을/ 부러뜨리고 밀어제껴버린 것이다,/ 그 문의 빗장은 이미/ 썩어 있었다.// 모든 고개는 다시 더 제껴져/ 하늘을 봤다,/ 그 무수의 눈동자들은 다시 내려와/ 서로의 눈동자를 봤다,/ 눈동자,/ 주림과 추위와 분노에 지친/ 사람들의 눈동자,// 단식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맑다,/ 서로 마주쳐 천상에서 불타는/ 두 쌍, 천 쌍, 억만 쌍의/ 맑은 눈동자.// 바둑판의 중앙에서/ 장대 같은 사나이가 일어섰다,/ 그의 어깨에도/ 괴나리봇짐이 메어져 있었다,/ 군중의 등불 같은 눈동자들이/ 집중했다, 장두 박광호,// "우리는 사흘을 기다렸다,/ 많은 동지들이 쓰러졌다,/ 죽음은 우리 앞에 있다,/ 회답이 없다,/ 우린 파리새끼만 못한 목숨인가?// 백성의 강산이다, 우리 조선은,/ 광화문은, 왜 우리 어질고/ 착한 백성의 길을 막는가?"// 군중은 일어섰다./ 주먹을 싸잡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벌판에서 솟구치는 무수한 미루나무 숲.// 박광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손짓했다.// "앉아주십시오, 그리고/ 열 사람만 나와주시오/ 역적이 되고 싶은,/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 열 사람만 나와주시오,// 문을 흔듭시다,/ 주먹으로 두드려봅시다."// 농민들은 다 일어섰다,/ 열 사람이 뽑혔다,/ 군중과 광화문과의 사이엔/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 속을, 열한 사람의/ 대표는 허기진 기색도 없이/ 뚜버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벽은 죽음이었다,/ 문은 죽음이었다,/ 죽음의 나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가슴뿐이었다./ 불덩이 같은 가슴,/ 가슴은 터지리라,/ 문이다,/ 고리다,// 열하나의 가슴이/ 최후를 밀 듯/ 죽음을 밀었다.// 열하나의 육신이, 미끄러/ 쓰러지면서 스물두 개의/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미 끝난 일이다,/ 노란 천지를 상대로, 끝없이/ 두드렸다, 이미 끝난 일이다,/ 머리로 받았다,/ 이미 끝난 일이다.// 싱겁다,/ 허사였다, 기다렸던/ 벌도 없었다./ 그 길로 교도들은/ 보은 속리산을 향했다.// 이왕실은 치마꼬리가/ 삭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겨드랑 밑으로 다시/ 추켜올리면 될 것 같았지만/ 추키려 해도 추키려 해도/ 붙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아무릴 단도 깃도 허리끈도/ 다 삭아서, 빌빌하는걸,// 늙고 메마르고 멍들고/ 삭정이만 남은 앙상한/ 허리 아래가 드러났다.// 이제 엉덩뼈가, 그 못생긴/ 한쪽 엉덩짝이 나타나리라.// 해월이 대도소(大都所)에 나타나는/ 3월 열하루, 보은 땅에는/ 십여만 명의 농민이 모여들었다./ 제 3차 무저항 농민시위운동,// 밥짓는연기,/ 막사 짓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 발과 발,// 무엇을 보았는가,/ 이조 5백년, 억울하게만/ 살아온 농민들이/ 처음으로 자기 주먹을 보았는가, 이제야/ 자기의 얼굴/ 자기의 가슴을 보았는가.// 어느새, 누가/ 달았는가, 여기저기/ 깃발이 나부꼈다,// "양민을 학살하지 말라"// "물리치자 폭정/ 구제하자 백성"// "몰아내자 왜놈/ 몰아내자 양놈/ 몰아내자 모든 외세"// "백성은 한울님이니라"// "일어나라 백성들이여/ 물리치자 관의 횡포"// 급보에 접한, 조정/ 양반배들은/ 선유사 어윤중,/ 보은군수 이규백,/ 충청병사 홍계훈,/ 그리고 그의 휘하/ 1천명의 군대를/ 보은 땅 보내/ 해산하라고 위협,// 지도자들과/ 사흘을 숙의한 해월은/ 4월 초닷새/ 자진 해산령을/ 내렸다.//
제15장// 날이 갈수록/ 세상 인심은/ 스산했다.// 노른자와 흰자가/ 암탉 품속에서/ 스무하루를 지내면/ 병아리가 되어/ 껍질을 깨고/ 귀염 떨며 나온다.// 한갓, 노른자와 흰자이던/ 액체가 자기 생명을 의식하고/ 다습게 조직하며,/ 기구하며,/ 내일을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달걀 속의 세상은/ 평화가 깨지고/ 불안 초조해진다.// 내부의/ 살의/ 성장에/ 밀려나/ 깨어지는 달걀 껍질은/ 내부의/ 병아리새낄/ 저주하리라,/ 반역자, 라고.// 자각된 농민들의/ 성장으로/ 달걀 껍질은/ 균열되기 시작한 걸까.// 어찌됐거나/ 세상 인심은/ 날이 갈수록/ 수런거렸다,// 눈녹이 바람/ 이 마을 저 마을/ 들썩여놓고 다닐 때,/ 얼어붙었던/ 대지의 껍질도/ 나무의 껍질도/ 싱숭생숭해지듯,// 봉건사회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대구 팔공산에선/ 이름 모를 새들이 나타나/ 한 달 동안/ 하늘의 해와 달을 가리고/ 싸웠다,// 이상한 울음 우는/ 칼새가 나타나/ 양쪽 새 다 죽이고 판가름냈다,/ 땅에 떨어지는 새의 시체가/ 소나기 같았다,// 이상한 소문은/ 꼬리를 이었다.// 오대산 속에선/ 소나무에 꽃이 피었다,// 평안도 용강/ 우물 속에선/ 용대가리 같은/ 깜정 꽃줄기가 두 개,/ 관리나 양반이 가면/ 종적도 없어지고.// 수덕사에선/ 겨울인데/ 복숭아꽃이 만발했다,// 6월 초열흘날 밤에/ 불비가 오리라,/ 그 불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흙에 발붙인 사람과/ 손에 흙묻힌 사람분이리라,// 무주 구천동에서/ 5백명의 신출귀몰하는/ 군사가 훈련중이다,/ 석달 열흘의 불가뭄이 지나면/ 그 군사들이 나와/ 세상을 뒤집어엎고/ 편안한 새 세상 오게 하리라,// 가는 곳마다/ 정자나무 밑 모여 앉아/ 농민들은 긴 한숨 쉬었다,/ 에이쌍,// 하늘과 땅/ 맷돌질이나 해라!// 1893년 11월/ 전주 익산 등지에서, 또/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고부에서도 일어났다,/ 허리띠 조른/ 삽과 지게의 행렬, 3년/ 부녀자까지 동원된/ 부역의 열매/ 북면 만석 저수지와/ 팔왕리 저수지,// 가을이 되니/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또 저수지 수세를 배당했다,/ 한 마지기당/ 쌀 서 말,// 엎친 자리 덮쳤다/ 호남 전운사 조필영,/ 호남지방 납세미를/ 배태워 보냈는데/ 서울 가서 되어보니/ 5천석이 모자란다,/ 미안하지만 다시 징수하겠노라/ 고, 이속 앞세워/ 마을 뒤지고 다녔다.// 익산면에선/ 영수증 없는 3천8백석의 세미 거둬/ 저희끼리 나눠먹고/ 다시 고지서를 내돌렸다,/ 곤장질, 단근질, 주리틀기로/ 난리 피우며.// 오지영을 선두로/ 3천명의 농민이/ 익산 관아에 모여/ 시위했다.// 고부군에선/ 전창혁을 필두로/ 5천명의 농민이/ 관아에 쇄도하여/ 시위했다.// 조대비의 심복/ 고부군수 조병갑은,/ 소원 들어줄 테니 전체가 해산하고/ 대표자 세 사람만 나와/ 협상하자고 제의했다,// 나이 많은 세 사람이/ 자원하여 동헌 마당으로 들어갔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 김도삼, 정일서.//희끗/ 희끗/ 눈발 날리는/ 동헌 바깥마당,/ 수천 농민은/ 쇠스랑/ 삽, 끄을며/ 집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기다렸다.// 이틀째도/ 눈은 날리고/ 아이들은 보채고/ 된장은 끓는데/ 소식은 없었다.// 그 사이,/ 조병갑은 세 농민을/ 전주로 압송했다/ 전라감사 김문현께,/ 민란의 장본인을 보내오니/ 엄치해 달라는 편지와 함게.// 전라감사 김문현은/ 세 농민대표를/ 형틀에 올려 반죽음시킨 뒤/ 고부로 되돌려보냈다.// 조병갑은 이미 반죽음된/ 세 사람을 다시/ 새 형틀 위 묶어놓고, 밤새도록/ 불로 지지고 주리를 틀었다.// 그날 새벽/ 매에 못 견뎌/ 급기야 전창혁이 죽었다.// 눈은 닷새째나/ 산과 들을 덮었다,/ 날리다 멎고/ 멎었단 다시/ 펑펑 쏟아졌다.// 눈 벌판을/ 소요하는/ 된장찌개/ 동김치 냄새.// 마을은/ 쥐죽은 듯/ 삼엄했다,/ 웃음소리 하나, 거리/ 한가하게 나다니는/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강아지도,/ 수챗구멍으로/ 얼굴을 조금 내놓았다간/ 이내 사라졌다.// 다듬이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 글읽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전갈을 듣고/ 녹두는 관아로 갔다,/ 아버지의 시체는 거적자리에 싸여/ 창고 옆 버려져 있었다.// 봉준은,/ 눈물 한방울/ 말 한마디/ 얼굴색 하나,/ 까딱/ 없이,// 뚜벅뚜벅,/ 그 두꺼운 손으로/ 아버지 전창혁의/ 늘어진 육체를/ 업었다.// 업고 문밖에 나오니/ 사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눈길/ 두승산으로 가/ 언 땅을 파고/ 전창혁을 묻었다.// 끝난 것일까,/ 봉준의 얼굴은/ 전날보다 더/ 너그럽고/ 편안해 보였다.// 십여일 후, 고부에는/ 왕명 받은 안핵사 이용태/ 역졸 8백명 달고 나타나,/ 고을을 뒤집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때려잡아/ 고기 엮듯 엮어/ 옥에 가두고/ 부녀자는 총칼로 겁탈하고.// 집엔 불을 질렀다.// 봉준은,/ 후취 부인과 아들, 딸/ 사랑방으로 불러놓고/ 조용히/ 마주 정좌했다,// 남매의 머릴/ 쓰다듬었다,// "얼마동안 태인 친정집가 있어주오,// 석이놈, 곶감을 좋아하는데/ 너무 먹어서/ 배탈이랑 나지 않게,// 간간이 글공부시키고/ 분이랑 잘 키워주오.//무슨 일 혹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며,/ 경우 봐서/ 애들 데리고/ 해남 땅으로 가/ 변성명시켜// 때 기다리도록 하오."// 봉준은 아들 석이의 이마, 눈/ 딸 분이의 코, 입술을/ 번갈아 보았다.// 까만/ 딸기 같은 촉촉한 눈동자/ 총기있는, 그러나/ 철없는 눈동자.// 밖에선/ 눈보라가 날리고/ 문풍지가/ 심란스럽게 울었다.// 며칠 뒤/ 봉준은/ 먼빛으로 보았다,/ 불에 싸인/ 자기 집.// 그리고, 밤하늘/ 아름답게 수놓으며/ 불타는 자기 마을과/ 이웃 마을들.//
제16장// "세상의/ 어지러움은, 그 까닭이/ 외부에만 있는 거 아닙니다,/ 손짓 발짓은 흘러가는 물거품,/ 우리의 내부가 더 문제입니다,/ 알맹이가, 속살이, 씨알이 싱싱하면/ 신지대사에 의해/ 외형은 변실됩니다,// 외부로부터/ 다스려 들어오려 하지 말고/ 우리들의 내부에/ 불을 지릅시다."// 태인 최경선 집의 사랑채,// 충청도서 달려온/ 하늬의 말이었다,// 봉준은 고개를 저었다,// "요원한 이야기지요,// 물론 옳은 생각이긴 하지만,// 석가 죽은 지 이미 3천년/ 노자 죽은 지 이미 2천수백년// 그분들은 하늘을 보았지만/ 그분들만 보았을 뿐// 30억의 창생은/ 아직도 하늘을 보지 못한 게 아니오?/ 아직도 구제되지 못한 게 아니오?// 동학은/ 현실개조의 종교요./ 자기혁명, 국가혁명, 인류혁명,/ 이게 바로 동학의/ 삼단계 혁명 아니오?// 지금은 그래도, 기껏/ 지방관리들이나 양반 토호들/ 부패, 행패, 횡포로 끝나지만/ 이대로 더 둬보오,/ 십년도 못 가서/ 강산은, 일본 아니면/ 청국 아니면 어딘가의/ 밥이 될게요,// 99의 인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1의 악은/ 제거돼야 할 줄 아오.// 좌시하면/ 99가 40 되고/ 40이 15가 되어/ 어느덧 우리의 자리는/ 악의 어둠의 세력에 의해/ 지워져버리오."// "알겠습니다,/ 봉준형의 뜻,/ 제가 염려한 건 바로 그 문제입니다,// 분풀이나/ 폭동은/ 무고한 희생만 남길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왕/ 일어서려는 의지/ 굳게 하셨으면/ 하늘끝까지,/ 벽을 찢고/ 하늘끝까지,// 전쟁을 넘어서서/ 사회혁명으로 이끌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봉기하면/ 국내문제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외세,/ 그들의 벽과 부딪치게 될지 모릅니다,// 각오하셔야/ 됩니다, 외국의/ 조직된 신식 군대와/ 성능 좋은 대량학살 무기,/ 구라파에서는/ 산업혁명 뒤,/ 신흥 자본주의 국가로의/ 꿈을 안고 껑충껑충/ 도약운동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전쟁,/ 식민주의 전쟁/ 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워낸 새로운/ 살인무기를, 일본이나/ 청국은 사들여오고 있습니다,// 각오하셔야 됩니다,/ 이왕 피를 보아야 된다면/ 책임도 지셔야 됩니다,/ 백성들만의 지상낙원,/ 손에 흙묻혀 일하는 사람들만의/ 꽃밭.// 정권 없는,/ 통치자 없는,/ 정부 없는/ 농민들만의 세상, 이상 사회,/ 우리들 손으로 이룩할/ 책임,/ 우리가 얻어야 합니다."// 질화로에선/ 새로 담아온 불이/ 이글거렸다,/ 봉준은 눈을 감고/ 있었다, 심호흡을 했다/ 두 번, 세 번,/ 다섯 번,/ 하복부에서/ 중부로/ 가슴까지/ 점점 넘칠 듯이/ 부풀어올아왔다,/ 눈을 떴다,// 두리두리한 눈,/ 그리고 서서히/ 손을 내밀었다.// 하늬도/ 봉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네 개의 손이/ 마주 얽혀/ 다습게 감격하고 있었다,// 봉준의 눈은/ 어느덧 감겨졌고/ 두 줄기의/ 물방울,/ 콧잔등의 기슭을 타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17장// 그로부터 한 달 후,// 1894년 3월 21일./ 전봉준이 영솔하는/ 5천 농민이/ 동학 농민혁명의 깃발/ 높이 나부끼며/ 고부 군청 향해 진격했다,/ 머리마다 휘날리는/ 노랑 수건,/ 질서정연한/ 대열, 여기저기/ 높이 펄럭이는/ 깃발,// "물리치자 학정// 구제하자 백성"// "몰아내자 왜놈/ 몰아내자 뙤놈/ 몰아내자 모든 외세"// '백성은 한울님이니라"// "일어나라, 세상 모든 농민들이여/ 굴레를 벗어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농민혁명의 서곡은/ 반도에 그 첫 보습을 댔다,/ 엽총,/ 화승총,/ 장도칼,/ 쇠스랑,/ 괭이,/ 낫,/ 호미,/ 죽창,// 울돌목,/ 성난 밀물처럼,/ 관아를 향해/ 달려들어갔다,/ 울돌목, 그렇다, 목포에서 배 타고/ 제주 가본 사람은 알리라/ 쏜살처럼 달리는 그/ 성난 밀물,// 하늘에서는 까마귀떼/ 참새떼 까치떼도 신바람이 났음일까,/ 날개를 가슴끝 휘저으며/ 동학군의 머리 위, 설레발이쳐/ 따랐다,// 집집마다에서/ 쏟아져나온 강아지, 바둑이,/ 부얼이, 삽사리까지도, 웬일인지/ 짖지도 않고/ 농민군의 앞 내지르며/ 신나게 뛰었다,// 닭들은, 높은 짚둥우리/ 콩깍지 위 올라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병석에/ 누워 있던/ 부황든 노인네들도/ 지겟작대기를 끄을며/ 버선발로 뛰어나와/ 행렬의 뒤를/ 넘어지며/ 따랐다,// 집이 불태워지고/ 아버지 빼앗긴/ 열두살짜리 소년들,/ 그리고, 남편 잃은 머리가 쑤세미 된/ 부인들까지도/ 돌멩이 두 개씩 안고/ 달렸다,/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얻어맞았단 말인가/ 깨어졌단 말인가// 깨진 항아리 속에서/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휘장을 찟고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맑은 강물을 보았단 말인가/ 안창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강물을 보았단 말인가// 살 속 숨쉬고 있는/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정신 깨치고 흐르는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생명을 보았단 말인가/ 광란에 마비돼가던 혈관이/ 사관침으로 소생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하늘을 보았단 말인가/ 피의 노랠 들었단 말인가/ 쇠옷을 긁어내고/ 다스운 피를 만졌단 말인가,// 그들은 벌써/ 관아를 향해 뛰고 있는 발이/ 아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힘이 전신에 솟구쳐/ 견딜 수 없어, 그저 달리고 있었다// 그건 기막힌 하나의/ 슬픔이었을까// 수백년의 누더기 속서 풀려나와/ 고삐를 스스로 끊고/ 뛰고 있었다// 이유없이 얽매이었던/ 수십대의 고삐를 끊고/ 뛰고 있었다// 하늘을 본 것이리라/ 자기 가슴 속의 피를/ 만져보고 놀란 것이리라// 자기의 하늘을 보고/ 놀란 것이리라.// 관아는 텅 비어 있었다,/ 조병갑은 어젯밤 벌써/ 전주로 도망갔고/ 이속들도 쥐구멍 속 다/ 숨었다,// 옥을 부쉈다,/ 뼈만 남은 농민들이 기어나와/ 관아에 불을 질렀다,// 창고를 부쉈다/ 석류알 같은 3천석의/ 쌀이 썩고 있었다,// 무기고를 부쉈다/ 열한 자루의 일본도/ 스물두 자루의 양총/ 6백발의 탄환이 나왔다,// 동학군은/ 대오를 정돈했다/ 인원을 점검하니 3천이 늘어서 8천명,/ 전봉준을 둘러싼/ 수뇌진에서는/ 동학농민당 선언문을 작성하여/ 각 고을에 붙였다,// "전략------오늘의 고관들은 나라를 생각지/ 않고 녹위를 도둑질하며 아첨을 일삼아,/ 충고하는 선비를 간신이라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트집잡아 안으로 나라 생각하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 학정의 관만 늘어가니/ 인심은 갈수록 변하여 들어앉아도 편안한 날이/ 없고 나가도 보신의 길이 없도다,// 중앙의 벼슬아치나 지방의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위태는 생각지 않고 내 몸 내 집을/ 살찌게 할 계략에만 눈이 어두워/ 벼슬 뽑는 길은 축재하는 길로 되고/ 과거 보는 마당은 물물거래하는 시장이 되며,/ 허다한 세금은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금고에 충당되며, 사치와/ 음란이 두려운 줄을 모르니 팔도는/ 고기밥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허약하면/ 나라가 쇠약해지는 법이니라,/ 보국안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병을 두어/ 오직 혼자 살기만 도모하고 녹위를/ 도둑질하니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우리 일당은 비록 초야의 농민이나/ 나라의 땅으로 먹고 살고 나라의 옷을/ 입고 사는지라, 나라의 위망을 좌시할 수/ 없어 팔도가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가 의논을 거듭하여 이제 의로운/ 깃발 들고 보공(報公)과 안민을 목숨 걸고/ 맹세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이 비록/ 각각 생업에 안온하여, 함께 강산의 태평세월/ 을 축하하며 다 함께 성스런 혜택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으로 아노라,// 1894년 3월 21일// 동학농민혁명본부"// 울 밑,/ 각시풀, 닭꽁지/ 바람에 날리고/ 나물 캐는 처녀들 다홍치마 속/ 심술스런 봄바람 부풀 때// 태백,/ 두메 산골,/ 양지쪽 움돋는 산나물 눈/ 보고/ 암사슴 마음은/ 미쳤다.// 두승산에서/ 황토현 이르는 언덕/ 수놓은/ 화창한 진달래,// 그날/ 강산을 채웠으리라/ 하늘/ 을 비치는/ 투명한/ 꽃잎.// 고부성에서는/ 최경선 인솔하는 8백명 남겨두고/ 농민군 주력부대는/ 백산은 향해 진격했다,/ 서울 갈 세미/ 수십만 석이/ 쌓여 있는 항구,// 농민군이 이르기 전/ 백산에서 백여명의 관병들이/ 환영깃발 들고 십리 밖까지 나와/ 농민군을 영접했다,/ 꽃다발 쏟아지는/ 무혈입성.//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작전계획,/ 부대편성, 인원 점호했다,/ 전녹두, 김개남, 손화중, 김남지,/ 신하늬, 그리고/ 일만삼천명,// 용서......,/ 이 뒤,/ 전주성 입성까지의/ 상세한 영웅적인 전투 이야긴/ 다 기록할 수도 없지만/ 생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만,/ 며칠 뒤, 오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서 있는/ 황토현, 잔솔밭 언덕에서,/ 대포 2문까지 끌고 온 전주관군 3천명이/ 농민군의 대창과 쇠스랑에 전멸되고, 더러는 투항하고/ 칠팔십 명만 살아 돌아갔다는 이야기,// 서울에서 보낸 홍계훈 휘하의 왕병 2천명이/ 대포 8문 끌고 군산항 상륙하여 뒤쫓아왔지만/ 농민군의 의기와 전략에 지리멸렬/ 재티처럼 흩날렸다는 이야기, 전라 땅 곳곳에서 농민들, 말단관리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관아를 점령하고 농민군 주력부대에/ 합세하여 와, 한 달 후 전주성에 무혈입성할 때엔/ 농민군은 총수 12만명이 되더라는 이야기,// 그리고, 여기/ 처참한 황토현 싸움이 끝난 다음날/ 동학군이 각 고을에 내붙인/ 선언문 한 토막만 부기한다,// "관병과의 접전에서 허다한 인명이/ 손상됨은 심히 유감된 일이다,/ 우리는 조금도 나라와 인명을 해코자 함이 아니노라,/ 나라와 인민을 가난과 시달림에서 구출하고/ 이 강토에 만민의 평등한 생존의 권리를/ 실현시키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 안으로는 탐학하는 관리들을 베고 나라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고자 함이니/ 관군일지라도 병졸은 물론이요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우리 의기(義旗) 아래 귀순하는 자에게는/ 조금도 해가 없을 것인즉,/ 안심하고 우리 백성의 의거에 동심 협력하라/// 동학농민혁명군본부"//
제18장// 미움의 난간을 끼고/ 조심조심/ 열두 굽이 돌아도/ 연민은 끝나지 않는다,// 백권 천권의 책을 뒤져도/ 우리들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헤매도, 헤쳐도,/ 두들겨도, 찢어도/ 그래도 남는다,// 연민,// 누가 누구를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막막한 수렁 속에 돋아난 버러지,/ 버러지의 기다림이/ 불쌍하게만 여겨짐이여,// 사랑은 끝나도/ 연민은 남는다,/ 미움은 끝나도/ 연민은 남는다,// 속리산 문장대 위 올라/ 은실 같은 낙동강 줄기 보았는가,//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보았는가/ 노고단 상상봉에서 활개 펴고/ 그 꽃밭/ 그 하늘 보았는가,// 금강산 비로봉/ 밤하늘의, 사발덩이 같은 물먹은 별/ 마셔보았는가/ 그 밤하늘 마셔보았는가,// 백두의 천지 가에 서본 일이 있는가/ 전신이 터지게/ 호수 건너편 벽 향해/ 소리쳐본 일이 있는가,// 한라, 그렇다/ 한라도 백록담/ 시로미밭을 밟고 서서/ 보았는가,/ 천공,/ 천공,// 하늘,/ 하늘 흘러가는/ 하늘소리를 들었는가,// 보이지 않은/ 하늘 너머,// 하늘 너머/ 그 멀리 흘러다니는/ 하늘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빛보다 빠른/ 시간보다 빠른/ 초시간을 짚어보았는가,// 하늘 땅보다 깊은/ 공간보다 깊은/ 초공간을 짚어보았는가,// 시공의 흐름을 거슬러/ 공간의 흐름을 거슬러,// 자유자재로/ 시공 위 좌정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보았는가/ 무엇을, 너는,// 없음이어라/ 없음이어라// 없었노라. 바람이었노라/ 지나가는 음영이었노라,/ 없음이어라. 없음이어라// 그러나 어찌하랴/ 그래도 여전히/ 남는건/ 연민임을,// 아퍼, 괴로워하는/ 이 시간의 살덩이만이/ 불쌍할 뿐이어라,// 지금, 이 시간/ 어디선가/ 찡그리고 있을 피부가/ 불쌍할 뿐이어라,// 미워할 사람도/ 예뻐할 사람도 없었노라/ 다만/ 살아 있음한 목숨의/ 불쌍함뿐,// 그럼 우리가 본 하늘은/ 무슨 하늘이었단 말인가,// 불쌍,// 우리는 보았다/ 가엾은 심줄,// 애처로운 목,// 서러운 사람들이/ 서러운 목 뽑고/ 서러운 코 흘리며/ 서러웁게,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 있음의/ 불쌍함이여,/ 숨쉬고 있음의/ 불쌍함이여,/ 이제 고만/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임오년,/ 군부 쿠데타에 쫓겨/ 다락방으로, 여주 논길로/ 치맛자락 끄을며/ 헐떡이던 뒤꿈치,// 은하수,/ 무자위, 견우, 직녀, 짚신할머니/ 경복궁 부엌 이름난 무당 불러들여/ 아들의 장수무강,/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마다/ 쌀 한 가마, 비단 한 필씩 걸어/ 푸닥거리 드리던 왕비,// 오늘은/ 민영준을 불러 청나라/ 원세개 앞으로/ 파병요청서를 썼다,// 조작청원이었을까?/ 타의에 의한?// "소국 전라도 땅에, 태인 고부 고을이 있사옵니다,/ 원래 습성이 고약한 게 우리나라 백성들입니다마는/ 이 고을은 유독합니다,// 요즘엔 동학당이라는 비적들과/ 배가 맞아/ 만여명의 무리를 일으켜/ 어느덧 고을을 휩쓸더니/ 이제는 호남의 요지 전주성까지/ 저들의 손에 넣었습니다,// 이미, 잘 훈련된 왕가 군사를 뽑아/ 이를 물리치도록 내려보냈사오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 역도들의 무리는/ 죽음도 무섭다 하지 않고 버티고 싸워옵니다,/ 궁병은 그들에게/ 터지고 패하여/ 많은 대포와 총검을 빼앗긴 채/ 퇴각해버렸나이다,// 이제 저들은/ 서울을 넘보는 듯 하나이다,// 그러나 소국의 궁중에 둔/ 새로 훈련된 군대는 그 수가 적어/ 겨우 궁성을 지킬 정도에 지나지 못하며/ 더구나 실전에 경험이 없는 풋내기들이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이 비적들의 무리들이/ 점점 더 번성 창궐하게 되면/ 저희 왕실보다도 귀 대국에 많은 염려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미 임오, 갑신, 두 차례의/ 내란 때 귀 대국의 군대의 힘으로/ 명맥을 유지한 우리 궁중의 일가친척// 이번도 오직/ 귀 총리님의 넓으신 재량에/ 의지코자 하오니 곧 북양대신 이홍장 폐하께/ 전보를 치시어, 얼마간의 군대를 보내시게 하여,/ 소국의 내란을 대신 소탕해주심과 아울러/ 소국의 미숙한 군대들도 귀국 장군을 모시고/ 군무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주옵소서."// 산에선 원추리가 피기 시작하는/ 6월 초순/ 아산만엔/ 야포 4문/ 87미리 대포 4문 이끈/ 엽지초의 청군 6천명이/ 양총 들고 상륙,// 이왕가에서 보낸/ 영접사 이중하의/ 꽃다발/ 술/ 합장 대배를 받았다,// 남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재빠르게/ 등덜미 잡는/ 손,// 인천 가두에/ 5천4백명의/ 까마귀떼 같은/ 일본군이 상륙/ 차렷 행렬로/ 점호,/ 왕가와/ 아산만의 눈치를 살폈다,// 기름진 평야, 나누어먹고 싶은 배포였을까?/ 아니면 통째 혼자 먹고 싶었을까?// 전함 일곱,/ 포함 둘,/ 체신선 하나,/ 기선 다섯,// 사령관, 그도 고국엔/ 우렁바가지 같은 마누라 가진/ 일본군 제 5 사단장/ 육군중장 野津道貫,// 여단장/ 육군소장 大島義昌,// 동학 농민군을 찾아/ 상륙한 이들 청.일군은/ 1894년 6월 11일/ 저희끼리/ 발포하기 시작했다,// 성환으로,/ 서울로,/ 평양으로,/ 쫓기고 쫓으면서/ 딩굴었다,/ 청일전쟁.// 한 달도 안 가서/ 전세는 판가름났다/ 백기 들고/ 배상금 내고/ 물러가는 중국,// 이왕가 5백년의/ 머리 위, 뿌리 늘였던/ 대륙 낙지발이 잘리고// 대신, 섬나라/ 낙지발이 이날부터/ 석양진 이왕가 머리 위/ 뿌리 늘인 의미일까,// 한편, 이 무렵,/ 농민혁명군 총본부/ 경기전 뜨락/ 고목 가지에선 매미가 울고/ 대들보 드러난/ 선화당 대청마루에선/ 농.관 협상회의가 열렸다,// 삼베 전투복 입고 정좌한/ 전봉준,/ 가슴 열고 부채질하는 김개남,// 맞은편엔/ 도망간 김문현 자리 부임한/ 전라감사 김학진/ 왕명으로 서울서 내려온 안무사 엄세영,// 그리고 먹을 가는 몇 사람의/ 입회 서기,// 간장독에 앉았다 날아가는/ 파리 쫓아 고의바람으로 삼십리/ 뛰었다는 진주 꼽쟁이의 여름도/ 이런 무더운 공간이었을까,// 흰구름은/ 은행나무 위 머물러/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바위,/ 유화(油畵),/ 풀밭,// 전봉준은/ 팔짱끼고, 또/ 눈 감았다// "우리가 자진 해산하면/ 일군과 중국군은 과연/ 철수할까?// 철수한 다음의/ 재기./ 늦지 않을까?"// 몇 시간 만이었을까,// 양측 대표는 협정서에/ 서명을 마쳤다,//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치/ 동학도인이 이를 맡아 민정에 참여한다,// 동학인과 정부 사이에 섞여 있는/ 미움을 일소하며, 탐관오리는 낱낱이/ 들추어 엄징한다,// 모든 토지는 농민에게 평등분배한다,// 횡포한 부호, 지주, 불량한 유림과/ 양반 족속을 엄징한다,// 칠반 상놈 제도를 뜯어고치고/ 노비의 호적문서를 불살라 버리며/ 백성은 패랭이 꼭 쓰지 않아도 무방하다,// 과부의 개가를 허락한다,// 무명잡세를 일체 거두지 못하며/ 공사채를 물을 것 없이 기왕의 모든/ 채무관계를 백지로 돌린다,// 외국인과 잠통하는 자를 엄벌한다."// 전봉준은 일어섰다,// "그럼/ 우린 싸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선은// 호남땅에서만이라도/ 동학과 농민의/ 꿈은 쟁취됐습니다,// 오늘밤 안으로/ 우린 전주성을/ 비웁니다,// 선정 베푸시오,/ 우리가 집강소를 가지고/ 살펴봅니다,"// 그날밤 자시,/ 김개남이 이끄는 부대는/ 남문을 나서 남원 방면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북문을 나서/ 금구 방면으로 향했다,// 하늬는 봉준의 뒤를 따라/ 덕소길 걸으면서 울었다,// 하늘엔 은하와 북두,/ 이따금 유성이/ 그 깊은 영원 속, 직선/ 긋고 간다,/ 어딜까?// 사발덩이 같은/ 샛별이 동녘 하늘에/ 떴다,// 우타박거리는 수없는/ 발과 발,// 삼례에서 하늬는/ 봉준과 작별 인사/ 나눴다,// 봉준의 이마엔/ 구슬땀, 아니면/ 이슬방울인가,// 가로 새겨진/ 깊숙한 세 줄기/ 강물,// 하늬는/ 조국을 보았다./ 끝나지 않는다.// "그 길로 서울 밀고 올라가/ 중심 도려내야 했습니다,/ 봉준형,/ 전주성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그 길로 서울 직충했더면/ 벌써 스무날 전에 우린/ 한양성 점령할 수 있었죠,// 왜놈과/ 뙤놈들이 상륙하기 전,// 중앙에/ 동학 농민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동과 서에/ 국제의 사다리/ 내려걸쳤더면.// 이제 늦었습니다,/ 봉준형, 어쩌실 셈입니까?"// 하늬의 눈동자를, 그리고/ 자기의 내부를/ 그 긴 역사를/ 번갈아, 보며/ 앉아 있던 봉준// "옳았소, 그때/ 하늬 말이,// 그러나/ 호남 일원에서만이라도/ 집강소의 설치로/ 우리 동학의 꿈/ 열매 익는다면.// 좀더, 두고/ 기다려봅시다/ 국제의 바람과 구름,// 지금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이래야/ 또 달리/ 없지 않소?"// 산에서/ 일찍, 잠 깬/ 새벽바람이/ 삼베적삼 속/ 기어들었다가, 소매 밖으로/ 나갔다,// 바람내, 그렇지/ 머릿다발의/ 진아 살내,// "길은 아직/ 있습니다,// 정공법만 피하면 됩니다/ 정공법만.// 만이 아니/ 5만이 와도// 이 나라 풍습과/ 지리에서 소외당한, 그/ 검은 바지,/ 청색 저고리,// 아무리, 기관포/ 대포로/ 둘렀다 해도// 밤 발라내듯/ 발라서, 망태 속 넣기란/ 쉽습니다,// 유격전으로/ 동에서 서에서/ 남에서 북에서/ 가슴에서.// 온 백성은,/ 산천은// 우리 편입니다,// 봉준형,/ 밤으로, 산으로/ 오륙십 명씩,/ 2백여개의 유격대 나누어/ 북상시키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전봉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다문/ 입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십분,/ 동양의 하늘 밑, 또/ 20분,// 나무,/ 하늘, 강,/ 밥짓는 연기./ "고맙소, 하늬/ 그러나, 또 그보다 다른/ 길도 있을 것 같소/ 맡겨주오, 내께,// 그동안 수고했소// 천명(天命),/ 아마 쉬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을 것/ 같구려,"// 두 사람은 눈 감은 채/ 손목 싸쥐었다,// 만경평야/ 아침 깬 바람이/ 벼포기 잎사귀 위/ 이슬방울 흔들면서/ 이 논, 저 논/ 인사를 다녔다.//
제19장// 금마,/ 하늬는 전우들과 작별/ 부여로 가는 길/ 마한, 백제의 꽃밭/ 금마를 찾았다,// 언제였던가/ 가을걷이 손 털고/ 재작년 늦가을/ 진아는 하늬의 손가락 끼어/ 미륵사탑 아래/ 그림으로 서 있었지,// 그날은/ 저 탑날개/ 이끼 위/ 꽃잠자리가/ 앉아 있었다,/ 7세기 초/ 백제인들 슬기로 건축/ 8세기초/ 낙뢰로 반파,/ 거대한 8층탑은/ 반공에 그 부러진/ 한쪽의/ 어깨,// 진아의 아름다움에/ 홀려, 마을 사람들은/ 떠날 줄 몰랐었다,// 동지 섣달이면/ 진아의 분신이/ 세상에 나온다,// 아들?/ 딸?// 남남 북녀,/ 북남 북녀,/ 먼 지방 사람끼리 만나면/ 우생학상 좋은/ 2세를 낳는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가족 근친혼,/ 마을 혼인/ 꺼려 왔고,// 눈이 가는 여잔/ 눈이 사슴 같은 사내,// 입술이 얇은 사낸/ 입술이 넓고 두터운 여자,// 비만한 여잔/ 깡깡한 사내,// 마음이 가을물같이/ 차가운 남잔/ 마음이 겨울 이불속같이/ 다스운 여자를/ 찾아다니는 법,// 진아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그 푸담한/ 가슴./ 꿈꾸는 듯 깊은/ 눈매 깜박이고/ 있을까,// 계룡산쯤/ 동학사에라도/ 피란가 있게 할걸,// 먼 고향/ 해주까지 보냈을까,/ 어리석음이여,// 떠나기 싫어하던/ 진아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무거운 몸인데도, 하늬 따라/ 종군하겠다고 우기던/ 진아,// 어는 핸가 여름/ 대전에서 전주 가는 버스/ 타고 가던 우린/ 금마에서 내렸었지,// 선화공주의 남긴/ 적삼바람/ 어느 나뭇가지엔가/ 걸려 있을지도/ 몰라,// 금마에서/ 서북쪽으로 20리/ 가도 가도 황토길/ 쏟아지는 땡볕 아래/ 엠원총 멘 제 2 훈련소/ 훈련병들의/ 굳은 행렬만,/ 지나갔다,// 목은 말랐어도/ 구멍가게엔/ 건빵, 쪼콜렛뿐/ 막걸리, 김치 생각은/ 굴안 같은데/ 가게엔 영어로 쓴 브란디/ 화학주뿐,// 냇가에선/ 수십명의 수건 두른/ 부인들이/ 모래를 일는다,/ 탄피, 소총알,/ 날품값 보리 두 되 값이라던가,// 사십쯤 되었을까,/ 한 아주머니가/ 담배를 청했다,// 일본서 곳간차 타고/ 돌아온 얼굴, 틀림없이/ 남편은 남양군도 징용가/ 소식이 끊어졌겠지,// 기준성 있었던/ 미륵산 정상엔/ 텔레비 안테나,/ 세우느라, 기재 실은 차가/ 다녔다,// 논배미에선/ 뜸부기가 울고.// 하늬는 기왓장을/ 주워 들었다.// 금마에서 남으로 십리,/ 지금 5층 왕궁석탑이/ 서 있는 고구마밭은/ 황토언덕/ 옛날 무왕의 이궁 터,// 신라 땅에 가/ 섬섬옥수/ 선화공주 꼬여온/ 낭만,// 선화공주 위해,/ 무왕이 된/ 마동은/ 별장을 지었다,// 어느날/ 선화는/ 미륵산 아래/ 산책하다/ 미륵불 캤다// 땅에서/ 머리만 내놓은/ 미륵부처님의/ 돌.// 마동왕의 손가락/ 이끌고 다시 가보았다,/ 안개./ 비단무지개,// 백성들이 모여/ 합장,/ 묵념./ 그들은/ 35년의 세월/ 머리에 돌 이고/ 염불 외며/ 농한기/ 3만평의 땅에/ 미륵사,/ 미륵탑, 세웠다.// 마동왕의 어머닌/ 부여 마래/ 화지산 기슭에/ 살았다,// 지금도 마래/ 이궁 터 방죽가엔/ 돌 우물,// 밤으로만/ 평복하고 나타나는/ 법왕 위해// 마동 어머닌// 돌 사발, 돌 우물/ 떠 바쳤다,// 그, 돌 우물가엔/ 지금도/ 초가집 몇 채.// 그 흙담집/ 고운 흙 위에서,/ 우린/ 출생했지,// 돌나물,/ 미나리방죽, 냉이/ 달래 캐던 그 가녀린/ 손마디들은 어디 갔을까,// 누나,/ 주워다 기른 누나/ 우린/ 마뿌릴 캐/ 궈 먹으며/ 여섯 살,// 멍석딸기 밭에서/ 고샹 뜯다/ 뱀을 봤지, 그리고/ 난잠,// 우린/ 먼길 가는/ 바람, 아니면/ 햇빛,/ 열매,/ 지고, 피고// 우린/ 어디까지/ 왔을까.// 이틀을 걸어/ 하늬는 고향으로 왔다,/ 문설주에서도/ 수저,/ 툇마루족에서도,/ 진아의/ 목소리,// 들길에서도/ 콩밭,/ 앞산에서도, 웃음 머금고/ 치맛자락 아무리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입모습,// 비단자락 밑의/ 살 냄새,// 하늬의 마음과 몸은/ 휘말려 갔다,/ 혁명처럼, 해주로.//
제20장//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반도에서 청군이 퇴각한/ 다음날,// 일본에선/ 수뇌회담이 열렸다,// "쑥대밭이 돼 버리면/ 어때,/ 차라리 할 수 있으면/ 초토로 만들어버리렴아,// 본토에서/ 반쯤 이민시키게,// 그래서, 그 동학당인가/ 농민군인가 씨 말려버린 담에// 흥정하는 거야, 왕족과,/ 요리상은 이미,/ 받아놓은 요리상, 하하하."// 우리는 들었다/ 일본 어느 고장엔가, 지금도/ 잔디 입힌/ 코무덤,// 일찍이/ 식인종이었던/ 섬나라,// 조선 사람의/ 대가리, 그 대가리가 왜/ 탐이 났을까,// 칼로 베서/ 병아리새끼처럼/ 엮어 가던/ 임진년.// 마늘접처럼/ 죽으로 엮여 가던/ 사람은 누구?// 마늘접을/ 배에 싣고 가던 사람은/ 누구?// 짐이 무거웠겠지/ 대가린 버리고/ 코만 베 갔다,// 실로 꿰서/ 코를 가지고 가면/ 일본 천황 이하/ 대신들이// 코날을 헤어서/ 조선사람 코 열 개에/ 쌀 두 가마/ 무명 두 필을 상급했다던가,// 가죽은/ 더 비쌌다,/ 인피,/ 구두 만들려고?/ 더 큰 충성으로 보였겠지,/ 한 장에 비단 세 필,//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야만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사람을, 총으로/ 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반도에서,/ 그리고/ 나뭇잎 싹트는/ 따스한 봄날/ 교수대에서.// 아, 일찍이/ 인류 예지의 발상지였던/ 아시아,/ 평화와 꽃밭과 덕망의 땅이었던/ 아시아,// 오늘 누가 와서/ 함부로 총질하고/ 있는가,// 임진년,/ 조선사람의 종잘/ 말릴 순 없어, 칼 씻으며/ 그들은 돌아갔다.// 민비./ 여인이었다,/ 남과 북이/ 진창 되어도/ 자기 안방의 따뜻함/ 금은 노리개의 상자 속의 평화,/ 아들 남편의 영화만은 목숨 내놓고/ 확보하고 싶은.// 대원군./ 이조가 내놓은/ 비뚤어진 사마귀,/ 양반은,/ 잘못은 돋아난/ 물사마귀,// 이미 대세 기운/ 파장에서 초조하게/ 우왕좌왕하는/ 더덕사마귀.// 생의 마차를,/ 불성실하게 끌어온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발바닥 붙이지 못하고/ 당황한다,// 임종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은// 아닌 줄 알면서// 안될 줄 알면서도/ 무엇인가,// 아무꺼구/ 손에 잡히는 대로/ 이 약/ 저 약, 목에 주워넣는다.// 그래서/ 이조말의/ 더덕사마귀 떼들은// 아닌 줄 알면서도// 원세개 장군이여/ 일본군님이여, 하며// 서학놈들이여, 동학놈들이여,/ 동으로, 서로/ 수선피웠으리라,// 어찌 됐거나/ 일본 군대는/ 1894년 9월/ 충청남도 서산에 상륙,// 금강 방면으로 내려왔다.//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도/ 3천의 왕병과/ 5천의 일군이/ 남진// 전봉준은 호남 일대의/ 전농민군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다,// "조선의 전체/ 동학 농민군이여,/ 어서 무장하고/ 10월 5일 밤까지/ 논산벌로 모여라"// 추수가 끝난/ 마을바다에선/ 그동안, 곳간 속/ 묻어 뒀던// 창,/ 엽총,/ 죽창,// 없는 사람은/ 쇠스랑,/ 호미/ 낫가지/ 닦아 들고 나섰다,// 만삭된 아내의/ 귀밑머릴 만져주며/, 병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무릎 나온 아들달들의/ 코를 닦아주며,// 그리고 정든 기둥나무에/ 눈 인사를 보내며/ 우리의 조상들은, 서리 내린 아침/ 집을 떠났다.// 아침엔 태양/ 낮엔 가마귀/ 밤엔 시퍼런 하늘.// 태백산,/ 바위틈서리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금강줄기의 원천처럼,// 논산벌로 모이는 길은/ 산마을에서 들마을로 내려서며/ 강물처럼, 사람은/ 불었다.// 홍수,/ 사로, 팔방에서/ 모여오는/ 창과 머리,/ 발과 증오의 홍수.// 10월 10일/ 노성산에서/ 논산 이르는 벌판엔/ 20만의/ 농민이 집결.// 낮이면/ 하늘을 가리는 흙먼지/ 밤이면/ 어둠을 수놓는/ 수천 개의 모닥불.// 어디서 왔는가/ 바위 같은 주먹,/ 꿈틀거리는 심줄이여,// 오,/ 무서운 감격이여/ 반란이여,// 오 무서운/ 힘이여/ 신이 나는 모임이여,// 내일은 공주/ 모레면 수원/ 글피면 한양성// 천추에/ 한 못다 풀/ 양반성의/ 점령이여// 조국의 해방이여/ 백성의 해방이여// 농민의,/ 노동하는 사람들의 하늘과 땅이여// 오, 발가벗고 싶은 감격이여/ 오, 위대한 반란이여,// 꿀과 젖이 흐르는 땅,/ 꽃과 과일이 만발하는 강산이여,/ 눈빛과 웃음이/ 어우러지는 땅,//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여./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여.// 농민군 총지휘 본부 막사/ 쉴 사이 없이/ 전령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남접대장/ 전봉준 총수,/ 의형제로 그제 밤 아우가 된 북접대장/ 손병희 총수,// 중앙에 높이 펄럭이는/ 깃발엔/ "왜적을 몰아내자"/ "썩은 왕실을 도려내자"// 천안 세성산엔/ 북접 농민군 5천을/ 전위부대로 배체했다,/ 지휘자 이희인, 김복용,// 홍성 방면엔/ 상륙한 일군의 남진을 저지코자/ 7천명을 배치했다/ 지휘자 박덕칠, 박인호,// 만명을 손화중, 최경선에게 주어/ 전남 광주로 돌렸다,/ 왜군의 후방상륙에 대비,// 김개남은/ 1만5천의 직속부대를 이끌고/ 진잠고개 넘어 청주로 진격했다,// 10월 21일, 무서리 내린 아침/ 세성산 유진했던 농민군 전초부대가/ 왜군 기관포소대의 기습으로/ 전멸됐다는 소식이/ 본부에 들어왔다.// 주력부대는/ 삼로로 진격했다// 계룡산 동쪽 기슭 돌아/ 대교 쪽에서/ 공주감영 공격하는/ 손병희 부대 5만명,// 성남에서/ 노성 효포 거쳐 북상하는/ 신하늬 부대 4만명,// 7만명 이끈 전봉준은/ 노성산 서쪽 돌아/ 이 인에서 우금티를 넘었다.// 산의 벽과/ 산의 벽이/ 마주 울고// 역사와 노도가/ 산을 문질렀다// 꽃도, 나무도,/ 돌도, 강물도,/ 북쪽 하늘 향해, 일제히/ 머릴 나풀거렸다,// 감발과 감발/ 짚신과 짚신/ 꿰진 무릎과 무릎,// 돌,/ 몽둥이,/ 삽,/ 호미,/ 괭이,/ 부엌칼,/ 부지깽이,// 그렇다/ 정말,/ 눈 못 보는 허리굽은 할머니들,/ 아들딸의 뒤를/ 따라, 부지깽이 들고/ 좇았다,// 창,/ 심지총,/ 죽창,// 살과 살,/ 뼈와 뼈.// 눈동자와 눈동자,/ 이마와 이마,/ 가슴과 가슴,/ 쓸개와 쓸개,// 미움과 미움,/ 분노,// 고개 넘고/ 내건너고/ 마을 지나// 밑없는/ 어둠을 뛰었다.// 일어나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일어나자/ 반도의/ 중생들아,// 목숨 살아 있는/ 동학교인이여, 모든 농사꾼이여// 일어나라,/ 조국의/ 모든 아들딸이여.// 손톱도 발톱도/ 돌도 산천도, 이 나라의 기름 먹은/ 흙도 바람도/ 새도 벌레도 일어나라,// 두레꾼이여/ 조국이여/ 너를 부른다. 두레꾼이여,/ 녹두알이여, 너를 부른다,// 땅도 강물도/ 깃 털고 중천 높이 솟아라/ 너를 부른다.// 너의 피를 부른다/ 여문 뼈, 노랑수건 휘날리며 오라/ 농민군이여.// 우리들은 이때 공주 싸움에서/ 있었던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3일 이른 아침/ 이인에서 곰나루 건너던/ 농민군이, 鈴木 소위가 인솔한/ 일군 기관총부대의 반격을 통쾌하게/ 때려엎은 이야기,// 지금의 공주교육대학 뒤 봉황산 마루에 있던/ 관.일 혼성부대가 농민군의 포위공격에/ 쫓기어 무기 버리고 성내로 도망간 이야기,//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역사도 울고/ 산천초목도 울었다.// 공주 우금티,/ 황토흙 속 유독 아카시아가/ 많은 고개였어,//어느 여름/ 땀 흘리며 뻐스로 올라가는/ 이 고개는 매미소리뿐이었지,// 그날 낯선 여학생이 나 보고/ 까닭없이 웃었지,/ 오빠였을까? 형무소에서 나오던/ 그 잘생긴 사내,// 그리고 어느 핸가/ 폭격이 있었다, 황소가 쓰러져 있는 마음/ 고갯길 한가운데/ 탱크가 누워 있었지,/ 부러진 포신.// 귀를 째는/ 제트기 폭음,/ 즐비하게 흩어진 외제/ 기관포 탄환/ 의 깍지,// 그 우금티 고개에서/ 동학군은 악전고투했다,/ 상봉 능선에/ 일렬로 배치,/ 불을 뿜는/ 왜군 제5사단의/ 최신식 화력,// 야전포,/ 기관총,/ 연발소총,/ 수류탄.// 꽃이 지듯/ 밑없는 어둠으로/ 수백명씩/ 만세를 부르며,/ 흰 옷자락 나부껴/ 수천명씩/ 차례차례/ 뛰었다,// 민족의 제전,/ 반도의 상봉우리 높이/ 불타고 있는 저 모닥불 속에/ 던져라,/ 우리의 젊음,// 없었노라/ 이 목숨 내맡길 자리./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성화(聖火),// 젊음을 부르는/ 성화,/ 왔노라,/ 이제야 왔노라/ 거대한 천명.// 이제야 보았노라/ 우리의 하늘/ 발밑에서 불타는/ 우리의 하늘,// 던져라/ 젊음,/ 던져라/ 창,/ 던져라/ 증오,/ 던져라/ 반역,// 영원의 강물이/ 우릴 손짓한다// 오, 위대한/ 몸부림이여// 깊은 하늘,/ 용광로 불길 속에/ 사방, 팔방에서/ 무수히 던져지는/ 저 꽃다발,// 지글거리는/ 역사의 밭이여,// 꽃불 튀기는/ 피의 잔치여,// 내가 왔노라,/ 이제야/ 내가 여기 있노라,// 뼈를 남기고/ 승천하는/ 승리여,// 내 여기 왔노라/ 이제야/ 처음, 내 여기 왔노라,// 내 여기서/ 불타며 승리했노라,/ 살덩이를 여기/ 찢어던지며/ 내 영혼은 여기서/ 승리했노라,/ 만세,/ 만세를 불렀노라,/ 노래했노라/ 우리의 형제들은,// 다음날의/ 백화 요란한/ 하늘밭 위해/ 우리의 목숨을/ 거름밭에 던졌노라/ 용감히 노래하며 던졌노라,// 알맹이를 발라서/ 던졌노라.//
제21장// 사흘 밤낮의 싸움 끝에/ 전봉준은/ 총 후퇴령을 내렸다.// 하늬는 이때 30명의/ 장정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봉황산 골짜기에 들어가/ 일본군의 대포 2문을 파괴하고,/ 관군의 본부 향해/ 화살 편지 쏘았다.// "왜놈들 미워하긴/ 그 대들이나 동학군이나 다를 바/ 없을 줄 아노라// 총부릴 어서 왜놈들의/ 등으로 돌리오."// 뒷날 전해진 이야기로, 3천의 관군/ 거느렸던 서산군수 성하영은 편지 보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의 곁엔 일군의/ 감시병이 24시간 떠날 날 없었다.// 갑자기 잠잠해진/ 함성소리,// 하늬는/ 척추에 땀 느끼며/ 유격대의 후퇴를 지휘했다,// 40보 앞 개울에서/ 포환이 터졌다, // 엎디었다,/ 뒤에서 또 터졌다/ 어디서 또 터졌다/ 콩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 마당쇠의 고개가 부러져 있었다,// 하늬는 보았다/ 능선 바위 사이 히노마루/ 기관총 사수,/ 검정 군복의 이마//쏘았다/ 겨냥없이,// 미움으로, 겨냥하고/ 마음놓고 쏘았다,// 기관총이 굴러떨어졌다.// 하늬는/ 뛰었다,// 보리 뿌리/ 쥐어뜯으며 전우들은/ 꺾여져 있었다,// 산마루 눈을 흡뜨고/ 네 활개 벌렁/ 왜군 기관총 사수는/ 누워 있다,// 피가 어깨를 적시고/ 흙에로 스민다/ 피의 고향은 흙일까?// 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여기가 어딘데?// 너에게도/ 고국 가면, 콩밥 묻어둔/ 아랫목// 쪽니 나온 마누라가/ 웃고 있겠지?// "불쌍한 것들"// 하늬는/ 흙 한줌 주검의 가슴 위/ 던져주며 뛰었다.// 골짜기마다 시체의 산/ 피 의 개울,/ 싸움은 끝난 걸까?// 초겨울,/ 보리밭에 뿌려진/ 허연 거름 건더기처럼/ 골짜기, 갯바닥을 덮은/ 누더기 죽.// 몇 달 두고/ 금강 이쪽 저쪽에선/ 살기름냄새 가시지 않았고// 우금티, 무너미 황토고개에선/ 지금도 간간이/ 밭 매다 뼈마디 추려내는 일/ 있다 했다,// 진아가, 와 있었다고/ 들었다, 앞치마 두르고/ 부녀자들 속에 섞여 동학군의 밥/ 나르고 있었다 한다.// 하늬는 이인 장터에 이르렀다,/ 어제까지 수백의 아낙들이/ 국을 끓이고 부상병을 치료하던 장터는/ 홍수 지나간 갯벌처럼 쓸쓸하였고,/ 수십개의 가마솥, 생솔가지 꺾어 만든 막사들만/ 주인 잃고 쓰러져 있었다.// 진아는 어디 갔을까./ 그리고 그 많은 아낙들은,/ 또 부상병들은?// 하늬는 소로길을 들어/ 계룡을 향했다,// 계룡산/ 갑사로 가는 길가엔 농바위 있다, // 어느 해 여름/ 우린 손길 맞잡고 휘파람 날리며/ 깨꽃 피는/ 절길 걸었었지,/ 참외.// 인천에서 내려오는 길이라는 어느/ 할아버지가 동학란 때 얘길 들려줬다,// 미처 후퇴 못한/ 부상 농민군이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일병, 왕병 수백명이/ 포위하고 기관포 난사하여/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남자들은 없었고, 아닌밤중 천지 뒤집는/ 총소리에, 부녀자, 노인, 어린애들은/ 방에서 부엌, 부엌에서 변소로 뛰다가 죽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20여명의 아낙들이/ 불붙은 옷을 찢어던지며 뛰다가 일.왕병에/ 잡히어 윤간당하고 살해되었다,// 옹기장수 부인 하나는, 일본군의 국부를 뽑아 죽이고/ 자기도 혀 깨물어 자결했다,// 열두 살 먹은 소년 하나가, 헛간 속에 숨어 있다가/ 엄마의 비명소리/ 듣고 달려가 일본군의 등에 쇠스랑을/ 꽂았다,// 어느날 밤/ 대창 든 검은 그림자 셋이/ 나타나 일본군 보초 두 명의/ 가슴 뚫어놓고 총 뺏어 사라졌다,// 며칠 후/ 역시 대창 든 세 그림자가/ 나타나, 관군 둘, 일본군 하나의 가슴/ 뚫어놓고 사라졌다,/ 그러나 뒤쫓은 일제사격,/ 벌판을 뛰던 세 그림자 중 두 개가/ 거꾸러졌다,// 머리에 노랑 수건 두른/ 고향 모를 농민들이었다,// 자취 감춘/ 한 사람의 게릴라가/ 하늬였을까,// 억수로/ 비가 쏟아졌다,/ 초겨울인데도 여름비처럼/ 이틀 밤을 쉬지 않고 퍼붓는 비/ 그리고 때아닌 뇌성벽력,// 사람은/ 산천의 아들,/ 아들이 아프면 산천도 찡그린다,/ 사람 마음에 궂은일이 있으면/ 산천도 따라 울어줬다,/ 외적의 행패가 못마땅해/ 산천이 날씨를 궂혀 방해하고 있는 걸까,// 갑사에서 하루를 묵은 하늬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팔도강산에/ 고루 내리는 빌까,/ 서곡은 끝났다./ 우선 끝났다,// 뇌성벽력은 누구의 분놀까,/ 누구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 걸까,// 십만의 농민이/ 죽고 다쳤다, 이제 그 가족/ 50만명이 학살당하고/ 주리틀리고 곤욕당해야 한다,// 하늬는/ 계룡산 주봉 향해 뛰었다,/ 뛰다 걷다 뛰다 쓰러졌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쥐어뜯으며 뛰었다.// 비는 옷을 적시고/ 살 속 스며 허리 아래로/ 흘러나리는 강물,// 상봉에 가까울수록/ 뇌성은 하늘을 가르며/ 으르렁거렸다,// 하늬는 기구하며 뛰었다, 벼락아/ 때랴라, 벼락아. 벼락이여, 나를 때려라, 내/ 대갈통을 부숴라, 벼락이여, 이 못 난 놈을/ 박살내다오, 벼락아, 벼락이여// 하늬는 어느새 상봉에 올라와/ 바위 위 무릎 꿇고 있었다,// 비는 더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도 더 무섭게 으르렁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맑아왔다,/ 네 활개 벌리어/ 바위 껴안고 잠들어 있었던/ 하늬,// 비는 멎고/ 하늘은 맑았다,// 아침,/ 눈부신 태양이/ 동쪽 먼 산마루 위/ 떠 있었다,// 저 태양은/ 영원한 걸까,// 금강의/ 부드러운 물굽이가/ 멀리서/ 희게 빛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이 흘러가는 강물.// 등성이 두어개만 내려가면/ 애화 얽힌 오누이탑,/ 그리고 동학사,/ 진아와 앉아 쉬던/ 돌방석, 아직도/ 나무 그늘 반쯤/ 비껴 있을까?// 시뻘겋게 젖어 있는 바위,/ 봉황산에서 부상한 손바닥/ 찍어붙인 쑥이 비에 씻겨 없어지고/ 피가 맘껏 흐르다가 제풀에/ 멎어 있었다.// 들여다보았다/ 손. 맞창이 난/ 손바닥.// 벼 베러 다니던 손,/ 진달래 꺾어 이웃 소꿉동무/ 나누어주던 손// 진아의 보드라운 볼 어루만질 때/ 그리고 그녀의 가슴/ 허리 아래 어루만질 때/ 이 손은 내 전부였다/ 생명,/ 천재,/ 그녀는 자주 내 손/ 되받아, 꼬옥 쥐어왔지// 마곡사에서/ 범종 함께/ 쳐볼 때도 이 손이었다.// 엄마는 비오는 날,/ 비./ 어떻게 생겼을까,/ 내 손 만들어놓고 간/ 엄마는,/ 그 피는 어떤 피였을까,// 눈/ 마음은,/ 목소리.// 하늬는/ 바위 위 기댔다,/ 동쪽 향해 경사로 누웠다.// 반도 위/ 누워 있었다,/ 눈을 감았다,/ 원허(原虛),/ 텅빈 바람의 마을,// 눈을 떴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박혀 빛난다,// 눈을 감았다,/ 하늘,/ 가슴 속/ 생명 속, 안방 다락방가지/ 골고루 적셔 들어오는 하늘소리.// 꿈이었을까/ 반도, 산과 마을/ 도시와 농촌,// 태평가 부르며/ 일하는 노동자들 머리마다에서/ 분수가 솟았다,// 반도 전역은/ 옥 같은 분수,// 분수에 휘말려/ 곤두재주 넘으면서, 쏟아진다, 쏟아진다,/ 무수한 양반 아전, 수령 왕족들이/ 바다로 쏟아진다,// 양총 멘 뙤놈/ 왜놈들이/ 곤두재주 넘으면서 쏟아진다,// 전봉준은 어찌 됐을까,/ 김개남, 최해월은?/ 손병희, 손화중은?/ 재조직,/ 그렇다, 재조직,/ 그리고, 알맹이만 모은/ 유격부대 조직,/ 동학농민혁명위원회/ 의 깃발.//
제22장// 씻어내면 또/ 모여들 올 텐데,// 씻어내면 또/ 또 열흘도 못 가/ 모여들 올 텐데,// 이 맑은 피로만/ 채워 버리면/ 좋겠는데,// 이틀도 못 가/ 검은 찌꺼기들은/ 또 모여들 올 텐데,// 그러나, 내일/ 새 거품 모여 올지라도/ 우선, 오늘/ 할 일은//씻어내는 일,/ 저 하늘의 검은 찌꺼기/ 오늘 할 일은 모두/ 씻어내는 일.// 1960년 4월/ 우리의 남이는 소방차 앞에서/ 허리를 꺾었다,// 유에스의 상표 찍힌/ 탄환이 그의 어깨를/ 쪼갰다.// 26일,/ 옆에 라일락 가지 들고/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남이는 꽃에 손을 뻗치며/ 입을 열었다,// 하늘을 보았죠? 푸른 얼굴./ 영원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어./ 우리들의 발밑에,/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우리들은 보았어, 영원의 하늘,/ 우리들은 만졌어, 영원의 강물, 그리고 쪼갰어,/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하늘./ 우리들은 이겼어.//
제23장// 10월 25일/// 공주 우금티의 결전 이후/ 일본군과 이왕병은, 패잔한 농민군, 농민군 가족,/ 농민군에게 밥 지어준 부녀자들까지 수색, 추격,/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가는 곳마다, 마을은/ 태풍이 지나간 벌판처럼/ 쓸쓸하였고,/ 두어 그루의 나무가/ 중동이 부러진 채 추레하고/ 서 있었다,/// 집집마다 연기가 끊어지고/ 인적도 끊어졌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땅을 굽어보고, 그러나 눈은 불안에/ 떨면서, 그렇지/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바삐/ 지나갔다,/// 눈발 날리는/ 11월 한 달, 가마니 짜고/ 짚신 삼는 12월 한 달, 다음해/ 정월 대보름, 2월, 3월/ 자운영 피는 춘궁기까지,/ 이왕병은 왜군과 손잡고 다니면서/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총검으로 쑤셨다,/// 영동에선/ 아궁이 속 숨어 있는/ 일곱 살짜리 계집앨 끌어내/ 아버지 있는 곳 대지 않는다고/ 기관총 갈긴/ 일병,/// 청산에선/ 미친개, 이진호 이겸제 등이 거느린/ 왕병과 일군 기관총 소대가/ 350명의 농민 사살하여/ 보리밭에 버렸다,/// 그들은 그 다음날/ 옥천에 들어가/ 동학교도 정원준 서도필 등/ 아홉 명의 노인을/ 눈 사태 속 끌어내/ 발까벗겨 세워놓고/ 사격,/// 이두황이 인솔한 왕병은, 왜군 기관총소대의 지원을/ 얻어 온양에서 농민 90여명을 창고 속에 몰아/ 넣고 불질렀다, 그리고 동네 부녀자들 강간한 뒤/ 기관총 난사./// 이두황, 그도 엄마 젖을 빨며 자란 사람 아들이/ 었을까, 바람 맑은 반도에서도 이따금 그런/ 고장난 기계가?///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120명, 400명,/ 270명씩 총살하고 강간하며/ 해미, 서산, 매현/ 유구, 노성, 은진/ 정산 등으로 설쳤다,// 이제 고만,/ 팔도 휩쓸던 이런/ 고장난 얘기는 끝도 없고/ 부끄러운 얘기,/// 다만/ 아직도 몇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후퇴령을 내린 전봉준은/ 잔존부대 만여 명 이끌고 전북/ 금구까지 와,/ 산과 내를 이용하여/ 반격태세 갖췄다,// 그러나 월등한 화력 앞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아성,/ 대포와 기관폴 맨몸으로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봉준의 오른쪽 어깨엔/ 깊숙한 파편,/// 봉준은, 자진 해산령을 내렸다,// "동지들,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 기다리고 있어주오."// 눈 벌판 속을,/ 순창 땅 향해/ 산길 걷는 외로운/ 그림자,/ 봉준의 마음,// 하늬가 말하던/ 유격대,/ 유격작전을/ 생각하며 산길을 뛰었다,/ 순창군 노피리/ 김접주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갑오년 12월 초이틀,/ 밤,// 군불 넣은/ 쩔쩔 끓는 아랫목./ 밖에선 함박눈,/ 내년의 풍년을 예고하는/ 소담한 함박눈이/ 오리나무 숲의 시린 발등을/ 덮으며/ 쌓인다,// 지리산 양지쪽,/ 눈 덮인 붉은 흙 속에선/ 쑥, 진달래 뿌리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그 향내나는 살로,// 처마 속 잠자던/ 참새들이 푸득푸득 날아/ 뒤꼍 장작우리 속으로/ 숨었다,// 그날 새벽/ 봉준은,/ 눈길 위 자죽난/ 천냥의 현상금 따라 뒤쫓아온/ 토반 관병 스무 명에게 포위되어/ 묵였다,// 눈먼 토반들은/ 다음날 천냥 받고 봉준을/ 일본군에게 인도했다,// 봉준은 동아줄로 묶인 채/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 들 것을/ 네 귀통이서 얽매고 가는/ 사람은 상투 튼 조선사람/ 그 뒤 총 들고 따르는 담배 피는/ 사람은 왜놈,// 봉준은/ 서울 오는 나흘 동안/ 입 한번 열지 않았다.// 눈은/ 감은 채, 물 한모금/ 담배 한모금/ 입 대지 않고/ 조용히, 그림처럼 정좌하고/ 있었다// 머리 위서/ 반도의 하늘이 그를 호송하는 듯/ 따라오고,// 어디선간/ 방울새, 한 마리/ 그의 어깨 위 날아와 앉았다간/ 냇물 건널 때/ 날아갔다,// 산이/ 가면 마을, 마을이/ 가면/ 들이 열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맛보는 사람,// 돌아다니는 사람은/ 먹는 사람.// 을지로 6가/ 지금은 도로공사로 헐렸지만/ 광희문 밖,/ 언젠가/ 미군 찦이/ 대폿집 들이받아/ 안방 뒤집어놓고/ 핸들 잡은 채/ 껌 씹고 있던,// 그리고 그 앞으로/ 천연스럽게/ 여대생,/ 너는 걸어오고 있었지,// 지금도 있을까/ 녹두지짐이를 팔던/ 눈이 무른 그/ 과부댁들,// 언제 보아도, 광희문/ 너는/ 우중충한 돌이끼.//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왔다,// 형리가/ 동아줄 끄르는/ 자기 손가락마저/ 분간 못할 만큼/ 비가 쏟아졌다,/ 온종일,// 그리고/ 오후 세시, 돌문 밖/ 질경이랑 반지꽃이랑 냉이랑/ 예쁘게 돋은 흙언덕/ 높은 장대 위,// 교수된/ 전봉준의 머리는/ 칼로 다시 잘리워/ 매달리웠다,// 다섯 차례의/ 혹독한 왜식 고문,/ 일본인 낭인 武田, 田中(다나까)의 번갈은/ 일본망명 권유,/ 인품에 감동, 뒷날의 쓸모를 계산한/ 일본 공사 井上(이노우에)의 은근한 호의,/ 들은 체하지 않고/ 발밑에 이까려 버린/ 농민지도자/ 전봉준의/ 비.// 그는/ 목매이기 직전/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하늘을 보아라 !"// 그의 곁엔/ 고창에서 체포된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의 머리가 나란히 효수됐다,// 그 앞을 누가 지나갔고/ 누가 지나왔을까,// 그리고/ 며칠 후, 서소문 밖/ 장터 네거리엔 전주 숲정에서/ 참수된 김개남, 성제식의/ 머리가 효수됐다,// 맨발벗은 아이들이/ 손가락 물고 서서/ 구경하고 있었을까,// 그 무렵/ 여행용 트렁크 들고/ 한양성에 들른 영국 관광객/ 비숍여사는, 표현했다, 효수된/ 혁명지도자들,/ 얼굴마다,/ 서릿발이, 엄숙하고/ 잘 생겼더라고,//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서 다음해 봄까지 사이/ 전국에 50만명의 농민이 봉기,/ 싸웠다,// 그리고/ 십만명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었다.// 충청, 전라도에선 전지역,/ 경상도 상주, 문경, 영주,/ 진주, 마산, 밀양, 김해,/ 강원도 원주, 춘천, 홍천,// 황해도 해주, 사리원, 배천,/ 구월산, 풍천, 장연, 수안,/ 평안도 용강, 평양, 신의주,/ 정주, 진남포/ 함경도 원산, 청진,// 방방곡곡에서/ 쇠스랑 들고 함성지르며/ 일어났다,// 벗고도 싶었으리라, 굴레,/ 찢고도 싶었으리라, 알살 덮은/ 쇠항아리./ 찢어진 쇠항아리 사이로 잠깐/ 빛난 하늘,// 살무더기의 소망/ 꽃들의 기구/ 쌀밥사발의 기원,// 누가 꺾었나,/ 그러나/ 꺾였을까?// '밀알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로 있을 뿐이나,/ 땅에 떨어져 썩으면/ 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리라.'//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 보고,/ 번식도 없다.//
제24장// 봄 달은/ 몸뚱아리엔/ 꽃이 피었다.// 멍석/ 그늘.// 돌창을/ 던져라,// 꽃힌/ 바위.// 호수 위엔/ 맑은 바람// 아우성은/ 승리 높이// 상천에/ 뻗고,// 죽음은/ 빛났다.// 숱한 낮./ 태양 익은/ 능선 따라// 서린/ 입김.//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연고(戀苦)는/ 빛났다.// 새벽/ 별/ 이슬 쏟은/ 네 발// 문/ 사자.// 죽음은 썩고/ 뿌리 적신/ 생피.// 비단 젖가슴/ 흙밭 위에,// 억센/ 사지,//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돌창을 꽂아라/ 푸른 동자.// 쓰러지지 않았다,/ 혼은/ 뛰쳐나와/ 하늘을/ 갔다.// 숱한 밤./ 멍석딸기 골짝마다// 꿈은,//
제25장// 진아는/ 금강가에 서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 수면은, 수억만 개의 물팡개/ 싣고 흘러간다// (하략)
제26장// 꽃노을/ 아름답게 물든 저녁 나절/ 웬 낯선 청년 하나가 산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형장의 중앙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형리들의 손/ 뿌리치며,/ 그리고선/ 눈 위에 네 활개/ 펴고 드러누웠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사나이, 얼굴에/ 돋는 무지개// 어서/ 나, 찢으라고 말할 뿐/ 딴 말이 없었다,// 한쪽/ 손바닥에/ 덜 아문/ 흉터가 있었다,// 네 쪽으로/ 찢길 때도/ 떡이 찢기듯,/ 살덩이만 몸부림쳤을 뿐,/ 신음소리 하나/ 없었다.//
後話 <1>//
後話 <2>// 1894년 3월/ 우리는/ 우리의 가슴 처음/ 만져보고, 그 힘에/ 놀라,/ 몸뚱이, 알맹이채 발라,/ 내던졌느니라./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19년 3월/ 우리는/ 우리 가슴 성장하고 있음 증명하기 위하여/ 팔을 걷고, 얼굴/ 닦아보았느니라./ 덜 많은 피 흘렸느니라.// 1960년 4월/ 우리는/ 우리 넘치는 가슴덩이 흔들어/ 우리의 역사밭/ 쟁취했느니라./ 적은 피 보았느니라./ 왜였을까, 그리고 놓쳤느니라.// (중략)// 논길,/ 서해안으로 뻗은 저녁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할지도/ 몰라.//
신동엽 시인의 장편서사시 금강이 <칸타타 금강>으로 제작되어 2012년 11월 공연되었다.
서사시와 관련한 노래 22곡이 만들어져 공연 되었다.
* 칸타타(Cantata)는 ‘노래한다’라는 뜻을 가진 이태리어 ‘Cantare’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내용을 몇 개의 악장으로 나누어 구성한 큰 규모의 성악곡.
2번째 곡 : 낙지 말거머리와 빈대 (테너 임정현 外)
4번째 곡 : 자장가 (메조소프라노 김지선)
8번째 곡 : 고구려의 밭, 백제의 씨 (테너 임정현 外)
12번째 곡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테너 임정현 外)
17번째 곡 : 다시 만나는 날 (테너 임정현 外)
20번째 곡 : 나 여기 왔노라 (테너 임정현 外)
22번째 마지막 곡 : 언젠가 만나지리라 (테너 임정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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