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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병란 시인

부흐고비 2021. 9. 9. 08:07

꽃씨 /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과/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꽃에게 / 문병란
차라리 마지막 옷을 벗어버려라.// 밤마다 비밀을 감추고/ 마지막 부분,/ 부끄러운 데를 가리우던/ 그날부터,// 내 앞에 위태롭게 서 있던 자태,// 너를 탐내는 눈 앞에/ 너를 더듬어 찾는 음모의 손길 앞에/ 간신히 지켜온/ 비밀,/ 가장 안에 감춘 빛나는 아픔을 보여주어라.// 그 어느 빛의 언저리에서/ 감음 당하는 너의/ 花心,/ 이 눈부신 밝음 앞에/ 탐욕의 눈길들이 너를 찾고 있다.// 오늘의 수치,/ 白晝의 無法 앞에/ 알몸으로 떨고 있는 꽃이여,// 아슬아슬한 빛의 난간에서/ 네가 마지막 지킨/ 분노,/ 어느 절정에 눈을 꼭 감고 있느냐.// 이제 지켜야 할 아무것도 없는/ 赤裸裸한 가슴,/ 차라리/ 찬란한 밝음을 갈갈이 찢어버려라.//

꽃가게 앞을 지나며 / 문병란
그 꽃빛깔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진/ 온갖 꽃들이 진열된/ 꽃가게 앞을 지나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문득/ 너의 이름이 떠오른다.// 진정 그리움이란/ 진홍빛 장미꽃만큼이나/ 간절히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냐.// 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 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 거기 눈부신 이국종/ 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 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 삶의 외로움 나누는/ 목마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 이리도 간절히 발돋음해 애태운다.// 오라, 노을 지는 꽃길 위에/ 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

꽃의 생식기 / 문병란
매사에 박식한 K교수가/ 꽃의 생식기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물었다.// 내가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 사이/ 그는 꽃이 바로 생식기라고 했다.// 인간의 치부, 그것이 부끄러워서/ 꽁꽁 가리고 살기에/ 밝은 햇살 아래/ 온통 드러내놓고 환히 웃는/ 그 꽃이 바로 생식기라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옳거니!/ 그 빛깔 향기에 반하여/ 꺾고 만지고 냄새 맡았던 꽃/ 나도 그 꽃을 하나/ 몰래 감추고 있음을 알았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잎사귀로 가리던 때부터/ 너와 나의 꽃은/ 밤에만 피는 숨겨진 꽃이었다.// 오늘도 꽃은/ 밝은 햇살 아래/ 빛과 향을 머금고/ 눈부신 생식기로 환히 웃고 있다.//

가로수 / 문병란
향수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폐허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 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열에 창문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국들이 돌아오는 오후의 입구,/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고독을 나누며 가는 계절의 좁은 길.// 빈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호흡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3월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 너는 보내야 했듯이 또 맞아야 하기에/ 철 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은 미쁘운 여인.// 여기는 계절이 맨발로 걸어왔다/ 맨발로 걸어 돌아가는 길목.// 가자,/ 우리 소망의 머언 산정이 보이면/ 목이 메이는 오후./ 가로에 나서면/ 너와 같이 나란히 거닐고 자운// 너는 5월의 휘앙세, 기대어 서면 너도/ 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

겨울 보리 -농부의 잠 / 문병란
농부의 가슴보다 따뜻한/ 검은 흙 속에서 滋養을 머금고/ 한 방울의 땀이 여물어/ 大地의 심장에 뿌릴 박는다.// 지난 여름 농부의 손이 주물러/ 더욱 부드러워진 흙,/ 그 몽글몽글한 가슴 속에/ 한 알의 씨앗을 키우는 마음,/ 억센 농부의 욕망이 묻혀 있고/ 새벽잠을 깨우는 아내의 배가 부르다.// 봄이 오면 싱싱한 푸름을 티우는/ 大地./ 무성한 머리털이 덮이면/ 五月 바람이 간지리고/ 농부는 긴 잠에서 기지개를 켠다.// 아내의 곁에서 지낸 겨울 밤/ 농부의 가슴에 크는 씨앗,/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다/ 보리 나까리를 꿈에 본 농부,/ 立春 가까운 어느 날 잠을 깬다.// 지난 가을 씨앗을 뿌릴 때/ 아내를 사랑했던 농부,/ 해산 달을 꼽아보는 손가락 끝에서/ 이상한 힘이 솟아나는 욕망의 새벽,/ 그는 서서히 기름진 밭으로 간다.// 오 大地여, 보리처럼 굳세고/ 보리처럼 싱싱한 농부의 육체가/ 부드럽게 흙을 주무를 때/ 아내의 잠은 깨어나고,/ 보리는 보람진 滋養으로 여물어간다.//

첫눈 / 문병란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사내들은 모두 예수가 되고/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여자들은 모두 천사가 된다/ 여보게 우리도 이런 밤/ 소주 몇 잔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 가에 언 손 부비며/ 쓸쓸한 추억하나 만들어볼까/ 만원짜리 한 장에 꿈을 달래고/ 포실거리는 눈발에 맞춰/ 여보게 우리도 첫눈 밤 같은/ 사랑 하나 만들까/ 그립다/ 첫눈이 내리면 먼데 마을 하나 둘 등불 꺼지고/ 지금쯤 그리운 사람은/ 혼자서 외로이 잠이 드는데/ 창가에 기대어 먼데/ 여인의 발자국 소리 엿들어 볼까/ 이런 밤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파리 떼와 더불어 / 문병란
사람이 모여 산 그날부터/ 어차피 너도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한 그릇의 보리밥 위에서/ 앙징스럽게 두 손을 비벼대며/ 내 먼저/ 성찬을 즐기는 파리 떼// 나는 감히/ 그의 무례를 나무랄 자신이 없다./ 생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 어두운 골목을 드나들며/ 똥내와 된장내를 구분해야 하는/ 나의 슬픈 코는 구토를 배운다.// 어쩔 수 없이 너와 더불어 살게 된/ 나는 슬픈 人間,/ 아무리 DDT를 뿌린다 해도/ 오늘의 증오는 가시지 않는다.// 죽여도 죽여도/ 오히려 나를 비웃는/ 너의 우주 비행/ 너와 나의 싸움은 계속된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오는/ 너와 나는/ 어차피 하나의 운명인가.// 내 앞에 놓인/ 한 그릇의 보리밥과 된장찌개 위에서/ 유유히 성찬을 즐기는 파리 떼/ 나는 그를 향하여 필살탄을 퍼붓는다.// 증오여, 증오여,/ 마음을 썩히고,/ 오늘의 구린내 위에서/ 너와 나는 어쩔 수 없이 대결하고 있다.//

 

엉머구리의 합창 / 문병란
해질 녘/ 어두워 가는 들판에서/ 엉머구리 떼가 운다.// 개굴개굴 개골개골/ 수 십 마리 수 백 마리/ 종당엔 수천 마리가 되어/ 한꺼번에 개굴개굴 울어댄다.// 그들은 왜 우는 걸까./ 집이 없는 것일까./ 배가 고픈 것일까./ 서러운 땅의 서러운 개구리들이/ 이 밤도 개굴개굴 울어댄다.// “저 요란한 소리는 무엇인고?”/ “예, 배고픈 백성의 소리올시다!”/ “당장 그 소리 그치게 하지 못할까?”/ “원체 무식한 엉머구리라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짐의 마음 심히 불쾌하도다”/ 억척같이 우는 엉머구리들을/ 엄벌에 처하는 법을 만들지어다!“// 법도 사상도 모르는 무식한 엉머구리 떼,/ 누가 저 울음소리를 멋게 할 것인가/ 누가 저 우는 개구리를 벌할 것인가/ 자식의 무덤이 떠내려가고/ 애비의 무덤이 떠내려가고/ 짓궂게 계속되는 장마/ 배고픈 엉머구리들이 울고 있다.// 여기서도 개굴개굴/ 저기서도 개굴/ 날마다 개구리의 장례식은 계속되고/ 본시 울기를 좋아하는 엉머구리 떼,/ 아이고 아이고/ 밤마다 초상집 통곡 소리만 요란하다.// 근심 띤 구름 어지러이 뒤덮고/ 또 작달비는 퍼붓는데/ 법을 모르는 무식한 엉머구리 떼들,/ 운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을 모르는/ 본래 울 줄밖에 모르는 엉머구리 떼들.// 배가 고파도 개굴개굴/ 임이 그리워도 개굴개굴/ 에미가 죽어도 개굴개굴/ 팔도의 온갖 개구리 떼 모여들어/ 서러운 합창을 부르고 있다.// 개굴개굴/ 개골개골/ 걀걀//

아버지의 귀로 / 문병란
西天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 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歸路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 위에도/ 부드러운 夕陽의 입김이 어리우고,/ 上司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 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 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 딸 앞에서는/ 그 어느 大統領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王國/ 主流와 非主流/ 與黨과 野黨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 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노을!// 무너져 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목포 / 문병란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소주 한 잔을 기울일거나// 벌거벗은 빈 산/ 돌멩이 만지며 풀포기 뽑으며/ 서쪽 끝에 와서/ 삐비꽃처럼 목을 뽑아 올리다/ 로빈슨크루소가 되어버린 사람들/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술이 취해서 봐도/ 술이 깨어서 봐도/ 유달산만 으렁으렁 이빨을 가는구나.//

 

연가 5 -새끼들에게 / 문병란
이 애비는/ 식민지의 하늘 밑에서/ 쑥죽을 먹으며 자라났고/ 너희들은/ 분단 시대의 하늘 밑에서/ 정부미 혼합곡을 먹으며 자라난다./ 대 물려온 할아버지의 가난을/ 이 애비가 물려받았고/ 이 애비의 가난을/ 너희들이 물려받을 것이다./ 우리들에겐 이미 익숙한 가난,/ 한 번도 잘 살아본 적이 없기에/ 우리들은 가난 따위를 걱정하진 않는다/ 양옥집에 사는 사람들 부러워하지 말아라/ 자가용 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콩나물 아침 시내버스에 흔들리면서/ 남의 발등도 조금 밟으면서/ 증오보다는 사랑,/ 돈보다 의리가 더 값진 재산임을 믿으라/ 가난은 또 하나의 스승,/ 궁핍 속에 고이는/ 풍성한 눈물을 배우라/ 척박한 땅,/ 맹물을 마시고 고운 꽃을 피우는/ 봄철 민들레의 웃음을 배우라/ 오늘 이 땅에는/ 남의 총 남의 깃발이 길을 막는데/ 팝송을 들으며/ 코카콜라를 마시며/ 코밑이 까칠해지는 아들아/ 아무리 달콤하게 속삭일지라도/ 아무리 술술 잘 넘어갈지라도/ 애들아, 너희는 구정물통에 뜬/ 기름진 선진국의 기름덩어리./ 먹고 남아 돌아가는 버터에 길들은/ 할렘가의 검둥이가 되지 말아라/ 국적 모를 洋돼지가 되지 말아라/ 나의 아들 딸들아!//

불혹의 연가 -영산강 賦 / 문병란
어머니/ 이제 어디만큼 흐르고 있습니까/ 목마른 당신의 가슴을 보듬고/ 어느 세월의 언덕에 서서/ 몸부림치며 흘러온 역정/ 눈감으면 두 팔 안으로/ 오늘도 핏빛 노을은 무너집니다.// 삼 남매 칠 남매/ 마디마디 열리는 조롱박이/ 오늘은 모두 다 함박이 되었을까/ 모르게 감추어 놓은 눈물이/ 이다지도 융융히 흐르는 강/ 이만치 앉아서 바라보며/ 나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보셔요, 어머니/ 나주벌 만큼이나 내려가서/ 3백리 역정 다시 뒤돌아보며/ 풍성한 언어로 가꾸던 어젯날/ 넉넉한 햇살 속에서/ 이마 묻고 울고 싶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흐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새끼 네 명을 키우며/ 중년에 접어든 불혹의 가을/ 오늘은 당신 곁에 와서/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남은 사연이 있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흐르는 강/ 누군가 소리쳐 부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목마른 정오의 언덕에 서서/ 내 가슴 가득 채우고 싶은/ 무슨 커다란 슬픔이 있어/ 풀냄새 언덕에 서면/ 아직도 목메어 흐르는 강,/ 나는 아득한 곳에서 회귀하는/ 내 청춘의 조각배를 봅니다.// 이렇게 항상 흐르게 하고/ 이렇게 간절히 손을 흔들게 하는/ 어느 정오의 긴 언덕에 서서/ 어머니, 오늘은/ 꼭 한번 울고 싶은 슬픔이 있습니다./ 꼭 한번 쏟고 싶은 진한 눈물이 있습니다.//

땅의 연가 / 문병란
나는 땅이다/ 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 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 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 아픔을 참으며/ 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 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 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 가만히 쓰러지는 사람/ 농부의 때 묻은 발바닥이/ 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 멋대로 사랑해버린 나의 육체/ 황토 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 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 연한 잠 속에서/ 나의 씨앗은 새 순이 돋친다.// 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 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 욕망의 말뚝을 박는다.// 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내 아픔을 밟으며/ 누가 기침을 하는가,/ 5천 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먹고/ 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먹고/ 슬픈 씨앗을 키워 온 가슴/ 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 나를 사랑해다오, 길게 누워/ 황토 빛 대낮 속으로 잠기는/ 앙상한 젖가슴 풀어 헤치고/ 아름다운 주인의 손길 기다리는/ 내 상처 받은 묵은 가슴 위에/ 빛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다오!// 짚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고무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군화가 짓밟고 간 다음에도/ 탱크가 으렁으렁 이빨을 갈고 간 다음에도/ 나는 다시 땅이다 아픈 맨살이다.// 철철 갈기는 오줌 소리 밑에서도/ 온갖 쓰레기 가래침 밑에서도/ 나는 다시 깨끗한 땅이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다.// 오늘 누가 이 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 땅에 멋대로 線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 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 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직녀에게 /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냐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네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나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여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갈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호수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안 된다 / 문병란
순결과 꿈으로 고이 간직한/ 우리들의 소중한 사랑,/ 참된 마음에 뿌리박고 피어난 장미를/ 슬기롭고 아름답게 지켜온 우리들의 입술을/ 누구에게나 헛되이 바쳐서는 안 된다.// 추악한 자의 탐욕스런 권위 앞에/ 그들의 강퍅한 가슴/ 무지와 잔인으로 무장된 바로의 발톱 아래/ 한낱 먹이로 먹히우는 오늘의 사육,/ 그 돼지의 포만증을 달랠/ 오염된 구정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정에 뿌리박고 피어난 악의 꽃,/ 하루만의 영화에 취하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추파에 빼앗긴/ 탕녀의 입술,/ 교언영색의 부리로 조아리는/ 카나리아의 아양에 홀려서는 안 된다.// 무수한 구호, 양심을 앗아가는/ 저 아양진 꾀꼬리의 노래,/ 치사한 주둥이들의 합창에 막혀/ 마지막 지킨 의지/ 최후처럼 간직한 마음의 칼날,/ 오늘의 분노와 눈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우리들의 사랑을 헛되이 바쳐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순결은/ 저 바다의 입술에 바쳐져야 하고/ 너와 나의 피가 스민/ 조국의 흙 한 주먹,/ 수난이 스쳐간 이 땅의 아픔에 바쳐져야 한다.// 보다 깨긋하고/ 보다 빛나는 내일을 위하여/ 우리들은 열렬히 포옹해야 한다./ 우리들은 열렬히 사랑해야 한다./ 우리들은 열렬히 입맞춰야 한다.// 보다 큰 사랑을 위하여/ 보다 큰 가슴을 위하여.//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 문병란
새벽에 깨어나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가늘은 현악기의 현 끝에/ 아리게 떨리는 알레그로/ 내 고독한 혼도 따라 울고 있다./ 이 새벽 밖에서는/ 새록새록 싸락눈이 내리고/ 어디선가 외로운 목숨이/ 쓸쓸한 기침 소리로 돌아누울 때/ 노래는 2악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가/ 세상은 얼마나 무섭고 고독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도 없이/ 눈 내리는 이 새벽/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 산다는 것은 음악보다/ 얼마나 아프고 쓰린 울음인가/ 어디선가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누워간다/ 오 기침 소리/ 기침 소리여.//

인생 송가 / 문병란
어떤 사람은 인생을/ 허무하다고 탄식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지상의 축복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인생을 고해, 사막이라 적는다/ 더더욱 인생은 쓰디쓴 소태맛/ 오직 괴로움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루 낮 햇살 좋은 장성호(長城湖)/ 아름다운 물무늬 바라보며/ 나는 오늘 인생을 사랑이라 수정한다/ 찔레꽃 향그런 가시덤불 아래서/ 꽃뱀도 암수놈 어울어지는 봄날/ 나는 살아서 그대 고운 눈 애달파라/ 진흙밭 가시밭길 타오르는 불길속/ 그 많은 삶의 짐 무겁고 버거워도/ 장성호, 그 수심에게 물어 보아라/ 저 화무십일홍 웃으며 떨어지는/ 한 송이 복사꽃에 물어 보아라/ 변치 않는 사람도 변한 사람도/ 저 한철 울다가는 뻐꾸기/ 술잔을 들고 있는 나그네에게 물어 보아라/ 인생은 사랑이라고/ 인생은 눈물이라고.//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평화를 위한 파라독스 / 문병란
총칼을 들고 외치는 평화란/ 바로 살인적 휴머니즘/ 다음 전쟁을 위한 짧은 휴지부/ 지구의 첫날에도 끝날에도/ 그 단어는 가장 값비싼 거짓말이었다.// 오늘 한 강국의 지도자는/ 한 손엔 총칼 한 손엔 성경을 들고/ 이겨야 한다 응징해야 한다/ 승리 그것 아니면 죽음뿐이다/ 힘없는 평화는 다만 노예일 뿐이다./ 우리들의 손에 총칼을 쥐어 준다.// 독점과 아집과 승리 속에 평화는 없다/ 부귀영화 호황과 황금의 영광 위에 평화는 없다.// 평화를 외치는 저 시세로는/ 바로 평화의 살인자/ 애국을 부르짖는 저 애국자는/ 바로 평화를 담보로 전쟁을 사는 장사꾼/ 승리를 찬양하는 곳에/ 평화는 해골 앙상한 공동묘지/ 개선장군의 빛나는 깃발 아래 평화는 죽는다.// 젖 달라 칭얼대는/ 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그것은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다/ 꿀꿀대는 돼지 삐약삐약 병아리의 노란 주둥이/ 밤새우는 귀두라미 울음소리/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다.// 누가 저 엄마 품에 잠든 아기의/ 작은 우유병과 핸즈프리를 뺏는가/ 달빛 아래 연인을 기다리는 아가씨의/ 꿈꾸는 면사포와 드레스를 찢는가.// 악마의 사전 속에 평화란 단어는 없다/ 애국, 애국 외치는 웅변 속에 평화는 없다/ 평화는 오직 두 조각으로 나누는 사과 속에 있다/ 그대 손에 쥐어주는 한 덩이 작은 빵 속에 있다.//

희망가 / 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일본 / 문병란
나는 당신들을/ 벚꽃을 보듯 볼 수는 없다/ 4월 달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온몸으로 웃는 저 활짝 핀 꽃/ 그 꽃의 청신한 자태를 보듯 볼 수는 없다.// 누군가 말했다, 벚꽃은/ 순결하고 열정적이고/ 천하의 봄을 한꺼번에 물들이고 남는/ 넉넉하고 융융한 빛깔,/ 다 드러내고 감춘 것 없는 정직한 꽃/ 봄 동산 가득 향기로 채우는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꽃 이라고.//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벚꽃 피는 봄날/ 게이샤의 두 빰에 흐르는 홍조,/ 다소곳한 그 아미/ 간드러진 사미생의 가락에 따라/ 높고 낮게 흔들리는 살풋한 그 춤사위/ 진정, 그 일본의 여인의/ 아양진 연가를 듣듯 바라볼 순 없다.// 벚꽃의 향기 밑에/ 살모사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게이샤의 미소 밑에/ 피비린 닛본도의 칼날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자국내 자국끼리 통하는/ 일본 국민의 근면과 정직성이/ 남의 나라 국경을 넘어오면/ 침략이 되고 전쟁이 됨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 왔다.// 잘도 핀 벚꽃을 보면서도/ 우리는 피 내음새를 연상해야 하고/ 아름다운 국화꽃 속에서도/ 잔혹한 닛본도의 피 냄새를 잊지 않는다.// 우리의 남과 북의 기나긴 생이별의/ 진정, 그대들과 무관하다 생각하느냐/ 이 땅의 길고 긴 정치의 겨울이/ 진정, 그대들과 별개의 남의 일이라 생각하느냐.// 오늘, 일본은 또 하나의 아시아의 미국/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동양의 유태인 새로운 양키라고 보는/ 우리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달러를 등에 업은 엔화의 대리 역할/ 캘리포니아의 사막 무법자의 권총과/ 에도의 달빛 아래 빛났던 사무라이의 칼날/ 그 프런티어 정신과 대화혼이 합친/ 환태평양 시대의 새로운 안보의 고리,/ 미국의 적자와 일본의 흑자가 만나는 곳에서/ 한국의 38선은 더욱 멀어가고/ 미, 소, 일, 중, 새로운 균형 속에/ 인질로 잡힌 한반도의 분단사/ 새로운 제국에의 아련한 향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잉태하고 있다.// 진정, 당신들이 평화 헌법을 사랑하고/ 동양의 평화를 원하느냐/ 북한 동포의 자립 경제의 궁핍이/ 남한 동포의 저임금과 자유 쟁취의 갈망이/ 진정, 당신들의 부귀와 무관한 것이냐.// 독약에 숨진 민족시인, 복강 감옥의/ 윤동주의 넋이 역력히 외치고 있는데/ 도막도막 갈라진 사신, 기미년/ 유관순 누나의 부릅뜬 눈이 빛나는데/ 보는대로 죽이리라, 만주 하얼빈 역두의/ 안중근 의사의 육혈포가 절규하는데// 어떻게 쉽사리 잊을 수가 있는가/ 어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데/ 어떻게 속빈 창자 헤헤거리며/ 새로운 선린의 악수가 가능한가.// 오늘도 현해탄은 출렁인다/ 새로운 제2의 대동아 시대의/ 태풍주의보 발효 중/ 어디선가 아직도 총독의 소리는 들려오는데/ 북한은 고립시켜 목을 조이고/ 남한은 타락시켜 썩게 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건망증 왜색 가요를 부르기엔 쑥스럽구나/ 기생 파티 모셔 놓고/ 명월관의 추억 가야금에 실으며/ 그날의 창경원 벚꽃놀이 되풀이는 민망하구나.// 현해탄의 파도에 실은 은원의 세월,/ 관부 연락선의 난간에 기대인 사랑은/ 오늘도 짝사랑에 새로운 정사를 꿈꾼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홋가이도와 사할린 냉기어린 탄광,/ 막장에 묻힌 해골의 외치는 소리/ 관동군 군화 밑에 짓눌린 정신대,/ 나이 어린 조선 처녀의 신음 소리가/ 남양군도 밀림 석에 자지러지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백골로 울고 있다.// 오오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여/ 앙두구육의 경제 대국,/ 우리들의 피를 딛고 번영하는/ 20세기의 동양의 아메리카인/ 또 하나의 양키여.//

식민지의 국어 시간 /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일장기)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더러운 놈")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선생)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압록강 둑은 무사한가 / 문병란
눈물로 건넜던 이별의 다리/ 지금도 압록강 둑은 무사한가// 스무 살 직녀는 할머니 되어/ 뗏목에 실은 사연 옛 노래 부르는가// 압록강, 대동강, 영산강, 낙동강 강물은/ 바다에서 하나 되는데// 분단 세월 반세기 전설도 아닌데/ 건너 갈 은하수엔 다리조차 없는가// 꼭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동정의 모진 세월 입술을 깨물며// 북녀여 직녀여/ 그대 이름 부른다// 다시 찾을 압록강 푸른 물결 부른다/ 다시 오를 백두산 통일 세상 부른다//

술에게 / 문병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갔을 때/ 비로소 나는/ 자네의 풍습을 처음으로 알았네.// 찌프린 이마를/ 상냥한 입김으로 어려 주고/ 얼어 붙은 가슴을/ 뜨겁게 뜨겁게 불태워 주었네.// 마시면 정직하게 취하고/ 슬픈 나의 공화국에 와서/ 무관의 제왕이 되어/ 또 하나의 법을 만드는 위력// '취하지 않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할지어다'// 깡소주 한 잔을 놔 두고/ 낙화암도 의자왕도 없이/ 삼천궁녀도 양귀비도 없이/ 나는 누구에게 호령할 것인가.// 술이여, 내게 잠깐/ 자네의 순수한 미친 불길을 빌려주게/ 넥타이를 비뚤어지게 매는 멋을 빌려주게/ 내 발걸음을 알맞게 비틀거리게 해 주게// 바야흐로 40대의 우정으로/ 자네와 뜨겁게 입맞출 때/ 지금은/ 금빛 소슬한 가을이 절뚝이며 오고 있네// 여보게,/ 진정 정직하게 미쳐 갈 방법을 가르쳐 주게./ 진정 한꺼번에 살아 버릴 용기를 빌려 주게.//

코카콜라 / 문병란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洋)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 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 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켜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드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름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켜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9월의 시 /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가을의 여백에 앉아서 / 문병란
가을은 먼저/ 4만 원짜리 횟감 두 접시와/ 우리들의 단란한 술잔 속에 와서/ 비린내도 향그러운 가을바다/ 아침이슬 한 잔씩을 가득 채웠다.// 길고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모처럼 하늘이 높고 푸른 날/ 때마침 제철 만난/ 남해 바다 전어 떼/ 그 싱싱한 비린내 속에서/ 우리들의 눈빛 가득/ 익어 가는 가을이 주렁주렁 열렸다.// 시인은 술보다/ 은비늘 파닥이는 가을바다에 취하여/ 코스모스 손짓하는 바닷가 횟집의/ 풍어의 식탁 앞에 허리띠를 풀고/ 원고료 없는 시 청탁에 쉽게 응하였다.// 일금 5만 원짜리 원고료 대신/ 그 다섯 배 비싼 점심을 대접받고/ 가을의 여백에 앉아/ 우리들은 이미 모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시인이 되어 붉으레 고운 단풍이 들고 있었다.// 가을은 취하는 달/ 그리고 외상으로도 서로 사랑하는 달.//

가을빛 물들 때 -순례의 노래 / 문병란
버릴 것 다 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정갈한 가을 나무들// 제 자리 떠난 열매/ 큰 은혜이오니/ 뿌리는 자 거두고/ 가꾸는 자 향기론/ 거룩한 시온성 마음에 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 된 자/ 욕심 비워 노예의 사슬 끊고/ 여기, 너와 나 우리 되어/ 같이 심고 더불어 꽃 피운/ 참 삶을 가꾼 이상촌// 받드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나머지는 버리는 마음이오니/ 믿는 자 주인 되고/ 주인 된 자 스스로/ 그 빛을 따라 사는 자/ 거룩한 임의 거두심이여.// 가을 빛 물들 때/ 들 건너온 종소리/ 터 닦은 약속의 땅에/ 녹색의 기 세우고// 갈고 닦은 옥토에/ 한 알의 밀/ 그 향기 썩어/ 고운 싹 틔운다.//

사랑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서 만나야 할 사람/ 비로서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

첫사랑 / 문병란
눈썹 달이/ 나뭇가지 끝에서/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어제 핀 꽃이/ 오늘 핀 꽃에게/ 부드러운 혀끝을 오므린다// 산다화 냄새가/ 쎄하니/ 코끝에 와서 간질인다.// 안 돼요 안 돼요/ 바람이/ 보리밭 속으로 숨는다// 숨겨 놓은/ 오렌지를 훔치는/ 아도니스의 하얀 손// 어둠은 살랑/ 눈썹달 끝에서/ 미약을 흘린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 문병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없다./ 더듬어 보면 우리가 만난 짧은 시간 만큼/ 이별은 급속도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랑도 삶도 뒤지지 않고/ 욕심내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켜져 가는 사랑으로/ 흔들림 없고,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할 뿐이다./ 외로움의 나날이/ 마음에서 짖궂게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내 너를 사랑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 말로써 다하는 사랑이면/ 나는 너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마음으로 너에게 다가갈 뿐이다./ 조금은 덜 웃더라도/ 훗날 슬퍼하지 않기 위해선/ 애써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가 내게 / 문병란
내 생의 고독한 정오에/ 세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 다 채운 가슴을 안고/ 우리는 왜 서로 헤어져야 하는가.//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은 외로운 고아,/ 바다는 모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한밤내 운다.// 너를 울린 곡절도, 사랑의 업보도/ 한데 섞어 눈물지으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허허 몰아쳐 웃어 버리는 바다// 사랑은 고도에 깜박이는 등불로/ 조용히 흔들리다/ 조개 껍질 속에 고이는/ 한 줌 노을 같은 종언인가.// 몸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을 안고/ 어느 절벽 끝에 서면/ 내 가슴 벽에 몰아와/ 허옇게 부서져 가는 파돗소리//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은 더욱 뜨겁게 포옹하라/ 바다는 내게 속삭이며/ 마지막 구석까지 채우고 싶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이별 연습 / 문병란
갑자기 헤어지면/ 눈물이 날지 몰라/ 우린 미리 조금씩 헤어지는 거야./ 날마다 눈물을 아껴/ 가슴 깊은 데 몰래 감춰두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더더구나 뺏는 것인가/ 그날 밤 뒤따라 오던 열사흘 달이/ 두 눈 흘기며 구름 사이에 숨었지.// 입술 훔치던 밤/ 숲 속에서 밤새가 울고/ 기뻤는데도 우리는 자꾸/ 눈물이 났었지 그날 밤.// 이별은 끝이 아니라고/ 시작이라고 말한 밤/ 멀리멀리 떠나가 비로소/ 그대 가까이 가는 연습을 시작하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닌 오래 간직하는 것 비로소/ 눈물은 가슴 속 까만 씨앗으로 영그는 거야.//

바람의 노래 / 문병란
어젯밤 알프스 넘어간 구름/ 오늘은 어느 항구에서 빈 술잔에 포도주를 채우는가.// 방랑길에서 바람이 가르쳐 준 말은/ 인생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 머물지 않는 바람은 저만치 고개를 넘으며/ 내일 쉴 곳을 정해놓지 않는다.//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시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국경이 없어도 외롭지 않은 바람은 유유히 손을 흔든다./ 정 주지 마라/ 꿈을 버려라/ 미워하지 마라/ 미련을 남기지 마라// 네가 앉았던 자리/ 네가 마셨던 잔/ 이제는 다른 사랑이 속삭이고/ 다른 잔을 마신다,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이 앉았다 간 자리/ 오늘도,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고 있다/ 이름이 무어냐고 묻지 마라, 다짐 하지마라.//

백지 앞에서 / 문병란
운명처럼 내 앞에 놓인/ 순수한 하나의 여백/ 거기에 나는 유언을 쓸까./ 오래 숨겨 놓은 비밀을 고백할까.// 증인처럼 등불이 지켜보고 있고/ 사위에 정적이 에워싸는 밤/ 나는 최후처럼 백지 앞에 앉아/ 한 마디의 마지막 낱말을 찾고 있다.// 창밖은 12월, 계절을 휩쓸어가는 북풍이 불고/ 어지러운 구름 사이로/ 반 남아 이지러진 조각달 헤매어간다/ 달빛을 가린 구름장이여,/ 잠깐 비켜나 달님의 얼굴을 보게 해다오.// 이 밤에 내 마음도/ 구름 사이 헤매는 이지러진 조각달/ 아직도 백지로 놓여 있는 종이 위엔/ 그대 모습 어지러이 그릴 길 없고/ 처음도 끝도 잊은 백지의 사연 위에/ 부서진 마음 조각만 촛불처럼 가물거린다.// 공포처럼 놓여 있는 운명 앞에/ 차라리 나는 두 눈을 감을까.// 영영 여백으로 남아 있을 백지/ 끝내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하고/ 백지 위엔 까만 정적만 기어 내린다.//

찬비 오는 저녁 / 문병란
나이 들면/ 사람 만나기가 차츰 두려워진다./ 사양지심과 자존심의/ 어느 중간쯤 서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기웃거리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아, 웃어야 할 대목과/ 성내야 할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순 여덟이 되어서야/ 눈과 눈썹 사이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그네 타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다.// 5분간 연설이 끝난 저녁/ 그림자를 따돌리지 못하는 비극/ 하늘에는 별이 멀어 보이고/ 방앗간 앞에서도 나는 그냥 지난다./ 이 시간 고독한 산보자는/ 루소의 남은 꿈을 빌려/ 비 내리는 오솔길에 길게 서 본다.// 찬비 오는 저녁/ 찬비 맞아 얼어 자고 싶은 밤/ 찬비 같은 여자가 젖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아, 아직도 꽃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귓가에 속삭이지 말라./ 오늘밤도 찬비가 등뒤에서/ 내 쓸쓸한 발자국을 적셔두고 있다.//

비 오는 날의 시 / 문병란
비 오는 날 비로소/ 나는 구두가 새는 것을 알았다.// 궂은 땅 더러운 땅/ 아무 데나 딛고 다니면서/ 고마운 줄 몰랐던 구두// 너는 어느덧/ 헌 구두가 되어 있었구나/ 무좀기 있는 내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기억하는가.// 구두야, 이젠 비 오면 물이 새는/ 헌 구두야, 수많은 길을 걸어/ 나의 모진 발바닥 밑에서/ 너의 여린 살가죽은 닳고닳았지.// 쉽게 바꾸고/ 쉽게 버리는 우리들의 인정/ 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네가 쓰레기통으로 가는 날/ 나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헌 구두야!//

시의 발견 / 문병란
청탁 원고를 구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펜을 팽개치고 산책을 나왔다.// 시는 제작일까 발견일까/ 아니면 모조품 훔치기 일까/ 종일 끙끙대며 찾아다녀야/ 그리운 그이도 그녀도 만나지 못했다.// 꽁꽁 숨어 버린 시/ 애숭이 삼류 시인의 눈에는 기적도 없어/ 나무도 산도 바위도 꽃도/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 그리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외톨이가 된 외로운 마음/ 진달래꽃 앞에 앉아/ 김소월 스승께 물어 보아도/ 아편 꽃 앞에 앉아/ 보들레르 아저씨께 물어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혼자서 왼종일 해매었지.// 그날 밤 집에 오니/ 쓰다 만 내 원고지 위에/ 바끔히 눈을 뜨고 앉아 있는 외로움/ 내가 버려 두었던/ 오직 하나의 내 모습!//

정당성 1 / 문병란
나의 행동에 대하여/ 나는 정당성을 찾는다.// 외국 유학생의 비자 위에서/ 오늘의 지성은 정당을 찾는다.// 마땅히 먹어야 하고/ 마땅히 배설해야 하고/ 모름지기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 나는 왜 그녀를 울렸던가./ 나는 왜 수입이 적은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나의 입술은 무엇을 훔쳤는가,/ 우리들의 사랑은 정당하다.// 데모대는 돌맹이 속에서/ 민주주의 소생을 믿고/ 경찰은 최루탄 속에서/ 법의 존엄성을 믿는다./ 모든 것은 정당하다.// 성토 대화가 열릴 때/ 도봉산에 가서 연인과 즐기고/ 데모가 전개될 때/ 당구장에 가서 휴강을 즐긴다.// 껌을 씹으면서 패튼을 관람한/ 내 양심의 소재,/ 껌을 씹다/ 어금니로 입술을 깨문 그/ 실수 - 짭짤한 피의 맛을 아는가.// 전쟁을 즐기는 위대한 영웅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졸병 사이에서/ 입 다문 휴머니티/ 어금니 사이에서 으깨려진/ 껌 - 모든것은 정당한가.// 막걸리 집에서 행방불명이 된/ 오늘의 지성과 꿈./ 나는 실연을 하고/ 체루탄 속에서 코스모스가 피고/ 저축 강조 주간에 적자를 낸/ 나의 아내 - 그러나 모든 것은 정당한가.// 미니스커트가 자꾸만 올라가고/ 서울의 빌딩이 자꾸만 높아가고/ 이 가을 나의 적자도 늘어나고/ 그러나 모든 것은 정당한가.// 정당성을 잃은 이 가을/ 입 다문 내 패배 위에/ 낙엽이 저야 하는 이유./ 시월의 연서를 불살라 버리고,//

 

역두에서 / 문병란
누군가 보내야 할/ 그런 마음을 안고/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먼 별 같은 이야길 남겨야 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고운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핏빛 꽃들이 한 잎씩 지듯/ 그렇게 사랑은 총총히 떠나야 했다.// 그대의 모습/ 숨겨진 계절의 뒤안길/ 아네모네의 꽃망울처럼/ 계절에 실려갔다/ 하늘 밖으로부터 아득히/ 그렇게 너는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손을 흔들면/ 울음이 영그는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시그널로 사위어가는 그리움.// 떠나간 사람으로 하여/ 시간은 별처럼 쌓이고/ 먼 행성에 실려간 사랑은/ 한 밤중 잠들지 못하는 호수의 물무늬/ 비에 젖은 돌멩이 되어/ 그렇게 외로운 마음들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종착역에서 / 문병란
나이가 는다는 것은/ 인생의 빛이 쌓인다는 것// 아내에게/ 자식에게/ 그보다 그 옛날 부모에게/ 덤으로 쌓인 빚 바리바리 지고서/ 빚진 죄인 나는 종착역에서 서성거린다//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길/ 이미 막차는 떠나 버렸고/ 채무자 과거가 홀겨보는 시간/ 떠밀려 나온 종착역/ 누굴 찿아 왔을까/ 가로등만이 포도 위에 아롱진다// 무작정 달려왔던 길/ 기다리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길을 막는 빨간 불/ 검문 검색하는 역사 앞에/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구나// 신과 대결했던 어제의 희망도/ 나의 마지막 밑천인 육체도/ 이제는 시들은 풀잎, 희망은 저만치/ 등을 돌려 떠나버렸는데/ 여인아 너는 내 술잔에/ 무슨 빛깔의 눈물을 채우려느냐// 기적마저 그 핓 종착역에서/ 시효가 지난 어젯날의 차표를 들고/ 막차가 떠난 플랫폼에서/ 나는 나 홀로 전별의 손길을 흔든다// 아 이 밤에도 시지프스는/ 그 형벌의 비탈길에서/ 잠깐 다리 쉬엄, 밤하늘의 별도 보며/ 향기로운 땀방울도 고요히 개이고 있을까.//

죽순 밭에서 / 문병란
죽순 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 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 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 올리는 대나무 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 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먹고/ 이슬을 받아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 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 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는 소리// 죽순 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이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 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부활(復活)의 노래 —어느 젊은 혼령들의 결혼에 부쳐 / 문병란
돌아오는구나/ 돌아오는구나/ 그대들의 꽃다운 혼,/ 못다한 사랑 못다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 다시 돌아오는구나.// 이 땅에 우뚝 솟은 광주의 어머니/ 역사의 증언자, 무등산 골짜기 넘어/ 우수절 지나 상그러이 봄 내음 풍기는,/ 기지개 켜며 일어서는 무진벌 넘어/ 한 많은 望月洞,/ 이름 모를 먼 주소를 넘어/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사는/ 광주 지선동 광천동/ 청소부 아저씨네 낡은 울타리를 넘어/ 주월동 셋방살이 젊은 기사님네/ 작은 창문을 넘어/ 정녕 그대들/ 머나먼 저승의 길목을 넘어/ 언 땅 뚫고 솟아오르는/ 끈질긴 잡초 뿌리로 우거지는구나/ 툭툭 망울 트는 핏빛 진달래로 타오르는구나.// 그날, 5월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 시원하고 큰 눈, 그 서글서글한 눈빛 속으로/ 그대들은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 곁에 나란히 서는구나.// 퉁겨오르는 새날의 태양처럼/ 황토 땅에 뿌리 뻗는/ 너무도 뜨겁고 잔혹했던 날,/ 산산이 갈라진 목소리 속에서도/ 온몸 끌어안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입맞추고 싶었던 사람,/ 융융한 강물로 막힌 뚝을 무너뜨렸더니!/ 꽃 같은 핏방울로 어둠을 찬란히 불사루었더니!// 지금은 다시 얼어붙은 땅/ 저 잔혹한 막힌 겨울의 어둠을 뚫고/ 광천동 양동 다리 밑 넝마주이들의/ 헤진 동산의 발가락 속으로/ 그날, 아세아 다방 앞/ 고아원 구두닦이들의 깨어진 구두통 속으로/ 목메어 흐르는 시커먼 광주천의 오열 속으로// 갇힌 벗들의 사랑이 우는 교도소 철창 속으로/ 문득 어깨를 치며/ 여보게! 씽긋 웃음지어 보이던/ 새봄의 향그런 쑥니파리처럼/ 스스로의 몸을 썩혀 싹을 틔우는/ 언 땅에 묻혀 겨울을 이겨낸 보리처럼/ 끝끝내 죽지 않는 뿌리로/ 빗살 가르며 날아가는 창 끝./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로/ 온 천지 가득한 눈부심으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가슴을 채우는 빛이 되는구나.// 그날, 가시 우에도/ 맨발의 장미 툭툭 망울을 트고/ 피 함빡 머금은 모란꽃/ 송이송이 낙화로 뚝뚝 떨어지던 날/ 무등산을 안고도 남았던 가슴/ 온 누리를 안고도 남았던 하늘/ 우리들의 사랑 금남로 가득 벅차게 넘쳤더니!/ 우리들의 눈물 뜨겁게 샘솟아 타올랐더니!// 어디에도 남은 가슴이 없는/ 지금은 엎대어 있는 고난의 거리/ 비닐공장 여공들의 퀭한 눈동자 속에서/ 시장 귀퉁이에 쭈그려 앉은/ 생선장수 노파의 눈꼽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끄러움/ 우리들이 비겁한 양심 속에서/ 집 없는 혼령들/ 짝 없는 혼령들/ 붕붕거리는 파리떼의 날개소리로/ 수채구멍 속에 스미는 구정물의 오열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슬픈 노래가 되는구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대들/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가/ 다시 80만개의 아픔으로 돌아오는/ 그대들은/ 갓 사랑하기 시작한/ 귀여운 누이들의 귓속말/ 깔깔대는 그들의 밝은 웃음 속에 있고/ 머리칼 하나 남김없이 가버린/ 그대들은/ 절뚝거리는 재봉공의 목발/ 삐걱거리는 휠체어의 바퀴 속에 있고/ 이 땅의 가장 캄캄한 어둠 속/ 척박한 황토 땅에 뿌리 뻗은/ 한 줄기 꼿꼿한 죽순 속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 그날, 캄캄한 허공을 향해 날아간/ 깨어진 돌맹이 속에 숨어 있고/ 가슴을 뚫고 날아간 아픔,/ 어디선가 까맣게 녹이 슬었을/ 그날의 어둠 속에 숨어있고/ 피와 눈물 대신에 마시는/ 금남로의 타는 목마름/ 한 젊은이의 목숨을 구한/ 황금동 여인의 뜨거운 핏줄기 속에 숨어 있다./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 하는가/ 목메어 부르는 진혼가의 절규 속에 있다/ 하나는 고향집 양지쪽에 핀/ 수수한 장다리꽃/ 하나는 어여쁘디 어여쁜 호랑나비/ 두 날개 쩍 벌려/ 춘향이와 이도령 상사춤 어우러지듯/ 꽃과 꽃의 순결한 입맞춤으로/ 아사달과 아사녀의 속삭임/ 그 순결한 배꼽과 배꼽의 만남으로/ 고구려적 하늘 아래 핀/ 맑고 고운 진달래꽃 빛깔로/ 한 줌 깨끗한 고향의 흙으로/ 그 위에 타는 찬란한 저녁 노을로/ 풀 끝에 스미는 한 방울 이슬로/ 대장균 우글거리는 광주천의 검은 오열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빛나는 사람이 되는구나./ 무너진 땅에 다시 봄이 오는데/ 가시 위에도 맨발의 장미,/ 칼날을 딛고/ 또 피 먹은 장미, 5월의 장미는 피워나는데/ 콕콕 찌르는 아픈 가시로 오는 임!/ 알큰한 고춧가루 매운 눈물로 오는 임!/ 역천하는 배반의 땅 위에 누워/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혼령이여/ 총각 귀신/ 처녀 귀신/ 집도 없고 짝도 없는/ 오오 구천을 떠도는 무주 고혼이여!// 오늘은,/ 깨끗한 혼과 혼으로 만나/ 이 땅을 끌어안고 입맞추는/ 한 줄기 고요한 바람이 되거라/ 저 미치게 푸른 하늘 아래/ 꽃과 꽃의 맨 살로 만나// 오늘은,/ 잠들지 못하는 땅의/ 찬란히 타오르는 한 줄기 노을이 되거라.//
* 1982년 2월 故윤상원과 박미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낭독한 시

5월이여 다시 부활하라 -5.18 민중 항쟁 30주년에 부침 / 문병란
다시 5월입니다, 님이여/ 저더러 5월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무딘 입술로 5월을 찬미하라 하십니까/ 눈부신, 너무도 아름다운 찬란한 5월을/ 차마 어떻게 노래하라 하십니까.// 그날의 핏자국 지워진 자리에/ 보상금 얼마와 바꾸어 버린/ 해골 앙상한 무덤만 남은 5월을/ 5월에서 통일로! 그날의 구호/ 민족통일의 그 맹세 저버리고/ 차거운 돌비만 남은 5월을/ 차마 어떻게 노래하라 하십니까.// 모든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 모든 꽃 중에 가장 향그러운 꽃/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위하여/ 꽃보다 향기로운 눈물을 위하여/ 5월은 생명의 달 눈부신 사랑의 달/ 님이여, 다시 5월입니다// 구르고 구른 역사의 수레바퀴/ 거짓과 진실의 사이에 서서/ 비석에 갇혀 있는 5월이여/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이여/ 저더러 가시박힌 혀끝으로/ 어떻게 5월을 노래하라하십니까// 눈가리개 하고서 귀를 막고서/ 어떻게 5월을 찬양하라 하십니까.// 제폭구민. 척양척왜. 오리징치/ 우금치의 피눈물 마르지 않았는데/ 민족. 자주. 통일. 인권. 평화/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금남로의 핏자국은 생생한데/ 눈감아도 보이는 아름다운 그 모습/ 귀 막아도 들리는 향그러운 목소리/ 혀끝에 박힌 까시 그냥 입을 다뭅니다.// 거짓 조화를 차려 놓고/ 헛된 구호를 외치고/ 허위의 가면 앞에 타락한 권력/ 횃불을 내리고 향불로 바꾼 손길/ 30년 기념잔치나 벌이면서/ 탄의 유혹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싸우라 싸우라 다시 싸우라/ 시작하라 시작하라 다시 시작하라/ 울긋 불긋 가식의 빛깔 벗겨내고/ 아름다운 5월의 눈부신 속살/ 5월은 아직도 핏빛 영롱한 싸움입니다/ 무덤 속 알알이 스민 우리들의 눈물입니다.// 오오 님이여, 식어버린 잿빛 가슴에 와서/ 활활 타오르는 속살 고운 5월의 꽃이 되소서/ 싸우는 자의 손끝에 와서, 님이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자유의 불꽃이 되소서/ 빛나는 정의의 횃불이 되소서.//
* 2010.5.27 금남로 부활제 기념시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1961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1970년대 이후 ‘죽순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등을 발표하며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문학을 선보였다. 《죽순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땅의 연가》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정당성》 《동소산의 머슴새》 등 시집 여러 권을 냈고, 전남문학상, 요산문학상과 박인환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5.18기념재단 이사,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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