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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하 시인

부흐고비 2021. 9. 15. 07:58

학교에서 배운 것 /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농담 / 유하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인생이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데 이건 진실이에요//

무력(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 -무림일기1 / 유하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천마대제가 죽자 무림존폐의 위기를 느낀 동창서열 제오위 광두일귀 동문혹은/ 낙성천마를 기습, 금나수법으로 제압한 뒤 고수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무력18년 겨울, 고금성 주위엔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천수신마, 건곤일검, 남해일노등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이 암암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벽안의 무사들에게 빌린 천마벽력탄과 육혈포를 가지고/ 동창서열 제삼위 무적금괴 승룡을 제압 중원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역의 천마벽력탄 앞에서 무적금괴의 철풍장 정도는 조족지혈이었다/ 무력 19년 초봄, 칠청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백골계곡에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무렵 하남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공의 소유자가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찬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천마대제는 비명에 갔지만 강자존 약자멸!/ 이 무림의 대원칙이 깨질 것을 우려한 광두일귀 및 일부 뜻있는 고수들은/ 武歷은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앞에 숙연해 하며/ 한층 겸허하게 무공연마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 차도살인지계: 남의 칼로 적을 침

오공 시대 / 유하
참 세상 많이 좋아졌지/ 절로 말이 새어나오게시리/ 라디오 디제이까지 청취자에게 속삭인다/ 오공비리로 4행시를 지어 주시죠.// 대세가 결판나서 그런가?/ 오공의 털로 만들어진 손오공 놈들까지도/ 이젠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고/ 근두운 타고 날아가둣 벗어나야 한다고 떠드는/ 오공, 오공, 오공시대// 참 많이 부드러워졌어/ 체제의 손바닥//

나와 여치의 불편한 관계 / 유하
비척비척 술기운의 발걸음을 멈춘/ 주택가 공터, 임시로/ 한 살림 차린 호박덩굴 속에서/ 쯧쯧쯧쯧// 침 튀기듯 달빛 튀기며/ 쯧쯧쯧쯧/ 여치란 놈이 열심히/ 혀를 차고 있다// 나의 오줌 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뭐가 그리 개탄스럽다고/ 쯧쯧쯧쯧/ 혀를 차는 여치// 한 도시 가운데서, 진저리치며/ 난 여치와/ 농경문화적으로 만났다/ 잠깐!// 이곳에 방뇨하는 자는/ 그것을 잘라버리겠다 주인백/ 쯧쯧쯧쯧//

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 / 유하
난 외로움의 힘으로 집을 짓는다 몸의 내부 깊은 곳/ 음습한 욕망을 나는 은빛 유혹으로 바꿀 줄 안다/ 꽁무니에서 나오는 가녀린 실의 끈적거림/ 나는 그만큼 삶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내 집은 내 욕망의 무늬이자 미로인 셈이다/ 내가 풀어 놓은 무늬에 때론 내가 헤매기도 하기에,/ 오늘은 하루종일 하루종일 하루살이를 기다렸다 세상의 온갖 방황도/ 내 집에 갇힌 이상, 내 좋은 대리 경험의 양분일 뿐이다/ 먹이는 고스란히 내 집의 실기둥으로 뽑혀져 나온다/ 먹이들의 살과 뼈를 원료로 이루어진 집,/ 나는 안다 자기 몸이 결국 자기 덫이었음을/ 적어도 나는 그 죽음의 덫을 내 식으로 육화시킬 줄 아는/ 교활함을 지녔다..... 저주받았으므로, 난 즐겁다/ 자, 내 분신 같은 새끼들아, 날 남김없이 먹어 해치워 다오/ 난 내 욕망의 무늬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싶다/ 그리하여 모든 너 안에 내가 살고 싶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 / 유하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나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은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 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생(生) / 유하
천장(天葬)이 끝나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 떼// 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 쓰러진 육신의 집을 버리고/ 휘발하는 영혼아/ 또 어디로 깃들일 것인가// 삶은 마약과 같아서/ 끊을 길이 없구나// 하늘의 구멍인 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 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 알을 낳으리//

자화상 / 유하
빈 양재 천변 길, 오늘도 자전거를 달린다/ 밤새 내린 비에 없었던 지렁이가 보이고/ 송장 메뚜기 한 마리 풀쩍 잡초 속으로 날아간다/ 아내는 직장에 간 시간/ 나는 자전거나 타면서 고작 지렁이도 익사를 할까/ 쑥부쟁이는 쑥과 뭐가 다른가 따위의 사소함을 붙들고 있다/ 몇 년째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 위에서 몇 편의 시를 구상했을 뿐/ 언제나 핵심을 피해왔다/ 시험 전날 만화방에 앉아 있는,/ 목적지를 놔두고 샛길에서 해찰하는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의 가슴엔 늘 쓸모 없는 것들만/ 다녀간다 가을 빛에 젖은 억새풀과 노란 은행잎 몇 개/ 길 옆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소학교에선 운동회가 한창이다/ 내 자전거엔 어느새 함성 소리처럼 날개가 돋아/ 유년의 운동회로 나를 데려간다/ 은빛 운동장 저편엔 젊은 날의 어머니가 있고/ 그녀와 이인삼각으로 달려가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내 자전거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붉게 물들어/ 정적 속의 내게로 되돌아온다/ 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열망은 이제/ 나의 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노는 자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저물어 돌아가는 나의 자전거가/ 텅 빈 가을 하천의 사소한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는 이 순간을//

천일馬화 -변마의 독백 / 유하
내 이름은 돈벼락. 통산 전적 68전 2착 세 번.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수년 전 단거리 경주 때 도주 후 버티기 작전으로 겨우 따낸 것./ 혈통? 나의 父馬는 뉴질랜드 변두리 경마장에서 바닥을 쓸다 사라진 부진마였다/ 주행 습성은 추입. 각종 예상지의 경주 평가란엔 후미 탐색이라 적혀 있다. 말이 좋아 후미 탐색이지 실상은 해찰하며 동료들의 꽁무니를 좇았을 뿐이다./ 데뷔 시절. 나의 脚質은 도주였다. 땅! 소리와 함께 단독 선행으로 질풍노도처럼 튀어나가지만, 직선 주로에 접어들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나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 후 나는 거세마가 되었다/ 요즘 나는 질주가 싫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이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자는 불행하다. 세인들은 그를 똥말이라 부른다./ 나는 주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내가 말이기를 멈추는 순간, 나는 불용 처리되어 단돈 몇 푼에 식용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그런 나에게 꾸준히 돈을 거는 한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최근 한국 사회의 便馬性을 풍자한 「천일馬화」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다. 경마장 안팎으로 쉬지 않고 질주하는, 똥말 똥시인 똥감독 똥교수 똥기자 똥정치……/ 하긴 대한민국 경마장 말치고 똥말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사내는 3년 전부터 나를 추적해왔다. 그가 나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나 같은 똥말만이 그에게 999배당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사내는 마권을 산 후 전광판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를 빤다. 밀린 세금이, 마권처럼 구겨진 청춘이, 떠나간 애인이 빠르게 배당판을 스쳐간다./ 나를 사랑한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디 한 군데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채 표표히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세속의 온갖 말들의 후미에서 해찰하는, 불용 처리 직전의 부진한 말들만을 사랑하는 게 그의 업이기에./ 그는 말의 고배당만을 노리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경주는 새로이 시작되고, 욕망은 지연된다. 나의 질주는 반복되고 누군가는 또다시 나를 기다린다. 결승선 전방 어디쯤 후미 그룹을 형성하다 벼락처럼 치고 나오는 짜릿한 나의 모습을./ 두두두두두 똥말은 달려간다. 천일마화여, 두두두두 마각을 감춘 채 세상의 똥말들은 쉬지 않는다/ 나의 왕인 고객이시여, 아직은 칼을 거두소서.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여전히 후미 탐색 중이니까요. 기다림을 멈추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박을 안겨드릴 거예요/ 그럼요, 멋지게 인생을 역전시켜드리겠어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 -어떤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 / 유하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 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 파인 배꼽 배……/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 유령처럼 축구를…… 해골바가지…… 난, 자식아, 여기 최후의 원주민이야/ 그럼 난…… 정복자인가? 안개 속 한남동으로 배추 리어카를 끌고 가던/ 외팔의 그애 아버지…… 중학교 등록금…… 와르르 무너진 녀석의/ 펜트하우스, 바람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 그 넓은 배나무숲에 가야 했다 그의 십팔번 김인순의 여고 졸업반/ 휘파람이 흐드러진 곳에 재건대원 복장을 한 배시시 녀석의 모습/ 그 후로부터 후다닥 梨田碧海된 지금까지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디서/ 배꽃 가득한 또 다른 압구정동을 재건하고 있는지…… 바람부는 날이면/ 배맛처럼 떠오르는 그애 생각에 배나무숲 있던 자리 서성이면……/ 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수많은 배들이…… 지금/ 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배로 한꺼번에 쏟아져들어가 배나무보다/ 단단한 배포가 되었을까…… 배의 색깔처럼…… 달콤한 불빛, 불빛/ 이 더부룩한…… 싸늘한 배앓이…… 바람부는 날이면……//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유하 감독, 엄정화 데뷔작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3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유하 

까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 자주 오는/ 심혜진 닮은 기집애가 묻는다 황지우가 누구예요?/ 위대한 시인이야 서정윤씨보다두요? 켁켁/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라는데 그게 무슨 소리죠/ 아, 이곳, 죽은 시인의 사회에 황지우의 시라니 아니 이건 시가 아니라/ 삐라다 캐롤이 섹슈얼하게 파고드는 이, 색 쓰는 거리/ 대량 학살당한 배나무를 위한 진혼곡이다 나는 듣는다/ 영하의 보도 블록 밑 우우우 무수한 배나무 뿌리들의 신음 소리를/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랏샤이마세 구정 가라오케/ 온갖 젖과 꿀과 분비물 넘쳐 질퍽대는 그 약속의 땅 밑에서/ 고문받는 몸으로, 고문받는 목숨으로, 허리 잘린/ 한강철교 자세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틀어막힌 입으로 외마디 비명 지르는 겨울나무의 혼들, 혼의 뿌리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 하늘에 뿌리고 싶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다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일수 아줌마들이/ 작은 쪽지를 돌리듯 그렇게 저 말가죽 부츠를 신은/ 아가씨에게도 주윤발 코트 걸친 아이에게도 삐라 돌리고 싶다/ 캐롤의 톱날에 무더기로 벌목당한 이 도시의 겨울이여/ 저 혹독한 영하의 지하에서 막 밀고 올라오려 발버둥치는/ 혼의 뿌리들, 그 배꽃 향기 진동하는 꿈이여, 그러나/ 젖과 꿀이 메가톤급 무게로 굽이치는 이 거리,/ 미동도 않는 보도 블록의 견고한 절망 밑에서/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필 수 없는 나무다//

* 황지우의 시를 부분적으로 패러디하거나 인용했음을 밝혀둔다.-유하

 

바람에게 경배하라 / 유하
바람이 분다/ 땅 위에 선 자들아/ 오월 강가에 선/ 이 저녁의 그리움들아/ 바람에게 경배하라/ 장미는 향기를 타고/ 나무는 씨앗을 타고 나무에게로 간다/ 저 바람 속으로/ 은빛 실을 풀어놓는 거미들/ 거미는 그 허공의 비단길을 걸어서/ 그리운 거미에게로 간다//

바람 속에서 / 유하
바람은 허공일 뿐인데/ 왜 지나온 시간 쪽으로 내 발길은/ 휘몰아쳐 가는가 뒤돌아보면,/ 살아낸 시간들 너무도 잠잠해/ 다만 바람의 취기에 마음을 떠밀렸을 뿐/ 눈밭에 흩뿌려진 별들의 깃털,/ 탱자나무 숲 굴뚝새의 눈동자/ 달빛 먹은 할아버지 문풍지 같은 뒷모습/ 산비둘기와 바꾸고 싶던 영혼,/ 얼마를 더 떠밀려 가야/ 생의 상처 꽃가루로 흩날리며/ 바람에 가슴 다치지 않는 나비나 될까/ 제 몸을 남김없이 허물어/ 끝내 머물 세상마저 흔적 없는/ 바람의 충만한 침묵이여/ 메마른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고통의 무게는 작용하는 것,/ 걸음이 걸음을 지우는 바람 속에서/ 나 마음 한 자락 날려 보내기엔/ 삶의 향기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 유하
수천의 파도가/ 몰려와 부서집니다/ 수만의 파도가 한꺼번에/ 산산이부서집니다/ 부서진 파도들 비로소/ 편안한 어깨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이할 수 없어라/ 그렇듯 뒷모습으로 돌아간 파도를/ 또다시 부서지려 몰려 옵니다/ 한번 부서져본 사랑/ 대단한 권세인 줄 알았습니다/ 그대여/ 내 사랑 더도말고/ 저 파도 같을 겁니다//

비가 / 유하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비 오듯 그립습니다./ 한 방울의 비가 아프게 그대 얼굴입니다./ 한 방울의 비가 황홀하게 그대 노래입니다.// 유리창에 방울방울 비가 흩어집니다./ 그대 유리창에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대 번개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흩어진 그대 천둥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눈과 귀,직달비가 등 떠밀고 간/ 저 먼 산처럼 멀고 또 멉니다./ 그리하여 빗속을 젖은 바람으로 휘몰아쳐가도/ 그대 너무 멀게 있습니다.// 그대 너무멀어서 이 세상 물밀듯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빗발치게 그립지 않은적이 없습니다//

 

나는 물의 나라를 꿈꾼다 / 유하
내 몸 물처럼 출렁이는 꿈을 꿉니다/ 내 몸 그대에게 물처럼 흐르는 꿈을 꿉니다/ 나 그대 앞에서 물처럼 투명한 꿈을 꿉니다/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입니다/ 내 사랑에 내가 놀라 화들짝 물방울로 맺힙니다/ 드맑은 그리움 온통 무거워지면/ 물방울로 맺힌 내 몸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수만 가지로 샘솟는 길을 따라 내가 흩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방울의 기억이 그대 눈빛처럼 빛나는 시냇가에// 내 사랑 고요히 모이게 합니다/ 오오, 달비늘로 미끄러지는 내 사랑/ 갈대 밑둥을 가만히 흔들고 지나갈 뿐입니다/ 바위 틈에 소리없이 스미고 스밀 뿐입니다/ 내 몸 투명한 물이기에/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낮게 흐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비켜갑니다 그대마저도 비켜갑니다/ 그 비켜감의 끝간 데, 지고한 높이의 하늘이 있습니다/ 놀라워라, 그 순간 그대 가슴속에 끝없이/ 범람하고 있는 내 사랑 봅니다/ 나 그대 몸 속에서 오래도록 출렁입니다/ 나 그대 시내 같은 눈을 보며 물의 마을을 꿈꿉니다/ 그 물의 마을, 꿈꾸는 내 입천장에서 말라붙습니다/ 내 몸 물처럼 출렁이다 증발되듯 깨어납니다/ 오늘도 그대를 비켜가지 못합니다//

뒤늦은 편지 /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다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갯짓을 하는 벌새만이/ 꿈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유하
내가 사는 동네 세탁소의 아가씨는/ 옷 수선을 아주 잘하죠/ 헐겁거나 꽉 조이는 바지들을/ 감쪽같은 맞춤복으로 고쳐놓지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음미하듯/ 나는 그 옷을 입어요// 솔벤트 내음 가득한 세탁소에 가면/ 그녀는 하얀 치아를 살짝 보이며 말하곤 하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 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그래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난 그녀의 손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꿈꾸어요/ 어둠의 꿈에서 다시금 흰눈처럼 빛나는/ 옷들의 영혼을 꿈꾸어요//

젖은 노을 속으로 가는 시간 / 유하
비가 세상을 내려앉히면/ 기억은/ 노을처럼 아프게 몸을 푼다/ 부리 노란 어린 새가 하늘의 아청빛 아픔을/ 먼저 알아 버리듯/ 어린 날 비 오는 움막이여,/ 왜 노을은 늘 비의 뿌리 위에서/ 저 혼자 젖는가/ 내 마음 한없이 낮아/ 비가 슬펐다/ 몸에 달라붙는 도깨비풀씨 무심코 떼어 내듯/ 그게 삶인 줄도 모르고/ 세월은 깊어서/ 지금은 다만 비가 데려간/ 가버린 날의 울음소리로 비 맞을 뿐/ 아늑한 눈길의 숲길, 말들의 염전/ 시간은 길을 잃고/ 나그네 아닌 나 어디 있는가/ 추억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쥐어짜/ 빗방울 하나 심장에 얹어 놓는 일이여/ 마음이 내려앉아 죽음 가까이 이를 때/ 비로소 시간의 노을은 풀어 논 아픔을 거두고/ 이 비의 뿌리 한 가닥/ 만질 수나 있을 것인가//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하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내 몸을 걸어가는 길 / 유하
길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지만/ 그 길을 만든 건 추억이었다// 길은 속도를 위해 존재해왔다/ 하지만 추억의 몸인 그 길은 자꾸/ 속도의 바깥으로 나를 끄집어내곤 했다// 실연의 신발은 속도를 갈망했고/ 사랑의 신발은 정지를 찬양했다// 바뀐 사랑을 이끌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추억은 그보다 오래된 추억을 지웠고/ 가까운 미래는 더 먼 미래를 지웠다/ 하여, 미래와 추억은 어느 순간 길 위에서 만났다// 난 이미 낡아버린 신발로 미래를 추억하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 길은/ 내 암흑의 내부를 걷기 시작했고/ 비 내리는 내 기억들의 필름이 몸을 풀어/ 길의 미래가 되어주었다.//

자갈밭을 걸으며 / 유하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대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난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가므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저녁 숲으로 가는 길 2 / 유하
1// 밑둥만 남은 향나무, 몸은 휑한 허공인데/ 지하 깊은 곳까지 뻗어간 뿌리는/ 땅밑을 온통 자기 생각으로 물들이며 아직도/ 해체중이다/ 한번 뿌리 내린 욕망은 이토록 완강한가/ 더디게 지워지는 뿌리긴 슬픔// 2// 저 숲속에 살았던 것들에 비하면/ 내 외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도 깃들지 못하고 비껴가는 곳/ 정적이 정적을 잡아먹고/ 마침내 정적의 뼛속까지 후벼먹을 때/ 아, 그리운 살쾡이의 포효/ 소쩍새는 제 오장육부를 퍼내듯 울다,/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피 한 방울 먹고 산다// 3// 저녁 숲이 끝나는 곳,/ 내 안의 푸른빛이 풀무치처럼 운다/ 느릅나무야, 굴참나무야, 안녕/ 환멸은 나무 껍질 같아서/ 떼어내면 다시 새 살이 돋는구나/ 탱자 가시 울창한 삶의 목구멍이여,// 피의 따스함처럼/ 날 거듭 토해내 다오//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 유하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 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 탱자나무 숲/ 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 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 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삼킬 수 없는 노래 / 유하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 봄비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 나도 한세상/ 그곳에 살다 가리라//

시골 국민학교를 추억함 / 유하
내 가슴엔 아직도 사루비아의 달콤함이 살고/ 여선생님 하얀 치아의 눈부심과 새 수련장/ 빠알간 색연필로 쓴 참 잘했어요가 산다// 히말라야시다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놀러 온 햇볕도 다람쥐도 찌르레기도/ 어린 풍금 소리에 맞춰/ 가슴에 달린 손수건처럼 마음을 펄럭이던,/ 그래 생명의 모든 국민학교가 거기 있었지// 아직도 내 입 안에 사는/ 철수와 영희, 아련하게 바둑이를 부르며/ 둥글게 둥글게/ 그 착한 영혼의 이름들로 충만한 운동장/ 아, 다시 가고 싶어라// 환한 금빛,/ 모래알의 은하수//

 

참빗 하나의 시 / 유하
지금 식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내놓은 물건 값보다/ 더 신세를 지고 가던 사람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 찰박찰박 장마 끝물로 와서/ 거시기 모다 있어라우, 찰 옥수수 같은 잇속 드러내며 웃던/ 담바우 방물장사 아짐/ 대나무 참빗 하나 달랑 풀어 놓고는/ 골방 아랫목 드르렁 고랑내 냄새 풀어놓으며/ 새비젓 무시너물 쩍국에 척척 식은 밥 한 술 말아먹고/ 보리쌀 반 되 챙겨서 싸묵싸묵 새벽길 떠나가던/ 염치도 바우 같은 담바우 방물장사 아짐/ 그것만이면 진짜 양반이게/ 담바우 아짐 자고간 날 이후론 온 식구 머릿속엔/ 영락없이 이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그 예펜네 욕 직싸하니 퍼대다가/ 그 빗살 촘촘한 참빗으로 득득 빗어내리면 와따/ 후두둑 후두둑 민경 위로 새까맣게/ 떨어져 내리던 가랑이 서카래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맑아오던 머릿속/ 그날은 온 식구 한데 모여 그놈의 서카래 손톱으로 똑똑/ 장단 맞춰 터뜨려가며 곤시랑댔다/ 허허참, 그래도 담바우 아짐 참빗이/ 참말로 짱짱한 참빗이랑게//

개나리꽃- 여는 시 / 유하
온 세상이 다 노랗다/ 봇물 터지듯 만발한/ 개나리꽃/ 시대의 노란 신호등/ 해빙의 봄일수록/ 돌아가시오/ 돌아가시오/ 한다//

오징어 -여는 시 / 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날개를 위한 시 / 유하
바람아 기억하는가/ 한때 나는 날개를 갖고 있었네/ 허공을 날며 사랑을 나누다/ 절정의 순간 몸이 터져 죽어버리는/ 수개미의 날개를/ 그러나 어느 날,/ 내 날갯짓의 에너지였던 사랑은/ 태양의 지평선을 따라 사라지고/ 난 지금 암흑의 대지에 갇혀/ 떠나간 사랑에 대해 쓰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날개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의 나머지를 견디네//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 유하
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 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 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있다/ 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순간/ 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 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포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휘파람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날개,/ 그 소리없는 찰나의 전율을 빌려/ 난 너의 내부에 둥지를 튼다//

별에서 하룻밤 / 유하
파도에 부서지는 별빛 조각들, 불현듯/ 그리움이 따가워, 오늘은 저 별까지 사다리를 놓고/ 시인 랭보의 대웅좌 선술집을 찾았네/ 아, 코를 찌르는 별들의 술향기/ 해당화의 여신이 취기의 꽃잎으로 나를 끌어올렸지// 그녀는 지금 나를 떠났지만/ 함께 올려다보던 별빛의 선술집은 아직 그대로인 걸,/ 영혼은 상처의 어깨에 한 점 피곤을 부리고/ 이 밤, 나 혼자 망가지 노래를 불러야 했지//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무수한 잔별처럼 소유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냥 그대로인 그대,/ 무엇을 얻고 싶은 건 아니었네/ 다만 그녀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이 감염되고 싶은....../ 그래, 그녀의 전부를 앓고 싶었어// 이젠 저 별들은 나의 욕구일 뿐/ 그녀의 속삭임은 썰물처럼 가벼렸지/ 할 말은 소라 귀만큼 많지만/ 별빛이 기다려 주질 않아,/ 별의 주막에서 하룻밤/ 취기는 먼동이 터 오고, 난 잊은 우산처럼/ 그녀의 맨 마지막 눈빛을 그곳에 두고 가네//

별을 바라보라 / 유하
별을 바라보라/ 뜨겁게 자기를 불사르는 먼 곳의 별을,/ 그러나 저 별을 떠나온 빛은 이리도 차갑구나/ 별을 바라보라/ 얼음꽃 같은 빛을 뿌리는/ 저 추억의 불덩어리를// 나를 별처럼 불태운 적이 있었다/ 내 사랑이 나를/ 별보다 뜨겁게 타오르게 한 시절이 있었다/ 그후로 내 사랑의 불길로부터 도망쳐/ 나 세월보다 빠르게 여기까지 왔다/ 빛의 속도가 그녀를 데려가버린 지금,/ 그 옛날 나를 태우던 불덩어리만 별빛으로 반짝인다/ 지상의 연인들이여, 별을 바라보라/ 눈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는/ 저 열애의 흔적을//

구름의 운명 / 유하
푸른 보리밭을 뒤흔들며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처럼 만져지지 않는 사랑이 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지나간 바람은 길을 만들지 않으므로 상처는 늘/ 송사리 눈에 비친 오후의 마지막 햇살/ 그 짧은 머뭇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탱자나무꽃은 온통 세상을 하얗게 터뜨리고// 산다는 것은 매순간 얼마나 황홀한 몰락인가// 육체와 허공이 한 몸인 구름,/ 사랑이 내 푸른빛을 흔들지 않았다면/ 난 껍데기에 싸인 보리 알갱이처럼/ 끝내 구름의 운명을 알지 못했으리라//

희망 / 유하
풍뎅이가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으며/ 징허게 징징거린다// (난 그의 집착이 부담스럽다)// 나도 그대 눈빛의 방충망에 마음을 부딪치며/ 그렇게 징징거린 적이 있다// 이 형광등 불빛의 눈부심은/ 어둠 속 풍뎅이를 살게 하는 희망?// (글쎄, 희망이란 말에 대하여/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무엇보다도,/ 징징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풍뎅이는 벌써 풍뎅이의 삶을 버렸으리//

오래 전 내가 살던 방을 바라보며 / 유하
오래 전 내가 홀로 기거했던 아파트를 지나칠 때면/ 옛 애인의 전화번호를 바뀐 줄 뻔히 알면서 다이얼을 돌려보듯/ 그 방을 올려다보곤 한다 밤새/ 불을 밝힌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방안의 나/ 그 생생했던 현실감을 텅 빈 실루엣으로 바라보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나를 지나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구겨진 회수권처럼 세운상가를 떠돌던 제복의 음울함이라든가/ 이태원 디스코텍 라이브러리의 사이키 불빛 아래/ 심해어처럼 發光하던 내 몸짓, 그 어느 순간도/ 나라는 현실감의 絶頂에서 비껴나 있어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양파 껍질처럼 벗겨져 사라져버린/ 무수한 내 현실감의 절정들을 추억하는 일일 뿐// 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음을 생각하던 고통/ 그 사람을 위해 아흔아홉 편의 연시를 쓰던 손가락의 떨림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허물 벗는 양파처럼 나는 나를 허물 벗으며 간다/ 함부로 내뱉었던 숱한 사랑의 말들도/ 진실보다 거짓이 뜨겁게 진실했던 욕정도/ 청춘이 생의 전부인양 늙음을 박대했던 한 시절도/ 벗어놓은 허물처럼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잃어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나는 매일 나의 낭떠러지를 살고 있다/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그 캄캄한 生의 허방 앞에서, 어제의 내가 그랬듯/ 한갓 양파 껍질이 될 현실감의 절정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 껍질의 독한 향기에 취해/ 한때 저 방안에 살았던 헛것의 구체성을/ 살덩어리의 따스했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 유하
붉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문득/ 그대 이름을 불러볼 때/ 단숨에 몰려오는, 생애 첫 가을/ 바람은 한점 푸른 하늘을/ 내 눈 속에 부려놓는다/ 마음 닿는 곳이 반딧불일지라도/ 그대 단 한 번 눈길 속에/ 한세상이 피고 지는구나// 나 이 순간, 살아 있다/ 나 지금 세상과 한없는 한 몸으로 서 있다// 그림움을 견디는 힘으로/ 먼 곳의 새가 나를 통과한다/ 바람이 내 운명의 전부를 통과해낸다//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 유하
간교한 여우도/ 피를 빠는 흡혈박쥐도/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도/ 자기의 애틋함을 전하려 애쓰는/ 누군가가 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애틋함을 갖는 순간/ 간교함은 더욱 / 피는 더욱 진한 피냄새를 풍기며/ 독은 더욱 독한 독기를 품는다//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결국/ 내가 내게 깊이 취했던 시간이었다//

당신 / 유하
오늘밤 나는 비 맞는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다가,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게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제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사랑의 흔적 / 유하
생선을 발라 먹으며 생각한다/ 사랑은 연한 살코기 같지만/ 그래서 달콤하게 발라 먹지만/ 사랑의 흔적/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구나/ 나를 발라 먹는 죽음의 세상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열애가 지나간 흔적 하나/ 목젖의 생선가시처럼/ 기억해 주는 일/ 소나무의 사소한 흔들림으로/ 켁켁거려 주는 일/ 그러나 이 밤의 황홀한 순간이여/ 죽음의 아가리에 발라 먹히는/ 고통의 위력을 빌려, 나/ 그대의 웃음소리로 잎새 우는/ 서러운 바람을 만들고/ 그대의 눈빛으로/ 교교한 달빛 한 올 만들어 냈으니/ 이 지상 가득히/ 내 사랑의 흔적 아닌 것 없지 않는가/ 땅의 목젖 내 한 몸으로/ 이다지도 울렁거리지 않는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 유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 책, 육체와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내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生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을/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 유하
1/ 한 미남 청년을 짝사랑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옛 그리스의 시인 사포/ 아기세줄나비,/ 학명은 Neptis sappho Pallas/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그 나비의 모습이/ 그녀를 연상시켰던 걸까//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만이/ 열정 속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노래하진 않겠다/ 나비는 불꽃이 자기를 태울 거라/ 생각진 않았으리라/ 혹, 불빛은 애기세줄나비에게/ 환한 거울 같은 건 아니었을까// 2/ 조롱 속의 짝 잃은 문조,/ 그 안에 작은 거울을 넣어주었더니/ 거울에 비친 자기를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 3/ 죽음을 걸었던,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날아들었던 당신이라는 불꽃/ 오랫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실은 그 눈부신 불꽃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사랑의 지옥 / 유하
정신 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하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는 능금나무처럼//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현 속의 푸른색/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그 사랑을 빚고 싶은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열매의 환한 빛도 꺼지듯//

중독된 사랑 / 유하
그 사람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한동안 깊은 마음의 병을 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사람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를/ 힘겹게 고백하려 하였으나, 막상/ 그토록 쓰린 아픔 이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굳은 약속을 파기한 그 순간, 내 가슴에 박혔던/ 그 사람의 구체적인 표정과 몸짓은/ 얼음 화살처럼 지워져버렸고/ 오직 다친 마음의 흔적만이 모질게 나를 탓하였다// 그럴수록, 난 고통을 견디기 위해/ 붉은 상처의 바깥에서 여전히 건재한/ 그 사람의 매혹에 얼굴을 파묻고,/ 사랑의 환희만을 안간힘으로 흡입했던 것이다//

느린 달팽이의 사랑 /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하나 갖고 있는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가장 환한 불꽃 -케이에게 얘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이 손을/ 불꽃 속에 넣고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 -어빙 스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중에서 / 유하
태양은 늘 자기 마음의 가장 환한 데를/ 가을 프로방스 땅에 바친다// 아를의 어느 허름한 여관방에 누워/ 바라보는 창밖의 낙조/ 벽엔 고흐의 방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햇살 한자락의 붓을 들고/ 이 땅을 노닐다 간 사내/ 사랑의 끝, 이별,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 그 작은 죽음들과 기꺼이 벗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고 환하다/ 저 잎새에 물드는 낙조처럼//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아비 앞에서/ 촛불 속에 자신의 손을 밀어넣는다/ 자기를 태울 때까지만 허용된 사랑,/ 그리고 사랑의 가장 환한 불꽃인 고통// 자기를 다 태울 때까지만/ 빛으로 허락된 햇살이여,/ 순한 바람이 불고/ 석양빛에 타오르는 붉은 잎새가/ 고흐의 손길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저녁 1 / 유하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우연의 음악 / 유하
꽃 피는 소리, 민들레의 음표들,/ 브라스 밴드 행렬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종달새 울음// 그리고, 내 수만의 몸들을 빠져나와/ 달려가는 영혼의 바람소리// 그대가 받은 이 生도/ 아주 우연한 음악//



유하 시인, 영화감독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본명은 김영준이다. 상문고등학교, 세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 석사. 2004년부터 동국대학교 영상정보통신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출간한 시집으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무림일기》,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 《안 이쁜 신부도 있나 뭐》, 《천일馬화》, 산문집으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가 있다. 1992년 자신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연출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강남 1970》,《말죽거리 잔혹사》,《비열한 거리》,《하울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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