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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수복 시인

부흐고비 2021. 9. 17. 07:47

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故鄕의 하늘 밑에서 / 이수복
빠개진 석류랑/ 실가지 가지마다 쏟아질 듯이 망울지는 빨간 감/ 빨간 감이 먹음은 푸른 하늘밑이/ 긴 유랑 끝에 돌아와 서는 내 마음에는/ 왜 이다지 기쁘냐// 하늘 비치며 하늘밑으로 흘러나가는 시냇물도/ 해지면 낙엽처럼 훗하게 가마귀나 넘나들 뿐/ 깊은 명상 속에 예대로 고요한 산 얼굴로// 긴 유랑 끝에 돌아 와 서는 내 마음에는/ 왜 이다지 기쁘냐// 저 하늘 아래/ 흙 이겨 흙 담치고/ 나무 깎아 초집 짓고/ 석류랑 감을 심는 황토 땅이/ 긴 유랑 끝에 돌아 와 서는 내 마음엔/ 왜 이다지 기쁘냐//

사모곡(思母曲) / 이수복
즐거웠던 것/ 즐겁지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遠景 水墨으로 번진다./ 갈기 가기 시작하는/ 芭蕉ㅅ닢을/ 디디고 넘어 오는 가을비에.// 무애(無涯)를 감싸 휘는 여유가/ 높이 부여 안은/ 스란치마 같은 풀./늦게사 생긴 외아들을/ 물끄러미 보시곤 하던……//

구름 / 이수복
깊이 모를 自我와… 自我를 쓰고 치고 쓰고 치고/ 부서지는 물결의 表象/ -돌아 앉는 바위의 否定이 아니라,// 더듬는 손길에 만지이는/ 밤ㅅ중 얼라의 알빛 이마며 볼이며/ 손목 발목이며, 숨 고른 소리며들처럼//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려 주는 切實함이여/ 오묘한 흐름이여.//

창 / 이수복
폭풍부는 날은/ 뜨락에서 수목들이/ 손흔들며 울고// 떠나가는/ 고물에서/ 손흔들며 울고// 구름이 파고드는/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폭풍부는 날은/ 시달리는 수목들이/ 부두에서 울고// 물결치는/ 고물에서/ 손흔들리며 울고// 후둑후둑/ 빗발들이/ 달려가며 울고//

포도 / 이수복
포도한테서는/ 이제 마악 소나기 개인 뒤/ 멀리 건너가는 우뢰소리가 들린다.// 연꽃봉우리가/ 못물에/ 망울지듯이/ 흐린 더위를 숲속처럼 헤치고 나온/ 포도한테서/ 바다를 솟구쳐 올라오는 해녀의 육체가 뵌다./ 포도는 하냥/ 숙어내리는 예지에 깊다/ 외롭고 고달픈 제/ 내리 한 철 쉬어가는 그늘....// 포도한테서는/ 달빛에 젖는 옥토끼의 기쁨을 받는다.//

석류(石榴) / 이수복
안엣 것이 차고 넘칠 때/ 은은히 들려오는/ 동트는 반향(反響)....../ 두드리는 소리.// 옆구리가 쩌렁 빠개어지는/ 결단성 있는 멋이여/ 새론 내디딤이여.// 첫여름 진초록이/ 바다처럼 출렁대다 혀놓은/ 석등(石燈) 뒤에/ 석류꽃이.// 블록 불러 오르던 풋풋한 아랫배가......// 날개를 못 가지는 육체 안에다/ 꿈을 가꾸는 묘한 솜씨가/ 홍보섯(紅寶石)을 질러놓고/ 순광(純光)으로 굴절(屈折)시키다.//

모란송 / 이수복
아지랑이로, 여릿여릿 타 오르는/ 아지랑이로, 뚱 내민 배며/ 입언저리가, 조금씩은 비뚤리는/ 질항아리를.....장꽝에 옹기옹기/ 빈항아리를// 새댁은 닦아 놓고 안방에 숨고/ 낫달마냥 없는듯기/ 안방에 숨고.// 알 길 없어 무장 좋은/ 모란꽃 그늘...../ 아떻든 하늘을 고이 다루네.// 마음이 뽑아보는 우는 보검에/ 밀려와 보라치는/ 날빛같은 꽃// 문만 열어두고/ 한나절 비어놓은/ 고궁 안처럼// 저만치 내다 뵈는/ 청자빛 봄날.//

동백꽃 / 이수복
동백(冬柏)꽃은/ 훗시집 간 순아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눈 녹은 양지쪽에 피어/ 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 홍치마에 지던/ 하늘 비친 눈물도/ 가냘프고 씁쓸하던 누이의 한숨도/ 오늘토록 나는 몰라./ 울어야던 누님도 누님을 울리던 동백꽃도/ 나는 몰라/ 오늘토록 나는 몰라./ 지금은 하이얀 촉루*가 된/ 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빨간 동백꽃.//
* 촉루 : 해골

멍텅구리 꽃 / 이수복
꽃이 피어나는 것은 당신에게 보이기 위함이요,/ 그 꽃이 지는 것은 당신에게 잠시 잊혀지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파도의 금빛,/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파도의 은빛 같은 것이예요.// 사람살이라는 건 꽃이 피는 아름다움이고/ 꽃이 지는 아름다움 속에 출렁이는 꽃상여,/ 그 흩어짐이에요.//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금빛의 파도,/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은빛의 파도 같은 것이에요.// 다만 지금 나의 마음 가득히 봄눈 같은/ 별꽃 별꽃 별꽃이 밤마다 살풀이로// 밀려오고 있음을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별꽃 보고 사랑하면 무얼해, 멍텅구니!//

꽃씨 / 이수복
가장 귀한 걸로/ 한 가지만 간직하겠소/ 그러고는 죄다 잊어버리겠소// 꽃샘에 노을질, 그/ 활홀될 한 시간만 새김질하며/ 시방은 눈에 숨어 기다리겠소.// 손금 골진 데 꽃씨를 놓니/ 득/ 닝닝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 다순 해/ 나래를 접고/ 향내 번져 꿈처럼 윤흐르는 밤....//

꽃상여 엮는 밤 / 이수복
인경을 걸어매고 슬픔에 영롱한 야삼경/ 골짜기에서는 쑤구기(뻐꾸기)가 울어/ 베옷 입고 숨어 울어.// 두메마을 뉘 집 문전에는/ 내어걸린 초롱불빛이/ 희부여니 물살을 일고// 화톳불이 날아올라 눈물 어린 별에 젖어 사위는 마당/ 골짜기에서는 쑤구기가 울어/ 애처로이 숨어 울어.// 찌는 물기 뿌리치며 뿌리치며/ 물동이를 길러 이고 거르막을/ 들어서며 웃는 꿈을/ 소스라쳐 깨나// 비 맞는 촉규꽃(접시꽃)에 가슴 적시던/ 하늘빛 도라지꽃/ 도라지 꽃빛을 닮은 딸아이를 외우는 육성...// 서언한(눈에 선한) 눈자위/ 찌른 목숨/ 초사흘 달처럼 걸렸다 넘어간/ 안쓰러운 살눈썹*// 들마을 수하리에선/ 새삼/ 닭 울음이 밤을 잦추고// 문밖에서는/ 내어걸린 초롱불빛이/ 희부여니 물살을 일어...//
* 살눈썹: 속눈썹

소곡 / 이수복
예닐곱 송이/ 백합꽃 피는/ 공일날 아침/ 공기도 참 맑네!// 제비들 날고,/ 체 기인 화장경 안에 아내를 멍멍히 보단/ 거울에다처럼, 잘 닦이인/ 거울에다처럼// 어릴 제 담아두곤 잊었던/ 맘을 구는 그 세찬 바다가/ 되풀이를 도네, 오오오 다시 즐거움/ 되풀이를 도네 , 그날 날던/ 바다제비도/ 꽃구름도 도네.//

외로운 시간 / 이수복
익는 햇살을 뒤에 받으며/ 엷은 음영을 던지고 서선/ 산국화야/ 천년 말없는 바위와 뭘 말하느냐./ 저 - 아래/ 한여름 유성들이 날아 묻히던 빈 골짜기가/ 금방 천둥 울듯 뒤시일 성싶어져/ 간절한 애끊임이여.// 돌아다보면/ 구름처럼 일렁이며, 타는 산/ 산들을 흐르는 너의 체취를 밟고/ 살아오는 눈, 옥빛 고무신 신고/ 걸어오는 눈..../ 그를 여의고 오늘토록 기대일 데 없는 내 마음에/ 너릿녀릿 흔들리는 네 몸짓만 청초하구나//

미명 / 이수복
소슬히 살고 있는 참함 시심을/ 소금인양 맛내주는/ 미명의/ 창/ 빛./ 고삿길엔/ 대를 휘며/ 눈이 오는데...// 창은/ 본 것 들은 것, 주무른 것을/ 어둔 해저에다 다 참아두고/ 머리맡에 밀물들며/ 지새는 신기/ 지하수 눈빛// 샛맑은 오월 아침 피는 백합/ 꽃. 서걱이는/ 꽃구름//

눈을 감고 / 이수복
홀 홀/ 호롱불/ 내걸리는 도리기둥..../ 울파주 밖으로는 물러서는/ 유한 야색// 장꽝 모롱이엔/ 다홍 분꽃/ 이슬에 함초롱/ 깜박이고// 정막이 산사처럼 상긋한 삼경// 유성 날아나간 뒷면/ 별들은 행결 멀어져가도// 가만히 눈감으면/ 자그만히 우주가 내 안에서 돈다//



이수복(李壽福, 1924년~1986년) 시인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면 장교리에서 태어났다. 목포 문태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다가 3학년이 되기 전인 1950년 돌연 낙향하였다. 1954년 '문예'에 동백꽃 발표로 문단에 데뷔하여 1957년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 조선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으며, 1963년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65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순천고등학교·전남고등학교 등에서 재직했으며, 순천 주암고등학교 재직 중이던 1986년 수업 도중에 순직하였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인 『봄비』(현대문학, 1969)를 발간 후 여러 문예지에 열심히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시집으로 묶지 않았고 사후 이수복 시전집을 펴낸 바 있다. 광주광역시 사직공원에 그의 대표시 봄비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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