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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병기 시조 시인

부흐고비 2021. 9. 16. 09:07

고향 / 이병기
닭이 자주 울고 산머니 달은 잦고/ 푸나무 들 언덕 상긋한 새벽 바람/ 너무도 익은 이 길에 발도 한결 가볍다// 달은 넘어가고 먼동이 밝아온다/ 누른 보리밭 종달새 소리소리/ 마을의 곤한 잠들은 몇몇이나 깼는지// 어제 선거에는 누가 당선하였을까/ 고샅 고샅에 모이어 수군수군/ 말마다 男女老少가 모두 政客이었다//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 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묶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내 한 生 / 이병기
한몸에 지은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짐을 다 버리고 이리저리 오고가매/ 새로이 두 어깨 밑에 날개 난 듯하고나// 쌀값은 높아가며 洋貨는 범람하고/ 거리 거리에 자동차 트럭 버스/ 이것이 서울특별시 새 풍경이로고나// 늙어가면서도 술잔은 놓을 수 없고/ 늙어가면서도 분필은 던질 수 없다/ 분필과 술잔으로나 내 한 生을 보낼까//

人生의 고개 / 이병기
겨우 六十里 지나 땅거미 지는고나/ 한 고개 넘어 한편엔 假葬서리 한편에는 靑樓들인데/ 차라리 觸樓를 안고 한밤 새워갈거나//

창(窓) / 이병기
우리 방으로는 창(窓)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진귀한 고서(古書)를 펴어 서권기(書券氣)나 기를까// 나의 추(醜)와 미(美)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苦)와 낙(樂)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임종(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시름 / 이병기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 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그 방 / 이병기
깨운적이 없이 자다 일어 앉았다가 다시 누우면 잠도 그저 아니오고 싸늘한 실바람만이 위로 휘돈다.//

백묵 / 이병기
몸을 담아 두니/ 마음은 들과 같다/ 봄이 오고감도 아랑곳 없을러니/ 바람에 날려든 꽃이/ 뜰 위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구나/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손에 백묵을 들고/ 가슴 아파 하여라.//

석굴암(石窟庵) / 이병기
한 고개 또 한 고개 고개를 헤어 오다/ 토함산 넘어 서서 동해바다 바라보고/ 저믄날 돌아갈 길이 바쁜 줄을 모르네// 보고 보고지어 이곳에 석굴암(石窟庵)이/ 험궂은 고개 넘어 굽이 굽이 도는 길을/ 잦은숨 잰걸음 치며 오고 오고 하누나//

보리 / 이병기
눈 눈 싸락눈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눈// 연일 그 추위에 몹시 볶이던 보리/ 그 참한 포근한 속의 문득 숨을 눅여/ 강보에 싸인 어린애마냥 고이고이 자라노니// 눈 눈 눈이 아니라 보리가 쏟아진다고 나는 홀로 춤을 추오//

봄 2 / 이병기
봄날 궁궐(宮闕)안은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御苑) 넓은 언덕 버들은 푸르르고/ 소복(素服)한 궁인(宮人)은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썩은 고목 아래 전각(殿閣)은 비어 있고/ 파란 못물 우에 비오리 한 자웅(雌雄)이/ 온종일 서로 따르며 한가로이 떠돈다//

고곰 / 이병기
몸이 한가로우매 도리어 병은 잦다/ 보던 글 더져 두고 상머리 홀로 누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잔시름만 하도다// 몸에 아픈 곳을 스스로 헬 수 없고/ 깃보다 가벼운 맘 허공으로 떠오르노니/ 흐릿한 별과 구름은 머리맡에 어르이다//

고서(古書) / 이병기
더져 놓인 대로 고서(古書)는 산란(散亂)하다/ 해마다 피어 오던 매화(梅花)도 없는 겨울/ 한종일 글을 씹어도 배는 아니 부르다// 좀먹다 썩어지다 하찮이 남은 그것/ 푸르고 누르고 천년(千年)이 하루 같고/ 검다가 도로 흰 먹이 이는 향은 새롭다// 홀로 밤을 지켜 바라던 꿈도 잊고/ 그윽한 이 우주(宇宙)를 가만히 엿보고/ 빛나는 별을 더불어 가슴 속을 밝힌다//

공손수(公孫樹) / 이병기
여기 한 거물(巨物)이 있다 갑오(甲午)는 물론/ 병자(丙子) 임진(壬辰)의 난(亂)을 모두 겪었다// 만약 그 팔을 편다면 온 동내(洞內)가 그늘지고/ 똑바로 선다면 구름도 이마로 스쳐 가고/ 그저 소박(素朴) 장엄(莊嚴) 침묵(沈默)/ 그려도 봄은 봄 가을은 가을로서/ 천지(天地)와 함께 늙지를 아니한다// 내 마냥 그 앞을 지나면/ 절로 발을 적이고 고개도 아니 숙일 수 없다//

광릉(光陵) / 이병기
깊고 깊은 뫼이 숲도 그리 그윽하다/ 빤히 트인 곳이 저 아니 광릉(光陵)인가/ 허울한 양마석(羊馬石) 머리 지는 해는 잦았다// 외롭고 쓸쓸하기 영월(寧越)과 어떠하리/ 해마다 봄이 오면 자규(子規)야 울지마는/ 오르고 눈물을 지을 누대(樓臺) 하나 없도다//

별 1 / 이병기
홀로 밤을 지켜 바라던 꿈도 잊고/ 그윽한 이 우주(宇宙)를 가만히 엿보고/ 빛나는 별을 더불어 가슴 속을 밝힌다//

별 2 / 이병기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西山)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듯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구름 / 이병기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 싶다/ 바람을 타고 동(東)으로 가다 서(西)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우뢰 / 이병기
한껏 찌고 우리고 나뭇잎 하나 까딱없고/ 돋는 달 연홍시 같고 마른 번개는 오락가락하다// 짓궂은 바람 갑자기 일며/ 굵은 비 마구 뿌려 앞뒤창을 두드리고/ 우르르 우르르 벼락이 나려치고/ 뻔쩍뻔쩍 불칼을 휘날린다// 책상 한머리 등은 자주 깜박이노니/ 보던 글도 두고 묵묵히 외로 앉아/ 나는 나의 한적(閒寂)을 깨닫노라//

바람 / 이병기
난데없는 바람 거리를 휩쓸고 몰아 온다/ 쓰던 모자를 쓰면 다시 떨어지고/ 분주히 오고가는 이를 기롱(欺弄)하듯 하여라// 가로 선 애나무들 싱싱히 푸르도다/ 시들고 병든 잎만 날린다고 믿지 마라/ 덧없는 바람에 불려 꺾일 줄을 어이 알리//

비 / 이병기
밤은 깊어지고 비는 줄줄 내린다/ 타던 거문고 한옆에 비껴 놓고/ 무단히 눈물지으며 누를 그려 하는고//

비 1 / 이병기
모종의 오뉴월이 가물고 더위러니/ 시원한 비 한번에 만인(萬人)이 웃음이네/ 마르던 삼천리(三千里) 안의 산(山)도 들도 다 웃네// 다만 빗소리요 저녁은 고요하다/ 어느 때 날아왔나 시렁에 앉은 제비/ 고개를 자옥거리며 젖은 깃을 다듬네// 비는 오다 마다 구름은 갈아들고/ 이따금 왜가리는 북(北)으로 날아가니/ 장마나 아닌가 하고 다시 하늘 바라보네// 모기는 한두 마리 전등(電燈)에 부딪히고/ 비인 마루 우에 고양이 자욱이다/ 누워도 잠이나 오랴 내 무엇이 그리워//

비 2 / 이병기
짐을 매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 없이 나리는 비/ 내일(來日)도 나리오소서 연일(連日)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 없이 나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비 3 / 이병기
고운 돌과 물은 이르는 골마다로라/ 보고 잠착하여 저물어 돌아오다/ 갑자기 비를 맞으며 선방(禪房) 찾아드노라// 선방(禪房) 한모르에 승은 조을고 있고/ 가늘게 나리던 비 소리 점점 굵어지고/ 나무 숲 울밀한 속에 어둔 빛은 짙어라//

괴석(怪石) / 이병기
그 얼굴 그 모양을 누가 탐탁타 하리/ 앞뒤로 돌보아도 연연한 곳이 없고/ 그 속은 얼음과 같이 차고 담백하도다// 차고 담백함을 누가 귀엽다 하리/ 다만 헌신같이 초개(草芥)에 버렸으니/ 때묻고 이지러짐이 저의 탓은 아니로다//

그리운 그날 1 / 이병기
병아리 어미 찾아 마당가에 뱅뱅 돌고/ 시렁 위 어린 누에 한잠을 자고 날 때/ 누나는 나를 데리고 뽕을 따러 나가오// 누나는 뽕을 따고 집으로 돌아가도/ 금모래 은모래 쥐었다 놓았다 하고/ 나 혼자 밭머리 앉아 해 지는 줄 모르오// 소나기 삼형제(三兄第)가 차례로 지나가고/ 언덕 밑 옹달샘에 무지개 다리 노면/ 선녀들 머리 감으러 나려옴을 바라오//

금강(錦江) / 이병기
산 곱고 물도 고운 우리나라 이 강산(江山)/ 오대(五大) 장강(長江)의 금강(錦江)이 하나로서/ 비단결 같은 이 강(江)이 이 어름에 비껴 있다//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뽐내던 신라(新羅) 끝에/ 왕건(王建) 태조(太祖)도 영웅은 영웅이지만/ 개태(開泰)에 원찰(願刹)을 두고 풍수설(風水說)엔 맺혔다// 같은 이 겨레도 남북(南北)이 다 형제다/ 나뉘고 합함은 한때의 일이었다/ 오로지 투쟁만으로 이 세계를 지닐까//

낙엽(落葉) / 이병기
담머리 굴참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높은 가지 끝에 한두 잎 달려 있고/ 소소리바람이 치는 벌써 가을이구려// 지는 잎 너도 어이 갈 바를 모르고서/ 바람에 흩날리어 이리저리 헤매느냐/ 그러다 발에 밟히어 흙이 되고 마느냐// 날아드는 잎이 뜰앞에 가득하다/ 바람이 자고 달은 고이 비쳐 들고/ 밤마다 서리는 내려 하얗게도 덮는다//

송별 / 이병기
재너머 두서너집 호젓한 마을이다/ 촛불을 다시 켜고 잔들고 마주앉아/ 이야기 끝이 못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 눈이 도로 얼고 산(山)머리 달은 진다/ 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밤의 정(情)이/ 십리(十里)가 못되는 길도 백리(百里)도곤 멀어라//

농촌화첩(農村畵帖) 1 / 이병기
웅덩마다 물 괴이고 밤에는 개구리 소리/ 동산에 숲이 짙어 낮이면 꾀꼬리 소리/ 그 바쁜 마을 집들은 더욱 적적(寂寂)하여라// 앞뒤 넓은 들이 어느덧 검어졌다/ 모기와 벼룩 거머리 뜯기다가/ 겉절인 글무 김치에 보리밥이 살지운다// 일심은 오려논에 기심이 길어 있다/ 헌 삿갓 베 잠방이 호미 메고 삽 들고/ 내 일은 내가 서둘러 새벽부터 나간다// 울마다 호박넌출 그 밑에 가지 고추/ 비는 오려 하는 무더운 저녁 날에/ 똥오줌 걸찍한 냄새 온 마을을 적신다// 몇 만년(萬年) 걸고 걸은 기름진 메와 들을/ 갈고 고르고 심고 거두고 하여/ 일찍이 우리 조상도 이 흙에서 살았다//

농촌화첩(農村畵帖) 2 / 이병기
구릉(丘陵) 구릉(丘陵) 구릉(丘陵) 그 사이 사이 마을/ 금만경(金萬頃) 회마밋들 한편엔 임익평야(臨益平野)/ 진실로 남국(南國)의 옥토(沃土) 제일곡창(第一穀倉) 아닌가// 잔디 비알 이뤄 갓 배추 심어 두고/ 진펄이라도 밀 보리 밭을 삼고/ 말만한 큰아기들이 똥오줌을 이고 온다// 쌀값은 떨어지고 부감은 더럭 불어/ 풍년이 들어도 벼 한 섬 둘 것 없고/ 새봄만 돌아온다면 도로 주릴 뿐이라네//

도중점경(途中點景) / 이병기
고랑 다랑 배미 살얼음 끼어 있고/ 퍼런 보리밭에 까마귀 날아 앉고/ 들 너머 먼 산(山)머리론 아지랑이 잦았다// 산(山)은 산(山)이로되 돌이나 흙만 남아/ 소쩍새 한 마리 깃들일 곳이 없고/ 갓 나는 잔솔 포기는 그 언제나 자랄는고// 나아가고 보면 점점 트이는 이 골/ 강(江)과 바다 끼인 옥야(沃野) 천부(天府)이지만/ 갈 들어 거둔다 해도 남을 것이 없다네//

홍원저조(洪原低調) / 이병기
묵직한 철책문鐵柵門이 덜그덕 닫치는고나/ 도몰아 이는 가슴이 메어지고/ 하룻밤 지내는 동안 적이 수壽를 덜었다// 버버리 그저 있고 처녀는 어제 죽다/ 발로 걷지 않고 자리를 옮겨 앉아/ 우러러 철창鐵窓 너머로 달을 처음 보았다// 등은 깜박하고 까마귀 소리 난다/ 창을 열뜨리고 누긋한 호흡을 하여 새 기운을 흐루다// 어뜩 새벽부터 빤히 트이는 하늘/ 가로 두른 선線은 담록 淡綠과 연분홍빛/ 내 매양 자고 일어나 거울삼아 보노라// 세상 모든 일이 저절로 잊어지고/ 죽지 못하요 하잖이 남은 목숨/ 다만 그 아침 저녁으로 도야지를 기린다// 이쑤시개 바늘삼아 해진 옷을 얽어매고/ 밥풀을 손에 이겨 단추를 만들어 달고/ 따뜻한 볕을 향하여 이 사냥을 하도다// 파란 하늘가에 빨간 노을이 돋고/ 까마귀 두어 마리 소리 없이 지나가고/ 앞 지붕 지붕머리로 저녁볕은 잦았다// 졸다 깨어 보니 산뜻한 볕이 난다/ 한나절 오던 눈이 지붕마다 소복하고/ 흐리던 구름 걷히며 파란 하늘 돋는다// 뜰에 나던 볕이 창으로 다시 든다/ 하루를 보내기 한해도곤 더디더니/ 어느덧 제 돌을 이어 또 가을이 되었다// 몹시 곤한 그 잠 숨소리 높아지고/ 빨간 숯불 곁에 간수看守도 노그라지고/ 호올로 나는 그 밤을 등과 함께 밝히다// 바다를 앞에 두고 보랴 보든 못하여도/ 전진 前津과 송도松島의 그 모양 그 이름과/ 아울러 파도 소리는 귀에 이미 젖었다// 고토故土의 모든 풍물 몹시도 그리워라/ 글월 한 쪽이 금쪽같이 귀엽고/ 무심한 기적汽笛소리도 때로 나를 놀랜다// 몹시 기다리다 아이들 편지 보니/ 팔순된 아버지 주야로 염려하시며/ 차디찬 방에 겨오셔 이 겨울을 나신다고// 눈언덕 다 꺼자고 볼은 옴푹 들어가고/ 뼈다귀 비어져 나무나 돌 같으되/ 맑고도 찰찰한 마음 전생前生 일도 다 헬레// 눈이 쌔고 쌔고 바람은 벼를 에우는데/ 손마다 꾸러미 들고 찾아드는 아들 딸/ 머나먼 험한 이 길을 문턱처럼 여긴다// 그 밤을 자고 나면 도로 그날 그날이다/ 짜고 누르고 뼈마저 다 녹인다/ 전전前前에 없던 마음도 새로 지어 이르다// 이불을 반투어 덮고 숨도 죽이고 누워/ 조이는 마음 이와 함께 웅실이다/ 이 밤도 겨우 든 잠을 비가 도로 깨운다// 법을 도가니 삼고 형으로 망치질하여/ 불로 녹이고 물로 시키고 하여/ 이 몸을 저의 맘대로 쇠와 같이 다루네// 샅샅이 이 인간을 그물로 후려낸다/ 한 번 걸리면 도마 위에 고기로다/ 붉어진 백정白丁의 눈에야 온전한 소 있으리// 비단 같은 뫼이 겹겹이 둘러 있고/ 검은 구름 틈에 달은 반쯤 비껴 나고/ 어디서 음악 소리는 은은하게 들린다// 보내는 그날 그날이 괴롭고 어렵더니/ 참고 견디어 도리어 버릇이 되어/ 참혹한 지옥살이도 천당으로 아노라// 손으로 꼼작거려 사주팔자도 보고/ 종이를 접어 개구리도 만들고/ 콩고물 참쌀가루로 큰 잔치를 베푼다// 종일 끓고 앉아 철창만 바라본다/ 몹시 소란하던 바람이 잠잠하고/ 얄포시 비끼는 볕도 들락날락하여라// 아직도 여염閭閻에는 고풍이 남았건만/ 팥죽도 없는 동지도 지나가고/ 창살에 비끼던 볕이 한 치 남아 자랐다//
* 감옥살이의 작품

박연폭포 / 이병기
이제 산(山)에 드니 산(山)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밑에 우는 폭포 백(百)이요 천(千)이러니/ 박연(朴淵)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오리 이던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이 흐르던 물이 그ㅊ지 아니하도다//

서향(瑞香) / 이병기
어두운 깊은 밤을 나는 홀로 앉았노니/ 별은 새초롬히 처마 끝에 내려보고/ 애연한 서향(瑞香)의 향은 흐를 대로 흐른다// 밤은 고요하고 천지(天地)도 한맘이다/ 스미는 서향(瑞香)의 향에 몸은 더욱 곤하도다/ 어드런 술을 마시어 이대도록 취하리//

꽃 / 이병기
꽃을 보려 하고 봄 오기를 바랐더니/ 새우는 찬바람 끝에 겨우 피려 하던 꽃이/ 덧없이 퍼붓는 비에 그저 지고 말아라//

매화 - 고목(古木) 된 야매화(野梅花)를 수년(數年) 기르다 얼려 죽이고 / 이병기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 따듯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梅花)//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梅花)//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 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梅花)//

매화 2 / 이병기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청매(靑梅) 3 / 이병기
봄마다 방긋방긋 구슬보다 영롱(玲瓏)하다/ 낼 모레면 다 필 듯 벗들도 오라 하였다/ 진실로 너로 하여서 떠날 길도 더뎠다// 대체 복(福)이란 건 길고 짜를 뿐이다/ 요(夭)니 수(壽)니 함도 이걸 일컬음인데/ 짜르고 긴 그 동안을 우리들은 산다 한다// 오늘 아침에야 봉 하나이 벌어졌다/ 홀로 더불어 두어 잔을 마시고/ 좀먹은 고서(古書)를 내어 상(床)머리에 펼쳤다//

풍란(風蘭) / 이병기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같은 뿌리를 서려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꽂은 하얗고도 여린 자연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이며 그 향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느니.//

               난초 / 이병기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난초 1 / 이병기
한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 2 / 이병기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난초 3 / 이병기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冊)을 앞에 놓아 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난초 4 / 이병기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파초(芭蕉) / 이병기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芭蕉)/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여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청동(靑銅) 화로 하나 앞에다 놓아 두고/ 파초(芭蕉)를 돌아보다 가만히 누웠더니/ 꿈에도 따듯한 내 고향을 헤매이고 말았다//

수선화(山仙花) / 이병기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 두고/ 그 우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山仙花)// 투술한 전복 껍질 발 달아 등에 대고/ 따듯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우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

오동꽃 / 이병기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나려 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냉이꽃 / 이병기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詩)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地球)는 어떨 건가/ 수소탄(水素彈) 원자탄(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옥잠화 / 이병기
빛나는 파란 잎새 파란 대공 하이얀 꽃/ 꽃마다 동글동글 玉비녀 꽂아 놓은 듯/ 이 아니 아름다우랴 이름 또한 玉簪花// 맵시며 차림차리 담장(澹粧)한 美人이다/ 유달리 맑은 향기 은은하게 움직이고/ 서로이 대할 적마다 웃는 듯도 하구려//

함박꽃 / 이병기
이제야 피는 양은 때가 늦어 그리는지/ 푸른 잎 사이사이 흰 숭이 붉은 숭이/ 제여곰 수줍은 듯이 고개 절로 숙인다// 유달리 풍성하고 화려한 그 얼굴을/ 우거진 녹엽(錄葉) 속에 으늑히 숨겨 두고/ 행여나 뉘라 알까봐 향기마저 없더라//

낙화 / 이병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마(詩魔) / 이병기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 내기 어렵다// 펴 든 책(冊) 도로 덮고 들은 붓 더져 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나오라 / 이병기
일즉 님을 여희고 이리저리 헤매이다/ 버리고 던진 목숨 이루 헬 수도 없다./ 웃음을 하기보다도 눈물 먼저 흐른다.// 다행히 아니 죽고 이 날을 다시 본다./ 낡은 터를 닦고 새 집을 이룩하자./ 손마다 연장을 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
* 조국 광복의 기쁨과 새 조국 건설의 의지를 담은 시조

애도(哀悼) / 이병기
비록 병이 들어 앓는다고 다 이러랴/ 백 년도 하찮은데 앞을 서서 가느냐/ 네 간 곳 내 가기 전에 이 설움을 어이리//

야시(夜市) / 이병기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쓴 이 벙거지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 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기정기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 십전 이십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외로운 이 마음 / 이병기
입동(立冬)이 멀잖은데 아직도 날씨는 덥다/ 어제 두어 잔 찬 술을 마셨더니/ 이 밤이 들기도 전에 배가 자주 끓는다// 잠은 든숭만숭 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피곤한 몸이 일어나기도 싫다가/ 첫새벽 참새 소리에 오도(悟道)한 듯하고나// 한 포기 꽃도 없는 사막(沙漠)과 같은 이 생활(生活)/ 부귀나 영화는 아예 바랄것 없거니와/ 한 나이 더해 갈수록 더 외로운 이 마음//

매창 뜸* / 이병기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고나// 羅衫常 손에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 뜸이란 한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을 뜻하지만, 매창 뜸이란 38세에 죽은 이매창을 애석히 여긴 부안사람들이 그가 묻힌 무덤과 지역을 정겹게 부르는 호칭.

가을 / 이병기
거뭇한 바위틈에 발간한 단풍ㅅ가지/ 삼각산 봉우리마다 석양이 비치는데/ 은은히 어는 골에서 종ㅅ소리가 들린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일어나며/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ㅅ그림자도 바쁜듯이 가누나// 베어내고 뽑아내고 또 무엇을 파아내나/ 새파란 광이ㅅ날이 가을ㅅ볕에 번쩍이며/ 이제야 웃음ㅅ소리가 들로부터 나오네//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줄을 모르네//
* 1946년 중등국어교본 상

정원(庭園)의 가을 / 이병기
우북히 솟아나던 차[茶]나무 다 베어 가고/ 상수리 익기도 전에 다투어 다 따아 가고/ 두어 대 산(山)옻나무의 단풍잎만 빨갛다// 난(蘭)을 사랑하던 마음 무우와 배추로 옮겨/ 그 가뭄 그 더위와 함께 타고 오그라지다/ 지난 밤 소낙비 듣고 나도 도로 젊었다//

향(香)의 가을 / 이병기
노깡 화분(花盆)에다 백련(白蓮)을 심었더니/ 중추(仲秋) 초하룻날 두어 송이 피어났다/ 그 향(香)을 함께 맡으려 벗을 오라 하였다// 뜰밑 계손(溪蓀)과 섞여 봄비에 옮긴 국화(菊花)/ 잦은 진딧물과 그 장마를 다 겪고 나서/ 누르고 희고 붉으며 벌이 먼여 모여든다// 천지 그 변화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완도(莞島) 해남(海南)서 온 유자(柚子)도 향이 없고/ 레몬꽃 한두 송이가 피어 홀로 뽐낸다//

갈보리 / 이병기
옅은 구름 끼고 서리도 아니 내렸다/ 언덕 퍼런 숲에 새들은 지저귀고/ 그 밑엔 갈보리 잎이 소복소복 자란다// 쓰일 듯 쓰일 듯하여 붓은 던질 수 없고/ 문장(文章)만으로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원컨대 오는 해마다 풍년(豊年)이나 드소서//

풀버레 / 이병기
해만 설풋하면 우는 풀버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히 멀리 예서 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어 울다 뚝 끈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어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우리님 / 이병기
아아 우리 님을 밉다고 말을 마라/ 갖은 그 얼굴을 일찍 보았는가/ 단장만 하고 나서면 천하일색이려니//

처(妻) / 이병기
귀히 자란 몸에 정주도 모르다가/ 이 집 들어오며 물 긷고 방아 찧고/ 잔시늉 안한 일 없이 가는 뼈도 굵었다// 맑은 나의 살림 다만 믿는 그의 한몸/ 몹시 섬약하고 병도 또한 잦건마는/ 그래도 성한 양으로 참고 그저 바궈라// 나이 더하더라도 마음이야 다르던가/ 백년(百年) 동안이 만나던 그날 같고/ 마주 푼 귀영머리는 나보다도 검어라// 이미 맺은 인연 그대로 잇고 이어/ 다시 태어나되 서로 바꾸어 되어/ 이생의 못다한 정을 저생에서 받으리//

젖 / 이병기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八九) 남매/ 따듯한 품 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파랑새 / 이병기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 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주시경선생(周時經先生)의 무덤 / 이병기
해마다 이 곳에도 봄은 돌아오지마는/ 벌건 모래 비알 풀 한 잎 아니 나고/ 서글픈 개구리 소리 재를 넘어 들리오// 한 손에 모래알을 움켰다 뿌려도 보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서서도 보다/ 발밑에 엉기어 드는 개아미를 놀리오// 해마다 봄은 와도 풀 한 잎 아니 나고/ 표를 하여 세운 돌 한 개 있고 없고/ 남기어 주신 그 뜻을 맘에 새겨 두리다//

아차산 / 이병기
고개 고개 넘어 호젖은 하다마는/ 풀섭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이병기(李秉岐, 1891년∼1968년) 시조 시인, 국문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이며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서울대학교 강사·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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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현대시조와 국문학] 청정·고아한 서정, 전북이 낳은 영롱한 별 - 전

가람 이병기(1891- 1968)는 전통적인 조선조의 시조장르를 현대시조로 계승 발전시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다. 가람은 변호사(이 채)의 장자로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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