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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유자효 시인

부흐고비 2021. 9. 18. 07:59

가을의 노래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가을 햇볕 / 유자효
가을 햇볕은 여름에 남은 마지막 정情마저도 태워 버린다/ 모든 미련을 끊고 찬바람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을 햇볕은 여름이 남긴 수분을/ 알곡이 모두 빨아들이고/ 과육果肉을 더욱 단단하게 여물게 한다/ 아, 다행하게도/ 병든 대지가 서서히 제 몸을 치유한다/ 다친 곳이 많았다/ 아픈 곳이 많았다/ 천천히 천천히 몸을 뒤채이며/ 온몸에 업고 안고 있는/ 잘디잔 무수한 목숨들이/ 그 입으로, 그 촉수로, 손과 발로, 전신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드디어 편히 숨 쉬게 한다/ 아직 끝은 아니었구나/ 이 계절이 주는 은혜/ 축복/ 부활/ 생명이시여//

추석 /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추석의 추억 / 유자효
성묘를 끝내면 아버지는/ 우리들을 근처의/ 선암사로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는 선암사 시주셨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내가 부처님을 처음 뵙고/ 절을 한 곳이 선암사이다.// 선암사 근처 폭포에서/ 차가운 물을 맞고/ 개울에서 가제를 잡았다//

감 / 유자효
이 가을 푸른 하늘/ 수놓은 붉은 점들// 반짝/ 눈물 끝에/ 흘린 피 몇 방울// 아직은/ 끝이 아니다/ 보여주는/ 신호등//

소나무 / 유자효
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 찬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은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

꽃길 / 유자효
당신을 만난 것에 감사합니다/ 함게 해온 시간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남으로서 탄생한 생명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서 나의 눈이 트였고/ 세상이 보였습니다/ 밤길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함께 걸어온 길은 꽃길/ 가시밭길도 때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당신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걸어갈 길도/ 마지막 떠날 그 길도/ 당신과 함께하면 언제나 꽃길/ 멀리 있어도/ 홀로 있어도/ 당신의 마음과 함께 있으면/ 그것은 또 언제나 꽃길.//

       떠날 줄 알게 하소서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 보다 더 빛나는 것은/ 떠남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줄 알게 하소서/ 이 저문 들녘에 철새들이 남겨 둔 보금자리가/ 훈장의 약속이 되게 하소서//


인생 /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인생 / 유자효
신은 사람들에게 웬만큼의 시간을 베풀어 주었다./ 웬만큼 조심하면은 6, 70년은 살 수 있다./ 6, 70년./ 긴 시간이다./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세상도 웬만큼 구경하고/ 삶도 어지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신은 거기까지 배려했었다./ 웬만큼 조심하면은/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인생은 눈물겹도록 행복할 수도 있는 거였다.//

 

여름 강 / 유자효
한여름/ 푸른 밤에/ 보름달은/ 강에 지고// 도롱이/ 늙은 어부/ 검은 강을/ 저어가고// 와스스/ 대바람 소리/ 흩날리는/ 빗방울//

이태석 신부 / 유자효
지금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남 수단 나환자가 본/ 그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떠나야 깨치게 되는/ 우리 곁의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 유자효
아기 새끼 손가락만한 참새 새끼가/ 모이를 주워먹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어미에게 쪼르르 달려가/ 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기 주먹만한 어미/ 새끼를 품으니/ 어른 주먹만해졌다//

사랑하는 아들아 / 유자효
아들아/ 네 아픔이 내게로 전해오니/ 사시사철 자욱한 물안개 뿐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일랑 묻어두면 어떨까// 좋으면 갖고 싶지/ 그것이 당연하지/ 그러나 안되는 게 더 많은 세상에서/ 참아라/ 이 말만 거듭 피 토하듯 뇌인다// 끊일 것 같아도 세상은 이어가고/ 없을 것 같아도 내일은 다시 밝고/ 마음의 주인 되는 법 배웠다고 여기렴//

인생의 봄을 맞은 아들에게 / 유자효
네 어미에게 들었다/ “엄마,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지?/ 미칠 것만 같아”/ 얘야/ 봄은 그런 것이다/ 미어질 것 같은 가슴으로 삶은 망울을 맺는 것이지/ 엄마에게 물었다지/ “엄마도 그래?”/ 엄마도 그랬었지/ 그러나 이제 엄마는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지/ 엄마는 여름을 사랑하지/ 그 더위의 왕성한 생명력과 푸름을 그리워하지/ 엄마는 오히려 가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싸늘한 바람이 대지를 적실 때/ 엄마의 가슴은 낙엽 한 올에도/ “덜컹”/ 떨어지는 무게를 체중 가득히 느끼는 것이다/ 얘야/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청춘(靑春)이라고 이름했겠니/ 계절에서 밀려나는 엄마가 보는/ 계절의 시작인 네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잠 안 오는 밤에 내게/ 말하더구나//

가족사진 / 유자효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는/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말을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됐지만/ 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아침 식사 / 유자효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더 잘 씹어야 하는 아픔//

아버지의 힘 / 유자효
아직은 잠들 때가 아닙니다/ 아버님/ 가실 길이 남았습니다/ 깨어나십시오/ 그 용기와 힘을 보여 주시고/ 담대함과 거침없음/ 사내다움을 보여주소서/ 너무나 약해빠져/ 실패를 겁내며/ 속으로만 욕을 하면서/ 계집애처럼/ 한만 쌓아가는 약골들에게/ 벼락을 내리소서/ 아버님/ 깨어나소서//

할아버지 시계 / 유자효
할아버지의 시계는 늦은 가을이다/ 낮은 소리로 일정한 속도로 간다/ 이낀 낀 돌담을 울리는 소리/ 깊고 잔잔한 그 소리는/ 이슬이 되어 돌에 스민다/ 할아버지의 시계는 저녁 어스름이다/ 잠들 시간이 멀지 않아서/ 온화하고 사랑이 많다/ 그소리는 깊이 울려서/ 벽난로에 잠시 머물다 쓸쓸하게 돌아선다/ 하루가 끝나는 고요와 평화로움/ 호롱불에 펄럭이다 사라지는 그 그림자에서/ 보았느냐/ 천사와 같은 아기의 모습/ 늦은 가을 저녁 어스름/ 할아버지의 시계는/ 연약하고 순수한 은빛으로 가고 있다//

늙은 아들 / 유자효
이제는 부모님보다 더 늙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답답하면 찾습니다/ 그 품을/ 아무리 늙어보아도 자식입니다/ 늘 어린//​

똥 / 유자효
손자가 응가를 한다/ 술렁술렁 빠쳐나온 노란 똥 몇 덩이/ 건강하고 예쁘다// 끊임없이 변의에 시달리는 장모는 대변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이다/ 천신만고/ 갖은 고생 끝에 빠져나온 딱딱한 검은 똥 몇 덩이 가끔 피도 섞인다// 손자의똥을 누이고/ 장모의똥을 누이며/ 인생이란 결국/ 예쁜 노란 똥에서 힘든 검은 똥 사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주먹 / 유자효
아기 새끼손가락만 한 참새 새끼가/ 모이를 주워 먹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어미에게 쪼르르 달려가/ 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기 주먹만 한 어미/ 새끼를 품으니/ 어른 주먹만 해졌다//

사랑은 / 유자효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루어지지 않아야/ 그리움이 보석이 되고/ 슬픔은 승천하여 별이 된다//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완성 없는 완성을 탐한 죄과로/ 추락하여 지상을 기는 영성靈性의 사체//

성스러운 뼈 / 유자효
불에도 타지 않았다/ 돌로 짙어도 깨어지지 않았다// 고운 뼈 하나를 발라내어/ 구멍을 뚫었다// 입을 대고부니 묘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번뇌를 달래는 힘이 있었다/ 사랑을 복돋아 주진 못하지만// 고통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힘/ 오직 사람의 뼈이어야만 했다//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아/ 그 괴로움이 뭉치고 뭉쳐// 단단하고 단단하게 굳어진 것이야만 했다/ 그 어떤 불로도 태우지 못하고// 그 어떤 돌로도 깨지 못하는/ 견고한 피리 하나가 되기 위해선//

잔소리 / 유자효
오늘도 아내는 잔소리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아내의 잔소리가 따라옵니다/ 잔소리 뿐이 아닙니다/ 나가려는 나를 붙들고 잔소리와 함께 뒷머리를 빗겨줍니다/ 40여 년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온 나는 아직도 그것에 익숙하지 못하여 가끔 불쑥 짜증을 냅니다/ 화는 아닙니다/ 화를 내면 그때는 잔소리가 아닌 폭탄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내의 눈물 방울입니다/ 저를 꼼짝 못하고 무릎 꿇게 하는 눈물 폭탄에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오늘도 나는 아내의 잔소리를 다소곳이 듣고 있어야 합니다/ 착한 아들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한들거림 / 유자효
한들거리다 낮아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여/ 때로는 홀씨처럼 떠돌다/ 계곡물에 실려 가기도 하고/ 불운하여라/ 더러는 차도 위에 떨어지고/ 타이어에 밟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끊임없는 가벼움/ 가벼움이여/ 한들거리다 낮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이여//

여적 / 유자효
내 평생 많은 사람 만났다고 여겼는데/ 외로워서 돌아보니 세상은 적막강산/ 무너진 가슴을 안고 홀로 넘는 등성이//

슬픔 / 유자효
슬픔은/ 힘이 세다/ 살과 뼈를/ 다 녹인다// 목숨을/ 태운 끝에/ 보이느냐/ 한 줄기 빛// 영혼이/ 먹고 자라는/ 식량이다/ 슬픔은//

속도 / 유자효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굳이 / 유자효
우리는 안될 곳을 굳이 찾아 가려고 한다/ 동주가 죽을, 중섭이 쫓겨날 일본으로 굳이 가려 했듯이/ 그것도 죽을둥 살둥/ 온갖 힘을 다해서//

적선 / 유자효
큰돈을 못 드려서 당신께 부끄럽소/ 가진 것 못다 드리고 떠날까 봐 무섭소/ 당초에 내 것 아닌 것 몰랐다니 우습소//

지도 / 유자효
내 나라 방방곡곡/ 사랑스런 이름들// 풍세 국수 구리 원통/ 웅진 나주 욕지 사량// 말 설고 물도 설으니/ 작으나 큰 내 나라.//

아름다운 세상 / 유자효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는 살육이 저질러지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떠나버린 고독에 몸을 떠는/ 사람들이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파멸을 위한 악의 씨가 뿌려지고 악의 꽃들이/ 재배되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나 세상의 중심/ 당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세상의 유일한 선택/ 세상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니/ 당신이 떠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곳//

홀로 가는 길 / 유자효
빈 들판에 홀로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동행도 친구도 있었지만/ 끝내는 홀로 되어/ 먼 길을 갔습니다// 어디로 그가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따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홀로였기에// 어느 날 들판에 그가 보이지 않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홀로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없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홀로였습니다//

개 / 유자효
의정부에서 열린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 경기도 예선/ 눈 먼 여인이 누런 개의 인도를 받으며 건물로 들어섰다/ 대회장의 밖에 개는 공손하게 앉았다/ 여인은 화장실로 가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풀어 한복으로 갈아 입었다/ 여인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몇 번을 맨발로 연습한 대회장 바닥의 감각을/ 맨발로 확인하며 단상에 올랐다/ 아무도 그녀가 눈이 먼 줄 몰랐다/ 여인은 창과 함께 시를 낭송했다/ 낭송은 다소 서툴렀지만 절절한 한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여인의 차례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개는 눈을 끔벅이며 구석에 묵묵히 엎드려 있었다/ 누가 바라보면 개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진 눈/ 어진 눈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어느 착한 사람이 개의 형상을 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여인은 장려상을 타고/ 개는 다시 여인을 인도해 건널목을 건넜다/ 아무도 그 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묵묵히 엎드려 있던 누런 등과/ 천천히 끔벅이던 어진 눈/ 이름 없는 무수한 성자 중의 하나가/ 개가 되어 여인을 인도하고 있었다/ 저 흔한 우리 누렁이 중의 하나가 되어//

마스크 / 유자효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전철 안이 조용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입맞춤이 사라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표정들이 사라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예쁜 눈만 남았다/ 비로소 공평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詩 / 유자효
詩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것이다/ 삶을 돕기는 커녕 방해만 한다/ 허영이며 사치며/ 한갓 장식품이 되기도 한다/ 못생긴 얼굴에 분을 바르고/ 모델인 양 으스대면서/ 세상의 말을 오염시킨다/ 조심하라/ 네 주술에 네가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 / 유자효
몇 십 년 시를 쓰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 몇 십 년 시를 쓰다가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온갖 것 다 해보겠다고 쫓아다니다/ 죽을 때 즈음해// “아하! 이게 나의 현생이었구나”// 시 쓰려고 목숨 받아 다시 세상 나왔던 것을//

강릉에 와서 / 유자효
초희楚姬ㆍ균筠의 집에는/ 낙엽만이 날리고// 울음도 아쉬움도/ 고통도 다시 없는// 신선이 되셨는가요/ 한숨 소리/ 갈대숲//

그 여인 / 유자효
모처럼/ 양복이며/ 넥타이며/ 차려 입고/ 광화문 네거리를 내려가는데/ 문득 눈에 띄는/ 그 여인/ 삼십년 만인가/ 사십년 만인가/ 양장에/ 손가방을 들고/ 신호를 기다리던/ 그 모습은/ 아직도 예전과 다를 바 없고/ 고생은 없었는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신호가 바뀌자/ 황황히 길을 건너던/ 가냘픈 어깨 뒤로/ 내리던 노을/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신산했던 그 세월/ 옛날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인파 속에 묻혀 가던/ 삼십년 만인가/ 사십년 만인가/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아무런 기약도 없이/ 멀리/ 힘없이 무너져 가던/ 작은 그림자/ 그 여인//

주머니 속의 여자 / 유자효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주머니 속 여자가 외친다// 좋은 조건의 대출상품 있다고/ 동창모임 있다고/ 심지어는 벗은 여자 사진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댄다// 버튼을 눌러 말문을 막아버리자/ 마침내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참 성질 대단한 여자/ 주머니 속의 여자//

세한도 / 유자효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 같은 사람이 그립고/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무얼 찾아 냈는지/ 까마귀 한쌍이 진종일 울어/ 금부도사 행차가 당도할지 모르겠다/ 삶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라고 치부해도/ 귓가에 스치는 금관조복의 쏠림 소리/ 아내의 보드라운 살결 내음새/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끝내 잊히지 않는 지독한 형벌/ 무슨 겨울이 눈도 없는가/ 내일 없는 적소에/ 무릎 꿇고 앉으니/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질긴 목숨의 끈/ 소나무는 추위에 더욱 푸르니/ 붓을 들어 허망한 꿈을 그린다//

눈이 오다 / 유자효
누가 왔나/ 이 밤중에/ 하얀 등불 들고서// 화드득/ 방문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니// 세상이 이렇게 밝아 몸 숨길 곳 없어라//

섣달 / 유자효
정리해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원통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시간을 다 썼습니다//

회상 / 유자효
잠깐/ 보지 못했는데/ 저승에 가 있습니다// 지척이라 여겼는데/ 아득한 시간입니다// 걸어온 날들이 모두/ 꽃길처럼 뵙니다//

아침송 /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없다/ 두려워 말라/ 젊은이여/ 그 길은 너의 것이다/ 비온 뒤의 풋풋한 숲속에서/ 새들은 미지의 울음을 울고/ 은빛 순수함으로 달리는//

​아직 / 유자효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노래 2 / 유자효
말 못하는 아기의 마음을 어머니가 알 듯/ 어른의 마음을 아기가 알 듯/ 어린 강아지가 사람의 마음을 알 듯/ 저 짐승들의 마음을 사람이 알 듯/ 뿐이랴/ 사람들의 마음을 나무가 알 듯/ 꽃들의 마음을 벌들이 알 듯/ 사랑하면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사람만이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타고났나니/ 네가 부르면/ 나도 부르고/ 내가 부르면/ 너도 부르고//

마라토너 / 유자효
그는 달린다/ 가슴이 터질듯한 고통/ 숨이 끊어질듯한 공포/ 포기하고 싶다/ 걷고 싶다/ 쉬고 싶다/ 눕고 싶다/ 시시각각/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며/ 그는 달린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 그는 달린다//

염려 / 유자효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 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아픔 / 유자효
만지지 말아다오/ 스치는 바람결에도/ 자지러지게 아프니/ 손대지 말아다오/ 세상은 아픔 투성이/ 아픔은 무섭지만/ 정말 싫지만/ 아픔을 모르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하니/ 아픔과 함께 가야할 밖에// 쳐다보지 말아다오/ 이제는 눈길에도 참 아프구나//

윤회 / 유자효
신령한 기운이 있어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두뇌를 그대로 갖고 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아닌 내가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조상의 그늘을 내가 입고 내가 하는 일이 나의 미래와 내 후손의 그늘이 된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요/ 설령 윤회의 바퀴 위에 얹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의 질서인고로 지금의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시간만이 나에게는 오로지 알파이자 오메가/ 그래서 지금 이 삶이 윤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난산 / 유자효
어린 암소가 난산이라는 전갈을 받고 수의사가 달려왔다/ 암소는 탈진 상태이고 새끼는 대가리를 반만 바깥에 드러내고 있었다/ 어미의 골반이 작은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수의사는 새끼를 다시 밀어 넣어 위치를 잡고 강제분만을 시도했으나 되지 않았다/ 어미라도 살리기 위해 새끼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 천신만고 끝에 새끼가 밖으로 끌려 나왔다/ 숨을 쉬지 않는 새끼의 입에 숨을 불어넣는데 탈진해 있던 어미가 고개를 돌려 혀로 새끼의 젖은 몸을 핥았다/ 그러자 새끼는 비칠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몇 번을 자빠지다가 마침내 일어서는 새끼/ 그날 몽골 초원은 새 가족을 맞아 더욱 푸르렀다//

부활절 아침 / 유자효
그렇게 떠나신 후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에도 세상이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육이, 공포가, 고통이 넘쳐납니다/ 무섭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소서/ 주님/ 다시 오소서//

무섭다 / 유자효
나는 고모부와 이복형을 죽인 30대 청년이 무섭다/ 사람들을 예사로 죽인다는 그가 무섭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잘 만난 행운아/ 그의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분장한 청년 말에 굽실거리는 노인들이 무섭다/ 일이 잘못되자 돌아가는 열차 그 청년의 문간에서 무릎 꿇고 빌었다는 노인의 석고대죄가 무섭다/ 그 청년이 나타나면 땅에서건 들에서건 껑충껑충 뛰며 열광하는 군중들이 무섭다/ 왕조가, 독재가, 독선이 무섭다/ 먹고살기 어렵다면서 쏘아 올리는 미사일이 무섭다/ 지축을 흔드는 핵무기가 무섭다/ 같은 말을 쓰는 타인들/ 나는 그들이 몸서리치게 무섭다/ 그들을 좋다고 하는 이들도 무섭다//

염려 / 유자효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하말라야 사람들 / 유자효
큰 눈이 오기 전/ 하말라야에서 소금을 캐어/ 하말라야를 넘어 소금을 풀고/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다시 하말라야를 넘어/ 처자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는 하말라야 사람들/ 그들은 서른 번 하말라야를 넘으면/ 다시는 마을에 돌아오지 않는다//

부처님 / 유자효
기다리지 마/ 다음이란 없어/ 탁발 스님을 보았을 때 시주를 하고/ 걸인을 만났을 때 동전 하나라도 던져야 해/ 부처님은 다시는 오지 않아/ 오직 한 번/ 네 앞에 모습을 나타내신/ 그 때를 놓치지 마/ 다음이란 없는 게야/ 다음이란//

 



유자효 시인, 방송인
1947년 부산 출생. 서울대 사대 불어과 졸업. 1974년 KBS 한국방송공사, SBS 서울방송에서 방송활동을 하였다.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 SBS라디오 본부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을 역임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한국문학상, 공초문학상, 현대시조문학상. 후광문학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한국참언론인 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동인지 <잉여촌> 동인이다.

시집으로 『성 수요일의 저녁』, 『짧은 사랑』, 『지금 독서 중입니다』, 『떠남』, 『라라의 투쟁』, 『내 영혼은』, 『지금은 슬퍼할 때』, 『데이트』, 『금지된 장난』, 『아쉬움에 대하여』, 『안장현과 한글문학』, 『성자가 된 개』, 『여행의 끝』, 『전철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다』,『나는 희망을 보았다』, 『사랑하는 아들아』, 『심장과 뼈』, 『어디일까요』, 『신라행(新羅行)』 등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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