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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한직 시인

부흐고비 2021. 9. 20. 08:58

풍장(風葬) / 이한직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뜬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 이 되는구나.// 날마다 날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북극권(北極圈) / 이한직
초록빛 지면(地面) 위에/ 한 개 운석(隕石)이 떨어지고.// 바람은 남(南)쪽으로 간다더라/ 징 툭툭한 구두를 신고.// 소란타, 마음의 계절(季節)/ 나의 뮤즈(Muse), 그대, 각적(角笛)을 불라!/ 귓속에선 매아미도 우짖어라.// 묘망(渺茫)히 창천(蒼天) 아래 누운/ 나형(裸形)의 넵튠(Neptune)!/ 추위를 삼가라.// 색채(色彩) 잊은/ 그날 밤의 꿈이여.// 밤마다/ 유찬(流竄)의 황제(皇帝)처럼/ 깨어진 훈장(勳章)의 파편(破片)을/ 주워모은 하―얀 손, 손,// 파리한 내 손.//

기려초(羈旅抄) / 이한직
그 굽어진 재 위에서/ 나는 그림자를 잃다.// 습지(濕地)에는 슬픈 설화(說話)의 발자국을 남긴 채/ 쉐퍼어드인 양 재빨리 걷다.// 함박눈처럼 날아오는 사념(思念)을/ 하나하나 아름다이 결정(結晶)시키고.// 또는―/ 산뜻한 Ozone을 헤치며 헤치며/ 함부로 휘파람도 날리다.// 상복(喪服) 입은 백화림(白樺林) 사이사이로/ 넌즛, 내어다보이는/ 꽃이파리 못지않게 현란(絢爛)한 산(山)결이여.// 동화(童畵)같이 어지러이 덧덮인 산맥(山脈)에서/ 이제 나는 조상(祖上)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들의 골격(骨格)을 생각하다.// 오전(午前) 열한 시(時)―/ 남풍(南風)은 유달리 미끄러워/ 산(山)마루턱에는 눈부시게/ 오월(五月) 햇살이 빛나다.// 이제 용렬(庸劣)한/ 시정(市井)의 거짓에 겁내지 않으리.// 한봉지 하아얀 산약(散藥)을 흩뿌린 다음/ 곰곰이 빛나는 흙을 더듬어 보다.// 이제부터는 우울한 생활(生活)에 매이지 않으리라고/ 나는 소라처럼 안도(安堵)하다.//

온실(溫室) / 이한직
그 유리창(琉璃窓)너머/ 오월(五月)의 창궁(蒼穹)에는/ 나근나근한 게으름이 놓였다// 저 하늘/ 표운(漂雲)이 끊어지는 곳/ 한대 비행기(飛行機) 간다// 우르릉 우르릉/ 하잔히 폭음(爆音)을 날리며// 진정/ 첫여름 온실(溫室) 속은/ 해저(海底)보다 정밀(靜謐)한 우주(宇宙)였다// 엽맥(葉脈)에는/ 아름다운 음악(音樂)조차 담고/ 정오(正午)/ 아마릴리스는 호수(湖水)의 체온(體溫)을 가졌다// 풍화(風化)한 토양(土壤)은/ 날마다/ 겸양(謙讓)한 윤리(倫理)의 꽃을 피웠지만// 내 혈액(血液) 속에는/ 또 다른 꽃봉오리가/ 모르는 채 나날이 자라갔다//

낙타(駱駝)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때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시인(詩人)은/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 1939.8월 <문장> 7호

가정(家庭) / 이한직
1// 마음 이리 호젓할 때면/ 소리 높이 군가(軍歌)도 불러 보았다// 2// 모두 쓸쓸한 사람들/ 밤이 밀려오면 소리 없이 봄비도 내렸다/ 분분(芬芬)히 즐거운 단란(團欒)은 없었지만/ 때로는 몸서듯 봉오리 지니는 군자란(君子蘭)이었다// 3// 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 서로서로/ 생각은 달랐지만 어리둥절 그 눈초리에/ 가냘픈 희망(希望)이 빛났다/ 이럴 때면 구태여 인간(人間)됨도 설지 않아/ 안도(安堵)는 끝없는 외로움인 양 마음 포근하다//

놉새가 불면 / 이한직
놉새가 불면/ 당홍(唐紅) 연도 날으리// 향수(鄕愁)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꺽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황(黃)나비도 날으리// 생활(生活)도 갈등(葛藤)도/ 그리고 산술(算術)도/ 다 잊어버리고// 백화(白樺)를 깎아/ 묘표(墓標)를 삼고/ 동원(凍原)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百合)꽃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또 다시 허구의 봄이 / 이한직
나 이제 좀 疲困하여/ 청춘 그 어느 길목에 우두커니 섰노라// 나와는 無緣한 것/ 꽃들이어// 너희들 다시 한번 그 곳에 마음것 피어보려나/ 거짓의 기도와 거짓의 맹서와/ 그리고 거짓의 포옹// 이 도시에는 도모지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그래도 나는 또다시 이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종점에 다다르려고 하는 나의 여정이어/ 병든 예감이/ 소년처럼 가슴 설레여 기다리는 것은/ 아아 이러한 허구의 봄이 아니라/ 너의 발자국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바람차게 나부끼는/ 나의 검은 종언의 旗발이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대신/ 나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

독(毒) / 이한직
푸르른 달빛이 괴롭구나/ 이처럼 잠 못 이루는 밤엔/ 필시 이 유역(流域) 어느 곳에서/ 저주(咀呪)의 버섯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게다// 초생달빛 푸른 밤마다/ 이슬을 받은 버섯들은/ 저마다 사나운 독(毒)을 지니는 것이라 하지 않은가// 그렇다/ 총명(聰明)한 화술(話術)보다는/ 차라리 잔인(殘忍)한 `사라센'의 비수(匕首)를// 선혈(鮮血)이 보고 싶어라/ 욕(辱)된 기대(期待)에 부풀어오는/ 그 원죄(原罪)의 유방(乳房)에서 내뿜는/ 선지빛 선혈(鮮血)만이 보고 싶어라// 이것은 다시 없이 엄숙(嚴肅)한 삶의 순간(瞬間)/ 미소(微笑)마저 잊은 입술을 깨물고/ 쏟아지는 달빛에 이마를 식힌다//

화하(花河) / 이한직
꽃은/ 이틀을 피더니 지고 말았다/ 물결을 타고/ 꽃잎들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내려갔다/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幸福)하였다/ 기억(記憶)에 틀림이 없다면/ 그때도/ 둥근 달은 강(江)물에 비치고 있었다// ― 무엇을 생각하며/ 너는 떠나갔는가―// 꽃은/ 몇 번이고 다시 피고/ 다시 지고// 아, 그것은 벌써 오래 전에/ 단념(斷念)한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 그냥 잊어버리고 말자// 물결은/ 피비린내 나는 육신(肉身)을 달래는/ 레퀴엠인 양/ 꽃잎을 태우고/ 흘러 흘러서/ 바다로 간다/ 확대(擴大)된 동공(瞳孔)을 덮으라// 고층건물(高層建物)들은/ 나에게 항의(抗議)하려 한다/ 나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한 번 분다/ 찰나(刹那)/ 이 역설(逆說)의 도시(都市)는/ 화염(火焰)의 바다가 되고 만다/ 로―브 데콜테를 입은 숙녀(淑女)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에서/ 나는 눈물이 나오도록 홍소(哄笑)한다//

동양의 산 / 이한직
비쩍 마른 어깨가/ 항의하는 양 날카로운 것은/ 고발 않고는 못 참는/ 애달픈 천품을 타고난 까닭일게다./ 격한 분화의 기억을 지녔다./ 그 때는 어린 대로 심히 노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해마다 헛되이 뿌리를 박았으나/ 끝내 살림은 이루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처참함을 겪고나면/ 오히려 이렇게도 마음 고요해지는 것일까./ 이제는 고집하여아 할 아무 주장도 없다.// 지금 산기슭에 바주카포가 진동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낯설은 외국말로 함성을 올린다./ 그리고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쉽게/ 쓰러져 죽은 선의의 사람들.//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나의 이 고요함을/ 깨뜨릴 수 있으리오./ 눈을 꼭 감은 채/ 나의 표정은 그대로 얼어 붙었나 보다./ 미소마저 잊어버린/ 나는 동양의 산이다.//

여백(餘白)에 / 이한직
사뭇 이대로 걸어가야만 할 것인가/ 이 길// 낯선 사람들과 어깨를 부비며/ 광복동(光復洞)거리를 가다가 걸음을 멈춘다// 이제는 도무지 슬퍼보지도 못하는/ 서른 세 살 난 사나이에게/ 이러한 때 소나기마냥 갑자기 쏟아져오는 것은/ 대체 무엇이라 이름하는 감정(感情)인가// 움직임을 멈춘 지 이미 오랜 시계(時計)다/ 그것을 주머니 속에 어루만지며/ 그래도 한(限)없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꽃방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몇 송이 글라디올러스의 주홍(朱紅)빛이/ 현훈(眩暈)이 되어 내 육신(肉身)을 뚫고/ 무한대(無限大)의 저 편으로 날아간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한 여름의 햇살이 머리 위에 뜨거운데/ 이때 누구의 목소리인지 내 귓가에 속삭인다// Rien, Rien./ 설득(說得)하려는 어조(語調)로/ 이 속삭임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Rien, Rien,//

시인(詩人)은 / 이한직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 이한직
반듯이 누운 가슴 위에/ 함박눈마냥 소복히 내려 쌓이는 것이 있다./ 무겁지는 않으나 그것은 한없이 차거운 것/ 그러나 자애롭고 따스한 손이 있어/ 어느 날엔가 그위에 와서 가만히 놓이면/ 이내 녹아 버리고야 말을 것/ 몸짓도 않고 그 차거움을 견딘다.// 전구(傳求)하라 산타마리아/ 이 한밤에 차거움을 견디는/ 그 가슴을 위하여 전구하라.// 삶과 살음으로 말미암은 뉘우침과/ 또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나이는/ 반듯이 누운채 눈을 감아본다.// 이 한밤에/ 함박눈은 풀풀 내려 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지붕 위에도/ 뉘우침의 함박눈은// 그렇다 동정 마리아여/ 이 가슴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모든 지붕과 그밑에 놓인 삶들을 위하여/ 그대 주에게 전구하라.//

강하(降下) / 이한직
첫눈 내리던 밤이었다./ 가설(假說)같이 우원(迂遠)한 너의 애정(愛情)에는/ 무엇보다도 흰것이 잘 어울렸는데/ 애달픈 나의 향일성(向日性)을 받들어줄 별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기울어진 사상(思想)은/ 조화(造花)처럼 퇴색하려고 하였다/ 붕대에 싸인 나의 人生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다.// 아득한 기억(記憶)속에/ 마지막 아마리리스인 양/ 너와의 약속(約束)이 피어남고/ 화액(花液)은/ 오히려 죄(罪)와 같이 향기로워/ 첫눈 내리는 밤이다/ 계절(季節)에의 공감(共感)만이/ 가난한 나의 가슴을 아름다히 장식하였다.// 두 눈에서 넘쳐 흐르는 것은/ 흡사 눈물같이 따스하였으나/ 나는 구태여 휘파람을 날렸다// 바로 그날 밤이다/ 차라리 노리개처럼 살려고 결심(決心)한 것은.//

설구(雪衢) / 이한직
첫눈 내리는 밤이었다/ 가설(假說)같이 우원(迂遠)한 너의 애정(愛情)에는// 무엇보다 흰 것이 잘 어울렸는데/ 애닯은 나의 향일성(向日性)을/ 받들어 줄 별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기울어진 사상(思想)은/ 조화(造花)처럼 퇴색(退色)하려고 하였다./ 붕대(繃帶)에 쌓인 나의 인생(人生)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다.// 아득한 기억(記憶) 속에 마지막 아마릴리스인 양/ 너와의 약속(約束)이 피어나고 화액(花液)은―/ 오히려 죄(罪)와 같이 향기로워// 첫눈이 내리는 밤이다./ 계절(季節)에의 공감(共感)만이/ 가난한 나의 가슴을 아름다이 장식(裝飾)하였다.// 두 눈에서 넘쳐흐르는 것은/ 흡사 눈물같이 따스하였으나/ 나는 구태여 휘파람을 날렸다.// 차라리/ 노리개처럼 즐겁게 살리라./ 첫눈 나리는 밤엔/ 파이프를 물고/ 호올로 밤거리로 나가자.//

황해(黃海) / 이한직
황해(黃海)/ 황해(黃海)// 몸부림치며 우는 동양(東洋)/ 쓴 웃음 짓는 동양(東洋)// 명상(瞑想)에 잠기는 노자(老子)/ 노호(怒號)하는 이반 이바노비치// 황해(黃海)// 얼굴에 칠한 멘소레이탐/ 녹쓸은 버터 나이프// 빛바랜 염서(艶書)/ 향수(鄕愁) 잊는 나그네// 황해(黃海)// 돌아오지 않는 탕아(蕩兒)의 레쿠이엠/ 서스펜더 감추는 신사(紳士)/ 첫 무도회(舞蹈會)에 나가는 소녀(少女)// 황해(黃海)/ 황해(黃海)// 장미(薔薇)를 훔치는 사나이/ 앙리 루소의 모티프// 황해(黃海)// 불령인도지나은행(佛領印度支那銀行)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 `찜미' 오장(伍長)의 체온표(體溫表)// 연경원명원호동(燕京圓明園胡同)에 사는 노무(老巫)/ 마드리드의 창부(娼婦)// 이빠진 고려청자(高麗靑瓷)/ 자선가(慈善家) 아담의 뉘우침// 황해(黃海)// 도편추방(陶片追放)을 받은 루스코에 보레미야/ 백이의제(白耳義製) 권총(拳銃)을 겨누는 이장길(李長吉)// 황해(黃海)// 던지어진 흰 장갑(掌甲)/ 조끼에 꽂은 내프킨// 시베리아를 돌아온 편지의 우표(郵票)// 굶주린 시민(市民)/ 캡틴 쿡의 시름// 황해(黃海)/ 황해(黃海)// 요트 로시난테호(號)는 달린다/ 내일(來日)은 포트 다알니// 황해(黃海)// 자꾸 잊어버리는 황해(黃海)/ 황해(黃海)는 망각(忘却)의 바다// 이제 황해(黃海)는 피곤(疲困)하다.//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 이한직
지금 저기 찬란히 피어오르고 있는/ 저 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모진 비바람과/ 염열(炎熱)과 혹한의 기후를 견디어/ 지금 노을 빛 꽃잎을 벌리려 하는/ 저 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서/ 완이(莞爾)*이 숨을 거둔 젊은이들/ 마산에서 세종로에서/ 그리고 효자동 저 전차 막 닿은 곳에서// 뿌려놓은 값진 피거름 위에/ 지금 저기 눈도 부시게 활짝 꽃잎을 연/ 저 꽃의 이름을 대어 주십시오// 추근추근히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던 놈도 있었지요.// 선생님 술 한잔 사주세요 하고/ 어리광부리던 놈도 있었지요./ 가정교사 일자리를 부탁하던 놈도 있었지요// 옳은 일을 하라더니 왜 막느냐고/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간 놈들이었습니다./ 늙어서 마음이 흐려지고/ 겁유(怯懦)*한 까닭으로 독재와 타협하던/ 못난 교사는 눈물도 말라버린 채/ 노을 빛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이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그놈들이 그 뜨거운 체온이/ 그대로 거기 느껴질 것만 같군요.//
* 완이(莞爾): 빙그레하고 웃는 모양,  겁유(怯懦): 겁이 많고 나약하다
* 1960.4.27. 경향신문 게재

진혼의 노래 / 이한직
겨레 爲하여 목놓아 외친 소리/ 메아리 되어 江山을 뒤흔드네/ 가시를 들고 횃불을 높이 든 이/ 그 뜻 깊이 받들어 우리 피도 뿌리리/ 고이 잠들라 同志품에 안겨서/ 먼동이 트기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목숨을 던져 네가 싸워 이긴 것/ 우리 거두리 값진 피 식기 전에/ 이웃 위하여 의로움 위하여/ 그 젊은 걸었던 일 헛되게는 않으리/ 고이 잠들라 태극기에 쌓여서/ 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수호예찬의 비’에 새겨진 시


 

이한직(李漢稷, 1921년~1977년) 시인
호는 목남(木南). 전북 전주 출생. 1939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慶應)대학 법과 수업. 1943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잡지 〈展望〉을 주재했고, 6·25전쟁 때는 공군소속 창공구락부로 종군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39년 〈문장〉에 〈온실〉등을 발표하여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 초기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썼으나, 6·25전쟁 후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몇 편 썼다. 1956년 조지훈과 함께 〈문학예술〉의 시 추천을 맡아보았고, 1957년 한국시인협회에도 관계했다. 196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시집으로 〈청롱〉(1953)이 있고 죽은 뒤에 후배 시인들이 그가 남긴 21편의 시를 모아 유작시집 〈이한직 시집〉(1977)을 출판했다.

 

 

21편의 詩만 남긴 이한직

1976년 7월 14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이한직 시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젊은 세대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이한직은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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