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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風葬) / 이한직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뜬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 이 되는구나.// 날마다 날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북극권(北極圈) / 이한직
초록빛 지면(地面) 위에/ 한 개 운석(隕石)이 떨어지고.// 바람은 남(南)쪽으로 간다더라/ 징 툭툭한 구두를 신고.// 소란타, 마음의 계절(季節)/ 나의 뮤즈(Muse), 그대, 각적(角笛)을 불라!/ 귓속에선 매아미도 우짖어라.// 묘망(渺茫)히 창천(蒼天) 아래 누운/ 나형(裸形)의 넵튠(Neptune)!/ 추위를 삼가라.// 색채(色彩) 잊은/ 그날 밤의 꿈이여.// 밤마다/ 유찬(流竄)의 황제(皇帝)처럼/ 깨어진 훈장(勳章)의 파편(破片)을/ 주워모은 하―얀 손, 손,// 파리한 내 손.//
기려초(羈旅抄) / 이한직
그 굽어진 재 위에서/ 나는 그림자를 잃다.// 습지(濕地)에는 슬픈 설화(說話)의 발자국을 남긴 채/ 쉐퍼어드인 양 재빨리 걷다.// 함박눈처럼 날아오는 사념(思念)을/ 하나하나 아름다이 결정(結晶)시키고.// 또는―/ 산뜻한 Ozone을 헤치며 헤치며/ 함부로 휘파람도 날리다.// 상복(喪服) 입은 백화림(白樺林) 사이사이로/ 넌즛, 내어다보이는/ 꽃이파리 못지않게 현란(絢爛)한 산(山)결이여.// 동화(童畵)같이 어지러이 덧덮인 산맥(山脈)에서/ 이제 나는 조상(祖上)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들의 골격(骨格)을 생각하다.// 오전(午前) 열한 시(時)―/ 남풍(南風)은 유달리 미끄러워/ 산(山)마루턱에는 눈부시게/ 오월(五月) 햇살이 빛나다.// 이제 용렬(庸劣)한/ 시정(市井)의 거짓에 겁내지 않으리.// 한봉지 하아얀 산약(散藥)을 흩뿌린 다음/ 곰곰이 빛나는 흙을 더듬어 보다.// 이제부터는 우울한 생활(生活)에 매이지 않으리라고/ 나는 소라처럼 안도(安堵)하다.//
온실(溫室) / 이한직
그 유리창(琉璃窓)너머/ 오월(五月)의 창궁(蒼穹)에는/ 나근나근한 게으름이 놓였다// 저 하늘/ 표운(漂雲)이 끊어지는 곳/ 한대 비행기(飛行機) 간다// 우르릉 우르릉/ 하잔히 폭음(爆音)을 날리며// 진정/ 첫여름 온실(溫室) 속은/ 해저(海底)보다 정밀(靜謐)한 우주(宇宙)였다// 엽맥(葉脈)에는/ 아름다운 음악(音樂)조차 담고/ 정오(正午)/ 아마릴리스는 호수(湖水)의 체온(體溫)을 가졌다// 풍화(風化)한 토양(土壤)은/ 날마다/ 겸양(謙讓)한 윤리(倫理)의 꽃을 피웠지만// 내 혈액(血液) 속에는/ 또 다른 꽃봉오리가/ 모르는 채 나날이 자라갔다//
낙타(駱駝) / 이한직
눈을 감으면/ 어린 때 선생(先生)님이 걸어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先生)님은 낙타(駱駝)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駱駝)는 항시(恒時) 추억(追憶)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駱駝)는 어린 때 선생(先生)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駱駝)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童心)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動物園)의 오후(午後)./ 시인(詩人)은/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 1939.8월 <문장> 7호
가정(家庭) / 이한직
1// 마음 이리 호젓할 때면/ 소리 높이 군가(軍歌)도 불러 보았다// 2// 모두 쓸쓸한 사람들/ 밤이 밀려오면 소리 없이 봄비도 내렸다/ 분분(芬芬)히 즐거운 단란(團欒)은 없었지만/ 때로는 몸서듯 봉오리 지니는 군자란(君子蘭)이었다// 3// 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 서로서로/ 생각은 달랐지만 어리둥절 그 눈초리에/ 가냘픈 희망(希望)이 빛났다/ 이럴 때면 구태여 인간(人間)됨도 설지 않아/ 안도(安堵)는 끝없는 외로움인 양 마음 포근하다//
놉새가 불면 / 이한직
놉새가 불면/ 당홍(唐紅) 연도 날으리// 향수(鄕愁)는 가슴 깊이 품고// 참대를 꺽어/ 지팽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황(黃)나비도 날으리// 생활(生活)도 갈등(葛藤)도/ 그리고 산술(算術)도/ 다 잊어버리고// 백화(白樺)를 깎아/ 묘표(墓標)를 삼고/ 동원(凍原)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百合)꽃이 되오리// 놉새가 불면―//
또 다시 허구의 봄이 / 이한직
나 이제 좀 疲困하여/ 청춘 그 어느 길목에 우두커니 섰노라// 나와는 無緣한 것/ 꽃들이어// 너희들 다시 한번 그 곳에 마음것 피어보려나/ 거짓의 기도와 거짓의 맹서와/ 그리고 거짓의 포옹// 이 도시에는 도모지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그래도 나는 또다시 이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종점에 다다르려고 하는 나의 여정이어/ 병든 예감이/ 소년처럼 가슴 설레여 기다리는 것은/ 아아 이러한 허구의 봄이 아니라/ 너의 발자국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바람차게 나부끼는/ 나의 검은 종언의 旗발이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대신/ 나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
독(毒) / 이한직
푸르른 달빛이 괴롭구나/ 이처럼 잠 못 이루는 밤엔/ 필시 이 유역(流域) 어느 곳에서/ 저주(咀呪)의 버섯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게다// 초생달빛 푸른 밤마다/ 이슬을 받은 버섯들은/ 저마다 사나운 독(毒)을 지니는 것이라 하지 않은가// 그렇다/ 총명(聰明)한 화술(話術)보다는/ 차라리 잔인(殘忍)한 `사라센'의 비수(匕首)를// 선혈(鮮血)이 보고 싶어라/ 욕(辱)된 기대(期待)에 부풀어오는/ 그 원죄(原罪)의 유방(乳房)에서 내뿜는/ 선지빛 선혈(鮮血)만이 보고 싶어라// 이것은 다시 없이 엄숙(嚴肅)한 삶의 순간(瞬間)/ 미소(微笑)마저 잊은 입술을 깨물고/ 쏟아지는 달빛에 이마를 식힌다//
화하(花河) / 이한직
꽃은/ 이틀을 피더니 지고 말았다/ 물결을 타고/ 꽃잎들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내려갔다/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幸福)하였다/ 기억(記憶)에 틀림이 없다면/ 그때도/ 둥근 달은 강(江)물에 비치고 있었다// ― 무엇을 생각하며/ 너는 떠나갔는가―// 꽃은/ 몇 번이고 다시 피고/ 다시 지고// 아, 그것은 벌써 오래 전에/ 단념(斷念)한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 그냥 잊어버리고 말자// 물결은/ 피비린내 나는 육신(肉身)을 달래는/ 레퀴엠인 양/ 꽃잎을 태우고/ 흘러 흘러서/ 바다로 간다/ 확대(擴大)된 동공(瞳孔)을 덮으라// 고층건물(高層建物)들은/ 나에게 항의(抗議)하려 한다/ 나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한 번 분다/ 찰나(刹那)/ 이 역설(逆說)의 도시(都市)는/ 화염(火焰)의 바다가 되고 만다/ 로―브 데콜테를 입은 숙녀(淑女)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에서/ 나는 눈물이 나오도록 홍소(哄笑)한다//
동양의 산 / 이한직
비쩍 마른 어깨가/ 항의하는 양 날카로운 것은/ 고발 않고는 못 참는/ 애달픈 천품을 타고난 까닭일게다./ 격한 분화의 기억을 지녔다./ 그 때는 어린 대로 심히 노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해마다 헛되이 뿌리를 박았으나/ 끝내 살림은 이루지 못하였다./ 지나치게 처참함을 겪고나면/ 오히려 이렇게도 마음 고요해지는 것일까./ 이제는 고집하여아 할 아무 주장도 없다.// 지금 산기슭에 바주카포가 진동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낯설은 외국말로 함성을 올린다./ 그리고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손쉽게/ 쓰러져 죽은 선의의 사람들.//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나의 이 고요함을/ 깨뜨릴 수 있으리오./ 눈을 꼭 감은 채/ 나의 표정은 그대로 얼어 붙었나 보다./ 미소마저 잊어버린/ 나는 동양의 산이다.//
여백(餘白)에 / 이한직
사뭇 이대로 걸어가야만 할 것인가/ 이 길// 낯선 사람들과 어깨를 부비며/ 광복동(光復洞)거리를 가다가 걸음을 멈춘다// 이제는 도무지 슬퍼보지도 못하는/ 서른 세 살 난 사나이에게/ 이러한 때 소나기마냥 갑자기 쏟아져오는 것은/ 대체 무엇이라 이름하는 감정(感情)인가// 움직임을 멈춘 지 이미 오랜 시계(時計)다/ 그것을 주머니 속에 어루만지며/ 그래도 한(限)없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꽃방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몇 송이 글라디올러스의 주홍(朱紅)빛이/ 현훈(眩暈)이 되어 내 육신(肉身)을 뚫고/ 무한대(無限大)의 저 편으로 날아간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한 여름의 햇살이 머리 위에 뜨거운데/ 이때 누구의 목소리인지 내 귓가에 속삭인다// Rien, Rien./ 설득(說得)하려는 어조(語調)로/ 이 속삭임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Rien, Rien,//
시인(詩人)은 / 이한직
한 눈은 가리고/ 세상(世上)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稱讚)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 이한직
반듯이 누운 가슴 위에/ 함박눈마냥 소복히 내려 쌓이는 것이 있다./ 무겁지는 않으나 그것은 한없이 차거운 것/ 그러나 자애롭고 따스한 손이 있어/ 어느 날엔가 그위에 와서 가만히 놓이면/ 이내 녹아 버리고야 말을 것/ 몸짓도 않고 그 차거움을 견딘다.// 전구(傳求)하라 산타마리아/ 이 한밤에 차거움을 견디는/ 그 가슴을 위하여 전구하라.// 삶과 살음으로 말미암은 뉘우침과/ 또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나이는/ 반듯이 누운채 눈을 감아본다.// 이 한밤에/ 함박눈은 풀풀 내려 쌓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지붕 위에도/ 뉘우침의 함박눈은// 그렇다 동정 마리아여/ 이 가슴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모든 지붕과 그밑에 놓인 삶들을 위하여/ 그대 주에게 전구하라.//
강하(降下) / 이한직
첫눈 내리던 밤이었다./ 가설(假說)같이 우원(迂遠)한 너의 애정(愛情)에는/ 무엇보다도 흰것이 잘 어울렸는데/ 애달픈 나의 향일성(向日性)을 받들어줄 별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기울어진 사상(思想)은/ 조화(造花)처럼 퇴색하려고 하였다/ 붕대에 싸인 나의 人生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다.// 아득한 기억(記憶)속에/ 마지막 아마리리스인 양/ 너와의 약속(約束)이 피어남고/ 화액(花液)은/ 오히려 죄(罪)와 같이 향기로워/ 첫눈 내리는 밤이다/ 계절(季節)에의 공감(共感)만이/ 가난한 나의 가슴을 아름다히 장식하였다.// 두 눈에서 넘쳐 흐르는 것은/ 흡사 눈물같이 따스하였으나/ 나는 구태여 휘파람을 날렸다// 바로 그날 밤이다/ 차라리 노리개처럼 살려고 결심(決心)한 것은.//
설구(雪衢) / 이한직
첫눈 내리는 밤이었다/ 가설(假說)같이 우원(迂遠)한 너의 애정(愛情)에는// 무엇보다 흰 것이 잘 어울렸는데/ 애닯은 나의 향일성(向日性)을/ 받들어 줄 별은 왜 보이지 않았던가.// 기울어진 사상(思想)은/ 조화(造花)처럼 퇴색(退色)하려고 하였다./ 붕대(繃帶)에 쌓인 나의 인생(人生)이/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다.// 아득한 기억(記憶) 속에 마지막 아마릴리스인 양/ 너와의 약속(約束)이 피어나고 화액(花液)은―/ 오히려 죄(罪)와 같이 향기로워// 첫눈이 내리는 밤이다./ 계절(季節)에의 공감(共感)만이/ 가난한 나의 가슴을 아름다이 장식(裝飾)하였다.// 두 눈에서 넘쳐흐르는 것은/ 흡사 눈물같이 따스하였으나/ 나는 구태여 휘파람을 날렸다.// 차라리/ 노리개처럼 즐겁게 살리라./ 첫눈 나리는 밤엔/ 파이프를 물고/ 호올로 밤거리로 나가자.//
황해(黃海) / 이한직
황해(黃海)/ 황해(黃海)// 몸부림치며 우는 동양(東洋)/ 쓴 웃음 짓는 동양(東洋)// 명상(瞑想)에 잠기는 노자(老子)/ 노호(怒號)하는 이반 이바노비치// 황해(黃海)// 얼굴에 칠한 멘소레이탐/ 녹쓸은 버터 나이프// 빛바랜 염서(艶書)/ 향수(鄕愁) 잊는 나그네// 황해(黃海)// 돌아오지 않는 탕아(蕩兒)의 레쿠이엠/ 서스펜더 감추는 신사(紳士)/ 첫 무도회(舞蹈會)에 나가는 소녀(少女)// 황해(黃海)/ 황해(黃海)// 장미(薔薇)를 훔치는 사나이/ 앙리 루소의 모티프// 황해(黃海)// 불령인도지나은행(佛領印度支那銀行)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 `찜미' 오장(伍長)의 체온표(體溫表)// 연경원명원호동(燕京圓明園胡同)에 사는 노무(老巫)/ 마드리드의 창부(娼婦)// 이빠진 고려청자(高麗靑瓷)/ 자선가(慈善家) 아담의 뉘우침// 황해(黃海)// 도편추방(陶片追放)을 받은 루스코에 보레미야/ 백이의제(白耳義製) 권총(拳銃)을 겨누는 이장길(李長吉)// 황해(黃海)// 던지어진 흰 장갑(掌甲)/ 조끼에 꽂은 내프킨// 시베리아를 돌아온 편지의 우표(郵票)// 굶주린 시민(市民)/ 캡틴 쿡의 시름// 황해(黃海)/ 황해(黃海)// 요트 로시난테호(號)는 달린다/ 내일(來日)은 포트 다알니// 황해(黃海)// 자꾸 잊어버리는 황해(黃海)/ 황해(黃海)는 망각(忘却)의 바다// 이제 황해(黃海)는 피곤(疲困)하다.//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 이한직
지금 저기 찬란히 피어오르고 있는/ 저 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모진 비바람과/ 염열(炎熱)과 혹한의 기후를 견디어/ 지금 노을 빛 꽃잎을 벌리려 하는/ 저 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서/ 완이(莞爾)*이 숨을 거둔 젊은이들/ 마산에서 세종로에서/ 그리고 효자동 저 전차 막 닿은 곳에서// 뿌려놓은 값진 피거름 위에/ 지금 저기 눈도 부시게 활짝 꽃잎을 연/ 저 꽃의 이름을 대어 주십시오// 추근추근히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던 놈도 있었지요.// 선생님 술 한잔 사주세요 하고/ 어리광부리던 놈도 있었지요./ 가정교사 일자리를 부탁하던 놈도 있었지요// 옳은 일을 하라더니 왜 막느냐고/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간 놈들이었습니다./ 늙어서 마음이 흐려지고/ 겁유(怯懦)*한 까닭으로 독재와 타협하던/ 못난 교사는 눈물도 말라버린 채/ 노을 빛 꽃송이를 바라봅니다./ 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 이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그놈들이 그 뜨거운 체온이/ 그대로 거기 느껴질 것만 같군요.//
* 완이(莞爾): 빙그레하고 웃는 모양, 겁유(怯懦): 겁이 많고 나약하다
* 1960.4.27. 경향신문 게재
진혼의 노래 / 이한직
겨레 爲하여 목놓아 외친 소리/ 메아리 되어 江山을 뒤흔드네/ 가시를 들고 횃불을 높이 든 이/ 그 뜻 깊이 받들어 우리 피도 뿌리리/ 고이 잠들라 同志품에 안겨서/ 먼동이 트기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목숨을 던져 네가 싸워 이긴 것/ 우리 거두리 값진 피 식기 전에/ 이웃 위하여 의로움 위하여/ 그 젊은 걸었던 일 헛되게는 않으리/ 고이 잠들라 태극기에 쌓여서/ 먼동이 트기 전에 가고만 사람들아/ 젊은 넋들아//
*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수호예찬의 비’에 새겨진 시
이한직(李漢稷, 1921년~1977년) 시인
호는 목남(木南). 전북 전주 출생. 1939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慶應)대학 법과 수업. 1943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잡지 〈展望〉을 주재했고, 6·25전쟁 때는 공군소속 창공구락부로 종군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39년 〈문장〉에 〈온실〉등을 발표하여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 초기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썼으나, 6·25전쟁 후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몇 편 썼다. 1956년 조지훈과 함께 〈문학예술〉의 시 추천을 맡아보았고, 1957년 한국시인협회에도 관계했다. 196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시집으로 〈청롱〉(1953)이 있고 죽은 뒤에 후배 시인들이 그가 남긴 21편의 시를 모아 유작시집 〈이한직 시집〉(1977)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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