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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희진 시인

부흐고비 2021. 10. 20. 09:38

새봄의 기도 / 박희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 뜨게 하옵소서.//

추일서정 / 박희진
이젠 가을이군! 하면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니/ 하지만 거기 이미 가을은 무르익어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성긴 반백의 머리칼은 마치 짓밟힌 갈대밭 모양이었고/ 꽤나 주름진 석류빛 얼굴은 차라리 웃지 않을 수 없다는 듯 …//

자연과 인간 / 박희진
저 히말라야의 냉엄한 설백(雪白) 보라./ 인간은 저렇듯 정화될 수도 있다./ 저 태평양의 쉴 새 없는 무궁동(無窮動) 보라./ 인간은 저렇듯 출렁일 수도 있다./ 저 밤하늘 별들의 고요 보라./ 인간은 저렇듯 침묵할 수도 있다./ 왜 고요는 빛이 되고 빛은 고요 되는지./ 저 팍팍한 사막은 여전히 입 다물고 있지만/ 보라, 느닷없이 방울뱀 한 마리 기게 하는 것을./ 그 방울뱀 소리 온 우주를 진동케 하는 것을.//

회복기 / 박희진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오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쌓인 毒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쳐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는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캄캄절벽 / 박희진
잠속에서 시를 세 편이나 탈고했다./ 웬일이여, 이 밤중에! 세 편이나 횡재하다니./ 하지만 일어나 소변을 보았더니 빠져나간 모양./ 이젠 아무런 생각이 안 난다. 캄캄절벽이다.//

허(虛) / 박희진
밤이 되어 찬란한 보석들이 어둔 하늘을 수놓을 때엔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어라 실상 이렇게 유리와 같은 가슴의 벽을 넘나드는 투명한 슬픔은 내아무런 생生에의 집착을 지니지 않음이니 아 이대로 돌사람처럼 꽃다운 하늘 아래 단좌하여 허虛할 수 있음이여 나는 아노니 이윽고 내 야기夜氣에 젖어 차디찬 입가엔 그 은밀한 얇은 파문이 새겨질 것을//

선생님 새해에는 / 박희진
저 해를 꿰뚫고 날으는 새처럼/ 생명의 연소 속에 앞장을 달리소서/ 저 백두산 천지(天池)처럼 가득히 고인/ 영감(靈感)의 높이에서 겨레를 살피소서//

송정바다에서 / 박희진

그리워 달려와서/ 파도 소리 듣다 보면// 내 마음 어우러진/ 함박웃음 절로 나고// 오늘도 그곳에 가면/ 보름달이 뜹니다.//


항아리 / 박희진
무슨 흙으로 빚었기에/ 어느 여인의 살결이 이처럼 고울 수 있으랴/ 얇은 하늘빛 어리인 바탕에/ 그려진 것은 이슬 머금은 닭이풀인가/ 만지면 스러질 듯 아련히 묻어 오는/ 차단한 기운이여// 네가 놓이는/ 자리는 아무데고 끝인 동시에/ 시작이 되는 너는 그런 하나의 중심이라/ 모든 것은 잠잠할 때에도/ 너는 끊임없이 숨쉬며 있는// 오 항아리/ 너 그지없어 둥근 것이여/ 소리 없는 가락의 동결(凍結)이여/ 물 위에 뜬/ 연꽃보다도 가벼우면서 모든 바위보다/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는 것// 네 살결 밖을 감돌다 사라지는/ 세월은 한갓 보이지 않는 물무늬인가/ 항아리 만든 손은 티끌로 돌아가도/ 불멸의 윤곽을 지니인 너 항시 우러른/ 그 안은 아무도 헤아릴 길이 없다//

시인은 / 박희진
시인은 영감의 벼락을 맞은 자./ 시인은 인류의 자정능력이며 극복의 의지./ 시인은 반인반수이자 반신반인./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

어느 시인의 묘비명 / 박희진
이 몸은 생전에도 보이지 않게/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으니/ 나의 시행詩行과 시행 사이/ 해와 달 별들이 보이면 그뿐!//

지금은 잃어버린 시인의 초상 / 박희진
배경엔 늘/ 고대(古代)의 인도풍(印度風) 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있었다. 주황빛인가 하면/ 초록빛 구름들이.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않고, 검은 셔츠의/ 시인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겐 하체가 없었다./ 그의 가슴 바로 아랜/ 늘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 때로는 휘황한 영감의 바다,/ 빛과 어둠, 황홀과 오뇌의/ 양극을 가득히 천변만화하는/ 바다가 있을 따름. 문득 반인(半人)/ 반신(半神)을 생각했다. 더구나 내가/ 마지막 그 초상을 보았을 땐./ 그의 가슴 아래 바다가 온통/ 불길로 화했었다. 세상의 온갖/ 피와 눈물과 한숨과 기름땀이/ 범벅이 되어 타면 그렇게 될 것인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의 사이/ 시인은 태연히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아니 하고 그 불길을/ 누르고 있었다. 화안한 미소로,/ 천상 천하에 번지는 미소로./ 불길이 스러지자/ 허나 거기 시인의 모습은 없었다.//

소나무 시인 / 박희진
소나무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절을 했다/ 소나무에 귀를 대고 숨결 소리를 들었다/ 소나무를 하늘처럼 바라보며 하루하루 걸었다/ 소나무를 처음 만나고 헤어진 애인처럼 그리워했다/ 소나무의 운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키웠다/ 소나무의 품격을 거룩한 종교처럼 섬겼다/ 소나무의 지조를 배우려고 가슴속에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의 이름을 시의 원천으로 삼았다/ 소나무의 의지를 사랑의 거울로 보고 또 보았다/ 소나무를 구원의 기둥으로 삼고 우주에 세웠다//

한국어를 기리는 노래 / 박희진
1// 한국의 시인은/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樂器)// 한국의 하늘, 한국의 바람/ 한국의 물에 씻기면 저절로/ 외마디 <아아>라는/ 소리야 나지만/ 그 모음(母音)은/ 구천(九泉)의 깊이에서/ 치솟는 물소리 같기도 하고/ 문득 청아한/ 거문고 한가락 같기는 하지만// 누가 타는 걸까/ 그 악기가 스스로 도취해서 때로 절묘한 소리를 내는 때엔//
2// 만파(萬波)를 재우고/ 혜성(彗星)도 물리치는 신들린 언어/ 불꽃 튕기는 칼날의 언어/ 삼국을 통일시킨 화랑(花郞)의 언어/ 가장 슬기로운 영혼의 언어/ 구중(九重)의 잿더미를 꿰뚫고 남은 언어/ 순금의 언어, 무궁의 언어/ 춘향의 일편단심 사랑의 언어/ 심청을 안고 솟은 연꽃의 언어/ 죽음과 삶이 꼬리를 물고 도는/ 태극(太極)의 언어, 한국의 언어//
3// 물은 물속으로/ 피는 핏속으로 흘러서 끝이 없듯/ 한국의 언어, 한국의 정신은/ 대대로 새롭게 속출하는/ 한국의 악기 통해/ 늘 끊임없는 광망을 뿜어 왔다// 가장 혹독했던 역사의 시련/ 일제(日帝)의 마수(魔手)에/ 나라의 목숨이 눌리었던/ 암흑의 시절에도/ (한국의 악기들은 모조리 줄이/ 끊기고 말았건만)/ 몇몇 악기들은/ 여전히 사무치게/ 아니 더욱 치열하게 소리를 내었거니/ 줄이 끊긴 다음에도 나는 소리/ 불멸의 소리// 그 소리는/ 천년을 넘어 묵은/ 바닷속 왕릉(王陵)의 관(棺)을 흔들었고/ 다시 석굴암 대불(大佛)의 미간에서/ 광명을 뿜게 했다/ 산산이 조각 나서/ 허공 중에 흩어졌던/ <조국>의 이름을/ 되돌아오게 했다// 8.15광복은/ 삼천만 동포가 시인이 되었던 날/ <아아!> 하는 모음의/ 빛뿜는 환호성을/ 삼천만 악기가 일제히 내었을 때/ 한국은 세계 속의/ 새 나라 되었다//
4// 한국어여, 한국어여, 되찾은 모국어여/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진정한 한국인의 혼과 육체를 되찾게 되었다// 너와 더불어 숨쉬자 콧구멍은/ 빛처럼 뚫려 맑아진 머릿속엔/ 영감(靈感)이 빗발치고 두 눈에 고인/ 눈물 속에 밝아오는 산, 구름, 바다,/ 하늘, 바위, 나무, 흐르는 물……/ (진정 이 땅이 금수강산임을 알겠구나)/ 너를 발음하는 우리의 이빨에선/ 향기가 절로 일고 혀는 꿀이 된다/ 꿀물에 젖은 입술은 앵두빛을 닮게 되고// 모국어여, 모국어여, 되찾은 영광이여/ 반 만년 동해물에 씻긴 언어여/ 그러면서도 너에겐 아직/ 핏내도 남아 있고, 벌집처럼/ 총탄에 뚫리었던 악몽도 남아 있다/ 게다가 바야흐로 세계의 온갖 찌꺼기들은/ 너의 신비로운 정화(淨化)의 힘을 바라/ 노도와 같이 이 땅에 몰려든다/ 하나 너의 그 엄청난 혼돈 속엔/ 크나큰 창조의 입김이 있음이여//
5// 오오 드높이 울려 퍼지거라/ 때가 이르거든 빛뿜는 한국어여/ 세계의 구석구석/ 불행과 상처가 있는 곳마다/ 가서 치유의 가락으로 스미거라/ 너는 이제 세계의 한국어가 되었기에// 오늘날 이 땅의 뛰어난 악기들은/ 너로 말미암아 자신을 갖고/ 창조업(創造業)의 희열과 사랑과 자유를 누리나니/ 예부터 모든 이 땅의 신명난/ 악기들이 그랬듯이/ 스스로 도취해서/ 진실로 영묘한 가락을 울릴 때의/ 악기는 이미 악기가 아니라/ 차라리 신기(神器)이리!// 태극(太極)의 언어, 신령(神靈)한 언어/ 너로 말미암아 이 나라 이 겨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 시간 속에 태어나도/ 너는 시간을 초월하는 까닭이다/ 늘 끊임없는 혁신(革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불사신(不死身)인 까닭이다// 자랑스럽구나/ 너를 가진 기쁨이여/ 너 한국어, 구원의 믿음이여/ 티 하나 묻지 못할/ 금강(金剛)의 언어여!/ 너 한국어, 무한한 가능성/ 풍요하고도 휘황한 미래여!//

북한산의 해골바위 / 박희진
너는 언제 살과 피와 힘줄의 올가미를/ 말끔히 버렸는가/ 무섭게 준열(峻烈)한 해탈에의 의지/ 차고 견고한 해골만 남았구나/ 풀포기 하나/ 그 흔한 이끼 한 점/ 깃드릴 여지가 너에겐 없다/ 억겁의 풍우상설(風雨霜雪)/ 억겁의 일월성신의 빛살로도/ 너를 마모시킬 도리는 없는 모양/ 너의 그 거대한 위용에 압도 되어/ 나는 지금 절반쯤 넋이 나가 있다//

어느날 그대가 / 박희진
식탁 위에 두고 간 초록의 아이비*는 자라고 자라/ 드디어 치일칠 마루에 닿았건만/ 그대는 어디에 잠적하였느뇨, 白玉의 그대,/ 그 사철 초록을 볼 적마다 꽃처럼 떠오르네.//
* 아이비: 실내에서 키우는 완상용 넝쿨의 일종

초록 예찬 / 박희진
조물주가 지상의 태반을 초록으로 물들인 것은/ 너무도 잘 한 일, 너무도 잘 한 일./ 만약 초록 대신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들였다면/ 사람은 필시 눈동자가 깨지거나 발광하고 말았으리.//

지상의 소나무는 /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영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 이글 타오른다.//

석련지 환상 / 박희진
저 아름다운 연꽃못 뵈시겠지.../ 드높이 솟아 정토에 열려 있지/ 그 뿌리는 지옥에 박혔어도/ 연꽃잎이야 한없이 청정해도/ 어리석은 자에겐 돌로 뵌다면서?/ 이 몸은 어둡기 돌보다 더하면서/ 정토에 원왕생(願往生) 원왕생하여/ 이 몸의 업장을 맑히길 소원하여/ 저 연꽃못 둘레를 돌고 돌아/ 일곱 날 일곱 밤을 돌고 돌아/ 지치어 쓰러지면 이슬로 녹아질까/ 연꽃못 채우는 이슬로 스러질까//

시들지 않는 꽃 / 박희진
시인은 보는 사람/ 모든 것을, 넋 속의 죽음, 죽음 속의 넋까지도/ 음악을 듣는 귀엔 고요가 들리듯이/ 나무를 보는 시인의 눈엔/ 땅 속의 뿌리가 보이는 것이다/ 바위까지 꿰뚫고 뻗는// 그러나 뿌리는 안 보이는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어야 한다/ 줄기가 억세고 그 꽃이 탐스럽기 위해서는/ 고뇌의 보람은 언제나 꽃,/ 꽃만이 아름답다//

해바라기 / 박희진
해바라기는/ 가장 해에 가까울 밖엔 없다/ 둥둥 하늘 높이 홀로 솟아/ 일심으로 해만을 사모하는/ 밤이면 말없이 돌아와 있다가도/ 첫 새벽을 받자마자/ 이미 해바라기는 시위를 떠난/ 화살, 땅 위엔 없다// 하지만 보라/ 서릿발 나린 시월 어느 아침/ 돌아온 해바라기_/ 까맣게 타서, 여름의 종언인 양/ 땅 위에 깊숙이 드리운 결실/ 그 황금의 햇살을 받아/ 온 여름내 해만을 사모하던 보람이 있어/ 씨마다 알알이 잉태한 해의/ 무게로 이렇게 떨어져 온 것이다// 해바라기의/ 고향은 하늘나라/ 여름은 다시/ 땅에 묻히었던 씨 안의 해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시절/ 밤이면 말없이 돌아와 있다가도/ 첫 새벽빛을 받자마자/ 이미 해바라기는/ 땅 위엔 없다//

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 박희진
잎이 시들면 떨어지듯이/ 우리도 자라면 처음의 자리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어요./ 내 어린 수정의 눈동자가 맑기만 해서/ 뭇 형상이 그 안에 도사릴 티가 없었을 때/ 또 이 손이 고사리처럼 귀여웠을 땐.// 시간은 없었지요. 연지빛 노을 속을/ 뜨는 해, 지는 해가 낮과 밤을 번갈아 불러/ 들였을 따름. 울긋불긋한 세상은 언제나/ 조금은 무서웠고 조금은 덩달아 즐거웠지요.// 그런데 나의 잔뼈가 굵어진 먼 여로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보았어요 산천은 어이없이/ 바뀌었다는 것을. 내 거기 벗들과 멍석딸기를/ 따기도 하고 뛰놀던 숲이 겨우 다복솔 몇 그루/ 뿐인 것을. 또 사철 가슴의 높이까지 흐르던/ 냇물의 신비는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나서 송사리/ 한 마리 없다는 것을. 내 기억 속에 그 빛바랜/ 이름만 남겨 놓고 지금은 그림자도 없는 벗들.// 나는 알았지요 우리도 이젠 떨어졌다는 것을,/ 가없는 사막 위에 촉각을 잃은 개아미처럼/ 헤매는 우리, 이제 다시는 그 천상의 보석 방석 같은/ 처음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동안 함부로 눈물을 탕진해서 흐려진 눈동자와/ 그동안 지은 죄로 더럽힌 이 손을 가지고서는.//

촛불 / 박희진
1// 너처럼 순수한 삶은 없다/ 시시각각으로 소멸해 가면서도/ 시시각각으로 되살아나는// 2// 삶의 원형식(原形式)/ 죽음 속의 삶이여// 이 명백한 신비를 보라// 3// 세상의 모든 소음이란 소음은/ 네 안에 흡수되어 고요가 되나니/ 세상의 모든 찌꺼기란 찌꺼기는/ 네 안에 모아져서 기름이 되나니// 4// 이 아름다운 목숨의 불꽃// 이 기적의 변용(變容)을 보고/ 누가 사랑을 기리지 않으리오// 5// 사랑은 온유한 것/ 사랑은 말없는 것/ 사랑은 모든 것을 무한히 받아들여 정화(淨化)하는 것/ 사랑은 불타는 것// 6// 하나의 고요를 만나기 위해/ 하나의 따스함을 누리기 위해// 세상에서 녹초가 되어/ 방 안에 돌아온 사람은 찾는다// 초 한 자루와/ 성냥 한 개비면 충분한 의식(儀式)// 7// 네가 켜지면/ 방 안은 그대로 사원(寺院)이 된다// 침묵의 사원/ 시인도 부끄러워 말을 잃게 되는// 너는 바로 기도/ 언어와 침묵이 하나가 되는// 완벽한 소신공양(燒身供養)/ 일체의 모순과 갈등이 해소되는// 8// 너를 보니 아직도/ 이 마음 가난한 걸 알 수 있네//

비의(秘儀) / 박희진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무르익어 떨어지는 도토리의/ 그것을 받아주는 너럭바위 없다면/ 어떻게 뚝! 소리가 나랴?// 흐르는 물 기운과/ 그것을 막는 바위들 없다면/ 물은 어떻게 희희낙락 환장하며/ 하얗게 속내를 드러낼 있으랴?//

얼음부처 이야기 / 박희진
1// 유 ․ 불 ․ 선 삼교가 하나로 융합된/ 풍류도의 나라, 금수강산, 한국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절 중의 절/ 海印寺 복판에서/ ‘국제현대미술전’이 열렸다.// 2011년 9월 23일/ 전시 주제는 ‘통 ․ 通 ․ Tong’ 이란다.// 중인환시리에 개막작 가린 백포가 벗겨지자/ 우와, 얼음부처!/ 항마촉지인의 장엄한 부처 좌상!/ 단아한 이목구비, 볼록한 육계며,/ 넓은 가슴, 얇은 장삼에 이르기까지/ 얼음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원융의 부처답게/ 대자 ․ 대비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하여 얼음부처는/ 신묘불가사의한 백색 광명을 뿜고 있다.// 저렇게 희고, 맑고, 신비롭고, 뼛속에 스며드는,/ 빛뿜는 향기는 모두 처음이라/ 만당의 사부대중/ 큰 눈을 뜬 채, 꼼짝도 못하지만/ 실은 무한히 가슴 탁 트이는 만사형통의/ 기쁨과 황홀에 젖고 있다.//
2// 나무부처, 돌부처, 철부처, 황금부처, 옥부처 같은/ 불상들과는 엄청 다른 것이/ 얼음부처라는 걸 절감하기 시작한 건/ 꼬박 하루가 지나서였다.// 아주 극미하게 시나브로 시나브로/ 얼음이 소리없이 녹기 시작한 것./ 육계가 조금, 콧날도 조금, 입술도 조금/ 은밀히 녹더니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나흘 뒤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얼음부처가 온전한 열반에 들고 만 것이다.//
3// 니르바나란 온전한 소멸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부처의 몸은 소멸할지언정 불성은 불멸이니./ 얼음이 녹은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땅 속의 나무뿌리, 풀뿌리 통해/ 또는 바위의 어둠을 뚫고 땅 밖으로 솟구친다./ 가장 순결한 햇살과 바람의 애무를 받으면서/ 생명의 초록 찬가 부르며 춤춘다./ 대긍정과 찬미의 노래엔 종말이 없나니./ 도처에 뻗은 물길 따라 인연 따라/ 그것은 순식간에 별들에 가 닿아서/ 눈물을 닦아 주는가 하면/ 다시 어느덧 지상으로 돌아와서/ 풀잎에 이슬로 맺히기도 하나니.//
4// 삼라만상이 부처 아닌 것은 하나도 없구나./ 풀부처, 바위부처, 달부처, 구름부처/ 솔부처, 사슴부처, 학부처, 거북부처,/ 별부처, 이슬부처, 꽃부처, 황소부처……/ 삼라만상끼리 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그래서 ‘통 ․ 通 ․ Tong'/ 만사형통의 통이 아니랴./ 유무상통의 통이 아니랴./ 중중무진의 인연이 그대로 텅 비어 있기에/ 무량광명 쏟아지는 통이 아니랴./ 나와 부처와 중생이 그대로/ 하나로 꿰뚫리는 통이 아니랴./ 眞空妙有의 통이 아니랴.//

불일암 추억(佛日庵 追憶) -법정(法頂) 스님에게 / 박희진
불일암(佛日庵) 별고 없겠지요?/ 구산(九山) 큰 스님도 안녕하시고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샤워장(場),/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선 안보이는 초현대식/ 이 세상에서 가장 운치있는 목욕간 말예요)/ 겨울철이라 요즘은 이용이 안 되겠군요.// 제가 갔을 땐/ 소쩍새 울음도 들을 수 있었는데,/ 빗방울 후두기는/ 파초 잎도 볼 수 있었는데.// 어스름이면 이내 폭 포시시....../ 소리를 내며, 수 십 수 백의 달맞이 꽃이/ 하얗게 피어났죠. 불일암(佛日庵) 뜰은/ 삽시간에 달빛바다, 화엄경(華嚴境)이 되더니만.// 지금은 온통 백설(白雪)의 바다겠죠?/ 적설(積雪)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우지끈하고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나는.// 나뭇새 싱그럽던/ 뒷간의 틈 사이로 보이던 댓잎,/ 청개구리나 다람쥐들도/ 잘 과동(過冬)을 했으면 좋으련만....// 스님,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 방금 저는 재치기를 했습니다./ 조계산 계곡물도/ 천한 이 몸 안에 들어와서는/ 콧물 눈물로 둔갑하는 모양예요.// 참, 자정국사(慈靜國師) 묘광(妙光)의 부도비도/ 잘 있겠지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 / 박희진
이삼만은 어려서부터 붓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좀 커서는 병중에도 하루 일천자 씩/ 연습을 했다니! 벼루를 세 개나 구멍을 냈다니!/ 그는 차츰 깨달아 갔다./ 사람의 경우처럼/ 한자漢字에는 몸과 얼과 정신이 있다는 걸.// 자연과 우주의 철리가 있다는 걸./ 인생의 모든 것, 삼라만상의 원형이 있다는 걸./ 쓰면 쓸수록 문리가 트여, 자유무애의/ 경지를 터득했고, 눈에선 빛이 낫다/ 그의 정신과 붓놀림의 간격이 없어진 것이다.// 서예, 붓글씨에 몰두한다는 건/ 자신의 심신을 늘 부단히 갈고 닦는 일./ 도 닦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미상불 이삼만은/ 나이 들수록 도가 높았으되 오히려 검허했다./ 도 닦는 일에는 끝이 없기에.// 「일생 동안 다하지 못하는 것은 심획일 뿐이다./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미친 듯이/ 더욱 독실하게 하여라」이것은 이삼만이/ 죽기 일년 전 애제자 원귱게 남긴 말./ 그런데 여기서 심획이란 무엇일까.// 마음 속의 획 하나。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걸 가슴속 깊이 키우고 있을 터./ 자신의 운명과 사명의 일치!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질 때 마음 속 획은 확실히 그어진다./ 노력할진저, '더욱 미친 듯이 더욱 독실하게'//

명필 이삼만李三晩 / 박희진
逸韻無跡일운무적// 빼어난 운치에는/ 흔적이 없다/ 솔바람을 보아라/ 또는 연잎 위의 물방울을 보아라// 得筆天然득필천연// 묘리를 터득한 필법/ 천연 그대로다/ 이삼만의 流水體유수체/ 山光水色산광수색 보아라//

山光水色산광수색 / 박희진
어느 화가가 천변만화하는/ 산 빛을 낱낱이 그려 낼 수 있으랴/ 또 어느 시인이 천변만화하는/ 물 빛을 여실히 읆을 수 있으랴// 하지만 조선 후기 명필 이삼만은/ 겨우 넉 자인 山光水色에/ 첩첩 산의 얼을 담았나니/ 무궁무진 옥수를 굽이치게 했나니// 능선들은 꼬리 물고 덩실덩실 춤추고/ 빛은 빛을 낳아 세상은 광명천지/ 물은 물을 불러모아 바다에 가 닿고/ 산 물 하늘이 하나로 춤추는 용이로세//

나태주 시인에게 / 박희진
늙은 아이인 나태주 앞에서는 세상도 아이/ 해 뜨면 안녕 해 지면 안녕하고 인사도 하지/ 한번 떠나면 다시는 오지 못할 별인 지구야/ 사는 동안은 보고 또 보고지고 안아도 보고//

다시 나태주 시인에게 / 박희진
늙어도 늙지 않는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인생과 자연이 넉넉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다./ 당신의 시간이 늘 새록새록 빛나는 것은/ 이승에 살면서도 실은 영원을 살고 있기 때문.//

靈通영통의 기쁨 / 박희진
어느 시인 말하기를/ 사람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아니다, 아니다./ 참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온몸이 후들후들 기뻐서 떨게 된다.// 영혼은 영혼과의 불꽃 튀기는 만남을 통해/ 둘이 하나 되는/ 백금白金의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

山淸에서 / 박희진
산청 밤하늘 능선 위의 그믐달 유심히 보다/ 山氣 마시니 시냇물이 흐르네 내 가슴속에/ 잊지 못하리 매화에 달 본 이는 평생을 두고/ 미동도 않네 뜰 안에 흐드러진 홍매화 구름/ 山淸 주막의 막걸이ㅘ 파전 맛 뼈에 사무침/ 몇 백 년 묵은 유서 깊은 매화라 碑閣도 있네/ 매화로 하여 선조와 후손들이 靈通하는 곳/ 어느 古家 앞 회화나무 두 그루 일주문 이룸/ 예담촌 담장 온종일 서성여도 싫지 않아라/ 지니고 오다 山淸서 마신 매향 서울 집까지//

山淸의 그믐달 / 박희진
지리산 자락 산청에다 玄石이 지은/ 하늘 푸르고 산 맑은 한옥,/ 天碧山淸堂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 날이 그믐께라 나는 묘하게도/ 잠 들기 전에 그믐달을 보았다.// 저기 보세요, 그믐달이 있어요./ 눈이 어둔 도반은 한참 찾더니/ 아, 저기 있군요. 하지만 그는/ 건서으로 본 체하였던 것./ 안 보인다고 말하기가 미안했던 모양.// 그런데 나는, 귀신도 못 보기/ 십상이라는 그믐달을 똑똑히 보았으니,/ 팔십 평생에 처음으로 보았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자랑할지 모르겠다./ 나는 생전에 산청에서 그믐달 보았다고.//

십이폭포十二瀑布 / 박희진
성문동聲聞洞에선/ 금강산에 반한 하늘의 은하수가/ 산 위로 내려와 쏟아져 흐르는/ 소리 잘 들린다/ 층층 낭떠러지 아래로 아래로// 가까이에선 일부밖에 안 보이나/ 떨어져 있는 은선대隱仙臺에선/ 전모가 들어온다// 위로부터 세어 보면/ 하얗게 환장하며 옥구슬 튀기는/ 폭포 아래 또 폭포 폭포 아래 또 폭포/ 폭포 아래 또 폭포…… 열두 층을 헤아리고// 아래에서 꼽아 가면/ 하얗게 환장하며 옥구슬 튀기는/ 폭포 위에 또 폭포 폭포 위에 또 폭포/ 폭포 위에 또 폭포…… 열두 층이나/ 무동 선 폭포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유명한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 수직 높이 290미터/ 길이 390미터 너비 4미터인/ 십이폭포라네//

망양대望洋臺 / 박희진
이곳(1025m)에서는 해금강 바다와/ 내금강, 외금강의 장엄한 산세가/ 두루 보인다。천선대天仙臺에선/ 보이지 않던 비로봉(1638m)까지.// 크나큰 봉황 되어 붕 뜨고 싶다./ 한쪽 날개로는 해금강 바닷물을 튀겨도 보고/ 다른 한쪽 날개로는 비로봉 정상에/ 하늘하늘 꽃바람을 날려도 보고.// 힘들게 여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올라왔으니, 심신이 탈락하여/ 신선으로나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헛되이 봉황을 꿈꿀 겨를도 없으련만.// 현실의 나는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해/ 털석 바위에 기대 앉고 만다./ 땀에 젖은 머리칼과 길게 늘어진/ 흰 수염이 민망했던지 늙은이 두 사람// 내게로 다가온다。주름진 얼굴에/ 웃음 가득 띄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단하십니다。참 용케 올라오셨어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내일 모래면 팔십이 됩니다」/ 그러자 오히려 서너 살 더 올려/ 대답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늙은이의 ‘뻔뻔스러움’이라는 걸까.// 쉬엄쉬엄 내려가는 하산길 또한/ 힘들기는 마찬가지。올라오는 사람 중엔/ 내게 말없이 사탕을 내미는 사람도 있다./ 고맙다, 힘 내야지。고맙다, 힘 내야지.//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 / 박희진
단발령에서 겸재가 바라본/ 금강산 만물상을 눈여겨 보라.// 이쪽 단발령은 검은 먹빛깔/ 울창한 산림인데,/ 저 건너 허공 중에/ 뾰죽뾰죽 들쭉날쭉 일만이천봉은/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것 같다./ 아니면 땅 속에서/ 거대한 반투명 수정궁水晶宮들이/ 솟아오른 것도 같다./ 아니면 시방세계 불국토에서/ 일제히 모여든/ 백의관음보살들의 현신인 것도 같다.//

​탐라의 길 / 박희진
탐라섬은 섬 전체가 휘황한 보석임/ 그 안엔 길이 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신나게 뚫려 있음/ 그 길은 천변만화의 길임/ 설사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달릴 때마다 새롭게 보임/ 설사 같은 풍광이라 하더라도/ 지날 때마다 다르게 보임/ 수시로 안개의 애무를 받아/ 또는 비바람에 말끔히 씻겨/ 티끌은 도무지 구경할 수도 없음/ 무지개 뜨는 공기는 달고/ 보석가루 같은 햇빛은 눈부심/ 어떤 길은 그대로 하늘에 닿아 있음/ 어떤 길은 그대로 바다에 닿아 있음/ 어떤 길은 그대로 초록의 터널임/ 어떤 길은 그대로 안개의 터널임/ 문득 조팝꽃내 코를 찌르는 길/ 문득 더덕내 골수에 스미는 길/ 문득 억새밭길 있는가 하면/ 환상적인 삼나무 거목길이/ 문득 협죽도夾竹桃길 있는가 하면/ 개민들레나 찔레꽃 사태 길이/ 멀리 한라산은 영원처럼 솟았는데/ 올망졸망 오름들이 둘레춤 추는 길도/ 칠색 띠를 두른 바다에 눈 주며/ 연거푸 찬탄의 한숨을 쉬는 길도/ 구멍 숭숭 뚫린 곰보바위/ 검은 현무암에 부서지는 파도길도/ 은싸락 같은 달빛이 깔린 길도/ 들리는 것이라곤 벌레소리뿐인/ 칠흑의 밤길도, 동트는 새벽길도/ 제주도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길도/ 여러 번 거듭거듭 누비고 달렸으나/ 번번이 새로운 감동에 흐느낌/ 더구나 가도 가도 끝없이 전개되는/ 대초원길을 달릴 때의 후련한/ 상쾌함이라니! 가슴이 타악/ 트이는 맛이라니! 특히 해질 무렵/ 대초원에 자욱이 이내 낄 때/ 하늘 땅이 온통 하나로 녹아/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충만할 때/ 누구들 눈물이 솟지 않으리오/ 그저 살아 있다는 뿌듯한 충일감에/ 탐라에는 끊임없이 전신轉身하지 않는/ 사물이 없음。하늘도 땅도/ 비도 바람도, 대초원도 수많은 오름도/ 칠색 바다와 사나운 현무암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유가 거기 있음/ 온갖 기화요초, 노루와 조랑말도/ 족제비도 마찬가지。이따금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는 꿩도 마찬가지/ 모든 사물에 원초적인 혁신의 에너지/ 기가 넘쳐 흐름。그 속에 종횡무진/ 나 있는 길을 누비고 달리는 일/ 미끄러지듯 또는 쏜살처럼/ 신나게 달리는 일/ 어찌 그 일이 신선놀음 아니리오/ 탐라의 길은 천변만화의 길/ 끝없이 이어지는 신비와 환상의 길//

성산포 일출봉 / 박희진
삼십 년 전에/ 내가 처음 일출봉에 올랐을 때/ 나는 감동의 회오리바람으로 압도되었거니// 원래 일출봉은/ 해저에서 솟아오른 소화산도나/ 언제부터인가 한 쪽이 제주땅에 붙고 말아/ 삼면이 출렁이는 짙푸른 바다인데/ 산상 둘레에는/ 뾰족뾰족 들쭉날쭉 아흔아홉 암봉들이/ 안의 분화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정히 해상의 요새인 것이다/ 산이 그대로 성채인 것이다/ 산상의 넓이는 일만 평 된다는데/ 이 대규모 산정 분화구의 핵심을 이룬/ 최초의 구멍은 크지도 않다/ 안으로 깊숙이 패이긴 하였어도/ 넓고 완만한 초지 한가운데/ 그것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신비의 신비/ 가슴 설레며 그 곁을 지났을 때/ 달나라에 온 것 같은 환상에 빠졌었지/ 다음날 새벽 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봤을 때엔/ 우화등선 체험했고// 오늘 실로 삼십 년 만에/ 나는 이곳 일출봉에 올라왔다/ 관광지로서 이곳이 더욱 정비된 것과/ 내가 흰 수염을 달고 있다는 것/ 그 밖엔 달라진게 없어서 좋았다/ 나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압도적 감명받고 한동안 취했으니//

사진가 김영갑金永甲 / 박희진
1// 사진의 매력이/ 한 젊은이의 뼛속에까지 바람을 넣어/ 오로지 사진 미치광이로/ 미의 사냥꾼, 피사체 찾는 떠돌이 되게/ 사진기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게/ 만들 수가 있는 걸까// 그렇다, 김영갑은/ 오랜 방랑 끝에/ 최선의 피사체로, 절해의 고도/ 제주도를 선택했다// 이래 십여 년/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그는 제주도를 구석구석 쏘다녔다/ 침식을 잊고 작업에 몰두했다/ 날감자 하나로 허기를 달래다가/ 인적이 끊인 오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때로는 간첩으로 오인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거니와/ 홍수를 만나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 필름 뭉치들을/ 몽땅 쓸려 버리기도 하였었다// 게다가 그 삶아도 구워도/ 못 먹을 옹고집, 자존과 오기라니/ 간섭이라고는 죽어도 받기 싫어/ 세속과는 죽어도 타협이 싫어/ 그는 우선 가족과의 인연을 끊었다/ 친척과도 애인과도 인연을 끊었다/ 하여 혈혈단신 절해의 고도에서/ 그가 자초한 건 고독과 소외// 철저하게/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는/ 스물네 시간의/ 집중과 지속의 도취를 위해서는/ 오직 사진예술에의/ 헌신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그는 완강하게 밀고 나갔던 것// 도대체 고독과 소외가 무엇이냐/ 처음 그것은/ 바늘구멍보다도 비좁고 답답한/ 벼랑길이겠지만/ 이윽고 그것은 광활한 바다로/ 하늘 땅이 하나 되는/ 대화엄경大華嚴境으로 통하고 말거늘//
2// 일체의 분심잡념分心雜念을 여의고/ 오직 한 가지 예술에만 매달려야/ 성심성의껏 전력을 기울여야/ 그때 비로소 미의 여신은/ 조금씩 미소를 보내는 법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김영갑 사진에/ 아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초차원의 새로운 빛이// 아무리 고성능의 초정밀 사진기/ 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기계의 한계를 벗어나서/ 어떤 기적적 성취를 이루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진가에 달려 있다// 그가 얼마나 마음을 비우느냐/ 그가 얼마나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에/ 투철할 수 있느냐/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열렬하게/ 사진예술에 골몰할 수 있느냐/ 그가 얼마나 자신의 능력을/ 극한의 극한까지 신장시키느냐/ 그가 과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느냐/ 그가 정말/ 마침내 사진예술을 통해/ 사랑과 자유를 최대한으로/ 터득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할 것이다// 이런 사진가라야/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바로 입신入神의 경지가 그것/ 바로 천인묘합天人妙合의 경지가 그것//
3// 사계절 따라/ 기상의 변화 따라, 시간대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풍경은 시시각각 천변만화한다/ (특히 탐라의 풍경은 그러하다)/ 그것이 풍경의 생태라 하더라도/ 그 진면목/ 그 아름다움의 핵심이 도달하는/ 극치의 찰나를/ 사진가는 기어이 놓쳐서는 안 되나니// 그 유일무이한 찰나를 위하여/ 사진가는 기어이/ 최적의 촬영장소를 찾아내야/ 미리 준비하고 대기할 줄 알아야/ 늘 수도하는 마음을 길러야// 그 결정적인 찰나가 다가올 때/ 마침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마치 기적처럼/ 탐라의 황홀은 삽시간에 포착된다// 김영갑의 머릿속엔/ 피사체 따라 다를 수밖엔 없는/ 최적의 촬영장소/ 그것들이 밤하늘 별자리 모양/ 점 찍혀 있다//
4// 해 질 무렵 세 시간과/ 해 뜰 무렵 세 시간이/ 그가 선호하는 촬영시간이다/ 한 낮의 무료함/ 한 낮의 게으름/ 한 낮의 잡념을 말끔히 쫓기 위해/ 그는 나름대로 묘법을 갖고 있다/ 즉 손을 쓰는 일// 광목을 구해 옷감을 재단하여/ 염색하고 바느질하는 일/ 옷을 빨래하고 풀 먹이고 다리는 일/ 또는 목수처럼/ 식탁이나 걸상을 만드는 일/ 헐린 옛집의 목재를 사다가/ 깎고, 자르고, 반질반질 다듬어서/ 사진을 넣을 액자를 만들거나/ 사진걸이 따위 용구를 만드는 일/ 또는 남의 땅에나마/ 나무를 심고/ 수석을 갖다 놓고/ 이끼를 입히거나 난초를 키우는 일// 그는 말하자면/ 제주도의 로빈슨 크루소인 것이다.//
5// 제주도 전체가/ 그의 야외 촬영장인 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수시로 출몰한다고 하여/ 그를 도깨비라 말하는 이도 있다// 사진 제일주의/ 촬영시간 우선 확보/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약속도/ 부실해지는 경우가 있다/ 하여 그를 실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이도// 어쨌거나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제주도에 홀려 있다/ 필름에 미쳐 있다/ 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나 있는 길을/ 연변에 펼쳐지는 환상적 풍경을/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안 나고/ 아니,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을 사랑한다 칠색의 바다/ 광활한 초원, 멀리서 보면/ 그대로 제주도 전체이기도 한/ 한라산을 사랑한다 기생화산들/ 오름들을 사랑한다 그 손잡고/ 춤추는 오름들의 초록의 곡선/ 초록의 볼륨, 초록의 평화/ 초록의 원경과 근경을 사랑한다/ 삼다三多의 섬, 바람과 돌과 해녀뿐/ 아니라, 섬의 모든 것/ 공기와 햇빛과 야생화를 사랑한다/ 소와 노루와 조랑말을 사랑한다/ 비와 안개와 구름을 사랑한다/ 해돋이와 해넘이와 이내를 사랑한다/ 그에게 있어 제주도는 사랑이고/ 자유이고 구원이다// 실로 제주도는/ 티끌 하나 묻지 않는 불멸의 보석이다/ 비교를 불허하는 이 나라 산수미山水美의/ 총집결체다 시간 속의 영원이다/ 부단한 매력과 신비의 덩어리다/ 그런 보석에/ 겁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자신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설사 백만 장의/ 걸작사진이 찍힌다 하더라도/ 결국 사진이란/ 티끌로 화하는 것// 하지만 엄연히 미가 존재하고/ 부단히 유혹의 미소를 던지는 한/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유혹에 넘어가는 마음이 있는 한/ 사진가의 두 눈과 카메라가 있는 한/ 풍경을 찍으려는, 미를 담으려는/ 노력은 무궁무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제도 찍었고/ 오늘도 찍고/ 내일도 무궁무진 찍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함덕이나 곽지 바닷가/ 언덕에 서서 (주변에 사람 그림자라곤 없다)/ 삼각가 세워놓고/ 하염없이 기적의 순간을 기다리는/ 또는 자욱이 이내 낀 저녁/ 대초원 복판에서/ 멀리 영원처럼 떠올라 있는/ 보랏빛 한라산과/ 그 둘레의 작은 오름들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김영갑 모습은/ 차라리 거인 같다/ 단독으로 제주도를 덮고 있는.//

섭지코지 / 박희진
섭지코지는 제주도의 제주도다/ 제주도의 진수인 초원과 오름과 바다의 삼중주다/ 아니 하늘과 별과 구름과/ 햇빛과 야생화와 갯바위와 맑은 공기/ 검붉은 흙과 꿩과 말까지도/ 하나로 어울리는 목숨 잔치이다/ 춤추며 노래하는 합환合歡의 자리이다// 협잡이 이곳에 틈입해선 안되지만/ 문명에 지친 이여/ 도시의 혼탁에서 귀를 찢는 소음에서/ 광란의 속도 무지막지한 차들의 충돌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치명적인 수질과 대기의 오염에서/ 느닷없이 발생하는 도시가스 폭발에서/ 산성비에서 대낮의 어둠에서/ 지뢰처럼 복병처럼 도처에 숨어있는/ 살인 강도 강간의 위협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갈애渴愛와 증오의 굴레를 못 벗어나/ 밤낮 지글지글 지지고 볶는 이여/ 괴로운 사람이여 병든 사람이여/ 고혈압 당뇨 중풍 동맥경화 신경과민에서/ 치유되고 싶은 이여 이곳에 오라// 섭지코지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선 신발을 벗어야 한다/ 냄새나는 양말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리고 맨발로 살뜰히 풀밭을 밟아야 한다/ 차츰 그대는 발바닥 감촉 통해/ 온몸으로 굽이도는 초록의 희열을 느끼리라/ 그 희열로 심신의 찌든 때를 씻어내라/ 온갖 번뇌 망상을 털어내라/ 찰거머리 같은 집착을 여의어라/ 그대의 마음을 아무 데도 두지 말라/ 허공처럼 비우고 거울처럼 맑히어라/ 그러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리/ 그대를 캄캄절벽이게 했던 우치의 비늘이/ 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과 함께/ 비로소 광활한 초원이 펼쳐지리/ 초원 위에 또 초원 초원 아래 또 초원/ 초원 옆에 또 초원……/ 무한으로 이어지는 초록의 목숨 잔치/ 저절로 아 아아…… 초록빛 장탄식이/ 초록빛 모음이 입술 뚫고 나오리라/ 초록이 이렇게 부드러운 것일 줄야/ 초록이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롭고/ 황홀히 꿈꾸는 신나는 것일 줄야// 저 굴레 벗은 초원의 말처럼/ 그대가 알몸이 될 수는 없다 해도/ 혹은 저 두 마리 낏낏한 수꿩처럼/ 저공비행을 할 수는 없다 해도/ 단추를 풀고 풀밭에 벌렁/ 누울 수는 있으리라 세념世念을 잊고/ 홀가분하게 잠들 수는 있으리라/ 그대의 들숨은 초록빛 될 것이고/ 그대의 날숨도 초록빛 될 것이리/ 잠결에도 들려오는 파도 소리/ 그것은 그대의 꿈꾸는 피를 맑혀/ 더없이 달콤한 휴식을 안겨 주리// 이윽고 눈 뜨거든/ 이번엔 야생화를 살펴볼 일이다/ 잘못 만졌다간 찔리기 십상인 꽃/ 엉겅퀴꽃이 이렇게 탐스럽고/ 이렇게 곱게 필 수도 있는 걸까/ 그 자줏빛 꽃빛깔의 신선함과/ 예쁜 양지꽃의 순노랑을 찬미하라/ 또한 이곳의 쑥부쟁이꽃은 유난히 크고/ 산뜻한 보랏빛 지녔음을 찬미하라/ 햇빛을 찬미하라 구름을 찬미하라/ 갯바위에 피는 갯메꽃을 찬미하라/ 보고 또 보고 음미하고 탄복하고/ 찬미하고 찬미하라 소리높이 찬미하라// 참으로 이 찬미한다는 것/ 그 일을 빼놓고/ 어떻게 인간이 구제될 수 있으리오/ 어떻게 인간이 극복되고 정화되고/ 고양될 수 있으리오// 보라 저 바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 시원의 바다 티끌 하나 없는 바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솟는 바다/ 해탈과 현실이 둘이 아닌 바다/ 죽음과 삶이 하나로 꿰뚫리매/ 더는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바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바다/ 진여眞如의 바다 무궁동 바다// 보라 그 바다의 밑바닥에서/ 어느 날 분출한 저 기생화산들/ 탐라의 수많은 오름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모양새 지닌/ 성산포 일출봉 해상의 성채城砦를/ 바다가 있는 한 일출봉은 영원하리/ 뭇 생명의 근원인 바다/ 바다가 있는 한 갯바위는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갈매기는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구름은 영원하리/ 바다가 있는 한 해와 달은 영원하리// 그렇다 섭지코지/ 본질적이 아닌 것 근원적이 아닌 것은/ 이곳에 도무지 있을 수 없다/ 본원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없는 이는/ 이곳에 들어와도 사막과 같으리라// 일체의 것이 여기서는 저절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든 사물은 아주 선명하게 제 빛깔 지니면서/ 제 가락대로 제구실 다하지만/ 전체와의 합일에서 일탈하는 법이 없다/ 낱낱의 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하나/ 실은 상호 삼투적 순수연관 속에/ 숨쉬고 있다 은밀히 안 보이게/ 바로 그 호흡이 삶의 에너지/ 사랑의 순수지속 불멸의 기다/ 무한 친화력의 근거인 것이다// 그렇다 섭지코지/ 거기엔 기가 때묻지 않은 시원의 에너지가/ 도처에 바람처럼/ 넘쳐 흐르고 있음을 본다//

제주 칼바람은 / 박희진
제주 칼바람은 바위에도 구멍을 뚫는다/ 제주 칼바람은 방풍림도 깎고 다듬는다/ 제주 칼바람은 공중의 갈매기도 떨어뜨린다/ 제주 칼바람을 가장 잘 견디는 건 엎드린 바다.//

탐라섬 무지개 / 박희진
탐라섬의 아름다운 칠색 무지개/ 한쪽 끝은 초원에 박혔지만/ 다른 한쪽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바다에 꽂히지 않았을까.//

오름의 유혹 / 박희진
오름 유혹에/ 서울서 제주도로/ 단숨에 날음// 오름 올라야/ 영원에 가닿는다/ 심신의 탈락// 칠십 노옹이/ 죽기 아님 살기로/ 오름에 오름// 세속 여의고/ 우화등선 하려면/ 오름 올라라//

돌 하르방 / 박희진
비 오나 바람 부나 돌눈을 부릅뜬 채/ 제주도 돌하르방 늘 빙그레 미소를 흘리시네/ 돌은 너로 하여 천 년도 순간임을 깨달은 모양/ 공기는 너를 따라 늘 빙그레 웃는 법을 익혔다네//

다랑쉬오름 / 박희진
다랑쉬는 오름 중의 여왕이다/ 크고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다랑쉬는 주변의 모든 오름들의 거울이다/ 다랑쉬는 그 안이 온통 깔때기 모양/ 둥글고 깊게 패인 굼부리임을/ 감쪽같이 숨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짝 암시하고 있다/ 다랑쉬는 보름밤이면 희고 둥근 알/ 은쟁반 같은 달을 쏘아올린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풀빛 옷을 벗고/ 황홀히 아름다운 살결을 드러낸다/ 다랑쉬는 한낮에 더러 심심할 때엔/ 패러글라이더 날리기도 한다/ 다랑쉬는 사람들이 새가 된 양 활공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다/ 다랑쉬는 초원을 사랑한다/ 특히 흰 찔레꽃을 너무도 좋아한다/ 달빛 받고 반투명이 된/ 다랑쉬 살결에서 찔레꽃 향기가/ 풍기는 것은 그래서인 것이다/ 다랑쉬는 오름 중의 여왕이다/ 크고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아끈다랑쉬 / 박희진
아끈다랑쉬/ 새끼다랑쉬/ 하지만 그 야트막한 오름 위로/ 한 발 들어서면/ 누구나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대우주 공간으로 활짝 열려있는/ 원형의 풀밭/ 생각보다 엄청 넓다/ 약간 패인 듯한/ 풀밭 한가운데 굼부리는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불가사의한 향기에 이끌리어/ 무성한 풀밭 사이 영원에 닿아있는/ 오솔길 따라 가면/ 무한정 걷다 보면/ 대기권 밖의 외계인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 그렇다 이 특별한 오름은/ 아득한 그 옛날 이곳에 불시착한/ 비행접시인 것이다/ U. F. O.//

디오게네스의 노래 / 박희진
오늘은 왜 이리 기분이 좋은가/ 이 햇빛과/ 바람에 설레는 푸른 그늘과/ 나무통만 있으면/ 나는 행복한 디오게네스/ 어제는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거리를 헤매었더니/ 놈들은 내가 미친 줄로 알았것다/ 바보 같은 것들이/ 내가 인간에 주린 줄은 모르고/ 정말 이렇게 푸른 하늘 아래/ 사는 무리들이/ 왜 모두 그렇게 욕심이 많을까/ 서로 시기하고 욕하고 속이고/ 그런 거 생각험 구역이 나더라/ 언젠가 한번은 알렉산더를/ 곯려준 일이 있지/ 그래도 그는 좀 다른 데가 있었어/ 오늘은 왜 이리 기분이 좋은가/ 절로 스르르 눈이 감기네/ 이 햇빛과/ 바람에 설레는 푸른 그늘과/ 나무통만 있으면/ 나는 행복한 디오게네스//

마르크 샤갈, 당신을 찬미한다 / 박희진
마르크 샤갈/ 당신의 그림은 너무도 아름답다/ 너무도 찬란하고/ 너무도 황홀하다/ 참으로 끝내주는/ 멋진 환상들로 충만해 있다// 서로 껴안은/ 연인(戀人)들이 유성(流星)처럼/ 공중을 날아간다/ 꽃다발을 기도하듯/ 또는 헌정하듯 치켜든 물고기/ 말 위의 어릿광대// 지붕을 뚫고/ 하늘로 솟은 거대한 황소 머리/ 거꾸로 놓인 집들/ 쫓기는 유태인들/ 느닷없이 추락하는/ 천사(天使)의 붉은 비명(悲鳴)/ 촛불을 켜든/ 경건한 비둘기/ 야곱의 사다리/ 부활한 십자가(十字架)/ 어린 산양(山羊)이 허공에 떠있다/ 상체는 여인인데/ 하체는 닭이다/ 한 얼굴이면서도/ 한 쪽은 벨라이고 한 쪽은 샤갈/ 우산을 받은 청어// 닭 속의 바이올린/ 꽃다발을 품에 안고/ 반쯤 넋 나간 청색의 당나귀/ 공중에 솟은// 빨간 머리 인어(人漁)/ 몸 전체가 첼로로 바뀐/ 여인이 서서 음악을 연주한다/ 푸른 옷 입은/ 흰 말도 한 마리/ 의자에 앉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하늘엔 별인 양/ 향기를 뿜는 화초(花草)/ 꿈꾸는 보름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새빨간 수탉/ 하늘을 나는 썰매/ 천사의 나팔 소리/ 흔들이 시계//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우연이 아니다/ 샤갈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온/ 영혼의 밑바닥을 뚫고 나온/ 필연의 실재(實在)들/ 심상풍경(心象風景)들/ 영원의 액틀 안에/ 포착된 까닭으로/ 이제 다시는 사라질 수도 없는/ 칠색의 무지개들/ 샤갈의 피땀에서 피어난 꽃다발들/ 그러기에 그것들은/ 더없이 신선하다/ 더없이 향기롭다/ 더없이 신비롭다/ 더없이 영묘(靈妙)한 광채에 싸여 있다// 마르크 샤갈/ 초차원(超次元) 예술가/ 당신은 육안으론 그림을 안 그렸다/ 오직 확실한 영혼의 눈을 통해/ 인·사·물(人·事·物) 현상의 본질을 투시했고/ 오직 확실한 영혼의 귀를 통해/ 모든 안 들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오직 확실한 영혼의 손을 통해/ 가장 근원적인 사물의 모습과/ 그것들의 순수연관까지 그렸거니// 마르크 샤갈/ 제2의 창조자여/ 전혀 새로운 조화의 발견자여/ 몸살을 앓는 지구// 상처 받은 인류에게/ 꿈과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안겨준 예언자여/ 미(美)의 사제(司祭)여/ 위대한 화가이자 시인인 당신/ 영혼의 투시자(透視者)// 색채의 연금술사/ 비전의 대가여/ 당신을 찬미한다/ 당신을 찬미한다//

세계의 오지, 라다크 노파 / 박희진
백내장으로 한 눈은 멀었기에 쪽안경 끼고/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웃고 있다. 치근이/ 드러난 앞이빨 세 개로 어떻게 살아가나/ 싸구려 목걸이 왈, "왕년엔 그녀도 미인이었다오" //

세계의 변방, 라다크에서 / 박희진
광활한 하늘과 광활한 벌판 사이/ 큰 스님은 큰 막대기, 작은 동승은/ 작은 막대기 짚고 가오. 뚜벅. 뚜벅. 뚜벅.../ 종일 말없는 둘은 움직이는 두 그루 나무...//

 

                                                           
                                                                - 일행시 一行詩 100수 - 

 즉흥적 각서(卽興的 覺書) / 박희진

1 종말은 없다. 시시각각 새롭게 시작하라.
2 나무엔 꽃이 피는, 눈엔 눈물이 솟는 소리.
3 회복기의 환자처럼 인생을 살 일이다.
4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어가듯 책을 읽는 사나이.
5 서예의 맛은 공간구성의 묘에 있다.
6 음악을 듣는 식물. 명상에 잠긴 새.
7 불란서어처럼 내리는 비여.
8 별의 고요와 맑음이 깃든 눈의 아름다움, 선미(善美)의 극치.
9 바다는 칠면조, 시시각각 빛깔을 달리한다.
10 누가 신의 투시를 견뎌내랴, 사람 중에서는 성자와 영아만이.

11 기적이 아닌 현상은 없다. 만상이 신비다.
12 가을물처럼 맑고 티없는 문장을 쓰고 싶다.
13 연인들에겐 서로의 얼굴이 더없는 천국이다.
14 꽃을 먹는 벌레, 벌레를 먹는 꽃.
15 손오공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그건 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일.
16 포플러는 시인. 소나무는 철학자.
17 자기 내부의 음악이 고갈하면 외부의 음악은 한낱 기계적 소음이 된다.
18 도인이란 육이 도화(道化)하여 걸릴 것이 없는 사람.
19 예술은 사람들을 정화하나 고독하게 만드는 것.
20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종교가 있을 따름.

21 영감이란 정신의 백열에서 홀연 되살아난 기억의 번갯불.
22 미의 사제들아, 자기집중하라, 집중하라, 집중하라.
23 채우고 넘쳐 뚝뚝 떨어지는 참과 아름다움, 그것이 멋이다.
24 詩가 언어의 무용이라면 무용은 육체의 詩다.
25 살얼음 밑을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다.
26 모국어를 여읜 시인은 물을 여읜 물고기.
27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 코끼리가 감쪽같이 항문으로 나오다.
28 선사(禪師)는 안 보이고 지팡이만 걸어온다.
29 빛과 어둠 사이가 시인의 주소다.
30 화가의 귀엔 화선지의 숨소리도 들리게 마련.

31 눈에 불을 켜고 녹색의 표범이 어둠 속을 날아가다.
32 돌베개하고 한 오백년 잤더니 온몸에 푸른 이끼가 돋다.
33 가화는 생화를 닮고 생화는 가화를 닮는 시대.
34 금성인의 손바닥엔 손금이 없다.
35 인간은 모두 우주를 향해가는 지구호의 선원이다.
36 도처에 우주의 중심이 있다.
37 시인은 움직이는 언어의 사원.
38 악마처럼 검은 데다 지옥의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커피 맛이라니!
39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죽은 석가. 생사일여.
40 십자가는 전화위복의상징. 생명의 비의.

41 역사상에 나타난 가장 완벽한 인간은 석존이다.
42 염주처럼 이미지도 꿰어야 보배.
43 한 잔 술 속에서 달빛처럼 떠오르는 태백의 얼굴.
44 오오 찬미의 눈물 한 방울, 그 안에선 만상이 투명해지나니.
45 지구 변방의 장미 한 송이가 은하계 밖의 우주인을 불러낸다.
46. 낮의 숲은 새가 차지하고 밤의 숲은 벌레가 차지한다.
47 빨간 도깨비가 바둑판을 들고 빗속을 간다.
48 시인은 언어 속의 혼령을 불러내는 무당이다.
49 지상은 어두운데 하늘은 대낮이다.
50 로봇트가 현대인의 인간성 상실을 한탄한다.

51 혼자서 노는 어린이는 조금은 신비롭다.
52 야합(野合)은 잘 하지만 화합(和合)은 못하는 불쌍한 얼간들.
53 인간 중의 인간, 성자(聖者)들은 예외없이 아름답다.
54 씨, 흙, 물, 빛, 싹, 잎, 돌, 샘, 벌, 꽃, 새, 숲.
55 인간은 지구의 신비이고, 지구는 우주의 신비이다.
56 眞, 善, 美 다음이 聖이니라.
57 지상의 최고 무용수는 차라리 음악의 지휘자다.
58 무용과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심동체다.
59 한국의 모든 전통악기 소리에선 흙냄새가 난다.
60 중국차가 향기라면 일본차는 빛깔이고 한국차는 맛이다.

61 해지면 겨울山은 짙은 수묵색(水墨色) 된다.
62 달밤의 사막은 보석밭보다 더 휘황하고 정결하다.
63 이목구비마저 마모된 석불이 웃고 있다.
64 인간 중의 인간, 성자(聖者)들은 예외없이 아름답다.
65 외로움도 정복(淨福)인 양 누릴 줄 알아야 곱게 늙어 가리.
66 대서양의 거센 파도를 지휘해 보는 일, 토스카니니의 꿈.
67 늙어도 늙지 않는 삶의 비결, 그것이 바로 집중(集中)과 지속(持續)일세.
68 성자(聖者)들의 세 가지 공통 요소, 고요, 부드러움, 그리고 한결같음.
69 주름살 투성이 농부가 웃을 때엔, 꼭 흙이 웃는 것 같다.
70 바위도 숨쉬고, 나무도 숨쉬고, 흙도 숨쉬고, 물도 숨쉬나니.

71 점과 우주, 무한소와 무한대는 보이지 않는다.
72 살은 흙으로, 뼈는 바위로, 피는 꽃으로, 영혼은 하늘로.
73 몸은 다소 꾸부정해도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 소나무.
74 이 몸이 재(灰)되면, 언제 다시 저 아름다운 벽공을 보랴?
75 자고로 성자(聖者)들은 큰 소리로 웃는 법이 없다.
76 詩人이란 이곳에서 영원(永遠)으로 언어의 사닥다릴 놓는 사람.
77 꽃을 보고 미소짓는 사람은 아름답다. 순수무구하다.
78 찬미는 무궁무진 샘솟는 기쁨, 샘솟는 보람, 샘솟는 신비.
79 인류 없이도 지구는 살지만, 지구 없이는 인류는 못 산다.
80 어떠한 기적(奇蹟)도 부처님 눈엔 한갓 필연(必然)에 지나지 않는다.

81 땅속의 고뇌가 지상의 환희에로 바뀐 게 꽃이라네.
82 모든 성자(聖者)들의 궁극적인 표정은 미소하는 침묵일 뿐.
83 自然은 말이 없고 聖者도 말이 없다. 다만 小人들만 지껄인다.
84 까치가 혼자 놀고 있는 잔디밭에 들어가긴 민망해라.
85 <깨달은 뒤에는 진리(眞理)가 사람을 좇는다> 삼장법사의 말.
86 한글과 漢字를 적절히 혼용해야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꿰뚫린다.
87 사회정화를 부르짖는 사람이여, 그대는 자신을 정화하였는가?
88 산천의 오염은 인심의 황폐와 타락의 반영이다.
89 인간을 제외하면 어떠한 동물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나니.
90 마음을 비워야 眞 善 美에 감응(感應)할 수 있다.

91 세상은 아직 견딜만하다. 수행자(修行者)들 씨앗이 바닥나진 않았기에.
92 미소(微笑)하라, 그러면 당신도 한 송이의 꽃이 될 수 있다.
93 남을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부단히 향상시키도록.
94 <탄생과 죽음은 두 개의 쉼표에 불과하다> 스와미 라마의 말.
95 모든 나무는 서 있는 그대로 순수한 기도이다.
96 왜 자연은 신성(神聖)한가? 무아무위(無我無爲)의 극치인 까닭.
97 황홀(恍惚)이란 영혼이 절반쯤 육체를 빠져나간 상태를 말함.
98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일, 그보다 더 뜻 깊은 일은 없다.
99 풀잎, 풀꽃, 풀열매, 풀피리, 풀덤불,풀방석, 풀벌레, 풀밭......
100 自然을 통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정숙(寂靜)을 터득하라.

 



박희진(朴喜璡, 1931년~2015년) 시인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보성중학교를 거쳐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55년 조지훈·이한직의 추천으로 《문학예술》를 통해 등단했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시동인지 '육십년대사화집'을 주도했으며, 1975년에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창작계획> 과정을 수료하였다. 1979년 4월 구상·성찬경 시인과 함께 '공간 시낭독회'를 창립하여 시낭독운동을 했다. 월탄문학상, 한국시협상, 상화시인상, 펜문학상, 제1회 녹색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실내악》,《청동시대》,《빛과 어둠의 사이》,《연꽃속의 부처님》,《북한산 진달래》,《화랑연가》,《박희진 세계기행시집》,《사행시 사백수》,《소나무 만다라》,《이승에서 영원을 사는 섬들》등이 있으며 《4행시와 17자시》를 출간하는 등 35권의 단행본을 냈다. 독신생활을 고수해 온 고인은 불교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삼라만상의 다양한 실상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행시에 대하여 / 박희진

박 희 진(시인) 1행시라는 제목을 걸고 나는 다음과 같은 4행시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1행시는 單刀直入이다. 번개의 언어다. 1행시는 點과 宇宙를 하나로 꿰뚫는다. 1행시는 직관적 상상력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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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시에 관하여(박희진)

사행시에 관하여 박희진 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보면 정형시와 자유시의 두 가지로 된다. 자유시는 편편이 독자적인 리듬을 타고 구성된 언어조직인 까닭에 唯一回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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