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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덕수 시인

부흐고비 2021. 10. 21. 09:15

침묵 1 / 문덕수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江물!// 천 년 녹슬은/ 鍾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恍惚한 啓示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버렸다//

종이 한 장 / 문덕수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무슨 예감처럼/ 부들부들 떠는 성난 종이의/ 언저리에 불이 붙고,/ 말씀이 삭아서 떨어지는/ 십육(十六)절지 반(半)의 백지./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시는 어디로 / 문덕수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손수건 / 문덕수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선에 관한 소묘 1 / 문덕수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에 관한 소묘 2 / 문덕수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품고/ 얽히는/ 난무(亂舞),/ 불사(不死)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멀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선에 관한 소묘 3 / 문덕수
은빛 실날을 뽑으며/ 그물을 짜는/ 한 올의 바람,/ 이윽고/ 환상처럼 걸리는 조롱(鳥籠),/ 천사의 손도 얼씬 못하는/ 조롱./ 그 속에/ 지구는 무한의 구석을 울리는/ 쓸쓸한 새./ 금빛 구름을 뿜으며/ 그물을 짜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 이윽고/ 허무의 가지 끝에 걸리는 초롱.//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초롱./ 그 속에/ 우주는 영겁의 모서리를 밝히는/ 호젓한 불꽃.//

선에 관한 소묘 4 / 문덕수
그것은/ 18세기의 내장 속을/ 기생하는, 한 마리/ 세균(細菌)./ 그것은/ 벽(壁) 뒤로/ 폭동과 군중을 거느린/ 하나의 점(點)./ 그것은/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는/ 파편./ 그것은 실패한 지도의 꿈./ 아니/ 지구를 둥근 3각형으로/ 변조하려다/ 들킨/ 미충(微虫).//

선에 관한 소묘 5 / 문덕수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묶어 금빛으로/ 졸라 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지중해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내 침실 / 문덕수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높이여서 안전하고/ 벽은 10년 전의 그 높이로 날 안아준다/ 등산모 운동모 맥고모자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고/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내 생일 선물의 빨쁘레질리 카운티스마라도 있지만/ 사흘 전의 구겨진 와이셔츠도 그대로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그리스도의 비밀, 붓다의 입문/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새벽바다 / 문덕수
많은/ 태양이/ 쬐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 오른다/ 일제히 쏘아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一齊射擊)/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보석 상자다.//

지하철 안에서 / 문덕수
시속 80킬로의 지하철 선반에 알록달록 배낭 네 개가 눕고 기대고 포개져 떨어지지 않다 뭔가 오순도순 속소리로 속삭이다 선반 밑에는 서른을 갓 넘은 아빠 엄마 사이에 낀 맏딸은 씨걱거리며 살세게 달리는 깜깜한 땅굴이 무서운 듯 연신 고개를 돌려 힐끗거리다 둘째는 머슴애, 엄마의 오른손을 꼭 잡고 휘둥그레 세상을 익히는 눈치다 천원 한 장에 두 켤레라고 꼬두기면서 목이 쉬어버린 요술장갑장수가 그 앞을 막 지나가다 아뿔사, 집을 나설 때 나는 약을 먹으라는 아내의 말을 깜박 잊어버리다//

천안에서 / 문덕수
하늘이 편안해서/ 天安인가 보다// 신호등 앞에서/ 덜커덕 머뭇거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만/ 이내 제 선로를 찾는다/ 급행열차/ 위로,// 무사한 고층아파트 工事와/ 폭우에도 비 한 방울 새어들지 않을 듯한/ 녹색 텐트 같은 풍요의 포도밭/ 위로// 천안의 하늘은/ 주름살 한 올 없다// 교각 곁에서/ 불법 아닌 듯이 무사 태평인/ 駐車 위의 견고한 고가도로/ 그 위로,// 재회의 기약인지/ 역 광장을 사뿐사뿐 빠져나오는/ 젊은 여인이 받쳐든 그 양산/ 위로// 天安의 하늘은/ 구김살 없는 비단이다//

건널목에서 / 문덕수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고/ 차단기가 내려진다/ 세계가 갈라지듯 단호하다/ 바쁜 걸음들이 서고/ 혹은 한두 발짝씩 물러선다/ 열차는 언제쯤 지나갈는지/ 가쁜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먼저 보낼 것을 보내도/ 또 다음 차단기가 내려지리라/ 권력도 영광도 분노도/ 여기서는 지푸라기다/ 조용히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든지/ 혹은 하늘의 구름도 보면서/ 모두들 기다려야 하나보다//

안라국의 목걸이 / 문덕수
안라국의 궁터 가야 도항리 33호 고분에서/ 2천년이나 잠자던 목걸이가 지렁이처럼 눈드고 나왔다/ 불그레한 마노는 왕후의 목덜미빛이요/ 토기 굽다리에 뜨거운 무늬를 뚫은 불꽃이다/ 파란 유리구슬은 안라국 어린 공ㅈ님 눈빛이요/ 왕궁 지붕마루에 내려와 앉은 하늘이요/ 여덟 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장수말이 마신 물이다/ 저 자잘한 비취빛 수정알의 바늘귀에는/ 지금도 후기 가야 여러 나라 맹주의 숨길이 흐른다/ 아라가야 궁터 도항리 33호 고분에서/ 2천년이나 꿈구닥 눈을 뜬 저 목걸이는/ 지리산 숲속에서 구불구불 흘러 내려 안라땅을 적시는 남강이요/ 한티 재를 넘어 마산 남쪽 바다로 통하는 바람길이요/ 여항산 멧부리 남동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다/ 아라가야를 지금도 두르고 있는 무성한 성벽이다//

종이컵 / 문덕수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의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히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길 잃은 노끈 / 문덕수
길 잃은 노끈이/ 한 밤의 창틈을 엿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어둠 속에서/ 돋아난 한 줄기 넝쿨이다./ 이브를 꾀어 낸 사탄의 머리칼이다./ 어머니의 목을 조른 치마끈이다./ 버림받은 娼女의 陰毛다./ 一家를 묶어 물에 던진 밧줄이다./ 언젠가는 地球를 채어 갈 끈인지도 모른다./ 빨간 뱀의 혓바닥처럼/ 한밤의 房 구석을 샅샅이 핥고 있다.//

원(圓)에 대하여 / 문덕수
네 품안에 할 알의 씨로 묻혀/ 너를 닮은 과일로 익고 싶다/ 내 물살의 칼날은 꽃잎이 되고/ 뾰족한 내 돌부리는 만월滿月처럼 깎이어/ 너를 닮아 차라리 타버리고 싶다/ 외길로만 뻗는 이 직선을 잡아다오/ 부러져 모가 서는 이 삼각을 풀어다오/ 꺾이어 모가서는 이 사각에서 놓아다오/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기에/ 실은 우주도 너를 닮은 충실이기에/ 네 품안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로/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이고 싶다//

원(圓)에 관한 소묘 / 문덕수
한 개의 원(圓)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指環)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水蜜桃)만한/ 세 개의 원(圓)이/ 천 개의 원(圓)이/ 굴러간다./ 신(神)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 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圓)이/ 팔월 한가위의 달만큼/ 자라서/ 굴러간다.//

조금씩 줄이면서 / 문덕수
잔고(殘高)를 조금씩 줄이면서/ 석류알처럼 눈뜨고 싶구나.// 그동안 흐드러지게 꽃피우거나/ 나비 벌들 떼지어 윙윙 몰려와/ 제풀에 뚝뚝 떨어져 묻히는/ 꿀단지 하나 그득히 빚은 일도 없으나,// 잎사귀를 한두 잎씩 떨어뜨리고/ 곁가지 곁넝쿨도 조금씩 쳐내고/ 몰아치는 성난 돌개바람이나/ 괴어서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도 돌려서,/ 겨우내 개울둑에 알몸으로 홀로 서서/ 이브처럼 눈뜨고 싶구나.//

무제 / 문덕수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를,/ 오늘은 철쭉꽃이 보고// 그 철쭉꽃이 시들어 이운 지/ 천 년이 지난 오늘엔/ 그 절벽의 소나무가 보고,// 그 소나무가 말라죽은 지/ 또 천 년이 지난 오늘엔/ 낙락(落落) 가지를 찾아온 학(鶴)이 보고,// 그 학이 자취를 감춘 지/ 다시 천 년이 지난 오늘엔/ 먼 바다 끝을 넘어온 갈매기가 보고,// 그 갈매기가 돌아간 지/ 또 다시 천 년이 지난 오늘엔//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가 스스로 제 모습을 보면서…//

전생설화 / 문덕수
그땐 나는 강아지였지./ 목화(木花)송이 같은 한 마리 복술강아지였지./ 그땐 당신은 목련(木蓮)꽃이었지./ 그땐 구름도 당신을 닮아 목련꽃으로 피고/ 맑은 냇물도 목련꽃 빛으로 흐르고/ 죽은 바윗돌에선 목련꽃의 싹이 트고/ 나는 목련꽃 빛의 복술강아지였지./ 그땐 나는 온몸이 달아/ 쇳덩이도 녹일 듯이 온몸이 달아/ 꽃나무를 위성(衛星)처럼 한 천 번쯤 돌다가/ 미친 듯이 문득 날아오를 듯/ 솟구치곤 하다가 떨어져 떨어져/ 꽃나무를 안은 채 타서 죽었지./ 목련꽃같이 핀 이승의 당신/ 먼 전생의 전생 때부터 / 나는 당신을 찾아 헤맨 짐승이었지.//

인연설 / 문덕수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만남 / 문덕수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흔든다, 웃으며./ 그러다가 한동안 나란히 걸어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걸어간다./ 그것은 강물이다, 바다다./ 두 사람은 빙그레 웃는 듯 노려본다./ 빛이 다른 옷을 갈아입는다./ 홱 돌아서고/ 멈칫 물러서더니/ 주먹으로 맞붙어 치고 받는다./ 꽃처럼 난만한 상처/ 이윽고 서로 끌어안으며/ 뺨을 부빈다./ 하늘은 맑고 냇물은 옥을 굴린다./ 두 사람은 냇가로 갈라선다./ 냇물은 점점 벌어져/ 바다가 된다./ 갈매기만 날으는 세월이 흘렀다./ 바다는 꽃송이처럼 오므라들었다./ 두 사람은 물가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흔든다./ 앉았다 일어섰다 춤을 추다가/ 다시 별 하나를 찾아 나서듯이 숲속의 나그네가 된다.//

행복 / 문덕수
사르비아꽃을 짓이겨선 기둥을 세우고/ 연(蓮)꽃을 짓이겨선 기와를 굽고/ 국화꽃을 짓이겨선 벽을 만들고/ 천축모란(天竺牡丹)으로 가락지 같은 문을 짜서/ 그 만년의 꽃집 속에 꿈이 살고/ 그 속에 우리가 산다.//

관계 / 문덕수
어떤 이는/ 내게 가까이 오면/ 새까만 벽만 세워 놓고 그 뒤로 숨는다./ 어떤 이는/ 계단 같기도 하고 사다리 같기도 한 것을/ 내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놓고/ 그 밑에서 한 계단씩 기어오르려고 한다./ 어떤 이는 내게 가까이 와서는/ 나를 저쪽 강가에 세워 놓고서는/ 나룻배로 저어 건너오려 하거나/ 혼자서 외나무다리 같은 것을 놓으려고 한다./ 어떤 이는 내게 손을 내밀다간/ 바람처럼 사라지고/ 사라진 그 자리엔 꽃만 한 송이 피어/ 가을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결여(缺如) / 문덕수
나는 겨우 몇 발짝 뗄 수 있는 내 앞밖에는 보지 못한다. 그 앞도 시력이 끝나는 지평 밖은 암흑이다. 뒤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야 하는데, 그때는 조금 전의 그 앞이 새로운 뒤로 바뀐다. 사람은 그 뒤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 뒤는 암흑 세계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도 돌릴 수 있으나, 그래도 좌우는 언제나 남아서 암흑 세계다. 이런 암흑 속에서도 나는 무사하다.// 나는 삼수 끝에 겨우 운전 면허증을 땄다. 운전대에 앉기만 하면 손이 떨린다. 앞차의 꽁무니만 보고 열심히 따라간다. 후면과 좌우는 암흑이다. 좌우로는 살벌한 차량들이 엇갈리고, 뒤로는 덤프, 택시, 버스들이 덮칠 듯이 바싹 붙어서 밀려온다. 그래도 나는 용하게 살아남아서 달린다. 누가 이 암흑, 이 결여(缺如)를 보충해주고 있는 것일까.//

의문 / 문덕수
풀이라곤 다 말라죽은 불모의 들판에 피골이 상접한/ 한 흑인 여인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숯덩이 같은/ 두 아이를 치맛자락으로 더 이상 감쌀 힘이 없다/ 그 자리에 그대로 픽 쓰러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멍하니 서 있는 세 모녀의 몰골은/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오늘의 거울이다/ 그 곁의 금방 딴 능금을 가득히 담은 함지를 인 여인이/ 저고리 섶 밑을 밀고 풍만한 乳房이 삐죽이 내민 채/ 등에는 토실토실한 갓난 애기를 업고/ 좌우에는 연신 재잘거리는 오뉘를 거느리고 있다/ 나는 이 두 그림 사이의 거리를 끝내 알 수 없다//

공간 / 문덕수
꽃망울이 트이듯/ 한동안의, 그 바람의 몸부림 만큼의/ 내 곁의 빈 空間./ 鍾路 二街쯤을 걸어왔을까/ 문득 에워싸는, 나의 앞뒤의/ 내 키 만큼한 숱한 空間들./ 그 空間 속의 부릅뜬 눈망울,/ 웃음과 손짓, 굽이치는 江물의 얼굴,/ 그러다간 자라나는 나무/ 아아, 한 그루의 暗黑./ 순간 순간 죽어가는/ 나의 存在 만큼의/ 餘白이 눈을 뜨듯 뚫리는,/ 끝내 내가 묻힐/ 한 동안의, 성난 鳳凰의 몸부림 만큼의/ 그냥 남아 있는 빈 空間.//

공간 / 문덕수
앞차가 서면 나도 서야 한다. 내 뒷차도 따라 설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차례로 서는 동작이 한동안 아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앞차와 내 차 사이에 범할 수 없는 공간이 생긴다. 내 뒷차와의 사이에도, 그리고 그 뒷차와 뒷차 사이에도―그리하여 빈 상자(箱子)와 같은 공간이 열을 지을 것이다. 그것은 안전을 지켜주는, 구슬을 꿴 줄같이 아름답다.// 앞차가 떠나면 나도 뒤따라 떠난다. 내 뒷차도 나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뒷차도, 그 뒷차의 뒷차도―그리하여 좁혔다 넓혔다 하는 공간이 일렬로 늘어서서 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 중에서 어느 한 공간이 죽을 때, 오, 그 순간의 충돌, 비명, 유혈……, 그러나 다만 한동안의 파문(波紋)일 뿐, 그 공간들은 여전히 일렬로 늘어서서 달릴 것이다. 영원히.//

한 뼘만큼의 공간 / 문덕수
두 개의 손바닥이 이렇게 가까이/ 두 개의 잎사귀가 이렇게 가까이/ 한 뼘만큼의 공간을 두고 가까이 왔다./ 한쪽이 한 치쯤 다가서면/ 한쪽은 또 그만큼 물러서고/ 그렇게 서로 영원히 마주보면서/ 한 뼘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한 삶인 것처럼./ 한 나무를 떠난 천 년 뒤의 해후,/ 한 영혼을 떠난 만 년 후의 대면,/ 헤매다가 헤매다가 마침내 찾았으나/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더 이상 붙을 수도 없는/ 한 뼘만큼의 절대한 공간.//

빌딩에 관한 소문 / 문덕수
빌딩이/ 빌딩을 막아선다./ 일언반구의 이유도 없다.// 앞뒤 죄우로 하나같이 꼭 같은 규격/ 비슷한 각도로 바싹바싹 다가와 붙기도 하고/ 내려 누를 듯이 치솟기도 하고/ 조금씩 밀어내기도 한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방향을 잃고/ 논란 바람이/ 근대화의 낯선 거리를 헤맨다.// 비둘기들이/ 잔인한/ 삭막한/ 새 도시에 길들기 위해/ 빌딩들의 높낮이를 점검하며 비상을/ 시험하고 있다.//

빌딩에 관한 소문 1 / 문덕수
눈 한 번 끔벅 하면/ 빌딩이 선다.// 손 한 번 들면/ 35층이다.// 종일 모가지를 빼고/ 눈이 통방울로 튀어나온 채/ 몇 층 몇 동 계단 복도 엘리베이터 캐비넷 금고를/ 염탐하면서 돈다.// 찌그덕 찍 찌익 찌잉 균열이 울고/ 우르릉 우르릉 몰려다니면서 서로 부딪치고/ 쿵쿵 밟으며 츠으층을 오르내리는/ 밤의 불길한 굉음,// 때로는 왈칵 의심이 나서/ 꼭데기에서 밤을 새고/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벽을 더듬어/ 내려가서는/ 성냥갑처럼 쭈그러뜨려/ 냉큼 떼어 호주머니에 넣는다//

계단 / 문덕수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 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칠 때마다 발을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사나이도/ 인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벽(壁) 1 / 문덕수
벽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나이/ 쇳덩이처럼 찰싹 붙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딛고 오를수록/ 벽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짙푸른 하늘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한 번 숨을 크게 몰아쉬고서는/ 메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뛸 듯이/ 그렇게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온몸은 찢겨 떨어지는 살점./ 햇빛이 찌르는 한낮, 눈 닦고 보니/ 벽을 붙어 올라가는 수천의 사나이/ 짐승처럼 찰싹 달라 붙은 수 천의 사나이/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고여서/ 마침내 냇물을 이루리라.//

소묘 / 문덕수
도시는 빌딩의 숲이다 빌딩의 계곡이다 치솟는 빌딩은 탑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올린 콘크리트의 서랍이다 성냥갑처럼 차곡차곡 포개 올린 서랍이다 사람들은 표본상자 속의 벌레, 그 서랍 속에서 눈을 뜬다 날이 새면 서랍 속을 빠져나오나 이내 다른 서랍에 갇힌다 지붕도 땅도 없이 대낮은 더욱 어둡고, 천장은 그 위층의 영원한 어둠의 밑바닥이다 지옥으로 가는 골목처럼 복도는 빠끔히 트이나 만나는 눈초리는 언제나 낯이 설다 엘리베이터는 조그만 죽음의 곳간, 분주히 오르내리면서 순간마다 계단의 꿈을 죽이고 있다 빌딩과 빌딩은 깎아내린 아슬한 절벽이다 어린 나비들이 떨어져 죽는다 그 절벽의 틈새로 굴 속 같은 길은 뚫려 거미줄처럼 얽혀 있으나, 나의 길은 없다 로터리를 몇 바퀴 돌아도 나의 길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붐비는 저녁 버스의 출구에서 하루의 문이 닫힌다 낯설은 강을 건너듯 어제와 오늘이 이어진다 하늘은 구름과 별의 무덤이다 도시는 언제나 잿빛 천막으로 덮여 있다 그것은 죽음의 포장이다//

금관 / 문덕수
아침나절에 소나기 개다// 갈릴리 호수를 걸어오는 예수의 맨발가락이 보이고/ 보리수 밑의 싯다르타의 알몸 가부좌 위로/ 툭 떨어지는 노란 망고 열매가 아프다// 북한산 양로봉 턱밑 푸른 능선을 오르는/ 한 여류시인의 등산모 차양에/ 오전의 다이아몬드 빛 부스러기들이 내려와 박히더니// 금관이다//

작품(1) / 문덕수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벌/ 컥벌컥 마시다 한여름의 불볕을 안고 모하비 사막을/ 앗! 뜨거 앗! 뜨거 맨발로 메뚜기처럼 뛰다 알몸으로/ 갠지스강을 건너 녹야원 보리수 꽃숲 속에서 알거지/ 님을 만나다 이런 것 저런 것 보고 듣고 마시고 먹고/ 다 거두어 들여도 나는 항상 빈 자배기다,// 늙어 바스러진 등 곶감 한 접 지고/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 한 알씩 빼어 먹는 일밖에.//

새의 나라 / 문덕수
모란순(牡丹筍)이 새의 몸짓을 하고/ 시냇물이 새의 울음을 운다./ 모두가 새를 닮아간다./ 큰 별이 하나/ 꽃밭 같은 은하수를 밀고 가다가/ 새가 되어 날았다./ 행방불명이 된 누나와/ 빌딩과 수상(首相),/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의 빈 리어카./ 누구는 역전(驛前)의 육십 계단(六十 階段)을 오르다가/ 누구는 무교동 사잇길을 걷다가/ 공작이 학(鶴)이 비둘기 제비 멧새가/ 되었다는 얘기/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일 년쯤 늦게사 돌아온 석조(石棗)꽃./ 나무도 사람도 차(車)도/ 날아오르고 싶으면/ 모두 새가 되었다.//

나비의 수난 / 문덕수
비실비실 포도를 가로질러 가는/ 연두빛 어린 나비,/ 신이 찢어버린 한 점의 색종이다./ 느린 시내버스의 옆구리에 부딪힐 듯/ 날쌔게 몸을 빼는 택시의/ 그 소용돌이치는 기류 속에 휩쓸려/ 치솟을 듯이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빠져 나온다./ 이윽고 뒤쫓는 까만 세단의 앞유리에 걸려/ 그대로 절벽에 떨어지듯 멀리 밀려갔다간/ 놓여나 한숨을 돌린다./ 휘말려가고 끌려가고 부딪히는/ 연두빛 어린 나비,/ 신이 찢어보낸 한 점의 색종이다.//

풀잎 소곡 / 문덕수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 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느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 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라네.//

실바람같이 / 문덕수
매달릴/ 당신의 빈가지를 찾아// 헤매는/ 허공 속,// 오직 당신에게만 울릴/ 내 영혼의// 그 먼/ 흐느낌……//

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생각하는 나무 / 문덕수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똘히 사유한다/ 보이지 않는 地脈에까지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을 전한다/ 안으로 지닌 생명의 그지없는 중량을 가득히 느껴본다/ 받들어 숨쉬는 하늘과 구름과… 산새의 무게를 均衡해본다/ 먼 불안의 방황에서 돌아오듯/ 이제 숨막히는 긴장을 푼다/ 한잎 두잎 목숨을 떨어뜨린다/ 가볍고 서운한 안으로 충만해오는 喜悅이 있다/ 가지를 휘감아 울리는 飛翔의 흐느낌이 있다/ 발가벗은 채,/ 나무는 귀를 기울여본다//

안개 / 문덕수
안개들이 道路 위로 기어 올라아서는 눕는다./ 안개들이 개천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논다./ 안개들이 工場 굴뚝을 안고 오른다./ 안개들이 車를 계속 몰고 온다./ 안개들이 아침햇빛을 온통 먹어 버린다./ 안개들이 산 위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온다./ 사람이나 꽃이나 짐승이나 실은 모두 안개다.//

빗방울 / 문덕수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동그랗게 수면을 파면서 수만 개의 자잘한 물기둥으로 다시 솟는다 그 물기둥의 목이 石筍처럼 똑똑 잘리면서 눈깔사탕만한 투명한 구슬방울이 된다 어떤 건 포물선형으로 휘늘어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떤 건 줄기에 매달려 미끄러지고 그냥 수직으로 玉碎한다 빗줄기 틈새로 놀란 개구리, 곤충 한 마리 빗줄기 치는 잎사귀 밑에 거꾸로 붙어서 소나기를 피한다 빨간 딱정벌레가 풀잎 위로 기어가다가 휘어져 튕기는 바람에 굴러 떨어진다 개미 대여섯 마리 歸巢 도중에 신호체계가 무너졌는지 길을 잃고 방황한다 소나기 뒤에 연못에는 평화처럼 맑은 허무가 내려앉는다//

프로이트 선생에게 / 문덕수
아내에게 대구탕보다 천원이 더 싼/ 오징어 뽂음을 주문한다/ 마을의 쌈지공원/ 온몸 돌리기 파도타기 줄 당기기 하늘걷기...그때/ 벤취에 편안히 앉은 두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있으면 물고 가"/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허리를 굽히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은 호랑이 띠야. 양띠인 나와 함께 치악산에 가서/ 나란이 바위에 앉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오는 거야. 임자는 무슨 띠야?"/ "제 아내는 용띠예요"/ "용은 호랑이 보다 두 살아래지"/ 그때 해일이 밀려와 휘어감고 흔드는 우리 집/ 기둥의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六·二五 1 / 문덕수
내게만 보이는 것일까.// 길바닥 여기저기/ 뽑힌 발톱이 흩어져 있고/ 잘린 목은/ 어디로 갔는지,// 한 웅큼 머리칼이/ 길바닥을 곱게 쓸고 있다./ 한 남자가/ 그때 내가 본 이 길바닥에서/ 지금도 맨발로 걷거나/ 알몸으로 뒹굴고 잇다/ 피를 흘리면서…//

六·二五 2 / 문덕수
그 차돌 같은 발바닥/ 억센 발목이/ 그립구나,/외짝 군화.// 포화 속/ 갯벌을 뛰고/ 가파른 언덕 기어오르며/ 탄환처럼 돌진하던/ 외짝 군화,/ 잡초 속에 누웠구나.// 바닥은 뚫리고/ 발등은 찢긴 채/ 휴전선 달빛 속에/ 그날을/ 홀로 증언하고 있구나,/ 외짝 군화.//

六·二五 3 / 문덕수
칼이 파르르 떨면서/ 일어선다./ 선 채로 꼿꼿이 뛴다.// 부러진 칼날/ 사금파리 같은 쇳조각이/ 떼지어 잉잉거리면서/ 날벌레처럼 날아다닌다.// 벽에 꽂히고/ 문틈에 끼이고/ 창문을 뚫어/ 그리고 가슴이고 눈이고 허벅지고/ 가리지 않는다// 녹슨 고철무더기들이/ 들썩들썩/ 모두 일어선다/ 수천의/ 칼날로…//

 


우체부 / 문덕수

- 다시 태어나 우체부 되고


 

문덕수 시인의 〈우체부〉는 470행 장시다.

월간 〈시문학〉 2008년 11월, 12월호에 발표되었다.

詩는 단순히 우체부가 아닌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이 전장에 나가서 총상을 당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머니의 안타까움,

산하를 넘나드는 바람과 꽃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일제강점기로부터 6.25동란, 보릿고개로부터 민주화과정에 이르는

근대화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Ⅰ 조셉 룰랭//

고향 뒷산 기슭에 옥으로 박힌 호수 그/ 어머니의 양수(羊水)에서 너는 물장구쳤네/ 잉어 가물치와 놀고 물밤 먹고 자랐네/ 어느날 서낭당 나무에 몸 칭칭 묶어놓을 듯이/ 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 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 우체부 ‘가방’ 하나 달랑 달렸네/ 지구의 궤도 같은 빈 동그라미/ 달마상처럼 눈에 잘 띄게 또렷하네/ 물결 서로 부르며 몸 섞고 짙푸른/ 우발수(優渤水) 가에서 금와를 만난 유화/ 미쓰 고구려 유화(柳花)의 침실에/ 햇빛이 들어와 좇으니 태기 있어/ 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으니/ 네 가방 그 알만 하네/ 네 가방 그 알만큼 불룩거리네/ 나라를 밴 첫 어머니의 배만큼 둥글해지네/ 사문(沙門)의 ‘바랑’ 이네/ 반 고흐의 ‘우체부 조셉 룰랭’/ 반짝이는 노란 수염발/ 코 밑과 두 볼때기에서 입술을 둘러/ 용수철처럼 고불고불 곰실거리며 두 갈래로 갈라져/ 내려와 가슴을 덮고, 그 새로/ 청색 유니폼의 넓은 목깃이 언뜻 비치네/ 두 줄의 웃옷 금단추 두 점/ ‘포스트(postes)’ 모표가 또렷한/ 앞 차양 짤막한 캡을 썼네/ 눈동자는 박아 끼운 녹색 구슬이네/ 아무래도 그 유니폼은 네게 어울리지 않네/ 그의 연인도 그의 가방도 맞지 않겠지/ 개울가로 떠내려온 누더기를 줍거나/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입다가 버린/ 군복 누더기가 맞겠네/ 올 굵고 거친 무명의 임란 때 융의(戎衣)가 좋겠네/ 바위를 종이처럼 가볍게 밀어내거나/ 태평양을 개천처럼 건너뛸 듯이/ 먼저 한 발을 앞으로 살풋/ 나비처럼 가벼이 떼어 내미네/ 턱밑이나 코끝을 넘을 만큼 수평으로 높이 뻗은 보폭은/ 상체를 실어 앞으로 옮긴 뒤/ 그 발끝을 살짝 땅바닥에 내려 놓네/ 힘껏 던진 긴 창대가 멀리 날아 한 지점에 박히듯/ 그 반동으로 지렛대의 뒷발은/ 얼른 번갈아 맡아 다시 창대처럼 뻗으며 앞으로 뛰네/ 9.96초의 두 다리네/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가슴/ 알 배듯 힘줄 통글통글 뭉쳐/ 거인이 지구를 히끈 들어 올리네/ 두 발로 지축을 딛고 꼿꼿이 서서는 무릎을 펴고/ 천년을 벼른 듯 벌떡 일어서네/ 186kg이 일순 두 팔에서 가슴과 허리로/ 다시 무릎을 거쳐 내려온/ 긴장의 위험을 입 꼭 다물고/ 두 발이 받쳤네/ 장미란(張美蘭)이 당당히 해내네/ 보라, 보리수 밑의 앉은이/ 두 발을 무릎에서 꺾고 접어 결가(結跏)하였네/ 오른발을 왼발의 넓적다리 위에 얹어/ 바위처럼 꾹 누르고/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네/ 포탄이 날아올 땐 인지(人指)를 펴어 밑을 가리키고/ 전란과 굶주림 속의 모든 염원과 기도를 도맡아/ 손바닥을 위로 하고 다섯 손가락 다 펴니/ 두 발의 결가부좌가 받드네/ 어버이 부축한 외나무다리 길도/ 5백킬로 상공의 무중력 궤도도/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네//

Ⅱ 격군들//

격군(格軍)의 노는 탱크의 캐터필러/ 사부(射夫)의 화살은 105미리 155미리 야포네/ 쇠나팔이 울돌목을 휘감아 길게 세 번 울고 그 꼬리 허공으로/ 풀리니 발진 명령이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되네/ 배의 노가 일제히 물위로 치솟다가 내려가고/ 이물에 덤비는 물결은 길길이 뛰며 달라들고/ 부딪친 물결이 깨어져 갈리며 소용돌이치네/ 노 한 자루에 네 사람이 붙어/ 서로 마주보며 몸을 숙이고 젖히네/ 온 몸이 북소리 한 번에 앞으로 밀고/ 또 한 번에 뒤로 당기네/ 노를 질타하는 북소리 다급해지니/ 빠른 뇌고(雷鼓)로 바뀌고/ 역류로 달라드는 물결과 북소리 틈새에서/ 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 펜대를 쥐었던 연약한 손이/ MI을 받들어총의 자세로 잡고/ 하낫 둘 하낫 둘 역사의 구령에 길들여지네/ 구슬땀이 염주알로 익어 한 겹 두 겹 모가지를 두르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한 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 바로 네 턱 앞의 헉헉거리던 한 병사의/ 묵직한 MI총대가 두 손아귀에서 빠질듯 미끄러져 내리니/ 어디서 번갯불처럼 채찍이 날아와 다그치네/ 행진을 이끄는 구령이 더 촉박해지고/ 움찔 놀라 추스러 끌어올리나, 그뿐 다시/ 미끄러져 내리네, 땀 훔치며 히끈 들어올리니/ 아이고매 죽여줍소 아이고매 죽여줍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유고매 죽여줍소 데이고매 죽여줍소로도 들렸지**/ 옴마니밧메훔으로도 들렸지/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네,/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밤비가 주룩주룩 죽죽 내리네 퍼붓네/ 한낮의 찐 더위도 밤에는 오히려 초겨울/ 지옥보다 더 캄캄한 비의 산길을 더듬어/ 헤드라이트를 끈 군용차들이 앞차의 반딧불만한 미등을 따라/ 진흙이 튕겨서 유리에 칙칙 뿌리는 도로를 꼬불꼬불 도네/ 네 우체부 가방도 진흙 투성이네/ 병사들은 군복 위로 둘러쓴 판초에 머리만 내어놓고/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전방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네/ 가느다란 쇠소리의 저 철모는 안전할까/ 풀과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위장했네/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어깨는 기관총을 메고/ 가슴에는 수류탄이 달렸네/ 구릉이나 언덕을 돌처럼 굴러서 오르내리고/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라는/ 이름의 저들은 누구일까/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일까/ 허리에 권총을 찬 소대장도/ 어깨는 한 자루 카빈 등에는 포탄 1발/ 한 병사는 포신(砲身)을 들고/ 또 한 병사는 포가(砲架)를 메고/ 또 다른 병사는 포반(砲盤)을 짊어지고/ 헐떡거리는 저들은 누구일까/ 발사의 반동으로 후진하는 포신에 부딪쳐/ 마냥 스스로 닦고 아끼던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네//
* 김훈 <칼의 노래>(2005), 84~85쪽 참고. 임란 때 울돌목에서의 조선 수군 해전의 한 광경.
** ‘아이고매’는 ‘아이고머니’와 같은 감탄사. 음을 따서 ‘I go 어머니’의 축약형으로 보고, ‘유고매’, ‘데이고매’도 ‘You go 어머니’, ‘they go 어머니’도 축약형으로 본 펀(pun).
*** ‘옴마니반메훔’(Om Ma Ni Pe Me Hum)은 산스크리트어. 불교의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 에카스민 사마예:ekasmin samaye. 산스크리트어인 듯. ‘일시’ ‘한때’의 뜻. 불교에 관련된 말.

Ⅲ 불의 기호//

열길 물 속은 알고 한길 사람 속은 몰라도/ 붓다는 보았네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았네 네 차디찬 샘 같은/ 눈 속에 들어 앉은 시뻘건 불가마를 보았네/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못갑니다고 막았으나/ 라이오스 왕은 나라의 재난은 내탓이라며 신전을 찾아 길을 떠났네/ 으슥한 갈림길에서 전날에 산중에 버린 아기 오이디푸스를/ 만나 길을 비켜라 옥신각신 실랑이 중에/ 수레의 말발굽에 발등이 밟힌 오이디푸스는/ 들고 있던 막대기로 그를 쳐죽였네 아버지를 죽였네/ 어린 조카의 울부짖는 눈에서 수양(首陽)은 불의 칼을 보았을까/ 어린 아들 사도의 눈에서 영조는 불의 왕관을 보았을까/ 영월의 청령포에는 강물 위로 화염이 U턴을 하네/ 푸른 소나무 숲을 이글이글 타는 욕망의 불꽃이 안고 휘감아 도네/ 아 저 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요/ 두더지는 황하(黃河)를 탐하나 쬐그마한 제 배 채울 뿐이네/ 누가 투덜거렸나 쯧쯧/ 우체부 ‘가방’은 평촌(坪村)에도 갔지/ 인제를 지나 원통리(元通里)부터는 개천/ 쏟아져내려 덮칠 듯한 험준한 절벽밑 길이었지/ 개 한 마리 지나도 무너질 듯한 다리와/ 빗물 먹은 길바닥이 갈라지고 허물렁한 산길을/ 가다서다를 거듭했네/ 삽으로 마른흙을 떠 던지며 길을 다시 다지고/ 범람한 곳에 다리를 다시 놓는 흙투성이 공병(工兵)도 보았지/ 차에서 내려 진창을 휘감고 헛도는 트럭 장갑차/ 타이어 밑에 짚을 깔고 차를 밀었지/ 12시간 우중의 행군 끝에 평촌이 보였네/ 우체부 가방은 다시 ‘개(犬)고개’를 넘었지/ 가전리(加田里)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솟은/ ‘개고개’ 왼편에는 저 멀리/ 흰 거품을 뿜으며 산골을 굽이굽이 적시는 소양강 상류가 보이고/ 그 앞의 나즈막한 구릉 기슭에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순으로 진을 쳤네 박격포 12문을 방렬(放列)했네/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머리를 내어 멀리 지평선까지 투시할 수 있도록/ 호를 2층으로 파라구/ 포탄이 날아들면 자라처럼 머리를 옴츠려넣고 몸을 옹크려야/ 탄약도 충분히 준비해/ 중대장의 이런 다급한 소리 들었지/ 남북이 갈린 숨막히는 포격전도 겪었지/ 전쟁은 안 돼 총을 쏘지마를 내심으론 외치면서 보았지/ 사단 CP 후방에서 포물선의 포성이 메아리치고/ FDC 에서는 기어이 발사명령이 떨어졌네/ 발사준비 편각(偏角) 1635 고각(高角) 777 장약 20호!/ 1번 포수가 편각과 고각을 맞추고/ 2번 포수가 각도를 올렸다 내렸다 조정하고/ 3번 포수가 장약을 맡고/ 4번 포수가 포탄을 들어 포구(砲口)에 집어 넣으니/ 포강(砲腔)에 떨어져 바닥의 격침에 닿는 순간 쾅! 발사되네/ 병사들이 확 밀려와 덮치는 폭풍을 피해 몸을 옹크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조금 물러서네*/ 이 모두가 눈깜작할 사이/ 북쪽에서 날아오는 포격도/ 소련제 122미리 152미리 중중포(中重砲)가 잇달아/ 쾅쾅쾅 불길을 길게 내뿜고/ 120미리 박격포탄이 얼레가 돌듯 연발하네/ 쉿쉿 쉬르르 쉿 무겁고 쇠를 끊는 철사줄 같은 긴 연음이/ 고압선을 타고 내려오네/ 포격이다 호 속으로 피해라/ 병사들이 벙커 속으로 날쌔게 뛰어들고, 쾅!/ 토사가 무너져 내려 앞을 막네/ 흙먼지와 포연에 숨이 막힌 한 병사/ 쿵킁 흑 기침을 짐짓 참으면서 쓰러지네/ 어서 물 가져와, 물!/ 덜덜덜 떨고 있는 부상병을 붙들어안고 물을 멕이며/ 괜찮아 안심하라 몸을 흔드니/ 머리는 한쪽으로 쳐지고 힘이 빠져 사지가 느러지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네/ 고지의 턱을 칼금처럼 판 구불구불 긴 벙커에는/ 기관총 다발총 따따따 탕탕 따따따 쿵 쾅 백병전의 불구덩이로 변하네/ 대검을 뽑아 형제의 목을 노리고/ 긴 총검이 가슴을 찌르네/ 핏방울은 확확 튀어 얼굴을 뿌리고/ 포반(砲盤)이 갈라지고 포가(砲架)가 녹을듯 굽으러지며/ 포신(砲身)은 벌건 불굴뚝이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네/ 974고지에는 이틀만에 비로소 주먹밥과 물이 왔네/ 노무대원 아저씨들이 가풀막 산길을 내며 져올렸네/ 위생병들의 부축을 받고 내려가는 부상병들의 행렬/ 두 눈만 빠끔 내놓고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긴 자/ 흙투성 몸으로 막대기에 의지해 절뚝거리는 자/ 조금 성한 병사에게 엎이듯 끌려가는 자/ 들것에 누워 중얼거리듯 신음하며 내려가는 자/ 계곡에 머리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자/ 주검들이 고지를 덮고 널렸네/ 해골 바가지들이 공처럼 두굴두굴 굴러가다가/ 발 끝에 채여 시커멓게 불탄 돌무더기에 걸리네/ 두개골 속에 갇힌 바람이 휘파람을 부네/ 반듯반듯 바랜 평평한 이마 밑을/ 두 개의 눈구멍이 펑 뚫리고/ 아래 위의 잇발이 뭔가를 더 씹을 듯 벌리고 가지런해지네/ 탄피와 불발탄에 섞인/ 팔뼈 턱뼈 무릎뼈 갈비뼈 척추 토막/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빽’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 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죽치고 마주 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 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dor)를 들러쓴 주검들/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 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崔極 <朝鮮戰爭>(東京:光人社 2004) 참고. 6.25 관련 장면은 이 저서에서 많이 참고함.

Ⅳ DMZ//

야윈 엉덩이에서 춤추듯 덜렁거리는 가방 속에서/ 장총(長銃)은 막대기처럼 두 동강으로 부러지네/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네/ 남쪽의 일요일 새벽을 놀라게 한 소련제 T34의 캐터필러도/ 종이네 납작 구겨지네/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헬멧을 쓰고 검은 긴 장화를 신은이/ 임진강 입구에서 철원김화를 거쳐 고성 쪽으로/ 위도의 높낮이를 더듬는지 예사롭지 않네/ 마치 제 소유인 것처럼 발걸음 뚜벅뚜벅 당당하네/ 총을 겨누어 맞선 중간을 긋고/ 남북으로 2킬로씩 물러나게 하네/ 우악한 손이 쇠막대기를 차례로 박아나가고/ 묵직한 쇠망치로 탕탕 치니/ 허벅살처럼 물렁물렁한 땅에 깊이 들어가네 아프네/ 또 어디서 무장한 헬멧이 돌돌 말아온 쇠그물 다발을 세워서 돌리며/ 서에서 동에까지 144 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허리를 잘라 살붙이들 가르고 찢어놓으니/ 아픔 슬픔 원한 피눈물의 소용돌이/ 구름과 바람과 하늘은 남북이 없네/ 고니는 높은 소나무 가지의 둥지에 알을 낳고/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오가며 놀고/ 푸른 숲속 백로의 하얀 몸빛 유난히 눈부시지만/ 철조망 안의 DMZ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 탕 치고 튕기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가네/ 축구 선수들 발 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한 군데 가만히 머물지 못하지/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지/ 네가 멘 그 우체부 가방의 불룩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지층의 깊은 벽을 뚫으면/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오줌발처럼 새어나오고/ 아이들처럼 응석부리고 흥얼대면서/ 곤히 잠자는 이 깨우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네/ 그러나 해골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지 사막에서도 바다에서도/ 도글도글 토글토글 똥글똥글 통글통글/ 사막을 깊숙이 떠서 동그랗게 말고/ 바다를 두세 겹 비단으로 거두어 말아 굴러가네/ 바람 개스 굶주림 절망 포화(砲火) 핵버섯구름도/ 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 호주의 모랫바람에 숨구멍이 막히고/ 2004년던가 지중해 신화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바람둥이 파리스가 아프로디테 누나에게 준/ 탐스러운 사과도 맛보았지/ 그 사과 아내와 나누니/ 지중해의 물빛으로 익은 신화의 깊음이 서걱거리네/ 두 눈을 가리고 오른 손에 ‘저울’을/ 왼손에 시퍼런 칼을 든 여신 테미스도 힐끗 보았지/ 지진의 무너뜨린 암석을 들어올리고/ 깨어진 벽돌의 틈을 비집고 빛살처럼 스며들어/ 숨길을 빠끔 빠끔 튀웠지만/ 수마트라 이체에서도 쓰촨에서도/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 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 2천 7백미터 백두산 맑은 물을 한 번 돌고/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 호수 위를 굴러/ 8천 848 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공은 스스로를 지우네/ 굴러가면서 제 온갖 몸짓을 지우네/ 날아가면서 날아간 길을 지우네/ 폭발과 살육 속에서도/ 숨 쉬며 지우네/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네/ 사무실의 안팎과/ 도시의 미로에 가득차 넘실거리는 것/ 만지거나 볼 수는 없으나/ 나무와 꽃을 가꾸듯이 기르고 있는/ 300층을 300층으로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네/ 피구슬 번호의 한 자 한 자/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

Ⅴ 모데라토//

공자님은 장난감 나무 수레바퀴를 혼자 끙끙거리며 돌리시고/ 예수님은 새끼 나귀 등에 안장도 없이 발끝 걸고 오르내리시고/ 부처님은 보리수 밑의 결가부좌로 눈떴다 감았다 하시네/ 너는 흙탕물 속에서 아직 칠삭둥이로 물장구 치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툭 떨어져 굴러가네, 유리 조각의 ‘인장’(印章)/ 마루바닥의 틈새로 빠지기 전에 얼른 집어 꼭 쥐어 보네/ 다섯 손가락에 힘을 줘 마디마디 뭔가를 확인하듯이/ 포화(砲火)에서도 불붙지 않고/ 칼 맞아도 금 가지 않음을/ 지중해 땅속의 빨간 장미뿌리도/ 아프리카 밀림 속 코끼리의 상아도 아닌,/ 쓰레기로 내다버린 고물 헬리콥터의 유리조각/ 둥글고 매끈하게 자르고 다듬어 새겼네/ 새끼 손가락보다는 조금 더 동그란/ 아버님 짓고 어머님 품에 안고 기른 이름/ 지금은 모서리 닳고 획도 희미하네/ 제라늄 꽃빛 인주를 듬뿍 묻혀/ 꾹 눌러도 네 나이만큼 몽글었네/ 억새 바래기 무성한 풀덤불 속의 숨은 총탄/ 따따따 딱 쿵 딱 쿵 쾅 쾅/ 언덕 밑 흙고랑의 잡초 속으로 나무토막처럼 튕겨 날아갔네/ 넓적다리 뚫리고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눈썹을 가로질러 긁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 피의 파편을 둘러썼네 죽음의 그물 둘러썼네 그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멘 이는?/ 들것의 앞뒤 채를 덥석 잡고 들어올린 이는?/ 길가의 저 바위돌일까 풀꽃일까/ 그 쪽의 팔목을 접고 머리를 잘 받쳐 바로해/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포탄이 텐트를 물고 날아갈듯이 펄럭이는 야전 막사에서/ 수술의 칼을 잡은 이는 누구일까/ 깁스 붕대 속의 미라에게 계속 맥박이 살아 발딱발딱/ 뛰도록 신비의 바늘을 찌른 손은 누구일까 포격에 쫓기면서/ 경복궁 옆의 수도육군병원까지 실어 나른 이는 누구일까/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 이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포성을 맞으며 새벽을 떠난 후송 열차는 느릿느릿/ 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 닭도 울지 않는 달구벌에 내려졌네/ 전선에서 몰려든 부상병들이 누더기처럼 광장을 다 덮었네/ 하늘의 은하수처럼 빽빽하게 쏟아부었네/ 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네/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추위가 추위에 눌려 지층(地層)으로 켜켜이 쌓인/ 달구벌의 겨울밤은 차라리 원시적 아픔이었네/ 눈물과 신음이 얼어붙는 북극 도시였네/ 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 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 다리 잘린이 눈 잃은이 부러진 척추/ 잘린 발목 부여잡은이 팔 없는 어깨죽지/ 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탑 속에 유폐된 탄식도 들은 제우스, 이곳엔 없네/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가을 들판을 덮은 온갖 풀벌레 울음의 잔치/ 지옥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Ⅵ 지금 여기//

무리들이 끌고 온 간음한 여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네/ 그때 치솟아 가래처럼 목구멍에 뭉클 걸린 신음/ 으음 으음 음 으으이 으윽 윽/ 죽음에 꾹 눌려 꿈틀거린 숫한 유언을/ 눈(雪)에 쓰니 다 녹아 버리네/ 바람이 물살에 뿌리고 달아나네/ 물 건너 이민 간 누나의 발자국은 하늘이 지우네/ 어둔 병실 구석에서 콜록거리다가 종적을 감춘 아버지/ 모깃불 피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밤하늘의 손주 별을 찾던 백발의 머리/ 든 채로 화석이 된 할머니/ 아들 만나려고 강 가의 나룻배 기다리는 동안/ 넋을 잃고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삿 삿 삿 삿각삿각삿각……/ 어디서 로봇 전사들의 군단이 몰려오네/ 먼 태풍 소리가 아니네 점점 다가오는/ 하낫둘 하낫둘 금속성 구령의 불협화음/ 복제 병사의 군단이 몰려오네/ 한손에는 단총 한손은 기관총/ 가슴에는 과일처럼 달린 수류탄 포탄들/ 손목의 맥박이 발사명령 신호를 받아 반짝하면/ 그들은 엎드리지 않네 선 채로/ 따따따따 타타타타 딱탕 딱탕/ 아버지 로봇과 아들 로봇/ 울돌목의 일자진 뒤에 배치한 가병(假兵)들이네/ 큰 로봇이 대장선의 좌현을 막아/ 칼을 빼고 다가오는 적병을 돌로 찍네/ 큰 로봇이 노를 맡고 작은 로봇이 돌을 들었네/ 칼을 빼어든 적의 배에 큰 로봇이 뛰어들/ 때, 적의 칼을 맞아 물 위로 꼬꾸라지네/ 작은 로봇이 애비를 벤 적의 머리를 돌로 치고/ 다른 적병이 그의 허리를 베었네*/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 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 저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 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 으슥한 흥안령 기슭을 돌아 밤의 두만강을 건넌/ 굴라그 구라게 굴라그 구라게/ 갓 속에서 촉수의 쇠그물 늘여친 クラゲ 굴라그/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 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 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 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 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 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 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 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 올라가 숨네/ 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 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기사 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찮게 그런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 물팍이 어링께 그라재/ 쓰잘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 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 미쳤는갑소**/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 가끔씩 닭이 보이지 않으면/ 소가 목 빼고 두리번거리고요/ 소가 한 구석에 엎디어 있으면 닭은 소막까지/ 가서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뒤뚱뒤뚱 돌아나오지요/ 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 저녁 바람이 이렇게 드세니 동백꽃도 뺨따구 맞듯 다 저버리겠어 진 꽃잎은 땅에서도 서성거리지 못해 바다로 쓸려 가버리겠고 동백꽃은 왜 선혈처럼 그렇게 붉고 붉은지…/ 그러면 보자 그 여자분 열 아홉 살 영감님 나이 수물 한 살에 만나가꼬 용초도에 동백꽃 필 때 동백나무 숲에서 오 년마다 미아이하기로 하고 마 헤어졌다는 그런 말씀 같으신데… 참말로 세상에 그런 기구한 곡절도 있다니 소매자락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말도 있드키 시상 오래 살고 볼 일임더****/ 이러히 그들의 연애 동백꽃도 붉네/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 지금 어디메 길바닥을 솟은 돌부리 빼시고 꽃씨/뿌리시네 병원 묘지 양로원 숲 바위 사이사이에/ 복권처럼 수상기 숨기시고 안테나 세우시네/ 휴대폰 좀 빌려줘 하나님과 통화하고 싶네/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 때때옷 꼬마 엄마의 손 꼭 잡았네/ 어머나 어쩌믄 저리도 쏙 빼닮았나/ 뭍과 섬 하나로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梁]/ 동과 서 이어 백성 지킨 그 물길 더욱 푸르네/ 한 뿌리에서 뿜는 압록 한강 영산 낙동/ 멀리 태평양 대서양 감쌌네/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 이브의 손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네//
* 김훈 <칼의 노래> 93쪽 참고. 임란의 울돌목 해전에 장흥 백성 정명섭과 해남의 오극신 부자가 고깃배를 몰고 참전하여 오극신 부자와 정명섭이 전사했다.
** 이대흔의 시 ‘아름다운 위반’
*** 서정우의 시 ‘소 닭 보듯이’에서.
**** 김원일의 ‘용초도의 동백꽃’에서.



문덕수(文德守, 1928년~2020년) 시인
경남 함안 출생이며, 호는 심산(心山)‧청태(靑苔)이다. 경남교원양성소를 거쳐 홍익대학교 국어국문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홍익대 교수 및 한국 PEN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문예신문』에 시 「성묘」를 발표하였으며,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홀》, 《선·공간》, 《새벽바다》, 《다리 놓기》, 《조금씩 줄이면서》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많은 시집과 평론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현대시인상, 펜문학상, 국민훈장목련장,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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