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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가만히 외우고 싶고 베끼고 싶은 65편의 시

안도현 엮음

모악출판사, 12,000원

 

 

 

젓갈 · 이대흠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가을소묘 ·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메꽃 · 이안

뒤뜰 풀섶/ 몇 발짝 앞의 아득한/ 초록을 밟고/ 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 메꽃 한 점/ 건너다보다// 문득/ 저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것이//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 키다리 명아주 목덜미를 한번쯤/ 없는 듯 꽃 밝히기를/ 바래어 보는 것이다//

 

우는 손 · 유홍준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 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나무에 대하여 · 이성복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를 고스란히 제 뿌리 밑에 묻어 두고, 언젠가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마 ·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따뜻한 비 · 이현승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화학선생님 · 정양

중간고사 화학 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 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 그러시고는 다음 차례 점수를 매기셨다/ 모두들 선생님의 장난말인 줄로만 여겼는데/ 며칠 뒤에 나온 내 성적표에는 화학 과목이/ 정말로 100점으로 적혀/ 그 점수가 영 믿기지 않았지만/ 백발 성성한 지금도 이 세상에는/ 그른 일들이 옳은 일보다 많다는 걸/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고향 ·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여름 끝물 · 문성해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 얽은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 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 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조를 갖고 있다//

 

그믐 · 김수열

한때 너를 아프게 물어뜯고 싶은 적이 있었다//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라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휘영청이라는 말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하관 · 천수호

아버지께서 업혀 왔는데 / 내려보니 안개 였어요/ 아버지 왜 그렇게 쉽게 풀어지세요./ 벼랑을 감추시면/ 저는 어디로 떨어집니까//

 

9월 · 고영민

그리고 9월이 왔다/ 산구절초의 아홉 마디 위에 꽃이/ 사뿐히 얹혀져 있었다./ 수로를 따라 물이 반짝이며/ 흘러간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누군지 모를 당신들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다 보냈다./ 햇살 곳곳에 어제 없던/ 그들이 박혀 있었다/ 이맘때부터 왜 물은 깊어질까// 산은 멀어지고 생각은 더 골똘해지고/ 돌의 맥박은 빨라질까/ 왕버들 아래 무심히 앉아/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이 와/ 내 손끝 검은 심지에 불을 붙이자/ 환하게 빛났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빗소리 곁에 · 장석남

1/ 빗소리 곁에/ 애인을 두고 또/ 그 곁에 나를 두었다// 2/ 빗소리 저편에/ 애인이 어둡고/ 새삼새삼 빗소리 피어 오르고// 3/ 빗소리 곁에/ 나는 누워서/ 빗소리 뒤에다 발을 올리고/ 베개도 자꾸만 고쳐서 베고// 4/ 빗소리 바람에 빗소리를 두르고/ 나는 누웠고/ 빗소리 안에다 우리 둘은/ 숨결을 두르고//

 

의자 · 차성환

의자는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 형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궁둥이로 깔아뭉갠다 수많은 의자 위에서 사춘기를 보냈고 나는 앉아있기 위해 태어난 거 같기도 하다 의자는 계속 앉은 자세이고 늦게 태어난 나는 의자에 몸을 맞춘다 의자에 바퀴를 달고 앉은 채로 나는 어딘가로 간다 다시 태어나면 의자가 되어 너를 앉혀 주고 싶다 다 의자에게 배운 말이다 의자는 신나고 즐겁고 지루하고 끔찍하고 슬프게 앉아있다 의자는 책상과 상관없이 앉아있다 의자는 앉아서 잠이 든다 다시는 일어날수 없을 때까지 앉아있다//

 

먹기러기 · 손택수

달에 눈썹을 달아서/ 속눈썹을 달아서/ 가는 기러기떼/ 먹기러기떼/ 수묵으로 천리를/ 깜박인다/ 오르락내리락/ 찬 달빛/ 흘러보내고/ 흘려보내도/ 차는 달빛/ 수묵으로/ 속눈썹이 젖어서//

 

종로일가 · 황인찬

새를 팔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새를/ 사는 사람이 없었다/ 새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물가에 발을 담그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다// 종 치는 소리가 들리면// 새가 종에 부딪쳤나 보다/ 하는 생각이 지워진다// 할아버지,// 하고 아이가 부르는데 날 부르는가/ 해서 돌아보았다//

 

합일 · 김해자

거기, 밖이 무너지고/ 여기, 안으로 삼켜져/ 눈 감는 음절들/ 거기까지 너였다,/ 여기까지 나였다,/ 경계가 차츰 무뎌지고 무너지다/ 문득 모든 말들이 끊긴다/ 하지 못한 말,/ 이미 한 말,/ 들이키고서야 합쳐지는 입과 입/ 여기서부터 검은 숲,/ 침묵이 범람한다/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나조차 잊어버려야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너조차 잊어버려야 너에게 들어갈 수 있다//

 

이런 낭패 · 도광의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간밤에 마신 술 탓에/ 새순 나오는 싸리 울타리에/ 그만 누런 가래 뱉어놓고 말았다/ 늦은 귀향 길 안쓰런 마음 더해가는/ 고향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실수에/ 무안해 하는데/ 때마침 철 늦은 눈이/ 내 허물을 조용히 덮어주고 있었다//

 

옥이 · 이병초

밥 퍼낸 무쇠솥 바닥을/ 초승달 같은 놋달챙이로 닥닥 긁어서/ 주먹밥처럼 뭉쳐온 깜밥/ 놀장놀장 눌은 빛깔에 불티 뒤섞인/ 그 차지고 고소한 단맛을/ 조금씩 떼어먹다가/ 목 당그래질이 뭔지도 모르고 떼어먹다가/ 배 아프다고 꾀를 쓰면/ 가시내는 자취집 장광에 깔린/ 흙기와 조각을 구워와 내 배에 올려놓고/ 깜밥 묻은 손끝을 떨었다//

* 깜밥: 전라도 방언으로 솥바닥에 눌어붙은 딱딱한 누룽지.

* 놋달챙이: 솥바닥을 하도 긁어서 초승달처럼 끝이 닳은 놋숟가락.

 

저무는 우시장 · 고두현

판 저무는데// / 안 팔아요?// ,/ 어미하고/ 같이 사야만 혀//

 

소년에게 · 박성우

소년이여, 작은 창 열고 나와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어라 여름부터 와 있었을 소녀에게 스웨터를 내주어라 행여라도 털장갑은 내주지 마라 소녀를 자전거 뒤에 태워 그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게 하라//

 

모란이 피네 · 송찬호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왔어요// 그런데 얘야,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혹,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긴 오뉴월 한 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 주려고,/ 꽃 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는 모란보자기//

 

허공 · 이덕규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 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 봐/ 조바심으로 오그라 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병든 짐승 · 도종환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 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발 · 권기만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물가재미식해 · 김명인

삭은 혀끝이 거머쥘 감칠맛 어디 있겠냐고/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그 할머니/ 구황하려 매운 손끝으로 버무려 온 물가재미식해/ 한 젓가락 듬뿍 퍼 올리고 싶다/ 흔하디흔한 물가재미 큼직큼직 채 썰어/ 무며 조밥, 마늘, 고춧가루에 비벼 간 맞춘 뒤/ 오지에 담아 아랫목에 두면 며칠 새/ 들큰새콤 퀴퀴하게 삭아 있던 밥 식해,/ 왜 오묘함은 가슴과 사귀는 좁쌀 별인지/ 밤새워 푸득거리는 눈발 한 채여도 안 서럽던!//

 

도토리들 · 이봉환

어디 가을이 얼만큼 왔나 궁금해/ 산에 갔더니/ 키 작은 졸참나무 도토리들/ 바위틈에 수월찮이 나앉나서/ 꼭 포경수술한 동무지간들/ 목욕탕에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거나 말거나/ 큰놈 작은놈들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가을볕 따글따글하니 쬐고들/ 있습니다요.//

 

그늘에 묻다 · 길상호

달빛에 슬며시 깨어보니/ 귀뚜라미가 장판에 모로 누워 있다/ 저만치 따로 버려둔 뒷다리 하나,/ 아기 고양이 산문이 운문이는/ 처음 저질러놓은 죽음에 코를 대고/ 킁킁킁 계절의 비린 냄새를 맡는 중이다/ 그늘이 많은 집,/ 울기 좋은 그늘을 찾아들어선 곳에서/ 귀뚜라미는 먼지와 뒤엉켜/ 더듬이에 남은 후회를 마저 끝냈을까/ 낱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진물처럼 노랗게 배어나올 때/ 고양이들은 죽음이 그새 식상해졌는지/ 밥그릇 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긴다/ 나는 식은 귀두라미를 주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었다//

 

그믐오리 · 이중기

청둥오리 한 마리 잡아/ 싸리울바자에 걸쳐놓고 잠시 뒷간 간 사이/ 그걸 담 너머 보고 후다닥 달려온 재종숙 신달복 씨/ 오리 혓바닥 냉큼 뽑아 뒤란으로 가버렸다// 시부적시부적 털 뜯어낸 뒤에/ 어린애 경기(驚氣)에 좋다는 그걸 뽑아내려고/ 청둥오리 주둥이 벌려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어라, 재종질이 그만 뜨악해져서/ 거참 희한한 일이네, 하고 구시렁거리자// 신달복 씨, 시침 뚝 떼고 앉아 능청스럽게/ 와 그카노?/ 이 오리, 혀가 없는데요/ 예끼, 그믐오리에 무슨 혓바닥이 있노/ 보름오리라야 그거라도 있지// 뒤란 매화나무 가시에 꽂혀 꾸들꾸들/ 마르고 있을/ 그 그믐오리 혓바닥//

 

반 뼘 · 손세실리아

모 라이브 카페 구석진 자리엔/ 닿기만 해도 심하게 뒤뚱거려/ 술 쏟는 일 다반사인 원탁이 놓여있다/ 거기 누가 앉을까 싶지만/ 손님 없어 파리 날리는 날이나 월세 날/ 나이든 단골들 귀신같이 찾아와/ 아이코 어이쿠 술병 엎질러가며/ 작정하고 매상 올려준다는데/ 꿈의 반 뼘을 상실한 이들이/ 발목 반 뼘 잘려나간 짝다리 탁자에 앉아/ 서로를 부축해 온 뼘을 이루는/ 기막힌 풍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반 뼘쯤 모자란 시를 써야겠다 생각한다/ 생의 의지를 반 뼘쯤 놓아버린 누군가/ 행간으로 걸어 들어와 온 뼘이 되는// 그런//

 

탁! 탁! · 이설야

마을버스에서 내린/ 맹인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 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 오른손에 움켜진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 ! ! 칠 때마다 땅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 찌르며/ 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 집을 찾아가는 지팡이// 무수한 길들이/ 종아리 속에 뻗어있다//

 

고약한 사이 · 조성국

욕부터 튀어 나온다/ 앙잘앙잘 옛일 돌이켜보면/ 일계급 특진이 걸린/ 현상수배전단/ 점퍼 안주머니 깊숙이 구겨 넣고/ 밤마다 잠복하던/ 말단형사 꼴통 새끼!/ 이따금 술 취해 와서/ 빨갱이자식 내놓으라고/ 가살스럽게 눈알 부라릴 적마다/ 봉선화 우북한 뒤란/ 장독대에 한껏 웅크렸다는/ 엄니를 생각하면/ 우수수 만정이 다 떨어지는/ 개 같은 놈의 새끼!/ 상스럽다 하신다 어머니는/ 아가, 깨복쟁이 불알친구들끼리 그러면 못 쓴다며/ 되게 나무라신다//

 

물 안의 여자 · 김근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 안의 여자가 길어올린 우물물 물 안의 물 너무 많아 없는 거나 다름없네/ 어느날 물 안으로 들어온 사내와 눈 맞아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아기를 낳았는데/ 물 안의 집 떠다니는 방구들에 차마 눕히지 못한 물 안의 아기 물 밖으로 떠난 아비 찾아 저 혼자 떠올랐네/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끝도없이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 안에서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는 물 안의 여자 얼굴은 여태도 잘 길어올려지지 않네//

 

동담치 · 육근상

처음은 검은색이었는데/ 강물 거슬러 오르는 꺽지 보내 비늘빛 그려 넣었다// 여름 이겨낸 바람이 곧게 가지 세우고 소나무처럼 잠깐 서있다 고샅으로 사라졌다 미루나무가 서쪽으로 휘어진 까닭은 새떼가 노을 몰고 우르르 내려앉았기 때문이라 했다// 벌겋게 익은 강이 김 모락모락 피워 올려 가을 다 흘러가버렸다 쪽창 열고 동담치(東譚峙) 헤집어 보라 일러두었다 밤새껏 머뭇거리다 돌아갈 길 묻던 등 굽은 노인이 큰기침 몇 번 하자 수런거리던 이파리들이 뒤뜰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꽃잠 · 김성규

어미 소는 막 태어난/ 새끼를 핥고 있었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햇빛 속에// 꽃밭에/ 누워/ 잠에 빠진/ 송아지/ 혓바닥으로/ 핥아주면/ 마당을 뛰어다니는/ 바람 속에/ 구름 아래/ 누워/ 일어나지 않는/ 송아지/ 혀에서/ 붉은 꽃 필 때까지// 어미 소는/ 죽은 새끼를/ 핥고 있었다//

 

집에 못가다 ·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11월 · 서정춘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때기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

 

한점 해봐, 언니 · 김언희

한점 해봐, 언니, 고등어회는 여기가 아니고는 못 먹어, 산 놈도 썩거든, 퍼덩퍼덩 살아 있어도 썩는 게 고등어야, 언니, 살이 깊어 그래, 사람도 그렇더라, 언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썩는 게 사람이더라, 나도 내 살 썩는 냄새에 미쳐, 언니, 이불 속 내 가랑이 냄새에 미쳐, 마스크 속 내 입 냄새에 아주 미쳐, 언니, 그 냄샐 잊으려고 남의 살에 살을 섞어도 봤어, 이 살 저 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던 살이 냄새만 맡아도 돌 것 같은 살이 되는 건 금세 금방이더라, 온 김에 맛이나 한번 봐, , 지금 딱 한철이야, 언니, 지금 아님 평생 먹기 힘들어, 왜 그러고 섰어, 언니, 여태 설탕만 먹고 살았어?//

 

그렇게 · 김명수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모습/ 한결같이/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 한결같이/ 향기와 푸름과/ 영원함은 그렇게/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나는 벌써 · 이재무

삼십 대 초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 애오라지: ‘겨우’를 강조 또는 ‘오로지’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사이 · 김수복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이가 참 좋다// 나와 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새들과 새들 사이/ 지는 해와 뜨는 해 사이//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우물 · 이영광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늙음 ·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잔설 · 이정록

산 채로 털을 뽑다가 오리를 놓쳤다/ 털 뽑던 손아귀로 달포쯤 모이를 줬다/ 잔설의 몸뚱어리가 밥그릇 멀리 서성거렸다/ 깃털이 뽑혀나간 자리마다 얼음이 박혀 있는지/ 멍이 들어 있었다 물을 끓이고 잔털을 마저 뽑아내자/ 오죽 같은 무릎마디에서 피리소리 새어나왔다/ 꽥꽥거리던 트럼펫 안에 검은 피가 고여 있었다/ 뒤뚱뒤뚱 신물이 올라왔다 발톱이 찍혀 있던/ 마음 안팎에서 새싹처럼 소름이 돋았다//

 

늪의 내간체를 얻다 · 송재학

너가 인편으로 붓틴 褓子에는 늪의 새녘*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믈 우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웅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곡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잇다 수면의/ 믈거울을 걷어낸 褓子 솝은 흰 낟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눈엽*처럼/ 하늘거렸네 褓子와 매듭은 초록 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머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內簡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대되*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한 소솜*遊禽/ 적신 믈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만한 고요의 눈씨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褓子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을 늪을 褓子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어름이 너무 차겠지 向念//

* 새녘: 동쪽, *눈엽: 새눈, *대되: 모두, *소솜: 솟음

 

사춘 · 정끝별

말랑말랑한 곳에 털이 날 무렵/ 달리는 발바닥에 잔뿌리가 내릴 무렵/ 손거울에 돋는 꽃눈을 세다 풋잠에 들 무렵// 뒷다리 떨며 뒷담을 기웃댈 무렵/ 꽃술에 노래를 꽂고 밥상에 앉을 무렵/ 때 묻은 풍선껌을 터뜨리다 토막잠에 들 무렵// 날갯죽지에 바람이 들 무렵/ 창궐하는 것들과 한패가 될 무렵/ 부푸는 덤불숲을 헤치다 등걸잠에 빠져들 무렵// 사로잡힌 일진(一陳)의 첫 봉오리들//

 

석유 · 송경동

어려선 그 냄새가 그리 좋았다/ 모기를 죽이는 것도/ 뱃속 회충을 죽이는 것도 그였다/ 멋진 오토바이를 돌리고/ 삼륜차 바퀴를 돌리고/ 누런 녹을 지우고 재봉틀을 매끄럽게 하던/ 미끈하고 투명한 묘약/ 맹탕인 물과는 분명히 다르고/ 동동 뜨던 그 오만함도, 함부로 방치하면/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리던 그 가벼움도 좋았다/ 알라딘의 램프 속에 담겨진 것은/ 필시 그일 거라 짐작하기도 했다/ 개똥이나 소똥이나 물레방아나/ 나무장작과 같은 신세에서 벗어나/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기름때 전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도/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 쨍한 사랑 노래 · 황동규

그대 기척 어느덧 지표(地表)에서 휘발하고/ 저녁 하늘/ 바다 가까이 바다 냄새 맡을 때쯤/ 바다 홀연히 사라진 강물처럼/ 황당하게 나는 흐른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 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

 

서릿발 · 송종찬

담배공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담배를 끊으시려/ 은단을 자주 드셨다// 붉은 마리화나를 피우던/ 나무들이/ 금단현상인 듯/ 잎을 떨구고 있다/ 빈 가지에 맺힌/ 은단같은 서릿발// 세상과 세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점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한때는/ 불꽃의 사금파리였을// 오십 넘어/ 노안은 찾아오고/ 멀리도 가까이도/ 볼 수 없는 지점의/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것들//

 

벼랑의 나무 · 안상학

숱한 봄/ 꽃잎 떨궈/ 깊이도 쟀다// 하 많은 가을/ 마른 잎 날려/ 가는 곳도 알았다// 머리도 풀어헤쳤고/ 그 어느 손도 다 뿌리쳤으니/ 사뿐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신발만 벗으면 홀가분할 것이다//

 

꽃 핀 저쪽 · 최정례

가끔은/ 나무 뒤에서 사슴이 뛰어나오더군/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영/ 튀어나오지 않으면 어쩌냐// 그래도 한 번쯤은 튀어나오지 않겠어요// 사슴이 튀어나와 어리둥절했고/ 그 순간/ 나도 사슴의 뿔을 뒤잡어쓰고 있었다구요/ 무거운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가족의 시작 · 김주대

여자가 아기의 말랑한 뼈와 살을 통째로 안고/ 산후조리원 정문을 나온다 아직/ 아기의 호흡이 여자의 더운 숨에 그대로 붙어 있다/ 빈틈없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내가/검지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 아기의 잠든 손이 사내의 굵은 손가락을/ 가만히 움켜쥔다//

 

별이 사라진다 · 천양희

나는 1분에 16번 숨쉬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장은 하루에 10만번씩 뛰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죽을 때 빠져나가는 내 무게는/ 21그램인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1분에 0.5리터 공기를 마시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성은 7년마다 한번씩 바뀌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하루에 12번 웃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별은 세상에 마음이 없어 사라지고/ 세상에 마음이 있어 사람들은 무섭게 모여든다//

 

풍장 · 이동순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으로/ 부모 시신을 말에 묶어서/ 채찍으로 말 궁둥이 힘껏 때리면/ 그 말 종일토록 달리다가/ 저절로 말 등의 주검이 굴러떨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무덤이라네/ 남루한 육신은/ 주린 독수리들 날아와 거두어가네/ 지친 말이/ 들판 헤매다 돌아오면/ 부모님 살아온 듯/ 말 목을 껴안고 뺨 비비며/ 뜨거운 눈물/ 그제야 펑펑 쏟는다네/ 눈 펄펄 오는 아득한 벌판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자식들 있네//

 

그루터기 · 박승민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별 닦는 나무 ·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배롱나무의 안쪽 · 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 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을 지나 천우사화(天雨四花)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음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12월 ·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억새풀 · 이윤학

암소가 뜯어먹은 억새풀/ 암소 이빨 자국을 밀어붙인다/ 암소 이빨 자국을 뿌리에서/ 최대한 멀리로 밀어붙인다// 연한 억새풀 억세게/ 양날을 세운 칼날에/ 톱날을 갈아 세운다// 칼끝이 잘린 칼자루 속으로/ 이슬방울이 들어가 숨는다/ 이 세상은 칼집인 것이다//

 

노독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등꽃이 필 때 · 김윤이

목욕탕 안 노파 둘이 서로의 머리에 염색을 해준다/ 솔이 닳은 칫솔로 약을 묻힐 때 백발이 윤기로 물들어간다/ 모락모락 머릿속에서 훈김 오르고 굽은 등허리가 뽀얀 유리알처럼/ 맺힌 물방울 툭툭 떨군다 허옇게 세어가는 등꽃의/ 성긴 줄기 끝, 지상의 모든 꽃잎/ 귀밑머리처럼 붉어진다/ 염색을 끝내고 졸음에 겨운 노파는 환한 등꽃 내걸고 어디까지 가나/ 헤싱헤싱한 꽃잎 머리 올처럼 넘실대면 새물내가 몸에 배어 코끝 아릿한 곳/ 어느새 자욱한 생을 건넜던가 아랫도리까지 겯고 내려가는 등걸 밑/ 등꽃이 후드득, 핀다//

 

 

 

[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 - 가만히 외우고 싶고 베끼고 싶은 / 안도현 엮음

6월말 제주 시인의집에 들렀을 때 골라 온 시집. 해무가 짙게 드리웠던 조천 앞바다. 손세실리아 시인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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