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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주요한 시인

부흐고비 2021. 10. 25. 09:12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 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四月)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이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여린 기생의 노래, 뜻 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우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大同江)을 저어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靑年)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월간 《창조(創造)》 1919년 2월호(창간호)

조선 / 주요한
어떤 이는 무리진 달을 사랑하고/ 안개 끼인 봄밤을 즐기지마는―/ 어떤 이는 봄물에 드린 버들개지를/ 황혼의 그윽한 그림자를/ 오동잎 떨어지는 가을을/ 소 소리 처량한 가을의 저녁을/ 떠나는 목선의 배따라기를/ 그 끊였다 잇는 곡조를 사랑하지마는/ 오, 조선의 자연이여 오직 나는/ 너의 위대한 여름을 껴안으련다.// 논물에서 떠오르는 김도 뜨겁고/ 붉은 산에 쬐이는 햇빛은 더 붉어/ 솔나무 향기가 코를 찌르고/ 석양 맞은 황소의 큰 울음 할 제/ 아아, 너의 홍수와 소낙비와/ 기운찬 바람 뜨거운 바람 돌개바람/ 번갯불 우뢰소리 뭉게뭉게 오르는 구름/ 산과 골짜기 뻗어 나가는 산맥들과/ 또 시냇물과 다리와 나룻배와/ 기심꾼의 구슬땀과 노랫가락/ 그늘진 나무와 샘물과 폭포와/ 바위에 기는 덩굴과 우거진 수풀// 보라, 저기 아침 해가 땅을 물들이니/ 벌판으로 가득한 곡식들의 행진곡/ 수수는 깃발 들고 벼는 발을 맞춰/ 물결처럼 군대처럼 열을 지어서/ 앞으로 앞으로 영원한 `희망'으로/ 조선사람의 가슴을 채워주는―// 아, 여름은 나의 고향 나의 조국/ 그의 품은 나를 단련하는 풀무 불/ 해외에 떠다닐 때에 생각을 이끌어 가고/ 일에 지쳐 곤할 때에 새 기운을 돋우는/ 나의 집, 나의 어머니, 조선의 여름―// 어떤 이는 봄과 달을 사랑하고/ 처량한 가을을 노래로 읊지마는/ 조선의 자연이여, 오직 나는/ 너의 위대한 여름을 껴안으련다.//

이야기 / 주요한
고운 손에 새로운 `날'을 든 봄이/ 초록색 긴 치마를 입고 걸어옵니다./ 눈­속에서 생겨난 토끼 새끼가 봄을 맞으러 산기슭에서 벌판으로 뛰어갑니다/ 아―봄이 옵니다. 햇빛에 반뜩이는 시냇물 우에, 주둥이 샛노란 병아리 빽빽 하는 소리를 따라, 산에도 들에도 한결같이 즐거운 노래를 퍼치는 봄이 올 적에/ 그리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세계 우에 웃으면서 나타날 적에/ 네 바구니를 가진 네 처녀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한 가시덤불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는 더 없는 향기를 피우는 만첩꽃이 바다의 물결같이 가득히 핀 것이 보입니다/ 용감한 네 처녀는 돌 많고 엉키는 넉지 많은 산비탈을 얼마 못 올라가서/ 가시나무로 세운 담장을 만났습니다/ 첫째 처녀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가시덤불로/ 나의 보드라운 살을 뜯지 않고는/ 이 산 우에 못 올라간다 하면/ 나는 싫소, 나는 올라가지 않겠소./ 그까짓 꽃은 가지고 싶지 않소’ 하고/ 옆구리에 끼었던 바구니를 가시넝쿨에 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세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아까 떠나온 산기슭 마른 흙 우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처녀는 그들의 흰 치마와 아름다운 뺨이 찢어지고 붉은 피에 물들기까지 애를 써서/ 더욱 더욱 우르르 가시담장을 넘어 올라갔습니다/ 얼마 더 안 가서 그들은 시꺼먼 물이 죽은 듯이 고인 넓은 못가에 다다랐습니다/ 그 못 속에서 아지 못할 손이/ 무서운 소리와 함께 손짓하여 부르는 것도 같고 저편 언덕에는 깊은 안개 속에/ 날샌 두 눈이 말없이/ 이편을 노려보는 듯도 합니다/ 어디선지 조고만 배가 젓는 이도 없는데 저절로 언덕에 와 닿았습니다. 둘째 처녀가 말합니다/ ‘저 물은, 나의 깨끗한 살을 더럽힐 터이지,/ 저 되인 안개는 나의 숨을 막으려 한다/ 무엇하러 이런 데까지 찾아왔을꼬/ 아까 그 애와 함께 돌아갈 것을’/ 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를 검은 물 우에 내어던지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두 처녀 앞에서 없어지고 산기슭 마른/ 흙 우에 한 걸음 먼저 떨어진 그의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두 처녀는 서슴지 않고/ 저절로 물 우에 떠가는 배를 잡아타고/ 안개와 내가 자욱한 언덕에 나렸습니다/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밤중 같은 어둠 속으로/ 길도 없는 산골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그것은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화려하게 핀 꽃들이 어둠을 뚫어, 그렇게 똑똑히/ 바라보이는 까닭이올습니다.// 그러는 새에 안개도 벗어지고/ 두 바구니를 가진 두 처녀는/ 바라고 바라던 산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꽃은 간 데 없고, 다만 한층 더 높이/ 한층 더 험한 산이 그 앞에 솟아올랐습니다/ 겨우 뵐 만한 그 감감한 꼭대기에는/ 지금껏 보던 것보다도 더욱 훌륭한 꽃들이 수없이 피어서/ 바람 불 적마다 흐늑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에 어디선지 모를 곳으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보아라 네 앞에 있는 끝 없는 싸움을’/ 그러나 셋째 처녀는 기를 써서 소리를 높여/ ‘오오 다시 나를 속이지 말라/ 미련함으로 세운 너의 비석(碑石)이 다만 너를 웃어주리로다’/ 이렇게 괌치고, 옆구리에 꼈던 바구니로 앞에 막힌 산을 치니/ 이상타, 별안간에 그의 몸은 다른 처녀 앞에 없어지고/ 산 밑에 마른 흙 우에 그를 기다리는 두 동무 곁에 있었습니다/ 넷째 처녀는 슬픈 맘으로 동무의 스러진 편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한층 더 험하고 가파로운 산을,/ 아침에서 낮으로, 낮에서 저녁으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차지하는 때를 더듬어/ 쉴 새 없이 고생과 외롬의 사이에/ 꿈으로 보는 산 우의 꽃을 향하여/ 그의 끊임 없는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산 아래서는 마음 약한 세 처녀가/ 이제 저의 남은 한 동무가 마저 내려와서/ 전 같은 넷의 친한 사이를 지을 때를/ 날을 두고 달을 두고 기다립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습니다/ 그 여름도 지나고 깨끗한 가을도 지나며/ 또 바람 찬 겨울까지 지나서/ 또 다시 노란 눈동자 가진 새 봄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리는 동무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집 / 주요한
우리집 동편 담 밑에는 돌창을 파고/ 서편 담은 곁집 담벼락으로 대신하였소./ 그 담에 붙어 있는 닭이 홰를 가리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난 살구나무, 첫여름에/ 막대기로 떨구는 선 살구의 신맛이/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가지를 꺾어다 꽂았던 포풀라가/ 곧은 줄로 자라나서 네 해에는 제법,/ 높이 부는 겨울 바람에 노래를 칩니다./ 나 많으시고 무서운 할아버님 안 계신 틈에/ 지붕에 오르기와 매흙 깐 마당 파기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봄에는 호미 들고 메 캐러 들에 가며/ 가을엔 맵다란 김장무 날로 먹는 맛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해마다 추석이면 으레히 햇기장쌀에/ 밀길구미 길구어 노티를 지지더니/ 늙으신 할머님 지금은 누구를 위하여…….//

하늘 / 주요한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우에/ 웃음 띤 아침해가 돋아 오른다./ 바람과 찬비는 다 어디 갔나/ 저 하늘 볼 때마다 놀뛰는 가슴,/ 그 속에 숨겨둔 애타는 생각을/ 저 파란 하늘 우에 놓아주면은/ 금(金) 같은 소리 되어 님의 귀에,/ 불 같은 별이 되어 님의 속에,/ 나의 소원(所願)을 갖다주련만./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우에/ 웃음 띤 아침해가 돋아오른다.//

푸른 하늘 아래 / 주요한
푸른 하늘 아래/ 오늘 또 빛이 찼다,/ 오늘 또 더움이 있다,/ 오늘 또 새들이 높이 뜬다.// 어떤 때는 외로운 지붕이 비에 젖었다./ 또 언제는 가장 높은 가지 우에/ 저문 해를 느끼는 바람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 새들은/ 잿빛과 누런빛의 보드라운 머리털을,/ 그 속에 숨긴 사랑을,/ 지혜롭게 흔들며/ 아무도 모르는 이상(異象)의 세계에/ 그들의 더운 가슴을 내어준다.// 오, 이날 이 감춘 귓속말,/ 보이지 않는 활개침,/ 아름다운 누리에 그려 내는 여러 낱 굽은 줄,/ 또한 새여 더욱 너의 미끄러운 잔등이/ 나래 밑에 가늘고 붉은 다리가/ 나의 입술을 이끈다.// 아, 밝은 날, 퍼지는 빛,/ 두텁고 가뿐 목숨 우에/ 춤추고 솟아오르는 곱다란 생물,/ 이날에 한갓 새 힘을 돋우어,/ 견딜 수 없이 움직여서,/ 그침 없이 노래하여서,/ 더, 더, 기쁜 소식의 때를/ 끝 날까지 두어 두려고, 간직하려고,/ 쓰다듬고 기르려고―/ 놀뛰고 춤추고 솟아오르는 곱다란 생물들이여.//

해의 시절 / 주요한
말 없은 불길은 하늘을 태우며,/ 향기로운 밀꽃은 땅을 채웠다./ 뜨거운 흙을 벗은 발로 밟으면서/ 드을의 감각 속에 나는 안긴다./ 논물이 햇빛을 비추어 번득이면,/ 나려오는 그 빛과 뜨거움은 몸을 곤하게 한다./ 때때로 느리게 부르는 노래도 귀에 즐거우며,/ 사람들은 서늘한 그늘을 찾아 무거운 발을 옮긴다.// 불붙는 태양은 우리의 머리를 치장하고,/ 솟아오르는 샘물은 우리의 발을 씻는다./ 모든 혈관은 더위에 불어 올라, 머리 수그린 드을꽃이여!/ 땀 흐르는 긴장에 헐떡이는 땅!/ 오, 해여, 무거운 바다를 녹이고,/ 모든 밝음의 자연을, 인생을/ 그침 없는 풀무 속에 집어 넣는 해의 시절이여!// 오, 이러한 날에 나의 생명은 저기 끓도다./ 저기 산 우에 걸어가리라―나무껍질에 흐르는,/ 향기 있는 송진냄새와, 햇빛에 피어난,/ 빛 독한 꽃의 길을 더운 벌겅 흙의 길을./ 거기서 나는 쉬리라―쉬는 풀 밑에./ 거기서 나는 쉬리라―수군거리는 나무 그늘./ 아, 마치 즐거운 뜰에 있는 것같이/ 나는 취하였다―땀 배인 땅을, 동편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떠다니는 구름을, 소낙비를, 넘치는 홍수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마음껏 껴안는다―흙에 묻힌 시절을 흙에서 피어난 이 시절을./ 이삭 익어가는 벌판에서, 솟아오른 산꼭대기에서, 마음은 춤추며/ 마음은 꿈뀌인다./ 곡식 냄새가 내 몸을 둘러싼다./ 숨은 것 없이 하늘에 빛나는 드을!/ 어지러운 벌이떼, 눈부시는 흰 치마./ 아 나는 천천히 걷는 네 좁은 길을,/ 나의 애인의 가슴인가 의심한다./ 해여, 바람이여 지금 내 가슴에 넘쳐오라./ 풀무 불에 제 튼튼한 팔을 두드리는 이상한 대장장이처럼,/ 사른 열정으로 나의 가슴을 달구리라./ 해를 물어 간다는 용감한 붉은 개같이/ 지금 나는 이 연한 두 손을 그 불 속에 넣으리라./ 위대한 계절이여, 나를 위하여 차리는 화려한 잔치에,/ 오직 하나인 내 불꽃의 `말'을 금으로 새기리라./ 나는 네 푸르른 바람에 쉬는 것보다,/ 네 달금한 피곤을 맛보는 것보다,/ 다만 네 가슴에 더욱 뜨거운 침묵의 길을 불로 닦으리라.// 오, 모든 사람의 여름이여,/ 질기고 질긴,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시절이여,/ 어떤 광채 많은 새벽에,/ 고대하는 나의 마음을 실어가려 하느냐―/ 길이 불에 싸인 너의 위대한 조국으로!//

햇빛같이 / 주요한
님이여 그대의 웃음은/ 저 햇빛같이 빛납니다/ 님이여 그대의 목소리는/ 저 이슬같이 가득합니다/ 님이여 그대의 노래는/ 강물에 그림자같이 그윽합니다/ 그러나 님이여 나의 가슴은/ 비 오다 개인 오늘 해같이/ 차차 뜨거워갑니다//

혼자말 / 주요한
임이여, 오시오,/ 여기 언덕에 풀이 돋았소./ 여기 비에 씻기어 푸른 향나무,/ 껍데기 벗으려는 나비,/ 따뜻한 볕, 흙, '고즈넉함'이 있습니다./ 또 그대 발을 씻을 맑은 물이 있습니다./ 오시오, 봄 오는 동안/ 모든 근심 잊고 이야기하러./ 오랜 잠에서 깨어난 머구리는/ 풀어진 풀밭에 뛰노라기/ 우리 귓속을 엿들을 새도 없겠지요./ 오시요, 임이여,/ 여기 그대 발을 씻을 맑은 시내가 흐릅니다.//

황혼의 노래 / 주요한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수수밭 사이에 뚫린 길로/ 오고 가는 손님의 흰옷이/ 언덕에서 그림같이 보일 적에/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그이가 참으로 오실 때는/ 황혼이 아기의 눈을 가리워서/ 색색의 오식을 다 가져간 뒤에야/ 그이의 참 모습을 잘 볼 수 있어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저 언덕에서 기다리노라면/ 먼저 나의 모양을 알아보실 터이지요/ 그리고 아기는 혼자서 노래부르면/ 그이는 그 노랫소리를 잘 아실 터이지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페놀탈렌 / 주요한
뜨거운 페놀과 순결한 탈렌이/ 낳은 따님 페놀탈렌/ 핏빛의 붉은 사랑은 감추었건만……/ 남달리 열렬한 가성칼리를 그려/ 변함 없는 붉은 가슴 끓건만/ 방울방울 떨어지는 가성액에/ 파문을 지으며 가슴의 한 끝이 뛰건만/ 찬바람같이 휩싸는 희류산의 시기에/ 애처롭게 스러지는 그 붉음/ 아아 페놀탈렌에게는 산과 가성……/ 사람의 따님께는 사랑과 버림이……//

부끄러움 / 주요한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읍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임이/
지름길에 나왔읍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읍네.//
* 새: 땔 나무의 사투리.


외로움 / 주요한
나는 옛날 성도(聖徒)의 걸음으로/ 외로움의 깊은 골에 홀로 나려가며/ 추억의 무거운 바다, 물 밑에 엎드려/ 나의 난 날과 모든 해를 이로 짓씹고,/ 지난날의 뜬생각 우에 재를 뿌리려 한다./ 나는 내 몸을 누르는 각색(各色) 옷을 벗어 던지고/ 붉은 살로 얼음과 뜨거움을 능히 견디며/ 도올 줄 모르는 나의 상처를/ 찬바람과 날카론 빗으로 문질므로/ 나의 살에 참된 사랑을 맛보기를 원한다.// 외로움은 뜨거움 없는 빛과 같다./ 지금 이 기이한 굴 안에 광채가 가득하매/ 그 빛은 얼음같이 찬바람을 토한다,/ 나는 눈을 열 수 없고 물고기같이/ 외로움의 찬 빛을 호흡하며 부침(浮沈)한다./ 아아 `사랑한다'는 모든 것/ 몇 천년 인류의 모든 겨레가 입으로 부르던/ 각색(各色) 가지의 `사랑'이란 말/ 그는 죽어 떨어진 꽃잎에 불과하다,/ 오직 이 광채 휘황한 슬픔과 아픔의 날에/ 죽는 듯이 빠르게 나의 핏줄기는 뛴다.// 물소리가 멀리 들린다, 외로이,/ 여기 밤과 어둠이 없다,/ 그러나 그 빛이 차기 얼음 같고/ 그 밝음은 잔혹히 뚫어보는 눈동자 같으매/ 스스로 헤아리고 사모하는 마음은/ 이 외롬의 쓴 빛 아래 더욱 간절하니/ 나는 이를 악물고 감사의 눈물로, 여기서/ 신(神)에게 나의 발가벗은 기도를 드리리라.// 아아 그러나 이상하다, 고요한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오는 듯이 마음 속 깊은 데서/ 병에 넘치는 물같이 벼랑에 떨어지는 꿈같이/ 형언할 수 없는 고감(苦感)과 쾌감(快感)을 가지고 온다./ 나의 다문 입술은 때때로 떨리며/ 두 어깨는 어린아이와 같이 격노하였다./ 이 같은 불안 속에 나는 소리를 들었노라./ `전에 슬픔의 바다에 잠기기 않은 자/ 또한 기쁨의 구름다리를 못 오르리라./ 이미 있은 자, 시방 있는 자, 장차 있을 자,/ 너의 눈물을 네 환상 우에 쏟으라/ 거기서 너의 쓴 사랑을 찾으리로다'// 폭풍우가 와서 나를 친다./ 벗의 발자취 빈 공기를 통하여 가까이 온다./ 색색의 그림자, 꿈, 혹은 나를 괴롭게/ 혹은 나를 즐겁게, 나의 귀와 눈과 살에 온다./ 그러나 시방 나의 몸은 차고 또 더워/ 그 밖에 차기가 맑은 유리와 같고/ 그 안에 덥기가 풀무에 놀뛰는 화신(火神) 같다.// 이리하여 기꺼운 침묵이 새벽처럼 와,/ 광채가 황홀한 기이한 굴속에/ 나는 맑게 개인 이지(理智)로 내 몸을/ 또 그 모든 지나간 날과 해를 잘 보며/ 후회도 없고 탄식도 없이 현황(眩惶)함도 다 가고,/ 소녀와 같이 순일(純一)한 애탐으로/ 제 몸과 그 모든 장래 올 날에 사랑을 붓는다.// 이제 몸소 단련하는 외롬의 굴에 있으며,/ 언 바람과 칼 같은 광채에 붉은 상처를 내어주고/ 변함 없고 다만 하나인 불꽃의 `사랑'은/ 깜박임 없는 열정의 눈으로 영원히 지키도다.//

채석장 / 주요한
핑, 핑, 핑, 지구의 근육을 뚫으는 강철의 소리 여름날 뜨거운 빛이 뜨거운 바위에 부어 나릴 때 푸른 숲과 흰 들의 중간에서 인생의 합창소리는 일어난다./ ‘노래하자 태양아, 나무숲아, 흐르는 시내야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핑, 핑, 핑, 꾸준히 쉬지 않고, 거기 기울여라 너의 전부를,/ 바위를 깨무는 의지를 신념을, 강철의 심장을, 그날에 산은 평지가 되고 바다와 바다가 서로 통하리니/ ‘노래하자 바람아, 소낙비야, 무성한 숲들아,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여름날 뜨거운 볕이 구릿빛의 근육을 태운다 흰 들, 붉은 흙, 푸른 산소리와 빛깔의 군악/ 여름이다 여름이다 그늘 깊은 산의 여름, 광활한 드을의 여름/ 생명은 한낱의 기구다, 닳아서 버리는 `정'과 같이 우주의 의지에 그 전체를 싸워 희생하는 행진곡이다./ 그러나 얼마 없어 해결은 오리니, 화강석의 깊은 뚫리리니/ ‘노래하자 우렁찬 시절아, 불타는 여름아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핑, 핑, 핑, 최후의 일격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폭약은 장치되었다 불을 그어댈 사람은 나오라, 위대한 승리에 취할 사람은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여름날 자연은 모두가 잠잠하게 불붙는 광경 잠잠한 것은 힘세다, 위대하다, 오, 잠잠한 합창의 소리/ 너는 듣느냐 그 소리를 `최후의 일격이다, 준비는 다 되었다'/ ‘노래하자 태양아, 나무숲아, 흐르는 시내야 올라가자 선구자야/ 깨트려라 새 길을,/ 우리에게 주라, 위대한 힘을, 막을 자 없는 힘을’//

자장가(운을 따라서) / 주요한
뒤뜰에 우는 송아지/ 뜰 앞에 우는 비둘기/ 언니 등에 우리 아기/ 숨소리 곱게 잘 자지//

옛날의 거리 / 주요한
조고만 복잡 조그만 시름, 조고만 행복,/ 새벽 물장수 석양녘에 주정꾼/ 궂은날 땅에 기는 연기/ 객줏집 부엌에 물이 들어/ 오오, 거리여!/ 고르지 못한 팔다리로/ 처마 낮은 가갓집을 젖먹이듯 헤가리던/ 나의 거리여.// 장마날, 나막신을 위하여 진땅을 예비하고/ 또 겨울, 얼어붙은 네 비탈에서/ 아이들의 얼음지치기, 할머니 한탄/ 세배 다니는 남녀의 차린 옷이/ 찬바람에 푸덕거릴 때/ 거리여/ 네 뺨이 아침 해에 불그레하였었다.// 비 오고, 밟히고 바람 불어/ 울둑불둑 굳은 땅을/ 짐 실은 구루마가 털석거리고/ 먼눈 파는 아이가 돌뿌리에 넘어질 때/ 너는 참지 못하여 연해 웃었다.// 달빛조차 얼어서 더 밝은 밤/ 밤엿장수 길게 외치는 소리,/ 희미한 방등 밑에 잦은 다듬이 방맹이가,/ 네 외로운 가슴에 얼마나 울렸을까./ 또 봄이 와서 먼 산에 아지랑이가 노닐어도/ 꽃구경 가는 아낙네의 흰 신이 한가로워도/ 너는 먼지 이는 구석에 흐릿한 그림자를 지키노라고/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너는 때로 한숨도 지으면서/ 이끼 덮인 수구로 빠져/ 굽은 소나무로 깎아 놓은 다리를 건너며/ 또, 새벽 민물에 나룻배를 건너/ 빨래소리도 못 들은 체하고/ 거리여, 너는/ 시냇물과 입맞추고/ 겸손하게 촌길과 손을 결렸었다/ 길고긴 여름밤에/ 부지런히 골목집을 찾아 들어가/ 수절하는 과부의 긴 한숨을 위로하고/ 속타는 며느리의 눈물을 마시었다./ 너는 어느 때에 한번이나/ 싫다 하였나, 더럽다 하였나, 못 참을라 하였나/ 너를 둘러싼 꿈 속의 평화/ 대대로 전하는 게으름/ 너는 그를 불쌍하게 보았을지언정/ 나무라지는 않았다./ 너는 놀랄 만한 참을성으로/ 그네가 그네의 행복을 찾도록/ 한결같이 기다렸었다./ 그적에 나는 너의 몸가짐 눈짓을/ 너의 가슴에 따스함을/ 오오, 거리여/ 알았었다, 들었었다, 만졌었다.// 그렇거늘 그렇거늘/ 오늘 너는 나를 몰라보고/ 나도 너와 초면이 되었다./ 네 좌우에 있는 초라한 전들이/ 멀찍이 물러나서 곁눈질만 한다./ 너는 네 우에서 아무런 비극이 생겨도/ 거리여, 거리여/ 너는 그렇게 변했다/ 너는 그렇게 변했다.//

아침 처녀 / 주요한
새로운 햇빛이여, 금빛 바람을 일으켜, 일으켜,/ 나의 몸을 불어가라, 홧홧 달은 이마를, 뺨을, 두 귀를/ 나의 강한 애인에게 나의 `뜻'을 가져가면서.// 이슬에 젖은 길이여, 빛나라, 빛나라, 나에 앞에/ 스스로 가진 힘을 의심 없이 깨닫기 위하여./ 빛나라 잠깨기 시작한 거리거리여/ 불붙는 동편 하늘로 숨차게 걸어갈 때에.// 아름다운 새벽이여 둘러싸라./ 희고흰 새벽 안개여 더운 젖통을 씻으라/ 나의 깨끗한 살의 단 냄새가/ 모든 강한 애인의 가슴에 녹아 들기 위하여.// 아, 땅이여, 붙들라, 나를,/ 너의 질긴 풀줄기로 나의 벗은 발을 매어/ 시원치 않은 이 몸을 너의 풀밭에 끌어 엎지르라.// 이슬에 젖은 아침이여, 빛나라, 빛나라, 그때에/ 안타까운 나의 사랑을 뜨거운 그의 가슴에 비추기 위하여,//

가신 누님 / 주요한
강남 제비 오는 날/ 새 옷 입고 꽃 꽂고/ 처녀 색시 앞뒤 서서/ 우리 누님 뒷산에 갔네.// 가서 올 줄 알았더니/ 흙 덮고 금잔디 덮어/ 병풍 속에 그린 닭이/ 울더라도 못 온다네./ 섬돌 위에 봉사꽃이/ 피더라도 못 온다네.//

누이야 / 주요한
누이야 나가 봐­라 나무 새에/ 어제 비에 앵도가 얼마나 익었나/ 익었거든 따다가/ 샘물에 씻어라./ 광주리에 따다가/ 샘물에 씻어라./ 광주리가 없거던/ 치맛자락에/ 따 오너라// 경신(庚申)

영혼 / 주요한
그렇게 완전하던 통일이/ 의지와 정이/ 아는 것과 바라는 것이/ 분명히 속일수 없이 하나이 되었던,/ 그의 개성이/ 다만 그 살의 흩어짐으로/ 아주 스러진다는 것이,/ 흔적도 없어졌다는 것이,/ 참일까.// 그 영혼은―영혼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어리더라도 분명히 `그이'였었다./ 아직도 피려는 꽃 봉오리라 하여도/ 누가 몰라 보았으랴./ 더구나 그의 높은 희망, 겸손한 이상/ 생각의, 사랑의 파동이 적거나 크거나/ 큰 이 만큼, 적은 이 만큼 울리었었다.// 물 한 방울도 있으면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사라진 줄 아는 `힘'도/ 반드시 우주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물질'보다도 `세력'보다도/ 더 확실한 더 힘있는/ 통일된 `의식'의 전부,/ 그 신기한 `개성'이/ 살이 식을 때에 더욱 굳세지고/ 더욱 맑아지던 그 `영혼'이/ 다만 어떠한 순간에/ 아주 스러졌다는 것이,/ 아니 있었던 것과 꼭 같이 된다는 것이/ 참일까, 참일까.// (1924년 12월 30일 누이동생이 죽음)

생(生)의 찬미(讚美) / 주요한
1// 비아, 비아, 비아, 병아리는 우물에/ 빠져 죽었다./ 닭, 닭, 닭, 암탉은 우물을/ 싸고 돌았다./ 눈빨간 삵이 나다니는 밤에도/ 이슬 찬 아침, 소리개 뜨는 낮에도/ 그 뒤에는 바람 부는 저녁이/ 자취 없이 기여들 때까지도/ 닭, 닭, 닭, 암탉은 우물을/ 싸고 돌았다.// 밤이 가고 아침이 왔다―// 물우에 뜬 것은 암탉의 시체,/ 닭의 등에 업은 것은 병아리의 시체/ 우물은 모른 체하고 푸른 하늘/ 거꾸로 비쳤다/ 닭, 닭, 닭 암탉의 우는 소리/ 다시 없었다// 2// 검은 진흙에서도 연꽃이 피네/ 니나니, 나니나/ 보이진 않아도 뿌리가 살았는 걸세/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실개천 모여서 대동강 되네/ 니나니 나니나/ 한바다 향해서 모인 때문일세./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두드리고 두드리면 바위도 갈라지네/ 니나니, 나니나,/ 그러나 그것은 직심이 있어야 하네./ 새는 노래하고 하늘은 맑다/ 태양은 장천 웃고 있다// 3// 하루, 한 주일, 한 달이라도/ 너는 먹을 것 없이 견디겠느냐/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홑옷 밖에 입을 것 없이라도‘/ 눈보라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친구의 친척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하는 고향도 영원히 못 볼 것이다/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고랑을 채우고 챗죽으로 때리고/ 나중에 갈 곳은 감옥의 쇠문이다/ ―그는 잠자코 ‘그리하겠오’/ 인제는 네 목숨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죽는지는 알릴 수 없다//

사랑 / 주요한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사랑은 비 뒤의 무지개처럼/ 사람의 이상을 무한히 끌어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목표외다/ 사랑은 마치 물고기를 번식케하며/ 기이한 풀과 바위를 감춰두며/ 크고 적은 배를 띄우는/ 깊이 모르는 바다와도 같사외다./ 그처럼 넓고/ 그처럼 깊사외다.// 그러나 사랑은 또/ 바위를 차고 모래를 깨물며/ 천길을 나려치는 폭포외다./ 그 나가는 길에 거침이 없사외다./ 사랑은 튀어 오르는 화산같이/ 잔인한 세상을 향하야/ 뜨거운 분노를 폭발케 하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통일/ 사랑은 무한히 참으며/ 사랑은 가장 용감하외다./ 사랑은 평화를 위하야/ 땅 위에 싸움을 퍼치며/ 사랑은 의를 위하야 붉은 피로/ 역사를 물들였사외다./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싸우지 않으면 안되겠사외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피를 뿜지 않으면 안되겠사외다./ 학대 받고 짓밟힌 인류가 있는 동안/ 사랑은 나를 명령합니다./ ××의 기빨을 앞세우라고―/ 짓밟힌 그만을 위함이 아니고/ 짓밟는 그까지 위함이 사랑의/ 위대함이외다/ 이 분노와 이 싸움은/ 그러므로 더욱 거룩하외다.// 나는 이 세기를 향하야 싸움을 걸겠습니다./ 싸우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외다/ 미워하지 않는 사랑은 값없사외다./ 노함이 없는 사랑은 헛되외다/ 나는 이 세기를 향하야/ 사랑의 돌격전을 걸겠습니다.// 나는 사랑의 사도외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나는 바른 손에 칼을 잡았사외다./ 오직 사랑함으로써/ 나는 왼손에 ××을 들었사외다./ 나는 참으로/ 사랑의 사도외다.//

명령 / 주요한
사랑이 오라 하면/ 불로라도 물로라도 아니 가오리까/ 사랑이 손짓하여 부르면/ 험한 것을 사양하오리까?/ 사랑이 오오 사랑이 나를 찾는다면/ 마중하러 먼 길을 아니 가오리까? 만나거든 다시는 떠나지 않도록/ 사랑이여 나더러 오라 하소서./ 발벗은 채로 뛰어 가오리다./ 사랑이여 나더러 빨리 오라 하소서./ 모든 것 버리고 달려 가오리다./ 사랑이여 나를 따라오라 하소서/ 땅 끝까지 가오리다./ 그 명령이 그런 힘을 나에게 줍니다.//

눈결 / 주요한
삼림(森林) 같은 님의 눈이/ 나의 얼굴에 쏘일 때/ 나의 눈과 마주칠 때,/ 나의 가슴은 바람같이 떨립니다.// 시냇물 같은 님의 눈결/ 나의 가슴 속을 흐를 때,/ 나의 붉은 뺨을 씻을 때,/ 나의 피는 물고기같이 헴칩니다.//

삶 / 주요한
1// `삶'이란,/ `행복'이란,/ 무엇?/ 아는 자는 누구?/ 그래도 알자면/ 애타고 설워……/ 그러나 봄빛이/ 나를 끄으니,/ 꿈 속에/ 잠기고저.// 2// 어둠과 밝음의/ 분별치 못할 새틈/ 봄잠을 설깨어/ 깨끗한 마음에/ 깨닫도다―/ 비고 또 빈 세상./ 아, 그 설움의 위로여./ 그러나 해 돋고/ 인간의 소리/ 귀를 울리면/ 분주한 마음/ 하염 없이/ 끝없는 길에/ 다시 서도다.//

삶.죽음 / 주요한
`삶'은 지는 해, 피의 바다,/ 강하고 요란한 하늘이여./ `죽음'은 새벽, 흰 안개/ 깨끗한 호흡, 소복한 색채.// `삶'은 펄럭이는 촛불,/ `죽음'은 빛나는 금강석,/ `삶'은 설움의 희극,/ `죽음'은 아름다운 비극,// 끓는 물결 산을 삼키려 할 때/ 돛대에 부는 바람의 통곡―/ 소리 없이 부어 쌓이는 밤 눈에/ 가득한 웃음을 던지는 가벼운 달빛―// `삶'은 `죽음'에 이르는 비탈길,/ `죽음'은 새로운 `삶'의 새벽,/ 아, 미묘히 섞어 짜는 `죽음'의 실로,/ 무거운 `삶'의 폭우에 성결한 광택을 이루리로다.//

농부 / 주요한
비 개인 뒤에 농부는 논에 나갔다./ 바람이 산봉우리로 나려와서/ 김 오르는 밭이랑과 논두렁으로/ 춤을 추며 지나갔다.// 검은 물새가 논에서 논으로/ 놀리는 듯이 소리치면서 날아갔다./ 기나긴 여름해가 말없이 쪼이는 것은/ 농부의 속을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릴 줄 아는 우리 농부는/ 자랑하듯 긴 한숨을 들이마시고/ 시방은 무섭게도 푸르른 넓은 벌에/ 금빛 물결이 흐늑일 가을을 확실히 보았다.//

늙은 농부의 한탄 / 주요한
팔자란 것이 있느냐고/ 아들놈은 그러지만/ 없다는 것 거짓말이// 지난해 풍년 들어/ 곡식말 남았던 것/ 팔아서 호미 사니/ 호미 값이 더 비쌌네// 안 팔고 겨울나면/ 비싼 값 받을 것을/ 누구는 모를까봐/ 핏집 볏집 노적가리/ 난 데 없는 불에 타니/ 불은 웬 불인가/ 이것이 팔자의 불// 올해도 풍년일세/ 빚 갚고도 남은 것은/ 큰년의 혼수흥정/ 옥에 가서 삼 년이나/ 못 나오는 아들놈의/ 옷이라도 들여 볼까// 침침칠야 잠든 밤에/ 된 소나기 웬일이냐/ 동이 터졌고나/ 산이 떠나가나 보다/ 구들에 물들었다/ 일어나라/ 사람 살려라// 번갯불 번쩍 할 적마다/ 미친년 머리같이/ 흐트러진 양버들나무/ 한 길 넘는 모래에/ 곡식도, 집도, 세간도/ 큰년, 작은년/ 할미강아지, 검정소/ 다 묻히고 남은 것은/ 지붕하고 내하고라// 먹을 것 망쳤으니/ 사람까지 잘 삼켰지/ 이 몸 혼자 살았으니/ 이것이 팔자의 목숨/ 황금 같은 벼를 베어// 도조 주고 빚 물면/ 남을 것 무엇 있나/ 남을 것 없을 바엔/ 물 속에 잘 썩었지// 살아서 굶을 바엔/ 물귀신 잘 되었지// 서리 치고 눈 날린다/ 홑옷 입고 땅을 파니/ 손등 얼어터질란다/ 하루 종일 파고 파도/ 죽 끓일 것 모자라네// 철로길 고쳐 놓면/ 누가 타고 댕길 건가/ 철로길 생긴 뒤로/ 못사는 놈 더 불었네// 지은 죄가 있다 하면/ 농부된 것 밖에 없네/ 탕수물에 풍덩실/ 죽지 못한 죄 뿐일세// 옥에 갇힌 아들놈/ 팔자 없다 떠들더니/ 네가 다시 세상 나와/ 팔자 잘 타거들랑/ 팔자 없는 세상을/ 만들고 살아 봐라// 동해바다에도 해가 진다./ 이놈에 두 눈에서/ 눈물이 솟으니/ 세상도 다 기울었나보다.//

드을로 가사이다 / 주요한
드을로 가사이다―/ 등불많은 거리를 지나서/ 달빛만 있는 드을로.// 장터에는 싸움이 벌어졌고/ 전등 불 밑에는 술과 노래가/ 밤의 거리의 보기 싫은 것을/ 모두 나타내는 때// 드을로 가사이다―/ 조고만 다리를 지나서/ 바람부는 드을로.// 풀로 덮인 길에 `여름밤'이/ 벗은 몸으로 맞아 주는 곳/ 수수잎의 속삭이는 소리 밖에/ 우리의 귀를 어즈러일 것 없는 곳// 드을로 가사이다―/ 영혼과 영혼이 `땅'의 향기 우에/ 하나이 되는 드을로.//

눈 / 주요한
인경이 운다. 장안 새벽에 인경이 운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흰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차디찬, 벗은 몸을 밤의 앞에 내어던지는 거리거리는 아편(阿片)의 꿈 속에서 허기적거릴 때, 밤을 새워 반짝이는 빨간 등불 아래 노는 계집의 푸른 피를 빠는 환락(歡樂)의 더운 입김도 식어져 갈, 장안의 거리를 동서(東西)로 흘러가는 장사(葬事) 나가는 노래의 가­는 여운(餘韻)이 바람 치는 긴 다리 밑으로 스러져갈 때, 기름 마른 등불이 힘 없고 긴 한숨 소리로 과거(過去)의 탄식(嘆息)을 겨워하면서 껌벅거릴 때, 꿈 속에서 꿈 속으로 웅웅하는 인경소리가 울리어간다. 새벽 고하는 인경이 울리어간다. 눈이 녹는다.// 동대문(東大門) 높은 지붕 우에 눈이 녹는다. 청기왓장 냄새, 낡아가는, 단청(丹靑) 냄새, 멀리 가까이 일어나는 닭소리에 밤마다 뚝딱이는 도깨비떼들도 아름드리 기둥 사이로 스러졌건마는, 문(門) 아래로 기어드는 바람소리는 아직도 처창(悽愴)한 반향(反響)을 어둑신한 천정(天井)으로 보낼 때마다, 아아 무슨 설움으로 가슴 막힌 바람소리를, 들으라 저기 헐어져가는 돌담장에서, 해마다 뻗어나는 머루잎 아래서 바람이 슬프게 부는 피리소리를. 흩어지는 눈에 섞여서 슬픈 그 소리가 나의 마음 속에 부어 내린다. 아아 눈이 녹는다. 새파란 이끼 우에 떨어지는 눈이 녹는다.// 까치가 운다, 장안 새벽에 까치가 운다. 삼각산(三角山) 나무수풀에 퍼붓는 눈에 길을 잃고서, 어제 저녁 지는 해 빨간 구름에 표해두었던 길을 잃고서, 눈 오는 장안 새벽을 까치가 울며 간다. 까치가 운다.// 아, 인경이 운다, 은은히 일어나는 인경 소리에 눈이 쌓인다. 장안에 넓고 좁은 길이 눈에 메운다. 님을 못 뵈고 죽은 색시의 설움에 겨운 눈물이 눈이 되어 나린다. 먼저 해 봄바람에 지고 남은 흰 복사꽃이 죄 품은 선녀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 나린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바람조차 퍼붓는 눈은 장안거리를 가로막고 외로 메운다. 그침 없이 끝없이 쌓인다, 쌓인다, 쌓인다…….//

눈 오는 날 / 주요한
1// 까맣게 덮누르어 퍼부어 나리는다/ 먼 거리 암암하고 행인조차 끊겼으니/ 장안이 빈들 같아야 가슴 활닥하고녀// 2// 저녁녘 된바람에 쌓인 눈 보라치네/ 밤 눈을 밟고 가니 빠각빠각 소리난다/ 두어라 예 듣던 소리로다 내 반기어 하노라// 3// 녹이다 남은 눈이 기와 끝에 엎드렸네/ 앓아서 누운 아이 창문으로 내다보며/ 꼬리 긴 강아지 같다고 혼자 좋아하더라// 4// 인왕뿌리 깔린 눈을 무심하게 보지 마소/ 작년 이맘때 그 속에서 보던걸세/ 아직껏 남아 있는 그들 역시 저 눈 볼 것을// 5// 눈 녹아 길이 지니 찬 날이 되려 좋다/ 털조끼 껴입고 아쉰 소리 하지 마라/ 불땔 것 없는 동포가 하나 둘만 아니다// 6// 오늘도 신문 보니 몽고라 시비리는/ 영하 칠십 도 춥던 중 첨이란다/ 집 없는 망명객들을 생각하며 사노라// 7// 불끄고 누워봐도 눈이 말똥말똥하네/ 밤 귀에 완연한 것 눈 나리는 소리로다/ 세상 한(恨) 도맡은 듯하여 잠 못 이루어 하노라//

남국의 눈 / 주요한
푸른 나뭇잎에 내려 쌓이는/ 남국의 눈이 옵니다.// 오늘 밤을 못 다 가서 사라질 것을/ 설운 꿈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푸른 가지 위에 피는 흰 꽃을/ 설운 꿈 같은 남국의 눈입니다.// 젊은 가슴에 당치도 않은/ 남국의 때 아닌 흰눈입니다.//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어지러운 달이 실날 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르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 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이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 위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그 봄을 바라 / 주요한
푸른 물 모래를 비추고 흰 돛대 섬을 감돌며,/ 들 건너 자줏빛 봄안개 설움 없이 울 적에,/ 서산에 꽃 꺾으러, 동산에 님 뵈오러/ 가고 오는 흰옷 반가운, 아아 그 땅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뜨거운 가을 해, 묏전에 솔나무길이 못 되고,/ 어린 아우 죽은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적은 동리 타작마당, 잠자리가 노는 날,/ 꿈 같은 어린 시절 찾으러, 아아 그 산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아침에 저녁에 해묵은 느릅나무 가마귀 울고/ 담장에 가제 푸른 넝쿨, 다정한 비 뿌릴 제/ 섬돌빛 누런 꽃을 뜯어서 노래하던,/ 지붕 낮은 나의 고향집, 아아 그 봄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봄달 잡이 / 주요한
봄날에 달을 잡으러/ 푸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 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 달은 물을 건너 가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 금물결 해치고 저어갔더니/ 돌 씻는 물소리만 적적하고/ 달은 들 너머 재 너머 기울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 '밤'을 기어 하늘에 올랐더니/ 반쯤만 얼굴을 내다보면서/ "꿈이 아니었더면 어떻게 왔으랴."// 봄날에 달을 잡으러/ 꿈길을 헤여 찾아갔더니/ 자기도 전에 별들이 막아서서/ "꿈이 아니었더면 어떻게 왔으랴."//

봄비 / 주요한
봄비에 바람 치여 실같이 휘날린다/ 종일 두고 뿌리어도 그칠 줄 모르노네/ 묵은 밭 새 옷 입으리니 오실 대로 오시라// 목마른 가지가지 단물이 오르도록/ 마음껏 뿌리소서 스미어 들으소서/ 말랐던 뿌리에서도 새싹 날까 합니다.// 산에도 나리나니 들에도 뿌리나니/ 산과 들에 오시는 비 내 집에는 안 오시랴/ 아이야 새 밭 갈아라 꽃 심을까 하노라// 개구리 잠깨어라 버들개지 너도 오라/ 나비도 꿀벌도 온갖 생물 다 나오라/ 단 봄비 조선에 오나니 마중하러 갈거나//

가을은 아름답다 / 주요한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 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 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 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가을 멧견 / 주요한
비 와서 강물은 벌겋고/ 무너진 산길이 석양에/ 그 벗은 다리를 쉬일 제/ 내 곤한 꿈도 쉬임이다.// 조밭에 방울이 요란하고/ 어지러운 새떼는 들을 건너며/ 바람결에 소울음 멀리 들릴 제// 내 마음은 가만히 눈감습니다./ 솔밭에 송진냄새 그윽하고/ 우거져 익어가는 풀 숲에서/ 흙과 `가을'이 향기로울 때/ 내 감각은 물고기같이 입 벌립니다.// 그러나 저녁이 몰래 와서/ 모든 요란을 그 옷자락에 쌀 때라야/ 나의 오관은 비밀을 뚫어보고/ 더 오묘한 소리를 알아냅니다.//

꽃 / 주요한
꽃이 핀다, 님의 웃음이/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핀다./ 그 꽃을 손으로 꺾었더니/ 꽃도 잎도 다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님의 웃음/ 마음 속 길이 간직했더니/ 그 속에 피어나 꽃이 되어/ 이 타는 속을 미칠 듯이.//

꽃밭 / 주요한
나팔꽃이 피었네,/ 백일홍이 피었네,/ 봉사 나무예 맺은 씨가/ 까맣게 여물었네.// 봉사씨 여물었어도/ 새벽엘랑 빗지 마라./ 봉사 나무에 맺힌 이슬/ 치마 자락 다 즐쿤다.// 봉사 나무에 거미줄이/ 빗은 머리 얽어 준다.//

복사꽃 피면 / 주요한
복사꽃이 피면/ 가슴 아프다/ 속생각 너무나/ 한 없으므로.//

흰 꽃 / 주요한
민물이 땅의 벗은 가슴을 씻는 큰 강가에/ 달빛이 물과 흙에 단꿈을 부어 줄 적에/ 그 언덕에 수없는 흰 꽃이 피어납니다.// 달빛에 피는 꽃이매 그 입술은 눈같이 흽니다./ 사람 몰래 피는 향기 없는 흰 꽃-/ 무한한 물결 노니는 강가에 피는 꽃-// 아침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꽃-/ 어린 아이들같이 머리를 모으고 조는 꽃-/ 달빛만 그 입을 맞추어 주는 적적한 꽃-// 달 밝고 물소리 끊임없는 무한한 강가에/ 수없는 흰 꽃이 밤을 숨어 피어납니다.//

물꽃 / 주요한
꽃은 잔다 맑은 물 밑에/ 꽃은 잔다 흰 모래 우에/ 꽃은 잔다 그 맑은 향내/ 그 고운 빛이 물에 잠겨서/ 바람이 와서 꽃을 깨웠다/ 물결이 뛰어서 꽃을 깨웠다/ 그러나 꽃은 깨지 않는다./ 꿈 하나 없는 고운 잠에서// 꽃은 잔다 때가 오도록/ 꽃은 잔다 기다리면서/ 운명이 정한 한낱소리가/ 꽃을 불러 깨울 때까지//

마음의 꽃 / 주요한
정성들여 물 주어도/ 마르는 나무를……/ 바람 비 안 맞혀도/ 지는 꽃을……/ 꽃은 시들고/ 나무는 말랐으니/ 버리리까// 그대여 서릿발 차고/ 바람 많으나/ 행여나/ 오는 봄/ 기다리리까// 그대를 위하여/ 정성들인/ 한 포기 꽃……// 마음의 꽃……/ 어리석은 꽃……//

풀밭 / 주요한
봄날 풀밭에 누워서/ 눈감고 조용히 들으면/ 어디선가 미묘한 음악이,/ 하나도 아니요 여럿이,/ 수천 수만의 숨소리가,/ 귀를 막아도 울려오는,/ 선녀의 합창하는 소리가,/ 사면으로 일어나서,/ 내 신경을 진동합니다./ 그것은 무수한 생명이/ 검은 흙 속에서 때를 헤는/ 신비의 곡조입니다./ 시방 그 조용한 속에 있는 `힘'을/ 나는 듣습니다 맡습니다 만집니다./ 태양과 공기가 그 `힘'으로/ 내 영혼을 멱감깁니다.//

 

     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올리운다.//

         * '학우'  창간호, 1919년 1월 수록.  '학우'는 일본 동경 한국인 유학생들의 기관지였다.

빛깔 없고 말없는 / 주요한
빛은 낡아 없어지나니/ 향기도 스러지나니/ 꽃은 떨어지고 먼지앉아/ 설움만 더하나니/ 눈물은 바람에 마르고/ 목소리도 설워가나니/ 떠날때 보낸 '베에제'도/ 기억조차 스러지나니/ 님이여 눈물도 꽃도/ 기억도 믿지 못할러라/ 세월을 따라 새롭는 것은/ 오직 빛깔없고 말없는/ '마음'이러라//

구작 삼 편(舊作三篇) / 주요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오,/ 칼이나 육혈포나./ 그러나 무서움 없네./ 철창 같은 형세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짐을 지고/ 큰 길을 걸어 가는 자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오./ 비수나 화약이나./ 그러나 두려움 없네./ 면류관의 힘이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광이삼아/ 큰 길을 다스리는 자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든 물건 없오./ 돌이나 뭉둥이나./ 그러나 겁 아니 나네./ 세사 같은 재물로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칼해 잡고/ 큰 것을 지켜 보는 자일세.//

새벽꿈 / 주요한
나는 깨었다, 졸음은 흙속에 스러지고/ 해는 없으되 낮같이 밝은 언덕가으로/ 나는 가비엽게 걸어간다, 흰 수풀/ 흰 나무 있는 데 길은 끊어지고/ 두터운 구름 그 끝에 일어난다/ 넓으나 넓은 언덕 우에 무거운 마음은/ 바깥 찬기운과 슬치는 듯하여 더욱 무겁고/ 허둥거리는 발은 허공(虛空)을 차고 땅에 엎드리니/ 어디선가 이상(異常)한 앓는 소리 귀를 친다./ 아아 이 언덕 저편 끝에 한 마리 누런 개 사슬에 끌려/ 힘없는 저항(抵抗)의 신음(呻吟)으로털 뽑힌 모가지,/ 길게 느리우고 상(傷)한 발톱은 흙을 깬다./ 아아 나의 눈은 어둡고 어깨는 떨려/ 더운 눈물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며/ 밟고 섰는 땅은 흔들리고 기울어, 갑자기!/ 가슴식는 두려움이 내 몸을 한없는 땅 밑으로 떨어뜨린다./ 아아 나는 새벽에 잠깨었으나/ 나의 마음은 한때도 가라앉지 않지/ 막을 수 없는 어떤 사슬 쉴새없이/ 나의 가슴을 이끄는 듯하여/ 낮은 베게 우에 뜻없는 눈물 쏟고 있도다,/ 아침 햇빛, 나의 속 어두운 담벽에 비치는 날까지.//

아기의 꿈 / 주요한
벌써 어디서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별이 아직 하나밖에 아니 뵈는데,/ 달빛에 노니는 강물에 목욕하러/ 색시들이 강으로 간다.// 바람이 간다, 아기의 졸리는 머릿속으로,/ 수수밭에 속삭이는 소리를/ 아기는 알아 듣고 웃는다.// 아기는 곡조 모를 노래로 대답한다./ 어머님이 아기 잠을 재우려 할 적에.// 어머님의 사랑하는 아기는/ 이제 곧 잠들겠읍니다.// 잠들어서 이불에 가만히 누인 뒤에,/ 몰래 일어나 아기는 나가겠읍니다./ 나가서 저기 꿈 같은 흰 들길에서/ 그이를 만나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읍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아기가 잘도 잔다 하시고,/ 다듬질할 옷을 풀밭에 널러/ 아기의 웃는 얼굴에 입맞추고 나가시겠지요./ 그럴 적에 아기는 앞강을 날아 건너,/ 그이 계신 곳에 가 보겠읍니다./ 가서 그이에게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읍니다.//
* '영대' 3호 1924년 10월

전원송(田園訟) / 주요한
전원으로 오게, 전원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 오나니/ 익은 열매와 붉은 잎사귀/ 가을 풍성은 지금이 한창일세.// 아아 도회의 핏줄 선 눈을 버리고/ 수그러진 어깨와 가쁜 호흡과/ 아우성치는 고독의 거리를 버리고/ 푸른 봉우리 솟아오른 전원으로 오게 오게.// 달이 서러운 밭도랑을 희게 비치고/ 얼어 붙은 강물과 다리와 어선 위에/ 눈은 내려서 녹고 또 꽃 필 적이/ 우리들이 깊이 또 고요히 묵상할 때일세.// 전원으로 오게, 건강의 전원으로./ 인공과 암흑과 시기와 잔혹의 도회/ 잠잘 줄 모르는 도회 달과 별을 향하여/ 어리석은 반항을 하는 도회를 떠나오게.// 노래는 들에 가득히 산에 울려 나오고/ 향기와 빛깔은 산에서 들로 퍼져 간다./ 아름다운 봄! 양지에 보드랍게 풀린/ 흙덩이를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봄.// 그러나 보라 도회는 피 빠는 박쥐가 깃들인 곳/ 흉한 강철의 신 앞에 사람 사람이/ 피와 살과 자녀까지 바쳐야 하는/ 되회는 문명의 막다른 골, 무덤.// 전원으로! 여기 끊임없는 샘물이 솟네./ 여기 영원한 새로움이 흘러나네./ 더운 태양과 강건한 대지의/ 자라나는 여름의 전원으로!// 아아 그 때 새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가/ 봉우리와 골짜기를 크게 울리리니/ 반역자가 인류의 유업을 차지하리니/ 위대한 리듬의 전원으로 오게 오게.//

노래하고 싶다 / 주요한
맑은 물에 숨쉬는 고기같이, 푸른 하늘에 높이 뜬 종달새같이/ 순풍에 돛 달고 닫는 배같이/ 그렇게 노래하고 싶다./ 그렇게 자유롭게.// 흰 모래에 반짝이는 햇빛같이/ 언덕에 부딪히는 흰 물결같이/ 물결과 희롱하는 어린애같이/ 그렇게 노래하고 싶다./ 그렇게 무심하게.//

금속의 노래 / 주요한
여기는 옛날의 투르키의 미인 파는 장터/ 각색 금속이 색을 자랑하는 실험이올시다/ 먼저는 날카롬과 열렬을 자랑삼는 경금속/ 칼리와 소다 석유병 속에 갇혀 지내며/ 언제나 맑은 증류수에 춤출 날을 꿈꾸나니/ 여러분 참으로 생명도 끊는 사랑을 구하시거든/ 가성칼리의 뜨거운 키쓰를 마다 맙시오// 다음에는 소복 입은 알루미늄 칼슘 마그네슘/ 연하고 겸손한 마음성이지만/ 마그네슘은 불에 사르면 별같이 빛나고/ 칼슘은 뜨거운 생석회가 됩니다./ 그러나 알루미늄같이 온 세상 살림을 가볍게 하는/ 얌전하고 일 잘하는 색시는 또 없을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화려치 못한 아연 속된 철 취미가 높지 못한 동/ 그러나 천하에 많고 많은 부엌 며느리 같은/ 그네의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올시다/ 신비한 푸른색 가진 백동 그와 한쌍인 붉은 코발트/ 가장 옷 잘차리기는 누런 치마의 카드뮴 등황색의 크롬/ 수은은 여승같이 세상을 버린 이/ 그러나 순홍과 주토의 붉은 빛이 수은계로 온 것은/ 잊지 못할 것의 하납니다/ 무거운 `연' 젊은 라듐이 천만 세기를 늙어서 된 `연'/ 예범 있고 깨끗한 `은' 참 말레디/ 한빛의 아름다움을 몸소 가르치는 은/ 교만한 금보다도 가면 쓴 백금보다도/ 은은 더 사랑스럽습니다/ 여보시오 여기는 투르키의 미인시장/ 각색 금속이 색을 자랑하는 실험실이올시다//

청년이여 노래하라 / 주요한
지화자 저 산 위에 올라/ 하늘을 노래하자/ 영원한 푸름을 우러러/ 노래로 응답하자/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끝없는 자비함을/ 정성으로 노래하자// 장고와 피리로 찬미하고/ 큰북과 나팔로서 화답하라/ 더 크고 더 높게 활개쳐 노래하며/ 발을 굴러 더 빠른 가락으로/ 장단을 맞추어라// 누리와 무리에게 기쁨을 전하는/ 온각 희망을 감사는/ 푸르름을 노래하자, 지화자// 하늘 닿는 소나무 그늘에/ 걸음을 가늠하라/ 바위를 누비는 개울소리에/ 생각을 키워라// 지화자 지평선까지 뻗은/ 나락 이랑을 노래하자/ 심는 철의 푸르름과 거둘 무렵의/ 황금 물결을 찬양하자/ 망망한 바다와 거기 맞닿은 곡식들의/ 물결을 자짗 시큰거리는/ 눈동자를 까집어 노래부르자// 붉은 댕기 춤추는 이랑의 마당 위에/ 몰리고 헤지는/ 참새무리와 함께/ 제 마음에 선동하여라// 왼편과 바른편, 병품모양 감사고 섰는/ 높낮은 산맥을 팔 벌려/ 감싸고 싶은 이 저녁/ 풍년을 내다보는 설레임으로/ 어깨춤을 추어보자// 하늘 닿는 소나무 그늘에/ 걸음을 가늠하라/ 바위를 누비는 개울소리에/ 생각을 키워라//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 주요한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안개 속에 돛 달고 가던 배/
바람도 없는 아침 물결에/
소리도 없이 가 버린 배//

배도 가고 세월도 갔건마는/
안개 속 같은 어릴 적 꿈은//

옛날의 돛 달고 가던 배같이-/
안개 속에 가고 오지 않는 배같이-//


아침 황포강(黃浦江)가에서 / 주요한
아침 황포강 가에서 기선이 웁디다 웁디다./ 삼판은 보채고 기선이 웁디다 설운 소리로...// 아침 황포강 가에서 물결이 웃읍디다 우습디다./ 춤을 추면서 금비단 치마 입고 춤을 춥디다.// 아침 황포강에서 안개가 거칩디다./ 인사하면서 눈웃음 웃으며 인사하면서// 아침 황포강에서 기선이 떠납디다 떠납디다./ 눈이 부어서 물에 빠져 죽으려는 새악씨처럼...// 아침 황포강에서 희극이 생깁디다 생깁디다./ 세관의 자명종이 열 시를 칠 적에// 아침 황포강에서 기선이 웁디다 웁디다./ 설운 소리로 샛노란 소리로 기선이 웁디다.//

목탁소리 / 주요한
"이 중 한 푼 주시오면/ 극락세계 가오리다"// 얼음 녹아 탁수소리/ 가지 우에 꾀꼴 소리/ 봄날이 완연컨만/ 목탁소리 웬일인고// 갔던 봄 왔건만은/ 오마던 님 왜 안 온고.// "이 중 한 푼 주시오면/ 극락세계 가오리다"// 버들줄에 피릿소리/ 중치는 목탁소리// 강남제비 왔건만은/ 님의 소식 왜 안온고.// 을축동(乙丑冬)

반딧불 / 주요한
호박꽃에 반딧불,/ 호박 넝쿨에도 반딧불,/ 옷 축이러 나갔더니/ 풀밭에도 반딧불.// 불 꺼라 방등 꺼라./ 반딧불이 구경하자./ 파랗게 붙는 불은/ 반딧불이 불이다.// 발갛게 타는 불은/ 내 맘 속에 불이다.//

등대 / 주요한
등대에 불은 꺼졌다 살았다,/ 그대 마음은 더웠다 식었다.// 등대는 배가 그리워 그러하는지,/ 그대는 내가 싫어서 그러하는지.// 배는 그리워도 바위가 막히여/ 밤마다 타는 불 평생 탈 밖에.// 싫다고 가는 님은, 가는 님은,/ 애초에 만나지나 않았던들―//

 




주요한(朱耀翰, 1900년~1979년) 시인·언론인·정치인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아(頌兒). 필명은 벌꽃·낙양(落陽) 등. 소설가 주요섭(朱耀燮)의 친형. 평양숭덕소학교,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 졸업. 동경의 제1고등학교 졸업. 상해(上海) 후장[嫉江]대학 졸업. 대학 재학시 상해의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1919년 《창조》 1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된다. 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했고, 그 밖에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과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과 『봉사꽃』(1930) 등이 있다. 한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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